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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정신 92호] 협동조합 운동, 200년 동안 지속된 지독한 환상
글쓴이 보스코프스키 E-mail send mail 번호 3099
날짜 2013-11-24 조회수 1742 추천수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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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운동, 200년 동안 지속된 지독한 환상







운동이 과학적이고 변혁적 열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자본주의를 대신할 유일한 전망은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만이 공황, 전쟁과 살육, 착취와 억압, 빈곤과 소외 같은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전망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협동조합인 듯하다. 협동조합은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구출할(또는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구세주로까지 격상되고 있다. 언론에서도 저마다 앞 다퉈 기획기사로 협동조합에 대해 다루고 있다.



협동조합 열풍이 우리사회에 더 직접적으로 밀어닥친 계기는 2007년 1월 사회적기업 육성법 제정에 이어, 2012년 유엔에 의한 협동조합의 해 지정, 이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같은 해 12월에 협동조합기본법이 발효되면서 부터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토록 호들갑스럽게 협동조합이 주목을 받게 되었는가?



2010년부터 시민들은 보편복지, 경제민주화를 시대정신이라고 차례로 선언했고, 지금 전국 각지에서는 협동조합 열풍이 일고 있다. 일시적 유행이 아니다.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은 세계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급증한 바 있다. … 심각한 고용불안, 높은 청년실업률, 끊임없는 실질소득의 감소, 엄청난 가계부채 등은 그 확실한 증상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자본주의 경제의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문제는 그 정도가 이미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는 점이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청년실업 문제만 하더라도 거의 재앙 수준이다. 지금 젊은 세대는 이대로 간다면 대부분 평생 단 한 번도 정규직 일자리를 가져보지 못한 채 늙어버릴 가능성이 크다.(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경제민주화의 해법, 협동조합, 시사인 [278호], 2013.01.18)



박원순 시장(이하 박원순) = 과거에 자본주의와 대결하던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 대안들을 찾아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지나친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단지 복지로서는 해결이 안돼요. 한계가 있는 체제하에서라도 지속가능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적 경제가 탄생했다고 봅니다.(김여란기자, [신년 기획 - 왜 사회적 경제인가](4) 박원순 서울시장·정태인 새사연 원장 대담경향신문, 2013년 1월 4일)



협동조합에 주목하는 입장들은 이러한 기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협동조합은 이처럼 전 세계를 부채위기와 실업과 빈곤으로 몰아넣은 자본주의의 공황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다. 공황으로 인해 자본주의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자본주의 모순이 더 심각해지고 있는 이때 탈출구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협동조합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위기가 ‘단기적 이윤창출을 최우선 목표로 하여 자유경쟁으로 달성하려 한다면, 협동조합은 ‘공동체적 생산과 소비를 통해 함께 만드는 시장’을 목표로 하는 ‘사회적 경제’를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인간적 경쟁으로 가득하고 실업자를 양산하는 살벌한 시장경제를 대신하여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적 경제’의 화신이 바로 협동조합이다.



그런데 같은 협동조합을 놓고도 저마다 기대하는 바가 다르다. 소부르주아는 한결같이 자본주의를 따뜻하고 건강하게 변화시킬 수단이라고 한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의 비서관이었던 박병옥조차 “협동조합 경제가 시작되면 우리나라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협동조합을 변혁수단으로 생각하는 자칭 ‘협동조합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이행노선’으로까지, ‘21세기 사회주의’로까지 그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구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강령에서도 모두 하나 같이 ‘협동조합,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사회적 기업’을 ‘대안적 소유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 형태로 간주하고 있다. 진보신당 당대표, 부대표 선거에서도 ‘협동조합 사회주의’가 중심 이슈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진보신당을 ‘협동조합당’으로 만들고 ‘협동조합 공화국’을 만들자는 호소도 들리고 있다.



협동조합은 과연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이행노선으로까지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진보신당 당원이기도 한 엄형식은 이렇게 주장한다.



지난 편지에서 제가 범주화했던 협동조합/사회적경제와 변혁운동, 구체적으로 사회주의운동/노동운동과의 관계는 여전히 유효한 부분들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19세기말, 20세기 초반에 정립되었던 구도들입니다. 여기에는 20세기 초반 사람들이 생각했던 협동조합/사회적경제, 사회주의/노동운동 그리고 ‘변혁’에 대한 상이 투영되어 있지요. 그러나 물질적 조건이 변화하고, 사람들이 겪고 느끼는 문제와 필요가 변화한 상황에서 ‘변혁’이 의미하는 것도 변하지 않을까요?(엄형식, “먼저 사람과 행동이 있었다”[협동조합의 역사 미래 의미] 우리 주변에서 진행되는 '변혁'에 주목, 레디앙, 2012년 12월 11일)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할 핵심 수단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사회주의 ‘변혁’에 대한 상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혁의 물질적 조건이 변화했다고 한다. 이 말은 곧 자본주의를 타도하여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장악하고 기업과 금융의 몰수와 국유화, 협동조합화를 통해 중앙집중 계획과 사회주의 집단적 생산관계를 만드는 것과 같은 과거의 이행노선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른바 ‘신좌파’의 주장대로, 협동조합 노선은 사회주의로 가는 새로운 제3의 길인가? 아니면 결국 자본주의 생산관계 내에서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만든다고 하는 개량주의 노선에 불과한 것인가?



협동조합 노선을 비판하는 이는 아주 극소수다. 협동조합에 대해 비판적일지라도 협동조합 노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의 협동조합에 대해 비판할 뿐이다.



특히 협동조합이 국가가능의 외주화를 통해 복지를 국가가 민간에게 떠넘기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이 문제다. … 결국 주택협회의 역할 증대는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 확대된 것이 아니라 정부역할을 축소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문제는 한국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그나마 부족한 국가의 복지 기능을 아예 축소시키거나 요구하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복지국가 시기 영국의 주택협회가 주거의 정부화라는 방향으로 공공성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사적 영역에 떠넘겨진 사회적 역할을 다시 공적 영역으로 돌려놓는 역할을 할 때만 협동조합은 진보적일 수 있다.(한형식(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 협동조합은 진보적인가? [기고] 협동조합 지나친 기대, 국가의 복지 축소 우려, 참세상, 2013.01.16)



이 주장은 협동조합 열풍 뒤에 감춰져 있는 한계를 폭로하며 제대로 된 협동조합 운동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접근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 빠져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내에서의 협동조합인가? 사회주의에서의 협동조합인가? 이다.



우리는 기본소득제, 경영참가 노선, 협동조합 노선에서 보듯, 이른바 ‘좌파’들의 노선이 결국 역사적으로 나타난 개량주의 노선과 한 치도 다를 게 없는 자본주의 개혁노선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협동조합 노선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야만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인 ‘사회적 경제’도 아니고 더더욱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노선도 아니라는 것을 밝힐 것이다. 우리는 이 노선이 결국은 이행노선 자체가 없는 자본주의로의 포섭노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할 것이다.





협동조합의 역사와 맑스주의 왜곡



협동조합 노선은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협동조합법 통과 이후 더 유난을 떨며 극성을 부리고 있지만 협동조합 운동 역사는 오래됐다.



유럽에서 현대 협동조합 역사는 자본주의 발전과 역사를 나란히 같이 하고 있다. 로버트 오웬과 찰스 푸리에는 인민들이 더 협동하여 살 수 있는 대안 사회를 구상한 사람들 가운데 중심에 있다. 그들이 설계한 시도는 대개 단명에 그쳤으나, 그들의 작업은 대안적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지난 200백 년 동안, 협동조합은 대안적 체제를 구성하는 잠재성 혹은 이른바 자본주의로 가는 제3의 길이냐 하는 첨예한 쟁점의 중심에 있다.(George Kokkinidis , (Agro)topia? A Critical Analysis of the Agricultural Cooperative Movement in Greece, June 2010)(조지 카키니디스, (농업)낙원? 그리스 농업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비판적 분석, 2010년 6월)



자본주의 발전과 역사를 같이 하는 현대의 협동조합은 생시몽, 푸리에, 오웬과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시작됐다. 이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맑스주의에 의해서 공상적 사회주의로 철저하게 비판받았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어김없이 실패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운동 위기 논쟁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박승옥(한겨레 두레공제조합연합회[준] 공동대표) 역시 협동조합 운동에 거대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박승옥은 쏘련 해체 이후부터 시작되어 90년대 중반에 고조된 노동운동 위기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박승옥이 제기한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의 핵심은 쏘련 사회주의 해체와 이른바 김영상 문민정부 등장 이후에 더 이상 전투적 노동운동은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에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1차 노동운동 위기 논쟁이다.



2차 노동운동 위기 논쟁은 노무현 정권 당시에 개시됐다. 노무현 정권은 고임금론, 노동귀족론으로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하면서 조직된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노동자와 노조를 공격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는 비정규직 문제를 정규직 노동자들한테 전가하고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2차 노동운동 위기 논쟁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조합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위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자본과 정권의 노동자 분열전략에 부화뇌동하여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과 단협의 양보를 요구하는 지배계급의 이해에 봉사했다. 이 중심에 박승옥이 있었다.



박승옥은 이제 세 번째 노동운동 위기 논쟁을 개시하고 있다. 박승옥은 노동운동에 팽배한 조합주의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협동조합 노선을 주창하고 있다.



“국가와 자본의 전방위 노조 무력화 정책에 대항하는 노동조합운동의 전략이란 것이 1년 열두 달 늘 구태의연한 총파업 구호뿐이었다. 이는 중소 영세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들까지도 노동조합운동의 반대 세력으로 돌려놓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

- 자본이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철저히 지배 종속시키려 하면 당연히 노동자들은 이를 탈환해 와야 한다. 그리고 이런 탈환 운동이 다름 아닌 협동조합 운동이다. … 그런데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협동조합 운동을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내부의 개량주의 운동, 또는 한가한 중산층의 운동 정도로 폄하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고도 편협하기 짝이 없는 편견이 아닐 수 없다.

- 맑스는 자본론에서 일관되게 자유인들의 연합체로서 협동조합 운동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엥겔스는 협동조합에 대해 오락가락하는 글들을 남기고 있다.

- 레닌과 스탈린은 철저한 국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솔직히 공동체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국가권력을 획득하는 전략에서 협동조합 운동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 때는 ‘사회주의의 학교’로서 협동조합 운동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한편, 일단 국가권력을 잡은 다음에는 또 철저하게 협동조합 운동을 개량주의 운동으로 부정하고 아예 국가 권력에 종속된 어용 조합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 투쟁과 파괴만으로는 새로운 사회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사회는 노동자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지금 한국 노동조합 운동은 자본과 국가에 대항한 투쟁에서도 철저히 패배하고 말았다. 아니 패배를 지나 이미 자본과 국가에 노동조건과 복지를 구차하게 애걸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박승옥(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준] 공동대표), 한국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 녹색평론사, 모심과살림연구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한국협동조합연구소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준), 부산노동자생협 혁신네트워크, 민주노총, 한국노총 주최 토론회 발표글, 한살림 교육장, 2011년 6월 3일)”



조합주의에 빠진 우리 운동의 철저한 혁신을 주장하는 것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이 주장은 곳곳에 반노동자적인 독이 숨겨져 있다. 박승옥은 총파업을 반대하고 협동조합 운동을 개량주의라고 비판하는 맑스-레닌주의의 변혁적 사상을 왜곡하고 거부하고 있다. 박승옥은 자유인들의 연합체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세우고 이를 통해 이행의 이행을 통해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주장한 맑스의 핵심사상을 중대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박승옥이 맑스-레닌주의를 부정하거나 왜곡하고 노동자 투쟁을 적대하면서 협동조합 운동을 주장하고 있다면, 반대로 맑스주의 문헌에 의거하여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협동조합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시도도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대학 이론경제학 교수인 브루노 요싸(Bruno Jossa)는 협동조합을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노선으로 규정하고 있다. 브루노 요싸는 특히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협동조합에 대해 말하고 있고, 완결적인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목해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몇 번이나 맑스는 협동조합 운동의 광범위한 도입이 새로운 생산방식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옹호하면서, 협동조합 기업에 대해 강력하게 찬성한다고 선언했다. 다른 시기에, 맑스는 심지어 협동조합이 궁극적으로 전체 자본주의 기업을 대체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레닌 또한 (전적으로 이 주제에 집중해서), 1923년 저작에서, 사회주의 일반과 협동조합을 동일시하는 것으로까지 협동조합 운동을 적극 지지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밖에도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기에서 중요한 조직의 단계로서 협동조합을 묘사하면서, “협동조합은 사회주의다”(레닌, 1923년)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파리꼬뮌 시기 이후로 여태까지 협동조합 운동은 맑스주의자들로부터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브루노 요싸, 맑스, 맑스주의와 협동조합 운동,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2005년, 3쪽)



국내 운동진영에서도 종종 그런 것처럼, 브루노 요싸 교수도 문필상의 조작까지 감행하며 맑스주의를 철저하게 왜곡하고 있다. 브루노 요싸는 협동조합에 대한 맑스의 대표적인 글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소유자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노동자의 정치경제학의 훨씬 더 위대한 승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협동조합 운동, 특히 소수 용기 있는 “일꾼들”의 전적인 노고로 만들어진 협동조합 공장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사회적 실험들의 가치는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 … 그리고, 노예 노동이나 농노 노동처럼, 고용 노동 역시 일시적이고 낮은 형태에 불과하고, 자발적인 손과 기꺼운 마음으로 그리고 행복에 넘쳐 열심히 일하는 결합된 노동 앞에서 사라져버릴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맑스, 1864년, 11쪽)(브루노 요싸, 같은 글, 4쪽 발췌 인용)



브루노 요싸가 언급한 맑스 저작은 맑스의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발기문>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브루노 요싸는 협동조합의 근본적 한계에 대해 말하는 맑스의 바로 다음 문장에 대해서는 인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원칙상 탁월하고 실천상 유익하다 하더라도 협동조합 식 노동이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적인 노력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제한된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나는 독점의 성장을 억제할 수 없으며, 대중을 해방시킬 수 없으며, 심지어 그들의 빈곤이라는 짐을 눈에 띄게 덜어 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는 귀족들과 부르주아-박애주의적 말꾼들과 싸늘한 몇몇 정치 경제학자들이, 예전에는 자신들이 그 맹아 상태에서 숨통을 끊으려 시도한 바 있고 몽상가의 유토피아라고 비웃은 바 있으며 사회주의자들의 이단이라고 유죄 판결을 내린 바 있는 바로 그 협동조합 제도에게 아첨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근로 대중을 해방시키려면 협동조합 제도는 국민적 규모에서의 발전과 국민적 수단에 의한 추진을 필요로 합니다. … 정치권력을 전취하는 것은 따라서 이제 노동자 계급의 커다란 의무입니다.(맑스, 국제노동자협회 발기문, 1864년. 저작 선집 3, 박종철출판사, 김태호 번역, 2003년 1월28일, 11-12쪽)



브루노 요싸 교수가 말한 레닌의 1923년 저작은 <협동조합에 관하여>이다. 브루노 요싸 교수의 말대로 레닌은 이 저서에서 협동조합이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협동조합의 거대한 중요성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했다. 그렇다면 브루노 요싸가 협동조합에 대한 레닌의 저서 중에서 은폐하는 주장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과거의 협동조합주의자들의 꿈속에는 많은 환상이 있었다. 종종 그들은 어리석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환상적이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착취자의 지배를 전복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이 갖는 근본적인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착취자들의 지배를 무너뜨렸으며, 그래서 과거의 협동조합주의자들의 꿈속에서는 환상적이고 심지어는 낭만적이고 진부했던 많은 것들이 지금은 그대로의 현실이 되고 있다.

실로 정치권력이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있고 또 이 정치권력이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실제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과제는 주민을 협동조합결사체로 조직하는 것뿐이다. 주민의 대다수가 협동조합으로 조직되면, 계급투쟁과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등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올바르게 확신하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과거에는 아주 정당하게도 조롱과 경멸, 멸시를 받아야 했던 사회주의는 자동적으로 그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레닌, 협동조합에 관하여, 1923년. 농업협동화론 레닌과 부하린의 논의를 중심으로, 윤수종 편.해설, 새길, 1991년 11월, 182-183쪽)



브루노 요싸 교수가 협동조합에 대한 맑스와 레닌의 글을 발췌하면서 문필조작까지 하면서 극구 말하지 않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맑스는 협동조합이 자본가 없이도 노동자 스스로 기업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의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협동조합 운동은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독점을 결코 막을 수 없고 협소한 영역에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협동조합이 전체 근로 대중을 해방시키려면 전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새로운 정치권력이 필요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협동조합 운동은 지배적인 새로운 생산양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협동조합에 있어서도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정치권력의 문제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탁월하게 지적한 것처럼, 아무리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고 맑스주의 문헌을 발췌해서 인용한다고 해도 결국은 정치권력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개량주의자와 혁명적 진영이 확연하게 갈라진다. 맑스와 레닌은 자본주의 정치권력을 타파하고 노동자계급의 권력이 중앙집중화 된 계획으로 전 사회적인 집단적 생산을 조직하는데 있어서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브루노 요싸는 레닌이 말한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기’를 노동자계급에 의한 정치권력 장악 이전 시기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레닌은 저발전 한 러시아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했지만 곧바로 농업을 포함한 전 산업에 대한 사회주의 조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면적인 사회주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이행의 특수한 국면을 따로 두었다. 이 이행기에서조차도 권력의 성격은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고 제 민중이 함께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이었다.



모든 개량주의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브루노 요싸는 국가권력의 문제를 회피할 뿐만 아니라 쏘련에 대해 ‘국가계획지령경제’라고 주장하면서 맑스주의자들이 지령경제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한다면서 비판한다. 이 점에서 한국사회의 이른바 ‘신좌파’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인식을 같이 하는 것이다. 브루노 요싸는 협동조합이 자본-노동관계를 효과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대립물로 비자본주의 기업이자 사회주의 기업이라고 주장한다.



브루노 요싸는 여기서 “진짜 맑스주의자” 만델의 예를 들면서 “진짜 맑스주의 용어 내부에서도 협동조합 체계가 시장경제 내부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주요한 전진을 가져다 줄 것”(같은 글, 15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하단 주2에서 “노동자 통제와 관련하여 E. 만델은 “‘노동자’ 통제가 이행 요구로, 탁월한 반자본주의 구조 개혁 요구”(Mandel, 1968&#8211;-9, p. 345)라고 주장하였다.”라고 한다.(같은 글, 15쪽) 우리는 일찍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행강령으로 제출한 노동자통제 요구가 국가권력의 문제를 회피하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는데 ‘협동조합 사회주의자’도 이점을 간파하고 만델의 이행강령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브루노 요싸는 이번에는 자본론에서 맑스가 협동조합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맑스가 협동조합 기업 체계가 단순하게 실현가능할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그 자체로 필연적이고 협동조합에서는 임금노동이 사라지고 생산수단 -경제학자들이 자본이라고 부르는- 이 더 이상 노동자를 노예화 하지 않게 되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낳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 체계 안에서, 노동자들은 더 이상 착취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기업을 소유했기 때문에 노동은 자유롭고 행복하게 느껴지게 될 것이다. 이 테제는 자본론의 유명한 다른 구절에서도 확인되는데, 거기서 맑스는 자본주의에 비해 우월한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서의 생산자협동조합에 기반을 둔 체제를 얼마나 기대했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방금 직전 인용한 아래 줄에서 맑스는 비록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지만 ‘자본주의 사적 생산의 폐지’를 향한 최초의 단계로 주식회사를 표현했다.(Marx, 1894, pp. 570&#8211;-1쪽)(브루노 요싸, 같은 글, 5쪽)



브루노 요싸는 “맑스주의는 교리가 아니라 단지 방법론이다”는 엥겔스의 말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이 마치 변증법적 방법론에 기초해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맑스주의 변증법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맑스의 자본론 전체에서 관통하고 있는 변증법적 방법론은 자본주의 역시 영원불변한 생산양식이 아니라 고대 노예제와 봉건제처럼 인류 역사발전의 특정한 생산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기본모순은 생산은 점점 더 사회화하는데 그 생산의 결과물은 자본가들이 독차지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맑스는 생산력은 고도로 발전하면서 과잉생산을 낳는데, 다른 한편에서 민중들 대다수가 절대적, 상대적으로 빈곤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날 대공황 같은 극심한 위기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의 사회화는 전 사회적으로 계획적으로 생산을 조직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낳는다고 말한다. 주식회사는 대표적인 생산의 사회화의 사례인 것이다.



여기서 주식회사는 비록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지만 자본주의 사적생산을 폐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주식회사 내부에 한정했을 때이다. 개별 주식회사는 비록 생산계획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 사회적 차원에서는 무정부적이고 무계획적인 생산이 이뤄지는 게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극소수 자본가가 노동자 민중을 수탈해 왔다면 이제는 절대 다수의 노동자 민중이 자본주의를 변혁해서 지금까지의 ‘수탈자가 수탈당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방법론은 맑스가 자본론 서문에서도 특별히 언급하고 있고, 자본론 본문 내에서도 수차례 언급하는 것이다. 자본론 서문에서 말한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은 혁명적 변증법의 정수를 보여준다.



브루노 요싸는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주장했던, 기존 국가권력의 폭력적 전복과 노동자계급에 의한 국가권력 장악, 국유화를 통한 생산의 중앙집중으로 사적소유의 철폐라는 맑스주의 핵심 원칙이 헤겔주의 변증법의 잔재로 무정부적 관점이라고 악의적으로 매도한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에 볼셰비키가 공산당 선언에서의 주장처럼, 협동조합 보다 중앙집중적 계획과 국유화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제 브루노 요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존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국가권력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협동조합을 통해 장기적이고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생산을 포위해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변증법적 접근에서 이행의 관점이란, 자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 한 번의 타격으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일시적인 과정이 아니라, 구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적 질서로 이행하는 점진적 적응의 장구한 시기를 거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브루노 요싸, 같은 글, 10쪽)



브루노 요싸의 주장은 수정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베른슈타인의 전형적인 주장이다. 베른슈타인은 독일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 내에서 자본주의의 적응능력을 주장하면서 자본주의 국가기구 내부에서 점진적으로 자본주의를 변화시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살레주의나 카우츠키주의, 역사상 모든 개량주의자들이 다 같이 공유하는 관점이다. ‘협동조합 사회주의자’들이 주관적으로 백번을 더해 협동조합과 사회주의를 결합시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량주의에 불과하다.





왜 협동조합은 반동적인가?



협동조합주의자들은 200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자본주의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협동조합의 역사를 강조하며 협동조합 운동이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200년 동안이나 협동조합이 끈질기게 살아남은 건 인식하고 있지만 협동조합이 200년 동안이나 자본주의 모순을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는 자명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20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왔고 그것도 모자라 확산되는 지독한 환상이다.



대부분 협동조합은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 협동조합은 파산한다. 협동조합 내에서 기업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이기도 한 협동조합 직원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해고당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본주의 내에서 독점자본과의 경쟁, 비독점자본과의 경쟁, 소자본 자체와의 경쟁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소부르주아 기업이 파산하는 것처럼, 절대 다수 협동조합은 파산하고 있다. 이 파산을 면하기 위해 협동조합 기업 내부에서는 자발적으로 임금삭감, 퇴직금 삭감을 하기도 한다.



협동조합에 대해서 자본주의 내에서 반자본주의 기업이라고 하든, 이행의 수단이라고 하든, 변혁의 전초기지라고 하든, 그람씨의 말을 빌려 ‘진지전의 참호’라고 하든, 시장경제를 대신하는 사회적 경제라고 하든, 새로운 모델이라고 하든 상관없이 그 역시 자본주의 내에서의 기업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확한 사실이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내에서 다른 ‘자본주의적 기업’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 자체적으로는 반자본주의 기업일지 모르지만 자본주의 기업, 그것도 거대한 독점기업에 철저하게 포위된 기업에 불과하다.



협동조합의 근본적 한계를 주장하면, 협동조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에 대한 결정적인 반박으로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서 성공한 거대 협동조합인 몬드라곤 사례를 들이댄다. 실제 몬드라곤 ‘성공’사례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들도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몬드라곤을 직접 방문해서 체험하는 경우도 많다. 몬드라곤은 직원이 10만 명이나 되고 122개의 생산기업과 6개의 금융조직, 14개의 소매상, 7개 연구 센터와 1개의 대학, 14개 보험회사를 가지고 있다. 2009년 총매출액만 20조가 넘는 초거대 협동조합 기업이다.(Mondragon as a Bridge to a New Socialism, 새로운 사회주의로 가는 교량인 몬드라곤)

http://www.solidarityeconomy.net/2011/03/16/mondragon-as-a-bridge-to-a-new-socialism/



몬드라곤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룬 책은 극히 드문데, 쉐린 카스미어(Sharryn Kasmir)의 <몬드라곤 신화(The Myth of Mondragon)>가 대표적인 저작이다. 이 책에 대해 비평을 한 글(louisproyect, The Myth of Mondragon, December 6, 2009) http://louisproyect.org/2009/12/page/3/ 을 보면 심지어 몬드라곤 창설자인 아리스멘디(Arizmendi) 신부는 스페인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 당시인 1965년에 공로훈장을 받았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무쏠리니 파시스트 정권은 처음에는 협동조합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에 협동조합 운동가들이 찬성한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허가를 했다. 무쏠리니는 협동조합이 노사협조주의의 사례라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봤다. 카스미어는 “노동자 참가는 노동자와 경영자 사이를 비적대적으로 하고 계급의식을 사라지게 한다.”는 무쏠리니의 말을 인용했다.



몬드라곤 기업 내부에서도 1970년대 파업이 일어날 정도로 노동자들 사이에 불만이 있다. 물론 그 파업은 협동조합 소유자들인 동료 노동자들에 의해 진압당하고 파업 주동자들은 해고당한 사례도 있다. 카스미어 책에서는 몬드라곤 기업(Mayc) 내에서 75%의 육체노동자들이 고용불안을 느낀다고 답변했다. 몬드라곤 기업 내에서 비숙련 노동자들은 기업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더 높았고 반대로 숙련 노동자들이나 경영자 모두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몬드라곤 내에서 경영자와 노동자, 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 격차가 증가하면서 기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몬드라곤은 해외 외주 기업에서는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그곳에서 제국주의 국가의 기업처럼 행세를 하고 있다.



몬드라곤 사례가 협동조합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찬사 일색이어서 부정적인 측면이 덜 부각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몬드라곤 기업이 비록 일개 기업으로서는 성공했다 할지라도 스페인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는 해방구(liberated territory)로서는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자본주의는 극심한 공황에 직면하여 실업률이 25%에 달하고 있고 청년 실업률은 50% 이상이다. 스페인 자본주의는 부채위기를 극복한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다.



몬드라곤 같은 개별 기업의 특수한 성공사례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자본주의의 모순은 전혀 손대지 못하고 있다. 몬드라곤은 여전히 스페인 자본주의, 세계 자본주의에 포위돼 있는 기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몬드라곤 그룹 내 개별기업에서도 파산이 늘어나고 있으며, 자본주의 기업과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몬드라곤 기업 내에서 아직 전면적인 해고는 없었으나 이러한 외부 기업과의 경쟁으로 인해 기업 내부적으로 임금을 자발적으로 삭감하고 퇴직금을 반납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독점자본들은 이미 거대한 자본력을 가지고 자동차, 조선, 철강, 전자, 건설, 유통, 금융, 방송, 언론 등 자본주의 전 산업을 장악해 들어가고 있다. 사유화를 통해 공공부문 전 산업에 대한 진출도 강화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 재벌은 빵집, 떡볶이, 피자, 순대 같은 사업에도 진출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몬드라곤 같은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협동조합 기업은 이른바 ‘틈새기업’이라고 해서 독점자본이 진출하지 않는 유통이나 소생산 부문으로 진출하고 있다. 이 같은 독점자본의 지배력 강화로 인해 절대 다수 협동조합 소기업들은 사업 영역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있고 거대 자본에 포위되어 생존 자체가 위태한 실정이다.



생산의 집적과 집중은 독점을 낳는다. 생산을 독점한 독점자본은 생산에 대한 지배력을 바탕으로 전체 사회를 지배한다. 이것이 독점자본주의 체제다. 국가 역시 독점자본에 종속되어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한다. 이것이 국가독점자본주의다. 결국 이러한 독점자본주의 경제법칙을 협동조합으로 극복한다고 하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는 파산한 기업을 노동자들이 인수해서 운영하는 노동자 소유기업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노동자협동조합이 마치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자,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변혁하지 않고 점진적인 확대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개량주의 환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주관적으로 협동조합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든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부여하고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흐리게 한다. 국가가 나서서 협동조합법을 제정하고 재벌이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지원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협동조합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소부르주아나 개량주의자들이 쏘련 사회주의의 중앙집중화된 계획경제 체제, 국유기업과 더불어 콜호즈라고 하는 전국적인 협동조합 체제에 대해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쏘련과 동유럽뿐만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는 전 세계적 차원으로 존재했고 그 생산의 중심에 협동조합이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는 생산의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해체되고 사유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주의가 부활했던 것이다. <노/정/협>





http://lmagit.jinbo.net/bbs/zboard.php?id=newspaper&page=4&sn1=&divpage=1&sn=off&ss=on&sc=on&sl1=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67



아래는 해당문서에 달린 평문들입니다.



물음표에게 2013-02-06 | 20:20:36



뭐가 맘에 안 드는지 구체적으로 집어주시게나. 그리고 맨날 뒤통수? 근거를 대라. 허위사실 유포하지 말고.





&#47973;미?? 2013-02-08 | 22:11:37



?//



뭔 소리임??





물음표에게 2013-02-08 | 23:56:25



자네가 한 비판은 인정할 수 없네.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타격하지 않고서 협동조합 운동을 지껄이는 것은 헛된 망상이라고 지적한 정당한 비판이 어찌 "언어 구부리기를 통한 노동자 이용성이 너무 강"하고 "빨강색을 흡수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하는가! 이토록 맑스레닌주의에 충실한 논리적인 글이 일관성이 없다고? 자네의 근거 없는, 비판을 넘은 '비난'에 상처 받을 동지들도 있다는 걸 명심하게. 앞으로 과학에 입각한 비판, 혹은 동지에 대한 격려를 기대해보겠네. 아직 젊은 동지 같아 보이는데, 어서 정신차리길 바라겠네.





!!! 2013-02-14 | 21:59:41



스탈린주의자들의 일국사회주의가 세계자본주의 속에서 공상적이고 반동적인 것처럼



오늘날 개량주의자들의 협동조합주의도 자본주의 속에서 공상적이고 반동적이다.





느낌표에게 2013-02-15 | 14:51:45



일국사회주의가 반동적?

트로츠키주의가 공상적이고 반동적이겠지!

세계혁명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보는가?

어찌됐건 간에 현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개량(이른바 복지국가)을 이끌었다.

한 나라 안에서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여 생산수단을 전취하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자본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양보하게끔 이끌어낸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일국사회주의가 반동적? 비판을 하려면 감성적인 비판만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일국사회주의의 어떤 점이 반동적인지를 얘기해야 한다.





보스코프스키 2013-02-16 | 11:27:38



뜬금없이 관련성이 그다지 없는 것을 끄집어 내는 것 정말 수상하다! 그리고 이미 그 일국주의는 세계, 국제주의와의 연결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상형태인데 정말 악천후의 쾌속 비행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아직도 이러시낫!!!





풍차 2013-02-16 | 23:04:48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가미카제 특공대를 보는 것 같다. 그것도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뜨로츠키의 낡은 이론을 짊어지고..





Z 2013-02-17 | 14:28:21



메인글하고 답변 좀 보시라 ZZZ 위선떠는 어린아이의 꼴깝을 ZZZ 룸펜의 위선.





보스코프스키 2013-02-22 | 11:18:34



저기 1950 ~ 60년대가 자본주의 쇠퇴기 였을까요? 도리어 이런 식으로 현실 진단의 오류가 심각한 위험 조차 초래할 수 있는 것일진데 이런 고민을 찾아보기가 왠지 힘듭니다.





보스코프스키 2013-03-31 | 16:36:21



그리고 협동조합의 부상은 주류들 그러니까 국가지상주의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사라는 사실도 있지요...^^





원글의오류 2013-09-22 | 10:48:19



원문에서 몬드라곤 창설자인 아리스멘디(Arizmendi) 신부는 이탈리아 무쏠리니 정권 하인 1965년에 공로훈장을 받았다고 했으나 이것은 오류입니다. 아리스멘디 신부는 이탈리아 무쏠리니 정권이 아니라 스페인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 당시인 1965년에 공로훈장을 받았다. <노동자의사상>5호에 실린 협동조합 관련글(신문 글 내용을 보강한 글이다.)을 일본어로 번역 중에 이 점을 지적해주신 동지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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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75 [노정신 92호] 협동조합 운동, 200년 동안 지속된 지독... 보스코프스키 2013-11-24 1742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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