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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음악의 반란자 (12)
글쓴이 한스 아이슬러 E-mail send mail 번호 167
날짜 2010-04-20 조회수 2451 추천수 123
파일  1271759781_구음악과 신음악에 관하여.hwp

  













구음악과 신음악에 관하여











구음악과 신음악에 관하여





1925















[역자 주 : 이번 글에서는 아이슬러의 초기 문제의식을 볼 수 있다. 당시 아이슬러의 성향은 부르주아 좌파정도라 볼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에 기반한 사고는 없지만 부르주아적 인습과 위선을 타파하려는 의도는 명확히 볼 수 있다. 스승인 쇤베르크와 결별하는 것, 독일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다음 해인 1926년의 일이며 그때부터 아이슬러의 노선이 점점 명확해진다. 이 글에서는 아이슬러의 음악관의 맹아가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후에는 이것이 발전된 형태로 제시된다. 혁명적인 예술, 혁명적인 음악을 기존의 진부한 형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에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고,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동안의 역주에서 부연한 내용이 다시 등장하는 경우에는 주석을 생략하였다. 지난 연재를 참고해주면 감사하겠다.]















비난받지 않을 신음악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신음악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 이후2)의 것이다.) 그것에는 전통이 없고, 사기일 뿐이라거나 혹은 다음과 같이 해석되기도 한다. 신음악은 음악적 착상(idea), 선율 그리고 특히 형식을 파괴한다고들 말한다. 이 모든 비난이 옳다면 그것은 구음악과 신음악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은, 구음악이 새로운 것이었을 때에도 같은 비난이 겨누어졌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모차르트는 이해하기 쉬운 작곡가에 포함되지만, 그의 시대에는 복잡하고, 현란하며 무모한 불협화음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베토벤3)의 <교향곡 9번>이나, 더욱이 그의 마지막 4중주는 어떤가? 그것은 새로운 음향이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형식이 출현할 때마다 똑같았다.





오늘날 오백년 전과 다른 옷을 입는다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는데,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8시간 선 채로 기계작업을 하는 노동자가 르네상스 의상을 입는다면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무직 노동자가 책상에서 토가4)를 입는다거나 여성이 크리놀린5)을 입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그녀가 그렇게 차려입는다면 전차에는 어떻게 기어올라 탈 것이며, 오늘날 쇄도하는 군중 사이를 어떻게 돌아다닐 것인가?





슈베르트와 동시대 사람들은 가곡 <우편마차(Die Post)>6)를 놀림감으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오네게르(스위스 태생은 젊은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 <퍼씨픽 231(Pacific 231)>7)은 사람들이 듣기도 전에 조소했는데, 그것이 급행열차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작곡가나 그 작품의 비교가 아니라 작품의 제목이 문제다.) 슈베르트는 우편마차에 관한 곡을 “탈 것”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사랑의 전달자”라는 측면에서 작곡했다. 오늘날 우편마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음악가는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더라도 “급행열차”를 “사랑의 전달자”로 여길 수 없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슈베르트의 우편마차가 그랬던 것처럼 급행열차가 그럴 수 있음에도 말이다. 아마도 그 대신 급행열차의 속도와 힘, 혹은 그 시대의 다른 전형적인 것에 매혹될 것이다. 왜 급행열차가 ‘그 시대의 산물과 같은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물레방앗간은 서정적인 주제로 인기가 있다. 물레방앗간, 물레방아의 물살, 방아장이와 그의 딸에 관한 셀 수 없는 시가(詩歌, poem)가 다양한 결말로 작곡되었다. 오늘날의 작곡가들에게 이는 보다 어렵다. 낭만적인 물레방앗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방앗간 간판 아래 물살에 눕고자 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오늘날 물레방앗간은 보통 돌진하고, 내려치고, 쉭쉭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한 공장이다. 옛날 작곡가는 물레방앗간을 자연에 더한 장식물로 보았다. 그는 물레방앗간과 함께 그 거주자 및 그들의 가부장적인 생활을 사랑했다. 오늘날의 음악가8)가 진실한 감성으로 명료하게 사고한다면, 자신이 마주한 제분 주식회사에 대해 사뭇 다른 결말을 그려낼 것이다. 어쩌면 그는 수백 명이 일하는 것과, 빈곤과 고통을 보게 될 것이다. 자연에서와 달리 공장 뒷마당에서는 사랑의 선언조차 달리 전해진다. 그리고 그는 슈베르트가 묻던 것과 달리, 공장 폐수인 물살9)이 어디로 그리 빨리 흐르는지 조심스럽게 묻는다.





현대 음악가는 전적으로 다른 것에 인상을 받고, 따라서 전적으로 다른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러한 다른 감각이 표현 형식을 제공한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 음악적 형상 또한 다를 것이다. 필연적으로 음악가의 새로운 착상을 형성하는 제재(題材, material)도 그의 달라진 의도에 따라 변해야 한다. 이런 과정과 결과를 어떤 이들은 “새롭다”고 하며 다른 이들은 “현대적이다(modern)”라고 한다. 실재로 그것은 새롭지도 현대적이지도 않다. 단지 다를 뿐이다. 지금 현대 음악가가 자신의 선배들을 존경심 없이 대하거나 경멸한다고 믿는다면 잘못일 것이다. 현대의 음악가보다 더 구음악의 거장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 이는 없다. 하지만 이 존경과 이해는 옛 악파(old school)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속물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그들을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없는가?





세상의 어떤 예술 분야도 그 선행자의 작품과 철저하게 결별하진 않았다. 과거에 공통된 요소들은 “급진적(radical)”이라고 비난받는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형식이 자주 쓰일 뿐만 아니라(합주협주곡, 푸가, 조곡; 오페라에서는 아리아와 서창(敍唱)10)), 낱낱이 보면 고전 혹은 전(前)고전 음악의 계속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현재의 음악가가 매우 자신의 선행자의 작품을 심오하게 이해하여 포괄적인 훈련을 거쳐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능력과 과거 음악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의 예술을 자유롭게 펼치기 위해서 몸소 음악의 전체적인 발전을 체험해야만 한다. 예술의 표현이 얼마나 변화하든 간에, 예술의 판단 기준 그 자체는 언제나 똑같은 채로 있을 것이다. 요컨대 물레방앗간에 대해서인지 제분 주식회사에 대해서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국에 듣는 이는 스스로에게 작곡가가 음악적 악상을 지니고 그것을 형상화했는지 물어볼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장조의 삼화음인지 새로운 화음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주요한 것은 음악가 자신이 감동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높은 수준의 완벽성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지 여부이다.





현대 음악에 대한 더욱 유행하는 반대 의견은 그것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현대 음악은 이해하기에 너무 복잡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가?





왜 그럴까? 예를 들어 대부분의 청자들은 처음부터 베토벤의 사중주가 스뜨라빈스끼의 작품보다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쉽다고 믿는다. 청자가 언제나 고전 작곡가의 복잡한 작품에서 조차 한 세기 간의 음악적 전통이 익숙하게 한 유사성으로 몇몇 요점 주안점을 찾기 때문이다. 이런 유사성의 결핍으로 인해 아무리 원시적11)이라 할지라도 청자가 현대 음악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차치하더라도 청자는 개별 작품에서 자신이 익숙한 특정한 유형의 소리를 (그가 화성적으로 조화롭다고 하는) 원한다. 결핍은 그를 매우 낯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음악과 신음악을 가르는 참된 지점은 대개 작곡가가 아니라, 청자에 달린 것이다. 그것은 청자가 언제나 똑같은 것만을 듣길 원하며, 언제나 전과 같은 정서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한 청자들의 취향을 충족시키려면 천 번은 반복되었을 것들만을 연주해야 하며, 천 번의 반복과 또 한 번의 재현은 열등한 해석을 제시하기 마련이다. 확실히 단순한 음악적 효과보다는 음악의 주제가 문제다. 유감스럽게도 보통의 청자는 “물레방앗간”에 메어 있다. “물레방앗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데에도 그것을 듣고 또 듣기를 원한다. 쇤베르크 같은 음악가가 나타나서 <삐에로>12)를 작곡하면 청자는 공포에 두 손을 들며 “어떻게 이따위를 작곡할 수 있냐”고 외친다. 고로 그는 처음부터 이런 작품에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스트라우스가 오페라 <쌀로메>와 <엘렉트라>13)를 시작했을 때도 이러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누구나 천재가 자신의 독자적이며 새로운 작품에 대해 말할 때 변함없이 그럴 것이다.





모든 음악 애호가와 청자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공연장에 소중한 전통의 수호자로써만 오지는 마라. 미의 표준에 매달려 작품을 망치지 말라. 그것은 당신이 진짜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맞는지” 혹은 백년 전에 이 화성이 “허용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참고서를 뒤지지 마라. 만약 복잡한 음향을 듣는다면 이해하려고 하고, 창작자를 꾸짖지 마라. 모든 현대 작곡가가 혁명가이거나 조롱을 하려는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단지 음악을 만들길 원하며 그뿐이다. 우리의 위대한 거장들—젊었던 나이 들었던—이 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모두 자신의 시대에 그리고 그 시대의 관점에 입각하라. 이것이 온전한 비결이다!















출처: Von alter und neuer Musik, Musik und Gegenwart(음악과 현대) Musikblätter des Anbruch(여명의 악보)가 발행한 일련의 리플렛, Vienna, 제 3권, c. 1925.





EGW Ⅲ/Ⅰ, pp. 18-21.





이것은 출판된 아이슬러의 글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노사과연>










번역: 최상철(운영위원)





 






1) Richard Strauss. (1864-1949) 독일의 작곡자 지휘자. 드뷔시와 말러와 같은 동시대 작곡가와 달리 초기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바그너의 후예로 훗날 나치가 집권 한 이후 적극적인 협력자였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Michael H. Kater, Music and Nazism(음악과 나치주의), Laaber, 2003을 보라.






2) 이 글이 1925년도에 쓴 것임을 고려해야 한다. 이때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도 아직 고전이 되지 않았었다. 20세기 초반 혁신을 가져온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은 이제는 일반화된 작곡 방식이다. 작곡과에서 이와 관련한 충실한 수업을 받은 학생이라면 어렵지 않게 12음 기법을 사용해 작곡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대 쇤베르크의 음악은 일반 대중에게는 소음 그 자체(지금도 쇤베르크의 음악은 환영받지 못하지만)였다. 






3) ��정세와 노동��, 2009년 5월호의 연재를 참고하라.






4) toga. 로마시대 시민의 의상. 궁정에서 널리 입었는데 외국인은 입지 못했다.






5) crinoline. 1840년대 후반부터 유행한 풍성하게 부풀린 치마.






6) 원주: <우편마차>, 슈베르트의 연작 가곡 <겨울 나그네>의 13번 째 곡.





역주: 마장조의 곡으로 도시에서 온 우편마차를 보며 연인을 떠올리는 곡이다. 피아노 반주에서 말 발굽 소리를 연상케 하는 리듬이 등장한다.






7) 원주: 아루투르 오네게르(Arthur Honegger. 1892-1955). <퍼씨픽 231>, 1923년 작곡, 기관차의 일종을 지시한다.





역주: 오네게르는 작곡 당시에는 이 곡에 교향적 악장(Mouvement Symphonique)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인데 곡이 완성되고 나서 <퍼씨픽 231> 이라고 부제를 붙였다. 1949년에는 동명의 영화에도 삽입되었다. 이 곡은 역동적인 셋잇단 음표의 사용과 혼을 비롯한 금관악기의 활약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곡은 쏘련의 작곡가 모쏠로프(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Мосоло́в, 알렉싼드르 바씰리예비치 모쏠로프, 1900-1973)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준 곡이기도 하다.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vol. 8, Macmillan publishers, 1980. p. 680.





한국에서 서양음악 교육은 오래 전 귀족의 유흥음악과 몇몇 대표적인 고전 작품에 한정되어 있는데 오네게르의 것과 같은 20세기 작품들도 초중등 수업에 충분히 교육적인 목적으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8) artist. 맥락상 musician과 같은 뜻으로 음악가로 번역한다. 이하에도 같다.






9) 앞에서와 같은 물레방아의 물살(millstream)이다.






10) recitative. 이딸리아어는 recitativo.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레치타티보라고 쓰기도 한다. 대개 독창으로 하며, 자연적인 리듬과 대화의 억양에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1600년대부터 등장 하였다.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vol. 15, Macmillan publishers, 1980. pp. 643. 오페라, 오라트리오, 칸타타에서 행동이나 내용을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되며 서창이 등장한 이후에는 아리아나 관현악단의 연주로 이어진다.






11) primitive. 이 표현은 스뜨라빈스끼의 작품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12) 연재 중에 여러 차례 등장한 <달에 홀린 삐에로>를 말한다.






13)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특색은 오페라와 교향시에 있다. 이 두 작품은 복잡한 화성과 효과적인 관현악의 수법, 풍부한 선율과 예각적인 표현, 괴기 취미의 내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안동림, ��이 한 장의 명반��, 현암사, 1997, p. 1509. <쌀로메>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쌀로메에 관한 오페라이며 <일렉트라>는 유명한 그리스의 비극의 거장 쏘포클레스의 작품에서 비롯한 것으로 모두 20세기 초반의 작품이며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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