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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현장 >
제목 현대차 노조 선거의 교훈
글쓴이 김해인│편집출판위원 E-mail send mail 번호 116
날짜 2009-10-23 조회수 3746 추천수 118
파일  1256270123_현자.hwp

  













현대차 노조 선거의 교훈











지난 달 25일 아침, 부정투표 논란에 이은 선관위의 재투표 결정 및 번복 등 어느 때보다도 많은 우여곡절과 논란 속에 진행되었던, 현대차지부 제3대 임원선거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 날은 1차 선거에서 1위로 오른 후보는 결선에서 낙선한다는 현대차 선거의 오랜 전통이 깨진 날이었으며, 동시에 7번의 도전 끝에 이경훈이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룬 날이기도 했다.





언론들은 앞 다투어 현대차 선거에서 중도‧실용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대서특필하며, 강경일변도의 노동운동에서 합리적 노동운동으로의 변화가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또한 그들은 조합원들이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투쟁노선 대신 실리를 택했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며, 연일 자신들이 바라는 노동운동, 노동문화를 이 당선자에게 주문하고 있다. 몇몇 노조들의 민주노총 탈퇴를 과장‧왜곡 보도하며, ‘민주노총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언론 자본들은, 이번 선거결과로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이경훈과 자본이 이렇게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는 이 때, 우리는 지금의 결과를 깊이 반성해야 한다. 현 상황은 누가 뭐라고 하든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이고, 우리의 기간 활동에 대한 조합원들의 냉엄한 평가이자 심판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냉철히 분석하고, 지금의 패배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류를 반성하지 않고, 실패로부터 패배로부터 배우지 않는 자는 결코 전진할 수 없다!





1. 선거 과정 및 결과










가. 선거 전 상황










지난 6월 16일, 임단협 기간 중 윤해모 지부장이 사퇴를 공식 선언했다. 윤해모 지부장은 2008년 잠정합의안이 현장조직 및 조합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한차례 부결되고, 2차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찬성 54.49%(반대 43.61%)로 가결된 데 이어, 2009년에도 잠정합의안이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61.21%의 반대(찬성 37.39%)로 부결되면서, 이대로 임단협이 진행된다면 2008년과 같은 혼란을 되풀이 할 우려가 크고, 현 지도부는 이미 노조를 이끌어 갈 지도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해 사퇴를 결정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임단협의 핵심 사항이었던 주간연속2교대제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윤해모 지부장의 소속 조직인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민투위)와의 지속된 의견 충돌 및 모 간부의 민투위로부터의 제명 그리고 모 간부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한 의혹 등도 사퇴 결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임단협 기간 중 집행부가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차지부 104차 임시대의원대회가 6월 25~26일 소집된다. 대대에는 ‘집행부 사퇴에 따른 조기선거 실시 건’으로 비대위 구성 등의 3개의 현장발의안이 올라왔는데, 하나는 제안자의 안 철회로 나머지 2개는 과반수 미달로 부결되고, 집행부의 원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집행부의 원안은, 조기 정상화를 위해 선거체제로 전환(금속대대 및 기타 상황 검토)하고, 세부적인 일정은 확대운영위에서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기 선거를 위한 선관위를 구성하고, 그 전까지는 사퇴한 집행부가 집행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동안 터질 날만 기다렸던, 금속노조의 시한폭탄이 드디어 터지게 된다. 금속노조는 2006년 11월 23~24일 그리고 12월 20일~21일 소집되었던 18차 임시대의원대회(금속산별완성대의원대회)에서 기존 10여만 명의 금속연맹과 4만여 명의 금속노조를 통합하는 15만의 산별노조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당시에 금속산별 건설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과 논란이 있었는데, 특히 기업지부‧지역지부의 조직편제 문제, 기업지부 임원 선출 문제, 교섭권‧체결권‧쟁의권‧소환권‧파면권 등의 문제, 인력과 예산 배분 문제 등이 핵심적인 쟁점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쟁점들은 소위 ‘묻지마 산별’에 묻혀버리고, 권한과 인력은 중앙으로 집중하되 2009년 9월까지 한시적으로 기업지부를 인정한다는 애매모호한 절충안으로 이 문제들은 일단 봉인되었다. 2009년 9월, 봉인은 뜯겨질 것이며 잠들어 있던 유령이 다시 깨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 다 아는 채 말이다.





윤해모 지부장의 임기는 2009년 9월까지였다. 2006년 완성대대의 규약에 따르면, 그는 현대차지부의 마지막 지부장이고 차기부터는 현대차지회장이 선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대차는 조합원만 4만 5천에 이르는 한국최대의 노조이고, 울산공장뿐만 아니라 전주‧아산에도 공장이 있고, 화성에는 남양연구소가 있으며, 울산에 현대차 부품 관련 현대모비스(구 현대정공)가 있고, 전국 각지에 판매와 정비를 담당하는 센터들이 산재해 있다. 현재는 여기에 있는 각각의 노조들이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의 지역위원회(판매위원회, 정비위원회, 전주공장위원회, 아산공장위원회, 남양연구소위원회, 모비스위원회 등)로 구성되어 있지만, 2006년 완성대대 규약에 의하면 현재의 기업지부는 2009년 10월부터 지역지부로 전환되어야 한다. 즉, 현대차 울산공장은 울산지부 현대차울산지회로, 남양연구소위원회는 경기지부 현대차남양지회로, 전주공장위원회와 아산공장위원회는 각각 전북지부 현대차전주지회, 충남지부 현대차아산지회로, 모비스위원회는 울산지부 현대모비스지회로 말이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판매‧정비위원회도 소속 지역지부로 전환되어야 한다(예: 경기지부 현대차판매경기지회, 광전지부 현대차정비광주지회 등).





그럼 이번 현대차의 임원 선거는 어떻게 치러야하나? 금속노조도 당연히 이 문제가 제기될 것을 알고 있었다. 2006년 완성대대에서 유령은 잠시 봉인되었을 뿐, 2009년 10월이 다가오면 그 봉인은 풀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다만, 윤해모 지부장의 사퇴로 그 유령이 조금 더 일찍 깨어났을 뿐이다.





기업지부를 어떻게 해소하고, 지역지부로 전환시킬 것인가, 금속노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7년 10월부터 2008년 5월까지 기업지부해소대책위를 구성‧운영하여 이를 논의했고, 2008년 10월부터는 중앙위에서 이를 나름대로 고민해왔다. 그 결과, 2009년 5월 19일 77차 중앙위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기업지부가 해소되고 지역지부로 조직편제를 하더라도 기업단위의 노사협의회, 자본에 대한 공동대응 등 일상적인 활동을 위해 대표지회장을 두고 통일적인 사업을 벌이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대표지회장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이며, 어떻게 선출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되었다. 금속집행부는 “대표지회장은 선거권, 피선거권을 포함하여 해당기업단위 조합원이 직선으로 선출하며, 대표지회장의 위상과 역할, 선출 방식 및 세부적인 조직운영은 관련 지회(현재 동일 기업지부 산하 지회)의 세칙으로 명시한다”는 안을 제시하였는데, 이 안은 상당한 논쟁 끝에, 중앙위에서 투표에 붙여져 재적 59명 중 찬성 33명(56%)으로 가결되었다. 이 날 중앙위에서 벌어진 논란은, 이 안이 제출될 차기 대의원대회에서 똑같은 논란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논란 끝에 과반수를 조금 넘는 찬성으로 통과된 안은, 기업단위 소속조합원의 선거권, 피선거권을 지회단위를 넘어 보장할 수 있는 것이므로, 지역과 사업장을 기본단위로 하는 금속노조의 규약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금속노조의 규약개정이 필요했고, 77차 금속 중운위는 현재 규약의 보완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 대의원대회를 개최해서 규약 개정안을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7월 3일 소집된 78차 중앙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부칙에 삽입하는 규약개정안에 제출된다.










부칙 제13조 (대표지회장 선출방안)





① 동일자본에 속한 사업장이 두 개 이상의 지회로 구성된 경우 자본에 대한 공동대응을 위해 대표지회장을 둘 수 있다.





② 대표지회장은 선거권, 피선거권을 포함하여 해당 기업단위 조합원이 직선으로 선출할 수 있다. 대표지회장의 선출 방식 및 세부적인 조직운영은 관련 지회(동일 기업단위 지회)의 세칙으로 명시한다.





③ 판매, 정비 지회는 자본에 대한 공동대응을 위해 부문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으며 대표지회장 산하에 둔다. 부문위원회 의장은 해당 단위 조합원 직선으로 선출할 수 있다.










부칙 제14조 (기업지부 조합원의 지역지부 선거권·피선거권부여)





① 기업지부 조합원은 6기 지역지부 임원선거에 대한 선거권, 피선거권을 갖는다.










그리고 이 날 중앙위에서는, 원래 7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24차 임시대의원대회의 일정을 앞당겨, 7월 13일에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현대차지부의 조기 선거를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선거방식에 대한 결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7월 13일, 금속노조 24차 임시대의원대회가 등촌동 88체육관에서 소집되었다. 이 날 논의될 안건은 크게 두 가지였다: <안건1> 기업지부해소에 따른 규약개정 건, <안건2> 쌍용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승리를 위한 대책(안). 오후 3시 25분, 정갑득 위원장의 성원 보고(재적 669명 중 현재 553명)와 함께 개회가 선언되었다. 이후, 대의원들의 만장일치로 <안건2>를 먼저 다루는 회순이 통과되었다. 당시 쌍용차 정세는 공권력이 이미 실질적으로 침탈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물리적 충돌이 연일 벌어지고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대는 총파업 등 실질적이고 강력한 대응책을 결의하지 못했고, 논란 끝에 정갑득 위원장이 제안한, <안건2> 원안에 “중앙교섭, 09년 임단투와 구조조정 저지투쟁을 위해 6기 임원선거일정을 연기한다. 세부적인 투쟁계획과 선거일정은 중집에 위임한다. 단, 규약에 명시된 임기를 지키기 위해 선거운동기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한 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쌍차 가대위가 방청석에서 대대를 지켜보는 가운데, 쌍차투쟁승리를 위해 금속이 강력하게 투쟁해야 한다는 대의원들과, 실질적으로 조직이 불가능하다는 집행부 및 대의원들의 간에 벌어지는 논쟁, 이미 공권력은 실질적으로 투입되었건만, 아직도 공권력이 투입되면(즉, 도장공장에 대한 침탈이 시작되면) 총파업을 비롯한 총력투쟁에 나서겠다는 헛소리들,  6월 25~26일 소집된 104차 임시대의원대회에서의 ‘쌍차공권력 투입 시 연대 총파업 결의’를 집행부 사퇴를 이유로 이미 부결시켜버린 현대차지부, 이것이 금속노조의 현주소였다! 저녁 6시 경, 공권력의 침탈에 맞서 싸우고 있는 쌍차의 동지들을 어떻게 엄호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앞에서 본대로 결정 아닌 결정만을 남기고, 대대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대의원들의 저녁식사를 위해 정회되었다.





7시 경, 대대는 속개되었다. 이제 유령이 등장할 때였다. 엄청난 논란과 논쟁이 시작되었다. 집행부가 제출한 규약개정안(<안건1>)은, 사실 이름만 지회이고, 대표지회장이지, 지금의 기업지부와 지부장의 위상을 그대로 가지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77차 중앙위에서도 논란이 되었고, 중앙위 투표에서 몇 명 차이로 통과된 안이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대로, 이번 대대에서의 논란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대대에는 이 안에 맞서 중앙위에서 이 안에 반대했던 위원들을 중심으로, 지역지부 및 소위 ‘대산별론자’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현장발의안(<안건 1-1>)이 제출되어 있었다. 일단 논의가 시작되자 앞의 제출된 두 안을 비롯해, 기업지부를 그대로 존속해야 한다는 주장부터, 대표지회장 없이 완전한 지역지부로 가야한다는 주장까지, 그동안 쌓여왔던 모든 주장들이 터져 나왔다. 논란 끝에, 일단 원안이 먼저 투표에 붙여졌다. 원안이 통과되면, 현장발의안은 자동 폐기될 것이고, 현대차지부는 원래의 생각대로 변경된 금속 규약 하에서, 지부의 임시대대를 열어 이에 맞게 규정‧규칙을 개정하고, 선거를 치루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봉인에서 풀려난 유령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10시 30분 원안의 핵심인, 부칙 13조가 재석 547명 중 찬성 287명 반대 258명 무효 2명으로 의결정족수(2/3)를 넘지 못해 부결되었다(부칙 14조는 쟁점이 아니며, 2006년 완성대대의 규약에 따라 보완이 필요한 것이었고, 재석 547명 중 369명의 찬성(67.46%)으로 가결되었다). 이제는 현장발의안(<안건1-1>)이 논의되어야 했다. 회의장은 환호와 혼란으로 뒤섞여버렸다. 안건을 다룰 건지부터가 논란이 되었다. 기업지부해소 방안은 중앙위에 위임된 사항이므로, 현장발의안은 안건이 될 수 없고, 다시 중앙위를 개최해야 한다는 의견, 현장발의안 자체가 대표지회장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으므로, 규약을 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현장발의안은 모순이고, 현장발의안도 과반수의 일반의결이 아니라, 2/3의 정족수를 넘어야한다는 의견, 이런저런 수많은 의견들이 제출되고, 기업지부와 지역지부 및 소위 ‘대산별론자’들 사이에 고성과 삿대질이 오가는 난리가 계속되었다.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경남지부 최은석 대의원이 현장발의안에 대한 제안 설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리는 끝나지 않았다. 논쟁은 계속되었다. 새벽 5시 20분, 정갑득 위원장은 현장발의안이 일반결의안건인지, 특별결의안건인지에 대한 결정을 표결로 묻기로 했다. 서로 간의 고함은 더욱 커졌다. 현대차지부의 일부 대원들은 이 안건을 표결에 붙이는 순간, 현대차지부는 퇴장한다고 고함쳤다. 하지만 표결은 거수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대의원들이 손을 드는 순간, 이미 과반을 넘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재석 431명 중 271명 찬성). 현장발의안이 일반안건이라면, 이 안건의 통과는 시간 문제였다. 그 순간, 일부를 제외한 현대차지부의 대의원 대부분은 거친 항의의 표시로 고함을 지르며, 집단 퇴장했다. 남아 있는 금속 대의원들과 방청석의 참관인들도, 고함을 치며 이런저런 말들을 뱉어냈다. 정갑득 위원장은 정회를 선언했다.





속개 후, 정갑득 위원장이 내놓은 제안은 대회를 폐회하고, 긴급중앙위를 통해 기업지부해소 방안을 다시 찾자는 것이었다. 정 위원장은 대의원들에게 현대차를 버리고 갈 거냐고 물었다. 현대차 없이 안건이 통과되어도, 현대차가 이것을 받겠느냐고 물었다. 현대차를 현중처럼 만들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이미 스탠드 한두 쪽을 가득 채웠던 현대차대의원들은 퇴장한 상황이었고, 대회를 계속할 정족수는 약간 모자랄 듯했다. 하지만 남아있던 대의원들은 안건을 처리하자고 했다. 성원파악이 시작되었다. 전광판에 조별로 성원이 올라오는 동안, 대의원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조가 발표되었을 때는 회의장에 환호성이, 확 줄어버린 조가 발표되었을 때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6시 15분 경, 성원 미달(재석 318명, 과반은 335명)로 대회는 자동 유예되었다.





아무 것도 결정한 것 없는 쌍차투쟁, 기업지부와 지역지부 간의 막말과 고성이 오간 11시간 동안의 논쟁, 그리고 현대차지부 대의원들의 집단퇴장과 대회의 유예, 24차 임시대의원대회는 금속산별의 현재 실력을 그대로 보여준 대회였다.





기업지부 해소 방안에 대해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 대의원대회가 끝난 뒤, 금속노조는 7월 21일 79차 중앙위를 소집했다. 이 날 중앙위에서는 여러 안이 제출되고 논의되었으나, 모두 부결되었다. 따라서 중앙위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린다: 기업지부해소방안은 중앙위원회에서 기결정된 내용으로 집행하고 대표지회장 선출방식은 해당 기업단위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하기로 함. 이 결정은 사실 상, 기업지부 임원선거를 지금까지 하던 그대로 해도 된다는 결정이었다. 이어 7월 28일, 현대차지부는 제105차 임시대의원대회를 소집하고, 논란 끝에 차기 임원선거를 현자지부 규정에 따라 현자지부장을 선출(현 체제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지금까지 선거 전 상황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이것이 이번 선거를 분석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금속노조의 현 상황과 기업지부해소 등 산별관련 문제가 이번 선거의 결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이다.















나. 선거에 출마한 4팀의 성향 및 선거전략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8월 20일 선관위 개소식을 시작으로 9월 22일 당선자 확정을 공고하는 현대차지부 제3대 임원선거 일정이 발표된다(이 일정은 이후 부정선거 및 재투표 논란 등으로 제대로 지켜지지 못한다). 이번 선거에는 총 4팀이 등록했는데, 기호1번에 전진하는 현장노동자회(이하 전현노)의 이경훈, 기호2번에 현장연대의 홍성봉, 기호3번에 민주현장투쟁위원회(이하 민주현장)의 권오일, 기호4번에 민주노동자회(이하 민노회)의 김홍규 후보이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집행부를 배출했던 현대자동차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민투위)는, 윤해모 지부장의 사퇴 등 일련의 사태들에 책임을 지고 이번 선거에는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다.





기호1번 이경훈 후보는 협조주의세력, 어용세력으로 대표되는 1대 이영복 집행부에서 조직쟁의부장을 지냈고, 다시 5대 이영복 집행부에서 수석부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현대차의 협조주의, 어용세력은 초대 이영복 위원장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는 노조 결성 전, 노사협의회의 노동자대표 출신이었다. 이후 2대, 3대 선거에서 연이어 낙선한 이영복은, 이제는 조직적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1991년 한빛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한빛)를 결성한다. 하지만 4대 선거에 출마한 이영복은 다시 범민주파의 연합인 범민주투쟁연합회(이하 범민련)의 윤성근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5대 임원선거에서, 민주파의 분열 속에 다시 위원장에 오르게 된다. 6대 임원선거에 다시 출마한 이영복은 민투위, 노동조합발전연구모임(이하 노발연), 현대자동차노동자신문(이하 현노신), 노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노사랑) 등 제현장조직의 단일후보인 정갑득 후보에게 패하고, 회사를 나가 하청업체의 사장이 된다.





이영복이 떠난 자리를, 이번 선거의 기호1번 이경훈이 차지하면서, 위원장을 향한 그의 오랜 도전이 시작된다. 1997년 7대 임원선거에 출마한 그는, 1차 투표에서 4명 중 최하위로 낙선했다. 그는 한빛의 이름을 노동자연대투쟁(이하 노연투)으로 바꾸고, 이영복과 한빛의 이미지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위 어용 이미지가 아니라, 실리주의 이미지로의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이후 그는 8대, 9대, 10대, 11대, 12대 선거에 출마해, ‘1차 1위, 2차 낙선’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2007년, 노연투는 6차례 선거에서 낙선한 그를 밀어내고 이전 노연투에서 분리되었던 한길투쟁위원회(이하 한길투), 전진하는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전민투)를 다시 통합하고, 실천하는노동자회(이하 실노회) 1, 2, 3, 4기 의장을 역임했으며, 10대, 11대, 12대 임원선거에 실노회의 위원장 후보로까지 출마했었던 박상철과 6대, 8대 정갑득 집행부의 부위원장을 지낸 현노신, 현대차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현노투) 의장 출신의 이성근 등 일부 민주파현장조직 이탈자들과 연합하여 현장연대를 결성하고, 현대차지부 초대 임원선거에 이번 선거 기호2번인 홍성봉 후보를 내세웠다. 한길투와 전민투, 그리고 일부 민주파 명망가들까지 끌어들인 현장연대는 이제 어용이 아닌, 실리파의 이미지를 더욱 구축하게 된다. 하지만 1차 선거를 2위로 통과한 홍성봉 후보는 결선에서 민투위 이상욱 후보에게 1천여 표차로 패배한다. 초대 이상욱 지부장이 전 집행부의 9개월의 짧은 잔여 임기(선거 전, 임기연장 등의 논란도 많았으나 95차 대의원대회에서 의결정족수(2/3)를 넘지 못해 임기연장안은 부결되었음)를 마치고, 2007년 12월 실시된 2대 지부장 선거에서 현장연대 후보로 다시 출마한 홍성봉은 이번에는 결선진출에도 실패하고 낙선하게 된다.





여기까지 한빛-노연투-현장연대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짚어야할 대목은, 그들이 점차 노골적인 어용 노선을 버리고, 민주파 출신들까지 영입하면서 자신들의 실리주의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몇 년 동안 현장연대는 실리주의 이미지를 넘어, 일부 지점에서는 강성 이미지까지 보여줬다는 평가도 있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선거에서 민주현장‧민노회와 연합해 최태성 후보를 지지했던 민주노조운동혁신투쟁노동자회(이하 민혁투)의 의장 출신인 이한부를 수석부지부장 후보로 세우며, 민혁투와의 선거연합도 성사시켰다.





2007년 두 차례 내부경선에서 탈락한 이경훈도 조직 내 자신의 세력과 함께 현장연대를 탈퇴한 뒤, 이번 선거에서 새로운 조직 전현노의 후보로 다시 출마했는데, 여기에는 이미 결합해 있던 박상철에 더해, 6대 정갑득 집행부의 부위원장 출신이며, 민주노총 정치위원장과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을 역임했던 이영희까지 결합했다. 이번 현대차 선거는 금속 6기 임원선거와 맞물려 진행되었는데, 전현노는 금속선거에서 민주노동자전국회의(이하 전국회의)에서 분리된 국민파 계열의 현장실천노동자연대(기호 2번)의 수석부위원장 후보로 박상철을 내었고, 지부선거에서는 국민파의 명망가인 이영희가 이경훈 후보의 수행실장을 맡았다. 상황이 이러한데, 이제 누구를 어용이고 누구를 민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혼란종식! 참민주노조운동 선언! 전현노의 선거 대자보 1호의 제목이다. 전현노는 선거 유인물 1호에도 다음과 같이 썼다: 가짜민주 갈아엎고, 참민주노조운동을 선언합니다. 이경훈 후보는, 이전 민주파 집행부들은 말만 민주이지, “부정과 부패, 반칙과 특권에 싸인 사이비민주”(유인물 1호)라고 말한다. ��전현노��(통합21호, 2009년 8월 28일)에 실린 그의 구구절절한 말들을 들어보자.










황소투혼으로 7전8기, 승리의 신화를 만들겠습니다.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고, 피눈물을 토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





그간 현자노조는 부정과 비리의 문제를 미봉책으로 묻어두고, 선거시기만 되면 공허한 반성의 울림만 있어 왔습니다. 노조권력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가치와 타협하고, 자기 조직을 보호하고자 대의를 던져버리는 것을 보며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여섯 번의 도전과 실패, 항상 결선투표에 올랐지만 결국 패배의 쓴잔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어도 이경훈은 안 된다는 현장 제조직간의 견제의 핵심은 ‘어용’이라는 한마디였습니다. 소위 민주파의 실책과 오류, 비리와 부정이 안겨준 상처보다 ‘어용’이라는 한마디는 더 큰 멍에가 되어 제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지들끼리 다 해처먹어도 같은 민주파는 용서가 되지”라는 조합원의 말이 더 가슴 아팠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노동운동에 대한 가치와 철학이 확고하지 못했던 초창기 노조활동 시절, 사람에 대한 의리 하나로 집행부가 되었다가 한 개인의 사욕에 철저하게 이용만 당했습니다. 어용의 멍에를 혼자 짊어져야 했습니다. 당시 같은 동향 후배였던 양봉수열사의 죽음 앞에 제 자신이 한점 부끄럼이 없노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민주파라는 이유 하나로 온갖 비리는 다 저질러 놓고, 선거 때만 되면 양봉수 열사를 모욕하고 이용하는 제정파조직의 비겁하고 파렴치한 이중성 앞에 분노가 끓어오르곤 했습니다. ...










나아가 이경훈 후보는 자신의 약력에서, 민주노동당 활동 경력을 홍보하기도 했고, 선거 기간 지속적으로 이전 민주파 집행부들의 각종 비리들을 다시 상기시키며, “어용몰이, 어용굿판 타령을 집어치워라”고 했다. 그리고 “마녀사냥꾼들에게 경종을 울린다”(��전현노�� 통합18호, 2009년 8월 17일)며, 우리 조직을 어용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열사회 회원에게 같은 진보정당 당원에게 어용이라고 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자신을 어용이라고 공격하는 상대편 후보들에게 역공을 퍼부었다. 이러한 상황들 역시 이번 선거 결과를 분석하는 데에 중요한 열쇠 중 하나이다.





기호3번 권오일 후보의 민주현장은, 민투위에서 분리된 실노회1)(국민파NL성향)와 실노회에서 분리되었던 현장활동혁신을위한자주노동자회2)(이하 자주회, 자주파NL성향)가 2007년 초대 지부 선거를 거치며, 다시 통합된 조직이다. 조직의 대표적 인물로는 6대, 8대 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금속노조 위원장으로 있는 정갑득(민노투-실노회-민주현장)을 들 수 있으며, 현재 전국적으로는 자민통 계열의 전국회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현장은, 이번 선거에 민투위가 나오지 못하는 상황과 기호4번 민노회가 박유기 집행부 시절의 ‘파라솔 선물 사건’으로 조합원들의 신뢰를 잃은 상황, 나아가 전현노와 현장연대의 우파 연합이 달성되지 못한 상황(우파의 표가 분산됨) 속에서, 민주 대 어용 구도로 선거가 진행된다면 자신들이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남의 눈에 티끌만 보고,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그 들보를 오랫동안 주시해오고 있었다는 것이, 이번 선거의 결과로 드러났다.





기호4번 김홍규 후보의 민노회는, 평등사회건설하는민주노동자투쟁연대3)(이하 민노투)에서 탈퇴한 ‘현장학습모임’과 5공장의 ‘동지회’가 주축이 되어, 2005년 결성한 조직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7대 김광식 집행부 기획실장, 10대 이헌구 집행부 사무국장, 12대 위원장을 역임하고, 이번 금속노조 6기 선거에 위원장으로 당선된 박유기(민투위-미래회-민노투-민노회)가 있다. 전국적으로는 지난 2월 출범한 전국현장노동자회(의장 박유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중앙파와 가까운 입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노회는, 지난 번 선거에서는 민주현장과 연합했었고, 이번 선거에서는 박유기 위원장 시절 ‘파라솔 선물 사건’4)이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으면서, 박유기 위원장이 현대차지부 대대의 징계 결의를 근거로 확대운영위에서 정권 1년의 징계를 받는 등 이 문제가 다시 이슈화되어 후보를 내지 않을 것 예상되었으나, 조직적 고려 및 박유기의 금속선거(기호1번)를 위해 독자후보를 내었다는 평가가 많다. 즉,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후보를 낸 것에 대해, 민주현장 정갑득 위원장과의 빅딜설 등 수많은 소문과 추측들이 난무했다. 또한 박유기 자신이 ‘파라솔 선물 사건’에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이것은 금속 및 현자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의, 자신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라고 주장하며, 금속선거에 출마한 것에 대해 양 선거 모두에서 계속되는 논란을 낳았다.















다. 선거의 과정 및 결과










선거 과정에서도 사상 초유의 일들이 일어났다. 9월 15일, 투표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1차 선거에서는 이경훈 후보가 31.39%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해, 결선에 진출했다(문제의 개표함 개표 전 잠정결과, 개표 후 최종 결과는 31.09%).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16일 새벽 개표를 진행하던 중, 판매위원회 경남지회의 투표함에 있던 투표용지가, 투표자(226명) 숫자보다 1장 더 많았던 것이다. 부정투표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뒤지고 있던, 3번 권오일 후보측 참관인이 강력하게 개표 중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선관위는 이에 개표를 중단하고, 회의를 진행한 결과 다른 투표함부터 먼저 개표하고, “문제의 투표함이 당락에 영향을 미칠 경우 재투표를 실시한다”고 결정했고, 모든 참관인들이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3번 후보측을 제외한 다른 후보측의 참관인들은 본래, 문제의 한 표만 무효표로 처리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결과가 나왔다. 개표 결과, 부정투표함에 대해 문제를 가장 많이 제기했던 3번 후보측이 박빙의 차이(86표)로 승리했던 것이다(2위- 3번 권오일 1만978표(27.10%), 3위- 2번 홍성봉 1만892표(26.88%)). 선관위는 고심 끝에, 재투표를 결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누구의 작품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현장에는 ‘2번 후보측의 불복으로 재투표가 강행되고 있다’는 괴문자와 괴문서 사건이 일어나고, 선관위원장이 현장연대 소속이라, 재투표를 강행한다는 이야기도 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바로 현장연대 쪽의 반격이 시작된다: 재투표 문제의 시작은 3번 후보측에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86표 차이로 승리하니, 입장을 바꾸었다.





선거는 사상초유의 부정투표, 재투표 논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것은 2번, 3번 후보측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로 남았고, 1번 이경훈 후보는 꽃놀이패를 쥔 형국이 되었다. 재투표가 결정되어도, 자신이 다시 1위로 결선에 진출할 가능성은 매우 높았고, 2위로 누가 올라와도 양조직 모두 상당한 상처를 입은 상황이었다(3번측은 재투표의 원인을 제공하고, 자신이 승리하자 이를 번복한 책임이 있고, 2번측은 각 선대본이 합의한다면 재투표 방침을 철회할 수도 있다는 선관위의 의견 제시에도, 재투표의 실시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점).





17일, 4위로 확정된 민노회측이 재투표가 확정되더라도, 선거에 참여하지 않기로 발표한다.5) 4번 김홍규 후보의 불출마 선언은, 결선에서 민노회가 3번 민주현장을 지지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결선에서는, 민주연합의 입장에서 민주현장을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6) 여기에 더해, ‘현자지부 제3대 임원선거 관련 사실확인의 건’이라는 판매위원회 경남지회 선관위장의 공문(9월 16일자)이, 17일 공개되면서 재투표의 분위기는 주춤하게 된다. 이 공문으로, 판매위원회 경남지회의 투표함에 왜 한 표가 더 있는가는 의문은 대부분 사라졌고, 이 문제는 부정투표 같은 것이 아닌, 지회 선관위의 실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7)





18일 오전, 홍성봉 후보측에서도 ‘1, 3번 후보측에서 우리 때문에 재투표가 결정되었다고 했던 각종 음해들을 공개적으로 사과’한다면, “조합원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결정하겠다”는 유인물을 돌렸다. 선관위는 일단 문제의 투표함을 개표하고, 이 1장이 문제가 된다면 재논의하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오후 1시 30분 경, 개표를 속개하려고 하던 선관위 사무실에 현장연대 소속의 조직원들이 찾아와, 강력하게 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개표는 다시 중단되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홍성봉 후보는 이미 선거 결과를 수용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는데, 현장의 조직원들이 이에 대해 반발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홍성봉 후보측에 악영향으로 작용했다. 2번측이 지부 선거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으며, 계속 재투표를 강행하려고 한다는 것으로 말이다.





이어진 주말 동안 각 선본과 선관위가 계속적인 대화를 진행했고, 20일(일요일) 오후쯤에는 개표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86표 차이의 석패는 아쉽지만, 현장연대에서도 이렇게 나가다가는 조합원들의 지지를 오히려 더 많이 잃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번 선거로 일정한 지지는 이미 확인했고, 차기를 노리자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21일 오전, 홍성봉 후보측은 이러한 자신들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오후에 드디어 문제 투표함에 대한 개표가 진행되었다. 2번과 3번의 차이는 99표로 더 벌어졌고, 최종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기호 1번 이경훈(12,774표, 31.09%), 기호2번 홍성봉(10,924표, 26.58%), 기호3번 권오일(11,023표, 26.82%), 기호4번 김홍규(6,118표, 14.89%), 기호1번 이경훈, 기호3번 권오일 결선 진출.





이번 재투표 논란은,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조합원들의 선거에 대한 실망을 더욱 키웠다. 2번 현장연대야 낙선했으니 이번에는 더 기대할 것도 없지만, 3번 민주현장의 경우, 이번 논란으로 조합원들의 지지를 더욱 상실했다. 이것은 ‘손 안 대고, 코 푼 격으로’ 1번 진영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더해, 이어진 결선에서 민주현장은 현장연대에 지지를 요청하고, 현장연대는 전현노에 대한 불만8) 등으로, 민주현장을 지지한다. 하지만 어제까지 서로의 등에 칼을 꽂던 조직이 이제 와서 서로 연합한다? 선거 공학에서는 가능한(혹은 필요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조합원들의 정서는 민주현장으로부터 더욱 멀어진다.9)





아무튼 가까스로(99표차로), 실리파 대 실리파의 결선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1차전의 판세는 일정하게 실리파의 손을 들어주고 있고, 그래서 민주현장은 위에서 봤던 바처럼, 선거공학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이는 자신들을 조합원들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악순환을 낳게 된다. 또한 민주현장은 다시 ‘민주 대 어용’이라는 전통적인 전략으로 결선에 임하는데 (물론 민주현장에게 다른 선택은 거의 없고, 이것은 분명 지지층 결집에는 나름대로 유용한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그동안 민주파 집행부들의 각종 잘못들, 민주파 인사 및 조직들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 등으로 이러한 구도는 이미 상당부분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다.10)





9월 24일, 우여곡절 끝에 결선투표가 진행되었고, 투표함이 전국에서 모인 25일 새벽부터 개표가 시작되었다. 개표 초반부터 표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남양, 본관, 판매, 정비, 모비스에서 이경훈이 모두 승리했다. 여기서만 이미 3,834표의 차이를 냈다.





그런데 이어진 울산 3공장 개표에서 다시 문제가 발생하고, 개표가 중단되었다. 3공장 총유권자 수보다 투표자 수가 51명 많았던 것이 문제였다. 이는 곧 선관위의 실수로 밝혀졌는데, 처음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이를 둘러싼 양측의 논란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표차도 많이 나기도 했고, 다시 이런 논란에 휩싸인다면, 이번 선거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양측의 판단이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 다시 개표에 들어가는 데 일정하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침 9시부터 개표는 속개되었다. 3공장에서부터 권오일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권오일은 이은 2공장(합계 표차: 2,204표), 전주(합계 표자: 2,077표)에서 차이를 조금 더 좁혔으나, 아산(합계 표차: 2,359표)에서 다시 벌어졌다. 이은 5공장(합계표차: 1,799표)에서 다시 차이를 좁혔으나, 1공장에서 다시 패했고, 결국 2,248표 차이로 권오일 후보는 패배하고 말았다.





기호1번 이경훈 21,177표(52.56%), 기호2번 권오일 18,929표(46.98%)로, 기호1번 이경훈 후보조가 당선되었다.















2. 패배의 원인










이번 선거 전까지 치러진 14차례의 현대차 선거를 보면, 어용‧실리 세력이 일정한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대(1차-이상범 45.75% 이영복 35.66%, 2차-이영복 54.86% 이상범 43.82%)





2대(1차-이상범 54%, 1차에서 4명 후보 중 이상범 과반수 획득)





3대(1차-이헌구 47.1% 이영복 20.3%, 2차-이헌구 65.3%)





4대(1차-윤성근 44.7% 이영복 24.3%, 2차-윤성근 61.8%)





5대(1차-이영복 27.8% 정갑득 21.9%, 2차-이영복 50.01% 정갑득 48%)





6대(정갑득 60.66% 이영복 37.31% /양자대결)





7대(1차-김광식 33.5% 정갑득 25.5% 이경훈 18.6%, 2차-김광식 58.3% 정갑득 40.8%)





8대(1차-이경훈 34.57% 정갑득 30.30%, 2차-정갑득 51.24% 이경훈 47.62%)





9대(이상욱 54.1% 이경훈 45.2% /양자대결)





10대(1차-이경훈 27.54% 이헌구 27.52%, 2차-이헌구 51.99% 이경훈 47.01%)





11대(1차-이경훈 35.06% 이상욱 20.87%, 2차-이상욱 51.1% 이경훈 47.9%)





12대(1차-이경훈 30.01% 박유기 20.03%, 2차-박유기 49.94% 이경훈 46.08%, 3차-박유기 51.62% 이경훈 47.53%)





1대지부(1차-이상욱 36.24% 홍성봉 33.62% 최태성 29.28%, 2차-이상욱 50.93% 홍성봉 47.98%)





2대지부(1차-최태성 35.99% 윤해모 35.22% 홍성봉 27.63% 2차-윤해모 50.05% 최태성 49.3%)










1~6대 선거에서 노골적인 어용이었던 한빛의 이영복은 두 번이나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위원장에 당선되지 못했을 때에도, 1차 선거에서 평균 20% 중반대의 지지율을 보이며, 결선에 진출했다.





그의 뒤를 이른 이경훈도, 한빛으로 출마해 4명 중 4등으로 예선 탈락한 7대 선거를 제외하면, 8대부터 12대까지 줄곧 1차 선거에서 1위를 차지하며, 결선에 올랐고, 이 때 지지율은 평균(9대 선거 제외, 9대 양자대결은 1차 선거가 아닌 결선으로 계산) 31.8%를 기록하고 있다. 여러 명의 경합 속에도 이경훈의 실리주의 세력을 지지하는 조합원의 비율, 즉 전통적인 지지층이 30%는 있다는 것이다. 2차 투표의 평균 지지율(9대 선거 포함, 12대는 3차 선거결과로 계산)은 당연히 더 올라가, 47%에 이른다. 그는 항상 몇 %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당선의 문턱에서 좌절했었다.





지부 1, 2대 선거에 나섰던 홍성봉도, 1차 투표에서 평균 30%의 지지율의 기록하고 있고, 결선까지 올랐던 초대 지부장 선거의 2차 투표에서는 47.98%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번 선거의 1차 투표 결과를 보면, 이들을 지지하는 표가 더욱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1차 선거에서는 소위 범우파‧실리파의 지지율이 57.67%(이경훈 31.09%, 홍성봉 26.58%)로, 범민주파의 지지율(41.71%; 권오일 26.82% 김홍규 14.89%)을 압도했다. 하지만 홍성봉이 민주현장을 지지했던 것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현장연대를 지지했던 표의 일부(약 1/5로 추정)는 분명히 전현노에 반대해 민주현장으로 갔다. 그래서 결선에서 그들 간의 차이는 다시 좁혀졌다.





그렇지만 민주파와 실리파의 지지율(이경훈 52.56%, 권오일 46.98%)은 과거의 선거들과 비교해, 거의 정확한 수치로 반전되었다. 이경훈에게 항상 패배를 안겨주었던 몇 %가, 이번에는 그에게로 갔고, 민주파와 실리파 사이의 희비도 엇갈리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1차 선거에서 실리파가 어떻게 지금까지의 전통적 지지층을 훨씬 넘는 지지를 얻을 수 있었냐는 것과 2차 선거에서 그 차이가 좁혀지긴 했지만, 지난 수십 년간 당락을 좌우했던 그 몇 %의 표가 왜 과거와는 다르게 움직였냐는 것이다. 이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결과를 낳게 한 우리의 잘못들을 다시금 인식하고, 그 속에서 이번 선거가 이런 오류들을 수정하는 계기, 다시는 그러한 잘못들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계기, 반성할 것은 철저히 반성하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가. 민주 대 어용의 구도가 허물어지다.










한빛에서 출발하는 협조주의‧어용세력이 어떠한 과정으로 실리주의 세력으로 자신을 탈바꿈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이제 반대로 민주파가 얼마나 무원칙하게 실리주의적으로, 그리고 협조주의적으로 변해갔는지를 살펴보자.





현대자동차 노조 설립을 주도했던 민주노동자실천협의회(이하 민실협) 출신인, 2대 위원장 이상범11)은 현장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으나, 90년 임단투에서 파업 중지를 선언하며, 사측과 직권조인을 하게 된다. 이에 반발한 활동가 및 조합원들이 집행부 불신임 투쟁에 나서지만, 아슬아슬한 표차(167표)로 의결정족수(2/3)에 미달되어 부결되었다. 집행부 불신임이 부결되기는 하였지만, 1대 어용집행부와 마찬가지로 위원장이 사측과 직권조인을 했다는 것, 그리고 거의 불신임 직전까지 갔다는 것은 민주파의 큰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3대 위원장은 불신임투쟁의 주역이었던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노민추)를 비롯한 제민주세력의 결집체인, 현대자동차연대투쟁위원회(이하 현연투) 출신의 이헌구가 당선된다. 현연투는 선거 승리 후, 이름을 현대자동차민주노동자회로 이름을 바꾼다. 3대 집행부는 성과급배분을 둘러싸고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나, 32명 구속, 56명 해고, 500여 명 징계되고, 대부분의 집행부와 활동가들이 구속 및 수배된 상황에서 직무대행까지 구속되자 집행부는 사퇴를 선언하고 보궐선거에 들어가 4대 임원 선거가 시작된다.





4대 임원 선거에는 범민주세력의 결집체인 범민주투쟁연합회(이하 범민련)의 윤성근이 당선되는데, 여전히 수많은 활동가들이 구속 및 수배 중인 상황에서 , 집행부와 현장조직들 간의 논쟁과 이로 인한 조직 간의 분열이 가속화되어 이어진 5대 선거에서 초대 이영복 위원장이 다시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5대 집행부 시절, 양봉수열사가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제조직들은 다시 ‘양봉수열사정신계승을위한실천투쟁위원회’로 결집했고, 이후 6대 선거를 앞두고 투쟁위원회는 민투위로 개편되었다.





6대 위원장에는 민투위의 정갑득이 당선되는데, 96년 임투 잠정합의안에 대해 민투위가 부결투쟁을 벌이는 등 계속된 논란이 있었고, 96년말~97년초의 ‘노동법날치기개악저지투쟁’에서 강력한 파업투쟁을 전개하나, 마지막 국면에서 ‘선거로 심판하자’며, 소위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으로 투쟁을 정리하게 된다. 이로써 정갑득 집행부와 민투위 간의 논쟁은 극에 달하고, 97년 7대 선거를 앞두고 정갑득 세력은 민투위를 탈퇴해, 노사랑과 연합하면서 실노회를 결성하게 된다.





7대 민투위 김광식 집행부에서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98년 고용안정투쟁에서, 현대차 노동자들은 36일간 공장을 점거하고 전투적으로 싸웠으나, 결국 집행부는 사측의 정리해고를 수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2000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와 무급휴직을 당했다. 대대적인 불신임투쟁이 전개되었으나, 불신임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7대 집행부는 스스로 사퇴하고, 99년 4월 조기선거가 실시된다. 이후 김광식 등 7대 집행부상집들과 그를 지지하는 민투위 조직원들이, 민투위를 탈퇴하여 미래회를 결성한다.





8대 선거에서는 실노회 소속의 정갑득이 다시 당선된다. 8대 집행부는 실노회와 현노신의 연합집행부였는데, 2000년 총선에서 울산 북구 민주노동당 후보 선출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겪고 분리되었다. 8대 집행부는 또한, 비정규직 고용 16.9%를 합의해 줌으로써 ‘정리해고의 빈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운다’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기본 프로그램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후 사내하청 등을 통해, 비정규직이 물 밀 듯 들어온다. 그리고 뒤이어 유명한 ‘한겨레 광고비 사건’12)이 불거지면서 집행부는 사퇴하게 된다. 이 사건의 관련 책임자 징계 문제를 두고, 실노회에서 자주회가 분리된다.





이렇게 7대에 이어, 8대 민주파 집행부 역시 자신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사퇴하게 된다. 이어진 9대 선거는, 8대 집행부의 잔여임기(6개월)를 채우는 집행부를 구성하는 선거였고, 따라서 대부분의 현장조직이 차기를 위해 선거에 출마하지 않은 상황에서 민투위의 이상욱이 당선된다. 당시는 대우자동차 투쟁, 한통계약직투쟁, 캐리어 사내하청투쟁 등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와 구조조정에 맞서 전국적인 투쟁의 불길이 타오르던 때였다. 2001년 6월 5일, 파업 중이던 효성에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투쟁은 전국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이상욱 집행부는 실질적인 연대투쟁을 조직하지 않았다. 또한 7월 5일 결의된 민주노총의 하루 총파업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가장 전투적인 현장조직으로 알려진 민투위 소속의 이상욱 집행부는, 말로는 강력한 연대파업 총파업을 이야기했지만, 당시 그들에게 남겨진 성과는 1인당 1백만 원의 성과급이었다.





이어진 10대 선거에서는 미래회, 현노신, 현지사가 통합한 조직인 민노투의 이헌구 전 위원장이 다시 당선된다. 이헌구의 현지사는 8대 선거에서 이미 일정한 지지를 확보한 바 있고, 8대 선거에서 실노회와 연합했다 내부 갈등으로 분리된 현노신과 7대 집행부의 다수를 구성했던 미래회와 연합하여 다시 위원장에 올랐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 연합의 힘에 더해, 3대 집행부 시절 투쟁에 대한 조합원들의 부채의식도 이헌구가 다시 위원장에 당선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10대 집행부는 3개의 조직이 각자의 지분을 가지고 연합했던 집행부여서, 상집 내 갈등이 끝일 날이 없었다.13) 또한 집행기간 중의 임단투는 소리만 요란했지,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평가가 많았으며, 당시 이미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었던 아산 등의 비정규직문제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이다.





그런데 나중에 10대 집행부는 이보다 더 큰 사건들에 휩싸이게 된다. 2005년 민주노조들에 대한 채용비리 수사가 현대차까지 미쳤는데, 이 때 10대 집행부 상집을 포함한 많은 전‧현직 노조 간부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된다. 결국 몇몇 간부들의 비리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또한 2007년 1월, 이헌구 전위원장이 2003년 사측으로부터 2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때는 12대 박유기(10대 집행부에서 사무국장을 역임) 위원장이 성과급 투쟁을 진행 중인 때여서, 이를 흔들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짙으나, 아무튼 이것은 사실로 확인되었고 이헌구 전위원장은 퇴사했다.





11대 선거에서는 민투위의 이상욱이 다시 당선되었다. 2004년 9월 22일 노동부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21개 업체, 울산공장 12개 업체 및 아산공장 9개 업체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렸다. 2004~2005년 불파투쟁이 시작되었다. 2005년 2월 28일 있었던, ‘비정규개악안 저지 및 불법파견 투쟁 승리를 위한 원하청 결의대회’에서 이상욱 위원장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강의 남쪽에 있는 얼룩말들이 풀을 모두 뜯어먹었으면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강을 건너 강의 북쪽으로 이동해야 살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 투쟁은 거부할 없는 역사의 요구며, 오늘을 기점으로 정규직‧비정규직이 더욱 똘똘 뭉쳐 반드시 승리하자.”





하지만 이상욱 집행부는 또 다시 말과 행동의 다름을 보여주었다. 이상욱 집행부는 불법파견 철폐를 외치며, 처절하게 투쟁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신했다. 집행부는 연대의 손을 내밀기는커녕, 8월 12일 비정규직 독자파업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고, 급기야 9월 4일 자결한 비정규직 노동자 류기혁 열사에 대해, “유서가 없다”, “해고의 사유가 있었다”, “열사가 아닌 것 같다”는 막말을 해댔다. 9월 8일, 집행부는 불법파견노동자의 정규직화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사측과의 임단협을 서둘러 잠정 합의해 버렸다.





이 임단투 및 불파 투쟁 과정에서, 앞에서 말한 채용비리 사건이 터진다. 물론 이것은 현자노조 죽이기, 노조 간부들에 대한 불신 조장 등을 목표로 한 검찰의 표적수사라는 의혹이 짙다. 하지만 수많은 전‧현직 노조간부들이 연루된 이 사건에서, 집행부는 빠른 징계 등의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며 비판을 받았고, 10대 집행부 세력을 포함한 제 민주파 조직들은 직접적 관련 여부를 떠나, 모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2대 선거에서는 민노회의 박유기가 당선된다. 2006년 2월 27일, 그동안 몇 차례 통과가 미루어졌던 비정규직 법안이 환노위에서 날치기로 통과된다. 28일, 민주노총은 총파업에 돌입한다. 하지만 실질적이고 위력적인 총파업은 이번에도 조직되지 못한다. 이 날은 4시간 파업, 3월 2일에도 주간 4시간, 야간 2시간 부분 파업만을 벌였다. 4월 14일, 21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어진 6~7월 임투는,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졸속으로 합의했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이다. 생산목표달성에 의한 1백50% 성과급 차등지급에 합의했고, 임금도 최근 중 가장 낮은 인상률로 합의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라인을 멈춰 세웠다. 하지만 집행부는 비정규직 파업에 실질적으로 연대하지 못했고, 대체 인력 투입을 방치했다. 뒤늦게 집행부는 중재에 나섰지만, 9월 1일 남문수 열사가 자결했다. 이제야 집행부는 원‧하청 공동투쟁에 나섰지만, 투쟁보다는 교섭에 집중했고, 9월 15일 사측‧정규직노조‧비정규직노조의 3자 협의의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집행부는 이를 두고, “임금협약안을 마련하는 중요한 성과를 가져왔으며, 노조활동을 인정받았다. 단체협약이 8개 조항이지만, 비정규직의 투쟁과 정규직의 연대로 이루어진 성과”라고 평가했지만, 비정규직노조(울산)에서는 상당한 반발이 일어나, 박현제 비정규직노조위원장은 사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아산과 전주에서는 이 안이 통과되었다. 집행부(현대자동차 원하청연대회의)는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안이라고 했지만, 한 쪽에서는 엄청난 반발이 있었던 것이다.





2006월 9월, 앞서 말한 ‘파라솔’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고, 그 해 말 박유기 위원장은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사퇴하게 된다(단, 성과급 투쟁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다음 해 초까지는 직무를 유지한다). 민주파 집행부가 지난 7대, 8대에 이어 다시 한번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하게 된 것이다.





이어진 현대차지부 1대 선거에서는 민투위의 이상욱이 세 번째로 당선된다. 그런데 2005년 채용비리, 2006년 파라솔 사건, 2007년 이헌구 전위원장 구속에 이어, 2007년 6월에는 이상욱 위원장의 친형을 포함한 친‧인척 비리가 폭로된다. 이 위원장의 친형과 동서가 협력업체의 사장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단 이 위원장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해명되었으나, 민투위 내부에서 큰 논란이 일었으며, 민투위은 큰 타격을 입었다.





바로 이어진 한미FTA 반대 총파업에서, 집행부는 4일간이었던 총파업을 2일로 축소했다. 보다 집중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했지만, 이에 대한 현대차 활동가들의 실망은 컸다. 또한 이어진 임단투에서는 조합원 투표를 통해 파업이 가결된 상황이었으나, 9월 4일로 예정된 파업을 유보하고 협상에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4)





지부 2대 위원장에는 다시 민투위 출신인 윤해모가 당선되었다. 윤해모 집행부 역시 이전의 민주파 집행부들과 마찬가지로, 전국적인 투쟁에 실질적으로 결합하지 못했다.15) 2008년 여름, 광우병 쇠고기수입문제로 터진 반이명박 투쟁은 민주노총과 금속의 강력한 연대투쟁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속과 현대차는 7월 2일과 10일, 언제나처럼 2시간 부분파업으로 대답했을 뿐이다.





이어진 임단투에서도 집행부는 소위 ‘의견접근안’을 잠정합의하려 했으나, 대의원들이 협상장까지 막아서며 강력 반발하자 이 안을 철회하고 재협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9월 2일, 기존 의견접근안에 일부 문구만 바꾼 안을 사측과 잠정합의했는데, 조합원 투표에서 부결되고 만다. 다시 협상에 들어간 집행부는 두 번째 잠정합의안을 내놓고, 우여곡절 끝에 두 번째 합의안이 조합원 투표에서 통과된다. 하지만 이상의 논란으로 집행부는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윤해모 위원장은 사퇴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로 다시 사퇴를 철회한다. 하지만 1년 뒤, 이 글 처음에서 보았던 것처럼 2009년 임단투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다시 반복되고, 윤해모 위원장은 결국 사퇴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는 쌍용차에서 공권력에 맞선 처절한 투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현대차는 위에서 말한 상황들을 이유로, 6월 10일부터 시작된 금속노조의 파업 일정에 전혀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집행부 사퇴 뒤의 혼란을 수습할 104차 임시대의원대회(6월 25~26일)에서 현대차대의원들은, 쌍차연대 파업을 부결시켜버렸다.





이상이 지난 수 십 년간의 민주파 집행부의 역사이다. 물론 여기에는 적지 않았지만, 끝까지 싸워 승리한 투쟁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싸워서 이긴 것에 주목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성과에 안주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필자는, 나의 능력 부족과 지면의 탓으로 민주파 집행부의 실리와 타협의 역사를, 배신과 비리의 역사를 더 적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지금 과거의 잘못들은 더 세세하게 폭로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한 수치를 느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반성할 수 있고, 변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민주노조의 기본을 자주성, 민주성, 계급성, 전투성, 연대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역사는 어떠한가? 실리와 타협이 난무하지 않았는가? 각종 비리와 의혹이 꼬리를 물지 않았는가? 연대는 방기하거나 순전히 형식적이지 않았는가? 여기에 더해 민주파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의 역사도 말해져야 한다. 집행부만 끝나면 새로운 조직이 다시 만들어지고, 평소에는 서로 못 잡아먹을 듯 싸우다가도 선거 때가 되면 다시 손을 잡고, 심지어 자신들이 어용이라고 부르던 세력과도 당선을 위해서라면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제는 아예 어용이라고 부르던 세력의 품으로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어용 세력은 실리주의의 옷을 입으며 점차 어용의 색채를 지워갔고, 민주 세력은 자주성, 민주성, 계급성, 전투성, 연대성을 잃어버리며 점차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선거에서, 누가 민주고 누가 어용이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장의 정서는 이것이었다: 그 놈이 그 놈이다!















나. 금속 산별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기업지부해소 문제










2006년 6월 29일, 현대차는 조합원 71.54%의 찬성으로 금속산별로의 전환을 결의한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1일 금속산별완성대대(금속노조 18차 임시대대)를 통해 역사적인 금속 산별의 시대가 시작된다.





12대 박유기 집행부는 그 어느 집행부보다 산별 전환에 적극적이었다. 2006년 산별 전환 투표는 2006년 임투 과정에서 진행되었는데, 집행부가 산별전환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당시 발행된 ��임투속보�� 4호(2006년 6월 13일자)의 한 부분을 그대로 보자.





6월 산별노조 전환 선택이 아닌 필수!





정권과 자본의 총체적 탄압을 저지하는 길은 산별노조 뿐















노동조합의 핵심사업인 6월 산별노조 전환을 앞두고 과정과 절차에 충실하고 4만3천 조합원이 함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기 위해 조합원교육을 실시했고 계획한 일정에 따라 빠짐없이 실천해 나가고 있다. 이제 기업별노조로는 더 이상 정권과 자본의 총공세에 맞서 노동자의 권리를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 특히 자동차산업의 무차별 해외공장 확대로 인해 노동자들의 고용이 점점 악화되는 시점에서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과감히 뛰어넘어 16만 금속노동자가 하나 되어 막가파식 탄압을 저지해야 하는 중차대한 현실에 놓여 있다.





아울러 비정규직 개악법 강행처리, 노사관계로드맵 등을 통해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수많은 조합원들의 피와 땀의 노동조합을 19년 전으로 돌려 놓겠다는 악법을 저지하는 길은 산별노조뿐이며 전환하지 못한다면 이후 노동조합의 미래는 없다. 6월 금속노동자가 하나 되는 길에 4만3천 전 조합원이 함께하여 노동운동의 새역사를 만들어 노동자는 하나라는 것을 정권과 자본에게 똑똑히 보여 노동자가 단결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주자.



















































<노동3권을 가장 잘 확보하여 노조활동 전개>


















































하지만 마치 산별만 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던, 장밋빛 약속들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금속산별은 비정규직 악법의 통과도 막아내지 못했고, 한미FTA도 막아내지 못했으며, 광우병 쇠고기수입도 막아내지 못했다. 산별교섭은 말로는 이런저런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조합원들에게 느껴지는 실질적인 성과는 거의 없었다. 현장은 산별전환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제는 묻지마 산별과는 반대로, 산별 무용론이 확산되었다.





거기에다 2009년 9월로 예정된 기업지부 해소 문제가 대두되었다. 많은 조합원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있던 현대차지부도 해소되면, 상황이 더 나빠지지나 않을까? 특히, 전국에 흩어져 있던 판매‧정비지회 조합원들이 더욱 불안을 느꼈다. 7월 13일 금속대대에서도 이 문제가 최대 쟁점이었다. 기업지부를 해소하자는 대의원들은 말했다: 지역지부로 전환되어도, 당신들의 투쟁에 지역지부가 금속노조가 나설 것이다. 하지만 이에 즉각 반대하던, 한 현대차 대의원의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남아 있다: “쌍차를 봐라! 쌍차 투쟁을 금속이 어떻게 하고 있나? 그런데 우리 투쟁을 금속이 도와줄 것 같나?”16)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조합원들에게,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기호 1번 이경훈 후보와 기호 2번 홍성봉 후보는 일찌감치, 기존 금속산별을 비판하고 기업지부가 살아야 한다며 자신의 입장을 정했다. 그리고 산별추진의 주요 세력이었던 민노회는 파라솔 사건에 더해, 산별 추진의 멍에까지 쓰고 지지율이 급감했다. 특히, 7월 13일 금속노조 24차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현장발의안>이 바로 박유기의 입장이고, 민노회의 안이라는 이야기가 돌면서 지지율은 더욱 급감했다. 민주현장은 이미 금속노조 정갑득 위원장으로 인해, 투쟁도 제대로 못하고 실리도 챙기지 못한 금속산별의 모든 비판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 선거에서도 기업지부해소에 대해 어떤 명확한 입장도 내놓지 못하면서, 선거의 주요 이슈에서 비켜나 버렸다. 권오일 후보의 입장에서는 그도 그럴 것이, 금속산별을 비판하면 자신의 조직을 비판하는 것이 되고, 산별 강화를 내세웠다간 4번과 함께 지지율이 더 떨어질 분위기였던 것이다.17)





금속 산별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기업지부해소에 불안한 조합원들의 정서를 선점한 기호 1, 2번 후보들은, 이 문제를 선거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이경훈 후보의 경우에는 직접 판매‧정비지회에 대한 순회 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이경훈의 이 전략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1차 투표에서 이경훈은 정비에서 44.42%, 판매에서 30.55%의 지지를 기록했고, 2차에서는 정비에서 61.92%, 판매에서 57.12%의 지지를 기록했다.





장밋빛 미래만을 약속했던 ‘묻지마 산별’과 투쟁을 방기했던 금속산별은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다. 현대자동차의 현 상황










현대자동차의 2008년 매출액은 32조 1천억 원으로, 사상 최대였던 2007년의 30조 6천억 원을 넘어섰다. 영업 이익도 1조 8천억 원에 이른다. 하지만 2009년 1분기에는 작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세계공황으로 인해,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23.1%, 영업 이익은 -70.9%나 떨어졌다.





그런데 현대차는 이번 2분기에 상당히 선전한 결과를 발표했다. 매출액은 전기 대비 34% 증가했으며, 영업 이익은 327.4% 증가했다. 이 수치는 사상 최대를 기록했던 작년에 비해서도 영업 이익(작년동기대비)이 -0.8% 밖에 감소하지 않는 수치였다.





하지만 세계 공황은 회복될 기미 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 속에서 지금까지 현대차는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이럴 때 조합원들의 정서는 투쟁보다 실리를 택하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투쟁보다는 지금이라도 바짝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져간다.










*               *              *










이렇게 지난 수십 년 동안 집행부에 있으면서, 각종 비리와 의혹으로 배신과 타협으로, 실망과 환멸을 안겨준 민주파 집행부에게 이제 더 이상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없었다. 조합원들은 이미 봐줄 만큼 봐주었다. 거기에 민주파 인사들까지 함께하며 어용 색깔을 벗어버린 이경훈은, 자신은 예전의 자신이 아니라고 하며 과거는 충분히 반성했다고 한다. 이미 ‘그 놈이 그 놈’이라고 생각하던 조합원들은, 7번이나 위원장에 출마했고 6번이나 어용으로 몰려 낙선한 이경훈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에, 이경훈은 점점 다가오는 기업지부해소에 불안한 조합원들의 정서를 파고들었다. 또한 세계적 공황이 엄습하고 있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지금의 상황에도 몸을 기댔다. 그는 이야기했다: 배신은 가라. 가짜민주를 갈아엎고 참민주노동운동을 선언합니다. 기업지부를 강화하는 것이 금속노조를 강화하는 것이다. 뒤쳐진 10년 성과, 이경훈이 되찾는다. 09임단투 중공업의 벽을 넘어 무너진 자존심을 바로 세운다!





조합원들이 우경화되었다고, 실리만 찾는다고 탓할 것은 없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누가 뭐래도 현장조직들 자신들 책임이 가장 크다. 조합원들이 우경화되었거나 우경화되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할 일은 본래부터, 그러한 경향들과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조합원들의 지지와 신뢰를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측의 선거 개입이 더 악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탓할 것도 없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에서도 드러났듯이, 현대차 사측은 노무관리비에만 500억 원을 쓰고 있는 기업이다. 사측의 개입은 본래부터 변수가 아닌 상수이고 우리는 자신의 활동을 통해 조합원들의 지지와 신뢰를 구축하고, 이것에 맞서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조합원들의 정서가 어떻다, 정세가 어떻다, 상황이 이렇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결과를 낳았던, 우리의 과거를 더욱 수치스럽게 폭로하고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선거의 패배를, 그러한 과거를 철저하게 반성하는, 그리하여 그러한 치욕의 역사를 완전히 도려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3. 전망










이경훈은 위원장에 당선되자마자 강하게 금속노조를 공격했다. 9월 28일, 그는 당선 기자 간담회을 열어, “금속노조가 교섭‧체결권을 관장하는 현 체제로는 개별기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이를 되찾아와 고용‧임금‧복지 문제는 개별기업 노조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금속노조 한 해 예산 100억 원 중 43억 원을 우리가 대줬는데 해준 게 없어 조합원이 허탈감에 빠졌다”며, “금속노조가 산별체제를 고집한다면 조합원의 뜻을 물어 결단할 수 있다”고도 했다. 같은 날, 전현노는 ‘12대 집행부 위원장 박유기 선물비 관련 조합비 강제 인출에 대하여’라는 대자보를 현장 곳곳에 붙였다. 외환은행이 대법원 판결에 의거하여 9월 30일 조합비를 강제 인출할 것이라는 것이 대자보의 주 내용이었다. 당시 1차 투표에서 승리하고, 금속노조 위원장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던 박유기에 대한 선제공격이었다.





이에 박유기 위원장은 10월 6일,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당선 이후 첫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금속노조 위원장으로서 현재의 금속노조 규약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교섭권 위임 문제는 규약을 변경하기 전에는 현행 규약에 따라야 한다”고 반격을 가했다. 즉, 교섭권을 위임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10일에는 현대차지부가 지난 1일부로 금속노조에 올라가는 조합비 납부를 잠정 보류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현대차지부는  ��출범준비�� 2호(10월 13일자)에, “금속노조 집행부가 인수인계 과정의 집행 공백기”라 “지역지부 재편과 관련해 명확하게 결정된 사항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현재까지는 현대차지부가 금속노조에 조합비 100%를 납부하면, 기금 16: 본조 30: 기업지부(지회포함) 54의 비율에 따라, 금속이 30%(기금은 16%)를 가지고, 현대차지부에 54%를 내려주었다. 그런데, 2006년 완성대대의 결정에 따르면, 이것은 2009년 9월 기업지부 해소 시까지이고, 이후는 기금 18: 본조 26: 지부 16: 지회 40의 비율이 적용된다. 즉, 현대차의 몫은 54%에서 40%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차지부는 기업지부해소 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가를 확인할 때까지, 금속노조의 돈줄을 쥐고 있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측은 팽팽한 기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양측 모두에게는 짊어진 문제가 많다. 먼저 박 위원장 측은, 자신의 징계에 대해 금속노조와 현대차지부에 재심을 청구해 놓은 상황이다. 재심의 결과에 따라, 최악의 경우 금속노조 위원장직에서 물러나야 할 경우도 생긴다.18) 그런데 이 재심의 징계 주체를 두고도, 금속인지 현대차인지 말들이 많다. 그래서 논란은 더 심각하다. 일단 12일 오후 열린 현대차지부 확대운영위원회에서는 재심 안건을 처리하지 않았다. 이 문제와 관련해, 외환은행이 계속적으로 조합비의 강제인출을 시사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104차 대대에서 결정된 조합의 구상권 청구도 박유기에게는 고민일 것이다. 대대의 결정은, 구상권 청구 범위에 12대 집행부(12대 집행부임원 6명+이혁훈 총무실장+박재수 업체사장)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박유기는, 11월 중에는 반드시 기업지부를 해소하겠다고 말하는데 사실 9월 2일 열렸던 후보정책토론회에서 본인 스스로 밝혔듯이, 그에게도 뾰족한 수는 없다. 단지, 다양한 의견들을 들어보고 발전적인 방향을 함께 모색해보자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 문제도 박유기에게는 난제이다.





일단 13일 오후 박유기는 현대차지부에서 이경훈과 면담을 가질 예정인데, 이 자리에서는 아마도 일단 조합비 배분 비율을 당분간 현행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박유기 측이 한 발 양보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이상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갈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박유기가 안고 있는 문제는 낮은 지지율로 당선된 것이다. 금속 산별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과 무관심 속에, 1차 투표에서는 기아차에서만 3,600표의 무효표가 나왔다. 63.9%의 낮은 투표율을 보인 2차 찬반투표에서 박유기는, 자신이 위원장을 지냈던 현대차에서조차 과반에 못 미치는 49.22%의 찬성 밖에 얻지 못했다. 따라서 박 위원장의 당선은 조합원들의 그에 대한 신뢰와 지지라기보다, 전(前)국민파 집행부 심판에 따른 반사이익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즉, 박 위원장이 전(前)국민파 집행부와 차이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조합원들의 이반은 불 보듯 뻔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박유기 위원장은 대중들에게, 예전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파나 중앙파나 결국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인식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놈 저 놈에게 다 실망한 대중들의 지도부에 대한 신뢰는 더욱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위원장 측에도 문제는 많다. 전현노는 선거를 앞두고 다양한 세력들이 연합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따라서 상집 인선을 둘러싸고, 벌써부터 수많은 잡음들이 들여온다. 이 위원장 자신의 계파들, 이번에 현장연대에서 탈퇴한 이상수(현장연대 의장 역임), 문성곤 계파들, 그리고 전 실노회 출신에 이영희, 박성철까지. 상집 인선이 늦어지면서, 선거 공약과는 다르게 임단투 재개 시점도 점점 미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집행부는 “사업부 대표 및 대의원 선거가 불가피하다”며, 임단투 재개를 더 멀어지게 하는 결정을 내리고 있다. 이 선거 이후 임단투를 재개한다면, 빨라도 11월 초~중순은 되어야 임단협의 재개가 가능할 것이다. 조합원들은 벌써부터 공약을 깨고 있다고 술렁거리고 있다.





현대차 사측도 고민이 많을 것이다. 임단투에서 떼어줄 것은 과감하게 떼어주고 실리주의 집행부에게 한번 힘을 실어줄 것인가?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이 이익일 수도 있으나, 한번 떼어준 것을 다시 빼앗아 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세계 경제 상황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쉽지 않은 고민일 것이다.





그럼 조합원들에 대한 전망은 어떠한가? 조합원들은 일단 실리를 택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될 것이다. 실리의 열매라는 것이, 처음에는 달고 맛있게 느껴지나, 알고 보면 독이 든 사과였다는 것을. 지금은 비정규직 동료들을 방패로 삼아 자신들의 실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에는 이런 것들이 다 자신 손으로 자기 발등을 찍은 것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조합원들이 실리파에게 배신당했다고 해서, 또 실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그들이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마라.19)





미국 공산당은 10년 동안 꾸준히 투쟁한 결과 현장으로부터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30년대 벌어진 투쟁들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20) 사상 최대의 대공황이 본격화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대중들의 그러한 신뢰와 지지가 있는가? 없다면, 왜 그랬는지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또 반성하자.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뼈를 깎는 노력으로 그러한 역사와 철저하게 단절하고, 대중들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쌓아 나가자!





역사의 수레바퀴는 때로는 진흙탕 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있고, 돌부리에 부딪혀 덜컹거릴 수도 있지만 끝내는 앞으로 전진한다. 동지들이여, 다시 시작하자! <노사과연>






1) 6대 정갑득 집행부 시절에 있었던, 96년 임투 및 96년 말~97년 초의 노동법개악저지투쟁 과정에서의 민투위와 노조 집행부 사이의 갈등, 그리고 집행부의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 노선에 대한 민투위와 노조 집행부 사이의 갈등 등이 1997년 7대 임원선거를 앞두고 있던 시점에서 극에 달하며, 정갑득 등 6대 집행부의 중심 세력과 노사랑이 통합하여 구성된 조직이다. 이 때 민투위에서는 정갑득 등 조직의 30-40%가 대거 탈퇴했으며, 이때가 현자 내의 PD세력과 NL세력의 분화가 시작된 시점이다.






2) 8대 정갑득 위원장이 ‘한겨레 광고비 사건’으로 자진 사퇴하면서, 조직 내에서 관련자 징계 문제가 불거졌고, 이후 징계요구자들이 실노회를 탈퇴하여 2001년 새롭게 결정한 조직이다. 하지만 광고비 사건 관련자 징계 문제는 직접적인 탈퇴의 계기였고, 더 깊은 곳에는 이미 실노회 내에 존재하고 있던 노선 상의 차이가 있었다. 실노회는 ‘자주민주통일’로 대표되는 노선이나, 이들 간에는 정갑득 등의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 사회적 합의주의에 더 중점을 두는 노선과 이와는 상대적으로 자주, 통일에 더 중점을 두는 노선이 있었다. 자주회는 후자의 노선이 실노회로부터 분리된 조직이다.






3) 2001년 미래를여는노동자회(이하 미래회),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이하 현지사), 현노신이 통합해 결성한 조직이다. 미래회는, 7대 김광식 집행부가 98년 정리해고 수용 합의 등으로 민투위와 갈등을 빚다, 집행부 상집들과 이들을 지지했던 민투위 조직원들이 민투위를 탈퇴해 99년 결성한 조직이다. 현지사는, 98년 고용안정 투쟁이 마무리된 후 98년 말 실노회에서 탈퇴한 3대 위원장 출신의 이헌구 세력과 생기사업본부를 중심으로 활동해 오던 ‘생존권사수투쟁위원회’(이하 생투위)가 통합해서 결성한 조직이다. 현노신은 2대 집행부(민주노동자실천협의회-최초의 노조설립추진세력) 세력들이, 92년 결성한 조직이다. 세 조직의 통합 시에, 현노신에서는 8대 집행부 부위원장이었던 이성근을 중심으로 한 일부 활동가들이, 통합에 반대하며 현노투를 결성했다.






4) 2006년 5월 12대 박유기 위원장 시절, 노조창립일 조합원 선물용으로 파라솔을 구입(구입대금 13억)했으나, 파라솔은 저질 불량품이었고, 자금이 부족해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던 파라솔 납품업체에 허위납품계약서를 작성해 줘 업체가 외환은행으로부터 4억 원을 대출을 받았으나, 그 업체는 결국 부도가 나서 채권자인 외환은행이 현대차노조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박유기 위원장은 자진사퇴했었다. 지난 6월 대법원은, 현대차노조에게 5억 4천여만 원(채무원금4억 원+이자1억2천3백여만 원+소송비용1천8백만 원)을 변제할 것을 판결하였다. 현재 박유기는, 이 사건은 당시 집행부의 이혁훈 총무실장이 사기를 당한 것이며, 다른 집행부의 비리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금속노조와 현대차지부에 자신의 징계에 대한 재심을 청구한 상태에서 금속노조 6기 임원선거에 출마해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5) 민노회는 이번 선거에서 14.89%의 득표율에 그쳐, 선물 사건, 박유기 위원장의 금속선거 출마,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금속산별 논쟁에서의 민노회의 입장(소위 ‘박유기 안’) 등으로 입은 상처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울산 5공장에서 32.45%로 1위를 차지하는 등 아직까지 조직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5공장은 민노회의 최대 지지기반이다. 비록 이번 선거에서 1위를 하기는 했으나, 이전보다 지지율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6) 이번 선거는 금속노조 선거와 맞물리면서, 수많은 설들과 추측들이 난무하는 선거였다. 여기서 제기되는 설이 이른바 전국회의-박유기 빅딜설이다. 4번 김홍규 후보는 인지도 등에서 볼 때, 원래부터 버리는 카드였고, 금속선거의 빅딜(‘쇼당’패)을 위해 출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속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은 전국회의는, 상식적으로 볼 때 범NL계인 현장실천노동자연대측의 김창한 후보를 지지해야 하나, 박유기를 지지하고 대신 현대차지부 선거에서 민노회가 민주현장을 지지하기로 했다는 설이다(앞서 말한대로 현대차지부 선거의 기호1번인 전현노가, 금속선거의 현장실천노동자연대와 관계가 있다). 여기에 박유기가 현대차지부와 금속노조에 신청한 재심문제까지 들어가면 이러한 소문은 더욱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문이고, 전국회의 공식적 입장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얽히고 설킨 부르주아정치공학보다도 더한 이합집산 합종연횡이, 조합원들에게 결코 좋은 이미지로 다가갈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현대차지부의 결선에서, 민노회 지지표의 상당부분은 ‘민주연합’의 입장에서, 민주현장으로 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7)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남 제1투표소의 투표 종료 후 투표용지가 1장이 남아, 선관위원 3명과 참관인(기호 1, 2번측 참관인 2명, 3, 4번측은 참관인을 파견하지 않았음)이 논의한 끝에, 백지를 투표함에 넣기로 합의하고 백지투표 하였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사실 관계 요청시, 저희 경남지회 선관위에서 적극적으로 사실확인에 임하겠음.






8) 전현노 자체가 현장연대를 깨고 나간 조직이고, 이번 선거 직전 전현노-현장연대의 선거연합이 무산되면서 현장연대를 탈퇴한 인물들이, 기호1번 전현노측의 수석부위원장, 사무국장 후보로 선거를 치루고 있다.






9) 어차피 선거는 전통적인 지지층들이 있고, 그 중간에 있는 부동층의 표심이 승패를 좌우한다. 민주현장의 선거전술은 이들을 자신들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했다. 또한 현장연대를 지지했던 성향의 표가, 홍성봉이 민주현장을 지지했다고 해서 얼마나 민주현장으로 올 지도 의문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도(1차 결과와 2차 결과를 비교해보면), 민노회를 지지했던 표가 대부분 민주현장을 지지했다고 가정할 때, 현장연대를 지지했던 표 중 1/5 정도만이 민주현장을 지지했고, 나머지 4/5는 전현노를 지지했다.






10)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11) 이상범은 노동자대투쟁 직후인 1987년 7월 24일 결성된 현대차노조 임시집행부 위원장으로, 현대차노조의 설립을 주도했던 사람 중 한 명이다. 1대 집행부 선거에서 1차에서 1위로 결선에 진출했으나, 이영복에게 밀려 낙선하고, 88년 9월 노조임시집행부 출신들과 함께 민실협을 결성했고, 89년에는 민주노조실천노동자회(이하 민실노)와 함께, 현대중공업 투쟁을 지지하기 위한 연대파업을 조직했다. 2대 선거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로 1차에서 과반을 득표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직권조인 등의 문제로 현장으로부터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92년 현노신을 결성했고, 95년에는 이헌구, 윤성근 등 전직위원장 출신들과 함께 ‘양봉수열사정신계승을위한실천투쟁위원회’에 참여했다. 97년 노발연과 조직 통합을 이루고, 현노신 후보로 7대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1차에서 낙선했다. 98년~2000년까지 울산시의원을 지냈다. 99년 현노신은 실노회와 연합으로 8대 집행부를 구성하게 되는데, 2000년 민주노동당 울산 북구 국회의원 선거 후보를 둘러싸고 실노회와 갈등을 겪었고, 연합집행부는 깨지게 되었다. 2002년 민주노동당 후보로 울산북구청장에 당선되었으나, 2004년 공무원노조 파업에 참가한 공무원을 징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이 선고돼 직무가 정지되었다. 2006년 5월 울산북구청장을 사퇴했다. 2007년 대선에서는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민주신당의 손학규 예비후보를 지지했다.




















12) 2000년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저지를 위한 자동차 4사 공동투쟁’을 한겨레에 광고하기 위한 비용을 회사로부터 빌려 지급한 사실이 회계감사 과정에 밝혀지면서, 8대 집행부가 사퇴하게 된 사건이다.






13) 이러한 갈등 끝에 결국, 박유기 등 (구)미래회 세력이 11대 선거 패배 후 조직적으로 민노투를 탈퇴해 현장학습모임을 결성하게 되고, 이 모임이 2005년 동지회와 연합해 지금의 민노회를 탄생시킨다.






14) 하지만 파업 없이 상당한 성과를 얻어내었다는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15) 물론 이것은 현대차지부만의 문제가 아닌, 금속 중앙 나아가 민주노총까지 연결되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16) 그런데 문제를 이렇게 제기하면 순환논법의 오류에 빠진다. 현대차지부가 금속의 1/3 동력(실제적으로 이보다 훨씬 큰 동력)을 차지하고 있다. 24차 대대에서 금속이 쌍차를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주장들이 말하고 있던 가장 큰 이유는, 현대차가 쌍차투쟁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투쟁을 방기하고, 사회적 합의주의에 경도되었던 금속집행부는 당연히 비판되어야 한다. 또한 현대차가 어떤 결정을 내렸건, 금속지도부는 명백히 쌍차투쟁을 방기했다.






17) 물론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갑득 집행부가 내놓은 안도 산별 강화와는 거리가 먼 기업지부의 실질적 위상과 권한을 거의 그대로 존속시키는 안이다. 하지만 이것보다도 더 기업지부의 존속을 원하는 세력들은, 이 안에도 불만이 있다.






18) 현재 구도로 볼 때, 아마도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19) 그들이 곧바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처럼 ‘미워도 다시 한 번’일 뿐, 진정한 신뢰와 지지가 아닐 것이다.






20) 다음을 참조하라. 진보노동당, 「1930년대 대공황: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노동자계급이 결사적으로 투쟁했다」, ��정세와 노동�� 제45호(2009. 4.),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손미아, 「공황시기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의 교훈」,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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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 현대차 노조 선거의 교훈[1] 김해인│편집출판위원 2009-10-23 3746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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