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 28일 그날,

“이제 세상은 뒤집어졌고,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87년 대투쟁 당시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개편 11인 대책위원’으로 선두에 섰던 정병모 동지는 울산노동뉴스 [연재] 글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 하고 있다.

........

개별로 흩어져 모래알처럼 보였던 노동자들이 한번 뭉치기 시작하니 거칠 것이 없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모여 열이 되고 물결이 되고 강이 되었다. 말라비틀어진 강바닥을 음습하게 소리 없이 힘없이 흐르는 강이 아니었다. 장마철 갑자기 불어난 성난 물결처럼 시커먼 아스팔트를 삼키며 종합운동장을 향해 달려갔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슬 퍼렇던 관리자들도 꽁무니를 뺐는지 보이지 않았고 하늘같았던 중역들도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냥 좋았다. 목 아프게 고함을 질러도 찡그리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걷다가 실수로 발을 밟아도 화내는 사람이 없었다. 어깨 걸은 옆자리 노동자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생면부지의 노동자가 아니라 수십 년 몸 부디끼며 살아온 한 식구처럼 느껴졌다. 매일매일 같은 공장에 다니면서 한번도 얘기한 적 없었던 무표정한 노동자들이었지만 사선을 같이 넘는 동지로 다시 태어났다.

기름때 절은 작업복이 몸에 닿아도 피하지 않았고 시금털털한 땀 냄새가 풀풀 나는 동료들의 어깨가 정겨웠다. 용접가스에 시커멓게 찌들은 찢어진 작업복도, 페인트에 범벅이 된 안전모와 땀 냄새 밴 목에 두른 수건도 낯설지 않았다. 서로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격려하고 마주보는 얼굴에는 웃음이 묻어나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깨와 어깨를 걸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노동자들의 발걸음에는 희망이 가득 차 있었다. 두려울 까닭이 없었다. 어디 간들 이보다 못할 리 없고 이만큼 열심히 일한다면 돈은 모으지 못해도 지금처럼 처자식 밥 굶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리랑목동이란 노래가 터져 나왔다.

‘야야아 야야야야 야야야야 야야야

꽃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는 아가씨야

아주까리 동백꽃이 제 아무리 고와도

동네방네 생각나는 내 사랑만 하오리까

아리아리 동동 아리아리 동동

스리스리 동동 스리스리 동동

아리랑 콧노래를 불러나 보세’

.......

응원가로 많이 불렀던 노래였지만 동료 노동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부르는 느낌은 달랐다. 강제로 동원되어 억지로 부르던 때와 스스로 뭉쳐서 단결한 노동자들이 내는 노래 소리는 화음부터 달랐다. 쇠를 다루는 사내들이 내는 거칠고 무뚝뚝한 소리가 아니라 가슴에 맺힌 한을 담아 토해내듯 부르는 노래는 비장한 느낌이 들었다.

목이 터져라 같이 노래를 부르다보니 가슴이 울컥해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어렵게 어렵게 노동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친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렁차게 구호가 울려 퍼진다.

“어용노조 물리치고 민주노조 건설하자”

“민주노조 건설하고 인간답게 살아보자”

이제는 구호도 노동자 스스로 만들고 자연스럽게 외치고 있다. 잠시도 쉬지 않고 구호가 나오고 구호가 끝나면 노래가 이어졌다. 같은 노래를 쉬지도 않고 반복해 부르고 끝나면 또 부른다. 3~40m 단위로 나누어진 대열에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지휘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 사람이 진행하는 방식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

“공장 한바퀴 더 돕시다.”

대열 가운데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공장을 한바퀴 더 돌자고 외치니 모두들 따라서 “공장 한바퀴 더 돕시다.”외쳐 다시 공장을 돌기로 했다. 백만 평 가까이 된다는 넓은 곳을 다 돌아다닐 수는 없지만 한 시간 이상 걸어서 다니며 구호와 노래를 했는데도 지치지 않았다.

아니 지치기는커녕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 본 희열과 감동에 신바람 난 노동자들은 종합운동장에 들어가 갇히기보다는, 열린 공간에서 모처럼 얻은 자유를 더 즐기길 원했다.

........

이제 세상은 뒤집어졌고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7월의 햇빛은 계란을 삶을 만큼 뜨거워졌지만 그 누구 하나도 피하지 않고 즐기고 있었다. 모두가 정겨워보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힘을 돋우는 구령을 내니 다같이 따라하며 내달린다.

“으쌰 으쌰 으쌰” 함성이 떠나갈 듯하다. 앞 대열에서 시작한 구령이 물결처럼 뒷 대열로 전달되고 끓어질 만하면 다시 이어진다. “으쌰 으쌰 으쌰 으쌰 으쌰 으쌰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뛰면서 하니 숨도 찰 듯 한데 새로운 방식의 구호까지 등장했다.

“민주”하고 앞줄에서 부르면 뒷줄에서 “노조”하고, “건설”하니 “하자”고 받는다. 그 사이 사이에 박자를 맞추어 박수까지 치면서 하니 흥이 절로 난다.

구호도 끝이 없고 쉴 생각 없이 달리며 ‘아리랑 목동’과 ‘현대사가’를 목이 터지게 부르는 노동자들은 어제의 근로자가 아니었다.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무지렁이 근로자가 아닌 새롭게 태어난 노동자였다.  ---울산노동뉴스 [연재] 글 정병모의 노동운동 야사 중에서---

1987년 7ㆍ8ㆍ9월

이른 아침이지만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데 공장안 출근 길 가에서 웬 사람들이 ‘찌라시’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7월21일 현대중공업 사측이 노사협의회 회장을 하던 권오성 이란 사람을 앞세워 기습적으로 노조 설립신고를 했고, 이들은 어용이라는 것이며, 어용노조는 인정할 수 없으니 물러가야 한다” 고 한 것 같다. 이상한 조짐은 그렇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러한 조짐이 급기야 7월 28일 전면 총파업과 거대한 노동자 군대로 드러났다.

그날, 울산 현대중공업 ‘조지나 공장’에서 쎄 빠지게 일 하고 있던 우리는 “다들 일 때려치우고 운동장으로 모인단다. 우리도 가보자”며 누구나 할 것 없이 “에라이 날씨도 더운데 잘됐다. 우리도 가보자”며 그렇게 작업공구를 내팽개치고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정주영의 눈에 흙이 던져지는 현장에 있으며, 해방된 노동자대중으로 운동장에 앉아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도 연단에서 쉼없이 선동질을 해대는 진행자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기억이 남아있다.

1987년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은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현재는 현대중공업 엔진사업부)노동자들이 노동조합설립 보고대회를 하면서 그 서막이 열렸다. 이후 울산 현대노동자들의 투쟁은 급속히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14일 민주집행부 출범, 8월18일 현대계열사 노동자 4만 여명 울산공설운동장까지 가두진출, 9월2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포크레인, 트랜스포터 등 중장비를 앞세우고 시청까지 가두진출 투쟁을 거치며 9월19일 조업 정상화에 합의함으로서 그 막을 내렸다.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새롭게 결성된 노동조합은 자그만치 1,060개였다. 이는 지난 1980∼86년 동안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수치였다. 아울러 대투쟁 기간 동안 발생한 노동쟁의 건수는 3,458건으로 하루 평균 40여건 씩 터져 나온 셈이었다. 이는 1986년 하루 평균 0.76건에 비해 무려 50배나 증가한 것이며, 1980년 봄의 노동자투쟁(총 407건)보다 8배나 증가한 것이었다. 가히 봇물 터지는 듯한 기세였다고 할 수 있다.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가장 밑바탕에서부터 억압 질서를 뒤흔들어 놓으면서, 끝내는 그것을 뒤엎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 놓았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는 비로소 강력한 엔진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세상을 뒤흔든 100일'이었다.(네이버 지식IN shj895님의 글 중에서)

10년간 노동자계급의 공세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는 1987년 7ㆍ8ㆍ9월 대투쟁으로 형성된 ‘강력한 엔진’으로 1997년까지 밀어 올렸다. 1997년까지 주요 투쟁들을 살펴보자.

1988년 11월 최초의 전국노동자대회(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법개악 저지투쟁)

1988년~1989 현중 128일 투쟁

1990년 현중 골리앗투쟁, KBS 노조 등 방송민주화 투쟁,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전국총파업

1991년 반 민자당 민주주의 투쟁

1993년 현총련 총파업투쟁

1994년 철도 기관사 파업, 전국지하철노조 파업, 한진중, 현중 LNG 선상점거파업

1996~1997년 노개투 총파업(최초의 정치총파업)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공세적 투쟁과정은 1990년 ‘전노협’을 거쳐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산별노조운동의 토대를 구축하는 동시 1997년 노동자 대통령후보를 출마시키면서 진보정당 건설의 토대를 구축하는 성과를 남겼다. 

1997년 그후 10년

1996년 12월 김영삼 정권이 노동법 개악 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곤 김대중 정권으로 권력을 넘겨줌으로써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가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1998년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로 시작된 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노동의 분절화와 노동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사회적 양극화를 날로 심화시키는 직접적 계기가 되어 왔다.

한편 지난 10년간 한국의 노동자투쟁이 정규직노동자들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면, 이시기부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지난 10년간의 투쟁을 주도해 오던 노동자계급 내부의 또 다른 계층(비정규직노동자)의 투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의 유연화 정책에 의한 자연스런 흐름이다.

특히 또 다른 측면에서 노무현정권이 집권하기 시작한 2003년부터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분신자결 사건들이 수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정규직 비정규직, 제조업 서비스업, 공기업 민간기업을 가리지 않고 형성되었다. 이들 자결의 원인은 자본의 노동에 대한 비타협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정규직노동자들은 현장통제 등 자본의 노동자통제에 의한 저항,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노조 불인정 등 자본과 정권이 노조요구를 묵살하는 데에서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003년 2월 창원 두산중공업노조 대의원이었던 배달호열사의 분신으로부터 시작된 열사정국은 부산 한진중공업 김주익, 곽재규열사로 이어졌고, 세원테크 이현중, 이해남열사, 근로복지공단의 이용석열사 투쟁으로 이어져갔다.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항의와 저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1년 자본의 무리한 구조조정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모조리 정리해고 하고난 후 노조가 어용화 된 울산 태광산업에서 조차 노조사무장이었던 박동준동지가 투신 자결한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은 사측의 노조에 대한 노골적인 개입에 항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어져 갔던 노동자 열사정국은 2004년 2월 14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 박일수 열사의 분신자결로 다시 이어져 갔다. 이러한 처절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2007년 현재까지도 계속되면서 노동자들이 목숨을 내던지며 항의하거나 경찰에 의해 살해당하는 상황은 끊이지 않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은 양적으로 성장했으나 질적으로는 후퇴하고 있다.

자본가들에게 권력과 노동자들을 해고 할 수 있는 자유를 더욱더 보장하려는 신자유주의자 노무현 정권하에서 정규직 노조와 노동자들은 더욱더 몸을 사리는 양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반대 급부적으로 1990년대 말을 경과하면서 자신의 처지가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더 스스로를 조직화 하며 투쟁하는 양상으로 변화되어 왔다.

그런데, 공장안에 갇혀 있는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자본의 통제뿐만이 아니라 노사 협조주의화된 정규직 노조에 의해서도 통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양적 성장은 했으나 질적으로는 후퇴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2006년과 2007년을 경과하면서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법안을 개악함과 동시에 노조를 무력화 하고 노동자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등 자본의 자유를 확대해 주는 노사관계 로드맵을 통과시켰다. 우리 민주노조운동은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지난 6월 산별노조로 15만 조합원 규모로 새롭게 출발한 금속노조가 비정규 개정법 등의 7월 시행령 저지와 한미FTA 체결 저지를 위해 총파업투쟁을 조직했으나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단지 금속산별노조가 주도적으로 정치적 총파업을 조직하고 단행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었을 뿐이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질적 발전을 위해 다시 20년전 역사에서 그 대안 찾기에 나서야 할 것 같다.

꼭 알고 있어야 할 기억, “하청을 직영화 하라!”

현대중공업 1987년 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모두가 하나였다. 특히 하청노동자들의 진출은 ‘노동자 대투쟁’이란 이면에서 돋보이게 드러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하나’ 되었기 때문이다.

“하청을 직영화 하라!”며 손으로 쓴 현수막을 앞세운 하청노동자들은 이 기회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고 싶었던 것이었다. 지금보다 원ㆍ하청노동자들의 임금과 복장, 근로조건에서 차별이 거의 없었던 당시 이들 요구의 내용은 ‘고용안정’이었고 ‘직영소리 한번 들어보는 것’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이 요구는 20년 전보다 더욱더 절박한 요구이다. 그런데, 그 많은 하청노동자들이 직영화 되면 직영노동자들의 고용이 불안해 지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넓게 형성되어 있는 현실을 볼 때, 우리 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의식적으로 전진하지 못 했음이 명백하다. 오히려 20년 전 보다 후퇴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20주년을 맞이하며 노동운동의 혁명적 전진을 기대해 보는 것은 무리일까? <노사과연>

2007년 7월5일(목)

1987년 그 후 20년

조돈희｜현대중공업 해고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