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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13)
글쓴이 사사키 타츠오 E-mail send mail 번호 173
날짜 2010-06-12 조회수 2552 추천수 132
파일  1276345564_아프간.hwp

  













혁명의 미스캐스트











혁명의 미스캐스트










농지개혁에 항의하는 최초의 봉화가 올랐던 것은 이미 그해 3월의 일로, 헤라트 주에서는 대규모 반정부폭동이 일어났다(부족의 리더, 이스마일 한의 지휘에 의한). 그 이후 몇 개 주에서도 발생했다. 이는 농지개혁을 적대시하는 지주들에 의한, 개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농민을 조직해서 일으킨 ‘복수(復讐)’의 반란이었다.





타라키 정권을 비롯해서 쏘련에 군사원조를 요청한 것이 그해 3월의 일이다. 동시에, 이즈음부터 정권 내부의 권력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난다. 즉, 아민으로 대표되는 하르크 파 내부의 강경파와 타라키, 판지세리, 제어리 등 정책추진 온건파와의 대립이다. 이것이 9월이 되면 한층 더 심각화되어, 수상 아민이 대통령 타라키를 살해하는 데 이르렀던 것이다. 이 사건은 혁명정권에 있어 불쾌한 일일뿐만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혁명의 명예는 현저하게 상처입었다.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 정쟁도, 쏘련에의 또 한번의 군사원조 요청도, 그 근원을 밝힌다면 엉터리 농지개혁안과 그 추진방법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민은 과연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일까. 예를 들어, 그는 그 개혁을 실시하는 1월 1일 당 창립 14주년 기념집회에서 연설을 행했지만, 농지개혁의 의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연설은 당시 그의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므로, 길더라도 인용해보자.










“우리 위대한 리더(타라키)는 다음의 사항을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은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발전도상국은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다음의 사항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당에 의해 봉건사회에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만들어진다는 것, 그 국가는 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국가이고,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그 사회는 일거에 두 가지 역사의 단계를 통과한다. 우리 하르크 국가는 이러한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가장 좋은, 첫 실제 예이다.”(방점은 인용자)










이 논지는 전체로서 극히 거친 것이고 오류이다. 노동자가 계급으로서 존재하고, 사회의 주도적 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조건으로서 자본주의가 상당한 정도 발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은 봉건적ㆍ반(半)봉건적 ‘저개발도상국’이고, 그 압도적 다수는 농민층이다. 게다가 농민층의 95% 이상이 문맹이다. 이러한 사회를 미성숙한 노동자 계급이 ‘일거에’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에 이르게 하도록 영도한다는 것이다. PDPA는 1965년의 당 창립문서에서, 일반론으로서 ‘비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언급에 근거해 아민의 위 발언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피즈라 아민은 또한 의기양양하게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우리 당은 성립한 이래로 세계에서 가장 짧은 역사를 갖는 당이면서, 혁명을 무사히 이룩한 당이다.”










이는 앞으로 농지개혁에 착수하기 직전의 발언이다. 따라서 혁명을 총괄할 정도의 시기가 아니다. 이 시기는 전년도 4월의 군사궐기에 의해, 다우드 정권을 쓰러뜨리고, 혁명평의회 하에 정부의 외관과 외교관계가 겨우 정리된 시기이다. 사실은 이때 농지개혁사업의 중요성과 곤란함에 대해서 인민에게 가능한 한 설명하고, 바라건대 인민총체의 협력 하에 개혁사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온당하다. 혁명의 핵심이라고도 할 사업을 성취하고 나서야말로, 승리에 환희하고 노래하고 춤추면 된다. 아민은 너무 지나치게 무지하고 경솔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혁명의 미스캐스트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등장을 허락한 것은 PDPA이고, 특히 타라키를 비롯한 하르크 파였다.















PDPA의 약점










아민 수상 하에서의 농지개혁이 좋지 않은 평판을 받은 이유를 다른 각도에서 고찰해보자. 개혁안을 어떻게 실현하는가라는 부분의 실패에 대해서는 이미 베트남노동당의 농업개혁과 대비해봤을 때 명백하다. 더구나 아민을 비롯해 PDPA의 이데올로그들은 대체로 농업문제에 상당한 연찬을 쌓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79년 5월에 발표된 앞의 책 『연보』의 「농업ㆍ농지개혁성(省)의 보고」(담당 장관 살레 모하마드 제어리)를 대충 훑어봐도, 형식적인 관료문서로 일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래서는 암담한 생각에 휩싸인다. 여기에 PDPA의 약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곳으로 빠지지만, 크리스토퍼 힐은 그의 저작(『레닌과 러시아혁명』, 오카미노루 옮김, 이와나미쇼텐, 1955)에서, 쏘비에트가 혁명 후의 내전과 외국간섭군의 침입에 끝까지 견뎌낸 것은 농민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1918년에는 적군(赤軍)이 500만에 달했고, 그들의 식량을 조달했던 것은 농민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식량의 징발이라는 비상수단도 포함되어 있고 부농의 저항도 있었지만, 농민이 혁명을 지켜냈던 것이라고 힐은 말한다.





1917년 구력 10월 26일에 가결된 유명한 ‘토지에 관한 포고’는 SR당(※)의 주장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쏘비에트 혁명에 있어 SR당이 제출한 농업강령의 무게는 컸다. 레닌은 일찍부터 나로드니키, 후의 농민정당인 SR당과 이론투쟁을 하면서 농업문제에 방대한 에너지를 소비해왔다. 그의 초기 대표작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달』은 1899년, 29세 때 발표되었다. 그는 1895년 25세로 검거당해, 1897년 시베리아로 3년의 유형을 선고받았다. 그 불우한 유형지 에니세이 현 슈셴스코예 촌에서 600페이지가 넘는 대작 『발달』을 집필했다. 이 대저작에 대해서 코멘트할 여유는 없지만, 그것은 유형지 부근을 비롯해 러시아의 광대한 농촌의 데이터와 젬스토브(※※) 통계 등을 종횡으로 구사해서, 1861년의 알렉산드르 2세의 농민개혁ㆍ농노해방 후의 농업, 그중에서도 농민층의 분해와 그 전개과정을 다루고 있다. 농업국 러시아가 시장으로서 발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부제는 ‘대공업을 위한 국내시장의 형성과정’이다. 그는 제2판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빈농의 지금까지 없던 빈궁화와 몰락의 기저에서의 부역경제의 팽대한 유물과 농노제도의 모든 잔존물이란 혁명적 농민운동의 깊숙한 원천을, 대중으로서의 농민의 혁명성의 깊은 근원을 완전히 설명하고 있다.”(『레닌 전집』 제3권)










여기에 레닌이 농민, 농업문제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품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그는, 또한 1903년 33세 때, 유명한 『빈농에 호소한다』를 발표하고 있다).










※ SR당 : 사회혁명당. 1901년 말부터 1902년 초에 탄생한 소부르주아정당. 전제정치에 반대했지만, 그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와 소소유자(小所有者)와의 계급 차이를 보지 않고, 농민 내부의 계급 모순의 존재도 부정했다. 그들은, ‘토지의 사회주의화’, 즉, 토지의 균등관리의 원칙에 기초한 공동체 관리에로의 이행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이것이 사회주의적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 젬스토브 : 1864년에 설치된 러시아 중앙 제현(諸県) 지방자치체. 그 권한은 엄격하게 지방의 행정ㆍ경제기능에 한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발달』의 페이지를 따라가면, 통계 수치의 표와 마치 교차하듯, 맑스, 엥겔스의 저작, 특히 『자본론』의 프레이즈가 인용되어 있다. 『자본론』의 견해로 러시아의 통계 수치를 해명하고, 자본주의의 ‘발달’을 모색하는 것이다. 레닌은 러시아에 어떻게 맑스주의를 뿌리내리게 할 수 있을까라는 과제와 격투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비맑스, 반(反)맑스주의자와의 심각한 대결도 당연히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발달』은 프로테스탄트와 폴레믹의 서(書)이기도 하다. 『발달』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이런저런 비판이 있다. 특히 러시아 농정사(農政史)의 연구자로부터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여기서 그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기로 한다. 그러나 농업혁명 분야에서의 레닌의 이론 및 SR당과 그 외의 논쟁에서 쌓아올려진 풍부한 축적, 정보와 실천적 과제가, 그 이후의 내전, 네프(NEP), 계획경제라고 하는 여러 시기에, 정책 상의 실패와 오류를 더해가면서도 전체로서 쏘비에트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발전시키는 데에 적잖이 공헌했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국 토지개혁의 경험










중국에서는 어떠했을까?





중국공산당을 명실상부한 혁명정당으로 만드는 것에 공헌한 마오쩌둥 등은 초기에 예사롭지 않은 관심을 농업ㆍ농민문제에 기울였다. 1926년, 펑파이(彭湃)는 「해농민운동의 보고」(『현대혁명의 사상3 중국혁명』, 치쿠마쇼보, 1970년)를 펴냈다. 그는 거기에서, 본래 초기의(Primitive) 농촌단체(org) 경험과, 한두 명씩 농민이 「농회(農会)」(농민조합)에 가입하는 그 동정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마오쩌둥은 펑파이의 뒤를 이어, 광저우 농민운동강습소의 소장으로 취임한다. 마오는 「중국 농민의 각 계급의 분절 및 그 혁명에 대한 태도」(앞의 책 『현대혁명의 사상3 중국혁명』에 수록)를 발표한다. ‘대지주, 소지주, 자작농, 반자작농, 반익농(半益農), 빈농, 고용농 및 농촌의 수공업자, 룸펜’을 혁명의 입장에서 각각 분석해 위치지웠다.





당시 당 중앙은 농민운동을 경시하고, 펑파이와 마오쩌둥이 지도하는 농민운동을 때로는 비난했다. 그때 마오는 「후난 성 농민운동의 시찰 보고」(앞의 책)을 발표한다.





마오는 그 안에서, ‘모든 혁명적인 정당, 혁명적인 동지는 모두 그들(농민)의 앞에서 심사를 받고, 받아들여질지 어떨지 정해질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어쨌든 중국에서도 혁명의 성공에 선행하는 긴 투쟁의 회임 기간에, 독특한 투쟁이 농촌지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나는 아프가니스탄 농업정책에 대해서 PDPA의 자국 농업의 특질에 대한 무이해, 행정수단에 의한 개혁수법, 수리개혁의 미실시, 선행하는 농민운동의 부재, 농업의 협동화의 결락 등을 지적해왔다. 여기서는 민주적ㆍ농민적 토지개혁과는 여하한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이해를 갖기 위해, 중국의 경험을 되돌아보고 싶다.





아그네스 스메드레는 그녀의 저서 『위대한 길―주더(朱德)의 생애와 그 시대』(아베 토모지 옮김, 이와나미쇼텐, 1955), 그중에서도 「제6권 토지개혁의 개시」에서, 1920년대 후반 주더가 후난(湖南), 푸젠(福建), 광둥(広東) 및 광시(広西) 성에서, 농민을 조직하여 국민당과 투쟁하면서 농촌근거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스메드레는 그것을 ‘추수폭동’과 ‘소고회(訴苦会)’ 등 농민의 움직임을 비록해 장대한 스케일의 스토리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이윽고 ‘홍비(紅匪)의 두목’(공산게릴라의 수장)인 주더와 마오쩌둥이 합류하고, 난창(南昌)과 징강 산(井崗山)에서의 투쟁 패배의 총괄로부터 ‘장정(長征)’과 연안해방구의 경험을 거쳐, 중국 북부의 해방구 건설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다.





또한 윌리엄 힌튼은 1937년부터 1945년의 항일저항시대, 산시(山西),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및 허난(河南) 성에 걸친 신키로요헨구(晋冀魯豫辺区) 안의 산시성 루청(潞城) 현, 장장촌(長莊村)이라는 일개 한촌(寒村)을 중심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직접 견문한다. 힌튼은 그것을 『번신(翻身)Fanshen』(가토 유조, 하루나 아키라, 가토 미키오, 요시카와 유이치 옮김, 헤이본샤, 1972)에 정리해놓았다. I, II권 합쳐 약 1,000페이지의 대저작이다. 그 저자는 ‘토지개혁’―지주가 소유하는 토지를 빈농, 고용농 및 소지주로 이전하는 것(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경작하는 사람에게 토지를)을 ‘번신’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것은 토지 소유권 이전의 당사자인 지주와 농민의 정신ㆍ인격 전체의 변경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령 자보공의(自報公議, 자신이 고백ㆍ보고하고 대중의 지적과 비판을 받음)에 의해서. 그러나 빈농이 토지를 입수했다고 해도 곧바로 생산 향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 농민은 토지를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협동경작, 협동사용을 함으로써 비로소 ‘번신’이 물질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보증된다. 힌튼은 문장 단락이 구분되는 곳에서, 초기의 마오쩌둥과 류사오치(劉少奇)의 발언이나 중국 고전을 인용해서 토지개혁, 농업의 집단화, 정신개혁에 빛을 비추고, 그것들을 일체의 것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힌튼과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인인 앙리 리켓과 아딜 리켓 부부는,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도합 7년간 중국에 체재했다. 그사이 4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중국혁명에 공명하고, 번신을 이루었다. 아딜은 유죄선고 후, 해방되어 베이징에서 홍콩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의 일을 적고 있다. 홍콩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호위원이, ‘아아, 이쪽에도 있어요’라고 호조조(互助組) 농민의 농작업 풍경을 가리켰다. ‘이미 (농민이) 혼자서 일하고 있는 모습 같은 건, (중국에서는) 보려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농촌의 구석구석까지 전개되고 있는 협동경작을 눈여겨보면서 ‘나(아딜)는 지금까지 감방에 유폐되었던 동안 읽은 많은 문장의 실제 예를 지금 만나고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여기에, 나의 눈앞에, 그들은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돌연 나는 무심결에 외쳐버렸다, ‘보십시오. 저쪽의 밭은 여자들만의 조(組)예요’.(『해방의 수인解放の囚人』, 앙리 리켓ㆍ아딜 리켓, 아베 토모지 옮김, 이와나미쇼텐, 1958, 하권 160~161쪽) 즉, 6억의 인구를 거느린 중국 전체가, 감옥도 포함해서, 집단으로 사회변혁을 행하고 있었다. 주더가 스메드레에게 ‘중국의 농민은 지구상에서 가장 혁명적인 인민이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이러한 선구적인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해도, 그후 농업ㆍ농민문제의 해결에 있어 오류와 실패를 야기해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PDPA가 결성된 즈음은 중쏘논쟁이 가장 격렬한 시대였다. PDPA는 쏘련당의 것만을 배우고, 중국당의 문헌을 충분히 흡수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PDPA의 이데올로그가 남긴 것을 보는 한에서는, 중국, 베트남, 또한 쿠바를 뒤따르고 있는 것은 적다. PDPA는 베트남과 쿠바 당과의 사이에서 연대의 메시지를 교환하는 정도였다.





어쨌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쏘련이나 중국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농민운동에 관한 자국의 문헌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PDPA의 명예를 위해 한마디 첨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하르크 파 안에서 타라키 의장에 이어 이인자의 위치에 있던 다스타기르 판지세리라고 하는 활동가는 앞의 책 『연보』의 「아프가니스탄혁명사 별견(瞥見)」이라는 100페이지 정도의 문서(이것은 아프간혁명 문헌 중에서 매우 뛰어난 것 중 하나이다)를 작성하고, 그 안에서 1919년의 독립 이후에 일어난 제2차 아프간청년운동 시기의 사회 각 계급ㆍ계층 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형화하고 있다.










“오래된 세력과 새로운 세력, 진보와 반동, 근로인민과 봉건적 지주, 봉건적 지주와 민족부르주아지, 대중과 부패한 정부관료, 대중과 제국주의, 애국전선과 지배계급, 진보적 전선과 반동적 왕조와 정신(廷臣)과의 대립이 점점 격화해왔다……”. 그는 이렇듯 대립축을 설정하고, 현실의 사회발전의 다이너미즘을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방법론을 사용해서 4월혁명 전의 계급 분석을 하는 데에 다음의 개념을 추출하고 있다. ‘봉건적 지주, 중간부르주아지, 민족부르주아지, 소부르주아지, 지식인 층, 혁명적 노동자 계급, 빈농(토지 없는 농민과 소토지소유자)’.










그러나 판지세리는, 예를 들어 펑파이와 마오쩌둥에게서 보이는 혁명적 실천의 명제, 혹은 농민운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또 한 권의 『빈농에 호소한다』가 씌어졌어야 했다.





PDPA의 혁명적 경험과 이론 구축의 불충분함, 특히 농민운동론의 결락이라는 파행성이 농민개혁을 실패에 이르게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PDPA는 ‘혁명의 제2단계’에 있어, 초기 개혁의 실패의 시정(是正)과 본래의 개혁이라는 이중의 과제에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노사과연>










번역 : 리떼(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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