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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10)
글쓴이 사사키 타츠오 E-mail send mail 번호 156
날짜 2010-02-21 조회수 2487 추천수 129
파일  1266682417_아프가니스탄 4월혁명.hwp

  













사사키 타츠오











일본의 파키스탄 원조와 아프가니스탄 비원조










일본정부는 아프가니스탄민주공화국, 즉 혁명 아프간을 1978년에 승인했다. 그러나 카터가 반쏘ㆍ반아프간혁명 노선을 선명히 하자 일본정부는 이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한 노골적인 행태는 주요하게는 일본 독점자본의 총의를 받드는 경제적 손익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때 정부수뇌는 아시아 제반 국가를 방문할 때에는 반드시 ‘수제 토산품’을 지참했다. 나카소네수상도 1984년 4월말 파키스탄을 방문해 원조를 약속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정부는 ‘분쟁주변국’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원조를 명목으로 서둘러 이를 증액했다. 1979년 파키스탄에 대한 엔차관은 146억엔이었지만, 1980년에는 250억엔으로 한번에 2.4배가 늘어났다. 이어 1982년 280억엔, 1983년 300억2600만엔, 게다가 무상원조 90억엔을 더해주었다. 1982년에는 ODA(정부개발원조―편집자) 95억3000만 달러를 지출했다. 이는 미국에 이어 제2위에 달하는 액수로 파키스탄이 받은 ODA 전체 액수의 1/4에 달한다. 또한 파키스탄에 대한 ‘아시아 난민원조’는 1980년에 10억엔, 1981, 1982년에 각 20억엔, 1983년 33억엔, 1984년 42억엔으로 해가 갈수록 증가했다. 이러한 원조는 전혀 ‘수제 토산품’의 차원이 아니었다.





 난민원조는 중요하다. 그러나 원조할 경우 어떠한 숫자적 근거에 기반해 실시하게 될까. 이른바 UN과 그 외의 자료에 기초한다고 해도 난민인구가 아직까지 한 번도 사실에 기초한 숫자였던 적은 없다. 아프가니스탄 전란을 취재한 기자 와나타베코우이치(渡辺光一)는 공표된 난민수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アフガニスタン』, 渡辺光一、岩波書店 2003年. p. 16.)





그 숫자는 정략적으로 날조된 것이었다. 반혁명 그룹과 파키스탄ISI는 병기와 자금을 비롯해 모든 물자와 서비스의 국제적 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숫자를 부풀려 보고했다. 게다가 대(對)쏘련 캠페인에는 숫자가 큰 쪽이 효과적이다. 유엔과 NGO직원 등은 난민 캠프의 입구까지 온다고 해도 개별적으로 조사할 리는 없다. 각각의 무장그룹에 의해 모아진 요원모집이 희생양이 되었다. 여기에도 ‘아프간분쟁’이라고 불리는 것이 가진 독특하고 더러운 구조를 읽을 수 있다.





한편 일본정부의 아프간원조는 1980년 3월 4일 각의에서 오오키타(大来)외상에 의해 지시되었다. 즉 1979년도 분 4억엔 무상원조중지, 1980년도 분 13억엔 무상원조동결, 그 외의 8억엔과 4억엔의 안건이 교환공문도 모두 동결, 이후 일본에서의 원조는 일절 중지되었다.





일본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두드러지게 대조적인 입장은 반혁명파의 승리에 현저히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패권주의의 반혁명적 역할










1960년대 후반부터 카불대학의 학생들 사이에서 정치, 경제 및 이데올로기 분야에서 논쟁과 자치회 집행부장악을 둘러싼 분쟁이 시작되었다. 한편에서는 모택동주의를 내건 ‘영원한 불꽃’파가 차지했다.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의 해외판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PDPA와 이슬람 청년운동과 노동운동과 메이데이 행사를 둘러싸고 공동투쟁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초반에는 ‘불꽃파’는 그 땅에서 실체를 잃었지만 중국본토의 운동단체와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쏘련에 반대한 후에는 반아프간 캠페인을 시작했다. 중국정부는 애초부터 이를 독려해왔다.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1990년대 후반 탈레반의 출현, 알카에다의 횡행, 9.11테러 사건에 의해 계기가 마련된 미국의 대 아프간 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정부는 위구르인의 이슬람 독립운동 및 동 투르키스탄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측으로 돌아섰다.)





1972년, 중미 교섭이 진척됨에 따라 중미관계는 점점 친밀해지게 되었다. 쏘련이 아프가니스탄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반년전인 1979년 여름, 중국제의 무기류가 파키스탄 배로 칼챠항에 짐을 풀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쏘련은 왜 아프가니스탄에 군사지원을 했는가―그 전제」) 화궈펑정권은 이미 78년 8월에 아프가니스탄을 국가로서 승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 5월, 그 정권아래에서 첩보부문의 최고책임자의 대리였던 차오스(喬石)가 카터정권의 종용으로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차오tm는 일부러 페르샤르 근교에 있는 반혁명 진영의 훈련기지까지 갔다왔다.





 존클린은 지미 카타정권의 국방장관 해럴드 브라운이 1980년 1월 4일부터 13일까지 북경을 방문하는 것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또한 그는 반쏘ㆍ반아프간의 ‘대연합에 중국을 동참시킨’ 브라운의 업적을 꽤 높게 평가했다.





중국의 상황에 밝은 브라운은 우선 화궈펑수상, 등소평 부수상 및 황화(黄華)외상과 차례차례 회담하고 미중의 ‘전략적 협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후 브라운은 장문호(章文普)외무차관과 3일간에 걸쳐 이하의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1) 중국제 중기관총, 박격포, 무반동포, 107밀리 및 122밀리 경합금 631형 1.2 연제 로켓 발사장치, 동일 단장 경량 로켓트 발사장치 등을 파키스탄정보부에 제공한다. (1985년 단장 로켓트 500기, 1989년 1000기가 운송되었다.)





2) 중국해방군 제2국(정보부에 해당)의 고문 교관 300인을 파키스탄의 4개소의 훈련기지에 파견한다. 무자헤딘에 대해서도 상기의 중국제무기의 조작방법 및 군사훈련을 수행한다( 후에 중국은 1985년 독자로 위그르 자치구의 카슈갈 호탄 근교에 기지를 만들어, 중국인과 파키스탄인 등의 무자헤딘의 훈련을 수행했다.)





3) 미국은 중국에게 쏘련의 미사일실험과 위성전파를 수신하기 위한 지상역 시설을 매각한다. 이는 이란혁명과 쿠르드인민의 반란으로 미국이 이러한 지상시설을 이란과 투르크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브라운이 귀국 후 1월 12일, 카터는 대쏘ㆍ대아프간 카터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당시 서방 측이 사회주의중국에 적용해온 코콤(COCOM, 대공산권 군사관계 무역금지조치)의 부분적 해소조치이기도 했다.





 카터정권은 어째서 중국에 이렇게 접근한 것일까. 그 이유의 하나는 중쏘대립을 한번에 격화시켜 양국을 이간시키려는 것이었다. 또한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는 1979년 2월의 미국의 앞잡이였던 이란의 팔레비정권이 붕괴하고 1979년 11월 호메이니파 학생에 의한 테헤란의 미국대사관 직원에 대한 인질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카터정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아프간의 덫’에 쏘련군이 출현하는 등의 이유로, 카터는 위기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곧 시작되는 차기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레이건이 입후보하면서 이를 만회할 기회를 잃었다. 카터는 이른바 기사회생책의 한 방편으로서 브라운의 중국 방문과, 독트린의 발표와 대규모의 쏘련위협론이라는 정보조작을 히트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때 중국의 당ㆍ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응하면서 무역금지조치의 해소를 얻어내기 위한 교섭에서 성공했다. 이것이 ‘미중협조행동’의 결과이다. 나지블라는 후에 “중국은 전쟁에서 좀 더 중요한 역할의 하나를 짊어졌다”, 또한 “반혁명파에 대한 중국으로부터의 군사원조는 4억달러”였다라고 말하고 있다.(ジョン・k・ク─リ─『非聖戦』第四章 鄧小平, p. 90~104) 그 이후 중국은 ‘메이드 인 차이나’를 새긴 무기와 탄약을 캠프에 계속 보내왔다. 1983년, 아프가니스탄 우호방문단원으로서 현지를 방문한 이들은 카불 병기박물관에 중국을 비롯한 제반 외국제 무기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베트남전쟁에 있어 미국의 패배이유를 생각할 때 베트남민의 민족적 주체적인 대미저항의 힘 이외의 이유를 찾는다면 그는 중국과 쏘련의 베트남 지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반대로 미국은 베트남에서 광대한 2개의 사회주의국가와 충돌하고 있는 것을 지정학적 견지에서도 중요한 요소로서 판단했다. 즉 미국 군사 전략가들은 (사회주의국가와) 충돌이 확대되는 것을 억눌러왔다. 이른바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날메르숀은 그의 회고록에서 중국과 쏘련을 전쟁에 휘말리게 하면 인명의 손해는 피할 수 없다고 강경파에게 경고를 발했다. 어쨌든 미국은 베트남에서 고통스러운 패배를 경험하면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승자에 가까워졌다. 그 승패의 명암을 나누는 요인 중 하나가 중국의 구축적 역할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만약 중국이 명실상부하게 아프가니스탄 혁명을 지원하고 중쏘가 동맹관계였다면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1975년, 중국은 베트남 전쟁 후,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는 앙골라해방인민운동(MPLA)의 도스 산토스정권에 적대하는 세력(UNITA=앙골라 전면독립동맹)을 미국, 남아메리카와 함께 원조했다.





중국의 UNITA에 대한 원조는 큰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시기 중국의 원조는 아프리카 민족해방운동에 마이너스의 영향을 주었다. 이어 중국정부는 1976년 7월 캄보디아의 폴포트정권의 수립을 지원했다. 또한 1979년 2월 베트남령을 공격해 침입했다. 이러한 일련의 중국의 국제적 활동은 미제국주의를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중국의 당ㆍ정부의 대외활동을 규정하는 기본방침은 이미 말했듯이 모택동ㆍ등소평의 3개의 세계론이다. 이러한 패권주의가 낳은 무원칙적이고 실용적인 힘의 행사는 세계사회주의 역사에 있어 수치스러운 오점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간혁명에 대한 쏘련원조에 대해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잘못된 노선과 정책은 스스로를 포함한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에 대해 큰 책임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책임은 대단히 무겁다.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모순과 혼란이 화궈펑(華國鋒), 자오쯔양(趙紫陽), 후야오방(胡耀邦) 및 등소평 등의 정권을 거쳐 충분하지는 않지만 회복, 조정, 정리되었다. 이른바 전술했던 역사적 결의의 채택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정권도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쏘련의 아프가니스탄원조의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가










우선 1979년 12월 쏘련이 군사지원에 나섰던 경험을 되짚어보자.





아프가니스탄정부는 1979년 3월부터 12월까지 종종 쏘련정부에 군대파견을 요청했다. (13번 요청했었다는 기록도 있다) 정부의 공식요청은 제국주의의 원조를 받은 반혁명파가 점점 혁명을 방해하고 혁명의 성과를 파괴하고 있다는 취지였다. 이는 말 그대로 이었지만 조금 더 덧붙인다면 그것은 PDPA 존속에 걸린 위기의식의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루크파 간부였던 모하메드 파류야티가 1981년, 필립 보노스키에 답변한 것에 따르면 만약 쏘련군의 원조가 없었다면 아프가니스탄은 제2의 인도네시아와 제2의 칠레(※)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앞의 책, “Afghanistan-Washington's Secret War", '128) 당시 PDPA는 하루크파가 팔챠무파 간부를 추방처분하고 하루크파 만으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반혁명파가 농지개혁에 대한 반격을 조직하고 수상인 아민은 고립감과 초조함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다.










※ 1973년, 살바도르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한 인민연합정권이 CIA의 후원을 받은 피노체트 쿠데타에 의해 타파되었다.















국가정책으로서 쏘련의 대외원조의 한계










쏘련공산당중앙위원회는 브레즈네프가 고령이기 때문에 이미 말했듯이 정치국에서 폴란드, 중국, 쿠바 및 아프가니스탄 등의 20개정도의 비공식 소위원회를 설립했다. 아프가니스탄 소위원회는(이하 소위원회라고 생략한다)는 안드로포프, 우스치노프, 포노마리쇼프, 그로미코라로 구성이 되어 ‘4인위원회’라고 불렸다. 공개된 기록에 따르면 소위원회는 1979년 3월부터 12월까지 열렸고 출석자는 매번 다소 달랐다.





소위원회에 대해서는 李雄賢저 ��쏘련의 아프간전쟁출병의 정책결정과정��(앞의 책)이 가장 자세하다. 그러나 저자는 쏘련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지원을 미국이 베트남전쟁으로 수렁에 빠진 것과 유사하게 보고, 쏘련은 이러한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같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통속설에 내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다만 우편향적인 서술은 제쳐두고 소위원회에 대해 개략적으로 보고자 한다.





소위원회는 아프가니스탄정부의 군사지원요청에 대처하는 창구로서의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1979년 3월 아프가니스탄정부는 (아민수상)의 원조요청 때부터 위원회의 협의가 시작되어 같은 해 12월의 지원결정 이후 위원회는 열리지 않았다. 앞의 4인방이 위원회 위원이 된 것은 각각 담당부서가 외교, KGB(국가보안위원회), 군 및 당의 국제부를 총괄하는 이들로서 다들 군사원조에 관련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4인위원회는 제각기 총괄하고 있는 직원들이 아프가니스탄현지에서 가져오는 정보에 기반해 토의를 했다. 소위원회는 군대의 파견에 대해서는 극히 신중했다. 그로미코 외무상은 대외관계, 특히 미국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제반 관계를 보고 신중할 것을 요구했다. 안드로포프는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적ㆍ정치적ㆍ사회적(종교)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부ㆍ당 자신이 우선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당을 대표했던 우스치노프는 정부의 파병명령이 발령된다면 따르는 한편 파병요청의 목적을 명확히 하도록 아프가니스탄정부에게 요청했다. 결국 12월까지는 군사고문과 소부대의 파견에만 머물렀다. 그런데  4월 쟈라라밧드, 8월 카불의 바라 힛살 등 주요 기지에서 반란발생(즉각 진압되었지만), 아민이 부수상에서 수상으로 승격하고 내각을 개조(3월), 타라키대통령 살해(9월)에 보인 쿠데타적 폭거, 하루크파 내의 온건현실파의 추방 등등,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각 현지파견 직원들이 쏘련으로 가져오는 정보가 워낙 다양한 부분에 걸쳐 있었기에 소위원회에서도 의견집약에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른바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관저부의 쏘련특수부대 등은 출병요청이 필요시 되었다. 결국 안드로포프를 대표로 한 의견, 즉 아프가니스탄에 있어 정부 PDPA체제의 건전 강화책(카루마루와 하르루쿠파 내의 현실파와의 연합정권)과 함께 군사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12월 12일의 결정이었고 27일 파병이 이루어졌다.





소위원회의 토론에서는 아민의 행동, 즉 아민이 CIA와 반정부세력과 접촉한 것이 아닌가하는 데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좀 더 정보를 모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물론 당시 미국의 대쏘 군사포위망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공통인식이 있었기에 1979년 2월 이란 호메이니 혁명의 행방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하쟈라 지구에 있어 시아파 반정부파활동의 영향, 또한 쏘련령 중앙아시아의 정치적 군사적 안전도 우려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79년 후반에 들어서며 아프간 국내에서는 농지개혁으로 농지를 몰수당한 지주와 농민들이 반정부파 지배층에 의해 매수되어 반란군 측에 서고 동네를 버리고 도망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쏘련은 이러한 상황을 모두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무이코 유서』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소위원회에서는 “몇 명이 밀실에서 협의했고” “보다 다수가 참석하는 인민대표회의에서 (그 문제가) 제출되지 않았다”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쏘련의 군사지원의 문제는 세계사회주의전체의 형태와 관련되어 검토될 필요가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우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나는 1986년에 쏘련을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라디오방송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원고 집필의 의뢰를 받았던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왜 나에 원고를 의뢰했는지 그 진의를 주의 깊게 들었다.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의 간부였던 그는 결코 당과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자주 언급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쏘련의 인민이 그다지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다. 그때 나는 왜 관심이 희박한지에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쏘련에서는 일반적으로 도상국에 대한 물질적 원조의 규모에 비해 인민의 정치적 원조 같은 국제적 연대의식이 희박하다는 데에 생각에 미쳤다. 그때 나는 어쨌든 쏘련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원조의 몇 가지의 예를 정리해 원고를 썼고 그 이후 쏘련의 도상국에 대한 대응에 대해서도 대답해주었다. 후에 고르바초프와 세바르나제의 주임통역으로 근무했던 파벨 베라췐코의 『쏘연방의 붕괴』(演田徹訳 三一書房 一九九九年)를 읽자 당시 UN기관에서는 “쏘련의 많은 사람들은 (쏘련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침공에 무관심한 태도밖에 보이지 않았다”(‘25, 강조는 인용자)라고 쓰고 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쏘련의 인민이 총체적으로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나 혹은 그러한 경향이 강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왜 관심이 적었던 것일까.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문제를 오늘날의 러시아인이 회고하는 것을 볼 때 필자가 아는 지식선상에서 보면 그 대다수가 그러한 문제는 마이너스의 이미지, 부정의 문맥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역사의 위조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당 정부의 공문서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이른바 쏘련공산당 제36차 대회(1981년 2월 20일~3월 3일)에 브레즈네프서기장 보고는 ‘1. 쏘련공산당의 국제정책에 대해 2. 해방을 가져오는 제반국가들과의 관계의 발전’이라는 절에서 당의 국제주의적 임무에 대해 쓰고 있다. 이어서 ‘5. 평화를 강화하고 데탕트를 강화시켜 군비경쟁을 억제하자’라는 절에서도 “아프가니스탄의 주권은 그 비동맹국가로서의 지위와 같다, 완전하게 옹호되어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ソ連共産党第二大会資料集』ソ連大使館広報部編訳 ありえす書房 1981年) 이어 제27차 대회(1986년 2월 25일~3월 6일)에서는 “쏘련사회 전체에 ‘정체적 현상,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 라고 하면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주요과제로 삼고 있다. 고르바쵸프서기장의 정치보고인 ‘4. 당의 대외전략의 기본적인 목적과 방향’이라는 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80년대 전반기처럼 세계정세가 폭발적으로 복잡하고 험악한 상태가 된 것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정권을 잡고 있던 우익그룹(레이건 정권의 일=인용자주)과 NATO의 동맹자들은 그들의 노선을 긴장완화부터 무력정책으로 급전환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데탕트의 의사를 가지고 “쏘련군부대를 빠른 시일 내에 조국으로(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귀환시키고 싶다는......그래서 단계적 철수의 기한도 아프가니스탄 측과 논의하지 않아 버렸다.”(ソ連共産党第二七回大会資料集』ソ連大使館広報部編訳 ありえす書房 1986年)





양대 회의 보고는 당시 쏘련공산당의 원칙적 입장을 관철시키고 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측에서 보면 혁명과 반혁명의 치열한 전쟁이 전개되어 쏘련병도 매일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위의 보고는 원칙적이었지만 상황을 극히 상투화시켜 편향되었다는 인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정치국은 앞에서 언급했던 1979년 12월 27일의 쏘련군을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했던 승인안건을 6개월 후인 중앙위원회에서 보고한 것이 끝이었다. 이러한 지체와 상투적 처리가 거듭되면서, 양국에 있어 사활이 걸린 문제에 대한 쏘련 측의 감수성은 현저하게 둔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의 정보제공만으로 쏘련 인민들이 관심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후기, 글라스트노스트가 진행된 단계, 제19차 전국당협의회(1988년 5월)가 열렸을 때, 이른바 모스크바인민전선(1988년 결성)과 함께 “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1979년의 아프가니스탄의 침공을 탄핵한다”(『モスクワ人民戦線─下からのペレストロイカ』ボリス・カガルリツキー著 佐久間․邦夫 訳 柘植書房, 1989)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마치 반제국주의의 입장을 거칠게 버리고, 아프가니스탄 혁명에 등을 돌린 것이 되었다.





1975년 포르투갈 혁명과 함께 혹은 그에 선행해 일어난 전 포르투갈령 앙골라 독립운동지원을 위해 쿠바정부는 병사와 의료관계자 등의 각종 전문가를 수만 명 파견했다. 카스트로는 당시 열린 제1차 공산당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쿠바의 대외정책의 출발점은, 사회주의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하는 인민의 투쟁이 국제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에 쿠바의 입장을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쿠바는 지금까지 항상 그 국제연대에 관한 입장을 모든 가능한 방법을 가지고, 즉 필요할 때에는 피를 가지고 또는 어떤 때에는 노동과 기술협력을 가지고 증명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해 이러한 입장이 쿠바의 국제적 자세임을 결의합니다”(『立ち上がる南部アフリカ』ウィルフレッド・G.バ-チェット著 吉川勇一訳 サイマル出版会 1978)





이렇게 쿠바에서는 국제적 지원 연대가 인민의 과제가 되었다. 그때 쏘련정부도 앙골라에 1000명 남짓한 군사고문을 파견하고 물자원조도 수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이 싸웠던 나라(쏘련)에서는 앙골라 문제가 인민 한 사람 한 사람 수준에서 의식화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쏘련의 당ㆍ정부의 대외원조 연대활동의 방법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미 ‘쏘련으로 대표되는 국가ㆍ행정 레벨에서의 원조 연대활동’ (p. 127)이라고 말했듯이 이는 한마디로 말하면 행정적 수단에 의한 원조였다. 만약 쏘련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넓게 자발적 의사를 가지고 집단적 토의를 거쳐 아프가니스탄의 혁명과 반혁명의 투쟁들에 개입하고자 했다면 또 다른 형태의 결과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쿠바 같은 연대운동이 전개되었다면 과연 그러한 혁명과 반혁명의 싸움의 전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노사과연>















번역 : 정혜윤(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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