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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15)
글쓴이 하르팔 브라르 E-mail send mail 번호 208
날짜 2011-01-22 조회수 2037 추천수 131
파일  1295694108_tro.hwp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











번역:편집부 















5부










스페인 내전















“쏘련의 근로자들은 스페인의 혁명적 대중들에게 원조를 줄 때만 자신들의 의무를 충족시킬 수 있다. 파시스트 반동들의 박해로부터 스페인이 해방되는 것은 스페인 사람들의 사적인 대의가 아니라 모든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인류의 보편적 대의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스탈린















16장















스페인 내전의 배경















스페인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상황










약 두 세기 동안 스페인 인민은 스페인을 현대적 세계로 만들기 위해 봉건적인 지주제도의 억압에 반대하여 저항해왔지만, 봉건적 지주들은 부르주아지의 상승과 자본주의의 발전을 억눌렀고, 따라서 노동계급의 발전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억압했다. 때문에 스페인 경제는 현대 세계와 관련하여 볼 때 점점 더 후진적으로 되었고 부르주아 혁명이 완수된 나라들과의 경쟁에 직면하여 더욱 더 무력해졌다. 그 결과로 스페인 인민의 상황은 꾸준하게 상대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저하하였다. 이것이 프랭크 옐리네크가 1930년대의 상황을 묘사한 방식이다:










“스페인은 배고픔의 나라이다: 주요하게는 순전한 육체적 배고픔의 그러나 또한 땅에 대한 배고픔의.”





“땅에 사는 거의 70%의 인구는 거의 땅 한 조각도 소유하지 못했다. 인구의 65%는 땅의 6.3%만을 가졌고 반면에 인구의 4%가 60%를 가졌다. ...”





“ ... 메디나첼리 공작은 79,146 헥타아르를 소유했지만 250만의 갈리시아 농민들은 2백 9십만 헥타아르를 소유했다.” (p. 33)





“무어인들이 지상의 낙원이라고 여겼고 심혈을 기울여 경작했던 이 땅에서 ... 총 경작 면적은 2천 2백만 헥타아르이고 경작되지 않은 면적은 2천 4백만이었다. ...”





“이러한 괴물같은 낭비의 원인들은 스페인의 지배 계급들의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산림벌채, 경지의 초원으로의 전환, 그리고 농업용 토지의 목초지로의 전환, 울타리치기, 부재지주, 믿을 수 없이 낮은 급료로 인한 강력한 국내 시장의 결여, 처음에는 농업과 가축 사육의 이해 간의 투쟁, 그리고는 농업주의와 산업 간의 투쟁이 결합되어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다.” (앞의 책, p. 34)










1930년대까지는, 스페인의 부르주아 혁명의 문제는 스페인 인민에게는 거의 보편적인 의제였지만 그것에는 강력한 적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 무엇보다도 물론, 대규모의 강력한 귀족적 토지소유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카톨릭 교회―특히 제수이트들―를 포함하고 있었다. 귀족계급은 그들이 농민층에 대해 휘두르는 권력(이 영향력은 카시키스모―caciquismo―라고 알려져 있다)을 통하여 그들이 원하는 어떠한 선거결과라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국가기구에 대한 확고한 통제를 확보할 수 있었고 교회는 어린이들의 모든 교육을 실질적으로 통제했고 스페인 인민에 대해 강력한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밀-가축(농업주의)과 직물-강철(산업) 간의 투쟁은 심대한 사회적 및 정치적 효과들이 있었다. 농산물 가격의 저하와 임금의 상승은 국내 시장을 강화함에 의해 산업에 유리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산업의 추진 속에서 권력을 향해 성장하고 스스로를 위해 팽창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젖히기 위해 대부르주아지의 승리들을 이용하는 소부르주아적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운동들을 강화할 것이었다. 이리하여 봉건적 토지재분배론자들(agrarians)은 나라를 가능한 한 곤궁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였고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전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앞의 책, p. 35)





“스페인 정치를 거의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토지재분배론자들은 그들이 16세기에 산업을 분쇄했던 것 만큼이나 쉽게 산업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해 싸울 수 있었다.” (앞의 책, p.36)










다양한 외국의 제국주의 나라들은 스페인에서 광산 그리고 심지어 국가 전화서비스 같은 이권들을 얻었고 그들은 또한 그들의 투자에 어떤 위협도 없게 하기 위해서 스페인을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국가로 유지하는 데 이해가 있었다. 프랭크 옐리네크는 다음을 지적한다(p.278):










“토착적 스페인 산업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외국의 이해들과의 경쟁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리오 틴토 관리부(영국회사)가 반복하여 자신의 주주들에게 불평했듯이, 혁명적 분위기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여분의 가치(plus-value)가 자본의 수출에 의해 중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정확히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라고 말해두자.





진보를 필사적으로 열망했던 사람들에게는―무엇보다도 그들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비참함과 가난 속에서 스페인의 후진성에 정면으로 맞선 노동계급과 농민 대중들에게는, 뿐만 아니라 민족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의 보다 정력적이고 용감한 요소들에게는, 특히 바스크 지역과 카탈로니아의 산업적으로 발달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이 강철같은 속박이 느슨하게 풀릴 것이라는 희망이 거의 없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고 실패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마침내 상황이 변화할 것이라는 표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백히 스페인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그들의 생활의 가혹함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그들이 보았던 사람들에 반대하여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의 민족 부르주아지 또한 전형적으로 우유부단한 방식으로 자신의 가일층의 발전을 위한 조건들을 창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1930년대까지 노동계급은 수적으로 약했고 엥겔스에 의해 「작업 중인 바꾸닌주의자들」에서 묘사되고 설명되었듯이, 스페인에서 매우 퍼져있었던 소부르주아적 무정부주의적 관념들을 흡수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쏘련의 10월 혁명에 의해 그 충격이 앙양된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력 하에서, 스페인 노동계급은 조심스런 방식으로 독립적인 노동계급 당과 독립적인 노동계급 노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조심스런 시작으로부터, 스페인 공산주의는 스페인 내전의 발발까지는 고려에 넣어야 하는 세력이 되었고 전쟁을 통하여 그들의 힘은 공화국 정치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스페인 노동계급의 성장과 정치적 성숙은 사회적 변화를 위하여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동시에 희망없는 경제의 쇠락과 스페인 사회의 부패는, 노동계급이 1차 세계대전에 이어지는 정세에 대한 레이몬드 카에 의한 다음의 묘사에서 명확한 것처럼 혁명을 위한 훌륭한 학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장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생필품의 결핍을 초래했지만 이러한 곤궁은 전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회의 구조적 결함을 은폐했다. 그러나 1914-1918년의 전쟁으로 초래된 번영은 사회의 구조적 결함을 폭로했다. 중립적 세력으로 스페인은 1915년부터 1918년까지 벼락치기 이윤들과 가격에서 깜짝 놀랄 만한 상승을 경험했다. 카탈란(직물) 공장들은 프랑스 병사들에게 공급을 하였고 값싼 웰시 석탄이 사라진 것은 아스투리안 석탄지대에서 열병같은 활동들을 자극했다. ...”





“틀림없이 이러한 활동의 많은 부분은 건전한 팽창보다 빠른 이윤들을 의미했다. ... 스페인의 전시 번영의 현실적 비밀은 우선적 생산물들을 위한 거래 조건의 반전이었고 스페인의 직물이 강요하는 높은 가격들이었다. ... 그리하여 그것은 사업의 약진에서보다는 페세타(스페인의 통화단위―역자)의 가격에서 반영되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국가의 그리고 철도의 빚의 본국송환을 가능하게 했고 대은행들의 권력의 성장을 촉진했다.”





“전쟁 특수와 극적인 가격 상승은 모든 노동관계들을 동요시켰다. 임금들이 빠른 속도로 상승했는데 특히 아수투리안 광산들에서 그리고 카탈로니아와 산업적인 북부에서 미숙련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 그러나 일부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에서 전혀 얻은 것이 없었고 ... 그리고 이는 추정컨대 고용주들이 막대한 ‘투기적인’ 이윤들을 얻고 있을 때에 그러했다. 이러한 상황들은 전쟁이 스페인을 의회적 방법들에 의해 통치할 수 없게 만들고 있던 때에 조직된 노동의 빠른 성장에 유리했다.” (p. 497-499)





전쟁과 가격 상승이 사회적 불만을 초래했다면, 전쟁의 종말은 천배나 모순들을 강화시켰다:





“유럽 시장의 전후(戰後) 모순은 스페인에 위기를 가져왔다. 변경의 아스투리안 광산들은 폐쇄되었다. 해운에서 거대한 증가를 초래했던 전쟁의 종말은 화물운송률이 떨어짐에 따라 그에 상응하여 거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많은 회사들이 호경기에 건조된 선박들의 비용에 의해 불구가 된 자신들을 발견했다. 배들이 놀려졌으며 빌바오 조선소는 일이 없었다. 새로운 강철 공장들은 그것들의 생산물들에 대한 수요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변경의 토지를 경작했던 토지소유자들은 그것을 다시 잡목과 목초지로 되돌리는 것을 허용했다. 농업의 불완전 취업은 도시에서의 실업을 악화시켰다.”





“그리하여 떨어지는 가격들과 실업이 1919-1923년의 혁명적 파업들의 배후에 있었다. ...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만약 노조들을 깨지 않는다면, 노조들이 고용주들을 사업을 못하게 몰아낼 요구들을 들이대며 자신들을 깰 것이라고 주장했다.” (p. 509)










군대가 파업들을 유혈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919-1925년부터 카가 노동전쟁이라 이름붙인 것이 잇따라 일어났는데, 그것은 주요한 파업들에 의해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과 경찰 사이에서 가두 투쟁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뿐만 아니라 양측에서 정치적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들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 유권자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더욱 더 분노할수록, ‘안전한’ 선거 결과를 보증하는 카시키스모(caciquismo)의 능력은 의심받게 되었다. 지배계급들은 의회 민주주의가 중지되어야만 한다고 느꼈고,  1923년에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 하의 군사 독재를 성립시킨 군사적 쿠데타(그것에 대해 스페인의 ‘헌법적’ 군주인 알폰소 8세는 묵인하였다)에 의해 의회 민주주의는 중지되었다.





군사정권의 수립은 말할 필요없이 문제들을 개선하지 못했다. 군대는 그 사상이 장교단의 모든 털구멍에 스며들었던 봉건적 귀족계급의 호주머니에 전적으로 있었다. 군사 독재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은 견식이 없었다. 그는 대중들을 억압하기 위해 매우 비이성적이고 불필요하게 반동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이들 조치들은 소부르주아적인 카탈란 민족주의 운동의 진압, 배심원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 그리고 언론의 자유 같은 모든 민주적 권리들에 대한 억압, 그리고 대대적인 박해, 투옥 그리고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지도자들의 추방을 포함했다. 갈등이 점점 더 첨예해짐에 따라 지배계급들은 군사독재가 상황을 호전시키기 보다 더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았고 그들의 특권과 권력을 구하기 위한 다른 어떤 방식에 대해 생각하려고 시도하면서 프리모 데 리베라를 속죄양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군대와 왕은 주로 비난을 피하기 위해 프리모 데 리베라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1930년 1월 29일까지 그 장군은 사임할 것을 강제당했다. 그는 그해 말에 파리에서 죽었다.





그의 사임은 군주제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군주는 프리모 데 리베라를 따라서 15개월 후인 1931년 4월에 추방되었다. 이에 뒤이어 4월 12일에 지방자치 선거가 있었는데 이 선거는 인민이 군주제에 대해, 군사독재를 지지한 군주제에 대해 완전히 적대적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지배계급들은 군주제의 희생을, 무너지는 봉건적 체계로부터 대중들의 적대감을 일소하거나 흩뜨리기 위해 시도할 시간을 버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보았다.















공화국










대중들은 당분간은 위로받았다. 물론 그들은 기쁨으로 거칠어졌다. 그리고는 완전한 보통선거가 1931년 6월 28일에 시행되었는데 그것은 4월 지방자치 선거들의 결과들을 더욱 더 확인했다: 117명의 사회주의자들, 93명의 급진주의자들, 59명의 공화파 급진사회주의자들, 27명의 공화파 행동, 27명의 우익 공화주의자들, 33명의 카탈란 민족주의자들, 16명의 갈리시안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반군주주의자들 28명이었다. 군주주의자들은 그들 사이에서 단지 85석을 모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선거들의 결과로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요소들로 정부가 구성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스페인 국가의 계급 성격에서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를 만드는 데 이르렀을 때 매우 무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데이비드 미첼은, 첫 수상인 알칼라 자모라가 1931년 10월에 마누엘 아자나로 교체되었을 때, “그는 군국주의와 교회의 적으로 선언되었다. 이들 두 쟁점들에 집중하고 가장 긴급한 문제―토지개혁―에 맞붙기 위해 단지 소심한 노력을 함에 의해, 어울리지 않는 연합은 주요하게 그 다음 2년 동안 거의 모든 분파를 성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아마도 단지 카탈란 민족주의자들만이 1932년 9월에 자치를 얻어서 그것의 실행에 만족했다.”고 쓰고 있다.(p. 16). 미첼이 토지개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진실이고 그리고 대중들이 그의 정부에 대해 환멸을 느낀―그리고 올바르게 그러했다―이유이기도 한 반면에, 그가 반동적인 지배계급들을 부들부들 떨게 하는 많은 진보적 조치들을 취한 것도 또한 진실이다. 그는 카톨릭 교회로부터 국가 종교로서 그것의 지위를 빼앗았고 다른 것들 중에서 종교의 총체적인 자유를 선언한 헌법이 작성되었다. 권리들이 여성들에게 주어졌다―특히 투표할 권리 뿐만 아니라 이혼할 권리. 아이러니하게도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부분적으로 아자나의 최후의 몰락에 책임이 있는데, 매우 많은 여성들이 스페인에서(혹자는 봉건적 사회를 예상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채였고 적절한 경과에서 그들의 새로 획득된 투표권을 고해신부들과 존경받는 영주들(Ladies of the Manor)에 의해 승인된 후보자들에게 유리하게 행사할 것이었다.





스페인을 아자나의 ‘반성직자 독재’로부터 구하려고 생각하여, 산주르요 장군은 정부를 타도할 음모를 이끌었다. 그러나 1932년 8월에 시도된 봉기는 쉽게 진압되었는데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지배계급들은 그것을 지지하는 것이 자살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장래의 선거들에서 대중들이 그들의 주인들이 그들을 이끄는 대로, 그들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깨닫고서 투표하는 것으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소부르주아적 공화주의자들에게 그들 스스로를 교살할 더 많은 줄을 주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산주르요 봉기의 지도자들은 산주르요 자신을 포함하여 체포되었고 다소간 안락한 감옥들로 던져졌다.





어느 정도는 지배계급의 전략이 성공했다. 아자나에게 주요한 문제는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약간의 매우 온건한 농업개혁이외에는 전혀 말할 수 있는 경제적 강령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가 1930년대의 경제 공황으로 급속히 들어감에 따라 실업이 상승하였고 그리하여 자연스레 대중들의 분노도 상승하였다:










“일련의 농민의 봉기들 그리고 산업의 파업들 후에 놀란 정부는 질서의 외관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 시민방위대, 그리고 새로 창출된 공화국 의회 부대, 돌격대를 불러들여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은 프리모 데 리베라 하에서보다도 더 경찰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에 대한 군대의 통제는 공고화되었고 반면에 정부 자체는, 소수파들이 그들의 지지자들의 압력 하에 그 노선을 발끝까지 거부함에 따라 분열되었다.










“산주르요 같은 군사 반란들은 단순히 추방되거나 혹은 안락하게 투옥된 반면에 농민 반란들은 경솔하게 무력진압되었을 때, 무정부주의자들(FAI)의 최악의 의심이 확증되었고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의 압력 하에 라르고 카발레로는 사회주의당과 UGT를 온건한 개혁주의로부터 더 혁명적인 입장으로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앞의 책, p. 16-17)










그 동안에 파시스트 팔랑게(이전의 군사독재자의 아들인 요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에 의해 시작되었다)와 극우인 CEDA가, 전통적인 노동자조직에 대해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을 활용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이 불만은 1933년에 시행된 선거에 노동자들이 상당수 참가하지 않는 것을 초래했다. 그 결과는 최대의 의석을 얻은 당이 CEDA였다는 것이다. 지배계급들은 CEDA로 하여금 권력을 잡도록 하는 것은 곤란을 요구할 것임을 여전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즉각 조직이 정부로 들어가는 것이 승인되지 않았다. 대신에 정부는 교활한 기회주의자인 알레얀드로 레로에 의해 이끌어지는 기회주의적인 급진당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CEDA였는데 그것이 지배했다. 미첼은 계속한다:










“코르테스에서 최대의 정당이지만 CEDA는 절대적인 다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의 대의원들의 압력 하에서 알레얀드로 레로를 영수로 하는 정부는 자신의 선행자의 ‘파괴적인’ 입법을 폐지하거나 혹은 무시했다. 그란데스의 영지들은 회복되었고 농민들은 쫓겨났고 임금들은 삭감되었다. 산주르요의 봉기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이 사면되었다.”





“1934년 2월에 라르고 카발레로는 ‘지금 대중들의 유일한 희망은 사회혁명에 있다. 그것만이 스페인을 파시즘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격노하게 만든 레로 정권의 다른 특징들은 다음과 같았다:





1. 국가와 교회 성직자계급 사이의 관계들의 현저한 개선. 레로 정권은 제수이트들에게 그들의 사상적 그리고 재정적 학정을 되살리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감히 허용하는 데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헌법의 국교를 폐지하는 개혁의 많은 부분은 늦추어졌고 그리고 교회 교육을 세속의 교육으로 대체하려는 노력들이 포기되었다.





2. 많은 수의 군주주의자들을 고위 군사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





3. 1934년 10월에 카탈로니아의 자치의 철회 그리고 갈리시아와 바스크 지역에 자치를 부여하는 계획의 정지;





4. 군주주의자이면서 프리모 데 리베라 정부의 전 성원이었던 칼보 소텔로에게 1934년 4월에 주어진 사면, 이것은 그에게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정부와 반공화주의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일반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들





이 모든 시기에 CEDA는 정부로 들어갈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공화국을 지지함이 없이 그렇게 할 것을 주장했다. 사태를 막바지로 몰아넣기 위해 CEDA는 그것의 요구들을 토의하기 위해 아스투리아스의 광산지역의 핵심지대에 있는 코바돈가의 완전히 프롤레타리아적 도시에서 우익 당들의 협의회를 소집했다. 이것은 사우트홀에서 모임을 개최하는 민족 전선에 대한 도발의 의미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터무니없었고 그것은 1934년 9월 내내 시위들을 불러일으켰다. 의회가 회복된 10월 1일에 CEDA는 정부에 반대하여 표결했고 그 결과 정부는 패했고 사임해야만 했다. 공화국의 의장은 레로에게 10월 4일에 핵심적 장관자리에 3명의 CEDA 인물을 포함하는 새로운 정부를 형성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이렇게 했고 그리하여 CEDA는 노동부 장관, 사법부 장관, 그리고 농업 장관 자리를 얻었다.

























아스투리아스










이들 파시스트들이 계속 정부에 있는다면, 자신들에게 닥칠 사태를 예상하고서, 그리고 돌퍼스 하에서 아스투리아스 노동계급의 경험들을 기억하고서, 스페인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파업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 지배 하의 노동조합, UGT는 10월 5일에 총파업을 하였고 레로는 전쟁 상태를 선언했다!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서 파업운동은 단지 아스투리아스에서만 무르익었다. 다른 곳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인해 지쳤거나 사회주의자 라르고 카발레로와 어떤 무정부주의자들같은 ‘지도자들’에 의해 전개된 투쟁에 대한 열정의 부족으로 인해 무엇을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스투리아스에서는 무정부주의자 지배하의 노동조합, CNT와 UGT가 프롤레타리아 형제들 조합이라는 이름 하에 연합하였다. 견실한 노동계급 아스투리아 시들의 노동자들은 단결하였고 결의에 차 있었다. 파업으로 나아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서, 노동자들은 정부가 그들의 요구들을 인정하도록 강제할 것을 희망하면서 며칠 동안 그 지역의 통제권를 장악했다. 대신에 정부는 프랑코 장군과 그의 무어인 부대들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했다. 스페인의 나머지 지역에서 총파업운동의 붕괴로 인해 아스투리아 반란의 패배는 불가피했다.





CEDA가 지배하는 정부의 잔혹성에 대한 노동자들의 최악의 두려움이 막 현실화하려했다. 실제로 노동자들과 농민들에 대한 진압에서 유혈의 야만이 규범인 스페인에서조차 레로-CEDA정부에 의한 아스투리아 노동자들에 대한 만행은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데이비드 미첼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0월 19일의 항복 전에 죽거나 부상당한 약 2,000명 중에서 거의 10%가 반란자였다. 거의 같은 수의 반란자들이 뒤이은 무자비한 진압에서 죽었다. 마누에 몬테킨은 ‘어떤 곳에서는 무어인들, 군단들 그리고 시민방위대들이 개들, 고양이들, 돼지들, 혹은 송아지들을 남겨두지 않았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살육했다. 나는 빌라프리아의 마을에서 내가 싸우고 있을 때 나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그들은 심지어 어린이들의 인형들의 머리조차 잘랐다’고 기억하고 있다.” (p. 24)










30,000 명의 아스투리아 노동자들이 죄수가 되었고 감옥에는 더 이상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수용소에 감금당해야 했다.





이 사건들은 공포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들이 노동계급운동의 힘의 성장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는 것이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단련시켰다:










“모로코 부대의 사용과 진압에 대한 공포가 다른 무엇보다도 서로 싸우는 좌익을 연대하게 강제했다. ... 희망없는 싸움을 계속할 것을 옹호했던 공산주의자들은(그들 중에는 파시오나리아[시계초]라고 후에 알려진 한 아스투리아 광부의 아내인 돌로레스 이바루리가 있었다) 인기와 당원의 급속한 증대로 보답을 얻었다. ...” (p. 24)










스페인 공산당의 총비서인 조세 디아즈는 1935년 6월 2일에 행한 연설에서 아스투리아스 봉기의 중요성에 대해 노동계급운동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모두는 10월에 일어난 것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우리가 온 나라에 걸쳐 일어났다는 것을, 스페인 노동자들, 카탈난 노동자들, 바스크인들, 갈리시아인들, 간단히 말해 노동자들은 스페인 전역에 걸쳐 총파업과 반란의 투쟁이라는 수단으로써 파시즘의 전진을 정지시키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대중들이 경탄할 만한 용기로  대부르주아지와 지주들 그리고 그들의 반동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그리고 권력을 잡기 위해 싸웠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다. 이 마지막 목적은 아스투리아스에서만 성취되었다. 아스투리아스에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영웅적 입장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아스투리아스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단결하여 행진할 것인지 어떻게 무기를 획득할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성취되었다. 노동자들의 그리고 농민들의 권력의 깃발이 15일 동안 아스투리아스에서 의기양양하게 나부꼈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동맹들은 무장투쟁을 통하여 권력을 획득했다. 우리의 아스투리아스 동지들의 영광스러운 행동은 모든 피착취 인민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의 형제들 그리고 자매들, 우리의 영웅들이 단결하여 싸웠다는 것을, 이것이 그들이 승리한 이유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 하나로서, 어깨를 걸고 싸웠다. 바로 이 동일한 이유 때문에, 만약 우리가 나라 전체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반동과 파시즘을 깨부수기 위해 광범한 대중들의 투쟁을 이끌 수 있도록, 통일전선이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행동에서 통일이 강제되어야 한다는 것, 노동자와 농민들의 동맹들이 나라의 모든 부분에서 창출되고 발전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한다면, 머지않아 우리는 이 정부를 볼 수 있고, 길로블들과 그들을 방어하는 모든 사람들이 도망치고, 아수투리아스의 광부들과 노동자들의 빽빽한 대열들과 무장된 힘에 직면하였을 때 아스투리아스의 부르주아들과 시민방위대들이 수치스럽게 그랬던 것처럼 내빼게 될 것임을 나는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다.” (p. 11-12)















아스투리아스로부터 1936년 2월의 선거에서 승리까지










아스투리아스는 많은 주요한 소부르주아 정당들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촉진된 인민전선에 참가하게 강제했다. 모두에게 인민전선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1936년 1월 15일에 공화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 간에 동의되었다. 그들이 유권자들에게 제안한 요구들은 다음과 같았다:





1. 1933년 11월 이후로 정치적 범죄들로 유죄를 선고받은 모든 사람들을 사면하는 것





2. 정치적 이유들로 그들의 직업들을 잃은 정부 피고용인들의 복직





3. 목숨을 잃은 혁명적인 부대와 정부 부대의 가족들에 대한 보상





4. 헌법 지배의 복구





5. 헌법의 의행





6. 개선된 공공 안전





7. 형사 사법의 재조직





8. 군대와 경찰 내에서 책임들의 재분배와 징계 규율의 재작성





9. 세금의 감소와 농민들을 위한 더 많은 신용





10. 산업에서 경제적 침체에 대응할 정책들의 채택





11. 공공사업의 계획의 채택





12. 은행과 기금이 국가 재건의 서비스를 통해 설치될 것





13. 최저임금의 고정을 포함한 사회적 입법의 수정





14. 세속적인 학교 설비에 대한 더 많은 투자





인민전선은 1920년대의 통일전선과, 전자가 사회민주당들을 포함한 반면에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달랐다. 그리하여 강령들은 사회민주당들이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어야만 했는데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강령들이 부르주아적이라는 고발을 초래했다. 그러나 인민전선들에 사회민주당들을 포함하는 것의 이유들은 캠벨에 의해 잘 설명되었다:










“1917년 혁명의 그리고 이어지는 유럽의 혁명적 시기의 교훈들은 노동계급의 기본적인 자산에 속하는데 그것들을 무시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훈들은 혹자가 1917-1920년의 상황을 현재의 상황과 비교하여 그 차이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에 적용될 수 없다. ...” (p. 316)





“1917-1920년에 자본주의는 쏘비에트 민주주의를 수립하려고 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추진에 반대하여 의회적 민주주의를 방어하고 있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그것 자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의회적 민주주의를 침식하고 파괴하고 노동계급의 기관들을 해체하려고 하고 있다. 1917-1920년에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혁명에 반대하여 자본주의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J.R. 캠벨의 이 시기에 대한 분석은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스탈린이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싸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사회적 버팀목으로서 그 ‘좌익’에 반대하는 싸움을 강화하는 것의 임무”를 강조했던 「쏘련 공산당(볼)의 우익적 일탈」에서 스탈린 동지가 1930년에 표했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노선과 부합한다. 그리고 다시 그의 「쏘련 공산당(볼)의 16차 대회에 대한 중앙위원회의 보고」에서 스탈린은 말했다:










“노동계급에서 자본의 대리인인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비타협적 투쟁을 발전시킴에 의해,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제분소로 곡물가루를 가져가는, 레닌주의로부터 잡다한 일탈들을 먼지로 만들어버림에 의해, 공산당들은 그들이 올바른 길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 길에서 명백하게 강화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할 때만 그들은 노동계급의 다수를 획득할 것을 기대할 수 있고 다가오는 계급 전투들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성공적으로 준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것을 할 때만 우리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위신의 가일층의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1934년 무렵에는 많은 경우들에서 다가오는 전투들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준비시키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그것에 지금 강요하고 있는 전투들에서 승리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는 경우이었다. 이것이 캠벨이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말한 이유이다:










“1938년에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주의의 공격을 쳐부수는 것이고 권력을 향한 노동계급의 어떠한 전진의 출발점이다.” (앞의 책, p.318)










다시 그의 분석은 스탈린 동지의 그것과 그리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일치하는 것인데 스탈린 동지가 1934년에 17차 당대회에 대한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보여준 것과 같았다:










“인민 대중들이 아직은 자본주의를 강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강습한다는 생각은 대중들의 마음 속에 성숙하고 있다. 그것에 대해 어떤 의심도 거의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사실들에 의해 즉, 파시스트 정권을 타도한 스페인 혁명에 의해 웅변적으로 증명된다. ...”





“ 이것은 물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지배계급들이 압제자들에 반대하는 그것의 투쟁에서 노동계급에 의해 사용될 수도 있는 의회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마지막 흔적들을 그렇게 정열적으로 파괴하거나 혹은 무효로 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





“이와 관련해서 독일에서 파시즘의 승리는 노동계급의 허약함의 증상으로서 그리고 파시즘을 위한 길을 닦은 사회민주주의의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의 결과로서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한 부르주아지의 허약함의 표시로서, 부르주아지가 더 이상 의회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낡은 방법들에 의해 지배를 할 수 없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지배의 테러리즘적 수단들에 의존할 것을 ... 강제당하고 있다는 것의 표시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p. 299-300)










이것이 1935년 8월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7차 대회가 다음과 같이 결의한 이유이다:










“통치하는 계급들이  대중들의 운동의 강력한 발전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는 정치적 위기의 조건들 하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및 정치적 권력을 훨씬 더 흔들고 노동계급의 세력을 강화하고, 타협적인 당들을 고립시키고, 그리고 대중들을 권력의 혁명적 장악으로 이끌기 위해 계산된, 주요한 혁명적 슬로건들(생산과 은행들의 통제, 경찰의 해체, 그것의 무장된 시민군에 의한 대체 등과 같은)을 강조해야만 한다. 만약에 대중들의 운동의 이러한 상승에 직면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의 견지에서, 아직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부는 아니지만 그러나 파시즘과 반동에 반대하여 결정적인 조치들을 수행할 통일 프롤레타리아 전선 혹은 반파시즘적 인민전선의 정부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면, 공산당은 이러한 정부의 형성을 획득해야만 한다.”





“통일전선 정부의 형성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a) 부르주아 국가 기구가 부르주아지가 이러한 정부의 형성을 막을 위치에 있지 못할 정도까지 마비되어 있을 때; (b) 가장 광범한 노동계급 대중들이 아직은 쏘비에트 권력을 위한 싸움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지라도 파시즘과 반동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행동을 스스로 시작하고 있을 때; (c) 통일전선의 부분을 형성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다른 당들의 조직들의 상당한 부분이 파시스트들과 다른 반동적 요소들에 반대하는 가차없는 조치들의 적용을 요구하고 있고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여 이들 조치들을 수행하기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통일전선 정부가 반혁명적인 금융상의 거물들과 다른 파시스트 대리인들에 반대하는 결정된 조치들을 취하고, 공산당의 활동들 혹은 노동계급의 투쟁들을 전혀 제한하지 않는다면, 공산당은 모든 방식으로 이 정부를 지지할 것이다. 통일전선정부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참가의 문제에 관해서, 이것은 각각의 경우에 구체적인 정세에 따라서 해결될 것이다.” (결의, 2장 8항)










그리고 옐리네크가 올바르게 지적하듯이(p. 208), “1936년 초에 스페인에서 구체적 정세는 ‘통일전선정부의 형성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였던 세 가지의 모든 요인들을 포함했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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