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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16)
글쓴이 하르팔 브라르 E-mail send mail 번호 215
날짜 2011-03-03 조회수 2165 추천수 123
파일  1299125142_번역_레닌or트로.hwp

  













5부











5부










스페인 내전















“쏘련의 근로자들은 스페인의 혁명적 대중들에게 원조를 줄 때만 자신들의 의무를 충족시킬 수 있다. 파시스트 반동들의 박해로부터 스페인이 해방되는 것은 스페인 사람들의 사적인 대의가 아니라 모든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인류의 보편적 대의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스탈린










17장





인민전선의 형성과 전쟁의 경과















인민전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의 승리에 의해 나타난 30년대 초반의 새로운 조건들 속에서―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폐지함에 의해 자본주의를 보전하려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파시즘으로 독점자본주의가 돌진했던 조건 속에서―인민전선 전술이 국제적인 노동계급운동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인민전선 전술은 양면적이었다. 첫째로 그것은 민주주의를 방어하고, 평화를 보전하고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민주 정부를 획득하기 위하여 노동계급과 대중의 중간적 층과의 동맹을 건설하려고 했다. 둘째로 그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계급의 전체 부분과 중간층의 상당한 부분을 완전한 사회주의라는 강령으로 획득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전술이 분별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좌익’의 어떤 부분들 그리고 특히 뜨로츠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한 악의에 찬 탄핵의 주제였다. 이러한 어렵고 복잡한 투쟁노선은 뜨로츠키주의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들은 이미 만들어진 공식들과 죽은 교조의 위안 속에서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쉬운 해결책을 추구한다. 뜨로츠키주의에게는 인구의 중간층이 독점자본의 영향력 하에 포섭되는 것을 막는 것은 계급협조이다. 독점자본가들이 최고의 속도로 파시즘을 향해 질주하는 시도를 할 때 그들을 고립시키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계급협조이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은 반혁명적인 뜨로츠키주의에 따르면, 단지 계급협조의 사악한 사례일 뿐이다.





이 글의 중간에 뜨로츠키주의자들이 파시즘에 반대하는 스페인 공화국의 투쟁을 사보타지했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날 것이고 매 시기에 이 사보타지는 다음과 같은 초좌익적인 구호들의 발언을 수반했다: “부르주아지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동맹이 될 수 없다”, “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프랑코의 배후에서 대중을 일깨우는 충분한 동원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기타 등등. 구체적인 환경과 이 투쟁에 참가하는 계급세력들의 관계에 기초하여 특수한 혁명적 투쟁의 실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에는 어떤 사소한 주의도 이 사악한 신사에 의해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투쟁의 모든 구체적 문제는, ‘혁명적인’ 자기고립이라고만 불릴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공허한 빈말들의 홍수 밑에, 그리고 우익 백치병이 좌익 모험주의 헛소리와 뒤섞이고 그것들이 해결할 수 없게 뒤얽히는 정치적 입장 밑에, 묻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로츠키주의가 인민전선의 혁명적 성격을 평가하는 데 실패했지만, 제수이트들(대부르주아지이고 스페인 카돌릭 교회의 지주들이었던)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기관지인 <논쟁 El Debate>은 인민전선 전술을 채택한 ECCI의 7차 대회에 뒤이어 1935년 8월 4일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공산주의는 지금, 그것이 정부차원의 협조의 마스크로 위장하고 이 협조에 단순한 반역 이상의 어떤 것을 제공할 때에, 우리에게 한없이 위험한 것 이상으로 보인다.” (p. 189. 옐리네크에서 인용됨)















인민전선의 형성의 환경들










총파업과 1934년 말의 아스투리아스 봉기의 패배에 이어서 스페인 노동계급 운동은 지하로 내몰렸고, 30,000명의 노동자들이 스페인 감옥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페인 공산당의 주도 하에, 공산당, 사회당 그리고 좌익 공화주의자들 사이의 협정에 의해 노동자 전선이 인민전선으로 확대되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인민전선에 결합하려 하지 않았으나 마지막에는 정치적 죄수들을 풀어준다는 약속 때문에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그것을 지지하여 투표하도록 촉구했다. 그 결과, 반동의 대열 내에서의 점증하는 위기로 인해 1936년 2월의 보통선거가 치러졌을때, 인민전선의 승리를 낳았고 노동계급운동에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그때에 스페인의 뜨로츠키주의자들은 분파적인 반혁명적 집단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맑스주의 통일 노동자당’ (간단히 POUM)이라고 뻔뻔스럽게 불렀는데, 요아킨 마랭(Joaquin Maurin, 그는 일찍이 우익적인 민족주의적 이유 때문에 공산당을 떠났었다)과 1926-1927년 사이에 쏘련에서 뜨로츠키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안드레아스 닌(Andreas Nin)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 뜨로츠키주의자들은 뜨로츠키의 소위 제 4 인터내셔널보다는 페너 브로크웨이의 혁명적 사회주의를 위한 인터내셔널 뷰로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POUM의 뜨로츠키주의적 성격을 언제나 부정했지만, 모든 본질적인 점에서 그것은 뜨로츠키주의적이었는데―예를 들면 쏘련에 대한 태도에서, 인민전선에 대해서, 그리고 스페인 혁명의 문제들에 대해서 그러했다. POUM 내에는 뜨로츠키의 계시에 대해 완전히 지지하는 ‘볼세비키-레닌주의자들’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그룹이 있었다. POUM은 처음에 인민전선을 탄핵하였는데 이리하여 무정부주의자들과 무정부적-생디칼리스트들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인민전선 사상이 “그것 앞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자,” 결코 인민전선의 옹호자로 묘사될 수 없었던 브로크웨이씨의 적절한 표현을 빌면, POUM은 선거의 목적들을 위하여 동맹에 들어갔고 이익을 취하고 나자, 나중에는 인민전선을 탄핵함에 의해 ‘행동의 자유’로 되돌아갔다.















2월 선거 이후의 과제들










2월 선거 이후에 스페인 노동계급은 인민전선의 내부에서 그리고 외부에서 그들의 조직들을 건설하고 2월 선거로부터 떠오른 공화국 정부보다 더 왼쪽으로 향하는 정부를 위해 분투한다는 과제에 직면했다.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하여 공산당의 주도 하에 약간의 실제적 진전이 이루어졌다. 공산주의자의 영향력 하의 적색조합들이 UGT, 사회주의 노동조합연합으로 들어갔고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 청년이 단일한 조직을 형성했고,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연합 간의 관계들이 개선되었고 협상들이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 당들의 통일을 위해 열려졌다. 그리하여 그 나라를 통치하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서투른 시도들을 대중들이 경험하자마자 대중들이 오른쪽으로 돌아설 것이라고 희망했던 지배계급들의 전략을 좌절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지배계급들을 더욱 더 광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 대중들을 오른쪽보다는 왼쪽으로 몰아가고 있었고 공화주의 정부에 대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위한 조건들을 창출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봉건적 잔재들과 대(大)매판 부르주아지가 이 발전을 교살하기 위해 오만가지 모든 속임수를 쓴 이유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초-초-혁명적인 구호들로 위장하며 반동적인 전망을 제시하며 노동계급과 농민운동을 혼란시키는 뜨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POUM의 뜨로츠키주의자들은 예를 들면, 진보적 세력들의 통합의 과정을 방해하려고 모든 방면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 자발적인 운동을 조직하고 규율을 세우기 위한 모든 시도들을 그들은 반혁명적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미국의 뜨로츠키주의자인 펠릭스 모로우가 교회 방화와 같은 활동들의 승인을 표현한 내용이 있다:










“증오받는 성직자, ‘검은 2년’의 지배자들은 또한 피억압 농민들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졌다. 특히 정부가 성직자들을 손대지 않을 것임이 명확해진 후로 대중들은 문제를 스스로의 손으로 가져갔다. 이것은 교회를 불태우는 것뿐만 아니라 사제들에게 그들이 돌아올 경우 사형을 당할 것이라는 선고 하에 마을을 떠나도록 명령하는 것이었다. 정부에 대한 절망적인 충성으로 스탈린주의자들은 성직자에 반대하는 투쟁을 헐뜯었다: ‘교회와 수도원들에 불을 놓는 것은 반혁명에 대한 지지를 가져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인터내셔널 언론 통신, 1936년 8월 1일). 그들은 아자나1) 이상으로 전혀 듣지 못했다. 발렌시아 지방에서는 노동자들이 반혁명을 결정적으로 분쇄했는데 그곳에는 6월에 기능하고 있는 교회는 거의 없었다.” (펠릭스 모로우, ��스페인에서 혁명과 반혁명��, p. 40)










이러한 행동이 혁명적 전술과 공통점이 전혀 없다고 설명하는 공산당의 노력은 욕설을 먹었다. 그럼에도 스페인 노동자들이 마주하고 있던 가장 긴급한 문제들 중의 하나는 종교적 성향의 농민들이 인민전선을 지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교회 방화는 이 과제를 방해했다. 이 행동은 스페인 혁명의 대의에 너무 해로왔는데 반란 전에, 파시스트 그룹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비방할 목적으로 교회를 방화하는 현행범으로 잡혔었다.





파시스트들과 부르주아들의 도발의 또 하나의 방법은 모든 실현될 수 있는 성과들이 이루어진 뒤에 파업들을 연장함에 의해 노동자들을 지치게 하는 것이었다. 뜨로츠키주의자들은 파업참가자들의 피를 빼서 하얗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러한 행동에 즐겁게 참가했고 그 과정에서 정부를 공격하고, 두 개의 노조 연합 간에,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간에 분열을 야기할 것을 시도했다.





고용주 계급은 1921-1922년간에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 의해 시작된 것과 유사한, 노동계급 지도자들에 대한 살인 캠페인을 파시스트 조직들이 시작하도록 고무하는 것에 의해 파업물결과 농민 소요에 답하려 했다. 그러나 파시스트 무리들은 노동자들에게 최악의 짓을 했다. 정부는 파시스트 조직들을 진압했고 경찰에 대한 숙청의 과정을 진행했다. 그 동안에 파시스트들은, 선거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국가를 장악하는 기회를 잃어버리고서는, 군사적 쿠데타를 통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계획을 활발하게 세웠는데, 군사적 쿠데타는 스페인의 지배적 써클들과 외국의 제국주의의 완전한 지지를 받을 것이었다. 인민전선의 승리가 선언되자마자 계획들이 꾸며졌다. 프랑코, 바렐라 그리고 몰라 장군이 전략을 협의하기 위해 마드리드에서 만났다. 각각의 지방의 수도에서 군사령관이 포위공격을 선언하고 이 탈취 시도가가, 필요한 경우에 아프리카인 군대에 의해 지지될 것이었다. 프랑코와 바렐라는 스페인 밖에 위치하고 있었지만(바로 정부가 그들을 불신임했기 때문에), 몰라는 팜플로나에서 본국에 머물고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그는 군사적 음모자들을 모으고 조직할 수 있었다.





정부는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전달받았으나 그러나 순진하게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공산당 지도부로부터의 한 대표단이 수상이었던 카사레스 키로가에게 논박할 수 없는 음모의 증거를 가지고 갔다. 그러나 카사레스 키로가는 즉시 그들을 내쫓고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파시스트들을 본다고 주장했다.





장군들이 정부에 대해 비겁한 위선의 정책을 채택함에 따라 정부는 그들의 아첨에 속았다:










“마누엘 아자나가 1936년 5월에 공화국 수상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에게 그들의 존경을 표하고 지지를 서약한 사람들은 프랑코, 고데드, 가바넬스 그리고 키에포 데 라노 장군들과 아란다 대령 등이었는데, 그들 모두는 공화국에 반대하는 음모에 연루되어 있었다.”





“프랑코가 봉기 며칠 전에 공화국 정부의 전쟁장관(Minister of War)에게 보낸 편지는 이중성과 시치미떼기의 모델이었다: ‘군대가 공화국에 반대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배신자 장군은 썼다. ‘그들 자신의 음울한 열정으로 음모를 창안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여러분은 기만당하고 있다...’”





“그가 이것을 쓰고 있던 바로 그때에 프랑코는 음모에 연루된 다른 장군들에게 지시를 받고 보내고 하고 있었다. 그는 음모와 술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산도발과 아즈카라테, p. 24)










유사한 속임수가 몰라, 카파즈, 카바넬라스 장군들에 의해 그리고 아란다 대령에 의해 채택되었다: “6월 16일에, 몰라는 바테 장군에게 자신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틀 후에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 그리고 바테를 체포했다.” (앞의 책) 그는 또한 바테를 적당한 절차를 거쳐 사형시켰다.















전쟁










봉기 자체의 시작은 1936년 7월 18일 오전 5시에 스페인 전역에 걸쳐 동시적으로 실행되기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의 계획들이 멜릴라(스페인령 모로코의 가장 동쪽의 도시)의 군사령관인 로메랄레스 장군에게 누설되었기 때문에, 최초의 봉기는 더 빨리 일어났다. 장군은 이미 반란 장교들이 무기를 배분했던 군본부로 군대와 경찰을 급파했다. 약간의 야단법석 후에 반란자들에 의해 체포된 것은 로메랄레스 장군이었고 다른 방식이 아니었다. 반란자들은 전쟁 상태를 선언했고, 모로코의 총사령관 프랑코 장군의 이름으로 멜릴라의 모든 공공건물들을 점령했고 ... 공화주의자 혹은 좌익 그룹들의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멜릴라가 성급한 짓을 함에 따라 스페인령 모로코의 다른 두 지도적 도시인 테투안과 세타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본국의 봉기는 계획된 대로 7월 18일 오전 5시에 시작되었다.





군사적 봉기에 대한 유일한 가능한 반응은―아스투리아스가 보여준 대로―즉, 무장된 힘이었다. 아직 충성스러운 채로 남아 있던 군대의 1/3과 시민방위대는 별도로 하고 공화주의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인민이었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는 이러한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전에 진정으로 범죄적 방식으로 망설였던 소부르주아 정부였다. 산도발과 아즈카라테에 따르면(p. 27), “코룬나의 지도적인 시관리는 반란자들이 지방정부 관청을 공격하려 하고 있던 이러한 긴장 속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 한다, ‘우리가 인민을 지금 무장시키면, 누가 뒤에서 그들을 제어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화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예상되었던 대로 수상 카사레스 키로가와 의장 아자나는 무기를 인민에게 배분하는 것에 반대했고 3일이 지나서야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된 대중 시위들이 정부로 하여금 이러한 점을 포기하게 강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스페인 전역에 걸쳐 군대 주둔군들은 들고 일어났고 지방정부들이 중앙으로부터 무기를 분배하라는 허락없이는 무기를 분배하지 않음에 따라 어떤 효과적인 저항도 없었다. 그 3일 동안에 25개 이상의 주요한 도시들이 파시스트들에 의해 장악되었는데 7월 18일에 세빌, 카디즈, 알게시라스, 제레즈가 장악되었고 7월 19일에 오비에도, 부르고스, 자라고자, 후에스카, 자카, 팜플로나, 테루엘, 발라돌리드, 세고비아, 살라망카, 아빌라, 자모라, 팔렌시아, 카세레스, 알바세테, 마요르카, 이비자가 장악되었고 7월 20일에 코룬나, 비고, 폰테베드라, 레온, 코르도바가 장악되었다. 이 도시들의 얼마나 많은 수가, 인민이 무장했다면 구원될 수 있었겠는가! 사실, 도시들이 구원된 곳은, 동정적인 병사들이 인민에게 무기를 분배했기 때문에 혹은 무장된 지방의 시민군이 이전에 조직된 곳이기 때문에 인민이 무기를 이용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중요한 점은 이들 도시들은 노동계급운동이 강력했던 스페인의 대도시이면서 인구가 밀집된 산업중심지들을 포괄했다.















마드리드의 방어










이것은 산도발과 아즈카라테가 마드리드에서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p. 28-9):










“마드리드에서 가장 큰 파시스트적인 위험한 장소는 몬타나 병영이었다.”





“7월 19일 일요일에, 부대 병영이 제복과 무기들을 신속하게 수령한 낮선 사람들, 젊은 파시스트 민간인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 목격되었다. 정오에 파시스트 장군인 판줄이 역시 민간인 복장을 하고 도착했다.”





“저급한 연설을 한 후에, 판줄은 마드리드에서 전쟁 상태를 선포하는 선언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드리드 노동자들이 주의 깊게 군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관찰하고 있던 거리로 그의 부대를 감히 내보내지는 못했다.”





“노동자들의 그룹들이 ... 구석에, 나무들에, 그리고 낮은 담장 아래에 배치되었다. 병영은 포위되었다. 화난 군중들의 모습이 판줄로 하여금 그의 반란을 병영의 내부로 한정하는 신중한 전술을 채택하게 했다. ...”





“그동안에 인민은 공세로 넘어갔다. 무장한 시민군의 분견대들, 돌격대들, 시민방위대와 충성스런 부대들이 장대한 대담무쌍함과 영웅적 정신으로 게타페, 캄파멘토 그리고 비칼바로에 있는 병영들을 회득했다.”





“다음날 새벽에 몬타나 병영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 정오에 그 파시스트 요새의 정문이 무너졌다. 마드리드는 그 성채로 돌격했다.”










그리고 나서 파시스트들이 바깥으로부터 마드리드로 진격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옐리네크가 이것이 이루어진 것을 묘사한 것이 있다(p. 313-4).










“10,000명의 보병과 세고비아와 메디안으로부터의 중포병 그리고 레온과 로그로노로부터의 비행대대를 가지고, 몰라 장군은 마드리드를 향해 시에라와 구안다라마로 진격해 왔다. 대부대가 알토 데 레온으로 꾸준히 이동해왔는데, 그것은 세고비아에서 마드리드로 향하는 길을 바라보는 통로였다. 그 종대의 나머지는 길 로벨스가 전쟁상이었을 때 건축된 시멘트 참호를 향해 산개해왔다.”





“그리고나서 전체 내전 기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의 하나가 일어났다. 장교들이 없이, 거의 탄약도 없이, 아무런 통신도 명령도 없이, 노동자들이 택시에서 흘러나왔고, 자동차, 버스, 그리고 아무거나를 징발하여 현대적인 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시에라로 왔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신문 묶음으로 쌓여진 다이너마이트로만 무장하여 언덕으로 전진했다. 후에 그들은 몬타나 병영에서 발견된 소총을 지급받았다.”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알토 데 레온을 향해 쇄도했다. 그들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은 그들의 휴일 동안에 사실상 떠났다. 최초의 대열의 조직은 전적으로 마드리드의 집행위원회의 유일한 성원으로서 22살의 소녀였던 아우로라 아르나즈에 의해 수행되었다.”





“거친 열정으로―그리고 거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닌―최초의 대열은 통로들로 폭풍우처럼 밀려들어갔고 알토 데 레온을 제외하고는 그것들 모두를 지켰다. 심지어 여기에서조차 적들은 저지당했다. ...”















제 5연대










물론, 파시스트들의 전진에 저항하고 파시스트들이 장악했던 지역을 다시 찾기 위하여 보다 항구적인 기초 위에서 조직하는 것이 지금 필요했다. 이것은 정부가 자신의 군대 중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겨우 1/3인 때에 두려운 과제였다. 하나의 연대―제 “5의” 연대, 그것은 인민의 공화국 군대가 기초하는 모델이 되는 것이었다―를 세우는 데서 주도성을 발휘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제 5 연대는 1936년 7월에 마드리드의 한 수도원, 프랑코스 로드리게스의 살레지안 수도원의 마당에서 형성되었다. 마드리드의 인민은 올바르게 조직되고 규율잡힌다면 그들의 노력이 훨씬 얼마나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는지를 마드리드의 방어에서 발생한 자발적인 싸움의 과정에서 스스로 관찰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제 5 연대에 합류하기 위하여 병영들로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그들은 직업적인 방식으로 군사적으로 조직하고 그 병사들을 올바르게 훈련시키고 무장시키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라는 것을 보았다. 모든 제 5연대 단위는 쏘비에트 군대처럼 정치위원이 있었다. 그들의 기능은 새로운 종류의 규율을 단련시키는 것이었다―부과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그리고 그리하여 훨씬 더 효과적인.





제 5연대에 적용된 조직화의 방법들은 점차적으로 명백히 성공적인 것으로 입증되어서 그것들은 새로운 단위(혼합 여단들)로 확산되었고 그리고 나서 전체 인민의 군대에 확대되었다. 군대를 조직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방법들의 성공은 공산주의자들의 위대한 친구가 결코 아니었던 부르주아 역사가 E.H.카의 칭찬에 의해 입증된다:










“쏘비에트 활동의 최초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장은 군대의 재조직화였다. 전쟁의 발발 이래로 PCE(스페인 공산당)는 통합된 ‘인민의 군대’를 형성하기 위하여 예전의 정규 군대의 살아남은 단위들과 노동자들의 의용군의 융합을 위한 캠페인을 했다. 그러나 1936년 말에 쏘비에트의 조언자들의 도착과 국제 여단들의 형성 이전에는 거의 달성된 것이 없었다. 통합의 공식은 국제여단들에서 유추된, 예전의 군대와 의용군의 대대로 구성되는 ‘혼합 여단들’의 창출에서 발견되었다. 국제여단에 도입된 정치위원들의 설치가 혼합여단들로 확대되었고 그리고 나서 새로운 인민 군대의 전체로 확대되었다. 그 설치가 쏘비에트 모델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그것에서 우세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위원들의 집단은 강력한 그룹이 되었는데 군사적 사안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군대의 관리와 전면적인 쏘비에트 통제의 수립을 향하고 있었다. 군사적 효율성이라는 단일한 목표가 추구되었다: 이것은 또한 이 당시의 쏘비에트와 코민테른의 정책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데올로기가 호소되었다면, 그것은 영웅주의의 그것이었지 혁명의 그것이 아니었다.”





“공화국의 전투력에 있어서 이 조치들의 유익한 효과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공화국의 인민 군대의 힘과 사기는 이런 것이었는데,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들에 의해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해 퍼부어진 결정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공화주의자들은 쉽게 승리를 거둘 수도 있었다. 타마메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p.263-4).










“... 시에라의 전투들은 의용군으로 조직된 공화국의 인민의 부대들이 정규군대와 팔랑헤주의자들과 카를주의자 의용군과 같은 그것의 보조적인 지지자들을 견제하기에 충분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 동일한 부대들이 중포병과 모로코인들, 독일인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의 지원을 또한 받았을 때는 그것은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우리가 보게 되듯이 프랑코의 부대들과 장비는 끊임없이 국제적인 파시즘에 의해 새로 보충되고 있었지만 반면에 공화국의 노력은 특히 히틀러에게 양보한다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 제국주의에 의해 끊임없이 침식되고 있었다.















파시스트의 전진들










파시스트들의 첫 번째 주요한 목표는 마드리드를 공격하기 위해 아프리카인 부대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들의 전체적인 전략은 가능한 한 빨리 마드리드를 획득하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일단 마드리가 함락되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인 부대들을 마드리드 지역으로 데려오는 것은 하나의 문제였다. 해협을 지키는 스페인 해군이 충성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에 바다를 통해서는 데려올 수 없었다.





휴 토마스는 해군의 충성심이 확보된 수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p.242-3):










“파란많은 7월 19일 새벽에 순양함인 리베르타드와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가 엘 페롤로부터 남쪽을 향해 항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군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는 것을 막으려 하는 정부에 의해 급파되었었다. 나중에 유일하게 항해에 적합한 스페인 전투함, 자이메 I(에스파나는 엘 페롤에서 수리 중에 있었다)이 또한 비고를 떠나 남쪽을 향했다. 모든 선박들에서, 카디즈에서 무어인들의 화물을 이미 하선시켰던 구축함 추루카에서, 그리고 카르타제나에 있는 모든 군함에서 똑같은 혁명적 사건들이 멜리나로부터 전날에 파견되었던 3척의 구축함들에서처럼 발생하였다. 즉, 그들의 사령관들에게가 아니라 그들에게 전해진 마드리드에 있는 해군본부로부터의 라디오 메시지들에 의해 자극받은 사람들이 충성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장교들을 압도하고 감옥에 넣고 많은 경우들에는 사살했다. 가장 폭력적인 전투들은 장교들이 해양 한가운데에서 배의 승무원에게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했던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에서 일어났다. (지휘권을 장악한 배의 승무원의 위원회가 질문한―시체들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관한 간결한 질문에 대해―해군본부는 답변했다: ‘존경스런 장엄함으로 시체들을 배밖으로 내릴 것’).”










1936년 7월 22일에 스페인의 파시스트들은 히틀러와 무쏠리니에게 도움을 구걸했다. 두 사람은 프랑코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려고 하는 것 이상이었다. 7월 27일에 11대의 사보이아 수송기들이 이탈리아로부터 모로코에 도착했고 28일에 20대의 융커 수송기들이 급하게 날조된 스페인-모로코 수송회사에 의해 지시를 받은 민간항공기로 위장하여 독일로부터 도착했다. 이 비행기들은 14,000명을 그들의 모든 장비와 함께 해협을 건너 스페인 본국으로 데려오는데 사용되었다.





공화국의 전쟁노력에 대한 계획적인 사보타지의 행동으로, 미국의 석유회사들은 연료의 재주입을 허락받지 못했던 공화국의 배들에게 공급을 하는 것을 보류했다. 이런 방식으로 스페인 함대를 침식함에 의해, 해협은 매우 빨리 파시스트들에게 열렸고, 그들이 아프리카 부대의 나머지를 바다를 통해, 독일의 구축함 도이칠란트에 의해 경계되는 호위를 받고 1936년 8월의 최초의 날들 동안에 수송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들 부대의 알제시라스에서의 상륙은 이번에는 지부롤터로부터 영국의 전함들이 그 부대의 상륙에 대해 스페인 공군이 폭격하는 것을 방해했던 것에 의해 촉진되었다.





아프리카 부대들은 상륙하자마자 북부로 쇄도했다. 전쟁의 나머지 동안에 방해받지 않는 통과를 위해 그들은 연안과 마드리드 사이의 공화국이 점령하고 있던 지대를 장악해야만 했다. 그들은 매우 빨리 전진했고 알멘드랄레조를 8월 7일에, 에리다를 8일에, 그리고 바다조즈를 15일에 장악했다. 바다조즈에서는 그들은 격렬한 저항을 만났고, 그들은 그곳을 장악하고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투우장에 둘러세우고 살육함에 의해 복수―전체 전쟁에서 가장 유혈의 잔악행위들 중의 하나―를 하게 될 수 있기까지 중대한 사상자를 내야 했다.





파시스트 군대는 8월 20일에 북부로 계속 진격했다.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p. 375):










“모든 혁명적 집단들은 마치에서 농장들의 점유들이 많은 싸움없이 붕괴된 후에 형성되었다. 비록 그 붕괴 후에 많은 살인이 뒤따랐지만.”










이것은, 혹자가 혁명을 돌본다면 전쟁은 스스로를 돌본다는 뜨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된 믿음의 견지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당신들이 그들을 방어하는 당신 수중에 있는 수단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혁명적 성과들을 얻는다는 것의 요점은 무엇인가?





파시스트들에게 지역적인 공중 통제권을 주었던 이탈리아 전투기들에 의해 도움을 받으면서, 아프리카 군대는 톨레도에 대한 공격 그리고 거기서부터 마드리드로 향하는 공격을 시작하기에 좋은 위치였던 탈레베라 데 라 레이나를 9월 3일에 점령했다. 톨레도는 공화국의 포위공격 하에 있었는데 그러나 아프리카 부대들은 그 포위공격을 9월 27일에 걷어냈고 그 때 파시스트들은 톨레도의 통제를 장악했다.





1936년 9월에 공화주의자들은 아라곤에서 공세에 들어갔다. 공화주의자 부대들은 카탈로니아에서 인상적인 많은 승리들을 거두었고 카탈로니아 전체를 공화국 편으로 공고화 한 후에 맹위를 떨쳤다. 그들은 압도적으로 보였다. 카탈로니아로부터 그들은 아라곤으로 진격했고 그들이 멈추기 전까지 영토의 절반을 재획득할 수 있었다. 타마레스의 견해로는, 추진력을 상실한 이유는 후위에 있었다.










“그 후위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노력을 실천하지 못했다. 마드리드가 식량이 부족했던 반면에 바르셀로나에서는 사람들이 마치 전쟁이 진행되지 않고 있는 듯이 살고 있었다. 생산은 무정부주의적 집단화로 인해 감소하고 있었다. CNT-FAL은 사람들이 극히 중요한 공헌을 했던 아라곤 지역에서 진격을 촉진하는 대신에, 혁명을 만드는 것에 그리고 콘세조 데 아라곤과 같은 존재들을 창출함에 의해 공화국의 권력을 침식하는 것에 바치고 있었다.”





“아라곤에서 진격의 붕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명백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과 해방적인 혁명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무정부주의자들은 POUM에 의해 고무되어서 전체적으로 이해하지를 못했다.





이 사실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전쟁이 다른 어떤 진격에 대한 사전 조건으로서 먼저 승리가 획득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산당에게 명백해진 후로, 공산당으로 하여금 무정부주의자들과 뜨로츠키주의자들과 충돌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다음을 요구했다:





―인민전선 정부에게 완전한 권력을





―스스로를 내전에서 입증했던 그러한 장교들로 구성되는 통합되고 단일한 명령 하의 인민의 정규 군대의 형성





동시에 공산당은 모범적인 군대의 핵으로서 제 5연대의 건설에 들어갔다.





이 계획은 POUM, 무정부주의자들 그리고 심지어 일부 좌익적 사회주의자들의 측에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스페인에서 반파시스트 투쟁의 가장 슬픈 측면들의 하나는 정부의 무장 부대들의 당 민병대들로의 분할―그 경쟁관계와 시기심들이 직접적으로 불필요한 군사적 패주를 초래했다―에 기인한 인명의 범죄적인 손실이었다.





다음은 내전의 초기 단계들에서 후에스코 바깥에서 한 독일인 관찰자가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후에스코 외부에는 카탈란 의용군, 시민방위대로부터 나온 약간의 백인대들, 그리고 POUM으로부터의 다른 사람들, FAI의 대대들과 그들 다음으로 통일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이 모든 그룹들에는 용감한 전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지도자들은 정반대로 올바른 전술의 의견에 반대했다. 조화롭게 행동했다면 의용군은 후에스코를 압도했을 것이다. 각 개별적 그룹들은 분리되어 작전을 했고 분리되어 패배를 당했다.”





“사회주의자 그룹은 결합된 작전 계획을 제출했으나 이웃하는 대대들은 이것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음 며칠 내에 여러분은 일어나서 후에스코에서 검은 색과 붉은 색의 깃발들을 발견할 것이다.” (피터 마틴, ��죽음과 탄생 사이에서의 스페인��, 캠벨 p.352에서 인용됨)










당시 클라리다드를 통제하고 있던 좌익 사회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통일된 명령체계를 갖춘 인민 군대에 대한 요구를 맞이했다:










“실제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혁명적 행동을 통제하고 있는 사람들 대신에 또 하나의 유형의 군대로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혁명적 의미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앞의 책, p.353)










얼마 후에 POUM은 통일된 군대와 통합된 명령체계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대는 그들의 관점에서는 인민의 군대가 아니라 노동자의 군대였다! 그것은 공화국 정부나 혹은 카탈로니아 정부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노동자들의 조직들로부터 선출된 군사 위원회에 종속되어야 했다. 그동안에 POUM은 마드리드 정부와 바르셀로나 정부(이 두 곳에서는 1936년 9월 이후 노동자들의 대표가 다수였다)에 반대하는 가장 사악한 선전을 하였는데 인민의 군대를 건설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이런 군대의 병사들은 “효과적으로 그들의 뒷꿈치를 딱 하고 붙이고서는 히틀러와 무쏠리니를 위해 행동하거나 죽는, 머리없는 자동기계”와 같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가장 유능한 병사들과, 대중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당들과 노동조합들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통일된 명령체계를 위한 공산주의자의 제안은 “노동자의 군대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를 직업적인 군사전문가에게 넘기는”것에 상응한다고 말했다.





논쟁이 발생하고 있는 동안에, 프랑코는 연전연승했고 반면에 모든 종류의 무정부주의적 실험들이 카탈로니아 산업에서 수행되었는데 파시즘에 대한 승리를 위한 두 개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필수적 조건 즉, 인민군대의 창출과 강력한 군수산업의 발전은 무시되고 있었다.





경제적 전선에서 공산당은 주요한 산업들이 국가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소규모 상점들 혹은 작업장들을 국유화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옹호했다. 나아가 이러한 국가 통제는 주요 산업들을 군수생산을 위해 전환시키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옹호했다. 실제적 상황은 대부분의 공장들이 노동조합들의 위원회들의 수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공장들 간에는 상호 협력이 없었다. 이들 조합통제의 기업들에서 벌어들인 이윤은 조합기금으로 들어갔다. 많은 경우들에서 공장들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전쟁을 위한 탄약들을 만들 수 있었던 때에 보다 이윤이 남는다는 이유 때문에 계속하여 목욕통과 유모차 같은 품목들을 만들었다. 이런 수치스런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 POUM은 정부가 고의적으로 아라곤 전선에 대한 무기 공급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명을 질렀다. 사실은, POUM이 카탈론 산업들을 아라곤 전선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는 것으로의 전환을 방해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지지하고 있었다. 국가에 의한 대규모 산업을 통제하려는 각각의 시도는 노동자의 통제를 청산하고 혁명의 성과들을 취소하고 자본가계급을 복귀시키려는 시도로 매도되었다.





다양한 조직들의 각각의 결정에 의거하지 않고 기능할 수 있는 완전한 권력들을 가진, 노동계급의 모든 조직들을 대표하는 인민의 정부에 대한 공산당의 요구를, POUM은 다음과 같이 매도했다:










“각료들이 그들 각각의 조직들에 책임이 없는 독재적 권력들을 가진 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간단히 말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조적인 혁명적 본능을 분쇄하려는 모든 노력을 지도할 강력한 정부” (라 바탈라, 1936년 12월 16일, 앞의 책에서 인용됨, p.356).










공공의 질서의 문제에서 공산당은, 6월 반란 동안에 파시스트들을 다루는 그들의 고유한 임무을 수행하고 나서, 라 파테렐라스에서의 대량학살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매우 멋대로의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던 노동자 순찰대를 해산함에 의해 정부통제하의 경찰력을 재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이 마을의 농민들은 강제된 농업집단화에 대한 저항의 과정에서 두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을 사살했다. 주요하게 무정부주의자들로 구성된 순찰대가 바르셀로나로부터 도착했고 잔인한 복수로써 마을 사람들 절반을 죽였다. 이런 불법행위를 억누르기 위한 요구가 올라왔고 POUM은 선언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이러한 공세는 성공할 수 없고 앞으로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 (앞의 책, p. 357)










이렇게 POUM이 지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1) 정부로부터 독립된 군대 그리고





(2) 내전에 의해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로서 정부로부터 독립된 경찰력





농민 전선에 대해 POUM은 공산당의 요구와 파시즘에 반대하는 공화국의 싸움의 이익에 반대되게 강제적인 집단화의 정책을 옹호했다―이리하여 식량공급을 위험하게 했다.















정부로부터 POUM의 배제










앞서 말한 것의 견지에서, 스페인 인민을 단결시키기 위해 필요한 정책에 대한 POUM의 사보타지가 깨지지 않았다면, 프랑코에 반대하는 투쟁의 조직은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POUM의 이러한 사보타지를 종식시키기 위한 첫 번째의 전제조건은 그들을 정부로부터 배제하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밤낮으로 정부의 모든 결정을 반혁명적이라고 탄핵하는 당을 어떻게 정부에 참여시킬 수 있겠는가? 비극적이면서도 어릿광대극인 이러한 상황은 정부로부터 POUM의 추방을 요구함에 의해 위기를 촉진시킨 카탈로니아의 통일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 당에 의해 종식되었다. 첨예한 내부투쟁 후에 이것은 동의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뜨로츠키주의자들과 그들의 친구들에 의해 노동계급의 통일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탄핵되었다. 반대로 그것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공화국의 방어에서 정부에 의한 단호한 행동을 방해하기만 했던 허위의 통일 대신에, 공화주의적인 스페인에서 통일된 정책의 채택의 시작을 기록했다.















마드리드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두 번째의 공격










그리고나서 마드리드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두 번째 공격은 1936년 11월의 첫 번째 주에 시작되었다. 25,000명의 부대들이 마드리드로부터 15마일 떨어진 곳에 집결했고 몰라에 의해 지휘되는 부대들은 4일에 제타페 공항을 점령했다. 모든 사람들이 마드리드의 함락은 단지 절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11월 8일에 쏘비에트 대사 이반 마이스키가 런던에서 윈스턴 처칠을 만났다. 처칠은 프랑코의 지지자였는데 그리고 그와 마이스키는 마이스키가 자연스레 공화국을 지지함에 따라 약간 열띠게 되었다. “왜 논쟁하는가?” 처칠이 말했다.










“일주일 안에 이런 불일치하는 스페인 문제는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다. ... 프랑코는 2,3일 안에 마드리드에 있을 것이다. 누가 나중에 스페인 공화국을 기억조차 하겠는가?”










마드리드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주요한 공세는 야구에 장군으로부터 아프리카인 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막 인수한 바렐라 장군에 의해 지휘되었다. 마드리드를 공격하는 데에 있어서 약간의 지체가 위대한 10월 혁명에 대한 반동적인 도전의 제스처로서 11월 7일에 마드리드를 취하고자 하는 파시스트들의 바람에 의해 야기되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게 되듯이 다시금 승리한 것은 위대한 10월 혁명이었다.





소부르주아적이었던 공화국 정부는, 자신들이 철수했었던 발렌시아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전쟁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길이라고 결정했다. 이리하여 마드리드의 방어를 조직하는 것이 투사들―특히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통일 사회주의자 청년―에게 남겨졌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기쁘게 할 필요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그들은 임무를 뛰어나게 수행했다. 11월 6/7일의 밤에 그들은 미아자 장군 아래에서 준타 데 데펜사(Junta de Defensa)를 형성했다. 이것은 급하게 조직된 것이었지만, 마드리드의 인민은 그의 지도력 하에, “어깨를 걸고 하나의 거대한 장애물을 형성하였고 행진하여 시 주위의 참호 속에 자리를 잡았다.”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베르덩이 될 것이다!’ ‘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공산당은 선언했고 이 구호는 시를 구하기 위해 그들의 목숨을 바친, 생업에 종사하던 남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파시스트들은 통과하지 못했다” (산도발과 아즈카라테 p. 72-3)










독일 폭격기들에 의한 집중적인 항공폭격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를 점령하지 못한 그들의 무능력에 충격받고 낙담하여서 파시스트들은 그 특수한 문제를 당분간 제쳐두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더 많은 인원과 물자를 필요로 한다고 우선 결정하고는 다시금 물자를 요구하기 위해 그들의 이탈리아와 독일인 보급장교들에게 되돌아갔다. 독일 대사는 그의 정부에게 이때에 “군사적 상황은 만족스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 수행된 군사 작전들은 모로코인 부대와 외인부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 부대들은 비록 그들이 어찌해서 수도를 점령한다 할지라도 마드리드에 의해 지쳐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알렸다.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는 프랑코에 대한 그들의 군사적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1936년 12월과 1937년 3월 사이에 이탈리아인들은 100,000명의 새로운 부대들(70,000명의 이탈리아인들과 30,000명의 무어인들)을 스페인으로 배로 실어날랐고 독일인들은 6,000명의 보병과 279대의 전투 항공기, 180대의 탱크 그리고 다수의 지원 포병들로 구성된 특별히 형성된 콘도르 연대를 보냈다.















말라가










새로운 이탈리아 부대들은 말라가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공격에서 최초로 배치되었다(무정부주의적 모험주의가 시 행정에서 혼란을 야기하여 그것을 방어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파시스트들에 의해 선택되었다). 말라가는 1937년 2월 9일에, 15,000명의 이탈리아인, 10,000명의 독일인, 5,000명의 스페인의 외국 외인부대들로 구성된 군대에 함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가의 함락은 공산당이 만들고 있던 것, 공화국 군대들이 비효율적이라는 것, 필요로 되었던 것은 단일한 지휘와 통합된 군대라는 것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요구를 지지하는 거대한 시위가 2월 14일에 발렌시아에서 발생했고 정부는, 공산당이 너무 지나치게 영향력이 있다는, 정부의 ‘존경할 만한’ 소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요구와 전쟁의 필요에 응답을 해야만 했다.















자라마










그동안에 파시스트들은 당분간 마드리드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공격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두 도시들(마드리드와 발렌시아―역자) 간의 보급선을 끊어버리기 위해 발렌시아를 향하기로 결정했다.





탱크들, 자동소총들 그리고 콘도르 연대의 전투기들의 지원을 받는 주요하게는 아프리카인들인 40,000명의 부대들이 1937년 2월 5일에 마드리드와 발렌시아 간의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자라마 강을 건널 것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2월 15일까지, 그들은 새롭게 재조직된 공화국 군대(정규군대와 인민의용군의 혼합여단들), 14와 15 국제여단들 그리고 스페인에 막 도착했던 40대의 쏘비에트 전투기들―모스카스와 카토스: 수에 있어서 독일 비행기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술적으로는 우월한―의 지원에 의해 퇴각해야만 했다.





자라마 전투에서 양측은 중대한 손실을 당했으나(각측에서 10,000명으로 산정된다) 그러나 공화국의 승리는 새로 형성된 인민군대가 비록 형편없이 훈련되고 장비도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지속된 직업적 군대에 맞서 공개된 전투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필요한 모든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영향 덕분으로 제공되었던 올바른 조직화와 올바른 규율이었다.















구아달라자라










자라마의 승리는 무쏠리니의 ‘지원군’―50,000만의 보병, 222대의 대포, 108대의 탱크, 32대의 장갑차와 80대의 전투기들의 부대―에 맞선 구아달라자라에서의 또 하나의 찬란한 승리에 의해 이어졌다. 이탈리아인들은 자라마가 전형적으로 스페인인의 무능력 때문에 프랑코주의자들로 인해 패배했다고 생각했고 “스페인과 세계의 나머지 나라에 그들의 힘과 전략적인 지혜를 과시하겠다”고 결정했고 “1937년 3월에 이탈리아인의 원정부대는 ... 마드리드에 대한 네 번째의 공격을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구아달라자라를 통해서였다. 사람과 무기에서 그들의 남아도는 자원에 의존하여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그들이 마드리드를 장악할 것이고 공화국을 금명간에 파멸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산도발과 아즈카라테, p. 78)





그렇지만 파멸한 것은 이탈리아인들이었다. 전투는 3월 8일부터 21일까지 지속되었는데 그때 이탈리아 사단들은 방향을 돌려야만 했다. 이타리아인들은 8,000명을 손실했고(3,000명의 사망, 1,000명의 포로, 4,000명의 부상) 방대한 양의 무기와 비축물을 잃었다.















북부










마드리드를 포위하고 패배시키려는 그들의 시도들에서 심각하게 상처를 입고, 파시스트들은 다음으로 북부로 방향을 돌려서 1937년 4월 1일에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바스크인들은 내전의 시작 이후로 그들의 염원인 자치를 마침내 얻었고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완강한 공화주의자였다. 그러나 많은 요인들이 북부 전선을 약화시켰다:





1. 프랑스 경제로의 접근(그리하여 프랑스를 통한 공급에의 접근)은 파시스트들이 장악하고 있던 이룬(1936년 9월 5일에)에 의해 그리고 산 세바스티안(1936년 9월 13일)에 의해 차단당했다.





2. 북부지역은 세 구역의 반자치적인 주들로서 이루어져 있었다―바스크 지역, 아수투리아스 그리고 산타데르 지역. 그들 간에는 실질적으로 상호 협력이 없었고 그들은 그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 방어물들을 이용하는 데 실패했다.





3. 그 지역에는 효과적인 공화국 군대가 없었다. 바스크인들은 바스크 영역을 제외하고는 싸우기를 거부했다.





4. 산도발과 아즈카라데(p. 107)에 따르면, “불행하게도 민족주의 당의 지도부의 정책은 전사들의 노력, 희생 그리고 영웅주의를 끌어낼 가치가 없었다. 민족주의 당은 바스크 정부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의 최우선의 바람은 바스크 지역에, 공화국 영역의 나머지에 이미 일어났던 민주적 변화들의 도입을 막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민 군대를 형성할 것을 거부했다. 노동자들은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이익을 얻지 못했다. 바스크 정부는, 바스크의 자유의 계속적인 존재가 위험에 처해 있던 때에조차 전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 지역의 산업적인 잠재력을 가동하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5. 파시스트들은 해상봉쇄를 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물자들이 바다를 통해 도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공화주의자들이 직면한 모든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북부의 획득은 결코 식은 죽 먹기가 아니었고 1937년 4월 20일에 민간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한 노력으로써 집중 폭격을 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게르니카에 대한 잘 알려진 폭격은 독일 비행기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1654명이 죽었고 889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7,000명 인구의 이 도시는 바쁜 장날에 폭격을 당했다. 이틀 후에 게르니카는 두랑고가 그랬듯이 파시스트들의 지상 부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4월 30일에 이탈리아 부대들이 베르메오로 입성했다.





공화국의 나머지는 그 자신이 파시스트로부터뿐만 아니라 또한 (카탈로니아에서) POUM으로부터의 항상적인 위협 하에 있어서 돕기 위해 거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들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압도적인 무력에도 불구하고 북부의 인민은 영웅적인 방어의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프랑코의 구축함 에스파나를 침몰시켰고 그들은 베르메오를 포위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들은 심한 전투를 통해 빌바오를 향하여 무자비하게 전진했다. 빌바오에서는 부분적으로는 바스크 정부 측의 열정의 결여로 인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빌바오인들의 산타데르로의 대규모 이동으로 인해 마드리드를 방어했던 것과 같은 준타 데 데펜사를 조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아무 것도 조직되지 않았고 심지어 파시스트들의 전진을 방해하기 위해 다리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는 것조차 없었다. 또한 바스크인들은 철광산들 혹은 제철소들을 사보타지하여 그것들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말라가의 오류들이 되풀이 되었다. 6월 중순에 빌바오는 함락되었고 독일인들은 제철소를 장악하기 위해 쇄도해 들어왔다. 8월 26일에 산타데르가 함락되었다. 최종적으로, 스페인의 다른 부분들에서 저항을 조직하려는 공화국 측의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욘이 10월 21엘 함락되었고 그리하여 공화국의 북부 지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럼에도 많은 전사들이 산으로 달아나서 거기서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는 오랜 기간의 지속적인 게릴라 공세를 유지했다는 것이 언급되어야 한다.















POUM의 폭동










파시스트들이 북부에서 공화국의 요새들을 파괴하고 있는 동안에, POUM은 공화국의 배후에서 사보타지에 대한 노력을 배가하고 있었다. 카탈로니아 정부로부터 자신들이 배제되자, POUM은 폭동을 위한 준비들을 시작했다. 폭동은 반파시스트 인민부대들의 저항을 해체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고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었다.  POUM의 확대된 중앙위원회는 기관지인 ��라 바탈라��에 1936년 12월 16일에 계속하여 발간된 긴 결의에서, 존재하는 정부를 타도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정부와 나란히 이중 권력의 기관들을 창출하는 것을 요구했다. 다른 말로 하면, POUM은 프랑코가 여전히 전진하고 있고 전투들에서 승리하고 있던 바로 그 때에 인민 부대들의 진영에서 내전의 상황의 창출을 옹호했던 것이다! 그것의 결의에서 POUM은 공화국 정부 하에 인민군대와 경찰력의 창설을 위한 모든 시도를 반대하는 그리고 (물론) 사회주의의 이름 하에 카탈로니아 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에 저항하는 정책에 대한 위장막으로서 ‘혁명적인’ 그리고 초좌익적인 미사여구를 멋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정부가 파시즘에 반대하는 승리적인 싸움을 위해 꼭 필요했던 이러한 목표들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전진함에 따라, POUM은 날마다 그리고 훨씬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들 조치들을 “혁명의 성과들을” 제거하고 프랑코와 이해의 일치에 도달하기 위해 외국으로 달아난 자본가들과 지주들을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탄핵했다. POUM의 정부에 반대하는 봉기에 대한 요구들은 더욱 빈번해졌고 뚜렷해졌다. 1937년 3월 22일에 ��라 바탈라��는 말했다:










“이것 때문에 우리 당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길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단계의 끝에 도달하게 하고 권력의 정복을 통한 노동자들의 그리고 농민들의 정부를 설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혁명적인 노동자의 전선. ...”










4월에 안드레아스 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잃어버릴 시간이 없다. 우리가 권력의 부르주아적 기구의 재건을 더욱 더 수동적으로 지켜보고 있다면, 스페인의 노동계급은 그것의 해방을 위해 주어진 가장 특별한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너무 늦을 것이다. 우리는 쇠가 뜨거울 때 두드려야 한다.”










5월 1일에 닌은 ��라 바탈라��의 한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노동계급은 그것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묶고 있는 끈을 잘라내야만 하고 결정적으로 권력의 정복을 위한 길을 취해야 한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내일이면 너무 늦을 것이다.”










안드라데는 라 바탈라의 같은 호에서 선언했다:










“혁명적인 노동계급 조직들은 그들의 완전한 경제적 및 정치적 독립성을 다시 획득해야만 한다. 그들은 정치적 무대에서 소부르주아지 및 개량주의의 분파들과 모든 종류의 혼란된 협력을 포기해야만 한다.”










1937년 5월 1일에 ��라 바탈라��에서 또 다른 호소는 말했다:










“이틀 동안에 노동계급은 경계를 시작했다. 공장들과 작업장들의 사람들이 개량주의자들의 연약하고 비뚤어진 정책에 의해 위험에 처해 있는 혁명의 안녕에 대해 밤낮으로 지키고 있다. 그들은 통제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고 미끼가 아니다. 그들은 후위를 지키고 있는 의식적인 보초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총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인내심이 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기력한 타협들에 기초하여 형성된 마분지 정부들의 측에서의 많은 연약함에 싫증이 났다. ... 우리는 이제부터 경계를 계속할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발렌시아와 카탈로니아 정부들의 절름발이 정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타협들의 정책. 노동계급에 반대하는 정책. 혁명에 브레이크를 거는 정책. 7월 19일에 내팽겨쳐진 부르주아지의 새로운 봉기를 지향하는 정책.”










5월 1일에 우리는 또한 이 최후의 선언을 발견한다:










“카탈로니아 혹은 다른 전선들에서 상이한 위치에 임명되었던 인민의 군사학교에 속하는 우리 당의 모든 성원들은 집행군사위원회로, 집행위원회의 본부인 람블라 에스타디오스로 보고를 할 것을 진지하게 요구받고 있다.”










5월 2일에 라 바탈라는 말했다:










“그것은 더 이상 즉각적인 요구들을 획득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 그 임무는 상이하다. 그것은 모든 노동자들에 의한 권력의 장악이다.”










또한 5월 2일에 ��라 바탈라��는 POUM 집행위원회의 성명서를 인쇄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정부측의 CNT와 현재 충돌하고 있고 다음과 같은 구호를 제기한 무정부주의 그룹들의 하나와 일치하고 있다: ‘모든 권력을 노동계급에게. 모든 경제적 권력을 노동조합들에게.’”










바로 앞선 인용에서 언급된 그 무정부주의 그룹은 파시스트 요원들에 의해 부패되었고 CNT 자체에 의해 나중에 단호하게 거부된 소위 ‘두라티의 친구들’이었다. 폭동 정책에 대한 무정부주의 조합들의 지지를 얻는 것에 실패하고서는 POUM은 그것을 분열시키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937년 5월 3일에 POUM이 요구해왔던 반란이 발생했다.





4월 25일부터 5월 1일까지의 정세는 매우 긴장되어서 카탈로니아의 정부는 모든 메이데이 시위들을 금지했다. POUM은 그것의 대변인 닌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이 금지에 대해 반응했다:










“노동계급은 자신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묶고 있는 끈을 끊어내야만 하고 결정적으로 권력 장악의 길를 취해야 한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내일은 너무 늦을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란에 대한 선동들을 읽고서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정부가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반란을 분쇄하기 위해 행동을 취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멈추게하기 위해 충분히 일찍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시스트들의 앞잡이들은 그들의 원하던 갈등을 얻었다.





무정부주의 노동조합 CNT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있어서 POUM의 실패는 반란이 빨리 패배하는 것을 운명지웠지만, POUM은 그것을 계속했다―두 개의 극단적인 무정부주의 조직들, ‘두라티의 친구들’과 ‘무정부주의자 청년’과 더불어서―그리하여 목적없는 유혈의 상황을 연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파시스트들의 앞잡이들은 POUM과 무정부주의 극단주의자들의 조직들의 안과 밖에서 그들의 가장 큰 그리고 가장 눈부신 사보타지의 행동을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그들은 분쇄되었다. 폭동을 수행할 목적으로 뜨로츠키주의 POUM과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자들은 그들의 부대들을 아라곤 전선으로부터 철수시켰기 때문에 후자는 파시스트의 압력이라는 상황에서 약화되었다.















배후를 깨끗이 하기










스페인 인민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배후를 깨끗이 하는 것의 필요성을 이제 확신하게 되었다. 통제할 수 없는 POUM과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해 그렇게 오랫동안 인내해왔던 라르고 카발레로의 중앙정부는 무너지고,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인민의 힘들을 집중시킬 능력이 있고 그럴 의향이 있는 정부에 의해 대체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그러한 사업을 단호하게 시작했다. 그것은 무정부주의자의 ‘순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믿을 수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통제하는 책임있는 경찰로 그들을 대체했다. 강제적 집단화와 농민층에 대한 징발들, 소규모 상점에 대한 간섭, 통화 밀수, 전선과 별개의 정치적 그룹들을 위한 무기의 수입이 중단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혁명의 가치를 손상시키고 그것의 통일과 목적을 침식했던 분별없고 비정상적인 과도함이 종식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설득을 힘으로써 보충함이 없이는 이러한 과도함이 종식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앞잡이들이거나 혹은 무정부상태의 지속에 이해를 가졌던 사람들은 호되게 다루어져야만 했다. 그것은 뒤죽박죽의 경쟁적 위원회들의 그룹들 하에 있는 대신에 하나의 권위 하에 배후를 확보하는 과정, 모든 이용가능한 자원들의 조직화를 파시즘에 반대하는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하나의 통제 하에 보장―스페인 혁명이 당시 직면하고 있는 이 가장 고귀한 과제들―하는 과정이었는데 그것은 이후로 뜨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부르주아지의 대리인들에 의해 ‘스페인에서의 테러’라고 묘사되었다. 이 신사들은 POUM의 뜨로츠키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들이 그들의 오류에 찬 정책, 방해, 사보타지 그리고 직접적인 도발에 의해 매우 크고 부끄러운 공헌을 했던 프랑코의 승리에 의해 해방된 파시즘의 테러를 언급하는 것을 ‘잊는다’.















첩자들 그리고 요원들 앞잡이들










깨끗이 하는 작업의 과정에서 스페인 경찰은 마드리드에 있는 페루 대사관을 급습했다. 거기에서 그것은 총참모부 본부, 군사적 의료 기관, 전쟁성의 정보기관들, 나말의 반공중 방어국과 공군성 그리고 많은 정부조직들에 있는 요원들과 접촉하고 있는 잘 조직된 파시스트 간첩 그룹에 대한 상세한 것을 발견했다. 이 조직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서류들 중의 하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배후의 운동을 위한 우리 세력들의 그룹화는 어느 정도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400명에 의지하고 있다. 이들은 잘 무장되어 있고 마드리드 전선에서 좋은 위치에 있다. 우리 사람들의 극단주의 무정부주의자들과 POUM에 대한 침투는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우리는 더 안전하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하여 우리 자신들과는 독립적으로 이 작업을 수행할 좋은 선전가 우두머리를 필요로 한다.”





“...당신의 지시를 완수하기 위해 나는 POUM의 지도적 성원을 인터뷰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직접 갔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지시한 것 모두를 말했다. 당신과 그 사이의 소통의 결여는 방송국의 파괴에 의해 설명되는데 방송국은 내가 거기에 있는 동안에 다시 기능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근본적인 문제에 관하여 답을 틀림없이 받게 될 것이다. N은 특히 당신과 외국의 친구들에게 요구하기를 그와 소통하는 것을 지시받는 사람은 나 자신만으로 한정하고 그리고 이외의 사람은 배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POUM의 작업을 수행할 새로운 사람을 마드리드로 보낼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재강화되면 POUM은 바르셀로나에서처럼 우리의 운동을 위한 확고하고 효과적인 지원이 될 것이다.”










위에서 인용된 서류에서 언급된 ‘N’은 POUM의 지도자인 안드레아스 닌에 다름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체포되었는데 나중에 군사복장으로 위장한 파시스트들에 의해 구조되었는데 그들은 당국이 새롭고 완전한 그들의 범죄들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을 막으려는 희망에서 이 조치에 호소했던 것이다.





10월 23일에 바르셀로나 경찰서장, 서장 보좌 부릴로 대령은 카탈로니아에서 유사한 POUM의 음모의 발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언론의 대표들에게 했다.















스페인 밖에서 뜨로츠키주의자들










스페인 밖에서 뜨로츠키주의자들과 뜨로츠키주의에 가까운 조직들의 활동은 스페인 내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같은 정신으로 그리고 같은 목표를 위하여 수행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공화국 정부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결정적인 공세를 예상하고 있었던 1937년 10월과 12월 사이의 달들에, 뜨로츠키주의자들이 인민의 정부에 반대하는 공격들을 배가한 것이 우연적으로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뜨로츠키 자신이 쏘련에 대한 첨예한 탄핵을 들고 나왔는데, 이것은 친프랑코 제국주의 언론과 우익 사회주의 신문에서 가장 광범하게 보도되었다. 뜨로츠키는 말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국제적 공세로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에 반대하는 국제적 공세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한, 스탈린주의의 중앙들의 하나는 물론, 스페인에서 인민의 정부였다.










“지금은 완전히 타락한, 그것의 국제적인 고용인들과 연계되어 있는 모스크바 관료주의가 어떤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를 스페인에서 최근의 달들에서의 사건들이 드러내었다.”





“소위 공화국 정부가 스탈린주의의 범죄적 무리들을 위한 차단막으로서 봉사하고 있는 스페인에서 GPU는 전체회의의 지령들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좋은 활동무대를 발견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국제적 공세로 넘어갈 때이다”. 1937년 11월)










프랑코의 공세와 동시에 일어났던, 스페인 공화국에 반대하는 뜨로츠키주의의 얼뜨기들의 국제적 공세―이런 것이 지역적 그리고 국제적 파시즘에 반대하는 스페인 인민의 투쟁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있어서 뜨로츠키주의의 공헌이었다. 스페인의 경험은 단지 뜨로츠키주의의 반혁명적 친파시즘적 성격에 관한 쏘련의 경험을 확증했다.















브루네테










공화국의 부대들은 1937년 6일과 26일 사이에 마드리드의 동부인 브루네테에서 파시스트들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공세의 목표는 부분적으로는 북부전선에 대한 압력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부분적으로는 마드리드 바깥의 바렐라의 부대들을 포위하고 에워싸는 것이었다. 이 공격에서 공화국은 처음에는 브루네테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7월 25일에 콘도르 연대가 북부전선으로부터 돌아와서 중대한 재보충을 얻은 후에, 프랑코주의자들은 브루네테를 다시 되찾았다. 그 전투는 23,000명의 공화국의 손실과 파시스트 측에서 13,000명이 넘는 손실로 끝났다. 공세는 파시스트 전선을 분쇄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성과물들은 쌓아지거나 이어지지 않았다. 바스크인들은 그들이 얻었던 중간휴식을 활용하여 전선을 다시 건설할 수 없었다.





유사한 공세가 아라곤 전선의 벨치테에서 1937년 9월에 시작되었고 유사한 결과들을 낳았다. 벨치테는 9월 6일에 공화국 부대들에게 함락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몇 달동안 유지했다.















테루엘










공화주의자들은 테루엘에 대한 다음 공세를 개시하기 위해 12월까지 기다렸다. 100,000명의 부대들이, 마드리드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구아달라자라에서 파시스트 부대들의 결집을 분열시킬 목적으로, 테루엘을 재획득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1937년 12월 15일에 공화주의자들은 테루엘을 에워쌌다. 매우 추운 기상 조건 속에서 그리고 프랑코주의자들로부터의 대응공격(이것은 마드리드에 대한 저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분산시켰다)을 분쇄하면서 공화주의자들은 매우 큰 어려움 속에서 마침내 1월 8일에 테루엘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금 독일과 이탈리아가 프랑코를 구원하러 왔다:










“ ... 살라망카에서 독일인 대사인 폰 스토러는 히틀러에게 프랑코가 외국의 원조에서 커다란 증가가 없이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고 하는 전보를 보냈다. 그리고 그리하여 서구 열강들이 스페인 인민이 교살당하고 있던 비개입의 올가미를 조이고 있던 동안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다시금 프랑코에게 보내는 전쟁 물자의 교부와 전체적인 군사 단위들의 분견대를  증가시켰다. 이것은 그로하여금 큰 공세를 조직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 2월 22일에 그는 테루엘을 다시 획득했다. 3월 9일에 항공기, 포병 그리고 다른 장비에서 그의 압도적인 우세 덕분으로 그는 동부전선에서 돌파에 성공했고 지중해를 향하여 전진하기 시작했다.”










4월 15일에 적은 지중해 연안의 비나로즈에 도달했고 공화국의 영역을 둘로 나누었다. 그러나 에브로 강이 파시스트들과 카탈로니아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세그레 강이 그들과 발렌시아의 사이에 놓여 있어서, 공화주의자들은 여전히 파시스트들을 퇴각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테루엘에서의 패배는 공화국의 소부르주아 지지자들의 일정한 부분의 사기를 꺽었다. 예를 들면 인민의 군대의 능력들에 대해 회의적(혹은 신경질적)이었던 사회주의자 전쟁장관인 인달레시오 프리에토는 공공연히 패배주의자가 되었고 직책에서 제거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인민은 항복을 위한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한가지 점을 들면,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그들이 항복한다면 프랑코가 어떻게 자신들을 다룰지 충분히 보여주었고 그래서 누구나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1938년 4월 20일에 공화국 정부는 상대편에게 평화제안―보복없이 전쟁을 끝내는 길을 위해 13가지 점의 강령―에 대해 협의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 제안이 받아들여지려면 정부가 프랑코에게 계속 싸우는 것의 무익함을 확신시키기 위해, 그에게 더 많은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38년 7월 25일에 공화주의자들은 카탈로니아 남부로 향하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고요한 밤에 에브로를 가로지르는 공세를 다시 계속했다. 파시스트들은 중포병에서는 12대 1, 폭격기에서는 15대 1, 그리고 전투기에서는 10대 1로써 공화주의자들을 앞서는 훨씬 우월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자들은 장대한 승리를 얻었고 세달 동안 그들의 성과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동안에 히틀러와 챔벌레인은 뮈니히에서(1938년 9월 29-30일) 회담을 했는데 잘 알려진 대로 챔벌레인은 히틀러에게 그의 제국주의 경쟁자들로부터 즉각적인 어떤 위험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그의 침략을 가속화하도록 고무되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예를 들면 그가 단호한 태도를 취할 수 있고 프랑스 영국은 그를 제지하기 위해 손가락도 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10월 30일에 스페인 파시스트들은 에브로의 공화국 군대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는데 공화국 군대는 11월 18일까지 에브로를 가로질러 후퇴해야만 했다. 휴 토마스에 따르면 공화국은 그 싸움에서 70,000명의 손실을 보았는데―30,000명의 사망, 20,000명의 투옥―국제여단들에 남아 있는 성원들의 3/4을 포괄했다. 파시스트들의 손실 또한 33,000명에 달했다.










번역: 편집부





카탈로니아의 함락










에브로에서의 패배와 독일 파시스트들이 스페인에서 그들의 장점을 활용하여 강력해짐으로인해, 카탈로니아가 함락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프랑스인들은 카탈로니아가 물자의 부족으로 고통받도록 하기 위해 1938년 6월 12일에 국경을 봉쇄했다. 쏘비에트 정부에 의해 제공된 비행기들, 500문의 대포 그리고 10,000정의 자동소총이 프랑스에 묶여 있었다. 프랑코는 340,000명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의 동맹자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되는 풍부한 무기가 있었다.










“1938년 11월과 12월 내내 이탈리아와 독일의 호위함들은 끊임없이 프랑코의 영역에 있는 항구들에 도착하여 수천명의 부대들과 군사적 기술자들 그리고 수천 톤의 전쟁 물자들을 가져왔다.” (산도발과 아즈카라테 p. 127)










우리 편은 단지 형편없는 장비의 120,000명이 있었는데 그들 중 불과 37,000명만이 소총을 갖고 있었다.





카탈로니아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공격은 1938년 12월 23일에 시작되었다. 공화국 군대의  영웅적인 싸움 덕분으로 전진은 지체되었으나 억제될 수는 없었다. 타라고나가 1939년 1월 14일에 함락되었다. 정부는 바르셀로나에서 게로나로 이동했다. 바르셀로나가 1월 26일에 함락되었다. 카탈로니아가 함락되고나자 영국 정부는 프랑코 정권을 스페인의 합법적인 정부로서 재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의 목적은 전쟁이 끝났을 때 스페인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 프랑코와 좋은 관계들을 유지하는 것(to keep in Franco's good books)이었다.





카탈로니아의 함락 후에 공화국의 저항은 산산조각이 났다. 정부에서 비공산주의자들은 항복에 동의함에 의해 스스로를 구제하려고 시도했다. 반면에 공산주의자들은 버티는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남아 있는 공화국의 영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 700,000명의 공화국 부대가 있었고 또 어느 때인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전환될 수 있는 매우 변덕스러운 국제정세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얼마동안 꾸물거렸는데―부분적으로는 패배주의 때문에, 그러나 또한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는 공산주의를 의미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에서의 행동을 통하여 얻은 위신이 이러한 것이었는데, 그리고 그들은 공산주의를 싸울 가치가 있는 어떤 것으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대로 돌아섰다. 싸움은 인민전선의 이전의 동맹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항복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얼마 동안 프랑코와 접촉했던 사회주의자 지도자인 카사도는 모든 공산주의자들을 그들의 군사적 직책에서 제거했다. 12,000명의 공산주의자들이 감옥에 쳐넣어졌고 많은 수가 적절한 경과를 거쳐 프랑코에게 인도되었다. 이 지점에서 전쟁은 패배한 것이었다.





1939년 3월 28일 화요일에 파시스트들은 마드리드에 입성했고 3월 30일까지 스페인의 전역이 함락되었다.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교수대의 끔찍한 평화, 새벽녘의 발사분대들, 심문자의 고문들, 공산주의자들―그렇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 그리고 또한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절멸.





“피의 급류가, 2년 8개월 동안 밝게 타올랐던, 세계를 비추고 인민들 사이에서 저항의 정신을 연마시켰던 영웅주의의 횃불을 꺼버렸다.” (산도발과 아즈카라테, p. 147)















비개입










마지막으로 비개입에 대한 몇 마디가 필요하다. 스페인 내전은 제 2차 대전을 위한 총연습이었다는 것이 평가되어야만 한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부분적으로는 지중해에 대한 통제의 목적에서 스페인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군사적 야심들을 가진 제국주의 열강에게 매력적인 자산으로 되게 했던 광물 자원들 때문에 스페인에 이해를 갖고 있었다. 더구나 스페인의 광물적 부는 압도적으로 영국의 소유였고, 영국이 독일이 빼앗을 필요가 있었던 제국주의 경쟁자였기 때문에, 영국에게서 스페인에 대한 영향력을 박탈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개입은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화된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공격하는, 그들 나라들의 파시스트 정권들에 의해 취해진 최초의 조치들 중의 하나였다. 후자(영국과 프랑스―역자)는 약화되어서 그들의 도전자들의 광포한 힘에 맞서 싸울 정도로 예민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정책은 히틀러를 설득하여 우선적으로 쏘련을 공격하도록 하고 그리하여 두 측면의 그들의 적들을 약화시키고 그들을 상황의 통제에 내버려 두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스탈린과 CPSU((쏘련 공산당―편집자)은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이해가 놓여 있는 곳을 충분히 평가하고 무엇보다도 이들 계획들을 좌절시키고 그리고 가능한 한 쏘련을 전쟁에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틀림없이 쏘련과 같은 강력한 적에 맞서서, 심지어는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서 어떤 전쟁이라도 하기 위해, 히틀러와 무쏠리니는 주요한 전쟁행위의 발발 이전에, 할 수 있는 한 사람과 물자의 공급을 확보하고 많은 자원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페인은 많은 인구와 전쟁을 위해 동원될 수 있는 가치있는 자원들을 가진, 매우 식욕을 돋우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이 파시스트 장교들의 반란의 시작부터 히틀러와 무쏠리니가 철저하게 지원한 이유이다. 친절함과 이해에 의해 히틀러가 쏘련을 먼저 공격하도록 설득될 수 있다는 희망에 마비되어서 영국과 프랑스는 파시스트들의 적수들을 지원하는 명백한 조치를 취하는 데 실패했다. 그들은 심지어 고의로 파시스트들의 적수들을 사보타지했는데 이것은 베를린과 로마에서 커다란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쏘련은 파시스트 하이에나들의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적이고 그것도 강력한 적이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쏘련의 동맹들은 유럽의 평화를 사랑하는 노동계급들과 농민 대중들이었는데 그들은 제국주의 강도들이 전리품을 나누는 방식에 혹은 그 전리품을 재분할하기 위한 전쟁에서 죽어가는 데 사소한 이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것이 쏘련이 충심으로 스페인 인민들의 대의를 지원한 이유인데, 이것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연기시키려 열망하고 있던 독일과의 전쟁에 사실상 끌려들어갈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한 이유이다. 스페인 인민은 쏘련이라는 진정한 친구를 갖고 있었는데 쏘련은 스페인 인민의 대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그리고 모든 제국주의 열강의 기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는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스탈린이 1936년 10월 15일에 조즈 디아즈에게 보낸 전보에서 말했듯이:










“쏘련의 근로자는 그들이 스페인의 혁명적인 대중들에게 도움을 줄 때만 그들의 의무를 다할 수 있다. 스페인의 파시스트 반동들의 박해로부터의 해방은 스페인 사람들의 사적인 대의가 아니라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대의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우애의 인사를 보낸다.”










우리가 보았듯이 파시스트들이 스페인에서 승리했지만, 그것은 단지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인들에 의한 공화국의 노력에 대한 사보타지에 의해 도움을 받고 부추겨진 이탈리아와 독일로부터 받은 대규모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이 사보타지는 스페인에서 그들의 계급형제들과 자매들에게 가해지고 있던 침략을 온순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평화에 호소함에 의해 보통 사람들을 동원하려 했던 ‘비개입 위원회’(런던 위원회)라는 부정직한 전선을 통한 것과 조화되었다. 미국의 역사가 F.J. 테일러가 지적하고 있듯이 미국, 프랑스 그리고 영국은 “추축국과 협력자들”이었고 이리하여 “현대에서  자유에 반대하는 가장 검은 범죄들의 하나”를 저질렀다.





국제법에 따른다면, 내전이 발생하면 모든 비전투 나라들은 관련된 나라의 합법적 정부에게 공급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독일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이 반란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만큼을 공급했던 반면에 ‘비개입’이라는 위장을 통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의 합법정부에 대한 물자의 공급에 대해 엠바고를 지켰다.





이론적으로는 비개입은 비개입협정을 제안한 1936년 8월 6일에 취해진 프랑스의 사회민주주의적 인민전선정부(교활한 기회주의자 레온 블룸을 영수로 하는)의 주도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협정은 27개의 유럽의 국가들에 의해 서명되었는데 그들은 스페인의 분쟁에서 어느 한쪽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무기를 보내지 않는 것에 동의했다. 가맹국 가운데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가 보았듯이 그리고 나중에 명백하게 되었듯이 그것을 도대체 지킬 의향이 없었다. 그것은 쏘련에 의해서도 서명되었는데 뜨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반혁명분자들로부터 배신이라는 비명들의 예상할 수 있는 합창을 유발한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쏘련은 이 협정을 통해 스페인에서 그들의 개입을 중단하도록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게 압력을 가하고, 혹은 다른 나라들을 동원하여 협정에 대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위반에 대해 맞서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에서 서명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 가능성들의 어느 것도 현실화되지 않았고, 3달 안에 전체 협정이 시작부터 끝까지 협잡이라는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에, 쏘련은 런던 위원회에 대한 몇 차례의 경고 후에 그것으로부터 철수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1936년 10월 7일과 23일에 런던 위원회로 쏘련이 보낸 공식적 편지들에 의해 입증된다.





이것들 중 최초의 것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쏘련 정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인 스페인 정부에 반대하는 반란자들에게 주어지는 군사적 원조를 감추려 의도하는 위장막으로, 비개입협정이 어떤 부분들에 의해 변형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쏘련 정부는 이들 위반들이 즉각적으로 멈추지 않는다면 ‘비개입협정’으로부터 결과하는 어떤 의무로부터도 쏘련이 자유롭게 될 것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두 번째의 것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쏘련 정부는 그 협정에 대한 다른 부분들의 누구보다도 더 큰 정도로 비개입 협정에 의해 묶여 있다고 느낄 수 없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쏘비에트 정부는 공화주의자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사람들로부터(스페인으로 약 35,000명을 보낸 국제여단을 통하여) 그 자신 군대의 군사적 조언자들까지, 무기와 식량까지 공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쏘비에트 인민은 그들이 스페인 인민에게 준 무조건적인 지원으로부터 이익을 보았다. 왜냐하면 확실히 파시스트 군대들과 싸우기 위해 그리고 거대한 우열의 차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 공산주의적 방법으로 조직되었을 때, 스페인 인민의 영웅주의는 히틀러에게 영국과 프랑스가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공산주의 국가와 맞서는 것은 좋은 계획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데 있어서 유효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페인 인민의 영웅주의는 유럽에서 파시즘의 궁극적인 패배에서 중요한 요인이었다. (5부 끝) <노사과연>






1) 편집자 주 : 마누엘 아자나(Manuel Azana), 1936년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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