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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11)
글쓴이 사사키 타츠오 E-mail send mail 번호 161
날짜 2010-03-26 조회수 2335 추천수 110
파일  1269602691_아프간.hwp

  

























페레스트로이카의 변질










페레스트로이카의 진전 중에 고르바초프지도부는 경제의 생산성과 서비스의 정체의 문제들을 포함해 복잡하고 곤란한 과제에 봉착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후에 언급할 쏘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의 하나의 예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적어도 쏘련 일국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그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결국 이는 명목이 아니라 실질적인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총단결을 세워야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일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1987년 11월 2일 고르바초프는 각국의 당대표와 내빈이 참석하는 중에 ‘10월 사회주의혁명 70주년기념식전’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이른바 ‘신사고’라든지 ‘전인류적 가치는 계급적 이익보다 우선한다’ 같은 것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이 연설 직후 인도공산당 맑스주의(CPIM)의 대표단은 쏘련당 정치국에 연설의 콘텐츠(취지)에 관해 회합을 열고 싶다고 신청했다. 정치국은 그러한 스케줄은 예정되어있지 않다고 거부했으나 CPIM의 거듭된 신청에 결국 양당대표에 의한 협의가 행해졌다. 당시 다른 당이 CPIM과 마찬가지로 쏘련당과 의견교환을 하도록 제안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불명확하다. 아마 그것은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양당협의의 기사를 CPIM의 기관지『피플즈 데모크라시』에서 읽고 아프게 마음이 움직였다. 즉 나는 CPIM의 신청이 페레스트로이카와 그것이 가져온 문제를 국제주의적으로 해결하려 시험해 본 하나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CPIM은 그 문제를 당내토의로 두고 후에 ‘중앙위원회결의, 동지 고르바초프의 10월 혁명 제70차기념집회에서 보고에 관한 이데올로기문제에 대해’라는 30페이지의 장문을 발표했다.(『자 마르키시즘』인도공산당 맑스주의 계간이론지, 1988년 제2호). 이어서 말하면 CPIM의 ‘결의’의 내용은 4대모순(사회주의체제와 자본주의체제, 자본주의국에 있어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제국주의와 억압받는 제반 국가, 및 제국주의 국가 간과 독점자본 간의 모순)의 존재를 시인하면서 고르바초프연설에 엄격한 비판을 행했다. 마지막 부분을 인용해보다.





“게다가 그 보고는 세계인식에 대해 우리들의 이해로는 익숙해지지 않는, 사실상 오늘날의 시대의 모순을 경시하고, 세계혁명을 약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당은 그 분석, 그 주장, 그 결론을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은 당연히 예상된 반론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그 연설 속에서는 물론 ‘국제공산주의운동’이 가지는 의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고르바초프지도부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회의를 여는 일이 성과가 적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것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쉽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쏘련일국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전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일을 오늘날이 되어 되돌아보면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국제주의에 입각해 공산주의운동의 쇄신을 실현하고 제국주의와의 싸움에 승리하려는 생각이 고르바초프지도부에도 그 비판파에도 적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혹은 그 부족함이 쏘련당 이외의 세계의 제반 당에도 적지 않게 공통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오늘날 그 쇄신으로의 참가의 기회를 공유하지 못했던 회개의 마음이 그들 당원의 머릿속에 넓게 남아있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쏘련군 철수의 과정이 던지는 질문










1985년 고르바초프가 쏘련공산당서기장에 취임했다. 곧 그는 아프가니스탄정부수뇌에 쏘련군철수를 통고했다. 왜냐하면 당시 아프간으로의 군 출동에 의한 비용이 쏘련에 있어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말하면 1979년부터 1988년까지의 10년간 아프가니스탄으로 출동한 쏘련군의 규모는 약 11만6000명으로 전사자는 약 1만4000명이라고 한다. 1985년 당시라도 꽤 희생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약 180만 명이 사상을 입고 약 26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고 챠르마즈 존슨은 그의 저서 『제국미국과 일본무력의존의 구조』(앞의 책) 속에서 쓰고 있다. 1989년 11월 28일자 『프라우다』지는 나지블라 대통령으로의 인터뷰기사를 게제했다. 그 기사는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었던 수개월 후의 일로, 내용은 칼마루를 대표로하는 아프가니스탄방문단이 쏘련수뇌와의 사이에서 일어났던 회합모습의 일부였다. 나지불라는 그 회합의 상황을 이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쏘련군의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의 귀환에 대해 공동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 그 때 아프간 지도부 대다수는 그에 부정적이었다. 칼마루는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언젠가 다시 100만 명의 병사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나지블라)는 그때 녹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대답하려고도 견해를 말하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후 사론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동료에게 향해 “칼마루는 옳지 않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정부 지도부 전체의 일을 고려해 발언하지 않고 있다"라고 했다.(『카불 타임즈』지, 1998년 12월 18일 게제)










최후의 나지불라의 말은 그 자신이 쏘련군철수에 찬성했던 것을 넌지시 비추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나지블라의 회고기사에는 분명이 『프라우다』지의 정책을 읽을 수 있다. 즉 위의 사정은 1985년의 일이었는데, 그 때에 발표하지 않고 1989년 말이 되어서 발표했다는 것이다. 또한 위의 기사의 게제 의도는 칼마루는 냉전시대의 인물이었고 고르바초프와 나지블라는 체제 간 대립을 넘어서려는 인물로서 그려내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와 칼마루의 의견의 차이를 조정하는 데에는 일정의 시간이 필요했던 1985년(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었던 해) 가을이 되자 나지블라가 PDPA정치국장이 되었고, 게다가 다음해 가을 칼마루가 서기장을 사임해, 나지블라가 그 후임이 되었다. 이렇게 아프간지도부전체가 철수론으로 정리되어 철수의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당시의 쏘련의 상황을 이른바 『모스크바 뉴스』지 등으로 보면, 쏘련인민의 측에서는 아프간 출병의 피해의 측면 만이 일방적으로 다루어졌고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의 의무 같은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쏘련의 병사가 대의 없이 전사한다는 식으로 다루어졌다. 제네바협정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쏘련군의 철수만이 존중되어 파키스탄을 비롯한 제반 국가들의 병사, 지원병, 용병의 철수 혹은 공격정지는 지켜지지 않았다.





『프라우다』지가 위의 인터뷰기사를 게재했을 때(1989년 11월)의 쏘련은 이미 아프가니스탄혁명의 명중한 이해자이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어 그 12월 9일자 『모스크바 뉴스』지의 티물 가이드 기자의 기사가 그렇다. 가이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큰 손해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면 PDPA에 의한 권력 장악과 이질적인 사회제도(혁명을 말함―인용자주)를 가져왔던 것이다"라고. "한편 미국은 파키스탄에서 반쏘 전투체제를 원조하고, 그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아프간이슬람주의동맹(무쟈헤딘의 일)의 회복에 힘을 들이고 있다"





즉 가이다는 아프가니스탄혁명의 의의를 부정하면서도 미국의 이슬람주의에 대한 지나친 원조를 비판하는 양비론을 펼치고 있다. 이런 논조도 철수론 논거의 하나였다. 고르바초프류의, 쏘련의 노동자, 인민에게 일견 의거한 듯 하지만 사실은 그에 기반을 두지 않는, 사회주의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철수론은 아프가니스탄정부와 인민에 전면적으로 부담과 책임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칼마루의 분연한 항의는 틀림없이 당연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의 제안의 방법은 단순히 아프간문제만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사회주의공동체의 운명을 제국주의 총체 앞에 통째로 내던지는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정권은 쏘련군 철수 후 아프간으로부터 전혀 손을 놓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파벨 파라시쵼코는『쏘련의 붕괴』(앞의 책)에서 제네바협정의 합의 성립(88년4월)이후 쇼와루나제가 미국의 국무장관 슈루츠에게 “아프가니스탄으로의 무기수입을 계속할 것을 허락한 채로 협정의 준수를 보증할 수 있다”는 방책을 제안한 것을 기록했다. 슈루츠는 그에 대체로 긍정적이었으나 국무성외의 스태프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다.(『쏘련의 붕괴』p93)





고르바초프의 좋은 적수라고 말할 수 있는 미국 국무장관 제임즈 베카(※)―슈르츠의 후임―는 그 재임 중, 고르바초프와 쉐와루나제와 빈번하게 만났었다. 그중에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안정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베카는 고르바초프가 계속해서 가져오는 문제들과 쏘련연방붕괴의 조짐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실무가'인 베카는 때로는 자신을 숨겨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게 해도 베카는 대쏘교섭 중에서 많은 이득을 얻어왔다. 이른바 니카라과혁명의 해결(?)에 대해서도 베카는 어느 때 쉐와르나제에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シャトル外交 激動の四年』ジェームズ・A・ベーカー新潮文庫 1996年 p131) 즉 쏘련도 미국도 서로에게 니카라과로의 무기원조를 정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무기원조가 없어진 단계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쉐와루나제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국 니카라과에서는 '자유'로운 대통령선거가 시행되고 챠모로가 당선되어 샨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1978년 결성)의장 오루테가 후보가 패배했다. 그 이후 니카라과 혁명은 좌절되었다. 챠모로 당선은 CIA가 코디네이트했던 훌륭한 일이었다. 쏘련은 78년 이래 니카라과로의 군사원조를 정부 외각에서 행해왔고 그 중지도 또한 정부 외각에서 정했던 것이다. 엘살바도르의 문제해결도 이에 준했다.(「エルサルバドルにおける交渉 ファラブンド・マルチ民族解放戦線」ラウル・ラルール『社会評論』92호 1993년10월) 이것은 당시 분쟁에 대한 미쏘에 의한 '해결'의 한 예시였다.





베카와 쉐와라나제의 협의의 결과, 쏘련 측 외무차관을 페샤와르에 파견해 아프간반대파대표와 회합이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 회합에서는 의미있는 이야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제임즈 베카: 레이건정권의 제1기 대통령수석보좌관, 제2기 재무장관, 이어 부시정권에서는 국무장관을 4년 지내고, 당시 미국정부의 고르바초프 등의 페레스트로이카 외교에 집중했다. 그의 저서 『쏘련방의 붕괴』(앞의 책)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자료이다. 양측의 페이지를 대조해보면 당시의 미쏘 간의 외교전개가 뚜렷하게 보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문제는 여타 많은 외교 안건― 이것의 대부분은 페레스트로이카, 사회주의의 해체에 연결되는 것- 중에 떠다니다가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도 알 수 있다. 즉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와 아프가니스탄혁명의 패배를 관통하는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쏘련 측에 강해졌던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사상조류와 함께, 고르바초프의 제안은 여러 가지로 곡절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프가니스탄혁명을 패배로 이끈 큰 요인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에 출동했던 쏘련병사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철폐하려는 사회를 위해 몸을 던진 적군(赤軍)병사의 의지와 전통을 계승했다는 점을, 나는 잠시 동안도 의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989년 2월 14일 쏘련국방 군사작전 그룹의 지도자, 지상군사령관 바렌코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이상의 성명을 읽고 있다. 다소 길어지지만 인용해 보도록 하자.










"현재(2월 14일), 쏘련군은 국제주의적인 의무를 완수하고 조국으로 향하고 있다....우리는 조국에 되돌아가지만 아프가니스탄인민에 대한 우리의 우정은 남아있다. 우리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그 외의 분야에서 원조공여는 계속할 것이다...우리들에게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독립한 중립적 주권국가로서 좋은 이웃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일부의 사람들은 쏘련군의 아프가니스탄주둔을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입장과 비교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대비는 정확히 볼 때 타당하지 않다. 베트남에는 어떠한 미국인도 초대된 적이 없었지만 쏘련군은 아프가니스탄정부의 거듭되는 합법적 요청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되었다....베트남에서 미국인들이 취한 행위는 결국 점령과 파괴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와서는 점령 파괴를 위해서도 아니었고 타인의 영토를 손에 넣으려는 목적도 가지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의 주권수호와 영토적 보존을 위해 국제주의적 원조를 제공하기 위해 우리는 온 것이었다.





쏘련군의 철수는 미국인들이 베트남에서 경험한 패배와 도망감이 아니다. 이는 제네바합의를 준수하는 것으로, 국제사회의 지지아래 아프가니스탄ㆍ쏘련 양 국민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 실현된 것이다...앞으로도 우리들은 정치적 해결을 위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인민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생각이다..." (앞의 책,.『쏘련의 아프간 전쟁―출병의 정책결정과정』p302~303)










여기에서 분명히 적군병사의 사상, 국제주의적 헌신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병사들의 사회주의ㆍ국제주의에 대한 충성이 쏘련 및 그 외의 사회주의제국의 노동자 인민의 뇌리에 각인되었는가가 희박해진다는 데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한편에서는 싸움이 계속되는 데 아프가니스탄인민을 분하게 죽게 만들며 천상의 사회주의라는 체제의 우위성만을 강조해, 그에 안주하며 인민의 적극적 내발적 참가를 내딛지 못하게 한 쏘련지도부의 책임은 1차적으로 무겁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쏘련과 아프가니스탄의 접점의 문제는 다시 이후의 PDPA를 총괄하면서 언급할 것이다.





이미 정보전쟁 중에 있었으나 통신ㆍ정보수단의 폭발적 발전과 제국주의 측의 미디어에 의한 홍수 같은 정부발신과 혁명적 투쟁은 꽤 빠르게 승패를 가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의 양의 적고 많음이 아니라 전자전파 통신기술 등의 비약적 발전이 가져온, 아직 있어 본 적이 없는 ‘통신정보사회’의 도래이자 그에 얼마나 대응해 갈 것인지의 문제였다. 그러한 분야에서 볼 때는 사회주의 제국, 비동맹제국 및 민족해방운동의 측은 분명히 제국주의, 신식민지주의에 대해 늦어지고 있으며 두드러지는 대항책을 가지지 못했던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통신정보사회’의 도래를 인지하면서 그 폐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완전히 없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1970년대 후반에 카리브해와 인도아대륙에서는 통신정보자본의 제약을 받지 않는 지역연합통신사의 설립이 제안되었던 적이 있다. 사실 몇 개의 통신사가 발족했다. 만약 쏘련 등이 유연ㆍ기민하게 그 아래에서 과학기술의 힘을 가지고 연합통신구조 등에 협력ㆍ대응했다면, 정보전에서 이렇게까지 무참하게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인민주당의 싸움―그 약점










혁명의 패배를 총괄할 경우, 국내분야만으로 한정해도 몇 가지 요인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종교(이슬람교)를 다룬 방식도 그 하나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복잡한 요인 중에도 가장 핵심이 되는 실마리는 하부구조로서의 농업ㆍ토지문제의 해결 실패에 있다. 그것은 PDPA지도부가 기본적으로 자국의 농업―봉건적ㆍ반봉건적 농업―의 특질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거나 혹은 경시했던 것에 원인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 국민총생산(GNP)





(물질적 생산분야에 있어 산출)

















































































































































































































































연도





1975/76 년도





 1976/77년도





1977/78 년도





 1978/79 년도





연평균 



성장률(%)





과목





금액





  %





금액





%





금액





%





금액





%





총계





135.42





100.0





142.51





 100.0





135.46





 100.0





142.51





 100.0





  3.3





공업





 30.54





 22.6





31.02





  21.8





 32.11





  23.7





 33.24





  23.3





  5.4





제조업





 15.88





 11.8





15.91





  11.2





 16.67





  12.3





 17.48





 12.3





  9.0





수공업





 14.66





 10.8





15.11





  10.6





 15.44





  11.4





 15.76





 10.0





  2.1





농업





 83.02





 61.3





86.63





  60.8





 77.33





  57.1





 82.72





 58.0





  1.3





건설





  3.77





  2.8





5.67





   4.0





  6.92





  5.1





  6.87





 4.8





 21.0





운송ㆍ통신





  4.79





  3.5





5.32





   3.7





  6.01





  4.4





  6.06





 4.3





 13.1





기타





 13.30





  9.8





13.87





   9.7





 13.09





  9.7





 13.62





 9.6





  2.8







출전 :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계획성 제공의 자료에의 한다.





금액의 단위는 10억아프가니 (1아프가니 = 약 5엔)










본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아프가니스탄인민의 일반적 상황을 짚어보고자 한다. 1977년





GDP는 일인당 162달러였다. 이는 129개의 발전도상국 중에 108위이다. 총 인구 1555만 명 중에 80%가 촌락에 살았고, 같은 인구 중 71.8%가 농업에 종사했다. 농업종사자 1/3이 토지가 없었다. 게다가 유목민 혹은 반유목민(유목을 하면서 이동 도중에 농작업에 고용되는)이 약 250만 명이었다. 또한 전인구의 88%가 문맹이었다.





 국민소득의 2/3은 농업에 의한 것이었고 수출의 약 1/2이 농업생산물이었다. 국민총생산의 통계(별도표시참조)를 보면 농업과 수공업(주로 소녀노동에 의한 융탄직물 등)의 비율이 70%전후의 추이었다. 이것이 이 나라의 경제ㆍ산업의 특징이었고 사회를 규정하고 있었다. 근대적부문의 GNP는 전체의 3.3%였고 프롤레타리아(노동자)는 약 5만이었고 주로 정부계기업의 종업원이었다.(『社会科学』1982年 No4「アフガニスタン民主共和国─四月革命の新段階」G・ムラドフ 塚本健訳)















농지・수리개혁에 관하여










아프가니스탄혁명 중에 원래 중요했고 가장 곤란한 과제의 하나가 농지ㆍ수리개혁이었다. 이것이 크게 해결된다면 혁명의 대업은 반은 해결된 것과 같다. 그러나 실상은 이것의 달성은커녕 당초부터 실패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황당무계한 개혁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개혁이 참혹한 결과가 된 것이야말로 혁명을 패배에 이르게 한 주요인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은 3기에 걸쳐 실시되었다.





1 타라키정권 하의 초기개혁





2 칼마루정권의 추가 보강개혁





3 나지불라정권의 농경정책





초기개혁은 1978년 11월의 ‘농지개혁에 관한 포고’에 근거해, 약 1979년 1월부터 착수되었다. 이 때 우선 농지를 7개의 등급으로 분류했다. 분류의 기준은 물의 유무, 그 정도를 기반으로 한 비옥도, 위치, 형상, 토질 및 일조량 등이었다. 아래의 ‘토지분류표’를 참고해볼 수 있다.










농지개혁을 위한 농지분류표



























































































































관개의 유무





경작상황





 계수





 제1군





제1급





 관개지





 과수원ㆍ포도밭





  1.0





제2급





 관개지





 이모작





  0.85





 제2군





제3급





 관개지





이모작 50%농작





  0.67





제4급





 관개 되지 않음





이모작50%이하농작





  0.40





 제3군





제5급





 관개지





1년마다 경작





  0.20





제6급





 관개지





1년마다 경작





  0.15





제7급





 최악건조지





1년 이상 있어 경작





  0.10












제1급지에서 지주의 소유면적의 상한을 6헥타르(30제리브)로 해 그 이상을 소유한 부분을 정부는 무상몰수 했다. 정부는 몰수한 농지를 토지 없는 농민 혹은 소토지소유자에게, 한가구당 1헥타르를 무상으로 분배한다. 분배의 우선순위는 빈곤도와 일찍부터 경작을 해왔는지 등을 보고 결정된다. 초기개혁 전체의 성과는 다음과 같다.





제1급지를 환산하면 약 33만 헥타르(절대가격으로 약 84만 헥타르)의 농지가 지주로부터 몰수 되었다. 그 숫자는 몰수되어야 하는 지주 농지의 65~76%에 해당한다. (제1급환산치와 절대치가 있기 때문에 퍼센트의 오차가 생긴다) 약 33만헥타르 중에 약 28만7000헥타르(절대치에서 약 26만 5000헥타르)가 229만 6000호로 배분되었다. 이는 토지를 가지지 않은 농민의 50~70%에 해당한다. 남은 약 43000헥타르는 국영농장과 그 외의 사회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분류되었다.





이 개혁 작업은 1979년 1월에 제 1차, 3월에 제2차, 그리고 4월에 마지막으로 실시되었다. 세 번에 걸친 실시를 아프가니스탄 행정지도에서 확인하면, 분명히 하나의 경향을 볼 수 있다. 즉 제1차 실시는 국가의 남쪽 및 남서부, 제2차는 북쪽 및 북서부, 그리고 마지막은 남은 중앙부=산악부에서 동부지대에서 이루어졌다. 개혁의 내실은 차치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전국에 실시된 것은 이 혁명정권이 전국에 그 통치능력을 넓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아프간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이었다. 매스미디어가 말하듯이 “카불정권의 영향력은 극히 좁았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78년 당시, 아시아에서 반봉건적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던 곳은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베트남 및 몽골 등 뿐이었고 그 이외에는 최근에 이르러서도 시작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아프가니스탄이 개혁에 착수한 것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이상과 같이 한두 개의 주를 제외하고 지역단위로 분류해 실시된 순서였다. 그러나 3차에 걸친 개혁은 제각기 지방의 농민운동과 지역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농민운동은 혹은 다른 노동쟁의라해도 그것은 전국 구석구석까지 일제히 균등하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시발점인 곳이든지 선진적인 거점지구에서 투쟁이 일어나기 시작해, 그 경험을 검증하면서, 전국으로 그 운동이 확대ㆍ보급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그러한 농민운동에 의거한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즉 지역분할을 하고나서 단순히 행정수단에 의해 (개혁이) 이루어진 것 뿐이었다. 1979년 3월에 수상이 된 아민은 농업 그 자체와 지방의 사정에 어두운 카불의 학생과 노동자를, 게다가 에스닉(민족)과 언어가 다른 지역에 파견해, 농민과 지주에게 농지분배에 대한 설명과 설득을 하게 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 이른바 ‘노동제휴’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으로 과연 지주들이 자신의 소유지를 쉽게 무상으로 남의 손에 넘겨줄 것인가.





이러한 경우의 ‘개혁’에는 일종의 강제가 동반되어 위협과 일방적 설득과 분쟁을 불러일으킨다. 지주들은 내심 남의 손에 넘겨주는 것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사과연>










번역 : 정혜윤(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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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 <기획번역>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11) 사사키 타츠오 2010-03-26 2335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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