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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7)
글쓴이 하르팔 브라르 E-mail send mail 번호 163
날짜 2010-03-26 조회수 2584 추천수 130
파일  1269604137_tro.hwp

  













기획번역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











번역: 편집부















2부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불균등한 경제적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몇몇의 나라에서 혹은 심지어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





가능하다. 










                              -레닌















--------------------------------------------















5장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뜨로츠끼의 입장










뜨로츠끼는 그의 ‘영구혁명 이론’을 완강하게 고수하면서, 사회주의는 선진적인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움이 없다면 후진적인 러시아에서 건설될 수 없다고 했다.





뜨로츠끼는 1905년 혁명에 관한 그의 책 서문에서 말했다.










“광대한 다수의 인구가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후진적인 땅에서 노동자 정부 하에서 나타나는 적대들은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의 국제적 무대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 측의 직접적인 국가적 지원이 없다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권력의 자리에 유지할 수 없고 그것의 일시적 지배를 안정적인 사회주의 독재로 전환시킬 수 없다. 이 진실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가능하지 않다.”(뜨로츠끼, ��우리의 혁명��. 1905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민족적 틀 내에서는 승리적인 결말로까지 수행될 수 없다는 ��평화강령��에서 수차례 반복된 주장이 아마도 거의 5년 동안의 우리의 쏘비에트 공화국의 경험에 의해 반박된 것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비칠 수 있다. 이러한 어떤 결론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견고한 상승은 유럽의 지도적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후에까지는 가능하지 않다.”(뜨로츠끼, ��평화강령��의 후기, 1922년)










이것이 뜨로츠끼가 오랫동안 일관되게 취한 입장이고 사실상 그는 그가 이 입장을 버렸다는 외관을 주는 때조차도 결코 이 입장을 버린 적이 없다. 광범한 러시아의 인민 대중들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반동의 어두운 세력들을 과대평가하는 이 이론적 관점을 갖고서 뜨로츠끼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정책을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뜨로츠끼의 입장은 멘세비즘의 새로운 변종에 다름 아니었다. 러시아 멘세비키들은 말했다: ‘러시아는 후진적인 나라이고 그리하여 유일한 가능성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자극을 주는 부르주아 혁명이다.’ 뜨로츠끼는 말한다,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신속하게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붕괴할 운명이다.’ 이리하여 멘세비키와 뜨로츠끼의 견해 사이에는 근본적 불일치가 전혀 없음을 볼 수 있다. 둘 다 모두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에 스스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열렬하게 믿었다.















유럽 혁명의 실패와 쏘비에트 노동계급에게 열려있는 대안들










자, 많은 유럽의 나라들이 러시아의 혁명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볼세비키들이 생각했고 예상했다는 것은 완벽히 진실이다. 그들의 예상은 유럽에서 당시 지배적이었던 객관적인 혁명적 상황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의 희망과 예상은 실현되지 않았는데 특히 공식적인 사회민주주의의 배신과 기회주의 때문이었다. 1922년까지 유럽의 부르주아지는 상대적 안정의 조건들을 획득했고 유럽에서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능성들은 앞으로 상당기간 사라졌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황에서―즉, 권력에 있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그러나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없다는 것―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을 해야만 했는가? 그들에게 열려져 있는 대안은 무엇이었는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열려져 있는 두 개의 커다란 길이 있었다.





(1) 뜨로츠끼의 충고를 따르고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측에서의 직접적인 국가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는커녕 권력의 자리에 머물 수 없고, 국제적 그리고 민족적 부르주아지와 평화를 만들어야 하고, 1917년 10월에 권력을 빼앗겼던 바로 그 동일한 계급에게 국가권력을 넘겨야 하고, 그리하여 노동계급은 지배를 할 수 없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만 했다; 혹은





(2) 다른 대안으로서는 그들이(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역자) 거대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과 그리하여 쏘련 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의 프롤레타리아들과 광범한 대중들에게 “노동계급은 부르주아지 없이도 잘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설명할 것을 결의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스탈린 동지가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중요성에 대한 개요를 찬란하게 잡은 방식이다.










“서구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승리의 길을 쟁취하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력에 대한 신념을 필요로 한다; 노동계급은 부르주아지 없이 잘 될 수 있다는 신념; 노동계급은 낡은 것을 파괴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을 건설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자격이 있다는 신념. 사회민주주의자들, 개량주의자들의 주요한 노력은 노동자의 마음에 회의를 불어넣는 것, 노동계급이 그들 자신의 권력을 의심하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승리를 힘으로 쟁취하는 그들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작업의, 우리의 모든 건설 작업의 중요성은, 그것이 자본주의 나라의 노동계급에게, 그들 또한 부르주아지 없이 잘 될 수 있고 도움이 없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서 봉사한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 나라들의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권력에 대한 신념을 획득하자마자, 여러분은 이것이 자본주의의 종말의 시작이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가 가까이 있다는 확실한 신호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14차 당대회에서의 연설)










이것이 스탈린과 볼세비키 당에 의해 제출된 혁명적인 대안적 정책이었다. 결과적으로 쏘련 공산당(볼)의 14차 대회는 뜨로츠끼와 그의 추종자들의 항복의 계획들을 거부했고 지금은 유명한 그것의 결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경제적 발전의 영역에서, 대회는, 우리의 땅,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땅에서 ‘완전한 사회주의적 사회를 건설하는 모든 필요조건’(레닌)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회는 우리 당의 주요한 과제는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14차 당대회의 결과들을 요약하고 그것의 역사적 중요성을 틀지우면서, 스탈린 동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쏘련 공산당(볼)의 14차 대회의 역사적 중요성은 그것이 신반대파(즉,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그리고 뜨로츠끼)의 오류들의 뿌리 자체를 폭로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회의와 코멘소리를 걷어찼다는 것, 그것이 명확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사회주의로의 가일층의 투쟁의 길을 지시했고, 승리의 전망을 당 앞에 열었고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에 대한 무적의 신념으로 무장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레닌주의의 문제들��)










러시아의 노동계급과 러시아 인민의 광범한 대중들은 혁명적 대안을 지지하여 결집했고 ‘혁명적’ 수사로 위장된 뜨로츠끼의 소부르주아적인 의기소침과 절망을 결정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볼세비키 당과 스탈린에 의해 입안된 그 정책이 혁명적이고 또 사리에 맞았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 반면에 뜨로츠끼에 의해 입안된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반혁명적인 동요였다.















스탈린은 세계 혁명에 반대했는가?










뜨로츠끼주의자들 중 가장 무지한 자들은 종종, 스탈린이 민족주의자였고 반면에 뜨로츠끼는 국제주의자였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스탈린은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원했고 반면에 뜨로츠끼는 모든 곳에서 사회주의를, 세계혁명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에 스탈린이 쏘련에서만 혁명을 원했고 다른 어떤 곳에서도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러면 이 뜨로츠끼주의자의 주장은 내용이 있는 것이다. 그 문제의 사실은 이 주장은 괴물같은 거짓이고 볼세비키 당의 위대한 지도자들 중의 한명인 스탈린 동지를 비하하기 위하여뜨로츠끼주의가 보여주는 거짓선동의 많은 사례들 중의 하나이다. 토론 하에 있던 논쟁에 대한 문서들을 보는 역사적 정확성과 주의를 조금이라도 존중하는 사람은 누구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책―결정적인 투쟁에 임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형제적 도움을 주는 정책―을 따르는 것의 바람직함과 필요성에 관해 당내에서 전혀 의견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스탈린의 지도력 하의 볼세비키 당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책을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실제로 따랐다. 왜냐하면 그들은(볼세비키 당―역자)쏘련에서 사회주의의 진정한 공고화는 다른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후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혁명들과 혁명적 투쟁들은 상호 간에 서로를 지원하는 것이다. 무지한 뜨로츠끼주의자들을 위하여 이 주제에 대한 스탈린 동지(그 이름이 뜨로츠끼주의자들과 다른 반동들이 입에 거품을 물기 위해서만 언급되는 바로 그 동일한 스탈린―입에 거품을 무는 것과 정신착란을 보여주는 것은 귀에 거슬리는 사실들에 대한 답이 전혀 아니지만)에 의해 유명한 선언을 인용해보자.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고 그 뒤를 따르는 농민층을 지도한 후에, 승리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건설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런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위한 완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보장할 것을 의미하는가, 즉, 그것은, 단 하나의 나라의 세력으로써, 복고에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사회주의를 최종적으로 공고화하고 그 나라가 간섭에 반대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보증할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최소한 몇몇의 나라에서 혁명의 이러한 승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의 발전과 지원은 승리하는 혁명의 본질적 과제이다. 그리하여 한 나라에서 승리한 혁명은 스스로를 자기만족적인 전체로 간주해서는 안되고 다른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촉진하는 원조자로서, 수단으로서 간주해야만 한다.” (스탈린, ��레닌주의의 기초들��,1)










따라서 국제주의적 정책을 따를 필요에 관하여 쏘련 공산당(볼)에서 원칙에서 어떤 차이도 없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국제주의 정책의 내용에 관하여는 차이들이 있었다. 유럽에서 성공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부터의 지원이 없다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없다고 하는 악명높은 ‘영구혁명’ 이론에 기초하여, 뜨로츠끼는 사회주의 혁명을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 때때로 모험주의적인 정책들을 옹호했다. 외부로부터 도움이 없이 러시아 노동계급과 농민층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능력에 대한 신념의 결여에 의해 자극된 이들 모험주의 정책들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올바르게 당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리하여 쏘련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외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의 혁명적 투쟁들에 형제적 도움을 주어야만 하는가에 관해서는 전혀 논쟁이 없었다. 논쟁은 다음과 같았다: 쏘련이 유럽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없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가. 스탈린과 볼세비키 당의 압도적 다수는 이 세계사적인 문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을 했다.2) 역사는 스탈린 동지와 볼세비키 당의 입장이 진실임을 충분히 입증했으나 이에 대해 우리는 나중에 더 말할 것이다.















스탈린이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문제를 처음으로 제출했는가?










뜨로츠끼주의자들에 의해 퍼진 또 하나의 신화는 스탈린이 1924년에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고 이 전에는 아무도 ‘단 하나의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일찍이 1915년에 레닌이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불균등한 경제적 발전3)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몇몇의 혹은 심지어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가능하다. 그 나라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들을 수탈하고 자신의 사회주의 생산을 조직하면서, 자본주의 세계의 나머지들과 맞서고, 스스로에게 다른 나라들의 피억압계급들을 끌어들이고, 그들 사이에서 반란을 고무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착취계급들과 그들의 국가에 맞서 무장력으로써 나설 것이다.”(레닌, ��유럽합중국 구호��)










그리고 1916년에 다시, 레닌은 그의 기사 「프로레타리아 혁명의 군사강령」에서 동일한 결론을 정식화했다:










“자본주의 발전은 다양한 나라들에서 극단적으로 불균등하게 진행된다. 그것은 그렇지 않으면 상품생산 체제하에 있을 수 없다. 이것으로부터 사회주의는 모든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승리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 반박의 여지없이 뒤따른다. 그것은 처음에 하나의 혹은 몇몇의 나라들에서 승리를 달성할 것이고 반면에 다른 나라들은 당분간 부르주아적 혹은 소부르주아적인 상태로 남을 것이다. 이것은 마찰을 창출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쇄하기 위한 다른 나라들의 부르주아지 측에서의 직접적인 분투를 창출할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경우들에서 우리 측의 전쟁은 합당하고 정의의 전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부르주아지로부터 다른 민족들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 될 것이다.”(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강령」)










레닌은 그의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로부터 이 결론에 도달했는데 거기서 그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독점 단계’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나서 레닌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은 5가지의 기본적인 특징들을 포함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정의를 했다:










“(1) 생산과 자본의 집중은 경제적 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독점들을 창출하는 이러한 높은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2)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융합 그리고 이러한 ‘금융자본’에 기초한 금융적 과두제의 창출. (3) 상품들의 수출과 구분되는 자본의 수출이 예외적인 중요성을 획득한다. (4) 그들 사이에 세계를 분할하는 국제적 독점 자본가들의 카르텔의 형성. 그리고 (5) 가장 큰 자본주의 열강들 사이에서 전 세계에 대한 영토적 분할이 완료된다.”










레닌이 말하기를, 제국주의는 첨예한 정도로까지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모든 모순들을 강화한다. 독점의 성장은 자본주의적 트러스트들과 신디케이트들에 의한 멍에를 더욱 더 무겁게 하고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은 제국주의 나라들에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모순들을 강화했는데 그것은 대중들을 그들의 유일한 구제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데려간다. 한 줌의 ‘선진적’ 나라들에 의한 세계의 광대한 다수의 나라들에 거주하고 있는 민족들에 대한 금융적 노예화 그리고 착취 그리고 식민지적 억압은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을 위해 투쟁을 수행할 것을 강제당하고 있는 식민지의 그리고 종속국의 나라들을 구성하는 광대한 다수 간에 모순을 강화시킨다.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은 이미 광대한 영토를 장악한 나라들과, 노획물에 대한 그들의 ‘공정한 몫’을 요구하면서 무대에 새롭게 참가하는 나라들 간에 세계의 재분할을 위한 격앙된 투쟁을 초래한다. 예를 들면 독일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 때문에 식민지의 노획물에서 다소간 뒤쳐져 있었으며 반면에 앵글로-프랑스 자본가들은 전 세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독일 자본주의는 앵글로-프랑스 자본가들을 따라잡았으며, 지금은 그것의 ‘공정한 몫’을 요구했다. 그것은 각각의 현재의 힘에 기초하여 재분할을 요구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그리고 따라서 현존하는 분할의 시기에 각측의 힘에 기초한 세계의 분할을 파기하기를 원했다. 물론 앵글로-프랑스 자본가들은 이러한 요구를 ‘기분 나쁘게 불공정한’ 것으로서 거절했다. 그리하여 독일 제국주의는 앵글로-프랑스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전쟁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불균등한 발전은 제국주의 상호 간의 모순의 강화를 초래한다. 그리하여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민족해방운동의 연합은 “제국주의의 세계 전선에 맞선 혁명의 통일된 세계전선에서 불가피하다.” (스탈린, ��레닌주의의 기초들��)










레닌은 이 모든 결론들을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다”라는 하나의 일반적 결론으로 요약한다.





그리하여 레닌은 다음과 같은 결론들에 도달했다:





(1) 제국주의의 성장이 하나의 세계경제를 창출했고 개별적 나라들의 민족적 경제들은 이 세계경제의 사슬에서 하나의 고리와 같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문제는 더 이상 낡은 방식에서 즉, 주어진 나라의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더 이상 고려될 수 없고 혹은 인구의 ‘다수’를 구성하는 노동계급의 관점으로부터 고려될 수 없었다. 전체로서 제국주의 체제는 혁명을 위해 무르익었고 제국주의적 세계전선의 사슬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파열될 것이고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출구를 제공하고 있었다. 가장 약한 고리는 선진적인 자본주의 나라일 수도 있고 혹은 자본주의의 진전이 그렇게 멀리 진행되지 않은 나라일 수도 있었다.





(2) 제국주의의 조건들 내에서 자본주의의 불균등한 성장과 제국주의 내에서 재난적인 모순들의 강화는, 제국주의 전쟁들과 모든 나라들에서 혁명운동들의 성장을 결과하면서, 개별적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필요성을 초래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개별적 나라들에서 승리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제국주의에 의한 간섭을 격퇴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모순들―제국주의 상호 간의 모순들, 제국주의 나라들에서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 간의 모순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와 피억압민족들의 모순―의 강화를 이용할 수 있다.





자신의 죽음 직전에 레닌은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문제로 돌아갔다:










“사실상, 모든 대규모 생산수단에 대한 쏘비에트 국가의 권력, 프롤레타리아트 수중에 있는 국가의 권력, 수백만의 소규모의 그리고 매우 소규모의 농민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 농민층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보증된 지도력, 등... 이것은 협동조합들(co-operatives)로부터―이전에 행상인으로 취급받았고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는 신경제정책 하에서 지금 이렇게 취급할 권리를 우리는 갖고 있는 협동조합들 하나로부터―필요한 모든 것이 아닌가, 이것은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직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니지만 이러한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이다.” (레닌, 「협동조합에 관하여」)










하나의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성공적으로 건설한다는 것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스탈린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제는 명백해지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그것은 일찍이 1915년에 레닌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고 다시 또 한번 그의 죽음 직전에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문제에 대해 뜨로츠끼주의자들이 스탈린을 공격하는 것은 사실상 레닌에 대해 그리고 레닌주의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다4). 이것은 모든 혁명적 노동자들에 의해 이해되어야만 한다. 





‘영구혁명’ 이론으로부터 계속하여, 뜨로츠끼주의는 레닌주의를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 레닌주의는 한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 뜨로츠끼주의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레닌주의는 농민층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믿을 수 있고 굳건한 동맹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뜨로츠끼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레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노동계급의 지도력 하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과제에 빈농과 중농층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반면, 뜨로츠끼주의에 따른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여기에서 갖고 있는 것은 일시적인 성격의 의견의 차이들이 아니며 혹은 사소한 문제들에서의 차이도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갖고 있는 것은 두 개의 근본적으로 상이하고 상호 간에 화해할 수 없는 조류들이다: (i) 혁명적 레닌주의와 (ii) 반혁명적 뜨로츠끼주의.





뜨로츠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레닌주의 이론을 이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영구혁명’이라는 파산한 이론을 받아들임에 의해 그들의 정치적 전망이 속박되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그것이 제국주의에 관한 레닌의 이론을 결코 받아들이지(말로 받아들이는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실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 죄악들―‘영구혁명’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제국주의에 관한 레닌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뜨로츠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구성하고, 나중에 계속 설명될 것인데, 왜 뜨로츠끼주의가 파시즘과 동맹하게 되는 지점까지 타락하게 되었는지 상당정도로 설명한다.















사회주의는 쏘련에서 건설되었는가? 뜨로츠끼는 그렇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회주의는 쏘련에서 건설되었다고 대답한다. 스탈린과 볼세비키 당과 혹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대해 호의적이라고 결코 묘사될 수 없는 한 권위자를 인용하여, 우리의 긍정적인 대답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권위자는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데 달인인 뜨로츠끼 자신이외의 다른 사람이 아니다:





뜨로츠끼는 말한다.










 “사회주의는 자신의 승리의 권리를 드러냈는데, ��자본론��의 페이지에서가 아니라 지구 표면의 1/6을 구성하는 산업의 무대에서, 변증법의 언어에서가 아니라 강철, 시멘트 그리고 전력의 언어에서이다. 심지어 쏘련이 어려움들, 외부의 타격들, 그리고 지도력의 잘못들의 결과로서 붕괴할 지라도―그것은 우리가 희망하건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뜨로츠끼의 희망들의 실제적 성격은 모스크바 재판들에 의해 폭로되었다)―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 덕택으로 후진적인 나라가 10년이 못되어 역사에서 유례없는 성공들을 달성했다는 파괴될 수 없는 사실이 미래의 진실로서 남아있을 것이다.” (뜨로츠끼, ��배반당한 혁명��)










그리고 다시:










“거의 모든 자본주의 세계에서 침체와 쇠퇴의 배경들과 반대된, 쏘련에서 산업화의 광대한 전경은 다음의 총목록에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산업에서 거대한 성취들, 농업에서 거대할 정도의 유망한 시작들, 구산업 도시들의 특별한 성장과 새로운 도시들의 건설, 노동자들의 수에서 빠른 증가, 문화적 수준과 문화적 요구들에서 상승―이런 것이 10월 혁명의 의심의 여지없는 결과들이다. ..” (뜨로츠끼, ��배반당한 혁명��)










혹자는 위에서 인용된 언급에서 뜨로츠끼 자신에 의해 전개된 것보다 더 좋은 뜨로츠끼주의에 대한 반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솔직한 인정에 대해 뜨로츠끼에게 매우 감사하고 빚을 지고 있다. 뜨로츠끼가 “사회주의는 ��자본론��의 페이지에서가 아니라 지구 표면의 1/6을 구성하는 산업적 무대에서 자신의 승리의 권리를 드러냈다”고, 산업에서 “거대한 성취들”이 있었다고, “거대할 정도로 유망한” 것이 농업의 영역에서 결과들이었다고, 쏘비에트 인민의 “문화적 수준과 요구들”에서 상승이 있었다고 인정할 때 그는 올바랐다. 그는 절대적으로 옳았다. 이런 것은 물론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를 위한 싸움들―당의 14차 대회의 결정(뜨로츠끼와 신반대파, 즉, 지노비예프 등으로부터 가장 사악한 반대를 만나야 했던 결정)에 따라 당에 의해 시작된 싸움―의 “의심의 여지없는 결과들”이었다.















올바른 정책과 지도력의 역할










맑스-레닌주의의 기치와 위대한 레닌주의자이고 가장 단호한 레닌주의의 옹호자에 의해 지도되는 볼세비키 당의 올바른 지도력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스탈린 동지와 쏘비에트 인민은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사회주의의 적들―내부적 그리고 외부적―을 분쇄하면서, 승리로부터 승리로 행진을 했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기적들을 달성했고 10월 혁명에 의해 창출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라는 조건(뜨로츠끼는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싸움의 모든 성공들과 업적들을 오직 이 조건들 탓으로만 돌린다) 때문만이 아니라 볼세비키 당의 혁명적 정책과 그 지도력의 우수성 때문에 그렇게 했다. 당의 역할과 지도력의 우수성은 그것없이는 아무 것도 달성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요인들이다.















“사회주의화된 소유의 조건들”은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










“사회주의화된 소유의 조건들”은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 자신의 느낌들과 아직 갈라지지 못하거나 혹은―같은 것인데―‘영구혁명’ 이론을 받아들인 누군가가, 사회주의 건설의 기간 동안에 쏘련의 지도력이 뜨로츠끼같은 사람에게 주어졌다면 쏘비에트 인민은 그들이 실제로 했던 것과 같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정확히 동일한 결과들을 달성했을 것이라고 진지하게 제기할 수 있는가? 이러한 제기는,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측에서의 직접적인 국가적 지원이 없이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권력의 자리에 유지할 수 없을 것이고 자신의 일시적 지배를 견고한 사회주의 독재로 전환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필연적이며 그리고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유일한 혁명적 길이라고 믿고 있는―그리고 객관적 실재에 기초하여 믿고 있는―사람들과 똑같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투쟁을 지도하는데 적합하다고(혹은 뜨로츠끼주의자같은 아는 체하는 바보가 대개 주장하듯이, 더욱 적합한)하는 불합리한 주장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제기는 물론 매우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역사의 진실 문제로서 “사회주의화된 소유”는 자본주의적 요소들에 대해 자동적으로 승리하지 않았고, 그리고 승리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명확한 정책을 가지고 있는 당의 올바르고 계획된 지도력이라는 이유에 의해 승리할 수 있었고 승리했다. 그러나 당의 정책이 성공하고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 전에 잘못된 그리고 반혁명적인 정책들이 패배해야만 했고 패배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한 것에도 불구하고 뜨로츠끼주의자들은 계속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대하여, 지도력의 우수함이 아니라 “혁명에 의해 창출된 사회주의화된 소유라는 조건들” 때문이라고 기계적으로 암기한 공식을 되풀이한다. 여전히 그들은 실제의 그리고 상상의, 사소하거나 혹은 주요한 모든 실수들에 대해 지도력을 비난한다. 자! 여러분은 두가지 길을 가질 수 없다, 귀중한 뜨로츠끼주의자들이여! 여러분은 사회주의는 하나의 나라에서 건설될 수 없다고 계속하여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혁명에 의해 창출된 사회주의화된 소유라는 조건들”이 그들 스스로 자동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주장한다! 여러분은 지도력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없지만 그러나 여전히 실제적 혹은 상상적인 모든 불행들에 대해 “스탈린 그룹”을 비난한다! 당신이 말하는 것에는 강렬한 모순이 있다! 당신은 정말로 이 불일치를 인식할 수 없게 되었는가? 당신의 인식능력과 당신의 정치적 안목은 정말로, ‘영구혁명’이라는 파산한 이론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정도로 왜곡되게 되었는가?





뜨로츠끼의 ‘영구혁명’ 이론은 역사에 의해 매우 쓸모없고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다. 결과적으로 뜨로츠끼는 맑스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유일한 올바른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즉, 실천상에서 잘못된 것임이 입증된 이론은 포기하고 솔직하게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할 수 있었다. 뜨로츠끼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소부르주아적 개인의 지식인적인 거만함(그리고 뜨로츠끼의 경우에는 이러한 거만함이 최고로 발전된 단계로 발견될 수 있었다)이 뜨로츠끼가 소부르주아 지식인의 눈에 단지 명백한 굴욕일 뿐이었던 것을 견디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리하여 뜨로츠끼는 그의 이론이 올바르고 역사가 틀렸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관념론적 입장인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실제가 그에 대한 나의 개념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러면 실재에 무엇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실재는 그에 대한 나의 개념에 맞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론적인 입장은 버클리 주교와 같은 것인데, 뜨로츠끼를 타락의 길로 더욱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사소한 잘못일 수 있었던 것이 정당화되고, 고집을 부리고 그리고 체계―이론―의 수준으로 상승될 때 괴물이 되는 것이다. 잘못된 이론은 잘못된 실천을 이끌고 그리고 실천의 관점에서 교정에 실패하면 각각에서 저질러지는 잘못은 더욱 더 큰 것이 된다. 양은 스스로 질로 전화되었다. 잘못들이 스스로 범죄로 전화되었다. 이 과정만으로도 왜 뜨로츠끼가 파시즘의 동맹과 대리인이 되는 지경으로 타락했는지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도 쏘비에트 국가를 타도하려고 결심했는지를 설명한다. 뜨로츠끼주의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은 뜨로츠끼 스스로가 그랬듯이 동일한 타락의 길로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뜨로츠끼주의자들의 화려하고 유혹적인 수사에 의해 넘어간 보통의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말한 것 즉, 뜨로츠끼주의를 버릴 것, 맑스-레닌주의를 수용할 것,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타도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싸움에서 귀중한 공헌을 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할 것을 호소한다.















사회주의적 산업화에서 성취들










1926년 초에 쏘비에트 산업은, 신경제정책 하에서 쏘비에트 정부에 의해 취해진 복구 조치들의 결과로서 다소간에 전전(戰前) 수준에까지 복구되었지만, 세 가지 결함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i) 대부분의 공장들이 오래되었고 낡아빠진 그리고 구식의 기계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ii) 기계제작 공장들이 없었다, 그리고 (iii) 언급될 만한 가치가 있는 중공업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사회주의 산업화정책에 의해 교정되어야만 했다. 추가적으로 군수산업이 노동계급의 최초의 국가를 방위하기 위해 창출되어야만 했다. 농업기계류의 생산을 위해 공장들을 짓는 것, 그리고 작은 개인 농장들이 대규모의 집단 농장들로 넘어가게 하기 위해 농업에 이런 기계류를 공급하는 것, 그리고 이리하여 시골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보증하는 것이 또한 필요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러시아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산업들이 창출되어야만 했다.





기술적, 재정적인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제국주의의 간섭계획들을 패퇴시키고 뿐만 아니라 내부의 반동들―당내의 그리고 당 밖의―의 계획들과 구상들을 분쇄하면서 그리고 모범적인 노동영웅주의를 보이면서 그들이 계속하여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성공적으로 건설한 것은, 쏘비에트 대중들의 커다란 신뢰와 영광으로, 볼세비키 당과 그것의 단련되고 검증된 지도자 스탈린 동지의 업적으로 언급되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은, 대중들의 열정, 그들이 사회주의 건설의 과제에 참여한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들의 노동에 대한 태도의 변화 때문에 가능했다. 자본주의 하에서처럼 비자발적이고 고역의 태도로부터, 노동은 스탈린이 말했듯이 “명예의 문제, 영광의 문제, 용기와 영웅주의의 문제”로 되고 있었다.





이미 1930년 말에 산업의 건설은 거대한 규모로 전국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다.










“드니페르 수력발전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크라마토르스크 그리고 골로프스카 철과 강철 공장들의 건설작업 그리고 루간스크 로코모티프 공장들의 재건이 도네츠 분지에서 시작되었다. 새로운 탄갱과 송풍 용광로가 만들어졌다. 우랄 기계제작 공장들과 베레트니키 그리고 솔리칸스크 화학공장들이 우랄에서 건설 중이었다. 작업은 마그니토고르스크의 철과 강철 공장들의 건설에서 시작되었다. 모스크바와 고르키에서 대규모 자동 공장들의 설립은 잘 진행되었고 로스토프 온 돈에서 거대한 트랙터 공장들, 수확 콤바인 공장들, 그리고 대규모 농업기계류 공장들이 잘 건설되었다. 쏘련의 두 번째 석탄 지대인 쿠츠네츠크 탄갱들은 확장 중이었다. 거대한 트랙터 공장들이 11개월 만에 스탈린그라드 근처의 스텝지대에서 솟아났다. 드니페르 수력발전소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들의 설립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생산성에서 세계 기록을 깼다.”





“역사는 이러한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발전에 대한 이런 열정의, 수백만의 노동계급 측의 이러한 노동 영웅주의의 산업 건설에 대해 결코 알지 못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경쟁에 의해 만들어지고 자극된 노동 열정의 틀림없는 솟구침이었다.”(쏘련 공산당(볼)의 역사)










산업의 성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38년까지, 1913년과 비교하면 쏘비에트 산업은 9배 성장했다. 여기에 제 1차 대전 전의 수준의 퍼센트로서 표현된 쏘비에트 산업의 성장을 보여주는 표가 있다. 이 표는 동일한 기간에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산업의 성장과 비교하여 산업의 성장률을 또한 드러내준다. 그것은 ��레닌주의의 문제들��(p.762)에서 재현되었듯이, 1939년 3월, 쏘련 공산당의 18차 대회에 대한 스탈린의 보고로부터 재현된 것이다.  















쏘련과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산업의 성장(1913년-1938년)



































































































































 





 1919





 1933





 1934





 1935





 1936





 1937





 1938





 쏘련





 100.0





 380.5





 457.0





 562.6





 732.7





 816.4





 908.8





 미국





 100.0





 108.7





 112.9





 128.6





 149.8





 156.9





 120.0





 영국





 100.0





 87.0





 97.1





 104.0





 114.2





 121.9





 113.3





 독일





 100.0





 75.4





 90.4





 105.9





 118.1





 129.3





 131.6





프랑스





 100.0





 107.0





 99.0





 94.0





 98.0





 101.0





 93.2












이 점에 관한 스탈린의 주장은 부르주아 전문가들에 의해 충분히 확증된다. 자신의 책, ��스탈린의 산업혁명��에서 인디아나 대학의 교수인 히로아키 쿠로미야는 특히 다음과 같은 관찰을 했다:










“1928-1931년의 혁명에 의해 만들어진 돌파는 제 2차 대전에서 그 나라를 떠받칠 1930년대의 놀라운 산업적 팽창의 토대를 놓았다. 5개년 계획이 4년만에 완수되었다고 선언된 1932년 말까지 총 산업산출고는 공식적인 보고에 따른다면, 1928년 이후로 2배 이상이 되었다. 이 공식적 보고는 서구에서 대개 과장된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1차 5개년 계획의 자본 계획들이 1930년대에 차례 차례로 가동에 들어감에 따라 산업생산은 거대하게 팽창했다. 1934-1936년 동안에 ... 공식적 지표는 총산업 생산이 88%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A’산업들(자본재 산업들)의 산출고가 107% 증가하고 ‘B’산업들(소비재 산업들)의 그것이 66% 증가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1927-8년에서 1937년까지의 10년동안 쏘비에트의 자료에 따르면, 총산업생산이 183억 루블에서 955억 루블로 뛰어 올랐다. 주철 생산은 330만 톤에서 1,450만 톤으로 올랐고 석탄은 3,540만 톤에서 1억 2,800만 톤으로, 전력은 5억 천만 킬로 아워에서 36억 2천만 킬로 아워로, 기계도구들은 2,098세트에서 36,120세트로 증가했다. 과장을 참작하더라도 성취들이 눈부시다는 것은 확실히 언급될 수 있다.” (쿠로미야, p.287)










모스크바에서 1958년에 발행된 통계적 요약인, ��쏘비에트 권력의 40년��에 따르면, 1930-1940년의 11년간에 쏘련은 산업생산에서 연평균 165% 성장을 기록했다.





쏘비에트 인민에 의해 수행된 놀라운 산업적 위업의 올바른 반영인 고정자본의 성장에 관하여, 1913년의 수치를 100으로 잡으면, 우리는 1928년―제 1차 5개년 계획의 시작의 해―에 이 수치가 136에 도달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12년 후인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야인 1940년에 지표는 1,085―유례없는 8배 증가―로 뛰어올랐다. 동일한 기간동안 농업의 고정자본에서 수치의 증가는 100(1931년), 그리고 333(1940년)이었다. (26페이지와 30페이지를 보라)





후진적이든, 선진적이든 어떤 자본주의 나라가 산업화의 무대에서 이러한 거대한 성공들을 자랑할 수 있는가!





관련된 희생들에도 불구하고 쏘비에트 인민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아이들을 위해 밝은 사회주의적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목적의식적인 결의를 갖고 도전을 즐겁게 받아들였고 계획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노동 영웅주의를 보여주었다. 히로아키 쿠로미야는 올바르게 관찰한다:










“역설적으로 보일지라도 강제된 축적은 결핍과 불안정뿐만 아니라 쏘비에트 영웅주의의 근원이었다. ...쏘비에트 젊은이들은 1930년대에 공장들에서 그리고 마그니토고르스크와 크즈네츠크같은 건설장에서의 작업에서 영웅주의를 발견했다...” (p. 305-6)





“5개년 계획의 빠른 산업화 드라이브는 새로운 사회 건설의 웅장하고 극적인 목표를 상징했다. 서구의 침체와 대중적 실업이라는 배경에 반대하여 촉진되어서, 쏘비에트 산업화 드라이브는 영웅적이고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초인적’ 노력을 불러일으켰다. 일리야 에렌부르크가 썼듯이, ‘다른 많은 것들과 같이 열정이라는 단어는 인플레이션에 의해 저평가되었다. 그러나 1차 5개년 계획의 날들에 적합한 다른 단어가 없다. 젊은 사람들을 일상의 그리고 평범한 위업들로 이끄는 영감을 준 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열정이었다.’ 동시대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의 날들은 ‘실제적으로 낭만적이고 흥분되는 시기였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 이전에는 단순한 꿈같은 것이었던 것을 창조하고 있었고 실천 상에서 이러한 꿈같은 계획들이 완전한 현실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p. 316)










쏘비에트 인민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그의 확신을 표명하면서, 쏘련이 유럽 혹은 미국에서 승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결합되지 않을 지라도, 레닌은 “공산주의는 쏘비에트 권력 더하기 전 나라의 전기(電氣)화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전망에서 문제들에 접근하면서, 레닌은 러시아의 전기화에 대한 계획을 1920년에 진전시켰는데, 그것은 15년의 기간 동안 175만 kw 용량의 30개의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을 그리고 있었다. 실제로는 1935년까지 쏘련은 전력을 407만 kw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레닌의 과감한 꿈을 233%나 초과달성―쏘비에트 인민의 자기희생적인 영웅주의와 스탈린에 의해 영도된 쏘련공산당의 레닌주의적 지도력의 결의와 지혜의 믿을 수 없는 공헌 때문에―하고 있었다. (��쏘비에트 권력의 40년��을 보라)





이러한 거대한 달성들은 유례없는 내부적 축적을 통해서만 가능했는데 어느정도는 즉각적인 소비를 희생한 것이었다. 1928년에는 축적기금이 3억 6천만 루블이었는데 국민수입의 14%였다. 이것들은 1932년에 17억 7천만 루블(국민수입의 44%)로 상승했다.





이 모든 것은 노동계급이 당하고 있는 무서운 어려움들에 대한 쏘비에트 정권의 무감각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쏘련과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발생한 것이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쏘련은, 경공업의 발전에 커다란 강조를 둠에 의해, 더 많은 소비재를 생산함에 의해, 더 많은 집을 건설함에 의해, 실제로 그러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정도로 쏘비에트 인민의 생활수준을 쉽게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러한 것이 당시 임박하고 있던 전쟁에서 쏘련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었을까? 나찌 짐승들이 1,710개의 도시들과 70,000이상의 마을과 부락들을 약탈하고, 방화하고, 파괴했고 2천 5백만의 쏘비에트 시민들을 집이 없게 했고 처소를 빼앗았다는 것(��쏘비에트 권력의 40년��을 보라)을 아무도 잊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오직 1928년과 1940년 사이 기간의 중공업, 야금업 그리고 기계제작산업에 강조를 둔, 격렬한 산업화만이 그리고 현대적 무기산업의 발전만이 나찌의 습격에 직면하여 쏘련을 구할 수 있었다(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오직 이러한 산업화만이 집단화와 더불어 쏘비에트 인민을, 수백만의 문맹의 농민들에게서 그들의 중세적 외피를 찢어버림에 의해, 기계류의 현대 세계로 몰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노동계급과 농민들의 생활 조건들이 짜르 정권하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참한 상태였다고 아무도 결론지을 수 없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산업화와 집단화는 쏘비에트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번영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1934년까지, 자본주의 세계에는 깊은 침체와 대규모 실업이 있었던 반면에 쏘련은 실업을 폐지했다.





1934년에는 이미 도시와 시골의 모습은 모두 산업화와 집단화의 성공의 결과로서 몰라보게 달라졌다. 1934년 1월에 열린, 17차 당대회에 대한 자신의 보고에서 산업화와 집단화에 의해 이루어진 변화들을 스탈린이 묘사한 그림같은 단어들이 이것들이다:










“착취자들에 대한 이 역사적인 승리가 노동인민의 물질적 수준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들의 생활의 조건에서 급격한 개선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생적인 계급들의 제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소멸을 초래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노동은 착취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착취자들이 인민의 노동으로부터 짜내던 수입들은 지금은 노동인민의 수중에 남아 있고 부분적으로는 생산의 확장과 생산에서 노동인민의 새로운 분견대의 편입을 위해 사용되고 부분적으로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수입을 직접적으로 증가시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노동계급의 천벌인 실업은 사라졌다. 부르주아 나라들에서 수백만의 실업자가 일자리의 결여로 인해 결핍과 궁핍에 고통받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자리와 수입이 없는 노동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쿨락의 굴레의 소멸로 인해 농촌에서 빈곤은 사라졌다. 모든 농민들은, 집단농장의 농부이건 혹은 개인적 농부이건 간에, 그가 양심적으로 일하기를 원하고 게으름뱅이, 방랑자, 집단농장 재산의 약탈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기만 한다면 지금은 인간적 존재를 향유할 기회를 가지고 있다.”





“착취의 폐지, 도시들에서 실업의 폐지 그리고 농촌에서 빈곤의 폐지는 노동인민의 물질적 조건에서 역사적인 성취인데 이것은 부르주아 나라들에서, 심지어 가장 ‘민주적인’ 나라들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꿈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의 대도시들과 산업적 중심들의 외관은 변화했다. 부르주아 나라들에서 대도시들의 불가피한 특징은 슬럼, 소위 도시 외곽에서 노동자 지구들이다. 한 무더기의 어둡고, 음습하고, 초라한 거주지들, 대부분은 지하실 형태인데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더럽게 살고 자신의 운명을 저주한다. 쏘련에서 혁명은 우리의 도시들에서 슬럼들을 일소했다. 그것들은 밝고 잘 지어진 노동자들의 주택들의 블록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많은 경우들에서 우리 도시들의 노동자계급 지구들은 중심 지구들보다 더 좋은 외관을 띤다.”





“우리의 농촌지구들의 외관은 더 많이 변화했다. 가장 도드라진 곳에 교회가 있고 전면에 가장 좋은 집들―경찰관, 사제, 그리고 쿨락들의 집들―이 있고 후미진 곳에 농민들의 초라한 오두막이 있는 낡은 유형의 마을은 사라지고 있다. 그것의 자리는 새로운 유형의 마을로 대체되고 있는데, 공공의 농장 건물들, 클럽들, 라디오, 영화, 학교들, 도서관들, 그리고 탁아소들이 있고 트랙터, 수확 콤바인, 탈곡기, 그리고 자동차들이 있다. 이전의 마을의 중요한 요인(要人)들, 쿨락 착취자, 피를 빨아먹는 고리대금업자, 폭리를 취하는 상인, ‘작은 아버지’인 경찰관이 사라졌다. 지금은 마을의 탁월한 요인들은 집단농장들과 국영농장들, 학교들과 클럽들의 지도적 노동자들이고, 트랙터와 콤바인 운전자들, 들판 일과 가축 사육에서의 팀 지도자들, 집단농장의 들판에서 가장 뛰어난 남녀의 특별작업대 노동자들이다.”










쿠로미야는 말한다.










“1932년까지 산업의 노동력은 6백만 이상이 증가되어 1928년보다 배가되었다.”(쿠로미야, p.290)





“동일한 4년 동안, 모든 부문에 걸쳐서, 천 2백 5십만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새로운 직업을 찾았고 그들 중 8백 5십만은 이전에 농부였다.”(p. 306)










쿠로미야의 책의 요점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스탈린은, 자신들의 대열에서 일어났던 사보타지하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피억압계급의 전쟁의 하나로서 쟁점을 제기함에 의해 빠른 산업화를 위해 산업의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벨기에 노동당(PTB)의 의장인 루도 마르탱은 최근에 발행된 그의 책 ��Un Nouveau Regard sur Staline��에서 다음과 같이 적절한 관찰들을 하고 있다:










“이 생각은 올바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상의 그리고 역사적 작업들에 의해 우리는 항상적으로, 산업화와 집단화의 이름 하에 벌어졌던 이들 계급전쟁들에서 억눌려진 사람들과 동일시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억압은 ‘언제나 비인간적’이며 문명화된 나라에서, 실제적으로 착취자들이건 혹은 이러한 계급들이건 간에 어떤 특정한 사회적 그룹에게 해를 주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누가 이러한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적인 주장에 반대할 수 있는가?”





“그러나 문명화된 세계에서 산업화가 어떻게 달성되었는가? 런던과 파리의 우리의 은행가들과 산업의 대장들은 그들의 산업적 토대를 어떻게 창출했는가? 그들의 산업화는 인디언 왕들의 금과 은의 약탈―6천만명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절멸을 수반한 약탈―없이 가능했겠는가?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자행된 괴물같은 대학살 즉, 노예무역없이 가능했겠는가? UNESCO 전문가는 아프리카의 손실을 2억 천만 명으로 산정하는데 습격에서 죽은 사람들, 여행 중에 죽은 사람들, 노예로 팔린 사람들을 포함한다. 우리의 산업화가 전체 민족들을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죄수들로 전환시킨 식민화없이 가능했겠는가?”





“수백만의 ‘원주민’의 죽음에 기초하여 유럽이라 불리는 지구상의 그 작은 구석을 산업화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에게 소유계급들에 대한 볼세비키의 억압을 증오라고 말하고 있다! 농민들을 총부리로 그들의 땅에서 쫓아내는 것에 기초하여 그들의 나라를 산업화한, 여성들과 아동들을 14시간 노동일에 종속시킴에 의해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을 실업과 기아의 위협 하에 일하도록 강제한 사람들이―이 사람들이 감히 그들의 문헌에서 쏘련에서 ‘강제된’ 산업화를 맹렬히 비난한다!”





“쏘련의 산업화가 부유하고 반동적인(혹은 부유하거나 반동적인) 5%에 대한 억압에 의해 영향을 받아야만 했다면,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그들 자신 나라의 그리고 피억압 나라들의 전체 노동 대중들에 대하여 동일한 부유한 5%에 의해 가해진 테러로 탄생했다는 것은 또한 진실이다.” (같은 책, 브뤼셀, 1993)










쏘련이 스스로를 변혁시키고 쏘련 공산당 주위에 결집하여 그것의 구호들에 하나로서 응답했던 수천만의 인민들의 창조적인 활동과 끝없는 열정을 통해 한 걸음에 7리그(21마일 거리―역자)씩 걸어나갈 때 그 악명높은 “쏘련 공산당(볼)에 관한 문제들에서 자본주의 언론의 정보국” 즉, 뜨로츠끼주의는 소위 당의 타락과 관료주의에 대해 외치고 다니느라 바빴다. 사실상, 쏘련의 빠른 산업화와 집단화의 아슬아슬한 용감한 계획은 당이 대중들 사이에 뿌리를 깊이 내림이 없이는 그리고 수천만 대중들의 능동적이고 열정적인 참여없이는 달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쿠로미야 같은 보통의 부르주아 지식인도, 뜨로츠끼주의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이 감수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어 거의 어려움이 없다. 쿠로미야에 따른다면 당원은 1928년에 1백 3십만에서 1930년에 1백 6십만으로 증가하였다. 동일한 기간에 산업노동자의 비율은 57%에서 65%로 올라갔다. 새로운 취업자의 80%는 돌격대(shock-brigade) 노동자들이었다. 대부분 이들은 기술 교육을 받은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 모범 노동자들로 두드러졌고 생산을 합리화하는 것을 돕고 높은 생산성 수치를 달성하고 있던 콤소몰 활동가들이었다. (319페이지와 115페이지를 보시오)





1930년에서 1933년 사이에 쏘비에트 국민수입은 350억 루블에서 500억 루블로 올라갔다. 동일한 기간에 쏘련의 인구는 1억 6천만에서 1억 6천 8백만으로 증가했고 산업의 노동력은 거의 8백만(천 4백 5십만에서 2천 백 8십만으로)이 늘었다. 노동자들과 여타 피고용인의 급료 총액은 천 3백 5십만 루블에서 3천 4백 2십만 루블(급료 총액에서 필자의 계산상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임―역자)로 되었다. 연평균 임금은 991루블에서 1591루블로 상승했다. 노동자들과 여타의 피고용인을 위한 사회보험 기금은 18억 천만 루블에서 46억 천만 루블로 증가하였다.





동일한 기간에 모든 산업의 영역에서 7시간 노동일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쏘련 전체에 걸쳐 의무적인 초등교육의 도입이 이루어졌다―그리하여 인구 중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였는데 1930년의 67%에서 1933년 말에 90%가 되었다. 모든 학년의 학교에 나가는 학생의 수가 1929년의 천 4백만에서 1933년에 2천 6백 4십만이 되었다. 취학전 교육을 받는 어린이들의 수는 838,000명에서 5,917,000명으로 되었다. 고등교육기관의 수가 1914년 91개에서 1933년 600개로 증가하였다. (위의 모든 수치는 스탈린의 쏘련 공산당 17차 당대회에 대한 보고, ��레닌주의의 문제들��로부터 취한 것이다. pp. 620-621)





당시의 쏘련에서 이들 전방면의 폭풍같은 발전들과 필적하는 어떤 부르주아 나라도 없다.





이제 산업에서 농업으로 전환해보자. <노사과연>






1) 다른 곳에서, 외적인 그리고 내적인 모순들, 사회주의 승리의 외적인 그리고 내적인 방해물들을 분석하면서, 스탈린은 올바르게, 내적인 모순들은 단 하나의 나라에서(당시는 쏘련) 극복될 수 있고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있지만, 이것은 그자체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쏘련에서 제국주의의 간섭과 자본주의의 복고에 대한 반대를 보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몇몇의 나라들에서의 혁명이 필요하다. 여기에 스탈린이 말한 것이 있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의 가능성은, 한 나라(물론, 우리 나라를 의미한다)에 의해 완전히 극복될 수 있는 내적인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지만,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의 가능성은 사회주의 나라와 자본주의 나라들 간의 외적인 모순들, 몇몇의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결과로서만 극복될 수 있는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순들의 이들 두 범주를 혼동하는 사람은 누구나 희망이 없는 멍청이이거나 교정할 수 없는 기회주의자이다.”(우리 당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일탈, 쏘련 공산당(볼)의 15차 전국협의회에서 행한 보고, 1926년 11월 1일, ��스탈린 선집�� 8권, p. 278)





정확하게 이들 희망없는 멍청이들과 교정할 수 없는 기회주의자들은 뜨로츠끼주의자들이다.






2) 특히 공식적인 사회민주주의의 배신으로 인해, 유럽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성공적으로 건설하는 것이 유일한 혁명적 출구라는 것이 쏘련공산당의 입장이다. 그것은 세계혁명을 발전시키고 더 다가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맑스-레닌주의의 기치 하에 그리고 스탈린 동지에 의해 영도되는 쏘련공산당(볼)의 지도력 하에 쏘비에트 인민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일을 진척시켰고 이리하여 세계혁명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 반면에, 뜨로츠끼주의의 멍청이들과 교정할 수 없는 기회주의자들은 세계 혁명에 대한 그들의 오랫동안의 그리고 희망없는 기다림을 시작하였다. 이 점에 관하여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뜨로츠끼주의의 입장이 카우츠키주의의 입장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카우츠키의 배신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고, 그의 이데올로기는 볼세비즘, 10월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에 반대하면서 유럽 부르주아지에게 봉사했다.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 관한 카우츠키주의의 샘플에 독자들이 익숙해질 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에 카우츠키가 1918년에 볼세비키들을 공격하기 위해 말한 것이 있다:





“볼세비키 혁명은 그것이 전반적인 유럽 혁명의 시작점이 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었다. ... 이 이론에 따르면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불러일으킬 유럽 혁명은 또한 ... 그 나라의 경제적 후진성에 의해 창출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수행하는데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 가정이 승인된다면, 러시아 혁명이 불가피하게 유럽 혁명을 해방해야만 한다면, 매우 논리적인 생각이고 그 토대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될 것인가? ... 우리의 볼세비키 동지들은 전반적인 유럽 혁명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 카드가 출현하지 않음에 따라 그들은  스스로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 이끄는 과정으로 들어가야만 했다.”(카우츠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위의 인용을 뜨로츠끼의 ‘영구혁명’ 이론과 대충 비교하기만 해도 뜨로츠끼주의가 카우츠키주의의 변종이라는 진실을 절절하게 느끼기에 충분하다.






3) 뜨로츠끼주의는 불균등한 경제적 발전이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라는 레닌의 테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뜨로츠끼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다양한 나라들에서 경제적 발전에서 모든 불균등성을 폐지한다. 뜨로츠끼가 주장하기를, 제국주의의 착취는 착취하는 나라와 착취당하는 나라들의 경제적 조건들에서 어떤 불균등성이라도 폐지하는 것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28년에 뜨로츠끼는 “인도와 영국 간의 사라지는 갭”에 대해 썼다. 자본주의의 불균등한 발전에 대한 이러한 거부의 입장으로부터 뜨로츠끼는 계속하여, 레닌주의를 직접 반대하면서, 민족적 혁명은, 가능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뜨로츠끼주의가 말하기를, 제국주의는 민족적 경제를 폐지하고 단일한 세계 경제를 창출했기 때문이라는, 오류에 찬―즉, 반혁명적인―결론으로 나아간다. 한 나라의 한 부분(즉, 통합된 민족적 경제의 부분)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있을 수 없듯이 그리하여, 뜨로츠끼주의가 말하기를, 민족적 경제가 단일한 하나의 통합된 세계경제의 부분이기 때문에 하나의 민족적 혁명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뜨로츠끼주의에 따른다면, 세계혁명―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의 혁명―은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아니면 전혀 아니다. 여러나라가 이어서 빠르게 연속되어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만 하는데, 마치 민족적 혁명에서 한 나라의 상이한 부분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만약에 뜨로츠끼의 현실에 대한 관점이 올바르다면,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성공적인 건설은 현실과 뜨로츠끼주의 사이의 커다란 간극에 대한, 뜨로츠끼주의의 완전하고 교정할 수 없는 기회주의적 성격에 대한, 그것의 내적인 반혁명적 내용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를 제공했다.






4) 물론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처럼 사회주의의 문제에 대해서, 스탈린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공격들은 거의 언제나 레닌과 레닌주의에 대한 공격이다. 이 진술의 올바름을 보이기 위해 로이 메드베제프라는 이름의 쏘비에트 부르주아 지식인에 의해 쓰여진 ��역사가 판단하게 하라��라는 이름의 책을 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메드베제프는 스탈린을 공격하지만 레닌을 ‘칭찬한다’. 스탈린에 대한 메드베제프의 공격은 어떤 사실들 혹은 증거자료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소문과 날조라는 말의 의미에서 그 산출이 제한되어 있지 않은 부르주아적 두뇌의 풍부한 상상력에 기초한 것이다. 심지어 이 책에 대한 평론가들 중의 한 사람인, 반동적인 반공산주의 칼럼니스트 에드워드 크랑크쇼우조차 1972년 3월 26일자의 ��업저버��에서 메드베제프가 “모든 공식적인 기록들에 대한 접근이 거부되었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은 크랑크쇼우가 메드베제프의 스탈린에 대한 공격의 이유가 “이책은 그의 내부적인 관점에 의해서만 인도되어, 진실을 위한 재능있는 개인적 싸움의 수준 높은 드라마이다”라고 동의하고 경탄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이것은 ‘진실’이 부르주아적 심성에 의해 즉, 완전히 사실들을 무시하고 혹자의 “내부적인 관점”에 의존하는 것에 의해 어떻게 수립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크랑크쇼우는 계속하여 말한다: “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것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과 전체로서 쏘비에트 인민들의 고통에 대한 경의의 행동을 별도로 하고, 그의 서술은, 스탈린의 위대함에 대한 요구들에 대한 저자의 절대적인 거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보다 깊게는 레닌의 혁명과 그것의 충만함의 성격에 대한 지적인 토론의 개시에 대해서 필요한 이유들을 수립하는 방향으로 무엇보다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라오쿤이 들어오는 지점이다. 요라프스키 교수(그의 편집은 매우 칭찬할만하다)가 그의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전체로서 책의 수많은 특별한 영향은 중심적인 테제에서 내적인 모순들에 의해 창출되는 항상적인 긴장으로부터 나온다. 쏘비에트 체제와 그것의 창시자 레닌을 비난함이 없이 어떻게 스탈린주의적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저자와 함께 칼날 위에서 걷는다.”





요라프스키 교수는 이 내적인 모순을 간파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올바른가? 그는 “스탈린주의적 ‘질병’”이 “쏘비에트 체제와 그것의 창시자 레닌을 비난함이 없이는” 진단될 수 없다고 시사함에 있어 매우 올바르다. 이 모든 시도들은 실패할 것이고 ‘스탈린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모두 레닌주의를 비난하는 것으로 끝맺을 수밖에 없다. 크랑크쇼우가, 메드베제프가 “매우 뛰어난 성취에서 약점들(레닌을 비난함에 의해 “스탈린주의적 ‘질병’”을 진단하지 못하는 메드베제프의 무능력)을 언젠가 교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함에 의해 그의 견해를 끝맺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니다.





머빈 존스는 같은 방식으로 같은 책(��새로운 정치가��, 1972년 4월 14일자)에 대한 그의 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불평을 한다, “그의 분석적인 장(chapter)들조차 ‘왜?’라는 질문보다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하고 있다. 그는 트집잡기 없이 ‘레닌주의의 규범들’이라는 교조를 채택하고, 레닌은 언제나 올바랐다고 가정하고, 스탈린은 ‘10월 혁명의 주요한 성취들의 하나였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거의 완전하게 청산했다고’―그 민주주의가 레닌의 시절에 얼마나 많이 침식되었는지를, 하물며 그것이 실제로 존재했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물음이 없이―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심지어 스탈린주의 비밀경찰과 인도적이고 양심적인 체카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체카는 어쨋거나 1918년에 6,000의 인민을 재판없이 총살했고 레닌에 의해 ‘대규모적인 붉은 테러’의 시작이라고 정당화되기도 했다. 우리는 뜨로츠끼의 영구혁명 이론이 ‘틀렸고’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원시적인 사회주의 축적 이론이 ‘올바르지 않’다고 들었는데 이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간략한 기각이다. 최악의 착오는 메드베제프가 베리야가 1919년에 반볼세비키 요원이었고 이것이 1953년의 그의 재판―틀림없이 비밀재판이었을 것이고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재판―에서 ‘수립되었다’고 엄숙하게 주장할 때 드러난다. 아, 쏘비에트 정권의 가장 정직한 산물조차도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구속복(미친 사람 등에게 강제적으로 입히는 옷―역자)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다른 말로 하면, 머빈 존스는 혹자는 쏘비에트 체제와 레닌주의를 비난함이 없이는 스탈린을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옳다. 물론, 존스씨가 ‘스탈린주의’만이 아니라 레닌주의와 쏘비에트 체제가 비난받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반대되는 교훈을 끌어내야만 하고 스탈린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난은 직접적으로 레닌주의와 쏘비에트 체제에 대한 비난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레닌주의를 사회주의 건설에서 쏘련의 조건들에 적용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뜨로츠끼주의자들, 수정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스탈린을 비난할 때 그들은 사실상 레닌주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인데, 반대로 이들 신사분들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어떤 주관적 소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심지어 10월 혁명 전에, 개인으로서 레닌이 아니라 볼세비키 당이, 볼세비키 당이 권력을 잡는 경우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는 것을 덧붙일 수 있다. 1917년 8월의 볼세비키 당의 6차 대회에서, 러시아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 선진적 나라들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동맹하여, 그것을(프롤레타리아트―역자) 평화와 사회의 사회주의적 재건을 향해 인도해야만 한다”는 동의가 이루어졌다.





그 대회에서 당시 숨어있어야만 했던 레닌을 대신하여, 스탈린은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수정안을 반대하여 말했다:





“나는 이러한 수정에 반대한다. 러시아가 사회주의로의 길을 놓게 될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어떤 나라도 전쟁의 시기에 러시아처럼 이러한 자유를 아직까지 향유하지 못했고 생산에 대한 노동자통제를 도입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우리 나라에서 노동자들은 농민층 중 더 가난한 층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최후로, 독일에서는 국가 기구가 우리의 부르주아지의 불완전한 기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효율적이다. ... 우리는 유럽만이 우리에게 길를 보여줄 수 있다는 낡아빠진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수정안은 기각되었다.





이리하여 10월 혁명 전에조차 볼세비키당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오직 교정할 수 없는 기회주의자들만이 노동자들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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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 <기획번역>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7) 하르팔 브라르 2010-03-26 2584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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