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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정신 71호] 엥겔스를 기억하라!
글쓴이 보스코프스키 E-mail send mail 번호 3103
날짜 2013-11-24 조회수 4416 추천수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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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를 기억하라!





철도 노동자



세계 공황(IMF)으로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던 시기인 1998년은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동 집필한 ‘공산당 선언’의 탄생 150주년이었다. 그것을 ‘기념’하여 전 세계적으로, 전 계급, 계층은 나름의 평을 내놓거나, 학술회, 토론회를 여는 등 소란을 떨었다. 여기에서 혹은 그 이전부터 주연으로 등장한 이는 맑스였고, 항상 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999년 영국의 BBC 온라인 방송은 여론조사를 통해 지난 1000년간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맑스를 1위에 선정하기도 하였다. 맑스에 관한 다수의 전기, 평전이 쓰였고,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일부 부자들과 그들의 이론가까지도 칭송을 하며 심심치 않게 인용되기도 한다.(한국육군장성 출신인 어떤 이는 와인을 이야기하는 중 맑스가 와인전문가였음을 기록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모두가 맑스만을 이야기할 때 저자 트리스트럼 헌트(영국의 소장파 역사학자이자 2010년 5월 노동당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는 말한다. “오늘날 마르크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고 있다면 이제 마르크스에 대한 기억과는 별개로 엥겔스의 겸손한 가면을 벗겨내고 그의 파격적인 사상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때다 ··· 우리는 이 평전에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었고, 지금도 우리의 역사를 형성하는데 모종의 역할을 하고 있는 한 인간의 열정과 욕망, 개인적 증오와 변덕, 그리고 그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과 역사적 요인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그래서 원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혁명적 삶(부제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은 탄생하였다.



엥겔스는 1820년 11월말 독일 라인란트주 바르멘의 사업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아버지의 이름과 같다)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엄격한 개신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버지 엥겔스의 간절한 “기도는 결국 응답을 받지” 못했다. 이단아 엥겔스는 엥겔스가의 ‘미운 오리새끼’가 되었다. 고교시절 유머감각을 가진 뛰어난 행동파이자 문학적 감성을 지닌 엥겔스는 독일 민족주의-주로 민중들의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의 부활에 따라 젊음이 넘치는 “문화적 애국주의”의 사상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는 “이상한 문학나부랭이들과 어울리고, 독실한 신앙생활에서 멀어질 우려” 때문에 학교장의 권유를 물리치고 가업을 잇게 한다는 이유로 학교를 자퇴시켰다.



결국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 공직에 진출하거나 시인이 되고자 했던” 엥겔스는 1837년 방적, 방직, 표백, 염색 등의 따분한 세계에 강제 입문하게 된다. 그렇지만 자본의 세계에 입문한 것은 한편에서 자본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자유주의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승마를 하고, 여행을 다니고, 헤엄과 결투를 자랑스러워하고, 펜싱을 즐긴 엥겔스는 사교계의 스타로 탄생하였다. 어린 나이를 감추기 위해 콧수염 클럽을 조직하여 속물들에게 저항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공화주의자들이 복장, 음악, 얼굴의 털까지도 자신들의 표시로 활용했기에 바이에른주의 경우 콧수염을 기르는 것조차도 보안상의 이유로 불법화하였다.



엥겔스의 배움은 학교에서가 아니라 밤의 사교계에서, 문학에서 지속되었다. 혁명적인 음악과 민중적인 시들을 사랑한 엥겔스는 이미 20세가 안되었을 때 “난 청년독일파가 돼야겠다. 아니 벌써 돼 있다. 온몸과 영혼까지”라며 고백하기에 이른다. 당시 프로이센을 검열을 피해 문예라는 형식을 빌려 풍자와 비판을 담았던 「독일텔레그라프」에 ‘프리드리히 오스발트’라는 필명을 가지고 부퍼탈 통신의 일원이 되어 활동을 한다. 그러나 바르멘은 애당초 엥겔스의 무대가 될 수 없었다.



‘시대의 아들’을 열망한 엥겔스는 1841년 입대영장을 받고 포병장교로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으로 향한다. 당시 독일은 헤겔 철학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헤겔철학의 보수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절대이성의 구현으로서 프로이센을 정당화하는데 복무했다면, 다른 편에서 변증법의 진보적인 측면을 부각하여 청년헤겔학파의 활동이 왕성하던 시기였다. 포이에르바흐의 기독교 비판(기독교의 본질)은 이 중에 독보적인 것으로 엥겔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군복무를 핑계로 집안을 벗어난 엥겔스는 이에 심취하며, 강의를 청강하곤 했으며, 바우어, 슈티르너, 모제스 헤스 등 청년헤겔학파는 물론 공상적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가지는 등 폭넓은 교류를 통해 한 걸음씩 공산주의에 다가서고 있었다.



이후 엥겔스는 다시 에르멘 앤드 엥겔스사의 고용인으로 영국 맨체스터로 향했다. 1842년 맨체스터의 노동자들은 ‘플러그 폭동’이라 불리는 총파업을 통해 “다가오는 파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폭동’은 참혹히 진압되었고, 노동자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맨체스터는 우울한 도시였다. 공장이 내뿜는 매연과 배출 폐수, 더럽고 좁은 진흙투성이 길, 나아지지 않는 처참한 노동자의 삶을 체험하며 24세의 엥겔스는 역작 「영국에서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저술한다. 이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에 대한 가공할 만한 고발이었고 깊은 감명을 자아내게 하였다. 엥겔스의 책은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상태에 대해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뛰어난 본보기로서 어디에서나 인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실상, 1845년 이전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노동계급의 비참함에 관해 그토록 생생하고 진실 되게 묘사한 것은 없다”(레닌, 「프리드리히 엥겔스」).



노동자 구역과 삶을 자세히 정리하기 위해 대동한 아일랜드 여성노동자 리지 번즈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44년 견습 사원을 마친 엥겔스는 고향 바르멘으로 돌아가는 중 파리에 들러 맑스와 역사적인 교우를 하게 된다.(맑스가 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 있던 시절 사무실에서 잠깐의 만남은 있었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의기투합된 두 동지는 공동저작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브르노바우어의 그 일파에 반대하여(신성가족)」를 기술한 후, 「독일 이데올로기」 등을 집필하며, 의인동맹활동을 통해 청년헤겔학파의 관념론을 탈피하여 완전한 유물론자로 거듭나게 된다. 의인동맹은 이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개칭하며 이름에 걸맞은 「공산주의의 원리」를 저술한 엥겔스는 이를 맑스와 다듬어 「공산당 선언」을 내놓게 된다. 「공산당선언」의 성공을 목도할 틈도 없이 전체 유럽의 혁명의 파도에 휩쓸렸다.



이론가이자 실천가답게 이들은 혁명이란 바다에 몸을 던졌다. 베를린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혁명군의 장교로 라슈타트 전투를 지휘한 엥겔스는 혁명군 14,000명의 4배나 되는 프로이센 반혁명군과의 전투에서 탁월한 전투솜씨를 보였지만, 내리막길을 넘어설 수 없었다. 하늘을 향해 남은 총탄을 쏘아버리고, 스위스를 통해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갈 곳이라곤 반혁명의 대륙이 아닌 런던이었고, 이미 런던은 혁명가들의 도피처가 되어 있었다.



맨체스터에 도착한 엥겔스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있어 지옥과도 같은 자본가 일을 다시 시작하게 만들었고, 이후 40여 년간을 정착한 곳이 런던의 소호 일대였다. 맑스의 경제학연구를 위해 엥겔스의 재정적인 지원은 시작되었고, 지긋지긋한 일상 속에서 엥겔스는 사기를 잃지 않고, 말을 타고 여우사냥을 하는 등 여가를 향유하며 사교계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럼에도 맑스의 연구에 관여하며 서신을 통해 꾸준히 함께하고 있었다. “엥겔스가 「자본론」에 한 기여는 통계 제공 정도를 넘어 마르크의 경제철학을 먼저 듣고 방향을 잡아주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러한 연유는 당시 자본의 최전선에서 경영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경제적인 연구외의 이론작업과 조직적인 활동의 몫은 엥겔스의 차지였다.



“사적유물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군사적 지식을 발휘한 1850년의 「독일 농민전쟁」, 유물론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의 성과인 「반뒤링론」, 당시의 획기적인 과학발전을 적극적으로 흡수한 「자연변증법」,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등은 엥겔스가 단순히 맑스의 조력자로 머무른 것이 아니라, 제1바이올린 역할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새로 단장한 런던의 프림로즈 힐의 아지트로 이주한 것은 1870년의 일이다. 이미 69년에 예르멘가의 동업자 관계를 청산한 엥겔스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맑스의 집에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물론 혁명가들조차도 연인임을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엥겔스에게 “왜 함께하냐?”는 충고도 서슴지 않은 리지 번즈와 함께였다. 여기는 당시 유럽의 망명혁명가들의 모이는 ‘요새’이자 그들이 “런던의 어르신”으로 부른 맑스와 엥겔스의 터전이 되었다. 이곳에서 파리코뮌을 목도해야 했고, 64년부터 설립된 국제노동자연합(인터내셔날)의 해체(72년)를 맞은 곳이기도 했다. 아울러 독일사회민주노동자당의 성공에 흥분한 곳도 이곳이었다. 리지 번즈가 죽고, 그의 동생이 엥겔스의 곁을 지켰으며, 카우츠키의 전 부인(루이제 카우츠키)이 새로이 집을 구할 때까지 지켜진 혁명가들의 성지가 바로 이곳이다.

엥겔스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진실게임’에 나온 하나의 단면은 이렇다.



“가장 좋아하는 미덕은? 쾌활함. 남자라면? 일에 집중하기. 행복은? 샤토마고(프랑스산 최고급 포도주)1848년산. 불행은? 치과에 갈 때. 심심할 때 좋아하는 것은? 남한테 농담하고 남이 내게 농담하는 것. 좌우명은? 무소유. 모토는? 쉬엄쉬엄하자.”



엥겔스는 리지 번즈와의 인연을 죽음 이후에도 이어갔고, 맑스의 가족들과 함께 했다. 오히려 물질적으로 맑스의 경제학 연구와 작업을 위해 현재액으로 계산하여 연봉 4000만 이상을 내놓았으며 (리지 번즈가 죽어서 엥겔스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조차 맑스는 돈타령을 할 정도였다.),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가장역할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수행했다. 심지어 유언을 통해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맑스의 딸과 사위, 리지 번즈의 가족, 카우츠키의 전처이자 비서(?)인 루이제 프라이베르거 등에게 모두 나누어 줄 정도였다.



엥겔스의 죽음은 그야말로 허허로웠다. 1895년 8월초 죽음을 앞두면서 방문한 베벨에게 심한 농담을 써보였고, 마르크스의 명예를 위해 지켜왔던 비밀인, 프레디 데무트의 진짜 아버지를 밝혀 마르크스의 딸 예니를 경악케 했지만 정작 그의 마지막을 지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루이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1895년 밤10시 경 그는 홀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를 떼어놓고 사회주의를 논할 수 없다. 「자본론」 2-3권이, 심지어 1권조차도 햇빛을 본 덕은 엥겔스 때문이었고, 맑스의 알아볼 수 없는 글씨체를 알아 볼 수 있는 유일한 이가 엥겔스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정리를 넘어, 내용에서도 공동 집필에 가깝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영광된 자리에서 한 걸음 뒤로 빠진 엥겔스는 “마르크스는 천재였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기껏 재능이 있는 정도였다. 그가 없었다면 이론은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이론에 마르크스의 이름이 붙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엥겔스의 혁명적인 삶을 따라가다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맑스와 엥겔스를 나누어 해석하려하거나, 붕괴한 사회주의를 폄하하며 맑스가 아닌 엥겔스의 탓으로 돌리려는 시도는 엥겔스가 아닌 맑스를, 맑스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오도하려는 소인배들의 행위일 뿐이다.(이러한 시도는 평전을 통해 비판되고 있으며, 평전을 읽다보면 자연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정당하게, 차분히 평전을 읽은 이라면, 「영국에서 노동자계급의 상태」와 그 후의 불멸의 저작들을 읽고 싶거나, 읽어야 할 과제를 안게 될 것이다.

레닌은 엥겔스의 사후인 1895년 가을, 「프리드리히 엥겔스」라는 추도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95년 8월 5일 런던에서 숨졌다. 그의 벗 맑스 이후, 엥겔스는 전 문명세계에서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위대한 학자이자 교사였다. 맑스와 엥겔스가 숙명처럼 만나게 된 때부터 두 벗은 공동의 대의에 혼신의 정열을 다 쏟았다. …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전사이자 스승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영전에 항상 경의를 표한다.”<노/정/협>



http://lmagit.jinbo.net/bbs/zboard.php?id=newspaper&page=15&sn1=&divpage=1&sn=off&ss=on&sc=on&sl1=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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