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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정신 78호] 맑스주의 ‘대가’의 해석에서의 맑스주의 왜곡과 실천에서의 케인즈주의
글쓴이 보스코프스키 E-mail send mail 번호 3101
날짜 2013-11-24 조회수 2551 추천수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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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대가’의 해석에서의

맑스주의 왜곡과 실천에서의 케인즈주의







혁명적 의식과 혁명을 가로막는 것



세계 공황이 더욱 더 파국적인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르주아 체제는 이미 경제적으로는 파국을 맞이하고 있다. 이 경제적 파국은 전면적인 정치적 파국으로 나아가지는 않고 있으나 이 역시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전 세계 공황은 이미 그리스를 정점으로 해서 남유럽 전체에서 노동자 총파업과 인민항쟁을 낳고 있으며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중심부에서도 노동자 투쟁이 촉발하도록 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노동자 투쟁에 이어 가장 취약한 상태에 있는 젊은이들의 ‘폭동’을 낳았다. 영국 자본주의 체제에 절망하고 분노한 젊은이들의 반란은 지배계급의 물리력으로 인해 진압 당했지만 언제든 더 격화되는 투쟁을 촉발시킬 것이다. 실업, 빈곤같이 반란을 낳은 근본적인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고 점점 더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젊은이들의 새로운 반란은 조직된 노동자 투쟁과 더불어 다시 격화될 것이다.



전 세계 공황은 반공주의의 최후의 보루이자 노동운동의 불모지인 제국주의 중심 국가에서도 위스콘신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수십만이 참여하는 노동자 투쟁을 일으켰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민주주의 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황으로 인한 생존권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 인민의 전국적인 항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도 수십만이 참여하는 투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국 경제의 예외성’이라는 부르주아의 맹목적인 신념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개별 자본의 파산을 넘어 한국 자본주의 자체의 파산을 재촉하는 징후가 속출하고 있다. 다만 예외성이 있다면 전 세계적으로는 전국적인 총파업과 수백만이 참여하는 거대한 시위가 터져 나오고 있지만 한국의 노동자 투쟁은 고립과 분산, 침체 속에서 아직 전면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 공황의 한 가운데서 한국 경제 역시 예외일 수 없듯이 한국 자본주의의 공황이 격화되면서 노동자 인민의 투쟁도 격화될 것이다.



과잉생산 공황과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오는 국가의 재정파탄은 국지적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맑스는 “공황 없이 혁명은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공황이 저절로 혁명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공황은 자본주의 위기의 적나라한 표현이지만 자본주의는 노동자 인민에게 자신의 모순을 전가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황은 그 자체로 혁명을 낳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잠재적 가능성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의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바꾸는 임무가 노동자계급에게 주어져 있다.



혁명은 자본이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을 때, 노동자 인민이 자본의 계급지배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때 발생한다. 자본이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 때문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는 제국주의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제국주의는 타민족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의미한다. 그 지배와 억압은 특히 타민족의 프롤레타리아와 인민에게 집중된다. 그런데 타국에 대한 초과착취로 자국 노동자 인민들에게 개량의 여지를 가져다 줄 수 있을 때 제국주의 내부의 모순은 약화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제국주의 체제는 타국 노동자계급과 인민을 초과착취하고 수탈하면서도 자국 인민들에게 개량의 여지를 가져다 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황에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 지배의 위기는 제국주의 내부의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 인민의 투쟁을 격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본주의가 더 이상 기존의 방식대로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지고 있지만 노동자 인민이 자본의 계급지배를 전면 거부하면서 투쟁하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 인민의 투쟁이 분출되고 있지만 그 투쟁은 부르주아 계급 지배 체제 자체에 반대하는 투쟁이 아니라 특정한 정권, 특정한 통치방식에 저항하는 투쟁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 속에서 혁명은 아직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가 전 인민적으로 쌓여가고 있지만 그것은 또 다시 부르주아 지배 체제 내부의 새로운 정권, 새로운 인물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 투쟁에 앞장서 왔던 김대중이 권력을 잡자 정권은 비정규직 확대와 정리해고제를 통해 민주주의의 성격이 바로 자본가들만을 위한 민주주의임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대중들의 실망과 배신감은 또 다시 ‘바보 노무현’에게 집중됐다. 반노동자적이고 반인민적인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또 다시 ‘샐러리맨 신화’인 이명박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경제대통령’ 이명박은 자본주의 경제법칙인 공황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명박 정권은 공황의 위기를 파쇼적으로 노동자 인민에게 전가하고 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인민들의 분노는 이제는 이른바 ‘안철수 현상’에 꽂히고 있다. 지배계급은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에 대한 대중적인 환상을 심어놓음으로써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재생산 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한다. 인민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변혁이 아니라 부르주아 체제 내로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이 독점자본주의 언론과 거기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그들의 임무인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안철수 현상’에 대해 진보적(?)인 지식인이 어떻게 노골적으로 야합하고 봉사하는지 이를 통해 대중들에게 어떻게 환상을 불어넣는지 보자!



“적어도 2011년 한국에서 안철수는 니체가 얘기한 '초인'이든, 이육사가 시 '광야'에서 노래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든, 우리가 열광할 수 있는 그런 초인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다 … 안철수가 우리에게 준 것은, 그 금제를 풀어서, 다시 상상을 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아, 내가 뭘 원했지? 우리가 바라던 사회가 어떤 거였지? 그게 열풍이 되고, 돌풍이 된 건데, 상상의 힘이 현실권력이 되는 그런 달콤하고도 황홀한 현실을 우리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 나는 좌파이지만, 내가 옳다고 믿는 정책들 대신에 일방주의를 해체하고, 경찰국가 그만하자는 꿈을 안철수에게 얹고 싶다. 딱 하나의 소망만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던지라면, 나는 MB식 일방주의, 그거 그만 하는 나라를 만들기라고 말하고 싶다 … ‘상상력이 권력이다’는 68의 오래된 구호, 그걸 이렇게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상상을 금제할 때만이 생기는 힘과, 상상만이 힘인 두 흐름, 그게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 아닌가?”([우석훈 칼럼] '대통령 안철수'를 상상해 보았는가?, 프레시안, 2011-09-14)



이 진보적 지식인은 안철수 환상에 흠뻑 빠져 있고 그것을 자신만 간직하고 있으면 차라리 나을 텐데 마치 주술사처럼 그것을 대중적으로 유포시키고 있다. 이쯤 되면 내세를 빙자해서 현실 세계의 모순과 비판적 인식을 마비시키는 종교처럼 인민의 아편이다. 그것도 대중들이 진보적이라고 믿는 지식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중독성 높은 아편이다. 전 세계적인 공황과 혁명의 가능성의 시대에 우리는 ‘상상력에게 권력을’이 아니라 현실적인 노동자 인민의 권력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자본주의 환상을 불어넣는 케인즈주의



새로운 인물과 정권 교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정책 변화 역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환상을 심어놓는다. 자본과 국가는 기존의 방식대로 통치할 수 없을 때 케인즈주의, 신자유주의라는 두 가지 정책을 번갈아 사용하거나 또는 그것을 뒤섞어 사용하며 자본의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차이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이가 아니라 독점자본주의의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의 차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부르주아 진영은 물론이고 운동 진영에서도 ‘신자유주의 체제 반대’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은폐하고 국가의 전면 개입으로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노동자 인민들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맞서 싸우는 투쟁전선을 교란시킨다. 한국사회에서 자본론의 번역자이자 공황론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김수행 교수가 대표적으로 그렇다.



정부가 실업자를 구제하려고 재정지출 확대 정책을 취하려 하면 금융자본이 반대하고, 금융자본이 선호하는 긴축 내핍정책을 실시하면 실업은 더욱 증가하고 대중의 투쟁은 격화한다. 선진국 정부와 자본가 계급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특별기고] 세계대공황 속의 한국 경제,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한겨레, 2011년 9월 18일)



김수행 교수는 이 글에서 세계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자본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노동자 인민들에게 내핍경제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폭로하고 있다. 김수행 교수는 이 때문에 남유럽과 유럽 전역, 중동지역 등 전 세계 자본주의 도처에서 노동자 인민의 저항이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김수행 교수는 막다른 길목에 처한 자본주의 체제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한다.



국제적 재앙과 가계 파산 및 대중의 폭동을 피하면서 세계대공황으로부터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업자에게 적절한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 9월8일 오바마 대통령이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발표한 ‘일자리 법안’은 루스벨트의 뉴딜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루스벨트는 공공사업, 실업급여, 사회보장을 통해 정부 주도로 실업을 해소하려 했으며, 소득세율을 크게 인상하고 특히 최고세율을 25%에서 80%로 인상했다. 반면 오바마는 부시의 부자감세(최고세율을 39.6%에서 35%로 인하)를 그대로 둔 채 일자리 확대를 위한 자금은 사회프로그램(노인과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의료보험, 퇴직 후 생활보장 등)의 삭감을 통해 조달하며, 민간기업에 혜택을 주어 실업자를 고용하도록 하겠다고 한다.(같은 기사)



김수행 교수는 자본주의 공황을 해결할 수 있는 분명한 방책이 있는데 현재의 국가가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공황을 극복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독재의 타도’와 ‘민주주의의 확립’을 통한 기업의 민주주의적 운영을 주장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무엇이 문제인가? 정치적 독재를 타도하여 모든 국민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대규모의 실업을 없애는 것도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길이다. 기업의 운영 목표를 이윤 추구가 아니라 국민의 필요 충족에 둔다면 실업자는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 … 예컨대 거대한 금융기업과 산업기업을 국민이 소유하는 공익사업으로 전환시켜 민주주의적으로 통제하면, 금융기업과 산업기업은 이윤 획득이 아니라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자금이 필요한 국민에게 싼 이자로 자금을 대부하고 국민경제의 조화로운 발전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같은 기사)



이 글만을 가지고 그를 전면적인 케인즈주의자라고 하기에는 성급한 측면이 있다 할 수 있다. 김수행 교수는 한 때 “오늘의 불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케인즈의 사회사상보다는 마르크스의 그것이 더욱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김수행, 자본론 연구, 한길사, 1988, p.306)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수행 교수가 여전히 맑스주의를 내세워서 자본주의를 해석하려고 하지만 몇 가지 오류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김수행 교수는 기존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의 부분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기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는 과잉생산 공황과 공황구제, 경기부양을 위해 국가가 전면 개입해서 재정적자가 심각해지는 현재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전반적 위기로 나타나는 재정적자를 해명할 수 없다. 또한 김수행 교수는 공황을 과잉생산 공황에 입각해서 설명하려 하기 보다는 ‘자본주의의 장기적 발전과 위기를 규정하는’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 법칙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주기적 공황을 설명하려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 「노동사회과학」제1호, 2008년 11월 ‘김성구 교수의 맑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 법칙-재구성을 위하여’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공황을 둘러싸고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이나 과잉생산 공황론으로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맑스주의 진영 내에서의 논쟁이므로 이를 근거로 김수행 교수를 케인즈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김수행 교수는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을 가지고 공황론을 설명하면서 “생산의 무정부성을 공황의 ‘원인’이라고 강조한 역사는 엥겔스로부터 현대의 소련 경제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김수행, 자본론 연구, 한길사, 1988, p.141)라고 하면서 엥겔스의 과잉생산 공황론을 왜곡해서 비판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 김수행 교수는 “국가의 경제개입은 자본주의 경제에 계획적 요소를 점점 크게 도입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서 생산의 무정부성과 경제적 공황이 제거될 수 있다”는 힐퍼딩의 ‘조직된 자본주의’ 주장이 엥겔스 주장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왜곡하고 있다. 범인이 엥겔스의 주장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가 한국사회에서 자본론의 ‘대가’라는 김수행 교수이기 때문에 대단히 악의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엥겔스는 자본주의 무정부성과 공황이 국가의 개입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는 것과 완전히 정반대의 주장을 했다. 엥겔스는 자본주의는 개별 공장 내에서는 계획이 이뤄질 수 있지만 전체 사회에서는 무정부성, 무계획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산의 무정부성과 과잉생산 공황은 극복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엥겔스는 자본주의 생산은 점점 더 사회화되는데 그 생산의 결과물들은 소수의 자본가들한테 집중되는 기본모순으로부터 자본주의 위기가 해결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엥겔스는 생산이 사회화된 결과로 생산력은 고도로 발전하는데 비해 생산의 결과물로부터 대중들은 소외되면서 빈곤은 가중되기 때문에 과잉생산 공황은 더 심각해지고 노자간의 계급투쟁은 더 격화됨으로써 자본주의 위기가 첨예해진다고 주장했다. 맑스와 마찬가지로 엥겔스는 자본주의 과잉생산과 대중의 빈곤을 공황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공황의 원인을 소비부족으로 보고 소비를 진작해서 공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뒤링의 주장이 시스몽디, 로드베르투스 같은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로부터 비롯됐다면서 신랄한 어조로 비판했다.



유감스럽게도 대중의 과소 소비, 즉 대중의 소비가 유지와 번식에 필요한 것에만 제한되는 것은 오늘날에 비로소 시작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러한 과소 소비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존재하는 한 존재해 왔다 … 이처럼 과소 소비는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해 온 역사적 현상이지만 생산 과잉의 결과로 공황 때에 발생하는 전반적 매상 정체는 최근 오십년 사이에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현상이라면, 이 새로운 충돌을 과잉 생산이라는 새로운 현상으로부터 설명하지 않고 과소 소비라는 수천 년 동안 있어 온 낡은 현상으로부터 설명한다는 것은 뒤링 씨의 지극이 속류 경제학적인 천박함에나 속하는 것이다.(엥겔스, 오이겐 뒤링씨의 과학 변혁(반-뒤링), 김세균 감수, 박종철출판사, pp.313-314)



엥겔스는 대중의 빈곤 때문에 과잉생산 공황이 더 심각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비의 진작만으로 공황을 극복한다는 비과학적 주장들을 비웃었던 것이다. 결국 엥겔스는 자본주의는 생산의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을 없앨 수 없고 공황과 계급대립을 격화시키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생산 수단을 우선 국가 소유로 전화시키”(같은 책, p.308)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했던 것이다.



김수행 교수는 자본주의 공황에 대한 해석에서는 맑스주의를 왜곡하거나 오류와 한계를 보이면서도 여전히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그 실천적 대안에서는 케인즈주의 좌파로 경도되고 있다. 김수행 교수는 자본주의 공황의 해결책으로 엥겔스가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는 대중의 소비 진작을 제시하고 있다. 김수행 교수가 말하는 ‘정치적 독재의 타도’와 ‘민주주의의 확립’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김수행 교수는 국가와 기업의 민주화를 말하면서도 그 국가와 기업의 성격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독재의 타도’와 ‘거대한 금융기업과 산업기업을 통제’하는 ‘민주주의의 확립’이 기존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되는 국가와 기업을 말하는 것인지 얼버무리고 있다. 대신에 김수행 교수는 복지제도의 확대, 내수시장의 개척 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국가와 기업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지배와 소유의 확립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 ‘자본의 정치적 독재 타도’의 ‘민주주의 확립’, ‘거대한 금융기업과 산업기업 통제’, ‘복지제도 확대’ 등은 사실상 전형적으로 케인즈주의 좌파인 사민주의 정권에 의해 시도된 정책들이었다. 김수행 교수가 ‘공공사업’, ‘실업급여’, ‘사회보장’ 등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시대의 케인즈주의 정책들을 극찬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이나 케인주의 경제학자 같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내부에서도 미국이 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2차 세계 대전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미국은 직접적인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는 대신 유럽과 한국내전 등 오직 전쟁을 통해서만 군수물자와 과잉생산물을 대량으로 팔아먹으면서 공황을 극복하고 세계 제국주의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루즈벨트 시대의 케인즈주의 정책들은 미국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인 투쟁으로 미국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한 양보조처의 일환으로 취해지기도 한 것이었다. 맑스주의 ‘대가’인 김수행교수가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김수행 교수는 지승호가 인터뷰로 정리한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한다’는 책에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케인즈주의를 옹호하고 나서고 있다.



“내수 중심의 경제를 한번쯤 해보라는 겁니다.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을 하다 보면 세계경제가 어려워 수출이 잘 안 되면 금방 타격을 입잖아요. 내수시장을 키운다는 것은 사실은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과 같아요. 사회보장제도를 확장해서 서로 나눠 가지는 식으로 정책을 바꾸면 내수시장이 확 커진다구요.”

“해외에 의존하는 경제가 아니라 국내에 기반을 두는 단단한 경제를 만들어야 된다”

“내수 중심의 경제를 한 번쯤은 해보라”

“내수시장을 키우는 것은 사실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과 같다”

“전반적인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공권력이 법으로 제정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정치가 굉장히 중요한 거죠”



루스벨트 정책에 대한 찬사와 사회보장 확대와 내수 확대가 공황의 탈출구라는 김수행 교수의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있다.



“모든 나라가 실업을 줄이고 임금수준을 높여 국내시장을 확대하는 것이 당장 필요하며, 국내시장을 확대하는 특효약은 사회보장제도의 확립이다. 루스벨트의 뉴딜이 아직도 총명한 아이디어라고 존경받는 이유는 실업자와 서민을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올리기 위해 노동조합 활동을 권장했기 때문이다.([김수행칼럼] 대공황의 탈출구 ‘보편적 복지’, 경향신문, 2011-02-15)



수요 진작이 아닌 내핍 강요는 자본주의 법칙



부르주아 체제 내에서 과잉생산 공황을 돌파하기 위해 노동자 인민들의 임금을 상승시키고 복지를 강화하고 수요를 진작시킨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본은 오히려 공황을 맞아 다른 자본과의 경쟁전에서 승리하고 이윤을 확대시키기 위해 노동시간 연장, 노동강도 강화, 정리해고 확대, 노동 유연성 강화, 복지 삭감 등 노동자 인민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한다. 자본가 국가 역시 공적자금이라는 이름으로 파산한 독점자본을 살리고 경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 붓는다.



이 때문에 재정파탄에 직면한 자본가 국가는 인민들에게 내핍 경제를 강요한다. 자본가 국가는 독점 자본가를 위해 봉사하기 때문에 독점자본에게 내핍을 강요할 수는 없다. 오직 인민들에게만 내핍이 강요된다. 내핍 경제에 저항하는 노동자 인민들에 대해서 부르주아 국가는 반동적으로 억압과 폭력을 행사한다. 저축은행 사태에서 보듯 자본은 침몰하는 배에서 전체 인민들을 바다에 빠뜨려서라도 자신들은 살아남기 위해 대주주나 지배계급 일원들은 수천억 원의 자금을 몰래 인출해갔다. 이러한 비도덕적이고 기생적인 부르주아와 자본가 국가의 모습은 단지 양심과 도덕의 문제를 넘어 부르주아 경제법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역시 노동자 인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면서도 수요 진작이 없으면 막대한 과잉생산물에 대한 소비가 줄어들기 때문에 공황이 더 격화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자연법칙처럼 필연적으로 노동자 인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과잉생산 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 인민의 빈곤을 해결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할 수 있다면 그 체제는 더 이상 자본주의일 수가 없는 것이다.



개별 자본의 위기를 넘어 국가 자체가 부도에 처해질 수 있는 공황이 격화되는 징후가 속출하고 있는 이때 한국에서는 고립과 분산, 침체를 넘어 노동자 인민 투쟁이 촉발될 수 있도록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하나의 투쟁이 연쇄 고리가 되어 전국적 정치투쟁으로 확산될 수 있는 투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것이 절박한 과제라면 이 투쟁이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치폭로의 조직화 또한 절실한 시기다.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 질서의 반동성에 대한 전면적인 정치폭로, 등록금, 청년실업, 노점상, 철거민, 농민문제 등 여타 계급 계층의 문제, 저축은행, BBK, 선거 등 부르주아 계급 지배의 기생성과 위선적 재생산 구조 등 사회 전 영역에 대한 과학적인 정치폭로가 이뤄져야 한다.



대중투쟁의 촉발과 이 대중투쟁을 전면적인 반자본주의 투쟁의 전망으로 조직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당면 과제이다. 노동자 인민이 자본의 특정 정치세력과 인물에 대한 반대를 넘어 부르주아 계급지배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구체적이고 혁명적인 전망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을 관념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는 반공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사상에 대한 과학적이고 혁명적 비판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공황이 전면적으로 격화되면서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실업의 문제나 노동자 인민의 빈곤 문제가 격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민주의 복지체제가 마치 좋았던 과거의 한 때로 찬양받고 있다.



노동자 인민의 계급의식을 부르주아 체제 내의 사소한 변화로 그것도 혁명적 투쟁이 없이는 성취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량주의적 투쟁만으로 한정시키려 하는 부르주아 사상을 폭로해야 한다. 노동자 인민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부르주아 체제에 안주하도록 유도하는 진보연하는 사이비 진보 지식인들을 과감하게 비판해야 한다. 대신에 실업 척결, 노동시간 대폭 단축, 전면적인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주거 등을 달성했던 쏘련 사회주의의 현실적 모습을 통해 노동자 인민에게 사회주의는 현실에서 강력하고 존재했고 또 패배를 딛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과학적인 평가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노동자 인민의 대중투쟁을 강화시키고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진보적 체제를 위해 투쟁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적소유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이윤체제를 분쇄하고 노동자 인민들이 전 사회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지도권을 확립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의 무정부성과 무계획성, 기생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공황 없이 혁명은 없지만 공황만으로 혁명은 있을 수 없다. 전 세계적 공황의 심화 속에서 혁명적 전망을 가지고 투쟁할 때만이 혁명은 잠재적 가능성에서 구체적인 현실의 영역으로 성큼 다가올 것이다. <노/정/협>



http://lmagit.jinbo.net/bbs/zboard.php?id=newspaper&page=11&sn1=&divpage=1&sn=off&ss=on&sc=on&sl1=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55



아래는 평문입니다.



보스코프스키 2011-09-29 | 23:15:22



이 문서 역시 노사과연의 http://lodong.org/board/board.html?mtype=view&page=2&bid=4&num=392&seq=1165&replynum=392&shownum=389&key=&searchword= 에서 먼저 작성한 문서인데 이미 이 전에도 김수행 교수의 어이없는 행동을 포착했기에 재 작성 합니다.



김수행 교수의 어이없는 행적을 고발한 다음 문서도 있습니다.



노동자 공동 투쟁: 21호 은평을 선거~ 중



유권자들이 투표에서 심판하면 ‘부자들의 독재 정권’은 무너지게 마련이다.(원 개제처는 경향; 노공투 신문 재 발췌)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nogongtu-5&id=115&page=2





자칭 2011-09-30 | 16:49:58



“전반적인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공권력이 법으로 제정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정치가 굉장히 중요한 거죠”



맑스주의자임을 자임하는 분의 입장이 이렇다니 한심하군요. 공권력 현재 자본주의 국가 권력에 의한 법제정으로 '전반적인 사회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니? 사실 새로운 법률도 혁명에 의한 경제관계의 변화를 상부구조 치차원에서 반영하고 이것이 물론 역으로 경제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인데...



이분도 현실사회주의에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고 그러다보니 사회주의 변혁의 가능성을 포기한 것이 이처럼 자본주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케인즈주의를 통해 부분적으로 자본주의를 개혁해보자는 개량주의 입장으로 돌아서게 한 것 같군요. 특히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렇듯 과잉생산 공황론과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부정으로 귀결되는는 것 같군요. 김수행교수는 트로츠키주의자는 아니지만 그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유사한듯 합니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케인즈주의에 비판적이지만 과잉생산 공황론과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해 이른바 '스탈린주의'로 보고 이어서 엥겔스의 과잉생산 공황론에 대해서도 왜곡하고 비판하는 점에서 말입니다.

맑스주의의 권위있는 해석자라는 사람이 맑스가 자본주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붕괴론(자동붕괴론이 아니라 혁명적 이행론을 포함하는)을 부정하니 김수행교수는 이제 더 이상 맑스주의자는 아닌듯 합니다. 사이비 맑스주의자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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