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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4)
글쓴이 마리오 소사(Mario Sousa, 스웨덴 공산당원) E-mail send mail 번호 175
날짜 2009-04-06 조회수 2510 추천수 149
파일  1276767746_번역.hwp

  













번역











번역: 김해인(편집위원)















[역자의 말: 먼저 여러 차례 연재가 중단되었던 것에 대해 독자 여러분들에게 사과 말씀 드린다. 이번이 연재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리고 본 기관지를 통해 이미 소개되었던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과 ‘1930년대 쏘련에서의 계급투쟁’, 그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마리오 소사의 다른 글, ‘안토니 비버의 책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비평’을 묶어 곧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쏘련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Ⅲ. 쏘련에 대한 거대한 거짓말들










러시아 조사보고서 - 검토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을 개괄해보자. 실제 쏘련 국가 문서고를 조사한 러시아 연구자들은, 지난 50년 동안 자본주의 세계 도처의 학교와 대학들에게 가르쳐 온 것들과는 전혀 다른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 50년의 냉전 시기 동안 몇 세대의 사람들은 쏘련에 대한 매우 거대한 거짓말을 배워왔고, 그것의 자취는 모두에게 남겨져 있다. 이것은 프랑스와 미국의 연구 보고서들에서 몇 가지 방식으로 반영되어있다. 연구자들은 노동 수용소에서의 수용자와 사망자에 대한 수치와 도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들은 심층적이고, 매우 종합적으로 그 수치들을 검토했다. 하지만 일차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심각하게 검토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범죄자들이 어떤 죄로 유죄에 선고되었는지 전혀 보고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쏘련의 수용수를 항상 정치적 억압의 희생자로 여긴다. 이러한 의문은 절대로 연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연구자들이 그 수치들로부터 더 나아가 그 사건들을 논평해야 할 때,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평가에 설설 기며 따라서 그들의 논평 결과는 때때로 완전히 소름끼치는 것이 된다. 쏘련의 형벌 체계에서 형에 선고된 자들 중 대다수가 도둑, 강도, 살인자, 강간범 등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그들 모두를 희생자라고 부른다. 유럽 혹은 미국에서, 언론들은 이러한 범죄자들을 보고, 절대로 대단히 가여운 ‘희생자’들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쏘련의 경우일 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냉혹하게 수차례 강간을 자행한 자들이나 살인을 범한 자들에게 ‘희생자’라고 운운하는 것은 최소한의 염치조차 없는 것이다. 쏘련 법정의 관점에서 ‘일반적인’ 범죄의 경우와 중대한 폭력 범죄의 경우에, 만약 처벌의 유형이 다르지 않았다면, 적어도 형 그 자체는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반혁명










오히려 반혁명분자들의 경우, 그들이 어떤 범죄로 유죄가 되었느냐는 것이 검토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두 개의 예로 시작해서, 이 문제와 관련된 사실들을 보다 상세히 보도록 하자. 우리는 1930년대 초반 유죄에 선고된 꿀라끄들과 1936년부터 38년 시기에 유죄에 선고된 암살자들 및 반혁명분자들을 이 자리에 기소한다.





먼저 러시아 부농인 꿀라끄에 관한 문제로 시작해 보자.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3십8만1천의 꿀라끄 가구, 대략 1백8십만 명이 유형에 처해졌다. 전체 꿀라끄 중 일부가 노동 이주지나 노동 수용소형에 처해진 것이다. 그런데 꿀라끄들은 왜 형벌에 처해진 것일까?





러시아의 부유한 농민인 꿀라끄는 수 세기동안 지독한 억압과 인정사정없는 착취로 가난한 농민들을 지배해왔다. 1927년, 1억2천만 명의 농민 중 1천만 명의 꿀라끄가 유복하게 살고 있었다. 나머지 1억1천만 명의 대부분은 여전히 가난 속에 살고 있었다― 혁명 전, 그들은 늘 가장 깊은 비참함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꿀라끄의 부는 다른 농민들의 충분한 대가를 지급받지 못한 노동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무장 공격










빈농들이 집단농장으로 결합을 시작했을 때, 꿀라끄들의 가장 큰 수입원이 사라졌다. 그러나 꿀라끄들은 포기하지 않고, 기근을 통해 착취를 되살리려고 시도했다. 꿀라끄의 무리들은 집단농장들에 무장공격을 가했고, 빈농과 당관리들을 살해했으며, 집단농장의 곡물 밭에 불을 지르고, 역축들을 도살했다. 꿀라끄들은, 빈농들 사이에 계속된 기아를 야기함으로써 그들의 권좌를 보증해 줄 계속되는 광범위한 빈곤이 확보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살인자들과 살인방화자들의 생각대로 일은 진행되지는 않았다. 빈농들은 혁명에 의해 지지되고 있었으며, 이 시기 꿀라끄들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들은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고, 체포되어 추방되거나 노동수용소형에 처해졌다. 1천만 명의 꿀라끄 중에 1백8십만 명이 추방되었다.





1억 2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쏘비에뜨의 농촌에서 벌어진 이 같은 거대한 계급투쟁에서, 아마 부당한 조치들이 저질러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답게 살아보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식들을 더 이상 굶주린 무지렁이로 살게 하지 않기 위해 싸웠던 가난하고 굶주리고 착취당했던 사람들을, 충분히 문명화 되지 못했다고 또는 그들의 심판이 관대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수백 년 동안 모든 문명화 과정에서 배제되어왔던 사람들을 문명화되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수백 년 동안 가혹하게 착취를 하며, 지배계급으로 있었던 꿀라끄가 언제 가난한 농민들을 문명적으로 관대하게 대한 적이 있었는가?















1937년의 숙청










우리의 두 번째 예는, 당과 군대 그리고 국가기구에서 숙청된 후 1936~38년의 재판에서 유죄에 선고된 반혁명분자들인데, 이들은 러시아 혁명 운동의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짜르와 러시아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볼쉐비끼의 성공적 투쟁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그들 중 상당수가 공산당에 입당했다. 불행하게도 그들 사이에는 프롤레타리아 권력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보다는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입당한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계급투쟁의 상황으로 인해, 많은 경우 새로운 당원을 심사할 시간도 능력도 없었다. 심지어 자칭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 예전에 다른 그룹에 속했던 정치적 반대파들조차 공산당의 당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새로운 당원 중 상당수가 예전 계급투쟁을 이끌었던 그들의 능력 때문에, 당과 국가 그리고 군대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생 쏘비에뜨 국가에게 당시는 매우 힘든 시기였다. 간부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며, 온전히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조차 부족했기 때문에, 당은 새로운 당원들과 간부들의 자질에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들에서 대립은 점차 커져갔고, 당은 사회주의 사회를 향해 투쟁하려는 한 쪽과 사회주의를 실행하기에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사민주의적 정책을 주장하는 다른 쪽의,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졌다. 후자와 같은 생각들의 원류는 뜨로쯔끼이다. 그와 그 주변의 그룹들은 1917년 7월, 공산당에 입당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뜨로쯔끼는 몇몇 지도적 볼쉐비끼의 지지를 얻게 된다. 그들은 볼쉐비끼의 원래 생각에 맞서 연합반대파를 만들었으나, 당 노선을 결정하는 1927년 12월 27일의 당 투표에서 심판되었다. 투표 전 수년 동안, 주요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논쟁이 있었다. 당 투표 결과는 명백했다. 7십2만5천 명의 투표자 중, 연합반대파는 단지 6천표를 얻었다― 당원의 1% 이하만이 연합반대파를 지지했다.





투표 결과에 따라, 그리고 반대파가 당과는 다른 정책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위원회는 연합반대파의 모든 지도적 인사를 공산당으로부터 제명시키기로 결정했다. 반대파를 연결하고 있던 인사인 뜨로쯔끼는 쏘련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반대파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노비예프(Zinoviev), 까메녜프(Kamenev), 그리고 예브도끼모프(Evdokimov)는 곧 자신의 지난 행위를 자기비판했으며, 뺘따꼬프(Pyatakov), 라데끄(Radek), 쁘레오브라줸스끼(Preobrazhensky) 및 스미르노프(Smirnov) 등 몇몇의 지도적 뜨로쯔끼주의자들 역시 그렇게 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 모두는 당원자격, 그리고 당과 국가 내에서 역할을 다시 얻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자기비판은 솔직한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쏘련에서 새롭게 계급투쟁이 강화되는 매 시기마다, 잘 알려진 연합반대파 인사들 대부분은 반혁명의 편에 서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1937-38년의 판결 전까지, 수차례 당원자격이 박탈되었다가 회복되길 반복했다.





1934년 12월, 레닌그라드 당의장이자 중앙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동지 중 한 사람인 끼로프(Kirov)가 암살되었고, 이로 인해 당의 지도와 국가의 통치권을 폭력적으로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던 비밀조직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1927년 투표를 통해 정치 투쟁에서 패배한 그들은, 이제 국가에 맞선 조직적 폭력을 통해 이 투쟁에서 승리하려고 하였다. 그들 조직은 전국 곳곳의 당과 군대 그리고 국가기구에 불순분자들을 심어놓았다. 그들의 활동은 산업 사보타지와 테러, 그리고 부정부패에 집중되었다. 그들의 위대한 교시자인 뜨로쯔끼는 해외에서 이 모든 일들을 조종했다.















산업 사보타지










산업 사보타지는 쏘비에뜨 국가에 파괴적이었다. 그것은 이중으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게 했다. 예를 들면, 비싸게 수입한 기계들을 파괴했고, 폐기시켜버렸으며, 그래서 광산과 공장에서는 막대한 생산 감소가 일어났다.





1939년에 이러한 당시 상황을 기술한 사람이 있는데, 미국인 엔지니어 존 리틀페이지(John Littlepage)이다. 그는 쏘비에뜨에 의해 고용된 광업부문 외국인 전문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리틀페이지는 1927년부터 37년까지 10년 동안 쏘비에뜨의 광업부문, 그 중에 주로 금광에서 일했다. 그의 책 ��쏘련의 금을 찾아서��(In Search of Soviet Gold)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사상과 책략들에는 관심이 없었고, 가능하면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쏘련에서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공부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스딸린과 그의 측근들이, 당에서 쫓겨난 적이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아채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또한 그의 경험에 비추어보아,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광범위한 산업 사보타지를 이용한 해외에서 지도된 음모가 있었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는 확실한 것이라고 썼다. 1931년 우랄과 까자흐스딴에 있는 구리ㆍ납 광산에서 근무할 때, 그는 이미 이러한 사실들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 광산들은 거대한 구리-납 트러스트에 속해 있었고, 그곳의 최고 책임자는 중공업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인 뺘따꼬프였다. 광산의 상황들은 생산의 측면에서 보나, 노동자들의 복리 측면에서 보나 파국적이었다. 그 때 그는, 사보타지가 구리-납 트러스트의 최고위층으로부터 조직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존 리틀페이지의 책은, 뜨로쯔끼 반대파가 반혁명활동에 사용한 자금들이 어디에서 왔는가는 의문점을 해결할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비밀 반대파의 개개 구성원들은 외국의 어떤 공장으로부터 기계들을 구입할 것인가를 추천하는, 쏘련에서의 자신들의 직권을 이용했다. 그들은 질 낮은 상품들을 가장 높은 가격에 구매했다. 외국 공장주들은 차액을 해외에 있는 뜨로쯔끼 조직에 주었다. 그리고 쏘련에 있는 공모자들에 의해, 쏘련 정부는 계속 같은 공장에서 상품을 구입했다.















절도와 부정부패










1931년 봄 베를린에서, 리틀페이지는 광산에서 사용하기 위한 산업용 리프트를 구매하는 큰 계약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이러한 사실들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러시아 대표단은 뺘따꼬프가 이끌고 있었고, 리틀페이지는 주문한 리프트들을 점검하고, 승인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그 리프트들이 쏘련의 광산에서 쓸 수 없는 조야한 품질의 부정품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뺘따꼬프와 다른 쏘련 대표단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폭로했을 때, 그들은 냉담하게 반응하며 이런 저런 변경과 핑계를 대며, 그에게 그 리프트들을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것을 거부했다. 그는 당시에는 이것이 리프트공장으로부터 뒷거래로 돈을 받은 대표단 사람들의 개인적 차원의 부정부패 문제라고 믿었다. 1937년 재판에서 뺘따꼬프가, 뜨로쯔끼 반대파와의 관계에 대해 자백한 후,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이 개인적 차원의 부정부패보다 훨씬 더 거대한 어떤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뒷거래로 받은 돈은 사보타지나 테러, 뇌물, 그리고 프로파간다 등 쏘련에서 비밀 반대파의 활동에 쓰일 예정이었던 것이다.





서방의 부르주아 매스미디어에서 그토록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노비예프, 까메녜프, 뺘따꼬프, 라데끄, 스미르노프, 똠스끼(Tomsky), 부하린(Bukharin) 그리고 또 다른 자들은, 쏘비에뜨 인민과 당으로부터 부여된 직무를 이용하여, 해외에 있는 사회주의의 적들이 쏘련의 사회주의 사회를 흔들고, 쏘련 내에서 사보타지를 일으키고, 쏘련에 맞서 싸우는 데 사용하기 위한 자금을 국고로부터 훔친 자들이었던 것이다.















쿠데타를 위한 계획










절도, 사보타지, 그리고 부정부패 같은 종류의 범죄만으로도 심각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파의 활동은 그보다 훨씬 더 전개되어 나갔다. 반혁명음모는 전체 쏘비에뜨 지도부를 제거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탈취하려는 준비를 진행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모든 저명한 인물들을 살해하는 것이 이 음모의 핵심이었다. 쿠데타의 군사적 계획은 뚜하쳬프스끼(Tukhachevsky) 원수의 지휘 하에 있는 장군들의 그룹에서 실행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스딸린과 쏘련에 관한 다수의 책들을 집필한 뜨로쯔끼주의자인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에 따르면, 쿠데타는 끄레믈린에 대한, 그리고 모스끄바와 레닌그라드 같은 대도시들에 주둔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부대들에 대한 군사 행동으로 시작될 것이었다. 또 그에 따르면, 이 음모는 뚜하쳬프스끼와 함께, 군(軍) 정치 꼬미사르의 수장이었던 가마니끄(Gamarnik)와 레닌그라드의 사령관이었던 야끼르(Yakir) 장군, 모스끄바 군사학교의 사령관이었던 우보레비취(Ouborevitch) 장군 그리고 기병 부대의 수장 중 한 명이었던 쁘리마꼬프(Primakov) 장군 등이 이끌 것이었다.





뚜하쳬프스끼 원수는 이전 짜르군 장교였으며, 혁명 이후에 적군(赤軍)으로 전향했던 인물이다. 1930년 군 장교의 약 10%, 대략 4천5백 명 정도가 전 짜르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들의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결코 버리지 않았고, 말없이 조용하게 있으며 싸움을 기다렸다. 반대파들의 쿠데타 준비와 함께,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볼쉐비끼들은 강했다. 하지만 민(民)과 군(軍)으로 이루어진 음모자들은, 힘 있는 동지를 얻었다. 1937년 공개 재판에서 부하린이 자백한 바에 따르면, 해외에 있는 뜨로쯔끼 반대파들은, 쏘련에서 반혁명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 나찌독일에게 광대한 영토를, 특히 다른 무엇보다도 우끄라이나를 할양한다는 협정을 나찌독일과 맺었었다. 이것은 반혁명에 대한 지원 약속으로, 나찌독일이 요구한 대가였다. 부하린에 따르면, 그는 이 일에 관하여 뜨로쯔끼로부터 지시를 받은 라데끄에게서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들 음모를 꾸민 자들 모두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그 사회를 이끌고, 운영하고, 지키라고 고위직으로 선출된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이렇게 하는 대신에 그 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에 종사했다.





우리는 더욱이 이 모든 일들이 1930년대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때는 나찌의 위협이 눈사태처럼 커져가고 있을 때이고, 나찌 군대가 유럽을 전쟁의 포화로 밀어 넣고, 쏘련 침공을 준비하던 때였다. 음모를 꾸민 자들은 공개 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에 선고되었다. 사보타지, 테러, 부정부패, 살인 모의, 그리고 나찌에게 영토의 일부를 넘겨주려고 했던 것, 이러한 범죄들에 적합한 판결은 다른 것일 수 없었다. 그들을 “희생자”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조작된 숫자










이와 관련해서, 로버트 콘퀘스트가 말하고 있는 적군 내에서의 숙청에 관한 서방의 프로파간다가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그는 ��거대한 테러��(The Great Terror)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37년 적군 내에는 7만 명의 장교들과 정치 꼬미사르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약 50% 그러니까 1만5천 명의 장교들과 2만 명의 꼬미사르들이 정치 경찰에 의해 투옥되어, 총살당하거나 여생을 노동수용소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 책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또한 콘퀘스트의 주장에는 하나의 진실조차 없다.





역사학자인 로저 리즈(Roger Reese)는 그의 논문 「붉은 군대와 대숙청」(The Red Army and the Great purge)에서, 이 문제에 대해 사실을 제시하며, 1937-38년의 숙청이 실제 군대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적군의 육군․공군의 지휘관들, 즉 장교와 정치 꼬미사르의 숫자는 1937년 144,300명이었고, 이 숫자는 계속 증가해서 1939년 초에는 282,300명이 되었다. 1937-38년 숙청 기간 동안, 34,300명이 정치적인 이유로 쫓겨났다. 그러나 1940년 5월을 보면, 그 중 11,596명이 이미 복귀해서 자신의 부대에서 다시 근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937-38년 숙청 기간 동안 군대에서 22,705명의 장교와 정치 꼬미사르(13,000명의 육군 장교, 4,700명의 공군 장교, 5,000명의 정치 꼬미사르)가 쫓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콘퀘스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체 장교와 꼬미사르의 50%가 아니라, 7.7%이다. 이 7.7% 중 일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반역죄에 선고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역사 기록들은, 그들 중 대부분이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1937-38년 재판은 기소된 자들에게 공정했는가?





부하린 재판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비밀 반대파에서 활동한 최고위 당관료였다. 당시 모스끄바 주재 미국 대사는 조셉 데이비즈(Joseph Davies)였는데, 그는 평생을 재판으로 법정에서 보낸 유명한 변호사였다. 그에 따르면, 부하린은 재판이 진행되는 전 과정 동안 자유롭게 이야기했으며, 아무런 제재 없이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주장했었다.





조셉 데이비즈는 워싱턴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재판에서 밝혀진 사실들은 기소된 자가 “입증된 범죄들로” 유죄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매우 심각한 음모가 일어났다는 것을, 확실한 증거들이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재판을 참관한 외교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역사로부터 배우자!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의 형벌 제도를 검토하는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이에 관한 사실을 조작한 기사와 책들이 수천 권이나 나오고 있고, 수백 편의 조작된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다.





이런 사실은, 부르주아 언론에서 나온 사회주의에 관한 역사들이 대부분 가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익들은 언론,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통해서 사실을 왜곡하고, 대중들을 혼란시킬 기회를 가져왔고, 이를 통해 상당수의 대중들이, 새빨간 거짓말을 진실로 알고 살아가게 만들었다. 특히, 역사와 관련된 문제들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우익들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역사들은, 그 역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기까지는 일단 거짓으로 가정해야 한다.





이런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사실, 우익들은 러시아 조사보고서들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0년 내내 들어왔고, 지금은 완전히 폭로된 거짓말들을 계속해서 퍼뜨리고 있다. 우익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거짓말은 몇 번이고 계속 반복되어, 끝내 진실이 되었다. 러시아 조사보고서들이 서방에서 출간되기 시작한 뒤, 여러 나라들에서 이에 맞선 출판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출판물들의 유일한 목적은 러시아 보고서들과 싸우는 것, 그리고 낡은 거짓말들을 다시 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시종일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책들 천지이다.





우익들의 거짓말들은 오늘날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거짓말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어떤 다른 대안도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에 맞선 더러운 전쟁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이 미래에 위한 대안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저들은 새로운 출판물에서도 낡아빠진 거짓말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사회주의적 역사관을 가지라는 거대한 요구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거짓말에 맞서기 위해, 공산주의 신문을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신문으로 만드는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계급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까운 미래에 새로운 힘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끝)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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