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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정신 96호] 맑스코뮤날레, 맑스주의 해체의 경연장
글쓴이 보스코프스키 E-mail send mail 번호 3097
날짜 2013-11-24 조회수 2461 추천수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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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코뮤날레, 맑스주의 해체의 경연장







맑스주의는 노동자계급 해방운동의 이론이다.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정초된 맑스주의는 독일의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의 원천으로부터 가장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내용을 계승하고 그것의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면서,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긴밀하게 호흡하면서 건설된 사상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유토피아에 불과했던 사회주의는 과학이 되었고, 맑스주의는 지금까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향한 전진에 사상적 근거와 방향을 제시해 왔다. 맑스주의는 이러한 변혁성으로 인해 모진 수난을 겪기도 했다. 지배계급의 탄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와 변혁을 부르짖었던, 맑스주의를 참칭하는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수정되어 변혁성이 거세된 채로 계승되어 온 것이다.



맑스주의는, 맑스주의의 변혁적 원칙을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변화한 상황에 창조적이고 보다 풍부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맑스주의가 ‘이제는 변화된 조건에 맞지 않다’고 하면서 맑스주의 방법론으로부터 이탈하고 맑스주의에서 혁명성을 거세하고 있다. 더 고약한 것은 맑스주의를 내걸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맑스주의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개최된 맑스코뮤날레에 참가한 많은 ‘맑스주의자들’이 이들이다.



맑스코뮤날레의 6회 행사가 지난 5월 10일부터 12일까지 서강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맑스코뮤날레는 “‘맑스+코뮤니스트+비엔날레’의 합성어로서, 맑스의 사상과 코뮤니즘 운동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는 각 분야의 연구자와 활동가 단체들이 공동으로 학술문화제를 2년에 한 번씩 개최하여 진보좌파 이론과 운동의 상호 소통과 발전을 위해 2003년 5월 출범한 한국 최대의 진보좌파 학술문화 행사 조직이다.”(맑스코뮤날레 소개, www.marxcommunnale.net) 맑스코뮤날레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한국 최대의 진보좌파 학술문화 행사’답게 매회 10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수백 명의 발표-토론자, 참가 연인원만 1천 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 있는 행사다. 특히 올해는 제1회 대회 이후 가장 풍성하고 규모 있게 진행되었다고 하니,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더욱 확산되고 있는 것 같아 ‘고무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실상을 보면 외형적 성과가 커진 만큼 맑스주의의 혁명성은 오히려 거세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6회 맑스코뮤날레의 중요한 주제였던 ‘적(노동)-녹(생태)-보라(여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맑스주의 사상의 총체성은 해체되어 부문의 병렬적 나열로 대체되고 있고, 자본주의 모순은 맑스가 아닌 뜨로츠끼의 눈을 통해 분석되고 있으며, 협동조합이나 기본소득과 같은 개량주의적 ‘대안’(* 협동조합이나 기본소득제와 같은 이른바 ‘대안’으로 제시되는 프로젝트들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비판을 가했다. 『노동자의 사상』 5호에서는 이에 대한 완결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이 난무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또한 노동자계급 해방운동의 이론으로서 맑스주의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노동자 당, 정치투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사라지고 사회연대전략이나 사회운동과 같은 ‘전략’이 제출되고 있다. 가히 맑스주의 해체의 장, 반(反)맑스주의 향연이라 할만하다. 맑스코뮤날레 공동대표인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의 [시론]이 이를 잘 보여준다.





맑스주의의 ‘총체성’에 대한 부정, 맑스주의 해체의 시작



김세균 교수는 맑스코뮤날레에 앞선 [시론]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상은 총화적 사상도, 유일무이한 변혁이론도 아니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적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는 오늘날 지구적 수준의 생태위기와 함께 진척되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강고한 동맹은 여성 노동자들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가장 큰 희생자로 만들고 있다. 이는 이른바 ‘적-녹-보 연대’가 변혁운동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제6회 맑스코뮤날레 대회는 ‘적-녹-보 연대’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최초의 학술대회가 될 것이다.(김세균, [시론] 제6회 맑스코뮤날레 대회를 개최하며, 한겨레, 2013.05.08)



김세균 교수의 주장은 맑스주의는 “총화적 사상도, 유일무이한 변혁이론도 아니”기 때문에, 맑스주의와 함께 생태주의와 여성주의가 결합되는 “‘적-녹-보 연대’가 변혁운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지구적 수준의 생태위기가 함께 진척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강고한 동맹에 의해 여성 노동자들을 가장 큰 희생자로 만들고 있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는 맑스주의와 생태주의, 여성주의가 결합된 ‘적-녹-보’연대가 변혁운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맑스주의 정치학의 ‘권위자’이신 김세균 교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김세균 교수의 주장은 맑스주의를 해체하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맑스주의와 생태주의, 여성주의의 결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맑스주의에는 생태와 여성 문제가 결합되어 있지 않고 결여돼 있다는 잘못된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에는 이미 생태문제와 여성억압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져 있다. 그것도 단순하게 언급하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의 근본적이고 역사적인 기원까지를 풍부하고 과학적으로 담고 있다.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맑스 <자본론>,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같은 저서들을 보기 바란다.



생태문제 즉, 환경파괴, 자원고갈 등의 문제는 무제한적 이윤을 목적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무정부성, 무계획성에 의해 비롯되는 문제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해서라면 무차별적인 자연파괴와 도시 난개발과 자원 남획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윤이 목적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절실한 필요와 요구에 의해 합리적으로 생산을 조직하고 자연과 인류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계획 체제에서만이 이러한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대한 단초가 열린다.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적 억압 역시 사적소유의 발생으로부터 비롯된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사적소유가 발생함에 따라 모계 중심에서 부계 중심으로 넘어가고, 가족 또한 변화를 겪으면서 가부장제적 억압이 발생한 것이다. 즉, 여성억압 역시 사적소유의 발생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억압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생산을 사회화하며, 가사노동을 사회적 부문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렇게 했을 때 여성억압을 철폐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물론 생태문제와 마찬가지로 생산관계의 변혁 그 자체만으로 여성문제가 곧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관계의 변혁 과정에서 인식 변화가 같이 수반되어야 하고 변혁 이후에도 새로운 생산관계에 걸맞은 문화혁명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단순히 맑스주의 안에서 여성과 생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다 거론되고 있기 때문에 맑스주의를 총체적(총화적) 사상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맑스주의가 담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단순히 서로 분리되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인식의 방법으로 분석되고 있고,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변혁이라는 방향으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각각의 문제들이 생산관계의 문제로 연결되고 있고, 생산관계의 변혁으로부터 각각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로서는 오직 맑스주의만이 총화적 사상이고 ‘유일무이한’ 변혁이론이다. 게다가 맑스주의는 고정되고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혁명적 방법론에 의해 끊임없이 풍부해지고 발전하는 사상이다.





뜨로츠끼주의의 비변증법적 사고가 짙게 밴 슬로건



맑스코뮤날레 6회 대회의 슬로건인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좌파의 대안’은 그 자체로 보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문제는 슬로건이 도출된 배경, 즉 문제의식에 있다. 맑스코뮤날레는 슬로건으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좌파의 대안’을 제시하면서, 이는 “마르크스의 ‘세계자본주의-세계시장공황-세계혁명’ 테제”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맑스코뮤날레는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은 경제학비판을 통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의 구체화이며, 이는 ‘세계자본주의-세계시장공황-세계혁명’ 테제로 집약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이미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천명”되었고 “<그룬트리세>(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을 말한다.)의 경제학비판 플랜에서 제시”되었으나, 맑스가 <자본론>에서 자신의 플랜을 완성하지 못함으로써 맑스주의 경제학비판의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 이후 “마르크스주의 주류(스탈린주의 국독자론, 제국주의론 등)는 마르크스의 후반체계를 이론적으로 전개하기보다, ‘단계론’, ‘현상분석’의 대상으로 치부”해 버림으로써 “마르크스의 진정으로 ‘글로벌한’ 접근을 ‘일국자본주의-일국공황-일국사회주의’와 같은 일국적 문제설정으로 대체”시켰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6회 맑스코뮤날레의 슬로건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좌파의 대안’은 식상하고 진부한 상투적 슬로건이긴커녕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슬로건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6회 맑스코뮤날레 슬로건의 취지, 맑스코뮤날레 홈페이지)



대회의 슬로건에서부터 맑스가 아닌 뜨로츠끼가 전면에 등장한다. 마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맑스주의이고 일국을 이야기하는 것은 반(反)맑스주의인 것처럼 말하면서, 세계와 일국을 대치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치야말로 맑스주의의 방법론과는 모순되는 것이다. 비변증법적 사고에 찌든 뜨로츠끼주의자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맑스는 결코 세계와 일국을 대치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변증법적 통일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들은 맑스주의와 무관한 비변증법적 방법론으로 세계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일반(보편)과 일국자본주의(개별)를 분리함으로써 개별을 통해 생생하게 포착되는 맑스주의의 현실 분석을 ‘식상하고 진부한 상투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일국혁명과 세계혁명의 관계 역시 이와 같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내용상으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상 처음에는 일국적이다.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연히 맨 먼저 그들 나라의 부르주아지를 끝장내야 한다.(K.맑스, <공산당 선언>, 『맑스-엥겔스 저작 선집 1』, 박종철 출판사, 2010, p.411)



뜨로츠끼주의자들이 무매개적으로 세계혁명만을 부르짖는 것에 반해 여기서는 세계혁명과 일국혁명의 관계가 결코 대치되고 있지 않으며, 변증법적으로 사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슬로건의 해제에서 언급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주류”라고 짐작되는 레닌(주의)이나 스탈린(주의) 역시 일국혁명과 세계혁명을 변증법적으로 논하고 있다. 레닌은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에서 일국혁명과 세계혁명의 변증법적 관계를, 사회주의를 건설한 국가가 세계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논하고 있다.



경제적, 정치적 불균등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사회주의의 승리가 몇 개의, 심지어는 하나의 자본주의나라에서도 가능하다. 자본가들을 수탈하고 그들 자신의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한 후에 그 나라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의 나머지 ― 즉 자본주의세계 ―에 대항하여 떨쳐 일어나 그 나라들의 피억압계급을 자신의 대의로 끌어들이고, 그 나라들에서 자본가들에 대항하는 봉기를 선동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의 국가와 착취계급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할 것이다.(V.레닌,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 『맑스-레닌주의 민족운동론』, 벼리, 1989, p.149)



(*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이 세계혁명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한 뜨로츠끼주의자들의 왜곡과 날조도 확인할 수 있다. <<김해인, <소위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한 왜곡>, 『맑스-레닌주의와 사회주의의 쟁점(노동사회과학 제3호)』, 노사과연, 2010>>)



이렇듯 레닌(주의)이나 스탈린(주의)이 “일국적 문제설정으로 대체”시켰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맑스코뮤날레의 슬로건이 나오게 된 문제의식 자체가 비변증법적 사고의 결과이고, 따라서 맑스주의 방법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단계론'에 대한 거부 역시 단계와 연속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뜨로츠끼주의 특유의 비변증법적 사고의 결과이다. 역시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독일에서 공산주의당(공산당)은 부르주아지가 혁명적으로 행동하는 즉시 부르주아지와 함께 절대 군주제, 봉건적 토지 소유 및 소부르주아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당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적 대립에 관하여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한 의식을 노동자들에게서 만들어 내는 일을 한시도 멈추지 않는바, 이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지배와 함께 도입할 것이 틀림없는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을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그만큼 많은 수의 무기들로 즉시 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독일에서 반동적 계급들을 전복한 후에 곧바로 부르주아지 자체에 대항하는 투쟁을 개시하기 위해서이다.”(K.맑스, <공산당 선언>, 『맑스-엥겔스 저작 선집 1』, 박종철 출판사, p.432)



뜨로츠끼주의자들은 단계는 비맑스주의적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연속만이 맑스주의적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작 맑스는 연속적인 과정 안에서도 단계를 구분하고 있으며, 단계와 연속을 통일적, 변증법적으로 사고한다. 맑스는 봉건제에 맞서는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를 설정하면서도 부르주아지와의 전면적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의 성장전화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까지의 과정을 연속으로 본다면 그 안에는 여러 단계가 존재하고 각각의 단계의 성격(모순)에 따라 실천의 방향이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 역시 단계와 연속을 변증법적으로 인식하고 모순을 처리해 왔다. 레닌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로 규정하면서 노동자 농민의 계급동맹으로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혁명의 성장전화를 주장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짜리즘이 붕괴되고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레닌은 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로부터 새로운 발전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계와 연속이라는 변증법적 방법론에 바탕을 둔 레닌의 성장전화론이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는 레닌이 단계론을 폐기하고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수용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단계와 연속을 비변증법적으로, 무매개적으로 사고하는 저들만이 할 수 있는 터무니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비(非)맑스주의를 넘어 맑스주의 해체로!



‘자본주의와 가부장체제, 적-녹-보라, 새로운 주체형성’이라는 전체 회의 주제는 6회 맑스코뮤날레의 기조를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주제의 핵심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고정갑희 교수의 논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고정갑희 교수는 놀랍게도 ‘적(노동)-녹(생태)-보라(여성)의 연대’가 아닌 아예 체제에 대한 규정 자체를 변경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고정갑희 교수는 논문의 내용을 “하나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넘어 가부장체제를 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부장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행동철학을 위해 적녹보라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즉, 맑스주의의 핵심적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생산관계의 규정성을 부정하고, 아예 구분의 기준 자체를 바꾸어 ‘가부장체제’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상품생산과 임금노동 중심의 사상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성적 생산과 노동을 전면화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논의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 ‘가부장체제론’을 구축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필자가 말하는 성관계는 마르크스주의의 생산관계에 버금가는 개념이다. ... 성의 생산관계를 논하는 일은 기존의 생산론을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가부장체제는 자본-군사-제국주의적 성체계를 의미한다. ... 가부장체제는 가부장적 성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가부장체제론은 현재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던지기 위한 이론이다.”

“반가부장체제적 행동을 위한 패러다임으로서 적녹보라 ... 적, 녹, 보라라는 개념을 운동과 이론에 끌어들이고 사용하려는 이유는 이론과 현장 사이의 접점 찾기뿐만 아니라 운동들 사이의 접점 찾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문운동 사이의 접점을 찾음으로써 현 사회의 변혁에 한 발 다가가자는 뜻이다. 적-녹-보라의 접점 찾기는 현 시점의 운동(노동, 환경,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장애, 지역)이 각각의 중심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운동과 새로운 운동에 열려 있기 위함이다. 이 점에서 적녹보라는 패러다임의 성격을 갖는다.”(고정갑희, 『가부장체제와 적녹보라 패러다임』, 2013)



고정갑희 교수는 맑스주의의 방법을 통해서는 지금의 체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고 체제를 넘어설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문의 병렬적 나열을 통해 모순을 다면화하고 맑스주의 총체성을 해체한다. 더 나아가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한 맑스의 규정 자체를 폐기한다. 결론적으로, 고정갑희 교수의 맑스주의에 대한 판단이 무엇인지는 고정갑희 교수가 속한 단체인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의 이은숙 활동가가 명확히 한다.



상품 생산의 패러다임으로 산업화 이래의 문제점을 통찰했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은 이제 파산한 것이 아닌가 한다. ... 상품생산관계의 생산과 노동, 그리고 계급 패러다임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가 않고 낡았다. 맑스주의적 노동 패러다임 역시 낡아서 너무나 흐물흐물하다. 근대 패러다임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래서 이른바 근대적 노동 역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이은숙,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새로운 주체형성』, 2013)



“‘적-녹-보 연대’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최초의 학술대회”(김세균, 2013)가 ‘맑스주의의 파산’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른 것이다.





맑스주의를 계승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맑스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계승, 발전, 현재적 해석은 철저하게 맑스주의 방법론에 입각해야 하고 혁명적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맑스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고 해서, 진보와 변혁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다 맑스주의가 아닌 것이다. 일찍이 레닌은 맑스주의의 진정한 계승과 발전이 무엇인지 실천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집적과 집중을 통해 독점자본으로 성장해 갈 것임을 논증한 바 있다. 그러나 맑스가 <자본론>을 집필할 당시 독점자본은 경향적으로만 나타나고 있었을 뿐, ‘독점자본주의 시대’라 할 만큼의 성장을 이루지는 못하던 때였다. 따라서 맑스의 분석은 자본의 독점화에 대한 이론적 분석과 독점자본의 운동에 대한 단초를 제공할 뿐 독점자본 일반에 대한 전면적인 분석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맑스 당시에 독점자본이 아직은 미성숙 단계에 있음으로 인해 발생한 ‘한계’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레닌이다. 레닌은 철저하게 맑스주의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독점자본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고, ‘독점자본주의 시대’, 즉 제국주의 시대의 정치경제학 일반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레닌의 <제국주의론>이다.



나아가 레닌은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에 기초하여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민족전쟁’론에 입각하여 ‘조국방위’를 부르짖었던 제2인터내셔널 내 기회주의자들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조국방위를 부르짖었던 기회주의자들이 맑스의 주장을 기계적으로 인용할 때, 레닌은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단계와 지금(레닌 당시)의 자본주의 단계가 무엇이 다른지, 맑스가 보았던 전쟁과 지금(레닌 당시)의 전쟁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차이에 따라 어떻게 맑스주의적 분석을 행해야 하는지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레닌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혁명적 슬로건을 노동자 인민에게 제시할 수 있었다. 결국 맑스주의에 대한 레닌의 계승과 발전이야말로 1917년 러시아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이론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맑스주의의 계승과 발전, 현재적 해석이라 함은 이러한 것을 말함이다. ‘레닌주의’에 대해 ‘제국주의 시대의 맑스주의’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이 때문이고, 나아가 ‘맑스-레닌주의’가 진정한 노동자계급 해방운동의 사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 맑스주의 해체로 나아가는가



맑스주의 진영 내에서 ‘맑스주의’라는 외피를 쓰고 반(反)맑스주의, 맑스주의 해체 경향이 득세하게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특히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맑스주의의 위기’는 전면화 되었다. 태반이 맑스주의의 파산을 선고하고 운동을 그만두거나 변혁을 포기하고 개량주의로 전환해 갔다. 빈틈을 자율주의, ‘포스트 ㅇㅇ주의’라고 하는 청산주의, 무정부주의가 비집고 들어왔고, ‘변혁’을 내세우는 진영에서는 뜨로츠끼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노동자계급운동의 침체 속에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나마 몇 안 되는 단위만이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올곧게 견지하고 있는 지경이다.



반(反)맑스주의, 맑스주의 해체 경향이 이렇게 팽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부터 기인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라고 얘기했던 뜨로츠끼주의자들에게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가 종파 확산의 기회가 되었겠지만, 쏘련을 사회주의로 알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해 왔던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전망의 상실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부정(*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였다”거나 “근대적인(이미 낡아버린) 프로젝트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에까지 이르면서 맑스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간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순간 사회주의 국가에서 구축된 경제적 성과, 자유 영역의 확장, 사회문화적 성과, 민주주의, 여성해방의 단초까지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맑스코뮤날레’로 조합된 단어의 하나인 ‘코뮤니스트’라는 단어는 ‘과거’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 사회주의 운동 역사에 대한 부정, 나아가 맑스주의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코뮤니스트를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체 개념으로 사용하든, ‘공동체주의자’라는 의미로 사용하든, 맑스주의에 대한 부정이라는 측면에서는 결코 다르지 않다. 저들이 ‘코뮤니스트’로 자임하는 것이야말로 포위와 고립 속에서도 처절한 계급투쟁을 전개했던, 노동자 민주주의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정치형태’를 건설했던 빠리꼬뮌 전사들의 이름을 더럽힐 뿐이다. 맑스주의자임을 자임했거나 자임하는 자들이 저들의 ‘주관적 의지’와는 달리 반(反)맑스주의자로, 맑스주의 해체로 나아가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저들의 사상이 그만큼 맑스주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는 총체적 사상, 방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핵심은 이것이다. 노동자계급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적소유를 철폐해야 한다는 것, 사적소유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통해 생산수단을 사회화(형식상 국유화)함으로써 생산관계를 변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노동자계급의 해방, 인간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력의 문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말하지 않는 그 어떠한 담론, 대안도 맑스주의가 아니다. 아니 반(反)맑스주의, 맑스주의 해체 사상이다! 또한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은 채 생산수단을 사회화할 수 있다는 듯이 얘기하는 모든 것, 그럴싸한 ‘처방’을 가지고 변혁을 이룰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 변혁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마치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펼쳐질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맑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사기 치는 것, 노동자계급의 정신을 지배계급에게 팔아넘기는 범죄다!



지금도 그렇지만, 맑스주의를 참칭하는 ‘사이비 맑스주의자’는 맑스 당시에도 이미 부지기수였다. 이들에 대한 맑스의 일갈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너희가 맑스주의자면, 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다!”<노/정/협>



http://lmagit.jinbo.net/bbs/zboard.php?id=newspaper&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l1=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101



그리고 아래는 원문의 평문들입니다.



보스코프스키 2013-06-03 | 20:53:24



코뮤날레에 맞는 진정한 명칭은 '맑스(주의)해체 코뮤날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김세균 교수는 만 5년도 더 전에 당건설을 한다면서도 엉터리 언사를 늘어놓기도 하였습니다. 아래와 같은 문구처럼요!



노동자-민중권력 창출의 길은 주어진 현실적 조건과 조성된 정세와 계급적 역관계 등에 따라 다양할 수 있겠지만, 어떤 길을 통하든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전면적인 개조와 노동자계급의 전사회적인 헤게모니 확보 및 인민주권기구에서 변혁정당의 민주적 지도력 확보 등이 요구된다.



이 문구의 출처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원출처는 토론문이지만 인용출처주소만 적습니다.





http://newscham.net/news/view.php?board=jinbo_media_16&nid=47025&page=5

& http://lodong.org/board/board.html?mtype=view&page=8&bid=1&num=79&seq=554&replynum=79&shownum=78&key=&searchword=





아따 2013-06-07 | 18:32:07



가부장제와 마르크스주의의 양날개론(?)으로 유명하신 분은 일본의 우에노 치즈코 라는 교수입니다.'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책으로 유명하죠. 1994년 번역되었으니 시기적으로 보면 그러한 양날개론이야 말로 새로운 것도 아닙니다. 사실 이 책은 꽤 유명한데, 조금만 읽어보아도 전혀 맑스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금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우에노 씨는 맑스의 책을 단 한줄도 읽지 않은 것같습니다. 예를 들어, '부불노동'(unpaid work)을 가사노동에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맑스는 국가가 노동력 재생산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인용에 주어가 '개별자본'인데, 그것을 빼고 '국가'로 잘못 이해하신 듯 합니다)

참고문헌을 보아도 엥겔스의 가족국가사적소유의 기원도 안들어가 있습니다.(들어가 있다 하더라도 참고하지는 않았을 듯)내용적으로는 그저 '노동'문제의 나열, '여성'문제의 나열, 이 나열된 게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두 가지다 중요하다 라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맑스주의의 개념은 단 한 단어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뭐 어찌되었던 우에노 씨도 최근 이 책을 다시 내서, 양날개론이 아니라, 다양한 '축'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던 외국(?)에서 이미 나온 것을 새로운 양 포장하는 것도 가당치 않을 뿐 아니라, 전혀 맑스주의와는 동떨어진 것을 '맑스주의'라는 포장을 덧붙이는 것은, 글쎄요, 아직 '맑스'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인기가 있어서일까요? 그래서그런지 우에노씨는 일본에서 전혀 맑스가 인기가 없게 되자, '맑스'는 입밖에도 꺼내지 않게 되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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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73 [노정신 96호] 맑스코뮤날레, 맑스주의 해체의 경연장... 보스코프스키 2013-11-24 2461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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