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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8)
글쓴이 하르팔 브라르 E-mail send mail 번호 165
날짜 2010-04-20 조회수 2209 추천수 129
파일  1271730560_tro.hwp

  

























2부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불균등한 경제적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몇몇의 나라에서 혹은 심지어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





가능하다.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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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집단화―농촌에서 사회주의의 건설















지도력의 역할










우리가 바라건대 위에서 보여주었던, “사회주의화된 소유”는 자동적으로 사회주의적 산업을 건설하지 않는다. “사회주의화된 소유”는 사회주의적 기초 위에서 농업을 재조직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사회주의적 산업화의 정책에서처럼, 집단화의 문제에 대한 잘못된 정책들에 맞서 싸워야 했고 그것을(올바른 정책을―편집자) 지켜야 했다. 올바른 볼세비키적, 레닌주의적 정책은 반볼세비키적 정책들에 맞서 자신의 승리를 위해 싸워야만 했다. 그러면 이들 잘못된 정책들은 무엇이었는가?















집단화에 대한 부하린-리코프 그룹의 정책










이들 잘못된 정책들의 첫째는 부하린, 리코프 그리고 톰스키에 의해 추구되었다. 이 정책은 농촌에서 쿨락에 대한 사회주의적 공격의 포기, 산업의 성장률을 늦추는 것, 그리고 집단적 농장보다 개인적 농장에 대한 의존을 선호하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곡물 전선에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을 창출했을 것이고 농촌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들―쿨락들―은 쏘비에트 정부에게 지시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하린은 사실상 쿨락들에게 ‘부자가 되라’는 구호를 제기했다. 당 중앙위원회는 즉각적으로 이 구호를 비난했고(뜨로츠끼의 반대되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부하린은 이 구호를 철회하는 글을 써야만 했다.















집단화에 대한 뜨로츠끼와 지노비예프의 정책










이들 잘못된 정책들의 두 번째는 뜨로츠끼와 지노비예프에 의해 옹호된 것이었다. 이 정책은 모험주의로 가득찬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중농층과 동맹을 실행하기 전에, 그리고 곡물 생산의 영역에서 부유한 농부가 쏘비에트 국영농장들과 집단적 농장들에 의해 대체되기 전에 1925년에 때 이르게 쿨락에 대한 공격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들―쿨락들―은 단지 무자비한 계급투쟁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었다. 이 계급투쟁을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중농층과 확고한 동맹을 필요로 했다. 이 동맹은 오직 중농을 집단화로 전환시킴에 의해서만 강화될 수 있었다. 이것은 이번에는 산업이 트랙터들, 다른 농업기계류, 비료들의 공급에 의해 농민층에게 실제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을 할 때에만, 국가가 신용들을 줄 수 있을 때에만 달성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농층은 그들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그리고 사례에 의해―강제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개인적 영농에서 집단적 영농으로 전환할 것이 설득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중에 보여지듯이, 헤아릴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이 농촌 곳곳에 있는 국영농장들 그리고 기계와 트랙터 스테이션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국영농장 세프센코는 최초의 기계ㆍ트랙터 스테이션을 설립했고 주위의 농민들에 대해 기계류의 대여를 통해 도움을 주었다. 이와같은 조치들의 성공, 농민층에게 적극적으로 지원을 줄 수 있을 정도로의 산업의 발전 그리고 신용을 줄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은 중농층을 집단적 영농으로 전환시키고 그리하여 노동계급과 중농층 간의 동맹을 강화시키는 요인들이었다. 이러한 강화된 동맹은 이번에는 쿨락에 관한 쏘비에트 정책에서 첨예한 전환을 야기했다. 쿨락들을 단순히 제한하는 정책으로부터 당은 계급으로서 쿨락들을 제거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것은 그리고 이것만이 1925년에 쿨락들을 공격하는 것이 왜 가능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1930년에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쿨락의 제거는 뜨로츠끼와 지노비예프가 1925년에 제안했듯이 단순히 ‘포고들’에 의해 달성될 수 없었다. 그것은 농촌에서 무자비한 계급투쟁―그를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빈농과 중농과의 확고한 동맹을 필요로 했던 계급투쟁; 그리고 그 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1925년에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30년에는 모든 필요한 조건들이 쿨락들에 대한 이 무자비한 계급투쟁을 위해 존재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뜨로츠끼와 지노비예프에 의해 옹호된 정책은 부하린-리코프 그룹에 의해 옹호된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었다. 1925년에 그것을 따랐다면 그것은 쏘비에트 정부와 노동계급을 부농층에 의해 지배당했을 중농층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쏘비에트 정부를, 대부분의 농민층과, 뜨로츠끼가 선호하는 표현을 쓰면, “적대적인 충돌”로 이끌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뜨로츠끼의 죽음, 파멸 그리고 절망이라는 예언의 실현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유형의 두 정책은 극단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들을 따랐다면 그것들은 사회주의적 요소들에 대한 자본주의적 요소들의 지배를 초래했을 것이고 종국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타도를 초래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본질은 동일하다. 비록 그것들이 표현된 형태에서는 아니지만. 형태라는 점에서 부하린, 리코프 그리고 톰스키의 정책은 우익-기회주의였고 반면에 뜨로츠끼와 지노비예프의 그것은 좌익-모험주의였다. 형태는, 좌익-모험주의가 초혁명적인 수사들로 덮어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간파하고 맞서 싸우기에 더 어렵다는 것 때문에 만 의미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두 유형의 기회주의는 노동계급운동 내에서 부르주아지를 위한 실제적이고 강력한 지원을 구성한다는 것은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이들 잘못된 정책들에 대한 스탈린의 비판들










뜨로츠끼주의자들과 부하린주의자들에 대해 그들의 쿨락에 대한 싸움의 문제에서 잘못된 정책들을 비판하면서 그리고 공격을 뜨로츠끼주의자들에 집중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말했다:










“두 개의 일탈들(즉, 쿨락들을 과소평가하는 것과 그들을 즉각적으로 폐지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다. 그들 둘 다 나쁘다. 우리는 그들 중 어느 것이 더 나쁜가에 대해 논쟁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것과 우리가 싸우기 위해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하는가를 논쟁하는 것은 실천적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당이 쿨락들에 대해 무자비한 투쟁을 수행할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는지 혹은 (당분간 쿨락들을 무시하면서) 중농층과 동맹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백명 중에 아흔 아홉명의 공산주의자들은 당이 ‘쿨락을 공격하자!’라는 표어에 따라 행동할 준비가 더 잘되어 있다고 말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그 동지들이 자신들의 길을 가게 내버려 둔다면 쿨락들은 즉시 가죽이 벗겨져 버릴 것이다. 경쟁적인 정책에 관해 말한다면, 쿨락을 즉각 폐지하는 대신에 중농층과의 동맹으로 들어가는 것에 의해 쿨락들을 고립시키는 훨씬 더 복잡한 계획을 추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정책―이것은 동지들이 결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당이 이들 두 일탈들에 대한 투쟁에서 자신의 화력을 두 번째의 일탈(쿨락들을 즉각 폐지하려고 하는)에 집중해야만 한다고 내가 믿는 이유이다.”(스탈린, 14차 당대회 개막연설)










이 점에 관해 또한, 뜨로츠끼의 불운들은, 그것의 본질이 농민층에 대한 불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조건 하에서―노동계급의 지도력 하에서―농민층의 기본적 대중들은 사회주의 건설로 끌어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의 결여, 그리고 혁명의 상이한 단계들에서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 후에 농민층의 상이한 부문들의 역할에 대한 이해의 결여인, ‘영구혁명’ 이론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사회주의화된 소유”에 더하여 올바른 정책과 지도력에 대한 필요―누구에게나 명백한데 그러나 그것은 뜨로츠끼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지식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이 우리가, 전에 수 천 번도 넘게 언급되었던 초보적인 진실들의 반복으로써 집단화라는 주제에 대해 시작을 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이유이다. 죽은 뜨로츠끼를 반박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뜨로츠끼주의자들이 노동자들에게 행하는 왜곡들과 부패―특히 소부르주아적 수사에 유혹되는 경향이 있는 젊은이들에 대해 그러한데 왜냐하면 올바른 정책, 올바른 지도력 그리고 올바른 이론의 역할을 부정하는 ‘맑스주의자들’(레닌이 말했듯이 “불쌍한 맑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와 맞서고 그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 집단화로 돌아가자.















1927년: 농업이 산업의 뒤에 처지다










1927년까지 대규모 사회주의적 산업의 신속한 성장이 있었다. 그러나 농업의 경우에는 모습이 매우 달랐다. 전체로서 농업 생산은 전전의 수준에 도달했지만, 곡물생산은 단지 전전 수준의 91%였다.





설상가상으로 곡물생산의 시장거래 몫은―도시들에 공급하기 위해 판매되는 곡물의 양―전전 수치의 37%에도 달하지 못했다. 대규모 농장들을 작은 농장들로 쪼개는, 그리고 작은 농장들을 더 작은 농장들로 쪼개는 과정이 너무 과도하게 진행되었다.





농업의 영역에서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허용된다면 도시의 인구와 군대는 고질적인 기근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유일한 출구는 트랙터들과 다른 현대적 농업 기계류의 사용을 가능하게 하고 그리하여 식량생산과 그것의 시장판매 몫을 증가시킬 대규모 농장으로 전환이었다. 쏘비에트 국가는 선택에 직면했다. 농민대중들을 파멸시키고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동맹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쿨락들을 거대하게 강화시키고 그리하여 농촌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영원히 종식시키는 대규모의 자본주의 농장을 채택할 것인지 아니면 농업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해 트랙터들과 기계류의 사용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동맹을 강화하고 쿨락들과 그들의 자본주의 복고라는 꿈에 호된 타격을 가할 대규모의 사회주의 농장들로 소규모 농민 보유지들을 합병하는 사회주의적 대안을 채택할 것인가의 선택이었다.





쏘비에트 국가와 볼세비키 당은 이미 언급한 것의 견지에서 두 번째 대안―대규모 집단농장을 통한 농업의 발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선택했다. 이러한 선택에서 볼세비키 당은 소규모 농장으로부터 대규모의 협동적인 집단농장으로 이행의 필요성에 관한 레닌의 다음과 같은 교훈에 의해 인도되었다.










“소규모 농장으로는 빈곤으로부터 탈출구는 없다.” (선집, 8권, p. 195)





“농민의 농장이 더 발전하려면, 우리는 그 다음 단계로 그것의 이행을 또한 확고하게 확신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소규모의, 고립된, 최소한의 이윤을 남기고 가장 후진적인 농민의 농장들이, 불가피하게 점차적인 합병의 과정에 의해 대규모 집단농장들을 형성하는 것이다.” (선집 9권 p. 151)





“우리가 농민들에게 실천적으로 공동의, 집단적인, 협동의 그리고 아르텔 농장의 잇점을 입증하는 데 성공할 때에만, 국가권력을 보유하고 있는 노동계급은 그것의 정책의 올바름을 농민들에게 실제로 확신시킬 수 있고 수백만의 농민들의 실제적이고 든든한 추종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선집 8권, p. 198)















15차 당대회―집단화










15차 당대회가 1927년 12월 2일에 열렸다. 중앙위원회를 대표한 그의 보고에서, 스탈린 동지는 사회주의 산업의 신속한 팽창을 언급하면서, 당에게 다음과 같은 과제를 부여했다:










“도시와 농촌에서 모든 경제적 분야들에서 우리의 사회주의적 핵심적 입장들을 확대하고 공고화하는 것 그리고 국가경제로부터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추구하는 것.”










기계류의 사용을 배제하고 쏘비에트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던, 소규모 개인적 농장에 기인한 농업에서의 후진성에 주목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물었다:










“출구는 무엇인가?”










그는 계속하여 답을 했다:










“출구는, 소규모적이고 분산된 농민의 농장들을 토지에 대한 공동의 경작에 기초한 대규모의 연합된 농장들로 전환시키는 것, 새롭고 더 높은 기술에 기초한 토지의 집단적 경작을 도입하는 것이다. 출구는 소규모의 그리고 왜소한 농장들을 점차적으로 그러나 확실히,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례와 설득에 의해서, 토지에 대한 공동의 협동적인 집단적 경작에 기초하여, 농업기계들과 트랙터들 그리고 집중적인 농업의 과학적 방법들을 사용하는 대규모 농장들로 연합하는 것이다. 다른 출구는 없다.”










15차 당대회는 농업의 집단화의 완전한 발전을 요구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대회는 또한, “쿨락들에 반대하는 공세를 발전시키는 것 그리고 농촌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제한하고 농민의 농장을 사회주의로 인도하는 수많은 조치들을 채택하는 것”(쏘련 공산당(볼)의 결의)이라는 지침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경제 계획이 깊이 뿌리를 내렸음을 깨닫고, 그리고 모든 자본주의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대회는 적절한 수임자들에게 쏘비에트 경제의 발전을 위한 1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할 것을 지시했다.















집단화에 대한 부하린―리코프 그룹의 반대










15차 당대회에 이어서 집단화가 실행에 들어가고 당이 쿨락들에 대한 공세를 취했을 때, 부하린과 리코프에 의해 지도되는 우익 기회주의자들의 그룹이 출현했다. 부하린-리코프 그룹은 당의 집단화 정책을 반대했다. 그것은 당이 쿨락들에 반대하여 채택한 긴급한 조치들의 철회를 요구했고 쿨락 농장의 쇠퇴를 농업의 쇠퇴로 묘사했다. 부하린-리코프 그룹은 집단화로부터는 아무런 좋은 것도 나올 수 없고 쿨락들의 부유화는 사회주의에 전혀 위험을 주지 않고 말할 것도 없이 쿨락들은 스스로 사회주의로 ‘성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이론적 정당화를 제공하기 위해 그들은,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모든 진전과 더불어 계급투쟁은 더 온건해질 것이고 쿨락들은 사회주의로 ‘성장’하고 결과적으로 그들에 대한 단호한 투쟁을 수행할 필요가 없으며 그리고 계급투쟁은 적대적 계급(부르주아지―편집자)이 폐지되기 전에조차도 감퇴할 것이라는, ‘계급투쟁의 감퇴’ 이론을 요리해 내놓았다. 이것은 어리석고 배신적인 이론이었지만, 부하린-리코프 그룹은, 사회주의의 모든 진전에 따라 계급투쟁은 더 첨예해진다―적대적 계급은 백배나 더 그의 시도들을 증가시키고 사회주의를 타도하고 그의 ‘잃어버린 이상향’ 즉, 자본주의를 재획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한다―는 레닌주의의 유명하고 올바른 테제를 방기하고 대체하려는 단호한 시도를 했다.















뜨로츠끼주의자와 부하린주의자의 이론들의 본질에서의 유사성










언론에서 발표들로부터 배우게 되어, 쿨락들은 그들의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반대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또한 볼세비키 당에 지원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러시아와 같은 유일한 후진적인 나라에서 사회주의는 건설될 수 없다고 주장한 뜨로츠끼와 지노비예프와 같은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14차 당대회와 그리고 그 이후에 당의 정책을 반대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다른 한편으로 부하린-리코프 그룹이 있었다. 이 그룹은 집단화에 대한 문제에서 당에 반대하고 나왔고 쿨락들에 반대하는 공세를 할 필요가 없다고 그리고 그들이 사회주의로 ‘성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형태에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후진적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는 건설될 수 없다고 주장한 뜨로츠끼주의자와 지노비예프주의자의 항복자들과 부하린-리코프의 우익 기회주의자들의 그룹 간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유일한 차이는 뜨로츠끼주의자와 지노비예프주의자의 항복자들은 얼마간은 ‘영구혁명’에 대한 ‘좌익적’ 혁명적인 소리침의 가림막 하에서 그들의 항복자로서의 성격을 감출 수 있었던 반면, 부하린-리코프의 우익 기회주의자들 그룹은 그들이 그래야만 했듯이 공공연하고 위장없이 쏘련에서 자본주의 세력들 특히 쿨락들을 옹호할 때 그들의 자본주의적 본성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하여 두 기회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조류의 만남과 그것들의 당에 반대하는 단일한 연합전선으로의 전환의 기초가 놓여졌다. ‘영구혁명’ 이론과 ‘계급투쟁의 감퇴’ 이론은 냉혹하게 두 기회주의적 조류들을 하나의 공통된 만남의 지점으로 이끌었다. 불가피한 것이 일어났다: 두 기회주의적 조류들은 볼세비키 당의 혁명적인 정책에 반대하여 연합하여 만났고 당에 대한 치밀하고 굳건한 반대를 형성했다. 그때 이후로 계속하여 뜨로츠끼주의자와 지노비예프 항복자들과 부하린주의의 우익 기회주의자 그룹은 제휴하여 행동했다. 그러나 이것의 더 많은 것이 모스크바 재판을 다룰 때 다루어질 것이다.















쿨락들의 저항과 이 저항에 맞서기 위해 당에 의해 취해진 조치들










쿨락들은 매우 빠르게,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거대한 양의 지원과 힘을 그들이 반대파의 관점에서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들이 혼자가 아니며 그들이 부하린, 리코프, 뜨로츠끼, 지노비예프 그리고 기타의 사람들과 같은 옹호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당과 쏘비에트 정부의 정책에 대한 쿨락들의 저항을 완고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쿨락들은 쏘비에트 정부에 잉여 곡물을 파는 것을 집단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당의 노동자들, 정부 관리들에 반대하여 그리고 집단농장 농부들에 반대하여 살인과 테러리즘에 호소했고 그들은 집단농장과 국가 곡물창고를 불태웠다.





당은 쿨락들이 완전한 농민층의 견지에서 공개된 싸움에서 패배되어야만 한다고, 쿨락들의 저항이 분쇄되지 않는다면 노동계급과 적군은 고질적인 기근으로 고통받아야 하고, 집단화 운동은 고통스럽게 멈춰버릴 것이고, 쿨락들은 쏘비에트 국가에 지시를 할 수 있게 되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타도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당은 쿨락들에 반대하는 단호한 공세를 시작했고 15차 당대회의 결정에 따라서, 당은 다음과 같은 구호들을 실행시켰다: 빈농에 굳건하게 의지하라, 중농과 동맹을 강화하라, 그리고 쿨락들에 반대하는 결의에 찬 투쟁을 수행하라. 쿨락들은 잉여 곡물들을 팔기를 거부했다. 당과 정부는, 국가에 고정된 가격으로 잉여 곡물을 팔기를 그들이 거부하는 경우에 쿨락들로부터 잉여 곡물들을 법원이 몰수하는 권한을 부여했던 형법 107조를 적용하는 것에 의해 응답했다. 빈농들은 많은 특권들을 부여받았고 몰수된 곡물의 25%는 그들의 처분에 맡겨졌다. 당에 의해 채택된 다양한 다른 긴급한 조치들이 빈농과 중농을 쿨락에 반대하는 단호한 투쟁에 합류하도록 야기했고, 쿨락들을 고립시켰고, 식량부족 문제를 제거하면서 집단농장운동을 전진시켰다. 그 결과는 1928년 말까지 쏘비에트 국가가 자신의 처분에 맡겨진 충분한 곡물 재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당조직에서 부하린주의자들의 패배










쿨락들에 대한 사회주의의 공세가 강화됨에 따라, 부하린-리코프 그룹은 자신의 반당활동을 강화했다. 이 그룹은 우글라노프, 코토프, 우하노프, 류틴, 야고다, 폴론스키 그리고 기타의 사람들과 같은 모스크바 당조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모스크바 당조직의 당회합에서 그리고 언론에서 쿨락들에 대한 중과세는 잘못되었고, 쿨락들에 대한 양보가 행해져야 하며, 중공업의 발전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이 옹호되었다. 드니페르 수력계획의 건설이, 자금이 대신에 경공업의 건설에 쓰여져야 한다고 그리고 어떤 엔지니어 공장들도 모스크바에서 건설되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 우글라노프에 의해 반대되었다. 우글라노프와 여타의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당의 중앙위원회를 지지한 모스크바 당조직에 의해 폭로되었다. 당에서 기회주의적 일탈에 반대하는 단호한 투쟁의 필요성이, 이 시기에 우익적 일탈에 화력을 집중하면서, 1928년에 열린 쏘련공산당(볼)의 모스크바 위원회의 전체 회의에서 스탈린 동지에 의해 틀지워졌다:










“우리 당에서 우익적 일탈의 승리는 자본주의의 세력들을 해방할 것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입장들을 침식하고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의 복고의 가능성을 증가시킬 것이다.”(��레닌주의의 문제들��)










쿨락들의 반대 그리고 뜨로츠끼주의자들과 부하린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단농장운동이 계속하여 발전했다. 모든 어려움들―외부적인 그리고 내부적인―을 하나 하나 극복해가면서, 당과 쏘비에트 정부는, 중공업을 건설하고 국영농장과 집단농장들을 발전시키고 그리고 제 1차 5개년 계획의 채택과 실행을 위한 기초를 놓음으로써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성공적으로 건설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16차 당협의회










당은 1929년 4월에 16차 협의회를 개최했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제 1차 5개년 계획을 채택했다.





스탈린은 말했다.










“5개년 계획의 근본적인 과제는 전체 산업뿐만 아니라 수송과 농업을 사회주의를 기초로 재장비하고 재조직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산업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협의회는 또한 사회주의적 경쟁의 가일층의 발전을 요구하는, 모든 노동인민에 대한 호소를 채택했다.















집단농장들의 신속한 성장










계획의 광대함에 의해 제약되지 않고 쏘비에트 인민대중들은 이 요구에 대해 가일층의 노동 영웅주의의 물결로 응답을 했고 제 1차 5개년 계획을 실현하는 과제를 신속하게 수행했다. 이 시기에 농민들은 뒤처지지 않았다. 농민들은 국영농장과 기계ㆍ트랙터 스테이션을 본 결과 집단농장을 더욱 더 찬성하게 되었다. 농민들은 국영농장들과 기계ㆍ트랙터 스테이션들을 방문하려 했고 트랙터들과 다른 농업기계들의 작동을 관찰하고 그것들의 작업수행에 경탄하고 즉석에서 집단농장에 합류를 결의했다. 집단농장운동이 발전한 것은 바로 이런 방식이었다, 즉, 농민들은 우월한 국영농장들과 농업기계류들에 의하여 집단농장들에 합류하도록 설득된 것이었다. 부르주아지의 유급 혹은 무급의 대리인들―즉, 뜨로츠끼주의자들, ‘박식한’ 부르주아 교수들 그리고 부르주아 지식인들―에 의해 주장되듯이 팔을 비틀거나 혹은 힘의 사용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사회주의 건설을 반대하기 위해 살인과 테러리즘에 호소하는, 그리고 자본주의를 복고하기를 원하는 쿨락들과 그들의 대리인들, 사보타지하는 사람들 그리고 파괴자들에 대해 전혀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극복되었던 자본가들이 다시 권력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쿨락들에 대해, 소수의 착취자들에 대해, 쏘비에트 인민이라는 보다 넓은 다수의 이익의 관점에서 자신의 독재를 실시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자신의 독재를 실행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정확히 그것이 존재하는 특수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것, 그것의 주요한 기능 중의 하나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 완전한 정당화를 우리는 갖지 않겠는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주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입장을 더 명확하게 하고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해 그리고 스탈린 동지에 대해 뜨로츠끼주의자들과 다른 반동들의 거짓말과 비방들을 반박하기 위해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로부터 파리꼬뮨에 관한 독재라는 주제에 대해 그들이 말한 것을 보이기 위해 인용할 것이다:










맑스: “...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하여... 부르주아지의 독재를 자신들의 혁명적 독재로 대체하는 때에... 노동자들은 국가에 혁명적이고 이행기적 형태를 부여한다. ...”





엥겔스: “승리한 당이”(혁명에서) “헛되이 싸웠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무기가 반동들에게 영향을 주는 공포(테러)라는 수단에 의해 이 지배를 유지해야만 한다. 파리꼬뮨이 부르주아에 대한 무장한 인민이라는 권위의 사용을 하지 않았다면 단 하루라도 지속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반대로 그것을 충분히 자유롭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을 비난해야 하지 않겠는가?...” (「권위에 대하여」)





엥겔스: “따라서, 국가가, 누군가의 적을 힘에 의해 억누르기 위하여 계급투쟁에서, 혁명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이행기적 기관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인민의 국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순전한 헛소리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여전히 국가를 사용하는 한, 그것은 자유라는 견지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적들을 억누르기 위해 그것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지 마자 이러한 국가는 존재하기를 멈춘다. ...” (「베벨에게 보내는 편지」, 1875년 3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문제에 대한 맑시즘의 입장에 관해서 문제는 바로 이러하며, 뜨로츠끼주의자들이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해, 부르주아지를 강제적으로 억눌렀다는 이유로, 그것의 저항을 분쇄했다는 이유로, 반동들에게 공포(테러)를 주었다는 이유로, 그것의 적들을 강제적으로 억눌렀다는 이유 등등으로 그들의 욕설을 퍼부을 때 뜨로츠끼주의자들은 단지 그들이 맑시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함에 있어 뜨로츠끼주의자들은 그들이 지구가 하늘로부터 떨어져 있듯이, 자유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로부터 떨어져 있듯이, 맑시즘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입증할 따름이다.





집단농장운동의 성장의 비율은 신속했고 유례가 없었다. 그것은 심지어 사회주의 산업을 능가했다. 집단농장들의 성장률을 언급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그의 기사 「위대한 변화의 1년(1929)」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러한 발전의 맹렬한 속도는 그것의 뛰어난 발전속도로 주목받는 우리의 사회주의적 대규모 산업에 대해서조차 능가한다.”















계급으로서 쿨락들의 제거 정책과 이 정책의 채택에 대한 이유들










산업의 빠른 발전, 집단농장운동 그리고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광범한 대중(빈농과 중농)의 강화된 동맹에 기초하여, 쏘비에트 권력은 1930년까지 쿨락들을 단순히 제한하는 정책(즉, 농업을 재생시키고 산업과 농업 사이에 연계를 회복하기 위해 신경제정책 하에서 채택된 정책)으로부터 계급으로서 쿨락들을 제거하는 정책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쿨락들을 제한하는 정책은 국영농장들과 집단농장들이 약하고 식량 생산의 영역에서 쿨락들을 대체할 수 없는 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929년 말까지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의 유례없는 성장은 쏘비에트 권력이 쿨락들을 제거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 정책 하에서, 마치 자본가들이 1918년에 산업의 영역에서 수탈되었듯이, 쿨락들은 수탈되었는데, 유일한 차이는 현재의 경우에는 쿨락들의 생산수단은 국가에게로가 아니라 집단농장으로 연합된 농민들의 수중으로 넘겨졌다는 것이다.















1930년에 탈쿨락화에 대한 뜨로츠끼의 입장










우리는 1925년에 뜨로츠끼와 지노비예프가 계급으로서 쿨락들에 대한 공격을 요구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또 우리는 당이 이러한 요구를 당시에 단호하게 거절했던 이유를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1930년 1월에 이러한 공격을 위한 모든 전제조건들을 준비하고서 당은 계급으로서 쿨락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당은 쿨락들을 단순히 제한하는 정책에서 계급으로서 그들을 제거하는 정책으로 이행했다. 이것이 일어났을 때, 그때까지 당이 부농들이 잘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고 머리를 흔들며 외쳐댔던 뜨로츠끼는, 지금은 당이 “집단농장들을 그들의 지지의 실제적 원천과 선을 맞추어야 하고”, “‘탈쿨락화’ 정책(즉, 부농들에 대한 수탈)을 포기해야 한다고”, 그리고, “쿨락들의 착취적 경향을 매우 오랜 기간동안 제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쿨락들에 대한 관계에서 지도적 원칙은 철의 ‘계약 체제’(부농들이 국가에 일정량의 그들의 생산물을 고정된 가격으로 공급해야만 하는 체제)이어야만 한다.”(뜨로츠끼, 「쏘련의 공산당원들에 대한 공개 편지」, 1930년 3월 23일)










이제는 집단화와 쿨락들의 제거에 관한 문제에 대해 뜨로츠끼 등에 의해 옹호된 정책들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집단화와 부농 제거정책의 성공










공고한 집단화를 위한 농민들의 대중적 운동의 결과를 요약하고 쿨락들을 제거하는 정책으로 전환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1929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쏘련에서 자본주의―‘사적 소유의 신성한 원칙’―를 복고하려는 모든 나라들의 자본가들의 마지막 희망은 붕괴하고 있고 사라지고 있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위한 토양을 성숙시키는 물질로 간주한 농민들이 ‘사적 소유’라는 찬양되었던 기치를 집단적으로 포기하고 있고 집단화의 길, 사회주의의 길을 취하고 있다. 자본주의 복고의 마지막 희망은 가루가 되고 있다.” (스탈린, ��레닌주의의 문제들��)










쿨락들을 제거하는 정책은, 한 번의 타격으로 사회주의 건설에서 세 가지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한 가장 철저하고 심오한 혁명을 결과했다:










(a)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착취자들 중 가장 수가 많은 계급, 쿨락 계급, 자본주의 복고의 대들보를 제거했다.”





(b)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가 많은 노동하는 계급, 농민 계급을 자본주의를 낳는 개인적 영농의 길로부터 협동적이고 집단적인 사회주의적 영농의 길로 변혁시켰다.”





(c) “그것은 쏘비에트 정권에게 농업에서―아직 최소로 발전되었지만 가장 넓고 사활적으로 필요한 국민경제의 분야―사회주의의 기초를 갖추게 했다.”





“이것은 나라 내부에서 자본주의의 복고의 마지막 주요 원천을 파괴했고 동시에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건설을 위한 새로운 결정적인 조건들을 창출했다.”(쏘련공산당(볼)의 역사)















집단화의 방법들에 대한 당의 지시들, 이 지시들에 대한 위반들 그리고 당에 의해 교정










계급으로서 쿨락들을 제거하는 정책은 「집단화의 비율과 집단농장들의 발전을 돕기 위한 국가의 조치들」이라는 1930년 1월 5일에 쏘련공산당(볼)의 중앙위원회에 의해 채택된 역사적 결의에 포함되었다.





주어진 단계에서 집단농장운동의 주요한 형태는 농업 아르텔인데 그것에는 단지 주요 생산수단만이 집단된다는 매우 중요한 지시를 이 결의는 구체화했다.





중앙위원회는 당 조직들에게, “집단농장들의 조직에서 실제적인 사회주의적 경쟁을 거짓된 집단화로 대체하는 위험을 포함할 수 있었던 위로부터의 ‘포고’에 의해 집단농장운동을 강제하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반대하는”(쏘련공산당(볼)의 결의들) 가장 심각한 경고들을 제기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특히 모스크바지역과 트랜스코카서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이들 중앙위원회의 경고들이 무시되었다. 집단화의 최초의 성공들에 도취되어서, 이 지역들의 당국자들은 집단화의 속도와 시기의 제한들에 관한 당의 지시들을 위반했다. 지방 당조직들에 의해 범해진 이들 오류들과 왜곡들은 농민층 사이에서 심각한 불만을 야기했다. 쿨락들은 이들 왜곡과 오류들을 이용하여 농민층 사이에서 가일층의 불만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중앙위원회는 즉각적으로 상황을 치유하는 과정에 들어갔다. 1930년 3월 2일에 중앙위원회는 스탈린 동지의 기사 「성공에 현혹되어」라는 기사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는데 거기에서 스탈린 동지는 당일꾼들에게 농민들을 집단농장들에 합류하도록 강제하는 정도로 집단화의 성공에 의해 도취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것은 당일꾼들에게 쏘련의 다양한 지역들의 조건들의 다양함을 고려할 것을 지시했고 집단농장의 형성은 자발적이어야 하며 그리고 집단농장운동의 주요한 형태는 농업아르텔이며 거기에서는 단지 생산수단의 주요한 것만이 집단화되며 가구보유 토지, 주거, 소규모 가축들, 가금 등은 집단화되지 않는다는 원칙에 의해 인도될 것을 지시했다.





중앙위원회는 정치적 오류들을 범했고 그것들을 교정하는데 실패한 일정한 지역 당조직들(모스크바 지역, 트랜스코카서스)의 지도부를 또한 교체했다.





1930년 4월 3일에 스탈린 동지의 「집단농장 동지들에 대한 답변」이라는 기사가 발행되었다. 이 기사에서 스탈린 동지는 집단화에 관해 범해진 주요 오류들과 이 오류들의 근원을 개괄했다. 이 오류들은, 스탈린 동지가 지적하기를, 중농들에 대한 잘못된 접근, 집단농장의 형성은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레닌주의적 원칙의 위반, 쏘련의 다양한 지역과 지구들에서 지배적인 조건들의 다양성에 대해 고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레닌주의적 원칙의 위반, 집단화의 아르텔 형태를 생략하고 꼬뮨으로 곧바로 이행하려는 시도들에,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매우 ‘영리하지만’ 여전히 어리석은 뜨로츠끼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반대되는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집단화의 문제에서 어떤 형태의 강제에 대해서도 반대한 사람은 스탈린과 중앙위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뜨로츠끼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지식인들 그리고 다양한 반동들이 매우 자주 그러한 것처럼 일반적 소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주장들에 대한 문서 증거를 제공했다. 이 사람들은 주장이 증거라는 것을 주요한 모토로 삼는 사상의 학파에 속한다. 그들의 모토들의 또 하나는 무지는 충분한 이유라는 것이다. 그들 자신의 주장을 위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주장 이외에 다른 어떤 증거도 결코 제출하지 않는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자들의 진술을 위하여는 최고도의 증거가 요구된다. 이러한 증거의 기준들이 의무적으로 다가온다면 그들은 이러한 증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에 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떤 증거도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확신시키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결코, 즉, 그들이 소부르주아적 자만과 지적인 거만을 멈출 때까지. 그러나 우리가 확신시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노동계급 그리고 노동계급에서 가장 좋고 가장 정직한 것에 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위에 언급한 신사들에 의해 야기된 혼란을 해결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오랫동안 묻혀져 있거나 왜곡되었던 사실들을 말하는 수고를 하는 것은 이러한 마음에서이다.





이리하여 올바른 노선을 굳게 취함에 의해, 중앙위원회는 스탈린 동지의 지도력 하에서, 집단화에 관해 일정지역에서 당조직들에 의해 범해진 모든 왜곡들과 오류들을 교정할 수 있었다. 이 교정은 이번에는 집단농장 운동을 공고화했고 새로운 전진을 가능하게 했다.















16차 당대회










16차 당대회가 소집되기까지 쿨락들을 제거하는 정책의 성공적인 실행과 집단농장운동의 성공으로 인해, 자본주의적 요소들에 대한 부분적인 공세는 자본주의적 요소들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6차 당대회는 1930년 6월 26일에 열렸고 스탈린 동지는 그것을 “모든 전선에 걸쳐서 사회주의의 몰아치는 공세의, 계급으로서 쿨락들을 제거하는, 공고한 집단화의 실현의 대회”로서 묘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 대회에서, 스탈린 동지는 또한 천둥같은 박수 속에서, “... 우리는 우리나라의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혁의 전야에 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17차 당대회










1934년 1월에 17차 당대회가 열리는 시기까지, 쏘비에트 인민은 모든 반동들의 단호한 적인, 스탈린이 영도하는 쏘련 공산당(볼)의 영광스러운 지도력 하에서 다음과 같은 유례없는 성취들을 만들어냈다:





(a) 쏘련에서 공업생산은 지금은 총 생산의 70%에 달하고 나라는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혁되었다.





(b) 공업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들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이 영역에서 유일한 경제체제가 되었다.





(c) 쿨락들은 계급으로서 제거되었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농업의 영역에서 지배적이 되었다.





(d) 집단농장운동은 지금은 이제까지 자신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 물질적 조건들을 향유하고 있는 농촌의 수백만의 인민들의 빈곤과 비참함에 종지부를 찍었다.





(e) 사회주의적 공업의 발전의 결과로 실업이 폐지되었고 비록 8시간 노동제가 일정한 공업들에서 유지되고 있을지라도 주요 기업들에서는 7시간 노동제가 제도화되었다. 건강에 특별한 위험을 주는 공업들의 경우에는 노동일은 6시간으로 감축되었다.





(f) 국민경제의 모든 분야들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종지부를 찍었다.





17차 당대회가 ‘승리자의 대회’로 알려져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 대회에서, 중앙위원회의 사업에 대해 보고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고찰하고 있는 기간동안에 쏘련에서 일어난 근본적 변화들을 개괄했다:










“이 기간동안에 쏘련은 근본적으로 변혁되었고 후진성과 중세의 외피를 벗어던졌다. 소규모 개인적 농업의 나라로부터 그것은 집단적인 대규모의 기계화된 농업의 나라로 되었다. 무지하고, 문맹의, 그리고 계몽되지 못한 나라로부터 그것은, 쏘련의 각 민족들의 언어로 가르치는 고등, 중등, 초등의 학교들의 광대한 망으로 뒤덮힌 읽고 쓸 수 있고 계몽된 나라로 되었거나 혹은 되고 있다. ”(��레닌주의의 문제들��)




















사회주의가 쏘련에서 건설되었다










이제, 위의 자료들에 기초하여 우리는 ‘쏘련에서 사회주의가 건설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긍정적으로 답을 할 수 있다.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10월 혁명에 의해 창출된 사회주의화된 소유관계들”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 볼세비키 당과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대변자, 스탈린 동지에 의해 쏘련의 민족들에게 주어진 올바른 혁명적 지도력에 의해서도 또한 가능하게 되었다.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이 논의를 마감하기 전에, 두 가지 추가적인 지점들을 제기하는 것이 적절하다:





(1) 쏘련에서 뜨로츠끼와 그의 추종자들은 한편으로, 사회주의는 후진적인 러시아에서,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측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국가적 지원이 없다면” 건설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항상적인 주장은 “스탈린 그룹”(즉, 볼세비키 당!)이 사회주의를 충분히 빨리 건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일관되게 그리고 항상적으로 사회주의는 쏘련에서 건설될 수 없다고 주장한 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볼세비키 당(그것은 내내 사회주의 승리는 쏘련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14차 당대회에서 그러한 취지의 잘 알려진 결의를 통과시켰다)에게 그것은 충분히 빠른 사회주의 건설이 아니고 혹은 그것은 자본주의를 복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지들 여러분은 이러한 뜨로츠끼주의의 입장에 대해 여러분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들과 일치하는 유일한 견해는 뜨로츠끼의 입장이 그의 측에서 초좌익적 수사에 의해, 뜨로츠끼주의의, ‘영구혁명’ 이론의 항복자적인 성격을 감추고 위장하는 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 제기되어야 한다.





(2) 쏘련공산당의 20차 당대회 이후로 쏘련에서 국가권력은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표하지 않고 단지 그들 자신의 특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쏘련에서 자본주의를 복고시키려는 의도가 있던 수정주의 배신자들의 집단에 의해 찬탈되었다. 그들은 내부적으로 그리고 국제관계의 영역에서 반동적인 정책들을 추구해왔다. 그리하여 20차 당대회 이후의 시기는 결코 그 대회에 앞선 시기와 혼동될 수 없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혼란케 하고 대중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뜨로츠끼주의자들은 바로 그렇게 해왔다. 예를 들면, 쏘련공산당의 지도력과 물론 전 세계의 모든 수정주의적 당들을 “스탈린주의적”이라고 묘사한다. 이제 쏘비에트 수정주의자들이 스탈린 동지를 탄핵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수정주의적 행동이 ‘스탈린주의적’이라고 묘사된다. 뜨로츠끼주의자들이 영국공산당을 ‘스탈린주의적’ 이라고 묘사할 때 그 입장은 웃기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들을 혼란시키려 기획된 이 선전전에서 뜨로츠끼주의자들이(상이한 뜨로츠끼주의 분파들―IS, IMG, 그리고 SLL) 서로를 ‘스탈린주의적’ 행동이라고 고발할 때 그들은 히틀러의 장관 괴벨스에 의해 세워진 이전의 세계기록을 넘어선다.















이러한 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혁명가들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동지들, 우리는 노동계급 사이에 뜨로츠끼주의의 실제적인, 반혁명적인 성격에 대한 지식과 혁명적인 ‘스탈린주의’에 대한 지식을 퍼뜨림에 의해 뜨로츠끼주의자들에 의해 창출된 이러한 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스탈린주의’라는 표현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스탈린 혹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주조되지 않았다. 그것은 레닌주의의 적들, 주요하게는 뜨로츠끼주의자들에 의해 그리고 또한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우리에게 던져졌다. 그러할 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달라붙어 있고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적들에 의해 욕설의 단어로 의도된 것을 좋은 뜻으로 전환시켜야만 한다. 스탈린에 대해 말하면 그는 스스로에 대해 레닌과 레닌주의의 충실한 추종자라는 것과 다른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로 하여금, ‘스탈린주의’는 볼세비즘이며 레닌주의라는 것을, 스탈린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사회주의의 승리,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지지한다는 것을, 그것은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들의 투쟁과 민족해방 투쟁들에 대한 전면적인 우호적 지원을 지지한다는 것을, 그것은 제국주의, 수정주의 그리고 모든 반동들에 대해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을 우리의 의무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라는 단어의 혁명적 본질에 익숙하도록 해야만 하고 그들이 ‘스탈린주의자’라는 단어들을 사용하고 ‘스탈린주의’라는 단어를 욕설의 의미로 사용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거부하도록 돕고 고무해야만 한다.





우리는 쏘련에서 지배적인 수정주의 써클들이 ‘스탈린주의자들’이 아니며 또한 영국공산당, IS, IMG, 혹은 SLL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공통의 지식으로 삼아야 한다. 이 모든 사람들은 반스탈린, 반볼세비키, 반혁명적인 정치적 타락자들에 속한다.





스탈린은,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한 싸움에서 그리고 파시즘과 세계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쏘비에트 인민들과 세계인민들의 선두에서 행진했던, 위대한 혁명가, 위대한 볼세비즘의 옹호자, 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옹호자였다. 그의 지도력 하에서 쏘련의 각 민족들과 세계의 각 민족들은 거대한 전진을 했고 많은 중요한 승리들을 달성했다. 그것이 전세계의 혁명가들이 스탈린을 기억하는 이유이고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바로 혁명가들 사이에서 사랑, 존경 그리고 감사의 감정을 주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스탈린의 이름이 뜨로츠끼주의자들, 수정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반동들의 측에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이유이다.





스탈린 사후에 쏘련공산당에서 수정주의의 부상과 그에 수반하여 자본주의적 경제개혁이 이루어졌던 이유들에 관한 것은 다른 곳에 속하고 별개로 다루어져야만 한다. 그것들은 지금 당장 다룰 수 없다. 그리하여 결론으로서 뜨로츠끼 측으로부터의 파멸의 예언들에도 불구하고 쏘련에서 사회주의가 건설되었다는 것이 간단하게 언급되도록 하자.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뜨로츠끼조차도 마지못해 사실의 인정을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주장이 없었다. 비록 동시에 그가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성공을 “사회주의화된 소유”로 돌렸지만. 성공이 “사회주의화된 소유” 때문만이 아니라 지도력의 우수성 때문이라는 것은, 희망하건대 이제는 충분히 드러난 것이다.





사회주의가 쏘련에서 성공적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뜨로츠끼주의에 대한 최선의 반박이다.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은 뜨로츠끼의 ‘영구혁명’ 이론의 완전한 쓸모없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뜨로츠끼의 현실 인식이 현실 자체와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뜨로츠끼는 그의 생각들을 현실과 일치하도록 변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현실을 오도하고 왜곡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현실이 그의 철저히 파산한 생각들과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쏘련이 사회주의를 건설함에 의해 당시에 실천적인 유일한 방식으로 세계혁명을 발전시키고 전진시킬 때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을 반대하는 입장을 채택했다.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반대라는 이러한 입장을 채택함에 의해 뜨로츠끼는 사상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반혁명적인 부르주아지와 제국주의의 대리인으로 되었다. 쏘비에트 노동계급이 그의 파산한 이론들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발견하고서 뜨로츠끼와 그의 추종자들은 더욱 더 테러리즘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의 세력이 불충분함을 발견하고서, 그들은 쏘비에트 국가를 타도하고 쏘련에서 자본주의를 복고하기 위해 파시스트 국가들과 동맹을 하기를 선택했다. 그들의 반혁명적인 행위들은 유명한 모스크바 재판에서 충분히 폭로되었는데 다음에 다루어질 것이다.(2부 끝) <노사과연>















번역: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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