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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9)
글쓴이 하르팔 브라르 E-mail send mail 번호 170
날짜 2010-04-29 조회수 2834 추천수 155
파일  1272526587_tro.hwp

  













3부











3부















모스크바 재판들















“추악한 인간쓰레기가 없는 단 하나의 깊고 위력있는 역사에서의 운동은 결코 있지 않았다.” ―레닌










“뜨로츠끼주의는 노동계급에서 정치적 조류이기를 멈추었다. ...그것은 7, 8년 전의 정치적 조류로부터 외국의 정보기관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파괴자들, 분열주의자들(diversionists), 스파이들 그리고 살인자들의 광적이고 규율없는 집단으로 변화했다.”―스탈린(1937)















7장















서문










우리가 왜 모스크바 재판에 대해 어떤 것이라도 알기를 원해야만 하는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것들은 지난 과거가 아닌가? 왜 그것들에 시간을 허비하는가? 동지들 그 대답은, 반동적이고 퇴폐적인 부르주아지의 지배의 혁명적 타도를 위한 싸움에서, 혁명가들과 노동계급은 그들 자신의 역사를 배워야만 하고, 그들은 혁명의 과학에 대한 지식으로 스스로를 무장해야 하며, 그들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 맑스-레닌주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의 실천에 대한 거짓말과 비방의 부르주아 캠페인들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재판에 관한 진실은 모든 곳의 부르주아지에 의해, 노동계급운동에서 그들의 대리인들, 뜨로츠끼주의자들, 수정주의자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역사적 진실의 총체적 위반, 이 진실에 대한 허위진술과 왜곡 속에서, 이 사람들은 모스크바 재판은 ‘진정한 볼세비키들’, 재판의 피고인들에 대한 ‘스탈린주의 관료주의’에 의해 행해진 숙청이라고 주장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운동에서 그들의 심부름꾼들은 이러한 완전한 거짓말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함에 의해 사회주의의 실천에 관하여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회의론을 주입할 수 있다. 이러한 승리가 단지 진정한 혁명가들의 제거를 의미할 뿐이라면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물론 쓸데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이다. 모스크바 재판은 물론 숙청―혁명적 숙청―이었는데 그에 의해 쏘련에서 혁명적 노동계급운동은 스탈린에 의해 영도되는 쏘련 공산당(볼)의 혁명적 지도력 하에, 후진적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문제를 마주할 수 없어서 국제적 그리고 민족적 자본주의에 항복하는 노선을 채택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타도와 쏘련에서 자본주의의 복고를 위해서 파시스트 제국주의 열강들과 동맹했던, 공산주의 진영으로부터의 이탈자들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간단히 하면, 이것은, 노동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의 당, 쏘비에트 정부, 쏘비에트 국가, 전 쏘비에트 인민에 반대하여 배신적인 행동을 했던 뜨로츠끼주의 겁쟁이들 그리고 관료주의적 타락자들에 반대하는, 볼세비키 혁명가들에 의해 지도되었던 숙청이다. 제출될 증거가 이러한 진술을 충분히 입증할 것이다. 따라서, 동지들, 진정한 사실들을 재차 주장하고, 이러한 진실들을 노동계급이 알게 하고 그리하여 부르주아지와 그것의 대리인들, 뜨로츠끼주의자들, 수정주의자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그것(노동계급―역자)를 애써 얻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지의 독재를 분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건설하는 것을 향한 우리의 노력에서 우리의 작업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수백만의 근로자들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편으로 획득하는 우리의 작업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이 재판을 취급해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오늘 저녁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의 본질을 간략히 개괄하는 것이 적절한데 왜냐하면 이 본질이 내가 필요 때문에 제기해야만 하는 증거의 매우 많은 양에 의해 상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모스크바 재판에서 많은 수의 뜨로츠끼주의자들과 우익들이 재판받았다. 그들은 쏘비에트 국가에 대해 배신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했고 뿐만 아니라 쏘련의 주요한 지도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테러를 범했고, 시도했고, 계획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산업에서 사보타지를 조직하고 수행했다는 혐의에 대해 죄를 인정했고 분열책동과  파괴활동을 수행한 혐의에 대해 죄를 인정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어떤 제국주의 열강과 러시아에서 반동적인 요소들과 협력하여 쏘련에서 자본주의의 복고를 위한 조직활동의 혐의에 대해 죄를 인정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특히 지식인들에 의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기를, 쏘련 공산당(볼)에서 뛰어난 성원이었던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복고를 원하고 그를 위해 실제적 조치들을 취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동지들, 어느날 밤에 뜨로츠끼, 지노비예프, 라덱, 부하린 그리고 여타의 이 재판의 피고들이 맑스-레닌주의자로서 잠자리에 들었다가 그 다음날 깨어나서 그들이 갑자기 쏘련에서 자본주의를 복고하려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아니다. 일이란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동지들, 내가 여러분에게 제기하는 것은 유일한 나라 그리고 당시 후진적인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가능성의 문제에 대한 뜨로츠끼주의자들과 우익의 논리 자체, 이 재판에서 피고들―뜨로츠끼주의자들 그리고 우익들―을 파시즘의 도구와 꼭두각시로 되게 했던 그리고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러한 그들의 입장으로 실제적으로 이끈, 투쟁의 발전의 논리 자체라는 것이다.





쏘련에서 뜨로츠끼주의자와 우익 반대파의 성격이 어떠하든지, 그것 내부에서 나타난 의견의 색조들이 어떠하든지, 그것의 모든 성원들을 묶은 어떤 것이 있었는데, 즉, 그들은 모두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뜨로츠끼는 반대파의 다른 성원들보다 훨씬 일찍, 그의 악명높은 ‘영구혁명’ 이론에서 이러한 견해를 제기했다. 뜨로츠끼의 이 이론은 농민층의 역할에 대해 그리고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 이론의 주요한 특징인 희망없음과 비관주의로부터, 이 이론에 포함된 반동적 생각들로부터 뜨로츠끼는 결코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이미 보여진 대로 이 ‘어리석은 좌익적’ 이론을 다시 또 다시 반복했다. 14차 당협의회가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에 찬성한다는 것을 단호하게 선언한 후로 카메네프 그리고 지노비예프 같은 회의론자들이 뜨로츠끼주의 입장으로 넘어갔다. 후에는 혁명의 문제들을 마주할 수 없어서 그리고 집단화에 대한 쿨락들의 저항에 의해 겁먹어서, 부하린주의자들이 또한 볼세비키 당의 관점을 버리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라는 뜨로츠끼주의 입장을 채택했다1).





반대파를 시작하는 것은 하나의 반대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반대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사회주의의 건설을 지지했던 당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잘못된 정책을 가진 반대파는 이 시기에 노동계급운동 내에서 단지 하나의 경향―반레닌주의적 경향,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경향―일 뿐이었다. 자신의 그릇된 정책을 고치는 데 실패하고 반대파는 당의 올바른 정책을 변화시키려고 하였다. 그것의 추종자들의 주관적인 바람과 희망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복고를 지지했던 그것의 정책에 대해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을 수 없자, 반대파에게는 그것에 열려진 행동의 단지 두 가지의 경로만이 남았다. 하나는, 그것이 자신의 그릇된 이론을 버리고 자신의 파산을 인정하고 당원의 나머지들처럼 진심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그것은 쏘련에서 자본주의의 복고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 즉, 멘세비키들, 사회혁명당원들, 쿨락들, 우크라이나의 그리고 기타의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제국주의 나라들의 부르주아지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반대파는 후자의 대안을 선택했다.





그 지지가 없다면 당과 쏘비에트 정부의 정책과 지도력에서 변화가 불가능한, 쏘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신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반대파는 쏘비에트 정부를 타도할 생각으로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테러, 파괴와 사보타지의 입장으로 건너갔다. 그들 자신의 세력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반대파들은 국내의 반동들―멘세비키들, 쿨락들,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부르주아 전문가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국내의 세력들이 불충분한 것으로 입증되었을 때, 반대파는 오직 하나의 대안, 즉, 제국주의 열강들과 동맹을 맺는 것만이 남았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그것은 쏘비에트 정부의 타도와 쏘련에서 자본주의 복고를 위해 독일과 일본의 파시스트들과 동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렇게 개인적 테러, 파괴, 사보타지 그리고 파시즘과의 동맹으로 넘어감에 따라, 뜨로츠끼주의는 반대파이기를 멈추었다. 그것은 노동계급운동 내에서 잘못된 그리고 반레닌주의적 경향이기를 멈추었다. 그것은 한 무리의 파괴자들과 분열주의자(diversionists)가 되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선진적 분견대가 되었다. 이제 제출될 증거는 이 진술의 올바름을 의심의 여지없이 세울 것이다.





최근의 시리즈에서 나는 뜨로츠끼주의의 이론적 진화를 자세히 다루었다. 나는 이 진화가 볼세비키 당의 건설의 문제에 대한 뜨로츠끼의 반대로 시작했다는 것을 보였다. 프롤레타리아 당을 건설하는 문제에 관해서 레닌에 대한 그의 반대는 이론의 문제에서 레닌에 대한 그의 반대의 서곡일 뿐이었다. 뜨로츠끼는 러시아 혁명의 성격에 대한 레닌의 분석을 반대한다. 뜨로츠끼는 ‘영구혁명’이라는 그의 이론을 고안하는데 그것은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과 그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이론의 부정이었다. 그의 이 이론에서 뜨로츠끼는 농민층에게 단지 반혁명적인 역할만을 할당한다. 물론, 뜨로츠끼가 말하기를, 자연발생적인 농민층의 봉기는 노동자 정부가 권력을 잡게 돕지만 노동자 정부는, 러시아 혁명이 유럽의 선진적인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혁명에 의해 뒤따르지 않는다면, 농민층의 반대에 직면하여 스스로를 권력의 자리에서 유지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뜨로츠끼는 유럽 혁명이 러시아 혁명을 돕게 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는 러시아에서 건설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은 충분히 내가 이미 보인 바 있다. 오늘 저녁에는 행동에서 뜨로츠끼주의(모스크바 재판에서 폭로되었듯이)를 다루고 여러분에게, 개인적인 테러, 사보타지, 분열책동, 그리고 파괴활동 그리고 파시즘과의 배신적인 동맹들이 뜨로츠끼주의의 입장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반대로 그것들은 뜨로츠끼주의의 발전의 논리적 정점―레닌주의를 반대하고,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했던 볼세비키 당의 레닌주의적 정책에 반해하는 그것의 반혁명적 투쟁의 논리적 정점―이다. 사회주의 건설을 반대하는 그것의 정책으로 인해, 뜨로츠끼주의는 결국에는 파시즘의 진영에서 끝났고 그리고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동지들, 이것은 뒤따르는 것의 본질이고 나는 여러분에게 이 본질을 놓치지 말 것을 요청한다.















뜨로츠끼주의의 가일층의 발전, 테러, 살인, 파괴 그리고 파시즘과의 배신적 동맹의 행동들을 위한 그것의 이론적 준비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관한 뜨로츠끼의 관점은 볼세비키 당에 의해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다. 그때조차 뜨로츠끼는 그의 ‘영구혁명’ 이론을 그것이 올바르게 속했던 쓰레기더미에 던져버리기를 거부했다. 대신에 그는 더욱 더 첨예하게 당에 반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쏘련 공산당(볼)의 14차 협의회 이후에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같은 패배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에 반대한다고 선언했을 때, 뜨로츠끼는 그들의 패배주의와 회의주의를 공유하면서, 그들과―동일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 대해 뜨로츠끼는 그의 ��10월의 교훈들��에서 우익으로 묘사했고 당으로부터 그들의 제거를 바로 최근에 추구했었고 동일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이번에는 뜨로츠끼를 당 자체로부터는 아닐지라도 당 지도부에서 제거하기 위해 자신들의 최선을 다했었다―기회주의적인 동맹을 형성하는 것으로 달려갔다. 사실 뜨로츠끼를 당 지도부에서 쫓아내려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시도들에 반대한 사람은 스탈린(뜨로츠끼주의자들의 전설에 따른다면, 뜨로츠끼의 ‘찬란함’을 두려워하고 그리하여 그에게 깊이 맺힌 적대를 하고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당으로부터 그의 제거를 추구했던 동일한 스탈린)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에 스탈린이 이 점에 대해 말한 것이 있다:










“우리는 잘라내는 정책, 유혈의 방법(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요구하고 있던 것은 유혈이었다)이 위험하고 전염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당신은 하나의 손발을 잘라내고, 내일은 또 하나를, 모레는 세 번째의 손발을 잘라낸다. 그러면 당에 무엇이 남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뜨로츠끼주의자들과 다른 부르주아 요소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찬란한’ 뜨로츠끼에 대한 스탈린의 깊이 맺힌 적대에 관한 위에서 언급된 전설를 반복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뜨로츠끼는, 그에 따르면 하나의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관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4년부터 계속하여 뜨로츠끼는 단지 스탈린에 의해 지도되는 볼세비키 당이 자본가들과 부농들에게 굴복하고 있고 그것이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일찍이 뜨로츠끼의 ‘영구혁명’ 이론을 관념적인 이론―현실을 고려하지 못하는 이론, 희망이 없게도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이론―으로서 묘사했었다. 현실의, 실제 생활의 요구를 만나기 위해 이 이론을 뜨로츠끼가 거부하지 못한 것은, 그리고 현실이 이 이론의 요구들과 만나기 위해 변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를, 먼저 그를 거기에 빠지게 했던 반동적인 이론을 버리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구출할 수 없었던 희망없이 반동적인 입장으로, 그리고 뜨로츠끼가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성취들을 자본주의와 반혁명의 어둠의 세력으로 묘사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그러한 입장으로 이끌었다.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이 더욱 더 성공적으로 될수록, 쏘련에서 임박한 파멸, 파괴, 실업, 경제적 혼돈, 내전 그리고 반혁명의 승리라는 뜨로츠끼의 예언들은 더욱 더 단호하고 빈번해졌다. 관념론은 반동적이다. 관념론적 이론은 반동적인 이론이다. 이론의 문제에서 관념론은 관념론적이고 반동적인 실천을 초래한다. 뜨로츠끼의 ‘영구혁명’ 이라는 관념적이고 반동적인 이론은 그를 곧장 반동적, 반혁명적 실천으로 이끌었다. 사회주의 건설의 불가능성을 선언함에 있어서, 그리고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성취들을 헐뜯고 모욕함에 있어서, 뜨로츠끼는 그가 원했건 원치 않았건, 그리고 그가 그것을 깨달았건 깨닫지 않았건,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반대하는 모든 반동적 세력들의 동맹과 도구가 되었다. 그는 사실상 전 세계의 반동적이고 퇴폐적인 세력들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대변자,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쿨락들, 멘세비키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적 요소들의 이데올로기적 대변자가 되었다. 누군가 뜨로츠끼가 도달한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는 뜨로츠끼가 그랬듯이 사회주의 건설의 성취들을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좌익 반대파의 뜨로츠끼와 다른 지도자들이, 그들 모두가 분파적 활동을 멈추겠다고 약속했던, 당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선언들2)을 반복하여 지키지 못한, 그리고 그의 분열적이고 분파적인 활동의 결과로서 당으로부터 쫓겨난 후에, 그는 일반적으로 쏘련과 볼세비키 당에 대해 그리고 특별하게는 스탈린에 대해 가장 혹독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는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와 결합했고 아니, 쏘련에 반대하는 비방 캠페인에서 그것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대변자가 되었다.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적 급진주의자들, 어떤 경우들에는 심지어 반동들3)이 뜨로츠끼에 대해 부드러운 입장(corner)을 가지고 있고 ‘스탈린주의 관료주의’에 대해 그의 ‘볼세비즘’을 옹호하는 것은 뜨로츠끼가 부르주아지에 대해 행한 반동적인 봉사 때문이다. 제국주의와 반동에 대해 뜨로츠끼가 행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봉사에 대해 좀 더 생각하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그것을 다루는 것은 2배로 중요한데 왜냐하면, 쏘련에 반대하는 제국주의의 선전과 거짓말의 캠페인의 병기고에서 중요한 무기라는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것은 동시에, 모스크바 재판에서 폭로된 행동에서의 뜨로츠끼주의를 위한 지구적 규모에서의 이론적 준비, 즉, 뜨로츠끼와 범죄에서 그의 파트너들이 쏘련의 내부에서 그리고 쏘련의 바깥에서 준비하고 있던 행동들인 테러와 살인, 분열책동 그리고 파괴, 그리고 파시즘과의 배신적인 동맹을 위한 이론적 준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의 ��배반당한 혁명��에서 뜨로츠끼의 모든 ‘좌익적’ 비방 그리고 다수의 다른 글들의 본질은,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타도하고 자본주의를 복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의 좌익적 활동과는 거리가 먼 활동을 감추기 위한 무화과잎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JR 캠벨이 뜨로츠끼의 “거만한 ‘좌익적’ 수사들의 진정한 불꽃놀이의 전개”(쏘비에트 정책과 그것의 비판자들)라고 불렀던 것의 본질이다.





남아있는 자본주의 요소들을 쏘련에서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5개년 계획에서, 뜨로츠끼는 대개 그런 것처럼, 죽음, 파멸 그리고 재난만을 본다. 그는 5개년 계획을 커다란 ‘모험’으로 간주하고 ‘파멸’을 예언한다: 그는 말했다.










“스탈린의 모험주의적인 정책들은 그 나라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










뜨로츠끼가 이렇게 재미있게 예언한 파멸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쏘비에트 인민은 거대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이들 어려움들을 극복하면서 맑스-레닌주의의 영광스러운 기치 하에 그리고 스탈린에 의해 영도되는 볼세비키 당의 지도력 하에,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의 길을 계속하여 행진해갔고 연달아 승리를 달성했다. 쏘비에트 인민의 승리들은 뜨로츠끼로 하여금 볼세비키 당에 대한 가장 신랄한 탄핵들을 풀어놓게 했고 경제적 혼란을 예언하게 했다. 그는 볼세비키 당에 대해 불가피하게 쏘련을 경제적 혼란에 빠지게 할 수밖에 없고 내전으로 이끌 수밖에 없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혐의를 둔다. 그는 쏘비에트 정부를 그(뜨로츠끼―역자) 자신의 질병―보나파르티즘―으로 혐의로 고발하고 쏘비에트 정부의 이 ‘위험한 정책’의 번복을 요구한다. 이 ‘위험스런 정책’의 번복에 영향을 주기 위해 뜨로츠끼는 먼저 쏘비에트 정부의 개혁을 요구했고 그리고 나서 계속하여 이 정부의 무장에 의한 타도를 옹호했다. 동지들, 이것은 뜨로츠끼가 왜 쏘련에서 자본주의 복고를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종말을 맞이했는지에 관한 의문을 푸는 것이다. 뜨로츠끼주의의 전체적인 이론적 진화는 그것의 가일층의 타락과 자본주의 복고의 진영 그리고 파시즘의 진영으로 이전을 위한 예비 학교를 구성할 뿐이다.





‘영구혁명’ 이론에 의해 인도되어, 뜨로츠끼는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모든 전진을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후퇴하는 발걸음이라고 묘사하고, 어떤 파멸 등의 예언들을 하는 그의 묘사를 수반하는 단 하나의 기회도 결코 놓치지 않았다. 1928년에 그의 유배로부터, 뜨로츠끼는 코민테른 6차 대회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들(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를 90% 실현했다는 것에 관한 악의없는 거짓말을 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경제수준, 우리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조건들이 오늘날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에, 그리고 그것도 후진적이고 계몽되지 않은 자본주의에 더 가까이 근접했다는 것을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오직 가장 선진적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할 때에만 실제적인 사회주의 건설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것을 알려야만 한다. ...” (뜨로츠끼, 「코민테른의 강령 초안에 대하여」)










동지들 여기에서 여러분은 명백한 언어로 된 그것을 가지고 있다―쏘련은 “가장 선진적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이후까지는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서지’ 조차 못할 것이라는 뜨로츠끼의 주장. 그리고 이 주장이 행해진 때는 1905년이 아니라 1928년이다. 이 주장이 행해진 해는 바로 쏘비에트 인민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전진을 기록했던 해이다.





1930년까지, 가장 열광적인 반동들에게 조차, 그들이 신경제정책(NEP)의 결과로서 희망했고 예상했던 자본주의의 평화로운 복고라는 그들의 희망들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반대로 NEP는 자본주의의 복고를 초래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성공적인 건설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것을 깨닫고서는 쏘련 내외의 반동들은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에 반대하는 대규모 캠페인을 시작했다.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는 쏘련에 대한 무력간섭에 찬성하는 공공의 여론을 준비하기 위해 거짓말과 비방의 이러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뜨로츠끼와 그의 추종자들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반대하는 그들의 캠페인에서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와 매우 기쁘게 결합했다. 뜨로츠끼주의자들이 그들의 ‘좌익적’ 수사들을 더 크게 외치도록 내버려 두자. 그러나 진실은 그들이 반혁명의 그리고 쏘련에 대한 간섭의 제국주의 세력의 편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진실은 결코 감추어질 수 없다.





영국에서는 영국의 지배계급과 “그것의 사무를 관리하는 집행위원회” 즉, 영국정부가 쏘련에서 ‘강제노동’과 ‘종교의 박해’에 반대하여 싸운다는 구호 아래에서 쏘련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기억하시오,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가 붕괴를 목격하던 때,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과잉이 되어서 굶주림, 빈곤, 비참함 그리고 타락을 경험하고 있던 때, 그리고 쏘련이 그것의 우월한 경제체제 때문에―사회주의 때문에―실업이 거의 무시할 만하고 경제적 기적이 수행되고 있던 유일한 나라였던 때였다. ‘종교박해’에 관하여 말한다면 종교적 소수들에 대한 어떤 박해도 결코 없었고 혹은 이러한 종교에 대한 박해도 없었다. 쏘비에트 정부는 교회를 유지했고 교회가 개방되도록 했고 그것은 사제들에게 보수를 주었고 교회에 나가고자 하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물론, 종교는 그것의 올바른 자리에 놓여졌다. 성직자는 그들이 짜르 시대에 했던 것과 같이 반동적인 영향력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었다. 이것이 ‘종교박해’라면 그럴수록 더 좋은 것이다. 어떤 경우에, 부르주아지는 ‘종교박해’에 반대하여는 싸움에 관심을 가지는가? 오직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협이 출몰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부르주아지가 혁명적인 젊음의 기간 동안 부르주아지는 스스로 종교에 반대하여, 교회에 반대하여 싸웠는데 왜냐하면 후자는 사회진보를 가로막고 떠오르는 부르주아지의 권력에 접근을 막는 반동적인 봉건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더 이상 혁명적 세력이 아니다. 그것은 반동적인 세력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쇠퇴의 시기에 있고 지금은, 플레하노프의 수사를 사용하면, 부르주아지에게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 쇠락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반동적인 어떠한 것이라도 붙잡는데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것과 같다. 이것이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들의 마음속에 종교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불어넣으려고 시도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부르주아지가 신과 종교를 옹호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들은 이러한 ‘신’과 종교의 옹호 뒤에 숨어있는 것은 독점자본주의―즉 돈벌이와 노동계급과 근로하는 수백만의 착취의 종교―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옹호가 놓여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영국의 지배계급들이 이렇게 쏘련에 반대하는 간섭을 위해 여론을 동원하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국제적 반동들은 한가롭게 방관하지 않고 있었다. 멘세비키들은 그들의 조직을 강화했다. 멘세비키 전연합 사무국은 사보타지 행동을 조직했고 급박한 간섭을 위한 준비를 했다. 사무국은 계속하여 해외에 있는 비합법 멘세비키 조직과 연계를 수립했다. 그것은 또한 어떤 간섭으로부터라도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다양한 외국 정부들과 연계를 수립했다.





동지들, 그러면, 뜨로츠끼가 쏘비에트 체제에 반대하고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캠페인에서 그들과 합류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1930년에 뜨로츠끼는 쏘련 공산당원들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썼는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 노선들은 쏘련에 대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운명에 대한 커다란 근심의 감정에 의해 지시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지도력, 스탈린의 자그마한 그룹의 정책은 그 나라를 전속력으로 위험한 위기들과 붕괴들로 이끌고 있다.” (뜨로츠끼, 「쏘련 공산당원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1930년 3월)










쏘비에트 인민이 노동계급과 그의 전위 쏘련 공산당(볼)의 지도력 하에 전속력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느라 바쁜 바로 그 때에 염세주의자 뜨로츠끼는 그의 엉터리같은 ‘좌익적인’ ‘영구혁명’ 이론에 의해 인도되어 “스탈린의 자그마한 그룹이”(볼세비키 당을 언급하는 뜨로츠끼의 방식) “그 나라를 ... 위기들과 붕괴들로 이끌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뜨로츠끼의 “쏘련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커다란 근심의 감정”에 대해 말하자면, 이 감정에 대한 더 좋은 안내는, 뜨로츠끼의 위선적이고 위장하는 글들에서가 아니라 모스크바 재판에서 폭로된 뜨로츠끼와 그의 동료들의 행동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그것은 뜨로츠끼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운명에 대한 ... 근심의 감정들”의 실제적 성격을 폭로하고, 쏘련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가장 큰 적대감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쏘비에트 정부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타도를 일으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그를 폭로하고, 파시즘의 동맹이자 도구로서 그를 폭로하는 행동들이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그의 “쏘련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커다란 근심의 감정”이 도달하는 것은, 동시에 뜨로츠끼가 사회주의 건설의 정책을 신랄하게 탄핵한다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도달하는 것은 그의 실제 감정들과 쏘련에서 자본주의 복고라는 그의 정책을 덮어가리기 위해 고안된 거만하고 공허한 수사일 뿐이다. 동지들, 이것이 뜨로츠끼의 이들 감정의 실제적 의미인데, 왜냐하면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없다면 그러면 유일한 대안은 자본주의의 복고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뜨로츠끼의 감정들의 진수이고 행동에서의 뜨로츠끼주의를 즉, 살인, 사보타지, 분열책동, 그리고 파괴의 조직자로서 뜨로츠끼주의―파시즘의 동맹이자 꼭두각시로서 뜨로츠끼주의―를 잘 설명하는 것이다.





‘씩씩한’ 뜨로츠끼는 사회주의건설의 문제들에 의해 놀라고 항복에서 위안을 느끼면서, 사회주의는 건설될 수 없다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위험한 위기들과 붕괴들”을 틀림없이 초래할 것이라고, “스탈린의 자그마한 그룹”은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위험한 위기들과 붕괴들”의 이 길을 따라 그 나라를 지도하는 것으로부터 멈추게 해야만 한다고 선언한다. 뜨로츠끼와 모스크바 재판에서 고발된 여타의 사람들을 사보타지 그리고 파시즘과의 동맹으로 이끈 것은 ‘영구혁명’ 이론의 이러한 패배주의이다. 이것은 이 재판들에서 고발된 사람들의 일부의 인정들로부터 충분히 명백해질 것인데 이것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될 것이다.





다시 같은 해인 1930년 11월에 뜨로츠끼는 쓴다:










“민족적으로 정해진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은 모든 일시적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생산력을 자본주의와 비교할 때조차도 후진적으로 잡아당기는 것이다. ...”










동지들, 그것이 환상적이고 믿을 수 없을 지라도, 이것이 뜨로츠끼가 말하는 것이다: 단일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더 진전될수록, 생산력들은 더 원시적으로 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의 사회주의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에서 어떠한 진전도 항상 생산력들에는 역의 비율에 있다. 사회주의 건설이 덜 진전될수록 생산수단은 더 진전되고 또 역의 경우이기도 하다. 이것으로부터 끌어내어지는 결론은 명백한데 즉, 쏘련이 그것의 기술, 그것의 생산력들을 증진시키기를 원한다면, 그러면, 뜨로츠끼의 관점에서는 이것은 오직 자본주의 기초 위에서만,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의 진전을 늦추고 멈추는 것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조차 뜨로츠끼의 이러한 엉터리같은 명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떤 경우라도 실천이 수백권의 책들보다 더 이 명제의 엉터리 같음을 입증했다. 실천은 쏘비에트의 기술과 생산력들에서 강력한 진전은 사회주의 건설의 정책의 기초 위에서 정확하게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것이 따라서 “스탈린의 자그마한 그룹”에 반대하는 뜨로츠끼의 비방의 본질이다. 뜨로츠끼는 신랄한데 왜냐하면 “스탈린의 자그마한 그룹”이 뜨로츠끼의 충고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거부하고 사회주의의 진전을 멈추기를 거부하고 자본주의를 복고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1931년에 뜨로츠끼는 그의 ��쏘련에서 발전들의 문제들��에서 훨씬 더 많은 예언들을 했다.





1931-1932년의 기간은 국제정세와 국내의 투쟁이라는 두 관점으로부터 쏘련에게는 어렵고 복잡한 투쟁의 기간이었다. 독일에서 파시즘이 가까운 장래에 모습을 나타낼 것으로 보였다. 제국주의자들은 쏘련에 반대하는 간섭을 위한 모든 종류의 구상들을 꺼내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쿨락들이, 사회주의가 건설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본주의 복고의 가능성이 빠르게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집단화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증대시켰다. 그들은 집단농장들을 침식하고 파괴하기 위해 쏘비에트 활동가들에 대한 살인과 사보타지에 호소했다. 동지들, 집단화에 대한 쿨락들의 저항에서 그들이 호소한 종류의 사보타지에 대한 묘사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음의 묘사는 우크라이나의 반혁명분자인 이삭 마제파(Issac Mazeppa)의 펜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처음에 콜호즈(집단농장들)에서 대중적 소요가 있었거나 혹은 공산주의자 관리들 혹은 그들의 대리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후에는 수동적 저항의 체계가 선호되었는데 그것은 파종과 추수의 수확에 대한 볼세비키의 계획들의 체계적인 차질을 목표로 했다.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모든 식량 생산물들이 그들의 볼세비키 지배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수출되는 것을 보고서는 겨울 기간의 기아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증오받는 외국의 지배에 반대하여 싸우는 어떠한 수단이라도 붙잡기 위해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곡물의 대규모적인 퇴장과 들판에서 도둑질―발각되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위반들―의 주요한 이유이다. 농민들은 모든 곳에서 수동적인 저항자들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는 저항은 민족적 투쟁의 형태를 띠었다. 우크라이나 인민의 반대는 1931년의 곡물 저장계획의 실패를 야기했고 1932년에는 더욱 더 그러했다. 1931-1932년의 재난은 1921-2년의 기근4) 이후로 쏘비에트 우크라이나가 해야만 했던 가장 어려운 타격이었다. 가을과 봄의 파종 캠페인은 실패했다. 모든 지역들이 파종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었다. 더불어, 수확물이 작년에 수집되고 있을 때, 많은 지역에서, 특히 남부에서, 20, 40 혹은 심지어 50%가 들판에 남겨져 있었고 전혀 수집되지 않거나 혹은 탈곡과정에서 파괴되었다.”(이삭 마제파 ��슬라보닉 리뷰��, 1934년 1월)










먼저, 물론, 마제파는 농민 대중들이 사보타지에 호소했다고 말할 때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보타지와 “공산주의 관리들 혹은 그들의 대리인들”에 대한 살인에 호소했던 사람들은 농민 대중이 아니라 쿨락들과 마제파 같은 반혁명분자들이었다. 둘째로, 수확의 50%가 들판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에 관해 말하면, 이것이 스스로를 “겨울 기간의 기근”으로부터 구제하려는 욕구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우크라이나의 반혁명분자인 마제파 같은 사람만이 알고 있다. 그는 이 점에 대해 우리에게 더 이상의 것을 비춰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 두 가지 단서를 전제로 보면, 마제파로부터 위의 인용은 집단화의 고조기에 쿨락의 사보타지와 저항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보여준다.





내부적인 그리고 외부적인 이 모든 어려움들에 대한 뜨로츠끼의 반응은 대개 그렇듯이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불가능성과 임박한 내전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기를 집단화는 광범한 규모로 실업을 초래할 것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집단화가 새로운 기술(일찌기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자본주의와 비교할 때조차 생산력들을 후진적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그의 말을 들었다)의 요소들과 더불어, 농업노동의 생산성을 상당히 증가시킬 것―그것없이는 집단화는 경제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을 가정한다면, 이것은 심지어 지금도 인구과잉인 마을에서 즉각적으로 백만, 2백만, 혹은 더 많은 수의 잉여노동자들을 창출할 것인데 그들은 공업이 심지어 가장 낙관적인 계획으로도 흡수할 수 없을 것이다.” (뜨로츠끼, ��쏘련의 발전의 문제들��, 1933)










그리하여 뜨로츠끼의 1931년에서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집단화는 중지되어야만 한다. 동지들, 이 결론은, 집단화가 물론 쏘비에트 정권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였을 때5)인 1924년에 즉각적인 완전한 규모의 집단화를 요구하고 스탈린에 대해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쿨락들과 연합하고 있다고 비난했던 그 동일한 뜨로츠끼에 의해 도달되었다. 그리하여 이런 것이 뜨로츠끼주의자들의 경제와 정치의 본질이다: 1924년에 적절한 준비가 없는 집단화 그리고 1931년에 집단화의 정지. 뜨로츠끼는 산업전선에 대해 유사한 충고를 했는데 이에 대해 간단하게 볼 것이다.





뜨로츠끼는 몇 번째인지 모를 만큼 사회주의는 건설될 수 없다고 반복한다:










“자기 충족적인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는 것의 불가능성은 훨씬 더 큰 규모로 그리고 훨씬 더 큰 깊이로 모든 새로운 단계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적인 모순들을 재생한다.” (앞의 책)










다른 말로 하면, 사회주의 건설에서 더 크게 진전할수록, 사회주의 건설의 불가능성은 더 커진다. 물론 심오한 엉터리인데 그것을 오직 뜨로츠끼만이 유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뜨로츠끼가 말하기를, 산업화가 더 클수록, 집단화가 더 클수록, 쏘비에트 사회에서 모순들―내전과 “계획원칙의 붕괴” 그리고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복고를 초래할 모순들―의 발전은 더 클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증거로서 뜨로츠끼는 당시에 열린 멘세비키들의 재판들을 인용하는데, 그 재판에 뜨로츠끼는 몇 년 후에 “스탈린주의자들의 조작”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1931년에 이들 재판들은 아직 “조작”으로 변형되지 않았었다. 여기에 뜨로츠끼가 이러한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이들 재판에 대해 말한 것이 있다:










“두 개의 재판들―전문가ㆍ파괴자들에 대한 그리고 멘세비키들에 대한―은 쏘련에서 계급들과 당들의 세력들의 관계에 대한 극단적으로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923-1928년의 기간동안 부르주아 전문가들은 부르주아지의 외국의 중앙들과 긴밀히 동맹하여, 자본주의 관계들의 재수립을 믿고서 산업화의 인위적인 지연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은 법정에 의해 반박의 여지없이 입증되었다(동지들, 언어에 주목하라. 아직은 이들 재판들이 ‘스탈린주의자들의 조작’이라는 암시는 전혀 없다)” (뜨로츠끼, 「쏘련의 발전의 문제들」, p. 26)










이제, 사회주의 건설이 계급투쟁의 강화를 떠올린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스탈린이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모든 전진에 따라 여기서의 계급투쟁은 필요성이 점점 더 줄어들고 그리고 우리가 성공을 성취하는 것에 따라 계급의 적은 더욱 더 온순하게 될 것이라는 썩은 이론을 파괴하고 치워버려야만 한다.”





“이것은 단지 썩은 이론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인민을 속여 넘기고 그들을 덫으로 이끌고 그리고 계급의 적이 쏘비에트 정부에 반대하는 투쟁을 위해 결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더욱 더 앞으로 전진할수록, 우리가 더 큰 성취를 달성할수록, 부서진 착취계급들의 찌꺼기들의 격분은 더욱 더 크게 될 것이고, 그들은 투쟁의 보다 첨예한 형태들에 더 빨리 호소할 것이고, 그들은 쏘비에트 국가에 더 많은 해를 주려 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파멸한 사람들의 마지막 호소와 같이 투쟁의 가장 절망적인 수단들을 더 붙잡으려 할 것이다.” (스탈린, 「당사업에서 결함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과 다른 표리부동한 자들을 청산하기 위한 조치들」, 1937년 3월 3/5일,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대한 보고)










쿨락 등에 의해 행해진 저항과 사보타지는 이미 언급되었다. 이것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착취자들이 그들의 ‘잃어버린 낙원’을 재획득하는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더욱 더 깨달을수록 그들은 자본주의의 복고를 목표로 하는 시도들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들은 별개의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에서 성공은 또 다른 문제이다. 강력한 쏘련 인민들은 쏘비에트 노동계급과 그것의 전위당인 쏘련 공산당(볼)의 지도력 하에서 자본주의 복고에 대한 이러한 시도들을 분쇄하여 산산히 부술 수 있었다. 역사는 이러한 것이 당시에 쏘비에트 인민이 하였던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6)을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멘세비키들에 대한 재판들은 자본주의를 복고하려는 부르주아지에 의한 시도들의 사례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도들을 절멸시킨 쏘비에트 인민의 강력한 주먹의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패배주의자 뜨로츠끼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쏘비에트 인민이 자본주의를 복고하려는 시도들을 성공적으로 분쇄할 수 없다고, 내전과 자본주의의 복고가 밤이 낮에 이어지듯이 쏘련에서 모순들의 발전을 따라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예언하기를, “적대적 세력들이 표면을 뚫을 것이고, 트러스트들의 관리들이 사적 소유자의 혹은  외국자본의 대리인들의 위치로 빠르게 접근할 것인데 그에 대해 그들의 많은 수는 생존을 위한 그들의 투쟁에서 전환을 강요당할 것이다. 저항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는 집단농장들의 형태들이 소규모 상품 생산자들을 흡수할 시간을 거의 가지지 못할 (시골―역자) 마을에서는 계획원칙의 붕괴는 원시적 축적의 요소들을 경솔하게 해방할 것이다.” (뜨로츠끼, 앞의 책)





동지들, 여기에 모두가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뜨로츠끼의 투항주의, 초산업화주의자, 1924년에 쿨락들에 대한 공세의 옹호!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독일의 파시즘이 수평선 위에 크게 떠오르자, 뜨로츠끼는 그의 대개의 낙관주의를 배반한다. 아직은 당시에 발생하지 않았던 독일에서 파시즘의 승리의 가능성을 논의하면서, 뜨로츠끼는 말한다:










“파시스트들의 손에서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분쇄되는 것은 쏘비에트 공화국의 절반의 붕괴를 이미 포함하는 것이다.” ( ��독일, 국제정세의 열쇠��. 1931)










국내정세와 국제정세에 대한 극단적인 비관적인 평가에 기초하여, 제국주의와 반동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쏘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대중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제국주의 상호 간의 모순들을 무시하고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들에 의해 겁을 먹고는 뜨로츠끼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적대적인 세력들의 대변자”가 되는 것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여기에 라덱이 그의 재판 기간에 이러한 발전을 설명한 것이 있다: 라덱은 설명했다.










“당으로 복귀한 많은 수의 뜨로츠끼주의자들은 5개년 계획을 위한 싸움이 첨예하게 되었던 때에 나라의 다양한 부분들에서 핵심적 위치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것은(5개년 계획을 위한 싸움―역자) 나라의 일부 지역들에서 쿨락들과 그리고 쿨락들의 지도를 따랐던 중농층 사이의 그러한 요소들과 첨예한 충돌의 형태들을 띠었는데 투쟁하고 있던 이 전자의 동료들은 나에게 가장 비관적인 성격의 정보들, 나라의 정세에 대한 나의 의견에 가장 치명적으로 악영향을 주었던 정보들을 홍수가 나도록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1930년과 1931년에서였다. 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5개년 계획의 획득물들은 거대한 것이고 주요한 한 걸음이 산업화의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어느 정도는 집단농장들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정보와 당시 내가 친분이 있던 뜨로츠끼주의 경제학자들―나는 스밀가와 프레오브라젠스키를 언급할 것이다―에 의해 이루어진 정세에 대한 평가에 기초하여, 경제적 공세가 너무 넓은 전선에서 행해지고 있어서 이용할 수 있는 물질적 힘들(트랙터의 수 등)이 전반적인 집단화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이러한 전반적인 공세가 늦추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캐치프레이즈로써 규정하듯이 ‘바르샤바에 대한 행진과 같은 종말’이 될 것이고, 이러한 빠른 속도로는 산업화는 아무런 결과들도 산출할 수 없고 단지 거대한 비용만 야기할 뿐이라고 나는 믿었다.”





“1931년 당시에 이미, 나는 공세를 보류하고 자원들을 경제 전선의 특정한 부문들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그 주요한 문제, 5개년 계획을 위한 싸움을 계속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다. 사회적 각도로부터 이러한 불일치를 분석하자면, 물론, 나는 당시에 내가 올바르다고 간주했던 전술을 최선의 공산주의적 전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누군가 이것의 사회적 분석을 요구한다면, 나는 역사의 농담은 내가 쿨락 대중들뿐만 아니라 중농들의 독립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능력과 저항의 힘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어려움들에 의해 겁을 먹었고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 적대적인 세력들의 대변자가 되었다.” (「반쏘비에트 뜨로츠끼주의자 중앙의 재판」, 1937년 모스크바, pp. 83-84)










그의 모든 파멸의 예언들이 현실화되지 못하자, 뜨로츠끼는 쏘비에트 정부가 사회주의 건설의 정책에서 ‘퇴각’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임박한 파멸이라는 예언을 한다. 여기에 뜨로츠끼가 1932년에 그의 ��위험에 처해 있는 쏘비에트 경제��에서 쓴 것이 있다:










“전체적인 곤란은 산업화에서 훌륭한 도약이 계획의 다양한 요소들을 상호간의 극단적인 모순들로 밀어넣었다는 것, ... 경제가 물질적 예비없이 그리고 계산없이 기능한다는 것이다. ... 곤란은 생겨난 불균형들이 훨씬 더 큰 뜻밖의 일이 생기게 한다는 것이다. 곤란은 통제되지 않는 관료주의가 그것의 위신을 이어지는 오류들의 축적에 붙들어 맨다는 것이다.”










우리는 “곤란은” 우리의 교활한 이기주의자 뜨로츠끼가 그의 “위신”을 그의 파산한 ‘영구혁명’ 이론과 “이어지는 오류들의 축적”에 “붙들어 맨다”는 것을 단지 덧불일 것이다.





뜨로츠끼는 더욱 더 머리칼이 곤두서는 예측을 계속하여 한다. 그는 대규모의 실업, 기업들의 폐쇄, 그리고 지방 경제에서―농업의 영역에서―파괴적인 결과들을 예언한다.










“곤란은 위기가 기업들의 강제된 폐쇄 그리고 실업과 같은 결과들의 도래로써 임박해 있다는 것이다.” (뜨로츠끼, ��위험에 처해 있는 쏘비에트 경제��, 1932년)










그리고 나아가:










“집단화에서 기록경쟁을 무모하게 추구하는 것은 ...실제로는 파괴적인 결과들을 초래했다. 그것은 소생산자에 대해, 그것이 다른 그리고 훨씬 고도의 경제적 자극에 의해 그것들(소생산자에 대한 자극들―역자)을 밀어내기 오래전에 자극들을 파괴했다. 공업에서 스스로를 빠르게 소진하는 행정적 압력은 농촌 경제의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힘이 없는 것으로 입증된다.” (앞의 책)










예전의 초산업화주의자였고 1924년에 쿨락에 반대하는 공세의 옹호자였던 뜨로츠끼가 그리하여 “산업과 농촌 경제에서” 퇴각을 제한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가 말하는 것이 있다:










“일시적 퇴각이 산업과 농촌 경제에서 긴급하다. 퇴각과 가장 가까운 노선은 사전에 결정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자본의 재건의 경험에서만 드러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퇴각은 집단화의 영역에서 불가피하다. 다른 어떤 곳보다 여기에서 행정은 자신의 실수들의 포로이다.” (앞의 책)










그리고 나아가:










“기계적으로 ‘쿨락을 청산하는’ 정책은 지금은 실제적으로 버려지고 있다. X표가 그것에 공식적으로 놓여져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쿨락의 착취적 경향들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 (앞의 책)










“기계적으로 ‘쿨락을 청산하는’ 정책”과 같은 뜨로츠끼의 왜곡을 무시하면(그리고 이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왜곡인데 왜냐하면 (i) 쿨락을 제거하는 정책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입안된 정책이었고 그리고 (ii)뜨로츠끼가 쿨락을 청산하는 정책이 사실상 버려지고 있다고 말하던 바로 그 때에 공세가 눈사태의 기세로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여러분 동지들에게, 위의 퇴각은 1932년에 뜨로츠끼에 의해 요구되고 있다는 것―뜨로츠끼의 수사를 사용하면, 공세가 “모험주의적 템포”가 되었을 때인 1924년에 쿨락들에 대한 공세를 옹호했던 동일한 뜨로츠끼―이다. 이것은 ‘영구혁명’ 이라는 “엉터리같은 좌익” 이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논리적인 엉터리이다. 뜨로츠끼주의에 있어 타고난 이런 논리적인 엉터리 때문에, 뜨로츠끼주의자들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운동의 미래의 과제를 수행하느라 바쁜데 동시에 현재의 과제들은 심오하게 무시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잘못된 적들과 싸우고 있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적들과 싸우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허공을 치고 있다. 현실은 언제나 그 불쌍한 친구들로부터 교묘히 빠져 나온다. 그러나 허공을 치고 또 풍차에 돌진하는 데서 그들과 결합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혁명가가 아니라 “스탈린주의 관료주의자”이다.





뜨로츠끼에 의해 요구된 위의 “일시적 퇴각”에 대해 말하면, 이 “일시적 퇴각”의 실제적 성격은 부하린의 재판에서 그에 의해 폭로되었다. 부하린은 이 “일시적 퇴각”이 자본주의 복고의 요구에 다름아니라는 것에 대해 의심을 남기지 않았다. 부하린이 우익과 뜨로츠끼주의자 블록의 강령에 대해 말해야만 했던 것은 매우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이 강령과 이 블록에 의해 요구된 “일시적 퇴각”의 실제적 성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은 우익과 뜨로츠끼주의자 블록의 진화에 대한 현실적 이해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부하린의 증언은, 일찍이 인용된 라덱의 그것과 같이, 수많은 두드러진 이전의 볼세비키들이 자본주의 복고를 위해 일하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파시즘과 협력했다는 범죄 혐의로 고발되어 피고석에서 스스로를 발견해야만 한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관한 미스테리를 풀어 준다. 부하린으로 하여금, 피고석에서 말하게 하자:










“나에게는 이 재판이 공적인 중요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의문이 극히 하찮게 다루어졌기 때문에, 나는 결코 어디에서도 쓰여진 적이 없는 강령에 대해, ‘우익과 뜨로츠끼주의자 블록’의 실천적 강령에 대해 길게 논하는 것이, 그리고 하나의 공식 즉, 자본주의 복고라는 것이 의미했던 것을, 그것이 ‘우익과 뜨로츠끼주의자 블록’의 써클들에서 구상되고 입안되었던 방식으로 해독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





“우익 반혁명분자들은 처음에는 ‘일탈’인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힐끗보면 집단화와 관련한, 산업화와 관련한 불만으로써, 그들이 주장하듯이 산업화가 생산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로써 시작했던 사람들인 것으로 보였다. 이것이 처음 힐끗보면 주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류틴 강령이 나타난다. 모든 국가 기구들이, 모든 수단들이, 모든 최선의 힘들이 나라의 산업화로, 집단화로 돌진할 때, 우리는 문자 그대로 24시간 동안 반대 해변에 있는 우리 스스로를 발견했고, 우리 스스로 쿨락과 함께 있는 것을, 반혁명분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고 우리 스스로 거래의 영역에서 당시에 여전히 존재했던 자본주의의 찌꺼기들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주체적 관점으로부터 기본적 의미, 판단이 명확하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재미있는 과정, 개인기업에 대한 과대 평가, 그것의 이상화로 이어 들어가는 것, 재산 소유자의 이상화를 통과했다. 이런 것이 진화였다. 우리의 강령은 번영하는 개인 농민의 농장이었는데, 그러나 사실상 쿨락이 그 자체로 목표가 되었다. 우리는 집단농장들에 대해 빈정대었다. 우리, 반혁명 음모자들은 당시에 더욱 더 집단농장들은 미래의 음악이라는 심리를 드러내게 되었다. 필요한 것은 부유한 재산소유자들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관점과 심리에서 발생한 거대한 변화였다. 1917년에 나 자신을 포함하여 죽임을 당한 백군을 동정하는 것은 당원 누구에게도 일어난 적이 없다. 그러나 1929-30년에 쿨락들의 청산의 시기에 우리는 수탈당한 쿨락들을 소위 인도주의적 동기로부터 동정했다. 1919년에 경제 생활의 뒤죽박죽에 대해 사보타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볼세비키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누구였던가? 누구도 없었다. 그것은 매우 솔직하고 공개된 반역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1928년에 농민층에 대한 군사-봉건적 착취에 대한 공식을 창안했는데, 즉, 계급투쟁의 비용들에 대한 비난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적대적인 계급에 대해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지도자들로 돌렸던 것이다. 이것은 이미 180도 회전이었다. 이것은 사상적 그리고 정치적 강령들이 반혁명적 강령으로 성장해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쿨락 경영과 쿨락의 이해들이 실제로 강령의 초점이 되었다. 투쟁의 논리는 사상의 논리를 그리고 우리의 심리에서 변화를, 우리 목표들의 반혁명화를 초래했다.” (「우익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의 반쏘비에트 블록에 대한 재판」).










동지들, 우익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의 블록의 발전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혁명적인 파괴자들과 사보타지자들로 되었는지에 대해 부하린에 의해 여기서 주어진 것보다 더 좋은 설명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울 것이다. 부하린의 이 증언은 우익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의 블록의 목표의 “반혁명화”에 대해 일찍이 주어진 가장 과학적인 설명들의 하나이다. 그것은 하나의 블록으로서 우익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의 블록의 진화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개인적인 성원들 각각, 피고들의 진화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사회주의가 쏘련에서 건설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그들의 입장으로터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볼세비키 당의 정책에 대한 뜨로츠끼주의자들과 우익들의 반대가 떠올랐다. 사회주의 건설의 반대라는 것으로부터 반대파의 쿨락들에 대한 동정 그리고 스스로 “문자 그대로 24시간 동안 반대편 해변에서 ...쿨락들과 함께, 반혁명분자들과 함께 있는... 자본주의 찌꺼기들과 함께 있는 ...”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앞서 말한 것으로부터, 쏘비에트 정부와 당이 인민들을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승리의 투쟁으로 지도하고 있는 반면에, 뜨로츠끼주의자들, 지노비예프주의자들 그리고 우익들은 사회주의 건설의 불가능성이라는 그들의 강령으로 시작해서, 투쟁의 논리에 의해, 자본주의 복고를 위한 그들의 반혁명적인 강령으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쏘련공산당(볼)과 쏘비에트 정부의 정책은 수백만의 쏘비에트 대중들을 사회주의 건설의 끈기있는 과제로 이끄는 것이었다. 많은 어려움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러나 쏘비에트 대중들은 맑스-레닌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볼세비키 당의 영광스러운 지도력 하에서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차례차례 장애를 제거하면서 쿨락들과 부유한 상인들의 저항을 압도하고 그리고 어려움들과 적대 계급들의 사나운 저항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면서, 승리에서 승리로 전진했고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였다.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세계사적인 중요성이 있는 사건, 10월 혁명에 못지 않은 중요성이 있는 사건이었다.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성공적으로 건설함에 의해 쏘비에트 인민은 전 세계에, 1917년 당시의 러시아처럼 후진적인 나라가 20년의 기간 동안에 그것의 기술을 높이고 그 인민들의 삶의 질을 증진하고 그들을, 혁명 전의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위생적이고 잘 먹지 못하고 문맹이고 그리고 무지한 대중으로부터 건강하고 잘 먹고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여러 소식을 잘 알고 그리고 자부심이 있는 쏘비에트 시민들로 어떻게 전화했는지를 드러내었다. 사회주의를 건설함에 의해 쏘비에트 인민은 사회주의가 유일한 후진적인 나라에서 건설될 수 없다는 뜨로츠끼의 반동적인 이론에,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어려움들이 쏘비에트 정부와 당으로 하여금 뜨로츠끼주의자들과 우익들에 의해 옹호되었던 정책, 그리하여 첨언하자면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옹호되는 정책들에 찬성하여 기존의 정책을 포기하도록 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던 제국주의자들의 희망과 바람에 대해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전 세계는 실제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함에 의해 유일한 후진적인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라는 반동적인 이론을 분쇄하여 산산조각 낸 것에 대해 쏘비에트 인민, 쏘비에트 정부, 쏘련공산당(볼) 그리고 그 지도자인 J.V. 스탈린에 대해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뜨로츠끼주의자들과 우익들의 정책은 패배주의의 그것이었고 어려움에 직면하여 항복하는 것이었다. 패배주의적인 뜨로츠끼주의 강령 주위로 수많은 악명높은 패배주의자들, 예를 들면, 14차 당협의회 이후에 레닌주의 진영을 버리고 뜨로츠끼주의의 그것으로 이동했던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같은 패배주의자들이 모여들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당시에 계속하여 부하린, 리코프 그리고 톰스키에 의해 영도되는 우익 그룹들과 관계를 수립해갔다. 뜨로츠끼주의자들과 우익들 간의 화해는 뜨로츠끼가 전체적으로 우익들의 강령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고 부하린의 표현을 사용하면, 뜨로츠끼가 그의 좌익적 유니폼을 벗어버렸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을 뿐이다.





뜨로츠끼주의자들과 우익들은 류틴 강령7)에 기초하여 연합하였다. 류틴 강령의 본질은 다음과 같았는데 그것은 (i) 국경농장 뿐만 아니라 집단농장들의 해체 (ii) 쏘비에트 공장들의 외국 자본가들에 대한 임대 (iii) 지도력을 획득하고 위의 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볼세비키 당과 쏘비에트 지도자들에 대한, 특히 스탈린에 대한 테러를 지지했다.





류틴 강령의 본질은 그것이 쏘련에서 자본주의의 복고를 지지했다는 것이었다.





류틴 강령은 류틴 혼자만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우익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들은 모두 그것을 자세하게 토론했다. 그것(류틴 강령의―역자)의 유포의 시기에 우익들의 지도자들―부하린, 리코프 그리고 톰스키―은 배후에 있었다. 그러나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이 강령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당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러한 정보의 견지에서 보면, 그러한 정보의 일부는 모스크바 재판에서 혹은 그들에 대한 조사의 과정에서 빛을 보게 되었는데, 1932-1933년에서 쏘비에트 정부의 힘에 의한 타도와 쏘련에서 자본주의 복고를 위한 배신적인 활동에 종사한 다양한 반당적인 음모 조직들의 구성에 관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A. 뜨로츠끼주의자들과 지노비예프주의자의 혼합적인 그룹은 1936년 8월의 1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폭로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는 정치적 암살자들의 연합이었다:





(1) 지노비예프 그리고





(2) 카메네프





그들은 이전의 레닌그라드 반대파의 지도자들이었다.





다른 지노비예프주의자들은 다음과 같다:





(3) I. P. 바카예프, 그는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 공격들의 일상적인 조직을 담당하고 있었다.





(4) I. I. 라인골드, 그는 지노비예프주의자들의 지하 반혁명조직의 가장 활동적인 성원이었고 언제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와 직접적인 접촉을 하고 있었고 지노비예프주의자들의 모든 비밀 회의에 참가했다.





(5) G. E. 에브도키모프





(6) R. V. 피켈, 그는 지노비예프의 가장 신뢰받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오랫동안 그의 비서를 담당했다. 그는 모스크바 테러리스트 중앙의 활동적인 성원이었다.





뜨로츠끼주의자들은 다음과 같다:





(7)I. N. 스미르노프, 그는 1923-7년의 당내 논쟁의 기간에 뜨로츠끼의 지지자였고 쏘련에서 뜨로츠끼의 대리인이었고 쏘련에서 지하의 뜨로츠끼주의 반혁명 활동들의 실제적인 조직자이고 지도자였다. 그는 뜨로츠끼와 해외의 뜨로츠끼주의 조직들과 개인적 연계를 유지했다.





(8)A. E. 드라이쩌, 그는 이 그룹의 일상적 조직작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뜨로츠끼는 드라이쩌를 묘사하기를 “적군의 장교이고 나의 추방 동안과 그 후에 그는 열명 혹은 열 두명의 장교들과 함께 나의 집 주위에서 경호를 조직했다.” 뜨로츠끼와 함께 그는 1927년 11월 7일의 반혁명적인 시위를 조직했다. 뜨로츠끼가 알마아타에서 추방되어 있을 때 드라이쩌는 뜨로츠끼와 모스크바의 뜨로츠끼주의 중앙과의 통신을 조직했다.





(9)S. V. 므라치코프스키, 그는 뜨로츠끼가 가장 확신하는 사람이었고 개인적으로 그와 가장 가까웠다. 그는 한 때 군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기도 했다.





(10)E. S. 홀쯔만, 그는 뜨로츠끼주의 반혁명 조직의 활동적인 성원이었고 개인적으로 스미르노프와 연계되어 있었는데 그의 지시에 따라 그는 해외의 뜨로츠끼주의 중앙과 접촉을 유지했다. 1932년에 그는 개인적으로 뜨로츠끼로부터 쏘련공산당의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 행동을 위한 준비에 관한 지시를 받았다.





(11)V. A. 테르-바간얀,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뜨로츠끼주의자-지노비예프주의자 중앙의 조직자들의 한 사람이고 이 중앙은 뜨로츠끼의 테러에 대한 지시에 기초하여 조직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12)V. P. 올베르크, “온두라스 공화국의 특별한 그 시민”은 뜨로츠끼의 그리고 동시에 독일 정보기관, 게슈타포의 유급 대리인이었다. 그는 1927-28년 이후로 독일의 뜨로츠끼주의 조직의 한 성원이었고 테러적 행동을 수행하는 임무를 띠고 뜨로츠끼에 의해 쏘련으로 보내졌다.





(13)M. 루리, 그는 쏘련공산당과 쏘비에트 정부의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적 행동들을 가속화하라는 뜨로츠끼의 지시를 받고 1933년 3월 4일에 베를린을 떠나 모스크바를 향했다.





(14)N. 루리, 그는 테러적 행동을 할 목적으로 뜨로츠끼주의 조직의 특수한 임무를 띠고 베를린으로부터 1932년 4월에 쏘련에 도착했다.





(15)K. B. 버만-유린





(16)프리쯔 데이비드(크루글리얀스키), 그는 스탈린 동지의 생명에 대한 시도를 하는 지시를 받고 뜨로츠끼에 의해 쏘련으로 또한 보내졌다. 그는 이 지시를 뜨로츠끼로부터 코펜하겐에서 개인적으로 받았다.





 





B. 뜨로츠끼주의자들의 대항(parallel) 중앙. 이 중앙은 1937년 1월에 제 2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폭로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었다:





(1)Y. L. 피야타코프, 중공업위원회의 부인민위원(Vice-Commissar), 그는 이 매우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던 결과로서 그 중앙의 다른 성원들과 지지자들을 핵심적 위치에 배치할 수 있었다. 그는 소위 대항 중앙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2)K. B. 라덱, 그는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불가능성이라는 뜨로츠끼주의 이론을 고수했고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이론을 하나의 거리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이론으로서 조소했다. 그는 그 중앙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3)G. Y. 소콜니코프, 외무인민위원회의 보조위원이었고 한때는 재무인민위원회 인민위원이었다. 그는 1925년에 쏘련에서 내부 교역의 수립은 국가 자본주의 기업이라는 그의 주장에 의해 쏘비에트 국가를 비방했다.





(4)L. P. 세레브랴코프, 그는 소위 대항 뜨로츠끼주의 중앙의 지도자들의 또 한 사람이었고 노동조합에 대한 논쟁에서 레닌에 반대했었다. 그는 당에 대해 청산주의적 입장을 가졌다.





(5)N. I. 무랄로프, 그는 뜨로츠끼의 ‘병사’였고 뜨로츠끼의 가장 충성스런 그리고 견고한 측근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또한 그가 파괴자였고 분열책동자였다고 실토했다.





(6)Y. A. 리프시쯔, 그는 철도인민위원회의 보조위원이었고 동시에 피야타코프의 철도에 대한 범죄사건에서 조수였다.





(7)Y. N. 드로브니스, 그는 ‘희생이 더 많을수록 더 좋다’라는 공식에 따라 노동자들을 근절한 오래된 직업적인 뜨로츠끼주의자였다.





(8)M. S. 보구슬라프스키, 한 뜨로츠끼주의자.





(9)I. A. 크랴제프, 그는 수십대의 열차들을 파괴한 일본의 첩자였다.





(10)S. A. 라타이챠크, 그는 화학공업인민위원회의 중앙관리의 장이라는 핵심적 지위를 점했다. 이러한 책임있는 지위에서 “이 초(super)-파괴자는 그의 화학적 재능을 발전시키고 ... 폭발들을 일으키고 인민의 노동의 과실들을 파괴하고 인민을 죽인다”(뷔신스키)





(11)B. O. 노르킨





(12)A. A. 세스토프





(13)M. S. 스트로일로프





(14)Y. D. 투로크





(15)I. S. 흐라세, 이 사람을 뷔신스키가 묘사하기를 “3차원의 그리고 적어도 3개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며 그는 스스로 그의 주요한 직업을 웅변적으로 묘사했으나 매우 유쾌한 단어, 즉, 첩자라고 묘사하지는 않았다.”





(16)G. E. 푸쉰





(17)V. V. 아르놀드, 그는 “국제적인 방랑자”로 묘사되었고 많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고 무정한 악당이며 신뢰받는 뜨로츠끼주의 대리인이었다.





보여진 대로 이 그룹은 쏘비에트 정부와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처음에 언급된 그룹보다 훨씬 그러했다.










C. 우익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의 블록. 이 블록은 1938년 3월에 제 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폭로되었다. 그 블록에서 두드러진 것은 주요한 우익 지도자들이었다.





(1)N. I. 부하린, 그는 당에서 오랫동안 많은 중요한 위치를 점했지만 그는 정견에서 우유부단함과, 레닌과 당의 노선에 대한 그의 반대로 알려져 있었다.





(2)A. I. 리코프, 그는 쏘련의 전 수상이었다.





(3)G. G. 야고다, 그는 1936년까지 정치경찰인 OGPU의 수장이었다.





이 블록에서 뜨로츠끼주의자들:





(4)크레스친스키, 그는 전 베를린 주재 대사였고, 전 재무인민위원회 인민위원이었고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전 비서였다.





(5)K. G. 라코프스키, 그는 전 런던과 파리 주재  대사였다.





(6)A. P. 로젠골쯔, 그는 쏘련의 외국무역 인민위원회 인민위원이었다.





(7)S. A. 베세노프





우익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의 민족주의자 동맹들은 다음과 같다:





(8)G. F. 그린코, 그는 쏘련의 재무인민위원회 인민위원이었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였다.





(9)A. 이크라모프, 그는 우즈베키스탄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조직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이었고 그리고 1930년대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중앙아시아국의 비서였다.





(10)F. 호드야예프, 그는 역시 우즈베키스탄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조직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이었다.





(11)V. F. 샤란고비치, 그는 쏘비에트 권력을 침식하고 벨로루시를 쏘련에서 끊어내고 그것을 폴란드 자본가들과 지주들의 지배 하에 두려는 목표를 가졌던 벨로루시 민족적 파시스트 조직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쏘련 공산당(볼)에 결합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당이 NEP를 통하여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5개년 계획이 전개되고 그리하여 자본주의 복고의 가능성이 점점 희미해지자 민족주의자들은 결사적으로 쏘비에트 권력에 적대적으로 되었다. 그들은 부하린 그리고 리코프 같은 우익들의 동맹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두 경향들은(민족주의자들과 우익들)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우익들은 민족주의자들에게, 쏘련에서 권력을 획득한 후에 독립적인 부르주아 민족 공화국의 수립을 약속했다.





(12)M. A. 체르노프, 쏘련의 농업인민위원회 인민위원, 그는 외국에 있는 멘세비키 조직들과 연계를 유지했던 전 멘세비키였다. 그는 NEP시기에 쏘련공산당에 합류했다.





(13)L. G. 레빈, 그는 플레트네프 그리고 카자코프(아래를 보시오)와 같이 야고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의사들 그룹의 한 명이었다.





(14)D. D. 플레트네프





(15)I. N. 카자코프





(16)I. A. 젤렌스키, 그는 전국협동조합 관리연합(즉, 센트로소유즈Centrosoyuz의 의장)의 전 영수이었다.





지도적 그룹의 단순한 도구였던 정치적으로 덜 중요한 다른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7)V. I. 이바노프





(18)P. T. 주바레프, 그는 우랄에서 우익들의 반혁명적인 지하 조직의 조직자와 지도자 중의 한 명이었다.





(19)P. P. 블라노프, 그는 내무인민위원회의  전 비서였다.





(20)P. P. 크류치코프, 그는 M 고르키의 이전 비서였다.





(21)V. A. 막시모프-디코프스키, 그는 우익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의 블록에 의해 살해된 쏘련 인민위원회 부의장 퀴비세프의 이전 비서였다.










D. 군사적 그룹은 다음을 포함한다:





(1)M. N. 투하체프스키





(2)I. E. 야코프





(3)I. P. 우보레비치





(4)A. G. 코르크





(5)R. P. 아이데만





(6)B. M. 펠드만





(7)V. M. 프리마코프





(8)V. K. 푸트나





이 그룹은 어느 정도만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 우익들과 주요하게 접촉을 유지했다.










1933년에 뜨로츠끼의 지시에 따라 이들 그룹들은 그들이 정규적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그들의 정책을 조정하였던 연락 중앙을 수립했다. 처음의 세 그룹은 뜨로츠끼와(그는 추방 중이었다) 정규적인 접촉을 유지했고 그의 지시를 수행했다. 그 그룹들은 외국에 있는 뜨로츠끼와 정규적인 접촉을 유지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없었다. 그 그룹의 일부 성원들은 그들의 공식적 자격으로 때때로 외국에 나가야만 했다. 외국에 대한 공식적 방문 기간 동안에 그들은 뜨로츠끼와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접촉을 할 기회를 가졌다. 두 번째 그룹의 구성에서 보여지듯이 그 성원들 중의 많은 수는 파리와 베를린 같은 중요한 중심들에서 쏘련의 대사였던 뜨로츠끼주의자였다. 또한 피고들의 일부는 그들의 공식적 자격으로 모스크바에서 외국의 외교적 대표들과 만나야만 했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이 처음의 세 그룹들이 추방된 뜨로츠끼와 항상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극히 쉽게 만들었다. <노사과연>















번역: 편집부
















1) 패배주의라는 일반적 입장과 집단화에 대한 쿨락들의 저항에 의해 제기된 어려움들에 직면하여 항복한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부하린주의자들은 쿨락들이 사회주의로 성장해 갈 것이라는 비맑스주의적 이론을 또한 제기했는데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하에서의 계급투쟁의 메커니즘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부하린의 비맑스주의적 입장을 따랐다면 쿨락들은 사회주의로 성장해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반대로 적절한 경로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파괴했을 지배적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하린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뜨로츠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2) 기회주의자들은 1926년 10월 16일에 당에 선언을 제출했는데, 거기에서 그들은 분파적이고 분열적인 활동을 멈추겠다고 약속했다. 이 선언에 포함된 약속들의 위반에 이어서, 반대파의 지도자들은 또 하나의 선언을 당 중앙위원회에 1927년 8월에 제출하였다. 불과 몇 달 후에 10월 혁명 10주년 기념식에서 반대파는 그것의 다양한 선언들을 위반하면서, 당의 공식적 시위에 대하여 대항 시위를 행하려고 시도했다. 이 이후로 당의 인내는 사라졌다. 반대파가 분열을 위해 작업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했고 그리하여 반대파의 지도자들은 당으로부터 추방되었다.






3)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지하로 내몰리고 파시즘적인 상황들이 지배적인 나라들에서 뜨로츠끼의 글들이 자유롭게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스페인의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과 페르시아의 샤의 잔혹하고 전제적인 봉건적 파시스트 정권 하에 있는 스페인과 페르시아에서의 경우였다. 이 정권들은 뜨로츠끼주의의 반공산주의적 본질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영국의 ‘맑스주의자들’의 일부보다 더 기민한―기민했다. 유사한 상황이 파시스트 독일에서 지배적이었다. 우리는 ��뜨로츠끼로부터 티토에게��에서 제임스 클루그만에게서 들을 수 있다.(로렌스 & 위셔트 Ltd, 런던, 1951)





“공산당과 조금이라도 연계되어 있는 것이 오랜 기간의 투옥 그리고 아마도 고문 혹은 심지어 죽음을 의미했던, 그리고 맑스, 엥겔스, 레닌 그리고 스탈린의 모든 저작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 외국의 민주주의자들과 진보적 인사들의 저작들이 이탈리아의 도서관들과 서점들에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던 1930년대의 뭇솔리니의 이탈리아에서 뜨로츠끼의 저작들은 ‘새로운 종류의 공산주의’로서 ‘자유롭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번역되고 배부되었다. 내가 1938년에 벨그라드 대학의 반파시스트적이고 공산주의적인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를 거쳐 가면서 뭇솔리니의 밀랑(Milan)에서 몇 시간을 소비할 때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서점 창에 두드러지게 진열된 수많은 책들이 나의 시야에 잡혔다. 그것들은 뜨로츠끼의 새롭게 번역된 저작들이었다.”





“공산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 혹은 전투적인 노동조합 활동가 혹은 자유주의자 혹은 민주주의자라는 것이 체포, 집중 수용소, 그리고 종종 죽음과 고문을 의미했던, 세계적으로 가장 철저한 문학의 ‘숙청’ 그리고 책들을 불태우는 것이 제도화되었던, 쉴러의 ‘돈 카를로스’, 하이네의 시들 그리고 토마스 만의 소설들이 금지되고 혹은 ‘파괴적인’ 것으로서 불태워질 때인 히틀러의 독일에서 뜨로츠끼의 저작들은 광범하게 번역되고 배부되었다.”





“뜨로츠끼의 글과 그의 추종자들의 글들은 미국에서 하스트 출판사에 의해 30년대 중반과 후반에 자유롭게 발행되었다. ‘새로운 종류의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저작들은 살라망카와 부르고스의 프랑코 출판사에 의해 발행되었다. 폴란드 독재의 비밀경찰은 폴란드 노동계급운동 내에서 그들의 정탐과 파괴 작업을 촉진하기 위해 뜨로츠끼주의로 특별히 교육을 받았다.”






4) 전 세계의 부르주아 반혁명 사령부에 의해 행해진, 1932년의 우크라이나 기근에 대한 신화들과 거짓말들은 더글라스 토틀의 ��협잡, 기근 그리고 파시즘��이라는 제목의 뛰어난 책(progress books, 토론토, 1987)에서 철저하게 폭로되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뛰어난 저작을 읽기를 추천하는데, 그것은 사실들을 제기할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의 거짓된 선전 기제의 작업방식에 대해 거대한 빛을 던진다.






5) 사실상, 1924년에 뜨로츠끼의 집단화에 관한 제안들은 파괴의 한 형태였는데, 만약에 그것을 따랐다면 쿨락들이 사회주의로 성장해 간다는 부하린의 비맑스주의적인 이론의 수행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타도를 틀림없이 초래했을 것이다. 뜨로츠끼의 ‘좌익적’ 일탈과 부하린의 우익적 일탈의 본질은 동일이다-양쪽 다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타도와 자본주의의 복고를 초래한다.






6) 스탈린 동지의 사후에 쏘련에서 수정주의의 승리는 어떠한 면에서도, 사회주의 건설의 진전에 따라 자본주의의 복고를 초래하는 내전이 불가피하다는 뜨로츠끼의 엉터리같은 이론의 올바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쏘련에서 수정주의의 승리에 대한 이유들에 관해서 보면, 이것은 그것들을 다룰 때 혹은 장소가 아니며 그것들은 다른 곳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7) 류틴 강령은 또한 다음의 점들을 포함했다:





(a) 이 강령은 파시즘과 협정에 도달하는 것을 지지했는데 왜냐하면 피고 소콜니코프의 언어로 말하면, “중앙의 지도적 성원들이 고립된 혁명으로서 우리의 혁명은 사회주의적 혁명으로서 지속될 수 없고 초제국주의라는 카우츠키의 이론, 그리고 부하린의 조직된 자본주의라는 유사한 이론이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었다는 견해였다. 우리는 파시즘이 가장 조직된 형태의 자본주의이고 그것이 유럽을 정복하고 장악하고 있고 우리를 질식시키고 있다는 의견이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것과 협정에 도달하는 것이 더 낫고,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 퇴각한다는 의미에서 일정한 타협에 도달하는 것이 더 나았다”는 것 때문이었다.(「반쏘비에트 뜨로츠끼주의자 중앙에 대한 재판」, p. 489)





(b) 이 강령은 전쟁에서 쏘련의 패배를 지지했다.





(c) 이 강령은 또한 민주주의의 폐지를 지지했는데, 왜냐하면, 뜨로츠끼가 1935년에 라덱에게 썼듯이, 재판에서 라덱의 증언에 따르면 “어떠한 종류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있을 수 없다. 노동계급은 혁명의 18년을 살아왔고 그것은 광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 노동계급은 사적으로 소유된 공장들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가장 어려운 조건 하에서 외국의 자본들과 경쟁해야만 할 국가 소유의 공장들로 보내져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이 격렬하게 하향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어떤 형태가 필요한 지에 관계없이 강력한 정부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반쏘비에트 뜨로츠끼주의자 중앙에 대한 재판」, p.114)





(d) 마지막으로 이 강령은 쏘련의 분할을 지지했다. “우크라이나를 독일에게 그리고 마리타임 지역과 아무르를 일본에게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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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9) 하르팔 브라르 2010-04-29 2834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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