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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정신 74호] 사회적 기업, 사상적 혼란과 대중투쟁에 대한 패배주의의 산물 -원주지역 활동가
글쓴이 보스코프스키 E-mail send mail 번호 3102
날짜 2013-11-24 조회수 1830 추천수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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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 사상적 혼란과 대중투쟁에 대한 패배주의의 산물







-원주지역 활동가







지난 노정신 73호에는 “착한 기업! 사회적 기업과 투쟁하는 원주시 재활용선별장 노동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원주지역 사회적 기업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소식을 전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사회적 기업이 지방자치단체 민간위탁 사업에 진출하였고, ‘노동자 협동조합’을 앞세워 노동조합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필연적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실제로 기고 이후 단체교섭 문제, 직접노무비 적용의 문제, 식대의 문제, 현장통제와 노동 강도 강화 및 휴게시간 축소 문제, 조합원에 대한 부당 인사 조치 문제 등 쟁점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그때마다 사회적 기업 ‘다자원’은 여타의 자본가들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아니 오히려 더 파렴치하게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현재 사회적 기업 ‘다자원’의 법적인 대표는 민주노총 교수노조 조합원이고 운영소장은 민주노총 건설노조 간부출신이자 현재도 조합원이다. 실무영역에서 많은 역할을 맡고 있는 실무진들은 현재 사회당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노동자들과 가장 잘 융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결국 노동자들에게 끝없이 권리를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번 기사에서는 이들의 사상적 혼란과 그 필연적 결과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겠다.



기만적인 사회적 일자리 창출 사업! 이에 철저히 놀아나고 있는 사회적 기업



사회적 기업은 정부가 주도하는 ‘일자리 창출 사업’의 일환이다. ‘일자리 창출 사업’은 1997년 경제공황시기에 김대중 정부가 ‘실업문제해결을 위한 종합대책’으로 ‘공공 근로활성화 정책’을 내놓은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이 이후 약간의 수정을 반복하면서 현재 사회적 기업까지 이어지게 된다.



2000년에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과 함께 ‘자활사업’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자활사업은 공공 부문 일자리 창출과 저소득층의 근로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활공동체를 통한 ‘창업형 자립’에 주요 초점을 두고 운영되면서 소위 ‘취약계층이 직접 기업을 운영’하면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기본 모델을 구축하게 된다.



이후 2003년 노동부 주체로 ‘사회적 일자리 창출 시범 사업’이 실시되면서 본격적으로 ‘기업을 만들어서’ 실업극복과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업이 체계화 되었고 이것이 현재 사회적 기업의 출발점이다.



각 정부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일자리 창출 사업’은 한마디로 철저히 기만적이다. 김대중 정부를 비롯하여 노무현 정부 및 이명박 정부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하고 반실업상태로 몰아가는 데에는 한 치도 다를 것이 없었다. 김대중 정부 때 파견법이 제정되고, 정리해고가 완화되면서 비정규직이 전사회적으로 급격히 확산되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 정부에 이르면서 비정규 악법이 제정되고 이에 저항하는 민주노조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법제도가 더욱 공고해지면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해고, 비정규직화, 실업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97년 경제공항 이후부터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정리해고 반대 투쟁, 수 없이 깨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있는 비정규직 철폐 투쟁이 바로 지금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최근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투쟁 이후 15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자살과 스트레스 등으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비참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현장에서 밀어냈던 원흉들이 다른 한편에서 ‘실업대책’이라고 하면서 ‘일자리를 창출 사업’을 내 놓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만적인가? 더욱 기가 막힐 노릇은 그 일자리 창출 사업의 기본 방향이 “너희들 스스로가 기업을 운영하면서 일자리를 창출하라! 그리고 알아서 생존하라”는 것이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생산적 복지’를 말할 때 그 본질은 ‘복지축소’였음이 드러났고, 청년일자리 창출을 위해 도입한 ‘벤처열풍’은 말이 좋아 열풍이지 실상은 ‘거품’에 지나지 않았으며 ‘벤처거품’에 빨려 들어간 청년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다가 스스로 몰락해 갔다.



결국 이러저러한 차이를 보이며 자본가 정부들이 내놓은 ‘실업대책’이란 것이 사실은 ‘대책 없음’을 반복적으로 선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투쟁의 역사에서 배우고 있다. 그렇다! 자본가 권력은 노동자들의 실업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소위 노동운동 또는 시민사회운동을 한다는 세력들이 정부의 ‘대책 없음’에 한껏 놀아나면서 마치 새로운 대안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이들이 바로 사회적 기업 세력들이다.



사회적 기업의 주무부서는 현재 노동부이다. 노동부에서 사회적 기업에게 지원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 일부와 사용자들이 부담하는 4대 보험료 그리고 세금감면 정도이다. 노동자들에게 지원되는 임금은 최저임금 수준이다. 그것도 길어야 3년이며 하나의 사회적 기업에게 지급되는 지원액은 3년 사이 계속 감소한다. 그것마저도 노동부 예산변동과 노동부 장관의 결정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지원된다. 사회적 기업은 3년 안에 수익을 남겨 자립해야 하며 그 생존의 모든 책임은 사회적 기업 운영자들에게 떠 넘겨진다. 게다가 사회적 기업은 수익을 남기면 다시 지역사회에 환원해야 하는 책임까지 떠맡게 된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허울 좋은 간판 때문에 사회적으로 뭔가 착해 보이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까지 떠맡았으니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삼중고가 아닐 수 없다.



그에 반해 정부는 어떠한가? 얼마 안 되는 예산으로 일자리도 창출(?)했음은 물론이고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잠재웠다. 게다가 사회적 기업들이 알아서 지역사회에 착한 일까지 맡아서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회적 기업이 망하면 딱히 아쉬울 것도 없다. 같은 돈으로 다른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면 그만이다. 사회적 기업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으니 말이다.



사회적 기업 세력들은 이처럼 기만적인 정부 실업대책의 본질은 망각한 채 정부지원에 목을 매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초라한 현실을 감추기 위해서 사회적 기업이 무슨 기발한 대안이라도 되는 양 과잉광고를 해대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기업은 전혀 새롭지 않다. 이미 자본주의가 태동할 당시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러저러한 공상적 실험들이 모색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상적 실험가들은 끊임없이 탄생과 몰락을 반복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의 현재 모습은 바로 사회적 기업 세력들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본가들을 흉내 내며 대안적인 기업의 모델을 찾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정부의 대책 없는 실업대책을 당당히 거부하고 자본가들이 더 이상 노동자들을 현장 밖으로 내몰지 못하도록 위력적인 대중투쟁을 조직해 내는 것과 이를 이끌어 나갈 강력한 계급조직을 건설해 내는 것이다.



‘국가기구 활용’이라는 망령



사회적 기업 세력들은 “국가기구를 활용하여 새로운 대안세계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힌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론에 있어 심각한 사상적 혼란에 빠져 있다.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는 철저하게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만든 도구이다. 국가는 중립적이지도 않으며 선(善)하지도 않다. 철저히 지배계급의 이해에 복무한다. 현재의 지배계급은 누구인가? 바로 독점 자본가들이다. 한국의 정부와 권력기관은 소소한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독점 자본가들의 이해를 위해 복무해 왔다. 철저히 독점 자본가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에서 소생산자 수준보다도 열악한 생산력을 갖춘 사회적 기업 세력들이 국기기구를 활용하여 새로운 대안을 찾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그 용기가 가상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사회적 기업 세력들이 국가기구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권력이 사회적 기업 세력들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 현재 사회적 기업은 정부로부터 얼마 되지 않지만 지원금을 받고 있다. 혹자는 정부지원금이 ‘눈 먼 돈’이라고 하지만 사실 정부의 지원금은 ‘독이 든 사과’와 같다. 사회적 기업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이상 그 지원금의 정확한 사용처를 철저히 보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활동은 철저하게 정부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노동부, 해당 지자체, 광역 지자체에 수시로 실적을 보고하고 그에 따른 온갖 잡무를 떠맡아야 한다. 노동부, 해당 지자체, 광역 지자체는 그 실적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치적으로 쌓으려고 한다. 이처럼 사회적 기업은 자본가들의 권력기관인 노동부, 해당 지자체, 광역 지자체의 실적을 쌓아주기 위한 심부름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기구를 활용하는 것인가 아니면 활용당하고 있는 것인가?



사회적 기업은 소위 반사회적 기업(?)과 무슨 차이점이 있는가?



사회적 기업! 이름 자체가 모순이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사회적이지 않은 기업이 있는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다. 그런데 사회적 기업들은 ‘사회적’이라는 말을 자신들의 특허품인 것처럼 갖다 붙이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기업을 설명할 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기업’이라는 아무 의미 없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적으로 의미 없는 일’을 하는 기업은 단 한군데도 없다. 오히려 현실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기업은 바로 독점 자본이다. 현대자동차가 만든 자동차와 현대건설이 닦은 도로는 사람과 물류의 이동을 쉽게 해주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삼성전자에서 컴퓨터를 만드는 일은 전 세계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사회적으로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생산 활동’을 자본가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노동자들이 해 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기업은 마치 ‘기업활동’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주요한 부분’인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것이 철저한 자본가들의 논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더 심각한 것은 사회적 기업이 자본주의 모순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착한 기업인 사회적 기업은 마치 자신들 이외의 기업이 사회적이지 못해서 즉 반사회적이고 못된 기업이라서 자본주의가 문제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삼성의 이건희가 태어날 때부터 악마라서 자본주의는 문제인 것인가? 그렇다면 삼성자본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자본주의의 모순은 극복될 수 있는가? 사회적 기업은 자본주의의 모순 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에서 오는 모순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현재 자본가들이 각성하여 앞으로 착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용어의 혼란은 여기까지만 이야기 하겠다. 문제는 사회적 기업이 자신을 어떻게 포장하느냐와 무관하게 그들 또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업이라는 것이다. 기업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다른 경쟁업체를 뛰어 넘는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비슷한 수준은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경쟁업체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현재 사회적 기업 다자원에서 실제 현장운영을 맡고 있는 운영진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작년에 어렵게 흑자를 냈다. 그 흑자로 노동자들 임금을 올려야 했는데 동시에 불가피하게 기계를 새로 들여놔야 했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임금동결에 동의해줘서 다행히 기계를 살 수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이 사회적 기업이 여타의 기업들과 한 치도 다를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설명해 주는 말이다. 모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여 이윤을 가져간다. 자본가들은 결코 그 이윤을 자신이 먹고 쓰는데 전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많은 부분을 다시 생산에 재투입시킨다. 즉 자본을 축적한다. 이유는 한 가지이다.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경쟁사들 수준으로 자본을 축적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내 기업들의 냉혹한 현실이다. 따라서 사회적 기업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이 노동자들의 동의 속에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느냐는 본질이 아니다. 동의에 의해서이든 폭력에 의해서든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기업은 마치 자신들이 하는 것은 착취가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회적 기업도 이미 노동자 착취의 기반위에 서 있는 것이며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동착취가 담보되어야 한다. 이는 사회적 기업이든 반사회적(?) 기업이든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운동에 침투하고 있는 자본의 논리



사회적 기업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업운영을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속에서 사회적 기업 세력들의 혼란은 계속된다. 사회적 기업 다자원은 환경단체인 원주환경운동연합이 만든 사회적 기업이다. 이들은 기업운영을 자신들의 운동인 것처럼 착각하고 자신들의 운동의 정당성을 기업운영의 성패로 증명하려 하고 있다.



가령 이들이 기업운영을 잘 해서 수익을 남긴다면 이들의 운동은 정당성이 입증되는 것인가? 반대로 이들이 기업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수익을 남기지 못한다면 이들의 운동은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들이 추구하는 환경운동은 환경문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기반으로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견해를 끊임없이 선전, 선동해 내면서 올바른 전략과 전술로 부조리에 맞서 투쟁하고 현실을 바꿔냈을 때 정당성이 입증되는 것이다. 반면에 기업운영의 성패는 전혀 다른 요인에 의해서 결정된다.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기업운영의 주체들의 상태 및 전사회적인 경제적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민간위탁 사업은 원청인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이처럼 환경운동과 민간위탁 사업은 전혀 다른 범주에서 성패가 결정된다. 그런데 사회적 기업 세력들은 자신의 운동을 기업운영과 뒤섞으면서 기업의 성패로 자신의 운동을 입증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저들의 운동 속에 자본의 논리 즉 이윤의 논리가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자신들의 실천계획을 마련함에 있어 자연스럽게 이윤논리를 중요한 판단근거로 삼을 수밖에 없다. 현재 사회적 기업 다자원의 운영진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바로 그 ‘운영하는 입장’이라는 것이 자본가들의 입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들은 철저하게 자본의 이윤논리에 잠식되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다는 착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허울뿐인 민주주의! 우리는 당신들이 해줄 수 있는 열 가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한 가지가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 기업 다자원은 현재 노동자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기존 업체에 비하면 참으로 인격적으로 좋은 호칭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철저히 기만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기업 다자원은 호칭만 ‘선생님’이라고 말할 뿐 노동자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인 지방자치단체에서 책정한 노동자 임금 기준의 문제, 급식문제, 근무지 이동에 대한 인사조치의 문제, 휴게시간 및 노동강도의 문제, 단체교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결정, 집행하고 있다.



현장의 한 조합원이 사회적 기업 다자원에게 이렇게 항의한 적이 있다.



“우리가 작년에 파업을 한 것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었다. 회사가 우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파업을 한 것이다. 지금 사회적 기업이라고 하는 다자원도 똑같이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그 운영자는 이 조합원의 말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신이 어떻게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쓴다고 해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일 때 상대방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면서 호칭만 ‘선생님’이라고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 노동자들은 당신들이 해줄 수 있는 10가지를 하면서 생색내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다. 단 한 가지라도 진정으로 우리 노동자들이 절실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사회적 기업, 사상적 혼란과 대중투쟁에 대한 패배주의의 산물



현재 원주지역 사회적 기업에는 사회당 활동가들이 실제 운영에 많은 개입을 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과거의 동지였던 이들과 노동자-사용자로 마주하면서 참담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사상적 혼란 속에서 허우적대는 개량주의 정치세력들이 반노동자적인 입장에서 철저히 자본주의를 옹호하며 자신들의 변명만을 늘어놓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한 가지 웃지 못 할 사례가 있다. 사회적 기업 다자원과의 단체교섭에서 노조에서 제출한 단체협약안 중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보장’이라는 조항이 있다. 이는 노동자들이 현장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로이 밝히고 선전, 선동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사용자는 이를 방해하지 못한다는 조항이다. 노동자들의 현장 내 정치실천은 매우 중요하다. 조합주의의 한계를 넘어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활동가들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이다. 이는 사회당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보장 요구’에 대한 당시 회사 측 교섭위원으로 나온 사회당 당원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 기업은 정치, 정당 활동에 개입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이 안을 수용할 수 없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이것이 진보정당이라고 하는 사회당 당원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인가? 사회적 기업이 정치, 정당 활동에 개입할 수 없고 그에 따라 사회적 기업 노동자들의 정치적 자유가 조금이라도 침해된다면 이러한 악법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오히려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사회적 기업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가?



또한 이들은 대중투쟁에 대한 심각한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 이들에게 노동자 대중투쟁은 구시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노동자 투쟁이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대로는 더 이상 전망이 없으며 ‘노동운동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창조적인 실험모색을 찾아내기 위해 사방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이들은 대중투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저들이 말하는 위기는 노동운동의 위기가 아니라 개량주의 정치세력 자신들의 위기이다. 이들은 현재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 개입력이 날로 약화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전망을 상실하고 대중투쟁에서 대하여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개량주의 정치세력의 현주소이다. 사회적 기업은 이처럼 전망을 상실한 개량주의 정치세력들이 자신의 본질을 감출 수 있는 좋은 가림막이자 정치적 도피처가 되고 있다. 결국 사회적 기업의 확대는 노동자 계급에게는 절망이 될 수밖에 없고 사회적 기업에 대한 노동자들의 태도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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