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세
현장
이론
기타
 
지난호보기
월간지/단행물
구독신청
세미나신청
토요노동대학신청
1
정세와 노동 - < 정세 >
제목 단결된 투쟁으로 정세를 역전시키자
글쓴이 문영찬 | 편집위원 E-mail send mail 번호 85
날짜 2008-05-09 조회수 3274 추천수 149
파일  1210336211_문영찬.hwp

  









1




















1. 모순의 정지












마치 이 세계의 모순이 정지한 듯하다. 이명박이 당선되고 한나라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후 이 세계는 마치 계급대립이 없는 듯이 실용주의의 깃발아래 성장제일주의가 외쳐지고 있다. 실제로 총선에서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른바 진보진영이라고 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참패를 면치 못하고 의미있는 세력으로 정립에 실패했다. 그 결과 마치 총선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사회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이명박은 미국과 일본을 들러 ‘전통적인’ 한미관계, 한일관계를 다지고 있다.





모순이란 대립물의 운동이고 투쟁인데 지금은 마치 부르주아지라는 한 쪽 면만 있는 듯하다. 즉, 모순이 겉으로 볼 때는 정지한 듯이 보이는 것이다. 노동자계급과 민중은 숨을 죽이고 있다. 그리고 이른바 뉴타운 개발공약의 취소에 대한 불만이 신문지면을 장식한다. 그러나 대립물의 투쟁, 모순의 운동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모순은 때로는 정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순의 정지는 일시적 상대적이고 모순의 운동은 절대적이며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의 운동, 대립물의 투쟁을 통해 세계는 변화하고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로 진보하는 것이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것, 이 사회의 발전의 원동력은 생산과 계급투쟁이다. 지금은 마치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이고 계급대립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부르주아지, 특히 반동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총력을 다하여 이 사회를 모순이 없는 사회로 만들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면 일시적으로 정지해있는 듯이 보이는 우리 사회의 모순의 현실을 파헤쳐 보자.



















2. 반동부르주아지의 지배체제의 완성












반동부르주아지의 실체는 이미 오래전에 폭로되었다












총선결과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반동부르주아지는 10년 만에 모든 권력을 되찾았다. 행정부와 의회를 모두 장악한 것이다. 이로써 반동부르주아지의 지배체제는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반동부르주아지의 이러한 복귀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파시즘의 잔재가 강하다는 것,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 예속적인 독점자본의 지배가 공고하다는 것, 이른바 한미동맹, 즉, 미제국주의에 대한 한국사회의 예속의 고리가 강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반동부르주아지의 실체는 이미 오랜 전에 폭로되어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반동부르주아지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군사파쇼세력이었다는 것, 그들은 이른바 성장, 즉, 독점자본의 이익에 전적으로 봉사한다는 것, 쉽게 말해 철저히 기득권적 세력이라는 것은 이미 공표된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 반동부르주아지가 권좌에 다시 복귀한 것은 이들이 개과천선해서도 아니고 대중에게 새로운 전망을 제시해서도 아니다. 이들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10년의 실정에 대한 반사이득으로써 다시 권좌에 복귀한 것이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철저히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배신하고 억압하고 수탈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한 결과, 민중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게서 등을 돌린 결과 이들 반동부르주아지가 이익을 얻은 것이다.





1987년 항쟁으로 인해 반동부르주아지는 후퇴했고, 그 빈 공간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가 차지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반동부르주아지와 타협하는 길을 택했고 그 결과 국가보안법으로 대표되는 억압적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 혁명의 저지를 공통분모로 하는 것이었다. 이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이렇게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탄압하는 세력이 된 결과, 사회변혁의 원동력인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억압한 결과 이들은 스스로의 집권의 토대를 허물고 다시금 반동부르주아지에게 권좌를 내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전개는 우리 사회에서 지난 10년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집권기간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최대치였다는 것을 말한다.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투쟁에 밀려 파시즘을 철회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과정이 평민적 방식으로, 혁명적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고 반동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타협을 토대로 진행된 결과 우리 사회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폭과 질은 매우 협소했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반동부르주아지의 권좌에의 복귀는 이러한 타협이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달도 차면 이지러지는 법! 반동부르주아지의 집권은 1987년 이후 우리 사회가 확보했던 진보의 성과를 철회하고 잠식하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갉아 먹고 노동자계급과 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강화하는 것 이외에는 그들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과정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반동부르주아지의 토대를 잠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자명하다. 지난 10년 동안 반동부르주아지는 비판의 대상에서 열외였다. 왜냐하면 김대중, 노무현 등이 집권하여 총대를 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을 적당히 견제하고 과실을 챙기면서 그들이 반동부르주아지의 이익, 즉, 독점자본과 제국주의의 이익을 결정적으로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면 될 뿐이었다. 실제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집권 10년 기간에 독점자본들은 막대한 축적을 하여 초국적 자본화하였고 미제국주의의 이익도 이라크 파병 등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반동부르주아지 스스로 총대를 메고 비판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반동부르주아지가 10년 만에 권좌에 복귀하면서도 보다 세련된 억압방식 이외에는 대중을 설득할 아무런 전망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들의 철학의 빈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제시하는 이념은 실용주의이다. 그러나 실용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혹시 중국의 고도성장에 영감을 받아 등소평의 실용주의에서 따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국의 고도성장은 기존의 사회주의의 성과를 토대로 하여 그것을 잠식하면서 이루어진 특수성이 있는데 남한의 경우 그러한 사전의 성과가 전혀 없다. 따라서 그때 그때 편리한 대로 대응한다는 것인데, 이는 스스로 전략의 부재, 철학의 빈곤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명박이 내세우는 7% 성장 전략은 이미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졌고, 또 하나의 성장전략으로 내세웠던 대운하도 스스로 총선에서 주장하기를 회피하고 감추려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대중적 지지를 상실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반동부르주아지는 대중을 설득하고 사회를 이끌어나갈 전망을 전혀 확보하고 있지 못한 것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10년을 이끌어 왔던 신자유주의, 노동자들을 대량해고와 불안정 취업, 비정규직으로 내몰았던 토대가 되었던 이념인 신자유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파산하여 공황의 그림자가 한국사회에도 어른거리고 있는 현실은 반동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모두에게 난관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말한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에 대한 복지의 철회와 공격을 특징으로 하는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이념과 노선이 더 이상 사회를 이끄는 노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르주아지 전체, 특히 반동부르주아지는 전망이 결여된 계급이고 따라서 이들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에 대한 억압의 강화의 길로 갈 수밖에 없고 이는 지금은 정지한 듯이 보이는 계급 대립을 격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철학이 빈곤한 것은 반동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만이 아니다. 지난 10여년의 기간 동안 소위 ‘민주화’의 과실을 누려왔던 소부르주아 세력도 전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소부르주아 우파를 대표하는 시민운동은 철저히 체제내화하여 부르주아지 지배의 보조물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보다 정직한 부르주아지, 보다 깨끗한 부르주아지라는 이들의 이미지는 억압과 착취, 그리고 부패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함만을 보였을 따름이다. 그러면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 1990년대의 노동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정치세력화하였던 민주노동당은 어떠한가?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은 지난 대선에서 진보적 성장론을 주장했다. 즉, 독점자본의 축적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과실을 ‘분배’적 차원에서 노동자와 민중에게 돌리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독점자본의 지배라는 현실을 전혀 바꾸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김대중과 노무현이 반동부르주아지와 타협하여 권력을 잡았던 것처럼 이제는 소위 진보를 내세우는 세력이 부르주아지와 타협하여 권력을 잡겠다는 야심찬 욕심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진보적 성장론은 착취의 현실을 바꾸는 노선이 전혀 아니다. 자본가의 지배를 더욱 더 보완하여 공고화시키는 것으로서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착취의 현실, 자본의 지배, 생산관계의 변혁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권영길과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커녕 스스로 소부르주아지의 일개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이와 같이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는 전망이 없는 세력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를 진보시키고 변혁의 전망을 가져올 세력은 노동자계급과 민중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은 쏘련의 붕괴 이후 변혁의 전망을 상실했다. 무너진 것은 후르시쵸프, 브레즈네프의 수정주의 체제였으나 그와 함께 과학적 사회주의의 원칙도 함께 무너졌고 러시아 혁명의 성과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 과학적 사회주의, 맑스-레닌주의의 복원을 통해 변혁의 전망을 찾아가야 한다. 미국에서의 공황이 보여주듯이 자본주의는 생산력 발달의 한계를 보이고 사회를 관리하고 유지하는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즉, 변혁의 객관적 조건은 날로 성숙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다시금 자신의 이념을 회복하고 투쟁의 주체로 나설 때 변혁의 시기는 성큼 다가올 것이다.

































3. 현 정세의 성격과 전략단계의 문제












20년의 민주화담론의 종식?












총선 직후 지난 4월 10일 ��중앙일보��에는 하나의 대담이 실렸는데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즉, “20년 정치담론 지배해온 민주화 시대 마감”이라는 것이다. 이는 부르주아지의 예민한 계급적 직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20년의 민주화담론이 종식되었다고?! 그러면 이 사회는 더 이상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인가? 아니면 더 많은 민주주의는 불필요하다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점을 뒤로 돌리면 ��중앙일보��의 주장은 하나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 투쟁이 사회변혁의 주요 동력이 아니라는 것, 즉,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 변혁의 단계는 지나갔다는 것을 부르주아지는 계급적 직관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그 다음에는 무엇이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중앙일보��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 이 사회는 더 이상 모순이 없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더욱이 우리 사회는 세계의 모순이 집결된 사회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이제는 사회주의 변혁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가 성숙하여 이제는 노자대립이 사회의 주요모순으로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파시즘을 물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과제가 전면에 제기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가 민주변혁의 단계를 마감하고 사회주의 변혁의 단계로 접어든 것은 대략 1997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이 시기에 노동자계급이 총파업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섰고 김대중이 정권을 장악하여 신자유주의 정책을 편다. 그에 따라 그 전까지 반동부르주아지와 민중을 대립축으로 하는 변혁의 단계가 변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반동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라는 자본가계급을 한편으로 하고 노동자계급과 소부르주아 좌파를 포함한 민중을 한편으로 하는 계급대립이 성립한 것이고, 그 중간에 시민운동으로 대표되는 소부르주아 우파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사회주의변혁의 특수성은 민족민주변혁의 단계가 불철저하게 진행되어 국가보안법 같은 파쇼적 악법이 존재하고 민주주의의 토대가 취약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사회주의 변혁은 민주적 과제의 완전한 해결을 포함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정세규정의 변화












이러한 변혁단계의 변화는 정세분석의 구도를 바꾸는 것이다. 과거 민족민주 변혁 단계에서는 반동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파시즘 권력과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의 대립투쟁이 주요한 구도였다면, 이제는 반동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한편으로 하고 노동자계급과 소부르주아지 좌파를 한편으로 하는 계급대립이 주요한 것이다. 따라서 정세가 변화한다는 것의 의미가 과거 민주변혁 단계와는 판이한 것이다. 그에 따라 과거 민주변혁 단계에서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이 주요타격방향이었다면 지금은 개량주의 세력, 소부르주아지 우파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주요타격방향으로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정세 즉 계급역관계를 파악하는 객관적 지표를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과거 정세분석의 틀은 파시즘 권력에 대한 대립투쟁의 정도, 경제적 대립투쟁의 정도, 토대에서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접근은 고양과 퇴조, 혁명적 정세 등을 모두 파악하는 틀이었다. 즉, 토대의 변화와 객관적으로 형성되는 계급투쟁의 쟁점을 중심으로 정세를 파악하는 것은 타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접근 자체가 사회주의 변혁 단계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노자 대립이 전면에 부각된다는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투쟁의 정도가 정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하여 당면의 정세를 분석해 보자. 지금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공황이 시작되고 있다. 미국은 이미 공황의 단계로 진입했으며 그 여파가 유럽, 일본, 중국 등 전 세계로 확산되는 중이다. 미국과 유럽은 중국과 인도 등의 경제성장이 세계적 공황을 저지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으나 중국과 인도 경제도 세계경제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어 공황을 피해가는 것은 어렵다. 이러한 세계경제의 상황은 남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대외의존도가 높은 남한 경제의 경우 세계적 공황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계급의 밑으로부터 투쟁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훨씬 더 배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정규직 투쟁, 민중의 생존권 투쟁이 단지 일상적 투쟁일 뿐만 아니라 정세반전의 고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한 자본의 재생산의 위기가 첨예화되는 가운데 그 모순이 집중되는 고리가 바로 비정규직투쟁, 민중의 생존권투쟁이기 때문이다. 반동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보다 세련된 방식의 억압과 노동운동의 무력화를 통해 이러한 토대에서의 위기를 헤쳐나가려 하기 때문에, 경제적 대립투쟁은 정세를 판가름하는 주요 고리가 되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이 대오를 정비하고 단결투쟁할 경우 정세가 반전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후반 이후의 지리한 반동의 시대, 퇴조의 정세가 역전될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대중의 투쟁이 활성화될 때 그것은 점차 쟁점을 상승시켜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으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












노동자계급의 현 상태에 대한 평가












그러나 지금 시기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열악하다. 자본가계급의 공세에 끊임없이 밀려서 “비정규직보호법”, 노사관계로드맵 등 노동법의 개악을 거쳐 이제는 현장에서의 구조조정 공세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자본에 의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열되어 있고 또 이념의 측면에서는 조합주의, 개량주의, 실리주의가 만연해있다. 그 결과 비정규직의 투쟁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나 국지적인 처절한 싸움으로 끝나고 있다. 더욱이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연대하기는커녕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사용하고 심지어는 구사대 등으로 나서서 직접 탄압하기조차 한다. 정규직 노동자, 특히 대공장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 것은 변혁의 전망을 갖지 못하고 실리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성립하고 1990년대 후반부터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로 분열된 이후 실리주의는 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실리주의는 나름대로 매력있는 이념이다. 고통스런 투쟁없이 적당한 교섭을 통해 경제적으로 안정된 결과를 내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것인가? 나아가 이러한 실리주의는 한편으로 변혁의 전망, 이념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객관적인 사회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가 성숙하여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이익’,‘실리’가 중심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과거 반제 반파쇼 투쟁의 시기는 ‘대의’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그러나 반파쇼 투쟁 단계가 지나고 자본주의가 성숙하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그러나 실리주의는 허무하다. 투쟁을 회피하고 교섭으로 얻은 성과는 당장은 이익이 된다. 그러나 이는 현재를 위해 미래를 저당잡히는 것이다. 약간의 경제적 성과에 만족하여 투쟁을 회피할 때 자본에 대한 고통스러운 예속은 강화된다. 무쟁의 타결, 노사화합선언 등은 실리주의 경향의 표출이지만 그 가운데서 자신의 해방의 전망, 노동해방의 전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사실 대중들은 실리주의를 통해 얻은 것이 없다. 노동자계급의 상층, 민주노총의 상층부와 민주노동당의 일부 상층부가 출세의 길을 얻었지만 실리주의로 인해 운동이 해체된 결과 노동자 대중에게 돌아온 것은 근로조건의 악화, 구조조정이었다. 그리고 경기가 상승해도 새로이 정규직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으로 채워진 것이 현실이었다. 자본에 의해 노동귀족으로 매도당하는 대공장의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적게 잃었지만 얻은 것은 없다. 여전히 잔업, 특근 등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언제 구조조정의 칼날이 자신을 덮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대립물의 상호전화라는 것을 가르친다. 변혁과 실리라는 대립물의 운동에서 실리주의의 끝은 허무하다는 것, 예속의 강화라는 것, 현재를 위해 미래를 앗아간다는 것, 해방의 전망을 봉쇄한다는 것 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실리주의의 종착점에서 다시 대중은 변혁을 향해, 노동해방을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집권, 반동부르주아지의 지배체제의 완성은 이러한 실리주의가 종착점에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민주의적 계급타협에 대해












과거 유럽의 경우 2차대전 이후에 사민주의적 계급타협으로 복지국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후 약 20년 후에 세계적 차원의 공황은 이러한 복지국가의 한계, 즉, 사회민주주의적 계급타협 체제의 한계를 드러냈고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신자유주의를 도입하였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러한 사민주의적 계급 타협으로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자는 노선이 대두되고 있다. 바로 진보신당이 그것이다.





진보신당은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참패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하고 반성하기는커녕 소위 “종북주의” 논쟁을 벌이면서 독자창당의 길로 들어섰다. 만약 진보신당이 변혁적 전망을 갖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나섰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나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즉, 우경화 경쟁을 하여 사민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논쟁과 창당과정에서 사민주의 그룹을 이끄는 주대환씨는 진보신당의 입장이 바로 자신의 입장이라 하면서 반겼다. 사실 “종북주의” 논쟁은 민주노동당이 그나마 갖고 있던 건강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운동권당, 민주노총당, 친북노선 등이 이 사회에서 최소한의 진보성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노회찬, 심상정 씨 등은 이러한 것을 부정하면서 자신들은 보다 참신한 진보정당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북주의 논쟁은 심상정 씨 등이 그나마 갖고 있던 건강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부르주아 정치인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폭로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이번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의 2중대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참패한 것이었다.





이러한 진보신당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사민주의적 계급타협 정책의 문제를 전면에 제기한 것이었다. 진보신당, 그 이전의 전진그룹이 전면에 제기했던 사회연대전략은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전면적으로 굴종하는 것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이 마치 자본가계급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책임이라는 것처럼 정규직의 양보를 통해 비정규직을 지원하자는 것은 최소한의 계급의식도 완전히 내팽개쳐버린 것이었다. 정규직은 수많은 잔업과 장시간 노동을 통해 겨우 노동력의 재생산비를 건지는데 반해 수많은 비정규직은 최소한의 노동력 재생산비도 획득하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을 비판하며, 자본과 대립전선을 치기는커녕 자본의 공세에 밀려 전선을 노동자계급 내부로 옮겨오는 것이 바로 사회연대전략이었던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분열이라는 현실에 영합하는 것이었다.





지금 많은 대중은 실리주의에 빠진 결과 한 걸음 두 걸음 양보하여 지금은 현상유지만이라도 해달라고 자본에게 애원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민주의적 계급타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사민주의가 대중적 설득력을 갖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최소한의 경제적 이익조차도 노동자계급은 투쟁을 통하지 않고는 획득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노동자계급이 변혁의 전망만 주어진다면 다시금 노동해방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주의 변혁을 의식적으로 준비하자












지금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사회주의 변혁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철저한 민주주의를 완성시키고 착취를 폐지하고 노동해방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과의 투쟁 전선으로 나서야 한다. 마치 모순이 정지하고 계급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지금이 변혁의 전망을 확보해야 할 시점이다.





사회주의 변혁은 과거의 농민반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과 달리 최고도의 의식성이 발휘되는 변혁이다. 더구나 부르주아 혁명과 달리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노동자계급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세우기 전에는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 변혁에 필요로 되는 의식성의 정도는 이전의 모든 변혁과 비교할 수 없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아직 쏘련 붕괴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쏘련의 붕괴가 20세기 후반 이래 사회주의 진영을 지배했던 수정주의의 붕괴였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새로운 변혁의 전망을 확보하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를 가로막는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가차없는 투쟁이 필요하다. 트로츠키주의는 20세기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였느니 혹은 왜곡된 노동자 국가였느니 하면서 20세기 사회주의를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노동자계급에 패배주의를 가져오고 과학적 전망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트로츠키주의의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결과는 제국주의와 반동세력의 이익에 대한 봉사임을 폭로해야 한다.





이렇게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통해 역사적 성과와 한계, 오류를 파악하는 것과 더불어 변혁의 길을 가리켜 줄 강령과 전략노선을 수립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인지 대중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향후 사회주의 건설의 과학적 길에 대한 최소한의 방침을 갖고 있어야 한다. 20세기 사회주의 평가는 이러한 강령의 수립을 위한 하나의 전제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 변혁은 철저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변혁이어야 한다. 20세기를 돌아볼 때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살아있고 철저히 관철될 때 세계변혁은 일취월장할 수 있었고, 반대로 수정주의가 득세하여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세계변혁과 사회주의 건설은 난관에 봉착했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남한의 사회주의 변혁운동은 전 세계 노동자계급과 연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계변혁에 기여할 때만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변혁도 가능하다는 점은 자명하다.



















4. 단결된 투쟁으로 정세를 역전시키자












“노동자의 힘”의 당건설 움직임에 대한 논평












최근에 민주노동당이 대선에서 참패하고 분열된 이후 그러한 정세를 바탕으로 노동자의 힘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노동자의 힘”은 각 사회주의 분파들에게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수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주의 당 건설의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올바르게만 진행된다면 이러한 노력은 정세를 돌파하는 하나의 고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힘”의 당건설 움직임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건설의 전제가 되는 강령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추상적 내용이 아니라 대중에게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하려는 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줄 강령에 대한 접근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당건설이라는 것이 정세에 대한 즉자적 반응 이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치열한 평가, 사회주의 사회의 상을 구체화하려는 노력 등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힘”의 당건설 움직임은 레닌주의를 배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를 규정했던 레닌주의를 배척하고 과연 21세기 초반의 지금 당건설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노동자의 힘”은 사회주의 노동자당이라고 자신이 건설하려는 당의 성격을 규정지으면서도 전위정당론을 거부하고 있다. 즉, 모든 정당은 전위정당이라는 황당무계한 논리로 전위적 질의 당건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변혁이 최고도의 의식성을 발휘하는 변혁이라는 점과도 배치된다. 과학적 이론에 대한 철저한 체현을 바탕으로 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성을 철저히 체현하는 전위들의 결집이라는 내용이 빠진 당건설은 공허한 것이다. 모든 정당이 전위정당이라는 것은 전위정당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당 일반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모든 정당은 계급의 일부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런 수준으로 논의를 제한하면 부르주아정당과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의 차별성이 없어진다.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반영하는 강령과 전위적 조직노선을 갖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의 힘”이 이렇게 전위정당 노선을 부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쏘련 붕괴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한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전위노선이 쏘련의 붕괴 이후로 무너진 후 다시 그것을 되살리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레닌주의를 부정하고서는 절름발이 사회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논리적 개념이라면 맑스-레닌주의는 역사적 개념으로서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즉, 레닌주의를 부정하고서는 제국주의 시대, 그리고 21세기 초반의 지금 올바른 과학적 노선을 세울 수 없다. 전위노선이 빠진 사회주의 당건설은 앙꼬없는 찐빵이다. 그리고 자본가계급에 대한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정당이 될 수밖에 없다.












개량주의를 무력화시키고 밑으로부터 투쟁을 견결히 옹호하자












현재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의 투쟁을 가로막는 것은 자본가계급만이 아니다. 바로 운동 진영 내의 개량주의 세력이 투쟁의 수위를 적절히 통제하고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투쟁이 확산되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국민파), 그리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라는 개량주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의 투쟁을 엄호해야 한다. 이들 세력은 노동자계급에게서 변혁의 전망을 앗아가는 주범이다. 이들이 노동해방의 대의를 배신한 지는 오래되었고 지금은 체제내화되어 노동자계급의 변혁으로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반동부르주아지의 지배체제의 완성은 앞으로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에 대한 파상적 공세를 예고한다. 소위 이명박의 개혁이라는 것은 착취와 억압의 강화일 뿐이다. 자본가에게는 최고의 세상을, 노동자계급과 민중에게는 예속의 굴레를 강화하는 것이다. 앞으로 한미 FTA국회비준 저지 투쟁, 공공부문 구조조정 저지투쟁, 비정규직과 민중의 생존권 투쟁, 건강보험 개악반대 투쟁 등 여러 가지 쟁점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그리고 민중 사이의 전선이 그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 투쟁들을 견결히 수호하고 지원하고 연대하자. 자본가계급이 토대에서 재생산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이 명확해지고 있는 바로 지금의 시점이 정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맑스-레닌주의자를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자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투쟁을 엄호하고 지원하면서 의식적으로 정세의 역전을 준비해야 한다. <노사과연>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84 단결된 투쟁으로 정세를 역전시키자 문영찬 | 편집위원 2008-05-09 3274 149


우 156-060)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435번지 진안상가 나동 2층 (신주소: 노량진로 22길 33) 
(전화) 02-790-1917 / (팩스) 02-790-1918 / (이메일) wissk@lodong.org
Copyright 2005~2023 노동사회과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