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족일도.

밀어걷기로 한발이 들어가면 상대방의 몸 어디든 내 칼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검도라는 무예에서 기본이 되며 매우 중요한 거리개념이다. 아, 밀어걷기란 뒷발이 몸을 밀어서 앞으로 나가는 보법으로 역시나 검도스텝에 있어서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한발을 밀어서 들어간다는 것은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기 때문에 이 일족일도의 거리는 실제로 위협이 되는 거리를 의미한다. 유효타격 거리.

반대로 일족일도의 거리에서 한발만 뒤로 빠지면 매우 안전한 상태가 된다.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려면 이 일족일도 즉, 유효타격 거리 안으로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이 거리 밖에서는 아무리 칼이 빨라도 아무리 현란하게 칼을 휘둘러도 상대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자신만 지칠 뿐.

권투라는 운동도 마찬가지다. 권투를 시작하고선 내내 줄넘기만 하다 관뒀다고들 하는 말을 종종 들으실 거다. 그토록 줄넘기를 하는 이유는 발로 거리를 지배하기 위함이다. 권투를 잘 하는 사람들이 무서운 건 주먹보다도 발 때문일 게다. 유효타격 거리를 지배하지 못하면 아무리 주먹이 강해도, 아무리 빠르게 주먹을 뻗어도 의미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말인데... 사실 진짜 실력과 속마음을 보려면 그들의 발을 봐야 한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얼마나 실제 타격이 되는 거리로 들어오려 준비되어 있는지. 나에게 검도를 가르치는 스승이 내가 초보시절 항상 고수들의 시합을 관전하라면서 했던 말이 있다. 난 당연히 검도이니 고수들의 칼을 열심히 쳐다봤다.

“칼을 보지 말고 발을 봐!!!”

그래서 발을 봤지. 국회를 박차고 나오는 그들의 발. FTA목숨 걸고 막겠다느니, 그러기 위해 서슬 퍼런 장외투쟁이라는 칼을 뽑아드느니... 그들의 정치적 수사가 노련한 고수의 칼처럼, 백전의 권투선수 주먹처럼 그 상대를 위협하는 듯 보여도, 그들의 발은 FTA를 막기 위한 유효타격거리를 향해 나가고 있지 않았다. 뭐 말을 이렇게 하지만 사실 발까지 볼 것도 없는 일이지. 한나라당이 “노무현이 시작한 FTA 우리가 완성하겠다”라고 선전해댔던 것에 그들이 분개한 건 사실이 아니여서가 아니라 진실이 까발려져서이지 않은가. 진짜 오줌싸개에게 “얘 오줌싸개에요”라고 까발리면 십중팔구 분해하며 화내니까 말이다.

어쨌든 상대를 정말로 타격할 생각 없이 멀찍이서 현란한 칼사위나 보여주고 있었을 뿐. 발은 원내로 원내로 뒷걸음질 치며 또다시 싸움이 아닌 한판 쑈로 남는 장사—뭐 선거겠지— 나 하고, 다행히 그들이 뒤집어써야 할 오물 현 집권당이 뒤집어쓰니 ‘앗싸 좋다’였을 테고...

‘진보’라는 잘빠진 칼을 휘두르며 통합이라는 강력한 주먹을 벼리고 있는 분들의 발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려나...

머... 그거야 어쨌든 그 사람들 이야기이고.

언젠가 어느 노조간부로 활동하는 한 동지와 이야기를 나누다 하소연을 들었다. 회사 쪽에서 구조조정 계획을 내놨는데 노동조합 집행부에서 은근슬쩍 그것을 받으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참고로 이 노조는 기천 단위의 조합원이 있는 제법 큰 노조이다. 이 동지는 이 집행부가 그다지 미덥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한다. 어떻게 투쟁 한번 하지 않고 그렇게 쉽게 구조조정을 받을 수 있냐고 회의 때 따졌더니 그러더란다.

“우리도 구조조정 정말 막고 싶다. 현실적 대안이 있다면 이야기해봐라. 파업하고 거리로 나가서 투쟁하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빼고”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쩝....

이건 마치 권투 선수가 상대선수를 주먹으로 가격하지 않고 케이오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거잖아.

이 일족일도의 거리를 또한 검도에선 ‘자신을 버리는 거리’라고도 한다.

뭐 당연한 말이지만 내 칼이 상대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거리는 상대도 내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즉 나를 버릴 각오로 칼끝을 세워 이 일족일도의 거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선 절대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거지.

육참골단.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싸움께나 한다는 분들이 입에 달고 있는 말이다. 뭐 물론 살도 안 주면 더 좋은 거긴 하지만...

아무튼 투쟁도 싸움이다. 투쟁께나 한다는 몇몇 분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바로 ‘현실적 대안’이다. 그 분들에겐 내 살을 내 줄 각오 따윈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게다. 물론 그러니 당연히 내가 당할 수 있는 ‘일족일도’의 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일이 될 테고, ‘유일한 대안은 일족일도의 거리 안으로 들어가 상대의 목에 칼을 대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무책임하고 철딱서니 없고 무능하고 현실감 없는 공상가라며 상종도 하려 들지 않는다.

뭐... 그럴 거면 차라리 칼이나 칼집에 꽂아 놓던가. 그렇게 아예 칼 꽂아 놓고 상대가 방심했을 때 암기나 쓰면서 허를 찌르기라도 하던가... 맨날 목숨 걸고 싸우니, 반드시 막아내니, 총파업을 불사하니(한다는 말은 절대 안한다) 하며 유효타격 거리 밖에서 칼 뽑아 들고 칼춤은 잘도 춘다. 그 칼춤에 장단 맞추다 지치고 불신의 골이 회복될 수 없을 만큼 깊어진 노동자민중에게 “우리는 하고 싶으나 조합원들이 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 뒤로 잘도 몸을 숨긴다.

흠... 그런 거 보면 아예 ‘꽂아 칼’을 선언해 버린 아까 그 동지네 노조 집행부가 차라리 솔직하고 더 나은 건가?...

뭐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 분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이라고 경멸해마지 않는 그 짓거리가 가장 현실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임을 증명하며 묵묵히 일족일도의 거리로 걸어 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2011년 벽두부터 그 일족일도의 거리인 85호 크레인 위로 걸어 들어가 꼿꼿이 상대의 목에 칼 한 자루 들이대고 309일을 물러서지 않은 김진숙 동지.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투쟁하고 싸우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그렇게 말하던 이들이 가진 칼보다 말도 안 되게 왜소한 칼 한 자루였던 그녀가 309일 만에 크레인을 내려오며 짓던 미소를 보며, 또한 그녀와 함께 크레인을 끝까지 사수한 사수대 동지들을 보며, 그들은 사기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까나?...

물론 그녀의 미소 뒤엔 만신창이가 된 몸이 있다. 그렇게 내 준 살에 비해 상대에게서 취한 뼈가 설령 아직은 치명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무엇이 현실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현실적인 것인지 증명하기엔 충분하다.

2011년을 달구며 달린 희망버스. 희망버스가 그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시작일 수 있었던 이유는 공장 담벼락을 넘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저 일족일도 거리 밖인 공장 정문 앞에서 칼 뽑아 들고 칼춤만 추다 왔다면 ‘희망’이라는 수식어가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희망버스에 함께 하며 난 소위 ‘조직 노동자’인 동지들을 많이 만났다. 한결같이 하는 말들이 적당한 거리까지 접근한 후 액션 좀 취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을 기약하며 모두 퇴근’이라는 조직 노동운동진영의 투쟁방식에 절망하고 있었는데 이 희망버스는 그렇지 않아서... 소위 쇼부치지 않아서 희망을 보게 되고 자꾸 오게 된다고들 했었다.

앞서 말한 그 분들이 말하는 가장 비현실적인 대안. 그것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희망을 발견하고 있는 거다.

직장 내에서 상습적인 성폭력에 고통받아오다 그것을 말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그 부당함에 맞서 싸우겠다고 천막 하나 들고 서울로 올라와 길거리에서 농성을 시작할 때도 그들은 비현실적이라며 비웃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현대자동차라는 대자본. 하지만 그렇게 나의 모든 것을 던져 일족일도로 들어왔기에 그 피말리는 고통에도 국가인권위로부터 성폭력 사실을 인정받고, 국내 최초로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산업재해로 인정 받아낼 수 있었으며,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현대자동차라는 대자본을 움직여낼 수 있었다.

당연히 유효타격 거리로 들어가며 내주는 살이 사무치게 사무치게 아프다...

다시 공장 정문, 그 일족일도의 거리에 천막을 치고 저들과 마주선 쌍용자동차 동지들 가슴에 하나하나 묻어야 했던 열아홉 명 동지의 목숨.

해고라는 칼날을 휘두른 적들의 목전에 물러섬 없이 천막을 치고 거리를 뒹굴며 1천 5백일이라는 비현실적인 시간을 버티고 있는 재능교육 동지들. 숱한 용역깡패의 살인적인 폭력, 성폭력을 버텨내고 구청의 농성장 철거와 경찰의 침탈, 손배 가압류로 만신창이가 되고, 동지를 잃고, 엄동설한을 손바닥 만큼도 하늘 가릴 곳 없는 시청대로변에서 보낸 밤들.

얼마 전 재능지부장 유명자 동지의 어깨 통증 얘기를 듣고 아는 선배 병원에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어깨 높이 위로 팔을 들어올리지 못한 채, 그나마 그만큼도 들어 올리느라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있어야 했다.

용역깡패의 폭력에 맞섰다는 이유로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차가운 감방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동지들...

모두 너무나 아픈 살이다...

오늘도 길거리에선 수많은 사람들의 FTA 반대 투쟁 목소리가 뜨겁다. 그 목소리는 뜨거운데 어찌 된 일인지... 아직은 그 발이 저들을 타격할 간격 안으로 전혀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 ‘나는 꼼수다’라는 한 인터넷 방송이 엄청난 유행이란다. 그리고 그 방송의 이름을 건 콘서트에 10만이 모인다면 FTA를 막아낼 수 있다는 말까지 하더라. 서슬 퍼런 칼날 10만개 아니 100만개가 적을 향해 있다 해도, 그것이 유효타격 거리 밖에서 날을 번뜩이고 있다가 곱게 칼집으로 들어가 버리게 된다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이 현실을 바꿔낼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 보다 단 한 개의 칼날이라도 정말 적을 타격할 거리 안으로 날아갈 때 비로소 저들의 털끝이라도 건들 수 있을 게다. 그 인터넷 방송에서 가장 유행시킨 말이 “쫄지 마 쉬바”란다. 글쎄... 뭐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일족일도 밖에서 칼춤 추며 아직은 자족하는 것 이상으로는 도무지 보여지지 않는데 도대체 얼마나 쫄 일이 있다고 쫄지 말라고 그렇게 외쳐대는지... 허긴 그 방송을 이끄는 사람이야 뭐 어차피 궁극적으로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칼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적어도 진짜 쫄지 말자고 그렇게 스스로들에게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콘서트 자리에 10만을, 광화문에 100만을 모았다가 해 뜨면 이 체제의 흐름에 일제히 순응해 들어가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일단 칼들은 모이고 있다.

주말에, 밤에, 광장에 모이는 것. 아직은 그 유효타격 거리 밖에 멈춰서는 것을 넘어...

평일에, 낮에,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진정으로 이 체제의 흐름 자체를 멈춰 세워내려 할 때, 그렇게 전민중적 총파업을 조직하려 할 때, 그렇게 진짜 유효타격 거리로 칼을 들고 들어갈 때.

그 때 비로소 쫄지말자고 외치자. <노사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