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세
현장
이론
기타
 
지난호보기
월간지/단행물
구독신청
세미나신청
토요노동대학신청
1
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12)
글쓴이 사사키 타츠오 E-mail send mail 번호 166
날짜 2010-04-20 조회수 2355 추천수 135
파일  1271759538_아프간.hwp

  













수리개혁의 미실시











수리개혁의 미실시










게다가 이 혁명은 수리개혁(물의 할당, 배분)이 병행되어 실시되지 않았다. 혁명평의회 의장의 ‘토지에 관한 포고’(1978년 11월 28일 및 1979년 1월 1일) 안에도 그 문언(文言)은 눈에 띄지 않는다.





1970~71년의 대가뭄에 관한 사사키 토오루(佐々木徹)의 보고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겨울철 힌두쿠시 산맥에 눈이 쌓이지 않아서 가뭄이 되고, ‘국민적 파국’에까지 이르렀다. 봄부터 가을까지의 눈석임물(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서 흐르는 물―옮긴이 주)이 호수와 하천으로, 마르는 일 없이 흘러가야만 이 나라에서는 농업이 이루어진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눈 없는 카불이라면 돈이 없는 편이 낫다’는 옛 속담이 있다. 대지 전체에 물이 없어지면, 설령 돈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쨌든, 넓은 건조지에서는 물이 부족하기 쉽다.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카레즈 또는 카나트라고도 하는 지하관개수로가 뚫리고 있다. 인류가 언제부터, 어디에서 처음으로 개발했던 것인지 지금도 분명치는 않은 카레즈 농업이 이곳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연구지 『Afghanistan』 제3호,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최근의 한발 피해アフガニスタンに於ける最近の旱ばつ被害」, 사사키 토오루, 1973년)





일본에서는 이 방면의 연구의 일인자 오노 모리오(大野盛雄)의 『아프가니스탄의 농촌으로부터』(이와나미쇼텐, 1971년)와 도쿄대 서남 힌두쿠시 조사대의 상세한 현장연구(앞서 언급한 『아프가니스탄의 물과 사회アフガニスタンの水と社会』)가 있다.





카레즈의 수리시스템에 대해 위의 선각자의 보고를 들어보도록 하자.





이미 소개한 것처럼, 아프가니스탄의 연간 강우량은 카불 시, 콘두스 시, 헤라트 시 및 칸다하르 시의 네 도시 평균이 251.5밀리미터였다. 이 강우량으로는 도저히 농경은 불가능하다. 전술했던 겨울산의 눈석임물이 아프가니스탄의 농업을 규정한다. 그 눈석임물은 지표면을 흘러서 호수와 하천의 물이 되는 것과, 지하복류수를 이루는 것이 있다. 카레즈는 지하복류수를 찾아낸 것이다.





이런 지방에서는 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관념이 형성되어 있다. 즉, 하천을 흐르는 물은 ‘만인이 공유해야 하는, 임자 없는 것이다’. 카레즈의 물은 ‘노동에 의한 생산이고, 생산물, 소유주의 것으로서의 물’이다. 다시 말해 카레즈의 물은 상품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물의 소유와 비소유에 한정해서 본다면, 차수지주(借水地主, 지주이자 정액의 물값을 물 주인에게 지불), 차지수주(借地水主, 물의 소유자로 정액의 지대를 지주에게 지불)이라는 계층이 존재한다. 물 주인이 지주인 경우가 많으나, 물 주인은 일정한 수량(水量)과 물에 대한 권리를 팔기 때문에 상인적 성격이 강하다. 이로써 농지개혁과 수리개혁의 대상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물 주인도 지주와 마찬가지로 봉건적ㆍ반(半)봉건적 착취계급이므로, 양자를 포괄해서 통일해 개혁하지 않으면 최종적 해결은 되지 않는다.





카레즈의 소유형태에는 두 종류가 있다. 다름아닌, 촌락공동체에 의한 공동소유와 사적소유(물 주인은 복수인 경우가 많음)이다. 오노 모리오는 그의 저서에서, 공동소유의 카레즈 중심 사회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물의 의의는 극히 중요하고, 물의 양이 생산력을 토지보다도 훨씬 강하게 제약한다.” “물의 양에 의해 파종량이 결정되고, 수확고가 정해진다. 면적에 의해 파종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물의 이용ㆍ배분에 관한 제어라고 하는 것이 이 마을의 모든 질서의 가장 기초적 조건이 되고 있다.” “모든 경지단위(단위파종량)에 대해, 물을 평균으로 공급한다는 원칙이 물의 이용ㆍ배분에 관한 제어의 방법을 관철하고 있다.”(『아프가니스탄의 농촌으로부터』, 48쪽)










예를 들어 한정된 카레즈의 수량(水量)을 평등하게 공급하는 경우, 부근의 경지 전부에 상시적으로 물을 배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일정 기간, 일정 구역에 물을 가두고, 일정 구획을 휴경지로 한다.





앞서 보여준 ‘농지분류표’ 안의 제3, 4, 5, 6 및 7급의 토지에서는, 일기작(一期作), 격년 경작(1년 휴경지), 2년 간격 경작(2년 휴경지), 2년 이상 간격 경작이 있다. 이는 카레즈의 물을 평등ㆍ공평하게 경지에 배분할 필요성으로부터 태어난 엄격한 ‘제어의 방식’이다.





공동소유의 카레즈에서는 농민 전체가 제어 시스템에 참여하고 있다. 농민들의 대표적인 파수꾼이 촌장(가리아달)이고, 그는 카레즈로부터 흐르는 물의 배분의 실무와 감시를 행하고 있다.





카레즈가 공유되고 있는 경우는, 수리개혁은 본질적으로 필요하지 않다. 물의 배분에 대한 대가 안에는 기본적으로 물 주인에 의한 착취ㆍ이윤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경우의 물은 상품이 아닌 것이다. 다만 촌 소유의 카레즈를 유지하거나, 더욱 증설하거나 하는 경우에는 공동부담, 공동작업을 행한다. 정부는 촌민이 공동소유의 카레즈를 유지하기 곤란한 경우, 그 원조나 부담의 경감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지하수로가 토사로 메워져 유수가 나빠질 때, 토사를 파내는 작업을 한다. 영화 <되살아나라 카레즈>(앞서 언급)에서 지상수로와 지하수로, 지하수로의 개수공사를 하는 농민군상의 영상이 인상적이었다.





사적 소유의 카레즈의 경우, 물의 배분에 대한 대가(물값)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정액소작인(※)이, 카레즈 관개로 경작하는 경우와 하천관개로 하는 경우를 비교해보자.










※부재지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경우, 토지 이외의 주요한 생산수단인 종자, 비료, 농기구, 소와 쟁기를 소작인이 제공하는 것. 이 경우, 소작인의 수확고 전체에 대한 몫은 분익소작인(뒤에 서술) 보다 많다.










로가르 지방(카불 주의 남쪽)에서는,





A: 정액소작인이 카레즈의 물로 경작할 때, 그는 1제리브(약 0.2헥타르)에 대해 25셀의 소작료를 지주에게 지불한다.





B: 마찬가지로 하천관개로 경작할 때, 13셀을 지주에게 지불한다.





A, B 어떤 경우에도 ‘물값’은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A의 경우 소작료 안에 물값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B의 하천관개 물은 ‘만인공유의 물’이고 원리적으로는 상품이 아니므로, 물값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바꿔 말하면, A의 경우, 소작인은 지주에게 지대와 물값을 일괄해서 납부한다는 것이다. A의 경우 25셀, B는 13셀이고, 그 차이인 12셀이 물 주인에게 지불되는 물값인 셈이 된다. 1셀이란 7.3킬로그램으로, 작물(곡물)을 무게로 표시한다.





또한 카불 주의 북쪽에 인접한 파르완 주에서는, 마찬가지로 정액소작인의 하천관개인 경우 1제리브 가량의 몫은 수확고의 60~70% 또는 50셀이다. 사적 소유의 카레즈일 때는 40% 또는 40셀이다. 이 예에서도 하천관개인 편이 소작인의 몫은 많다. 그 차이 10셀이 물값이다.(앞서 언급한 『아프가니스탄의 물과 사회』, 43쪽)





분익소작인(※)의 경우 물값도 대체로 정액소작인의 그것에 준한다.










※ 분익소작인이 제공하는 생산수단은 정액소작인의 그것보다 적고, 대부분 노동력뿐이고, 따라서 수확고에 대한 몫도 적다.










어쨌든 소작인이 부담하는 물값은 대체로 수확고의 10% 전후이고, 이 부담비율은 소작인에게 있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물 주인은 배수(配水)할 때, 반드시 이만큼의 물값을 물 이용자(소작인)로부터 거두어들이고 있다. 이렇듯 하천관개 물의 은혜를 입는 사람과 카레즈 관개의 물을 이용하는 사람 사이에는 물값의 부담에서 차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 주인과 물의 이용자 사이에는, 경제적으로는 상품으로서의 물값을 둘러싼 적대적인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더구나 물주가 물의 배분량, 배분 시간을 자의적으로 조절해서 이용자(소작인)를 억압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경제외적강제라고 한다. 이런 것들을 개혁하는 것이 수리개혁이다. 아민의 개혁에는 이것이 제외되어 있던 것이다.















선행하는 농민운동의 부재










더구나 농지개혁ㆍ수리개혁에 앞서,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는 그것들을 받아들일 준비ㆍ도움닫기 기간이 필요한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그것이 없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개혁에 선행하는 농민운동이 실행되고 있고, 그것이 농지획득 투쟁을 행하는 주체를 확립하고 있는, 또는 계속 확립하고 있다는 것이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운동이 전무했던 것도 아니고, 가뭄피해 때 농민의 폭동 등도 일어나고 있었지만, 의미 있는 개혁으로 직접 이어지는 운동은 없었던 것이다. 지주가 나서서 자신의 농지를 소작인에게 양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지주는 종종 마음에 들지 않는 소작인을 쫓아낸다. 이는 소작인 측에서 말하자면 소작권의 상실이다. 소작인은 그러한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러한 봉건적 소작ㆍ예속관계로부터 탈각하기 위해, 가령 소작인은 지주에 대해 우선 소작권을 확립하고, 그것이 실현되면 다음으로는 소작료 인하 요구로 투쟁한다. 이러한 일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각각의 혁명과 농민운동의 경험이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일본에서도 소작권 옹호 투쟁이나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농민운동은 꽤 광범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일이긴 하지만, 나는 소지주 가문 출신이다. 어릴 적 어느 늦은 가을밤, 작업복을 일본옷으로 갈아입은 마을의 농민들 몇 명이 우리 집의 이로리(일본식 실내 사각 화로―옮긴이 주)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한사람씩 아버지와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용은 잘 모르지만,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닌 것은, 그 말투 하며 전체적인 분위기로 알 수 있다. 그 가운데는 자신의 아들을 군대에 빼앗기고 남겨진 노인으로서는 농작업이 불가능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에 모두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아버지는 큰 목제 주판을 가지고 나와, 수를 표시해 상대에게 건넨다. 그러면 농민 측은 그 마디 굵은 손끝으로 주판알을 움직여 아버지에게 돌려준다. 즉 이렇게 주판을 번갈아 건네며 흥정하면서 소작료의 감액분을 정하는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는 지주 나부랭이였고 그들 농민은 소작인이다. 소작료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해는 흉작이었다. 또 아들이 전쟁터에 나가 농작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소작료를 줄여달라는 요구이다. 그들은 미리 의논해두고 지주에게 교섭을 하러 왔던 것이다. 이는 전쟁 중의 농민운동의 한 가지 예이다. 이윽고 전쟁이 끝나자, 점령군의 농지개혁 지령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들은 농민조합의 깃발을 올렸다.





그 실천 사례를 베트남노동당에서 살펴보자. 





호치민은 샌들을 신고 농촌에 빈번하게 다니며, 투쟁하고 있는 농민들과 깊이 교류했다. “농민과 함께 일하고, 농민과 함께 식사를 하고, 농민과 함께 기상한다”(세 가지를 함께)를 모토로 하면서, 그는 수차례에 걸쳐 소작료 인하 운동과 식민지주의(植民地主義) 지주의 토지개혁을 병행하여 수행하도록 촉구했다. 또한 제2차대전 중에는 ‘당은 일시적으로 토지혁명의 슬로건을 삭제하고, 소작료와 고리대금의 이자 인하’를 행했다.(「당의 30년의 활동」, 앞의 책 『호치민 선집』 제3권, 428쪽) 이리하여 베트남노동당은, 농민의 주체적인 조직력(단결)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농업혁명을 추진했다.





PDPA의 실천에는 이 부분이 결락되어 있었다. 또한 PDPA의 개혁에는 다른 사회세력에 대해 고려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중농, 부농, 게다가 지주 역시 일시적으로 자기 편으로 만드는 전략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호치민은 ‘빈농과 고용농에 의거해, 중농과 단결하는 것. 그들과 단결하여, 함께 식민지주의를 몰아내고 지주들을 쓰러뜨려 승리를 쟁취한다. 지주계급도 결코 단결해 있을 리가 없다’고 반복하여 역설하고 있었다. 더구나 ‘북베트남에서의 토지개혁’의 과정에서는 지주를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배신자 지주, 반동주의자 및 지방의 폭군, (2) 일반 지주, (3) 저항에 참가하거나, 자식이 저항에 참가하고 있는 지주, 민주적인 인사. 그들의 재산은 ‘그들의 정치적인 자세’에 의해 몰수, 무상접수(지주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음), 유상접수 및 기부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들 조치는 봉건적 지주를 분열시키기 위해서였다.(『베트남의 농업과 농민ベトナムの農業と農民』, 미도로 타츠오(美土路達雄) 감수, 니이 요시코(新居芳子) 옮김, 민슈샤, 1969년, 286쪽).





아프가니스탄의 농지개혁에서는, 어제까지 토지가 없었던 농민이 갑작스레 1헥타르의 농지를 손에 넣는다. 비록 소규모라고 해도, 농지를 소유하고 경영주가 되면 경영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은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설령 농지를 개인소유화해도 협동조합과 같은 제도가 개개의 농업경영을 보충하지 않으면, ‘가난한 지주’는 그 토지를 내버려둘지도 모른다. 이 개혁에는 협동조합화가 결여되어 있었다. 게다가 종자ㆍ농기구ㆍ비료 등을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그들에게 이들 생산수단을 입수하게 하는 대책이 나타나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제5급 농지는 격년으로 휴경지가 되는 경지이지만, 그렇게 휴경하는 1년간은 고용농민이 되든가 도시에서 일하고 다음해 급수될 때 새로이 종자를 사서 파종하지만, 아마도 종자 구입대금을 미리 준비해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이 개혁의 결과, 분배된 농지 전체에서 경작된 것은 그 1/4 정도였다는 보고이다. 이것으로는 인위적 흉작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노사과연>










번역 : 리떼(회원)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164 <기획번역>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12) 사사키 타츠오 2010-04-20 2355 135


우 156-060)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435번지 진안상가 나동 2층 (신주소: 노량진로 22길 33) 
(전화) 02-790-1917 / (팩스) 02-790-1918 / (이메일) wissk@lodong.org
Copyright 2005~2022 노동사회과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