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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한 사회주의 나라를 방문하기(2)
글쓴이 리처드 레빈스(Richard Levins) E-mail send mail 번호 174
날짜 2010-06-13 조회수 2503 추천수 123
파일  1276427266_리처드 레빈스.hwp

  













한 사회주의 나라를 방문하기











리처드 레빈스(Richard Levins)1)





번역: 문영찬(편집위원)















[역자 주: 이 글은 리처드 레빈스가 쿠바를 방문하면서 느낀 여러 가지 사항을 적은 것이다. 이 글은 단순한 방문기라기보다는 현실의 한 사회주의 나라를 관찰하면서 우리가 그로부터 사회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쿠바의 현실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반동의 시대라는 현상황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를 받을 수 있다. 이 글은 ��Monthly Review�� 61권, 11호(2010.4.16)에 실린 것을 번역한 것이다. 5월호와 6월호 두 번에 걸쳐 싵는다.]















간극










모든 사회들과 제도들에서 선언된 이상들과 실제의 실천 간에는 간극이 있다. 사제들은 죄를 짓고 경찰관들은 범죄를 범하고 불교도 장군들은 사회에서 전쟁을 초래한다. 하나의 간극은 불가피하고 필연적이다. 만약 이러한 간극이 없다면, 모든 것이 의도된 대로 정확히 작용한다면, 이것은 상상력과 열망의 끔찍한 결여의 증거일 것이다. 명백히 우리는 실천을 악화시킴에 의해서가 아니라 열망들을 제기함에 의해 그 간극을 유지하려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지배계급은 공공의 소비를 위한 이상들을 선언해야만 하고 이 이상들이 완전하게는 아닐지라도 충족되고 있다고 확신시켜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 간극은 사회적 통제를 위해 구성된다.





브레즈네프의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라는 주장은 사실상, “이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더 이상의 것은 없다. 더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관념적이다. 따라서 입을 다물어라.”라고 주장함에 의해 그 간극을 지우려 시도하였다. 기독교 내부의 하나의 견해는 그 이상들을 신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고 그것들에 이르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인간의 불완전함 혹은 원죄로부터 오는 것으로 봄에 의해 그 간극을 인정한다. 교회 자체 혹은 그것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이상대로 살지 못할 때조차 이것은 교회의 필요에 대한 증거로서 취급된다.





나 자신의 경험을 보면, 어느 일요일 아침에, 십대 초반인 내가 나의 아버지에게 나의 첫 번째의 공산주의 조직을 찾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좋다. 그러나 공산주의 조직이 공산주의 사회를 흉내낼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마라.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혁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혁명가들이 직면하는 불가피한 모순들의 하나이다.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것이고 영감을 줄 뿐만 아니라 종종 실망시키기도 하는 과정이다. 그것의 기술은 모두 불가피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의 결점들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들의 원천들을 분석하고 그리고 그것들에 맞선 투쟁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로서 보다는 혁명적 과정의 부분으로서 그것들에 맞서 싸우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모순을 구성하는 하나의 길은 이중적 방식으로 “오류들”만이 아니라 심지어 사회주의의 범죄들을 보는 것이다: 그것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왜곡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사회주의의 왜곡들이다. 하나의 유추는 식물의 질병들의 그것이다: 옥수수 얼룩은 옥수수가 아니라 옥수수의 질병이다. 그러나 그것은 호박이 아니라 옥수수의 질병이다.





첫 번째의 주장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와 동떨어져 있고 그리하여 실제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의 기치 하에 발생했던 많은 무시무시한 것들의 뜻밖의 각하를 초래할 수 있다. 폴 포트? 베리야? 카예타노? 그들은 어쨋거나 실제적으로 결코 우리와 함께 한 것이 아니었다. 이 변형은 또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서 합리화하는 것을 초래한다. “당신은 계란들을 깨지 않고서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는 익숙한 변론은 계란들을 깨는 것이 오믈렛을 만들고 그리고는 그 계란을 깨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전투성의 표시라는 환상이 된다. 우리는 깨끗하게 되고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객관성”과 “필연성”이 냉소적인 도구주의2)의 망토가 된다.





두 번째의 주장은 그 자체로, 퇴각을 초래할 수 있는데, 즉, 사회주의는 불가피하게 공포를 초래하는 소박한 환상이며 따라서 당신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을 초래할 수 있다. 혹은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개인적으로 배반당하고 환멸을 느끼고 그리고 반대편에 가담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발견을 초래한다. 많은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자들이 이 길을 걸었다. 두 개의 한 측면에 치우친 해석들은 냉소주의로 끝난다.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결정적인 쟁점이다. 정확하고 명백한 오해 때문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이해를 열기 위하여, 떠오르는 사회주의들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인권이라는 이유에서 쿠바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평가들은 그들이 참고하는 인권에 대한 세계선언에 대하여 매우 선택적이다. 그들은 음식, 물, 교육, 의료, 성평등, 문화에 대한 대중의 접근, 스포츠, 그리고 노후의 안정 같은 것들을 포함하여 초보적인 필요들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권리와 같은 것들을 대개 인정하지만 그러나 재빨리 넘어가고 이것들을 정치적 권리들에 비교하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강등시킨다. 그리고 정치적 권리들의 결여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우리 자신의 형식적 권리들을 민주주의의 유일한 합법적 수단으로서 여긴다. 쿠바에 대한 그들의 반민주주의적 모델에 대한 봉사로써, 그들은 “피델이 권력을 그의 형제인 라울에게 넘겼다”는 것과 같은 것들을 말한다―실제로 일어났던 것은 유고된 국가평의회 의장으로부터 부의장으로 합법적인 승계였다.





쿠바에 대한 비평가들은 무지에 기초하여 선거의 결여에 대해 판에 박히게 헐뜯는다. 물론쿠바에는 학교 어린이들과 투표 면제자들에 의해 감시되는 비밀 투표에 의한 선거들이 있다. 피터 로만의 연구들은 우리의 선거와는 매우 다른 선거 과정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설명이다: 그 선거들은 비당파적이지만 유일당은 아니다(공산당은 후보를 내지 않는다. 비록 많은 후보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일지라도). 시의회 대표의 지명들은 공개된 이웃 간의 모임들에서 이루어지고 투표는 2-8명의 후보자들 중의 한 명에 대해 행해진다. 그 경우들 중에서 약 10%는 누구도 투표의 50%이상을 얻지 못하고 상위 2명의 후보자들 간에 결승 투표가 행해진다. 캠페인들, TV 광고들 혹은 인터뷰들이 없고 단지 1페이지의 각 후보자들의 경력이 있을 뿐이다. 쿠바인들은 당신이 부유할 필요가 없고 혹은 부유한 친구들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랑한다.





더 높은 수준들(지방적 그리고 전국적)에서는 후보자들은 지명 위원회들에 의해 심사된다. 진술되는 목적은 각 선거구의 광범한 대표성을 확보하고 전문적 식견이 모든 논쟁들을 알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국민의회가 가능한 모든 영역들의 대표들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영역들”은 직업들, 기술들, 나이들 등을 의미하지 정치적 사상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들, 아프리카계 쿠바인들, 그리고 젊은이들의 대표성이 증가되었다는 것이 가장 최근의 선거들에서 주요한 업적들로 간주되었다. 전체 과정은 자본주의 하의 전국적인 정치적 선거라기보다는 직업적 집단들에서의 선거 혹은 우리의 지역적 식량 협동조합에서의 선거와 같은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선거를, 정보를 잘 파악하고 잘 조직된 다양한 그룹을 선택하는 과정으로서 본다면 그 체제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신이 선거를 사상들의 전장으로 본다면, 그것은 끔찍하게 결함이 있는 것이다.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출마하거나 심지어 선출되는 것에 법적인 장애가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선거들은 참여와 투표가 국민투표의 하나의 종류라는 의미를 제외하고서는 사회주의 내에서의 것이지 사회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인민은 참가율과 비어있거나 혹은 훼손된 투표를 불평의 수단으로 본다. 이 수단에 의해 반대가 10% 못되게 나오는데 비록 당원 친구들은 나에게 그들의 판단은 20%에 가깝다고 말해주었지만.





국민의회는 그것의 반년간의 회기 동안에 매우 적은 법안들을 다룬다. 특정 선거구에 이로운 법안들(pork-barrel bills: 특정 의원의 선거구민에 대한 인기를 의식하여 행해지는 법안들―역자), 정부를 당혹하게 하기 위해 도입되는 입법, 혹은 너무 광범하여 대표들이 그 내용을 읽지도 못하고 그것들에 투표해야 하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주요한 법안이 투표가 되기까지는 그것은 국민의회의 위원회들, 선거구민과의 모임들, 그리고 관련된 조직들과의 협의들을 통과하여 돌아야 한다. 대의원들은 적어도 그것이 투표되기 20일 전까지 법안을 받는다. 법률들은 대개 만장일치로 승인된다. 의심을 품는 관찰자에게는 이것은 어딘가에서(당에 의해? 국가의 수장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결정들에 대한 유순한 의회에 의한 요식적인 고무도장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입법과정은 사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피터 로만은 2006년의 농업법의 발전을 추적함에 의해 국민의회의 활동을 연구했다. 그 법률의 발의는 소농연합인 ANAP로부터 나왔다. 2008년에 남성에게는 60에서 65세까지, 여성에게는 55에서 60세까지 은퇴 나이를 제기하는 새로운 사회보장법이 노동운동에 의해 조직된 85,301개의 모임에서, 그리고 3,085,798명이 참가한 가운데 토의되었다. 이들 중에서 90개의 의회들과 28,596명의 성원들이 그 법에 반대하여 투표했다. 성교육 센터가 선두에 선 쿠바여성연합은 지금은 많은 종류의 가족들을 인정하고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그리고 트랜스젠더의 권리들을 강화하기 위해 가족법을 개정하는 일을 작업하고 있다. 대의원 마리엘라 카스트로는 다가오는 회기에 입법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쿠바 정부의 구조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로 진화해 왔고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창출은 복잡한 과정이다. 그것의 결함들과 풀리지 않는 문제들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부터의 일탈로서 보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것이고 그 자신의 목표들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다. 풀리지 못한 문제들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정치적 지도력과 연합된 생산자들. 국민의회의 성원은 전일적인(full-time) 직업이 아니다. 대의원들은 정규적인 직업을 갖고 있고 만약에 그들이 지명되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많은 지역 조직들에 참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매우 부득이하게 당분간 그것을 맡는 것이고 그들을 도와주는 참모들도 없다. 많은 가정에서 노동의 성별 분업이 남아 있는 사회에서 이것은 특히 여성을 위한 문제이다. 그 위치는 어떤 특권도 없다. 대의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어떤 문제가 지금 풀릴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것일 때, 그것은 매우 벅찬 것이고 그리고 종종 실망스러운 것이다. 매우 높은 전환율(turnover rate: 대의원들이 연임을 하지 않는 비율이 높다는 것―역자)이 있는데 인민이 연임하게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요구수준이 높고 비판적인 선거구민 때문이다.





국민의회에서는 그들의 이웃들과 그리고 의회가 연관되는 다양한 문제들의 전문가들이라는 두 개의 공동체 사람들과 강력한 끈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두 개의 목표들은 동일한 사람들에 의해 충족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종종 그들의 영역들에서 전국적 지도자들이다. 대중 교육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사회에서는, 전문적 의견에 매우 큰 가치가 놓여지는데 그것은 조직들의 수장들을 지명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리하여 인민의 의회는 대부분 노동자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지도자들로 구성된다. (어느 정도는 대의원들의 절반 이하, 대개는 또한 시대의원들인 사람들, 노동자들인 사람들)





“그들과 우리”라는 관계로, 지도자들을 평당원들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보는, 방문하는 미국인들에게는, 이것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지도자들과 평당원들 간의 생활조건과 사상에서의 간극은 그 과정의 민주적 성격을 침식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특별한 시기(the Special Period: 영어의 문자가 대문자로 시작하는 이유는 고유명사임을 말하는데 즉, 쏘련 붕괴 이후 고난의 시기를 가리킨다―역자)에 지도자들과 선거구민들 간의 분할을 따라서는 아닐지라도 불평등이 쿠바에서 확대되었다. 어느 쪽인가 하면, 새로운 부유한 사람들은 마이애미에 있는 친척들로부터 돈을 받는 사람들, 호텔 혹은 그들이 달러에 접근할 수 있는 외국 회사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혹은 허용된 새로운 소규모 장사를 하거나 비공식적인(암시장) 경제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만약 필요한 전문적 식견을 가진 전국적 지도자들이 항상 그들의 지구와 평당원들에게 연계되어 있지 않다면, 그들은 그 이유 때문에 알려질 수 없거나 혹은 선거구민의 다수와 연계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일부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하여 많은 유럽의 선거들에서처럼 이러한 모순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투표자들은 개인적 후보자들보다는 지명된 후보자 명부에 투표하도록 격려된다. 이 사람들은 지명 위원회들에 의해 그들의 전문적 식견에 대해 검증되었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비판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은 배제될 것같다.





쿠바의 사상은 자신의 사회를 광범한 참여와 합의를 위한 노력을 통해서 점차 민주적으로 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가장 저학년에서부터 어린이들은 반 대표들을 선출하고 그리고 모든 대중조직들에서 지도자는 선출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협의 과정은 정부와 시민사회 간의 구별을 침식하는데, 레닌이 예견했던 “국가의 사멸”에 대한 예기치 않은 왜곡이다. 모든 대중 조직들을 사회의 기관으로 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피터 로만은 국민의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의회(Asambles Nacional del Poder Popular or ANPP)는 다섯 가지 원칙의 기초 위에서 작동한다. 첫째, 그것은 쿠바 사회의 대표이어야만 한다. 이리하여 국민의회의 권한 아래에 사회의 모든 영역들과 경제, 농업, 건강, 교육, 스포츠, 그리고 다른 영역들을 포함하는 생활의 영역들 출신의 대의원들이 있다. 둘째로, 인민과의 긴밀한 접촉과 연계가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대의원들의 거의 절반이 또한 시의회 대표단이 됨에 의해 대부분 달성된다. 셋째로, 그것은 제안된 입법에 관하여 그리고 후보의 목록을 결정하기 위하여 선거구민들, 대의원들, 전문가들, 이해관계가 있는 당들, 정부 관리들, 쿠바 공산당(Partido Cominista de Cuba 혹은 PCC), 쿠바 노동자 연합(Central de Trabajadores de Cuba 혹은 CTC), 그리고 대중조직들과 협의하여야만 한다. 넷째, 그것은 조직된 반대 혹은 체제를 공격하는 반대로서가 아니라 제안된 입법 내에서의 쟁점과 같은 토의 하에 있는 조치들에 관하여 반대의 표현을 허용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섯째로, 그것의 목표는 전원 회기에 조치들을 제출하기에 앞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차이들을 조화시키는 것이다3).










지역적 조직들과 보다 높은 기구들 간의 관계는 매우 다양하다. 나의 친구 중의 한 명은 그의 작업장에서 그의 공산당 (nucleo)의 비서에 대한 선출을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말하기를 그 자리는 보다 높은 기구들로부터 과제들에 대한 지시를 전달하는 것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인 한 외교관은 그의 외교적 임무에서 그 이 대부분 그 임무의 과제들을 논의하고 정책들을 논의할 시간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내가 이것을 또 다다른 작업장에서 친구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은 분개했다. 그들의 은 언제나 정책들을 논의했고 노동자들의 필요에 대한 무시 때문에 그 기업의 책임자의 제거를 요구하는 것을 이끌었다. 나는 또 다른 한 작업장에서 그 의 성원들과의 논의에 참가했는데 그들은 전국모임에서 발전에 대한 그들의 생태학적 접근을 어떻게 제출할 것인지를 계획했고 “선진적인” 기술에 매혹되어 생태학을 신화적인 황금시대에 대한 향수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반대를 예견하고 있었다. 한 학생은 로큰롤에 대하여 그의 중학교 학급에서의 논쟁을 나에게 묘사해주었다: 쟁점은 당신이 음악을 개업자들(변호사나 의사 등의 개업 자영업자들을 가리킴―역자) 생활스타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가였다.





그것들의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쿠바 정부의 형식적 구조는  연합한 생산자들에 의한 사회의 운영에 적합하다. 제한하는 요인들은 형식적이라기보다는 이념적이다. 이것들 중에 첫째는 다음과 같다: 미합중국 측에서의 침략적인 호전성의 세 세대에 대한 반응에서 봉쇄의 정신상태. 이것은 쿠바의 삶에서 결여와 비효율성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실제적인 살아 있는 요인이다.





B. 동일성과 차이. 두 번째의 풀리지 않는 문제는 쿠바의 역사가 혁명가들 사이에서의 분열에 의해 파괴되는 혁명적 봉기들의 사례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우 높은 우선성이 통일에 두어졌는데, 그것은 적대적 행동과 불일치 간의 구분을 언제나 하는 것은 아니며 그리하여 의견의 첨예한 차이들을 표현함에 있어서 소심함을 조장한다. 봉쇄에 대한 군사적 은유가 널리 퍼져 있다. 하바나의 한 게시판은, 특별한 시기에 공통되는데, 제복을 입은 피델의 초상과 “사령관이여 명령하라(commandante, ordene!)”이라는 슬로건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확실히 비판적 사고를 고무하지는 않았다.





피델 카스트로는 많은 방식으로 언급된다. 그의 은퇴 전에 언론은 국가평의회 의장 그리고 각료회의 의장 그리고 당의 제 1비서라는 그의 일련의 호칭을 제출했다. 그는 지금은 혁명의 지도자로 언급된다. 피델의 쿠바에서의 역할은 이중적인데 혁명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나라의 가장 유능한 정치가로서이다. 그러나 전자의 역할이 지배적이고 비판을 단념시킨다. 그것은 또한 고정관념, 슬로건 내걸기 그리고 판에 박힌 찬성의 표현을 고무한다. 가장 불쾌감을 주는 것은 매우 어린 아이들이 아마도 스스로 써본 적도 없고 그리고 아마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들을 말하면서 읽는 Tribunas del Puelo의 연설들이다.





단결을 우선하는 것은 논쟁에 제한을 설정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너무 부정적으로 보임에 의해 주변화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의 말이 진지하게 귀기울여지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리하여 승진을 위하여 혹은 “사회에 대한 공헌”을 하는 사람들에게 수여되는, 부족하게 공급되는 특별히 탐나는 물품들에 대한 접근을 위하여, 건너뛴다. 존경받는 지도자들에 대한 복종은 종종 휘파람 부는 것을 제지한다.





나는 한 참가자가 다음과 같이 암송함에 의해 참가를 조롱하는 한 포럼에 참가했었다:





나는 참가한다.





당신은 참가한다.





그와 그녀는 참가한다.





우리는 참가한다.





그들이 결정한다.





이것은 일반화로서는 공정하지 않은 것이지만 하향식 결정과정의 문제를 확인시켜 준다. 진보주의자들은 “상향식” 결정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하향식”에 대해 혐오를 갖고 있고, 종종 동일한 것인데, 탈중앙집권화된 권력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중앙집권화된 것에 대해 혐오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침해하는 것 외에 우리는 중앙집권화를 비판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곳에서 단일한 지배를 적용하려고 시도함에 의해, 비판에 대한 책임성의 결여에 의해, 각각의 상황의 특수성들, 필요들 그리고 가능성들을 고려하지 못함에 의해, 종종 잘못된 결정들을 초래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들의 커다란 창의성과 개인들의 재능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한 것의 독특함은 중앙집권화를 주장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현장을 중시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좋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는 종종 이윤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기업들로서 행동하는 집단들을 초래했다.





농업에서 중앙집권화의 비판은 또한 산업적 규모에서 단일재배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확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완전한 소유의 범주, 토지를 매각하는 권리를 갖고 그것이 어떻게 이용되는가를 결정하고 그리고 그것의 생산물을 처분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동일한 사람의 수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 하에서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회들에서는 토지가 공동체에 속하고 그러나 때때로 주기적으로, 그들의 필요 혹은 그것을 이용할 능력에 따라서 가구들 사이에서 생산을 위해 나누어진다. 다른 사회들에서는 하나의 가구가 경작권을 갖고 있고 또 다른 가구가 목초지를 이용할 권리를 갖고 있다 등등. 농사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함에 있어서, 우리는 계획, 경작, 그리고 보수의 단위들을 구분해야 한다. 계획의 단위들은 계획들이 관련되는 규모들에 의존한다. 분수령은 물과 노동에 대한 그들의 계절적 필요들에 따라 선택되는 수확들 그리고 인구의 소비와 영양상의 필요를 지지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다양성 등의 어떤 목적을 위한 자연적인 단위이다. 경작지의 바람직한 규모는 수확물의 종류와 해충의 이동성에 더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나는 고구마 밭이 약 40미터 넓이이어야 하고 바나나 밭과 인접해야 한다고 권하는데 왜냐하면 바나나 밭에 살고 있는 사자개미들이 고구마 밭을 돌아다니고 그리고는 자라고 있는 괴경들 주위로 이동하여 둥지를 틀고 고구마 바구미를 쫓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보수의 단위는 수확되는 농작물의 가치에 의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수확물의 식량 가치와 경제적 가치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토지가 이웃들의 토지에서 생산을 증가시키고 혹은 학교 점심에 봉사하기 위하여 그들의 수입의 일정 부분을 희생하라고 농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똑같이 어려운 노동에 대해 똑같이 보수를 주기 위하여 생산 단위들 사이에서 수입의 일정한 재분배가 있어야만 한다. 명백히 필요한 것은 다양한 수준들에서 문제들의 규모들에 따라서 계획하는 것이다.





지방과 보다 높은 기구 간의 권위의 적절한 분할은 추상적으로 해결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존하는 것이다. 한번은 1960년대에 반바티스타 투쟁에서 여러 해의 경험이 있는 여자 재봉사인 나의 한 쿠바인 친구가 닭을 키우는 농장을 이끌 것을 요청받았다. 그녀는 어떤 처방들을 넘어서서는 닭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러나 당시 그녀는 좋은 피임명자였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녀가 생산을 사보타지 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상부로부터 상세한 지시사항들을 받았고 그것 모두를 환영했다. 당시에는 훈련된 사람들의 결여가 중앙집권화의 해악을 적게 했다. 그러나 때때로 지시사항들은 무의미하게 될 수 있다. 중앙계획이, 그것이 다양성의 대등함을 의미할 수 있을 때, 조건들에 관계없이 각각의 장소에 대해 한결같은 처방을 의미한다는 환상이 있다.





중앙계획의 작은 면은 유사하게 의약에서 나타난다. 각각의 환자가 상이하고 그리고 의사가 환자를 육체적 검사, 역사, 무릎 테스트 그리고 대화에서의 느낌을 결합시키는 전체적인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의사들은 지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또한 진실이다. 그들의 전형적인 실수들은 경험의 결여로부터 나오는데 특히 일반적이지 않은 질병이 그러하다. 먼 거리에 있는 전문가들과 협의는 젊은 임상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전형적인 실수는 실험실로부터의 발견의 목록들에 의해 혹은 각 환자의 미묘한 독특함을 놓치는 임상의의 보고서들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다. 두 종류의 지식을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가가 추상적으로 풀릴 수 없는 1차 진료를 위한 주요한 쟁점이다.





예를 들면 야구아자이라는 도시가 1995년에 건강을 둘러싼 그것의 전체적인 발전 전략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넓게 정의되었는데 그리고 곧 그들은 주거, 나이구조, 병적 상태, 그리고 정신상태, 이용할 수 있는 의료, 기능장애 가족들, 그리고 공동체의 삶의 다른 측면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다양한 전국의 성(省)들로부터 전문가들을 데려왔는데 외부에 보여주려고 하기보다는 필요한 전문적 의견을 제공하기 위해서였고 모든 것은 시의회에 의해 조정되었다. 중앙 대 지방이라는 간편한 범주들이 우리의 이해를 왜곡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문제는 “상향식”과 “하향식”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였고 그들 간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합들은 나라를 운영함에 있어서 사활적 역할을 하는 대중조직들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의 감각으로, “독립된 조합들”인가 혹은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독립적이라면 우리는 어찌하여 쿠바에서 파업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다시 한번, 방문자는 완벽하게 훌륭한 기준을 그릇된 상황에 적용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조합들과 국가 간의 관계들은 다양하다. 조합들은 국민의회에서 입법을 제안할 수도 있다. 많은 대의원들이 조합원들이다. 일 년에 두 번 조합들은 내각의 각료들을 만나서 상호 관심사를 논의한다. 조합들은 노동문제에 대한 전국적 규모의 토론을 후원하고 때때로 국민의회의 제안들을 거부하기도 했다. 국가와 조합들은 연합하여 노동법의 준수를 감시한다(이 위반들 중의 많은 것은 때때로 법에 대한 무시에 의해, 때때로 무관심에 의해, 혹은 생산의 요구가 긴급할 때 분란을 일으키기기를 원하지 않아서이고 때로는 기회주의 때문이다). 우리가 노동자들이 국민의회에서 피켓팅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은행가들 혹은 CEO들이 의회(Congress:서방의 의회를 가리키며 쿠바의 의회는 Assembly로 표현되고 있다―역자)에서 피케팅하거나 혹은 백악관에 앉아서 시위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그들의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특정한 결정에 대해 불만족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이 공통된 이해를 나누어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C. 관료주의와 혁신. 쿠바인들과 외국의 방문자들 간에 공통된 불평은 관료주의이다. 일상  생활의 너무 많은 것이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종종 적용되는 규칙들과 절차들에 의해 강제된다. 예를 들면 많은 서류들이 당신의 집에 어떤 건축을 위해 획득되어야만 하고 그리고 당신이 그 서류들을 위해 가야하는 관청은 다른 장소들에 있고 혹은 당신이 거기에 도착했을 때―비록 당신이 그들이 사무실을 열어두어야 하는 때에 도착했을 지라도―일하지 않고 있고 그동안에 당신은 거기에 가느라고 일을 못하고 그리고 당신 자신이 책임지는 일을 돌보지 못한다. 혹은 정부 관청의 참모들이 대화에 깊이 빠져 있고 당신의 필요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마침내 이루어졌을 때에도 당신은 바로 시장에 가서 시멘트 한 부대를 살 수가 없다. 똘똘하고 새로운 설익은 생각을 가진 혁신자는 용수철과 세 개의 배터리를 사기 위해서 코너를 돌아 단숨에 달려갈 수 없다. (이것들은 금요일마다 ��그라마��의 편지 섹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불평들의 종류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짖굳음이 아니다. 관료주의는 특권을 부여하고 벌칙들을 부과함에 있어서 봉건적인 변덕에 대한 교정수단으로서 역사적으로 나타났다. 당신이 누구인가에 관계없이 “법의 지배”의 한결같은 적용이라는 이상은 개척시대의 무법성에 대한 반응으로서 미국의 의식성의 매우 매력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다. 더구나 공인된 절차들이 우선성과 공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누군가가 바로 상점으로 걸어 들어가서 한 부대의 시멘트를 살 수 없다는 실망스런 상황은 병원 혹은 학교가 희소한 자원들에 대한 첫 번째의 우선권자라는 것을 확증한다. 그리하여 자원의 결핍 자체가 형식화된 절차를 필요하게 만든다.





관료주의에 대한 우리 자신의 거부는 필요와 그것의 해결 간에 많은 절차들을 끼워넣고 개인적 환경에 무관하게 그 동일한 조치를 모두에게 비인간적으로 적용하고 혹은 그밖에 무감각하거나 기회주의적인 이유들 때문에 관료주의자들에 의해 위반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관료주의적인 정신은 비판, 변화 그리고 불평을 거부한다. 이상은, 각자를 그녀의 혹은 그의 필요에 따라 대우하는 방식으로 적용되는 법의 유연한 지배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관료 참모들의 높은 수준의 의식성과 행위 그리고 긴밀한 공동체의 감시를 요구한다. 그것은 쿠바에서 오직 불균등하게만 달성되는데, 비록 “개인에 대한 관심을” 향한 운동이 그 방향에서 내딛어지고 있을 지라도.





D. 사회주의와 언론 매체. 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공유되어 있는 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집단적인 지성의 동원이다. 이것이 어떻게 달성되는가는 그 자체로 주요한 도전이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단지 자유민을 위한) 모델에서는 물론 언론이 없었다. 극장은 여론 형성의 주요한 기관이었고 고전적인 그리스의 극장의 작품들은 종종 정치적 논쟁이었고 잘 알려진 인물들에 대한 풍자였다. 중세 서정시인의 시, 훈련소(nursery)의 운문, 그리고 다른 예술적 형식들은 또한 주석서와 여론 형성의 초점이었다.





민주주의를 찾는 관찰자들은 종종 대신에 적절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특별한 지시기에 초점을 맞춘다. 대중에 유포되는 쿠바의 언론은 언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그렇지 못했던 것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에 적합하지 않다. 그것의 뉴스의 범위는 빈약하고 많은 기사들은 역사적 사건들 혹은 공식적 사건들, 외교관들의 방문 등등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신문과 잡지의 교차로이다. 가장 최근에는 조사의 내용을 담는 보고에서 증대가 있었는데 대부분 왜 어떤 기업이 그것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그라마��에 보내는 편지들은 금요일 마다 발간되는데 일상생활의 많은 실망스러운 점에 대해 불평을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불평들에 대하여 비판된 기업 측으로부터의 반응을 담고 있다. ��하바나 타임즈�� 그리고 ��테마스��같은 다른 발행물들은 더 큰 범위의 의견을 공표한다.





전반적으로 보아, 쿠바의 언론은 자유주의자들이 자본주의 하에서 언론에 대해 그들의 이상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여론 형성의 기관이 아니다. 한때, 13개의 식민지들에서, 모든 골목에 인쇄기가 있고 모든 인쇄기가 발행자였고 모든 발행자가 명백한 의견들을 갖고 있을 때에, “언론의 자유”는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그리고 독립의 길을 토론하는 자유였다. 그 행복한 때는 멀리 가버렸다. 매체가 효과적으로 독점되어 있는 때에, 상업적 광고가 “자유언론”이고 심리학적인 전쟁상태와 조작이 과학이 된 때에, 발행의 비용이 인기없는 대의들로서는 너무 급상승했을 때, 언론의 자유는 그것이 그런 체하려는 것의 풍자만화가 되었다. 심리조작 전사들은 스스로를 저널리스트라고, 객관성의 망토를 두른 명사로 스스로를 이름붙일 수 있고 그 천직이 전통적으로 요구했던 그리고 때때로 얻기도 했었던 보호들을 요구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언론의 자유”를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노동인민과 피억압자들이 정보에 접근하고 그들의 관심사를 토론할 기회를 갖는 권리를 찬성한다. 이것을 어떻게 수행하는가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며 그것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공허한 호소에 의해 풀리지 않는다. 베네주엘라와 아르헨티나에서는 국가, 공동체 그리고 인민들의 조직들, 그리고 사적인 기업 사이에 전국적인 방송 주파수를 할당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법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시장의 자유와 모순되지만 우리의 눈 앞에서 창조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민주주의를 확장한다.





E. 내용과 형식에서의 민주주의. 많은 다른 민주적 슬로건들은 인도적인 목적을 위한 명백한 수단 대신에 추상적 원칙들로 전환되었을 때 유사하게 금이 갔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시민적 권리들을 위한 투쟁에서, 사람들은 “분리”와 “차별”을 탄핵했다. 지배적인 인종주의의 맥락에서, 그것은 명백한 그리고 정당한 그리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요구였다. 그런데 다른 측면이 차별철폐조치를 침식하는 “역차별”을 창출했다. 이리하여 전통적인 흑인 대학들과 여성대학 과정이 형식적으로 분리처럼 보이게 되었다. 반면에 실제로는 모든 백인의 그리고 모든 남성의 기관들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의 기관들이었고 그리고 모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혹은 모든 여성 학교들 혹은 학급들은, 그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면서 그들의 학교생활을 보내기를 원하지 않는 피억압 그룹의 사람들을 위한 안전한 환경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백인의 혹은 남성들의 독점에 도전하고 사자의 소굴에 모험적으로 들어가기를 원할 것이고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번성하고 스스로를 채우고 그리고 나서는 다시 약탈하기 위하여 지지가 되는 안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분리”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효과적인 수단을 원칙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이 전혀 아님이 판명되었을 때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공통된 실수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수많은 나라에서 혁명운동들이 있었고 다양한 성공을 거두었다. 어떤 사람들은 단독으로 정부직을 얻었고(구야나) 혹은 연합들의 부분으로서(칠레, 우르과이, 브라질) 정부직을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국가권력을 획득했다(쿠바,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에쿠아도르). 각각은 상이한데 왜냐하면 상이한 정세 때문에 그리고 어느 정도는 상이한 사상때문이었다. 이 차이들을 높은 배율에서 검토하고(높은 배율이라는 것은 그 차이들을 관찰하는 것을 현미경에 비유하여 확대시켜서 자세하게 관찰, 검토한다는 것을 말한다―역자) 그들이 선거에서 승리, 대중 동원, 무장투쟁 혹은 이것들의 조합을 통해서 지배하게 되었는지와 같은 일정한 기준으로써 그것들을 보충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리하여 ��더 네이션��의 마크 쿠퍼는 살바도르 아옌데와 피델 카스트로를 대립적으로 보고 전자를 지지하고 후자를 탄핵한다. 그러나 이 지도자들 자신들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았다. 아옌데는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들이 패배 후에 그 간부들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피신을 도와주었다. 쿠바는 아옌데를 혁명적 영웅으로서 추앙한다. 그들 모두에 대해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미제국주의와 동맹하여 그들의 나라를 지배했던 낡은 과두제에 반대하는 대중적 반역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각각은 그것 자체의 역사를 갖고 있고 그것 자체의 구속들 내에서 발전한다.





그들은 모두 “법의 지배”에 대해 상이한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법의 지배”는 “누구의 법인가?”라는 첫 번째의 물음없이는 명료하게 승인될 수 없다. 이리하여 단지 연합을 통해서 노동자당이 통치하는 브라질에서는, 정부가 지지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소유권에 대한 솔직한 위반으로써 무토지운동이 토지를 장악하고 있다. 쿠바에서 농업개혁은 법에 의해 수행되었다. 볼리비아, 에쿠아도르, 베네주엘라, 그리고 온두라스에서 진보적인 정부들은 대의제 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일정한 결합에 기초하여 새로운 헌법과 각 나라의 “재설립”을 요구했는데 그리하여 법의 지배는 가능한 만큼 정의와 평등에 대한 요구를 수행할 것이다.















혁명적 비판










C.라이트 밀즈가 ��들어라 양키들아!��에서 유명하게 말했듯이, “나는 쿠바 혁명을 찬성한다. 나는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위하여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걱정한다.”4) 우리는 이것을 일반적 원칙으로 삼을 수 있다. 떠오르는 사회주의사회를 보기 위한 출발점은 100% 그 혁명에 대한 연대이고 그것의 세계사적인 의미에 대한 평가이고 그리고 그것의 성취들에 대한 깊이 느끼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의 지배를 재수립하기 위한 모든 시도들에 반대하여 그 혁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를 요구한다.





그 혁명에 대한 100%의 서약이 그것의 모든 결정들에 대한 동의 혹은 거기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에 대한 만족을 요구하지는 않고 심지어 그것의 모든 지도자들에 대한 완전한 평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비판은 혁명가의 서약의 필수적 부분이고 비판적으로 보려는 의도는 혁명적 조직들에서 성원자격을 위한 필수물들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비판은 그것의 주요한 목적으로서 그것의 약점에 대한 교정을 포함해야 한다. 그것은 회피되어서는 안되며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의 참가의 주요한 방식이 될 수도 없다. 방문자는 혁명을 지지해야만 하고 그것으로부터 배워야만 하고 그것을 즐겨야만 한다.





의미있는 혁명적 비판을 위하여 세 개의 주요 전제가 있다.





1. 비판은 지지하는 참가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혹자가 동맹으로서 참가하고 실제로 공유되어 있는 목표들을 달성하는 것을 도운 정도에 따라, 방문자들로부터의 비판적 통찰은 쓸모있고 환영받을 것이다. 동시에 두 가지를 기억하라: 그것은 우리와 매우 닮아 있으면서, 누구도 완전히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과제들을 직면하고 있고, 오래된 고질적인 적대와 즉각적인, 매일매일의 고난과 실망스런 상황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는 그들의 혁명이다. 우리는 경외심, 동정, 그리고 사랑을 갖고 그들의 노력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의 혁명이고 우리가 이해, 의무들, 그리고 권리들을 갖고 있는 지구적 과정의 부분이라는 것을 또한 기억하라.





2. 비판은 장소와 때에 대한 지식과 이해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 이해의 첫 번째의 요소는 그 나라가 그로부터 나오고, 그것이 달성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그것의 주요한 장애물인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과거로부터의 잔존물인지, 한쪽에 치우친 전진인지, 퇴행적인 세력에 대한 양보인지, 혹은 인식되지 않은 문제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양보라면, 그것은 이러한 것으로 인정되거나 혹은 창조적인 사회주의로 과시될 수 있는가? 각각의 결정의 맥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비판은 그 나라의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지적인 현실에 기반해야만 하는데 관찰들이 맥락 속에 위치하고 무지의 어리석고 분개하는 실수들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지식과 동정적인 이해, 그리고 오래된 사회주의적 발전과 운명의 지그재그 간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깊어짐에 따라, 비판은 더 예리하고 유용하게 된다.





3. 비판은 우리를 즉각적인 것에 의해 압도당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는 이론에 의해 제기되어야 하지만 그것(즉각적인 것―역자)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쿠바의 경험은 우리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슬로건들을, 그것들을 쓰레기 취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상대적인 명료성과 궁극적인 제한성으로 그것들을 보기 위하여, 그것들을 회의적으로 보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 세계사와 인류의 생존의 맥락에서 최초의 사회주의를 놓는 것을 돕는 것, 우리 사회의 진화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양자를 보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나라를 위한 우리 자신의 투쟁을 또한 북돋울 것이다. <노사과연>











1) 리처트 레빈스(humaneco@hsph.harvard.edu)는 전복적인 제 3 세대, 전(前)농부, 생태학자이고 푸에르토리코 독립운동, 인민을 위한 과학, 반전, 그리고 다른 훌륭한 대의들의 베테랑이다. 그는 공공건강 하바드 스쿨에서 인간 생태학을 가르치고 있고 쿠바의 생태학 및 계통학 기관에서 보조 외국인 연구자이다. 그는 리처드 레원틴과 함께 ��술에 취한 생물학��(월간 리뷰 출판사, 2007)의 저자이다.






2) 이것은 한 짝의 명제들의 사례인데, 그것의 각각은 떨어져서는 틀린 것이지만 함께 보면 진실인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건강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건강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3) 심포지움 “오늘날의 쿠바: 특별한 시기 이후로 계속성과 변화”에서 제출된 논문, 쿠바 프로젝트, 서반구연구를 위한 빌드너 센터, 대학원 센터, 뉴욕시 대학, 2004년 10월 4일






4) C. 라이트 밀즈, ��들어라 양키들아!��, (뉴욕, 발란틴, 1960),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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