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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아프가니스탄 4월 혁명] 보론(1)
글쓴이 사사키 타츠오 E-mail send mail 번호 200
날짜 2010-12-30 조회수 2120 추천수 130
파일  1293707985_아프간.hwp

  





























번역 : 정혜윤















[편집자 주 : 지난 10월호로 본문의 번역이 끝났다. 이번호부터는 보론을 3회에 걸쳐 싣는다. 10월호를 내면서 “편집자의 글”에서 번역이 완전히 끝난 것으로 썼는데 정정한다.] 




















이 보론은 처음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의 머리말에 넣을 예정이었다. 이것은 혁명에 선행하는 민족의 자기형성과 번영ㆍ독립전쟁에 관한 부분이다. 그러나 페이지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이렇게 본론과 별도로 인쇄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사회였을까.










2001년 10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군사공격을 시작했을 때 세계의 많은 미디어는 이른바 “그곳은 구태의연한 봉건국가로, 봉건적 군벌이 횡행하는 부족사회이다”라고 보도했다. 이것으로는 그 사회ㆍ국가는 전쟁을 시작한 당사자에 의해 근대화될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이러한 사고방식은 구미 제반 국가들이 자기 좋을 대로 중상주의 시대 이후, 해외에 제반 지역을 식민지나 종속적 지배하에 둘 때 사용해온 명분과 다르지 않다. 확실히 아프간 사회는 지금까지도, 부족제의 유제와 관습에서 나온 봉건적 요소가 잔존한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오래된 껍질을 내부에서 뚫고 투쟁해온 인민의 역사도 또한 존재한다.





쏘련과학 아카데미 동양연구소 이골 레이즈나는 “아프가니스탄에 있어 봉건제 발전의 특징”이라는 논문 중에, 원시공동체제도(부족제 사회)의 해체와, 봉건적사회관계의 성립에 대해 서술했다. 그는 다양한 부족이 있는 곳에서는 급속하게 또한 별도의 곳에서는 극히 완만하게 수백 년,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변화하고 발전해온 모습을 보고하고 있다. (Specific Features of the Development of Feudalism Among the Afghans, by I. Reisner, "Afganistan : Past and Present", Moscow, 1982)





도대체 부족이란 무엇인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가족ㆍ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1884년)중에서 미국의 인류학자 루이스 ㆍHㆍ모르간의 󰡔고대사회󰡕를 인용하면서, 부족사회가 그리스, 로마, 독일의 고대사회에 속한다고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 모르간은 미국 미개원주민 이로쿼이족 사회에 살면서 이들을 자세하게 관찰했다. 그는 인류의 발전을 야만, 미개, 문명의 삼단계로 구분해, 󰡔부족제사회󰡕가 미개와 문명 사이에 있다고 규정했다. 모르간이 규정한 부족은 근친씨족의 집합체가 토지를 공동으로 점유ㆍ소유하면서 생활전반에 관습으로서의 제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또한 동일한 방언으로 조직되어있다. 그러나 이 부족이란 것은 “국가라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회조직”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특정의 지배자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그것은 계급이 발생하기 이전의 사회이다. 모든 것은 부족회의에서 결정되며, 그 결정을 실행하는 것은 존장(노장)이다. 당시 인류학에서는 모르간이 외쳐온 인류의 야만기의 집단혼(군혼)등의 설은 부정되어 왔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는 고대사회의 규명에 있어 월등히 앞서갔다고 볼 수 있다.※










※ 모르간의 연구의 뒤를 이은 미국의 인류학자들은, 선대인디언의 생활(부족민의 생활)을 훌륭하게 해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이시, 북미최후의 야생 인디언󰡕(シオドーラ・クローバー著 行方明夫訳 岩波書店 1970年)을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인디언은 현재 그 많은 수가 거류지에 수용되어있으나, 이시는 문자 그대로 최후까지 야생 그대로 혼자 살아남았다. 그의 동족은 모두 사망하고, 그는 땅에서 멀리 떨어져 고독하게 성장했다. 인류학자들은 그와 대화하는 것에 성공해, 4년간 그와 생활을 함께 했다. 이는 단순히 학술적인 것만이 아니라 미국의 개척자들이 그 개척과정에서 수천만 명의 인디언을 ‘대량살상’(홀로코스트)한 역사적 죄(󰡔미국 인디언의 비사󰡕藤永 茂 朝日選書 1974년, 에 자세하다)를 묻는다는 의미를 가지는 작업이었다. 물론 그러한 것으로 대죄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골 레이즈나는 시대구분을 하지 않았지만, 파슈톤민족에 속하는 기루자이 부족제사회에 대해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즉 10, 12개의 가족집단이 모여 하나의 씨족(clan)을 만든다. 또한 몇 개의 씨족모임이 부족이다. 부족민은 일정한 구역을 나누어 그 안에 정주한다. 그 부근 일대의 토지는 공동체의 소유이지만 도구 등을 가진 가족을 넘어서면 가족단위의 할체제(경작지를 순차, 수년마다 변경하는 것)에 의해 경작이 이루어졌다. 또한 다양한 관습법에 근거해, 부족회의(지루가)가 결정한다. 여기에서도 지배자는 아직 나오지 않는다. 부족 내의 대립이 생기면 중개자와 보증을 통해 화해에 이른다. 지루가의 결정과 화해의 결정사항은 강제력을 가지고 만약 그것을 어긴 경우는, 그 집은 불태워지고, 가축은 몰수된다. 또한 가족 중 누군가를 인질로 잡기도 하고 가족전원을 추방하는 일도 있다. 부족전체에서 식량이 부족했던 때에는 근처 부족에게 약탈하러 나가는 일도 있었다. Jㆍ스페인은 그의 저서 󰡔실크로드의 수수께끼의 국민= 파탄민족지󰡕), 勝藤猛・中川弘訳 刀水書房 1980)에서, 파탄(파슈톤)민족의 관습(파슈토우 누와레이)을 자세히 소개했다. n





아프가니스탄에 근접한 쿠르트메니스탄에서는 어떠했을까. 가토우 큐조(加藤九祚)는 「투르크멘 민족사」󰡔실크로드 아시아 최심층 쏘비에트(2)󰡕(日本放送出版協会 1984)에서 “투르쿠멘은 중앙아시아 제반 민족 중에서 부족제를 가장 강고하게, 게다가 20세기까지 유지해 왔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약탈(아라만)의 구조」라는 부분에서 “평시나 전시를 불문하고 다른 민족과 부족을 습격해 약탈해왔다. 그 규모는 수인에서 수천 명까지 다양해왔다”라고 표하고 있다. 이러한 부족사회의 모습은 세계 어디서도 관찰할 수 있다. 나는 어찌되었든 이러한 의미에 맞는 윤곽을 놓고 부족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엥겔스는 앞의 책에서 부족제사회에서 ‘사유재산’을 허용한 사회로의 이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엥겔스는 이 경우도, 그 사회전체의 생산력에 규정된 이행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처음으로 부족회의에 참가했던 장로 중에서 세습된 사람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공동체의 재산과 자신이 획득한 것을 모두 비축해 사유화했다. 또한 그는 더욱 발전하자 약탈행위와 전쟁으로 힘을 발휘해 부족과 공동체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지배자가 되었다. 동시에 그 사회에 계급의 문화가 생기면서, 부족제는 붕괴하고 봉건제사회에 이르게 되었다고 엥겔스는 주장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부족사회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봉건제사회로 진화 ㆍ발전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큰 봉건적 통일국가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부족제 공동체사회가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1747년부터1834년까지의 드라우니왕조와 그 다음 바라쿠샤이 조(1834~1928년)에 의해 봉건적 통일국가가 완성되었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바라쿠자이조의 시대, 아프가니스탄은 세 번에 걸쳐 영국의 침략을 받아 그에 대한 저항ㆍ방위전쟁을 행했다. 최종적으로는 바라쿠자이 아프가니스탄이 승리했다. 또한 그 전쟁을 계기로 보다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다.















드라우니 왕조(1747~1834년)










드라우니 왕조는 어떠한 정치구조를 가진 국가였을까. 토지소유, 세제 및 권력의 서열(계층, 위계질서) 등을 보도록 하자, 아시아적 전제국가의 특수한 드라우니체제란 도대체 어떠한 것이었을까.





드라우니 영토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그 동부, 즉 지금의 파키스탄의 중앙부를 남부로 흐르는 인더스강주변, 그 북부 카시밀 일대까지 이르는 광대한 곳이다. 이미 강력했던 왕조는 주변의 약소민족국가, 번왕국을 석권하며 전쟁 때마다 국토를 확대해왔다.





왕(한)을 시작으로 자신의 출신 지역일대의 토지를 영유해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왕이란 투르크와 몽골색이 강한 ‘아시아적 전제군주’를 말한다. 그 왕은 유럽에 있어 고대 그리스 로마사회의 노예제, 이어지는 중세봉건제 농노사회에 있어 영주 및 군주와는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아시아적 전제군주로서 왕이 토지를 소유한 형태는, 넓게는 일반적 개인소유가 아니라, 전제국가적인 소유였다. 그 토지의 소유형태는 기본은 어디까지나 국가적 규모로 집중되어있다. 그러나 부분적이고 예외적으로 한이 그 일족에게 일정구역의 토지를 주기도 하고 이후 나올 상인층의 사적소유 또한 존재했다.





게다가 왕은 새로운 전쟁 등에 의해 다른 왕의 토지를 획득한 경우 그 토지(주)에는 자신의 가신을 지사로서 파견했다. 당시 드라우니왕조는 주 혹은 행정구분을 8개로 나누어 소유했다. 파견된 지사는 그 주의 통치를 왕의 명령에 의해 행한다. 그 왕과 지사와의 관계를 지행제 혹은 영주제라고 말한다. 왕조의 경제적 기초는 봉건적 아시아적 전제국가의 토지소유제에 있다. 왕은 그 국가적 토지소유제아래 세금을 거두었으나, 면세지(하리세)를 설정했다. 그 면세지는 거의 다음의 3개였다. 하나는 자신의 일족이 증여한 토지, 그리고 종교단체의 소유지, 세 번째는 부족의 공동소유지였다. 이 왕조시대에는 전쟁에 의한 것이든지 아니든지 이미 토지의 사적소유제가 부분적으로 발생했다. 그 사적소유란 세습의 장로, 지방의 황종 및 상인층에게 존재했다. 오래전부터 실크로드를 비롯한 캬라반 사라이(상점ㆍ숙박업)가 번창해왔다. 또한 사라이 바잘(역내 시장)에서는 옥석, 노예 및 각종의 생산물이 거래되었다. 그러나 이 상인층은 중앙아시아에서 ‘자유도시’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한(왕) 치하의 성을 기반으로한 도시 속에 속해 가렴 주구한 세의 징수와 마주하게 되었다.





왕조가 징수하는 토지세가 국고의 주요부분을 차지했다. 그 토지세란 지대가 조세의 형태로 걷어졌던 것이다. 그 징수는 명목상의 소유자인 국가 또는 왕이 사실상 경작자인 농노에게서 걷는 것이다.





세의 징수기준은 대체로 수확고의 1/10부터 1/3단계까지 설정되어있다. 1/3이라는 것은 극히 높은 비율로, 비옥한 토지를 대상으로 한다. 또한 1/10은 물을 얻지 못하는 토지에 적용된다. 물 없는 곳이라도 가축의 방목지로서, 생산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토지에서 생산이 가능한지 어떤지에 근거를 두고 과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이 불가능해도 인민의 노동력을 자비 없이 수탈해 과세하는 것이다. 이것이 봉건적 부역이다. 즉 무상노동력의 강제적수용이다. 왕과 영주들은 자신의 식료운반, 전투진지의 구축, 수리사업으로의 노역, 도로 건설 등 모든 생활, 체제유지의 국면에서 노동을 강제했다. 나아가 물 없는 곳에서 칼레즈, 카나트라는 지하깊이 흐르는 물을 굴삭해 물을 들여오는 수로에서도 물세를 받곤 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맑스)에 있어 아시아전제군주의 중요한 권한의 하나는 황하, 양쯔강, 겐지스강, 인데스강, 메콩강, 이라와지강 등의 치수, 관개시설의 준비이다. 토지가 국가적 소유인 이상, 이것은 논리적 요청이다. 다른 한편 비가 적은 스텝지대에서는, 이 칼레즈의 굴삭, 소유 및 관리가 전제군주의 권한이었다. 노예와 농노가 자발적으로 칼레즈를 굴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칼레즈 소유가 언제부터 촌락공동체소유와 호족 등에 의해 사적소유의 두 가지 종류에 변용된 것일까. 호족 등이 사적으로 소유한 칼레즈에서 징수하는 수세부담은 극히 무거운 것이었다. 이에 칼레즈의 소유자는 경작자인 농민에서 수세를 징수한다. 당시 농민은 자주적ㆍ자발적으로 경작하는 것보다는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경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농민=경작자는 작물재배상의 손질, 중경작, 풀베기 및 거름을 주는 것 같은 생산증가를 목적으로 한 농작업은 극렬하게 사보타지 했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농노였다. 일해도 일해도 그들의 생활의 향상이나 개선은 있을 수 없다. 앞에 언급한 고율의 세의 징수가 그렇게 만들었다. (농노의 문제는 후에 한 번 더 언급한다)










표(1) 드라우니왕조지배하 서부지역(현아프간 령) 및 부족거주구의 연수입과 왕조중앙금고로의 상납액















































주 혹은 부족거주지





수입총액



(단위 1000루피)





샤에 대한 상납액



(단위 1000루피)





수입총액에 대한



상납액의 비율(%)





카블



페샤와르



쟈라라배드



고르반드



반카샤트



가즈니



카라토이 쟈루쟈이



챠리칼과 판쟈실



칸다할



파라아



헤라트



파미얀과하자라쟈트



 





995



1191



400



90



100



110



...



210



960



...



1181



100



 





265



295



200



 40



...



50



102



100



210



65



421



...



 





26.6



24.7



50.0



44.4



...



45.4



...



47.6



21.8



...



35.6



...



 





합계





5338





1748





32.7







  





표(2) 드라우니왕조 지배하 동부지역(현 파키스탄ㆍ인도 령)의 연수익과 왕조중앙금고로의 상납액















































주 혹은 지역구





수입총액



(단위 1000루피)





샤에 대한 상납액



(단위 1000루피)





수입총액에 대한



상납액의 비율(%)





카시밀



무루탄



데라 이스마일 한



데라 가지 한



시카루풀



무자화라밧드



아토쿠



인디안 하쟈라



숫쿠루





4018



673



299



1097



593



100



110



230



...





2250



255



120



670



391



...



50



...



65





56.1



33,4



40.0



61.0



65.9



...



45.4



...



...





합계





 





 





 







출전: 유리 간코프스키. 드라우니왕조. “아프가니스탄: 과거 그리고 현재”





 





쏘련과학 아카데미 동양연구소의 유리 간코프스키는 아프가니스탄의 각 주에서 모였던 세금이, 국가재정과 주재정에 어떻게 배분되는가, 당시의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표(1), (2)이 그러하다. 드라우니왕조의 지배범위는 편의적으로 분류하면, 서부지구와 동부지구의 2지구가 된다. 서부란 거의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영역과 겹치는 부분이다. 동부는 현재의 파키스탄과 인도의 일부이다. 이른바 표(1) 카블주의 경우 세수입의 총액이, 99만 5000루피이고, 그중 샤(왕)금고(중앙정부)에 상납된 세액은 26만 5000루피이며, 이 수익총액의 26.6퍼센트에 해당된다. 칸다할주에서 상납된 액의 비율은 3.8%이고 다른 주에 비해 극히 적다. 즉 왕(한)이 취하는 부분이 적다. 표(2)에서 카시밀, 시카루풀 및 데라 가지 한 같은 새롭게 드라우니왕조의 지배로 편입된 주에서는 평균적으로 샤로 가는 상납액이 많다. 즉 샤권력이 강하고, 그 곳의 주지사가 샤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표(1)(2)는 주에서 징수된 세가 왕과 주지사의 금고에 어떤 비율로 배분될지, 그것의 역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샤는 면세지로서 사유지를 소유했다. 즉 샤자신이 직접 지주였다. 그 면적을 유리 간코프스티는 국토총면적의 20~40% 정도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왕의 경제적 기반은 흔히 알려진 것보다 막대했다.















징세청부제










아시아적 전제국가 중에 무시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그 세를 누가 어떻게 징수하여 모으냐의 문제이다. 드라우니왕조에서는 세를 징수하는 사람은 두 종류였다. 그 중 하나는 관료로서 정식의 징세관리로서 이후 세관을 지낸다. 또 하나는 징세청부인(쟈기달)이다. 아프가니스탄 동부―그 지역은 후에 아프가니스탄에 편입됨. 힌두교와 시크교의 신도가 많은 지구―에서는 인도상인과 고리대업자에게 이를 대행시켜왔다. 우리들은 징세청부인이 봉건사회 속에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동방견문록󰡕(1295년)의 저자 마르코 폴로는 옥석상인의 눈으로 그가 걸었던 중앙아시아에서 중국, 동아시아 넓은 지역의 당시의 상업 활동과 캬라반 사라이(숙박업)를 관찰했다. 폴로는 현 아프가니스탄북부의 시베르간, 마쟈리샤이푸근교의 발트 등을 방문했다. 그의󰡔방문록󰡕에서 직접적으로 상인들이 징세청부인을 겸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 (13세기)부터 상인활동이 지역에 지반을 만들었던 것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존재한 바라구쟈이왕조의 시대에 스웬 헤딘은 투르크부터 중앙아시아, 중국을 수차례 순회했다. 헤딘은 아프가니스탄 납부로의 헤르만드 강유역을 걸으며, 거기에서 상인과 교통세를 취하는 세관을 만났다. 실크로드 대동맥으로서 그 간선을 따라 무수하고 작은 도로가 기로를 만들어, 제각기 지역의 오아시스와 칼레즈의 하류역과 협곡의 위락까지 올라갔다. 상인 캬라반 및 유목민은 그곳 기로를 마치 혈관 속을 흐르는 혈액같이 왕래한다. 사람들의 왕래는 중앙아시아, 서역에서 결코 멈추거나 정체하지 않는다. “촌이 고립되었기 때문에 인도에는 도로가 없고,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촌의 고립이 길게 이어졌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동체는 일정한 낮은 수준을 유지하며 다른 촌과 거의 교류도 하지 않고 사회진보에 필요한 욕망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며 살아 왔다”라고 한다.(맑스, 「영국의 인도지배의 장래의 결과」, 󰡔맑스ㆍ엥겔스 전집󰡕9권, 大月書店, p215) 인도에서 보이는 정체는 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각지에 산재한 시대를 다르게 한 불상, 조각류 및 회화(이른바 15세기로의 라트미니아츄이 타시켄트 미술관소장)류의 보급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오아시스도시가 형성되었다.





간선에서 지선에 걸쳐 활약한 상인들은 정착농경지와 유목민의 텐트까지 발을 옮겨, 고리대금업자가 되었다가 이후 대부분이 징세청부인이 되었다. 부족의 장로가 새로운 왕조의 가신이 징수하는 세금청부인이 된 예도 있다.





칼레즈의 사적소유자는 그 자체가 일대자산의 소유자였고, 많은 경우 하나의 칼레즈를 복수의 개인들이 공유했다. 그들은 부근의 토지세(지대가 조세의 형태를 취한)의 징집청부인을 겸하기도 했다. 이러한 청부인들은 징세사무의 대상으로서 그 상당수가 수수료를 손에 넣었다. 또한 징세불능지가 된 곳도 사적으로 소유해, 스스로 지주가 되어갔다. 게다가 몇 번에 걸친 전쟁의 출정자에게는 세의 면세가 이루어졌다. 경작자가 사실상 부재했기 때문에, 세의 부담자도 없다. 청부인은 그러한 토지를 매점했다. 강력한 청부인은 곧 닥칠 한의 군대를 위한 병기와 라우다나 말들을 조달하기도 하고, 옥석ㆍ귀금속ㆍ차ㆍ옷ㆍ마약을 강매하기도 했다. 더욱이 한과 친하게 지냈던 이들은 한에게 여성을 증여하기도 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 징세청부인들은 관료로서 공적인 징세자와는 별도로, 아시아적 전제국가의 내부에서 생겨난 새로운 계급이다. 그들은 근대상업자본과 연결되는 맹아이기도 하다.










표(3) 드라우니와조 각 주의 세수와 쟈기달(징세청부인)의 소득





(1793~94년, 단위 1000루피)


























































































































































































































































수입



총액





샤로의 상납액





쟈기달의 몫





주(지사)재정으로









비율(%)









비율(%)









비율(%)





카불





995





265





26.8





255





26.0





470





47.2





챠리카루와판지실





210





100





38.8





65





34.0





45





27.2





칸타하루





961





210





21.8





420





43.7





330





34.4





헤라트





1181





421





27.3





450





39.5





290





33.2





무루탄





673





255





35.6





323





48.0





95





16.4





데라이ㆍ이스마일ㆍ한





299





120





36.0





154





55.0





25





9.0





카시밀





4018





2250





44.9





628





15.5





1140





39.6





데라 카지ㆍ







1097





670





59.2





320





30.0





107





10.8





시칼프르





593





391





65.2





145





24.0





57





10.6





평균





-





-





39.5





-





35.0





----





27.3







 





출전: 유리 간코프스키. 드라우니왕조. “아프가니스탄: 과거 그리고 현재”










표(3)은 드라우니왕조하의 각 주의 세수총액, 샤의 금고에 납부된 액수 및 쟈기달(징세청부인)의 거래를 가리켰다. 이른바 칸다할주의 경우 세수총액은 96만100루피이다. 그중 샤의 금고(국고)에 들어가는 액수는 13만 루피이고, 쟈기달의 거래분(수수료)은 42만 루피였다. 헤라트, 무루탄 및 데라이 이스마일 한주 등에서는 제각기 수입총액의 40%부터 50%가, 제각기 주의 쟈기달의 몫이다. 징세청부인의 실수령액은 많게 보지만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역으로 말하면 한 아래의 관료들의 징세업무의 능력이 극히 비효율이고 진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간코프스키는 세수총액 중에 샤금고로 들어가는 분과 쟈기달 몫을 보여주지만, 이후 잔여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잔여분은 제각기 주재정의 금고로 돌려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표(3)의 우축의 란「주(지사) 재정의 금고로」는 필자작성의 부분이다. 카불 칸다할 및 카빌주 재정의 금고로의 납입액은 전체의 47.2%, 34.4%, 및 39.6%이다. 주에 따라 납입비율은 제각기였다.





샤금고에 들어가는 분, 쟈기달 몫(수수료) 및 주재정으로 납부된 액수의 각주의 평균비율을 보면, 제각기 39.5%, 35.0%, 27.3%로 거의 3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쟈기달 몫이 1/3이상을 넘어, 벌써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징세청부인이 상업 자본으로서 자립해, 순조롭게 어떤 방해도 없이 발전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왕조는 토지세 이외의 세금도 상당히 징수해왔다. 이른바 상인, 직인, 이송업자(캬라반), 과수재배업자 및 유목민에도 제각기 과세해왔다. 인두세, 굴뚝세(세대단위로의 과세), 가정세, 물세, 통행세 등의 이름이 문헌 속에 보인다. 통행세라는 것은 이른바 카시밀지방에서는 12파일(약 19킬로미터)마다 세관을 설치한 것으로, 수송상품에 과세했다. 상품가격의 5%상당액이었다. 카불시내에 들어서면, 1인당 1루피의 통행세가 매겨졌다. 이렇게 높은 세율은 상업, 교통의 발달을 막는다. 이렇게 되는 한 상업자본의 발전은 지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통행세는 일반적으로 상업 교통 및 도시의 발전과 함께 세액을 증가시켰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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