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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현장 >
제목 코스콤 비정규지부의 475일 동안의 투쟁 ―우리는 결국 자본에 졌다. 그러나 학습하고 실천하는 노동자다
글쓴이 정인열 ∣전 증권노조 코스콤 비정규지부 부지부장, 미학세미나 팀원 E-mail send mail 번호 111
날짜 2009-06-02 조회수 4363 추천수 137
파일  1243937207_코비.hwp

  













모든 비민주적인 것과 다수의 횡포











모든 비민주적인 것과 다수의 횡포, 권력의 쾌감을 좇는 자들에 맞서 싸우는 동지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부끄럽다. 죄송하다.





475일의 투쟁을 끝낸 코스콤 비정규지부(이하 ‘코비’)에 관해 누군가가 물어오면 나오는 말이다. 진실은 추악하다고 했던가. 코비 투쟁을 통해 비친 노동계의 어두운 그림자를 짚음으로써 다시 한 번 학습과 실천이 왜 필요한지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사내하청 노동자로 십수년을 일했던 코스콤(구 한국증권전산)의 노동자들은 정규직화 회피를 위한 사측의 위장도급 운영과 고용불안 처지에 불만을 갖고 2007년 5월 19일 사무금융연맹 증권산업노조에 가입하여 코스콤비정규지부를 설립한다. 그리고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475일간의 장기간 파업투쟁의 결과로 2008년 12월말 직접고용 무기계약에 합의하고 3개월 이내에 복귀하기로 한다. 그러나 총 76명의 조합원 중 65명만 직접고용에 합의하고 11명은 추후 합의키로 한다.










이상은 각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다.





그리고 현장 복귀까지 남은 3개월의 기간 동안 조합원의 근로조건과 11명의 직접고용에 대해 합의하기로 하였으나, 그 3개월의 기간 동안은 많은 것이 변했다.





먼저 2009년 2월 28일 총회에서 남겨진 11명에 대한 어떠한 고용담보도 없이 65명 먼저 복귀하겠다는 결정을 하였고(이에 대한 과정은 아래에 더 자세히 언급하겠다) 선복귀한 65명의 노동조건은 다음과 같다.










○ 복귀한 조합원 평균 연봉 1800만원(기존 하청업체 연봉과 동일)





○ 대다수의 지방거주 조합원 서울 인사발령(사용자의 인사명령에 대하여 취소요구 및 이의제기 하지 않는 각서를 쓰게 함으로 사실상 노동조합이 합의한 결과)





○ 의료비 지원(200만원~ 3년간 단계적 적용), 각종 기념일에 상품권 지급





○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한 다수의 희망퇴직자 발생(17명)










다음은 지부의 민주적 운영과 노동조합 이념에 관한 사실이다.










○ 한나라당 강성천 의원으로부터 노사화합 공로패 수상





○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에게 지부 창립기념 당일 감사패 수여





○ 민주당 추미애 의원에게 감사패 수여





○ 운영규정 변경





 ― 대부분의 의결과 집행 권한을 집행위원회에 둠





 ― 조직 질서유지와 조합원의 권익 수호 명목으로 지부장 긴급조치권 발동





 ― 회사의 본래적 기능과 사명을 다하게 하는 운영 규정





 ― 조합원 숫자 확대 방지 의도로 조합원 가입 자격에 엄격한 제한





 ― 대의원 대회를 총회에 갈음하는 최고의결기관으로 정함.





 ― 소수의 희생을 당당하게 강요한 결정










패권주의는 노동조합에도 있다.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고공시위와 단식투쟁을 하는 노동조합에도 있다.





나는 영혼이 갈갈이 찢겨졌다.





사태의 본질은 크게 세 가지 맥락으로 보인다.










○ (산별노조의 취지를 무색케 한)기업별 노조의 조합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점





○ 고질적인 관료주의(민주적 운영과 토론을 거부하고 권력을 이용한다)





○ 투쟁 회의론










기나긴 투쟁과정에서 나는 직접 대면하고 싸웠다. 내가 상대한 그 모든 것들―표면적으로는 노동조합과 좌파라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지만―결국 패권주의가 지배하는 또 다른 얼굴의 자본과 권력과의 싸움이었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





저항하는 과정에서 믿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개인적으로는 물리적인 폭행도 당해보았고, 마녀사냥, 온갖 근거 없는 루머에 휩싸여야했다.





처음 지부 출발은 아주 모범적이었다. 조합원들의 결의 상태이며, 정규직화 요구에 합당하는 많은 법적ㆍ정황적 근거, 증권노조와 민주노총 서울본부 상근간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노동자의 시각을 갖고 한마음으로 실천했던 모두였다. 상시적인 토론과 교육이 실행되고, 각기 다른 입장에 있는 조합원들을 설득하러 다니고, 집행간부의 활동내역은 조합원에게 상시적으로 보고되었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쳤지만 마음만은 가장 뜨거웠고 기뻤었다.





그리고 파업은 길어졌다. 예상치 못한 지점도 있지만 예상된 이유도 있었다. 파업이 약 두 달을 넘기는 시점이 되자 여러 가지 주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론





조합주의





관료주의





투쟁 무용론





주장





○연대해봤자 이용만 당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코비의 이익만을 생각하겠다.(증권노조가 어찌돼도 상관없다)



○자주적인 결정이 필요하다. 우리만의 특수한 문화가 있다. 따라서 외부세력(=지부 간부 의견과 다른 활동가)에 휘둘리지 말고 자주적인 결정을 해야한다.



 



○국회의원에(한나라당, 민주당) 감사패 수여 및 수상





○조합원들은 지부장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따라야 하며  무조건 믿어야 한다.



○총회 및 토론 기피



 조합원들이 솔직히 얘기를 안 한다



 결의해 놓고도 지키지 않는다.



 중요한 결정사항들이 사측에 흘러들어간다.



 조합원들은 고민이 없다.



 뒷감당 생각없이 무조건 센 투쟁, 높은 요구만 통과된다.



○보안상의 이유로 정보 비공개 및 독점



 모든 회의 기록 거부 또는 회의록 공개 거부



 회의가 아닌 단순한 모임으로 격하



 모든 정보를 공개하면 조합원들의 기대만 높아지거나 계획이 실패했을 경우 좌절감과 혼란만 가중



○현재는 전시이고, 우리는 군대와 같은데 민주주의로 운영해서는 싸움이 안 된다.



○지부장의 전권 요구, 집행부 재량권 요구



○교섭 전 요구안 비공개 등 상시적인 토론 구조 마련하지 않음.



○학습 소모임에 대한 탄압(사조직, 빨갱이, 좌파)



○다수자에 의한 소수자의 희생 강요



○의견이 다른 집행간부 축출 후 임의 재구성





○지부가 해결할 수 있는 건 별로 없고 연맹의 면담이나 비선교섭 등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조합원들이 힘들어 하므로 어떤 합의가 되던 당장 정리해야 한다.



○코비 문제는 정치권의 도움으로 해결될 수 있고 그렇게 해결됐다.



○코비 투쟁은 외부세력(활동가)에 의해 이용당했다.



○투쟁으로 해결할 수 없다.



 투쟁하는 것은 여론화 되는 등 오히려 해결을 어렵게 한다.



 투쟁은 잘했으나 실리는 없었다.



 투쟁전술은 있었지만 교섭전술은 없었다.



 할 수 있는 투쟁은 다 해봤다.



 하루종일 투쟁가 틀어놓는 것, 농성하는 것 자체가 투쟁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투쟁은 다르다.



 우리의 요구 자체가 애초 불가능한 요구였다.







 





○ ‘외부세력에 의한 활동가들의 무리한 투쟁’ 주장, 이른바 ‘외세개입론’을 주장하는 것은 198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조선일보��류의 시각이며, 공안세력의 주장이고, 노동자들의 유일한 무기인 '단결'을 내부에서 갉아먹는 이적 행위일 뿐이다. 이는 지부 결성 때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왔던 코스콤 사측과 정규직노조의 주장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 ‘투쟁 무용론’에 대해 이해되는 측면은 연맹대책위가 진행하는 공중전들과 그에 의한 성과를 잘못 해석하면 위의 주장들에 동조하기 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주장들을 한 배경에는





 ― 이렇게 쉽고 안전하고 효과적인 투쟁방법들이 있는데 지금껏 쓸데없이 고생했다





 ― 활동가들이 이런 좋은 방법을 두고 투쟁만을 외친 것은 자신들의 원칙을 강요한 것





 ― 코비에게 투쟁을 강요한 것은 코비문제의 해결보다는 비정규직 문제의 사회적 이슈화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





 ― 연맹 임원들의 공중전 실력(?)과 무능한 활동가들의 대책없는 투쟁 만능주의 주장을 비교해보면서 연맹 임원들의 말이 더 신뢰있고 코비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등으로 짐작되어 진다.










지금까지 열거한 사실들을 볼 때 대단히 근본적인 문제들이 복잡하게 엮여 여러 가지 사건으로 파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코비의 전적인 잘못일 수는 없다. 코비가 이렇게 단기간에 괴물로 성장하기까지는 그렇게 영향을 준 노동계 총체적인 ‘시스템 결함’과 자본의 꾸준한 공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하는 사건들이 코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발생했다.





2008년 9월 증권노조의 일부 활동가 축출 사태는 산별노조 이념에도 불구하고 고질적인 병 ― 기업별 정규직 노조의 조합주의 한계 ― 에서 비롯된 사태였다. 코비가 장기간 투쟁을 하면서 증권노조 대부분의 재정과 상근간부 4명의 인력이 코비에 들어갔다(이 맥락은 곧 관료주의에 영향받은 코비 집행간부 축출로도 이어진다). 처음 지부를 증권노조에 가입시키기 전부터 이 흐름은 존재했었는데, 산별노조의 이념을 지향한 일부 간부들과 기업별 조합주의를 대변하는 간부들 사이에 갈등이 존재했다. 그리고 코비 쟁의가 발생하자 쟁의대책위가 꾸려져 여성간부 3명과 당시 위원장이 올인했다. 증권노조 각 지부에서는 코비의 처절한 투쟁과 주변 동지들의 헌신적인 조직으로 재정적, 마음적으로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증권노조는 각 이해관계를 넘어서 비정규직 문제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파업이 장기화 되자, 몇몇 지부에서 코비 투쟁에 대한 회의론과 함께 증권노조에서 처리하지 못한 몇 가지 사업들을 이유로 들면서 그 화살을 코비 투쟁에 헌신하고 있던 여성 간부들에게 돌렸다. 나머지 증권사 지부를 위해 또다른 상근간부 3인이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에게는 모든 면죄부가 주어졌다. 평소 산별지향과 노사화합ㆍ조합주의 기치의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벗지 못한 지부들과 이해관계가 상충했던 상태에서 코비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지부장들은 조합주의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간부 2인은 명백한 표적수사로 인해 해임과 해고를 겪었다.(이유는 위원장 권위 침해와 비정규 여성 프로젝트 비용을 횡령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것은 코비가 자신들의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했던 여성간부들의 축출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료주의와 기업별 조합주의를 주변에서 보고 배운 코비 일부 간부들은 같은 방식으로 지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조합원 소통 구조 마련과 투쟁, 학습을 강조하던 집행 간부들은 축출되었다. 나는 프레시안에 지부의 문제점을 발설한 인터뷰를 했다는 이유로 총회에서 대대적인 비난을 받았다.1)





2008년 초부터 시작된 투쟁 회피, 조합원 소통 부재, 나날이 심해지는 관료주의, 집단 따돌림... 그러한 조건에서 그래도 투쟁이 제대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중 중심적인 활동인 ‘학습팀’ 이라는 소모임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이 소모임은 5―6명으로 파업 돌입 후 3개월째에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책을 읽고 사회 사건들을 토론하며 모임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당연한 과정이겠지만 우리가 토론하고 읽은 것들을 우리 현실에 대입시키게 되었다. 바로 코비 투쟁에 말이다. ‘현장조직’이라는 말. 나는 그런 것을 몰랐지만 얼마 전에서야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성격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시시각각으로 변화되는 상황과 지부의 한계에 계속 부딪치면서,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너무 답답했고 그냥 무작정 조합원들이 알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측에 제대로 된 대응은커녕 조직내부부터 바로 잡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나는 제안했다. 학습 토론도 좋지만, 지금 당장은 뭔가 실천적인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안될 거 같다... 아마 그때부터 현장조직이라는 모습을 띠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정보 공유와 질문하기였던 것 같다. 현재 정세와 지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돌아가는 모양새를 도통 몰랐던 조합원들에게 정보 공개를 통해서 조합원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독점적인 권력구조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조합원 무서운 줄 알게 하자’였다.





그러기 위해서 상명하복 식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적 체제에서 ‘조장단 회의’에 무게를 싣기로 했다. 일방적인 전달내용에 대해 어떤 것이 궁금하고 뭐가 문제인지 제기하며, 집행부 회의록을 열람하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집행부는 이 흐름을 감지하고 단번에 견지했다. 발언하는 사람들은 ‘불만’만 많은 존재로 취급했고, 불만을 제기할 거면 대안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나아가서 집행부 필요없고 조장단이 다 알아서 하면 되겠네 등의 방식으로 접근했다. 물론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집행 간부 2명이 술을 먹고 사람을 폭행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벌금이 380만원이 나왔었다. 그 집행을 지부 재정에서 처리하겠다고 집행부에서 조장들에게 알렸다. 결국 그 안건은 통과되었지만 항상 말없던 조장들이 집행부 형평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고 재발방지를 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집행부 회의록 공개요청이 통과되자, 당시 서기를 했던 나는 회의록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지부장을 비롯한 지부 간부와 크게 싸웠다. 조직 내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한 조합원은 왜 지들끼리 싸우는 내용을 공개하냐고 욕설을 퍼부었다. 당시 회의록에는 관료주의를 주도한 집행 간부들의 약점이 들어간 발언들이 있었는데, 회의록을 여과 없이 공개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 앞서 목표했던 것이 있어 회의록 공개 등을 추진했지만 오히려 조합원들의 반감만 늘어난 채 변하는 것은 없었고 나에게는 오히려 ‘조직 분열자, 험담자, 지부장 반대세력’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게 되었다. 이미 조직력은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무엇을 해도 먹히지 않은 채 나와 학습팀 성원들의 입지만 좁아져갔고 ‘사조직, 빨갱이, 좌파’라는 말들을 들어야했다. 학습팀 성원임을 드러낼 수 없었던 몇몇 동지들과 우리 모두는, 매일 밤 조합원들의 눈을 피해 몰래 천막에서 나와 따로 모임을 가지고 현안 대응을 논의했다. 이것은 추후 '사전모의' 했다는 죄를 씌우며 일부 집행간부 축출에 사용되고 학습팀 탄압의 골자를 이루게 된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거짓말로 나에 대해 모함하는 것에 대해서는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속이 상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성과를 얻었을 때는 희망이 생겼다. 코비 투쟁에 대해 더 집중하고 집요해졌다.





그리고 2008년 10월, 17대 환노위 국정감사 시기가 되었다. 이제는 조합원들마저 '투쟁'이라는 말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조직 상태가 되어있을 때였다. 투쟁은 고공농성이나 단식 등 몸빵하는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을 바꾸기 위해 국감팀 실무를 자원했다. 당시 나와 마음이 맞던 학습팀 성원 중심으로 4명이 팀워크를 맞추어 철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며칠 밤을 샜고 몸은 정말 피곤했지만 사측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면서 공격하고 방어하는 법을 토론으로 이끌어냈다. 환노위와 정무위 의원실 40여 군데를 최소 3번씩 들러서 자료를 배포하고 설득했다. 결국 여야를 뛰어넘어 2년 연속 증인 채택에 성공했고, 100%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이를 계기로 회사를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을 통해 결국 1년이나 중단되었던 사측과의 협상을 다시 재개하기에 이르렀고, 긴 파업의 마무리로 이어졌다.





(이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노동전선 동지들, 이정희, 홍희덕, 김재윤 의원실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연맹대책위원 동지들의 헌신에도 감사드린다)





그 기간 동안에도 지부는 역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다. 농성하는 것 자체가 투쟁이라는 마당이었다. 새로운 사장이 와도 총회에서 결의한 전조합원 단식 등 투쟁계획은 몇 달씩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기만 했다. 중요한 국면에 투쟁 주체로부터 결의되어 올라오는 투쟁이 전무하자, 어느 순간부터 거꾸로 연맹대책위에서도 투쟁을 주문하는 구조가 되었다. 나는 투쟁주체보다 열심히 뛰는 연맹대책위원 분들에게 그냥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집행부 회의 때 투쟁계획과 조직상태를 감안해서 여러차례 제안을 했지만 이미 '투쟁 만능주의 활동가 측근'으로 찍힌 내 제안이 먹힐 리가 없었다. 거절하는 이유는 대부분 조합원들이 힘들어 한다와 그것을 해서 무슨 효과가 있느냐는 주장들이었다. 그렇지만 동일한 투쟁계획이 연맹대책위로부터 내려올 때는 지부 간부는 거절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조용히 미루다가 연맹위원장이 독촉을 하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한단계 낮추어서 하는 방식이 되풀이되었다)





2008년 11월 초, 국감을 통한 노동부 압박과 지부장 단식 투쟁이 이루어지자 사측과 협상이 재개되었다. 사측은 조합원 전원이 아닌 65명 직접고용만을 주장했다. 지부의 대안은 그저 "끝까지 함께 간다"는 결의 하나였다. 그러나 실제 타결국면이 되자 더욱 구체적인 대안과 확고한 결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집행부 회의와 연맹대책회의에 직접고용에서 제외된 12명(나와 주요 학습팀 성원이 포함되어 있다)에 대한 구체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했고 연맹의 입장을 요구했다. 집행부 회의에서는 우리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자기들 살길만 찾는다는 식으로 또다시 나쁜 놈년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연맹에서 심사숙고를 했는지, 위원장과 교섭단 전체가 12명을 따로 남기고서 정리해서는 안 된다고 확실히 밝혀주었고 구체적 전략을 마련했다.





(이 시기부터 나는 우울증과 강박증에 시달려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집행간부와의 갈등과 끊임없는 인신공격성 루머에 시달렸고 조합원들도 쳐다보지 못하는 대인기피증세까지 생겼다. 삶에 대한 애정이 강했던 내가 이제는 매일 자살을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코스콤을 상대한 자살이 아닌 지부내 갈등 때문에 자살을 생각한다는 것이 더 괴로웠다)





지부장 단식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학습팀은 이후 투쟁을 모색했다. 그것은 '조합원 단식투쟁' 이었는데 이 계획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 자발적인 조합원 단식투쟁을 진행하되, 직접고용에서 배제되는 조합원들은 최대한 많이 참여한다.





 ― 당사자가 끝까지 투쟁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사측, 교섭단과 지부에 조금이라도 일부만 직접고용하는 선택을 할 수 없게끔 만든다.





 ― 전원 직접고용 대원칙이 무너지면 이후 나머지 65명에 대한 고용조건도 겉잡을 수 없이 사측에 밀려버리기 때문이다





이미 지부 집행간부를 설득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최대한 연맹 등 상급단체를 설득하고 조합원들을 슬며시 조직하기 시작했다. 전원 직접고용이라는 일관된 교섭단의 주장과 조합원 집단 단식으로 2008년 12월 15일, 우리는 '전원 직접고용'이라는 잠정합의를 이끌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잠정합의는 코스콤의 원청인 증권거래소에 의해 무산되고 만다. 이미 코스콤 정규직 노동자에 의해 2차례나 합의가 물거품 된 경험을 했던 우리는, 이번에는 증권거래소 경영진과 노동조합에 의해 조인식 직전에 무산되는 기가 막힌 상황을 겪는다.





그리고 약 2주 후, 타결 국면이 다시 왔다.





연맹대책위와 교섭단, 지부 모두 매일매일 피가 말리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사측에서 최종이라면서 내놓은 안은 '65명을 3개월 안에 직접고용하되, 근로조건은 별도로 정한다' (근로조건은 회사가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해석임), '나머지 11명은 협의한다' 였다.





연맹대책위 성원이었던 나는 받을 수 없다고 했다.(당시 대책위 분위기는 지부의 입장이 결정적이어서 지부 의견을 존중하려고 했다) 11명 고용조건을 그냥 협의로만 끝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버리는 행위와 같았다. 또한 65명의 근로조건 역시 회사에 칼자루를 쥐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딱히 버틸 말이 없었다. 이 안으로 합의할 거면 당신들 (지부 간부들)이 주장한대로 투쟁 안 하고 법정소송으로 3년 가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그 말에 지부 간부들은 화를 내면서 오늘 넘기면 끝이므로 꼭 합의해야 한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 일부 조합원을 배제하고 가려는 흐름은 이 날이 처음이 아니라 2008년 4월부터 이어져온 흐름이었다. 당시 지부장과 증권노조 위원장은 직권조인으로 사측과 비선교섭해서 2년차 이상은 직접고용, 2년차 미만은 위로금, 그 외 조합원은 여전히 해당사항 없이 합의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1시간 후, 교섭단이 다시 최종 수정된 안을 가져왔다.





'65명을 3개월 안에 직접고용하되, 근로조건은 별도 협의한다', '나머지 11명은 협의 후 합의한다' 였다. 대책위 전원이 동의하였다. 이 날 얻은 교훈은 '버티면 된다'였다.





2008년 12월 29일 475일간의 파업은 끝이 났다.





2009년 2월, 한나라당 강성천과 민주당 추미애 의원에 상패를 수여하는 문제로 집행부는 의견이 엇갈렸다. 그리고 크게 싸웠다. 지부장은 '집행부 깨겠다', 'OO 개새끼'를 남발하고는 평소 자신과 맞지 않았던 집행간부(학습팀 성원)를 축출했다. 그리고 이후 평소 지부장과 뜻이 맞았던 성원으로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 흐름은 2008년 가을부터 지부장이 꾸준히 추진하고 실천해왔던 것이다)





합의 후 남은 3개월 동안 노동조건과 11명 고용문제를 협상하기로 했다. 12월 합의 당시  11명의 미복귀 조합원에 대해서는 조직적 결의를 하는 것으로 대안을 삼았다. '최우선 과제로 삼고 복귀를 위해 투쟁한다', '11명 복귀시까지 임금 및 일시금 등을 공제하여 조합원 생계를 책임진다' 였다.





이후 진행되는 실무교섭은 꼭 녹취록을 공개해서 조합원에게 빠짐없이 보고하는 체계를 가져갔다. 아마도 우리와 논의되지 않은 교섭위원이었다면 교섭 보고 역시 없었거나 매우 간소하게 보고되었을 터이다.





회사는 이런저런 근로조건을 제시했는데 그 중 핵심은 '연봉제' 도입이었다. 연봉제는 노동조합 단체교섭을 무력화하고 조합원 간의 경쟁체제를 만들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자 입장에서 아주 환영하는 제도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연봉제의 의도가 뭔지 잘 몰랐다. 학습팀 역시 그러해서 모임 때 연봉제와 분리직군제 등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논의했다. 연봉제는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합원들이 자연스럽게 연봉제에 대해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교섭위원에게 부탁해서 '연봉제'에 관한 자료를 카페에 게시했다.





물론 집행 간부들은 '그런 거 왜 올리냐'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 자료로 인해 조합원들 스스로 호봉제를 꼭 사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호봉제로 회사와 합의하는 결과가 나왔다.





11명 복귀 협상과 관련하여서는 교섭단 내에서 이견이 발생했다. '11명 복귀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협상하여 일괄 타결키로 한 것을 지켜야한다' vs '일괄타결이 아니며 65명 근로조건부터 협상하고 11명 문제를 협상하자' 였다. 후자로 협상을 한다면 분명히 11명은 또다시 아무것도 담보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또다시 학습팀은 이를 저지할 방안을 찾아보았다. 매주 미복귀자 분회모임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지부 상황에 대해 현안 토론을 하고 실천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각 지방분회 모임도 열릴 수 있게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합원들 간에 자연스럽게 11명 복귀문제와 함께 노동조건을 토론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함으로써 집행간부들의 조합원 의견 수렴 절차를 배제한 65명 선복귀 결정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는지 이미 지부의 여론은 65명 선복귀로 잡혀가고 있었다.





근로조건을 협상하는 3개월 동안 조합원들은 수입 한 푼 없어 생계고통이 극도에 다다랐다. 그리고 회사는 2월 내에 타결하면 위로금을 지급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문제는 위로금에 꽂혀 빠른 시일 내에 타결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는데 이것은 동시에 11명 복귀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채 먼저 복귀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회사는 회계결산 시점 등을 이유로 꼭 2월 내에 타결해야 위로금을 줄 수 있다고 압박했으나 얼마 안 가 이는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난다. 2009년 2월 23일, 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집행간부와 교섭위원은 조합원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분회총회를 하였고, 최우선적으로 11명 복귀를 위해 힘쓰겠다는 결의는 온데 간데 없이 65명 선복귀, 11명은 사장의 말을 믿어보자(6개월 후 고용을 고려해보겠다)로 의견이 모아졌다.





분회 총회 결과를 들은 한 증권노조 여성간부는 지부 카페에 글을 올리고 사퇴를 선언했다. 증권노조로부터 해고를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헌신했던 동지였다.















제목 : 코비 동지들에게.. 절박해도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2009.2.26)










동지들과 함께 했던 1년 반동안 수없이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돌덩이를 가슴에 얹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있는 지금처럼 마음이 무겁고 힘든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재경지역간담회와 지방지역간담회 결과를 접하고, 저는 코스콤비정규지부 관련 교섭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24일 오전에 실무교섭 대표인 연맹의 이형철 실장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코비 간담회에서 2월말까지 교섭을 종료하는 것을 목표로 아이트네이드와 일괄타결 없이도 65명이 먼저 근로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답니다. 저는 코비 교섭위원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형철 실장은 “그렇게 혼자 결정하지 말고 조금 있다 교섭사전회의에서 이야기 해보자”하였습니다.





1시에 개최된 교섭사전회의에서 교섭위원을 그만두겠다고 얘기하려고 하다가, 요구(안)을 최종통보하자는 논의가 진행되면서,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교섭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동지여러분이 카페에서 보셨겠지만, 노조측 최종(안)이라고 제출한 내용은 동지들이 결정한 내용과 다릅니다. 아마도 동지들마다 이해한 내용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동지들이 간담회에서 결정한 내용은 ‘2월말 타결을 목표로 회사가 제시하는 룸 속에서, 위로금을 일부 받고, 65명만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11명 동지들에 대한 고용담보는 합의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회의결과를 들었을 때 저는 ‘올 것이 왔구나, 결국 누구도 원치는 않았겠지만, 1년 가까이 유예되었던 결정이 이제야..., 그런데 심지어 돈과 사람을... 돈과 동지를 바꾸는구나’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물론 동지들 중에는 아이트네이들 동지들을 저버리는 결정이 될까봐 우려하여 위로금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분들도 있었을 테고, 11명 때문에 65명의 합의서도 물거품되면 어쩌나 걱정하신 분들도 있었을 것이고, 아이트네이드 동지들의 생계비를 노조에서 지원하기로 했으면 최선을 다한 거 아니냐는 분들도 있었을 것이고, 먼저 들어가서 싸우면 되지 않느냐는 분도 있을 것이고, 위로금과 동지를 바꾼다고는 생각한 적 없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동지들의 간담회 결과는 “위로금과 11명의 고용보장을 교섭에서 교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지들의 결정에 대하여, 제가 교섭위원직을 그만두는 것과 관련하여, 우려하는 연맹위원장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연맹위원장은 “대책위에서 총회를 권고했는데, 간담회를 통해 결정한 것은 공식결정사항이 아니다. 더구나 대책위에서는 아이트네이드와 일괄타결한다고 했는데, 65명 먼저 한다고 간담회서 결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 교섭을 계속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이상 연맹대책위가, 연맹위원장이, 증권노조 위원장이, 아니면 교섭위원인 OOO가 동지들의 방패가 되거나,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연맹대책위원회로 교섭권과 체결권이 넘어간 후 수차례, 십수차례 지부에서는 간접고용을 수용하거나, 일부의 동지를 떨쳐놓고 가는 방향을 잡으려 했고, 이것을 다시 돌려놓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역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코비의 다수 조합원들은 “아이트네이드 기한명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65명이 선복귀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함께 간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또한 조금 아쉽고 미안하지만 먼저 복귀해서 돈으로 지원하고 투쟁을 하겠다고 약속하면 된다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지들의 결정은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해도 저의 양심과 가치관에 상반됩니다. 삶이 절박하고 힘든 다수의 동지들에게 한 달 먼저 근로계약을 체결하게 하고 위로금을 받게 해주기 위해서, 고용이 확실히 보장되지 않는 11명의 동지들을 두고,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는 다수의 동지들을 위해서, 교섭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동지들이 만약 토론과 결정과정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가기 위해서, 임금을 양보하고, 임금체계를 양보하고, 위로금을 안 받더라도 마지막까지 함께 해보자”라든지, “6개월 이내에 11명 동지들이 복귀되지 않으면 어렵지만 다시 파업을 포함한 모든 투쟁을 해보겠다”였다면, 이렇게 처참한 느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동지들은 12월 29일 파업을 종료하기 전 총회에서 이미 결정한 “IT네이드 동지들 문제를 우선에 두고 해결한다”는 원칙도 위배하였습니다. 다만 이미 총회에서 결정한 재정적 지원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65명이 먼저 근로계약을 체결해도 괜찮다는 명분을 공동결정을 통해 해낸 것입니다.





왜 연맹이나 증권노조의 교섭위원들이 동지들과 관련된 수많은 교섭에 들어가서 동지들의 고용을 보장받으려고, 임금을 올려보려고, 연봉제를 저지하려고, 위로금을 달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제 동지들에게는 그 정당성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적 약자를 못 본 척하고, 상대적으로 유리한 집단을 위한 교섭을 종용받는데, 왜 다른 사회적 집단이나 타인이 교섭을 해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동지들을 지원하고 함께 했던 것은 차별받는 약자이기 때문이었고, 바라는 것이 단 한 가지 있었다면 차별받았던 고통을 다른 이들에게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코비동지들에게는 과연 누가 “우리”이고 “동지”입니까? 사실 오랜 기간 동지들과 지내면서, 몇몇 동지들의 언행 속에서 “도움이 되는 세력은 우리”이고, “조금만 거슬리면 외부세력”이고, “실리에 부합하면 동지”이고, “세워놓은 목표에 장애가 되면 적”이라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실리적으로만 움직이고, 내가 힘들고 지치면, 더 힘든 사람은 모른 척해도 되는 것일까요... 아이트네이드나 조직 내 소수자ㆍ약자에 대한 문제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이미 작년 초반부터 “일부 희생은 불가피하다”라는 말이 오가기도 했고, 관련된 다양한 의견들도 있었습니다. 다만 “일부 희생자”가 “2년차 미만”, “FDL", "아이트네이드”, “투쟁에 비적극적이었던 조합원” 등등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이 기준은 나이, 지역, 근무성적, 인사고과 등등 어떤 기준으로 달라질지 모를 일입니다.





이것저것 보다가 코스콤정규직노조 20주년 기념식때 제가 썼던 글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마치 내가 동지들인 것처럼 쓰고는 코스콤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함께 나누어 주었던 글입니다. 너무 생경하고 낯설었습니다.





제가 왜 동지들과 저를 동일시 했을까요... 썼던 글이 후회도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지부는 2개월밖에 되지 않는 새내기이지만 노동조합을 통해 민주주의를 배웠고, 노동자는 투쟁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쟁취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습니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에서 연대의 소중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연대는 이해관계가 다소 다를 수 있는 세력과 세력 간의 단결이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의 문제를 함께 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본과 정권은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막기 위해 고용형태, 성, 학력, 직급, 출신학교와 지역 등 다양한 형태로 노동자를 분할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분할지배를 돌파하지 못하면 노동자들은 승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연대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코스콤노조 정규직선배들이 노조깃발을 세운지 20년이 지나서야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비정규직들은 '빵과 장미'를 위해 일어섰습니다. '빵과 장미'는 세계 여성의 날의 기원이 된 1908년 뉴욕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서 나온 구호였습니다.





빵은 인간의 생존권을, 장미는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여유와 삶의 질을 의미 합니다.





100년이 지난 한국의 상황에서도 비정규노동자들은 여전히 '빵과 장미'를 원합니다.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으며, 노동조합을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존중받고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민주노조를 생명과 같이 소중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에게 장미는 어디 갔고, 민주노조는 무엇입니까?





저는 동지들이 지금 사태에 대한 합리적 판단과 비판적 성찰을 하길 바랍니다. 저를 포함해서 코비에 결합한 소위 활동가 내지는 외부세력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잘못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투쟁하는 사업장이기 때문에, 너무나 절박할 것이라서,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끝까지 함께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저는 코비의 집행부의 권력지향적, 코비조직의 권위주의적, 군사문화적, 전체주의적 문화들에 대해서 문제제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동지들과 조직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저의 신상과 관련한 어려움이 있을 때도 동지들과 코비조직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참으로 많은 후회가 됩니다. 그것은 조직과 동지들을 위한 길이 아니었고, 코비에게는 피해자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어떤 잘못을 해도 면죄부를 주는 이상한 보호장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코비에 결합하면서 코스콤 정규직들을 보면서 이기주의가 어떻게 극대화 되는지, 집단 뒤에 숨어서 개인이 얼마나 비굴해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보았습니다. 코스콤의 이해와 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는 일치해나갔고, 코스콤비정규사태라는 위기 앞에서 그들은 더욱더 단결하면서, “우리”라는 의식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저는 사실 한동안 코비 내에서 “외부세력이 이용한다”, “활동가들이 코비투쟁을 이용하기 위해 장기화한다” 등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후에 코스콤에 들어가서 일할 “우리”이기 때문에 서로는 다 이해가 되는 코비동지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집단적 총화는 조직과 개인을 일치시키며, 자신들과 조금 다른 집단과 개인은 배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렇게 코비에서는 코비동지들의 이해에 따라 “우리”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배제해도 되는 집단이 생겨난 것이지요. 이제는 조합원 중에서도 누군가를 “우리”에서 배제하고,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이기적 단결”이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최근 코비 내에서 조직의 대표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조직성원의 개인정보를 비밀리에 수집하고, 개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간담회에서 공개적으로 알리고 정보를 유출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권력남용과 인권침해를 보면서, 인간의 권리를 위해 해왔던 지금까지 코비와의 시간들이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몇몇 동지들이 지부활동에 대하여 사전에 논의한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편가르기가 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고 그 점에 대해서는 토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왜 이런 움직임이 있었는지는 간과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집행부회의시 발생했던 욕설, 집단따돌림, 소리지르고 회의장 뛰쳐나가기, 내용과 무관하게 투쟁을 종료하자던 수많은 주장 등등이 동지들 간에 어떤 관계를 만들었는지는 지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은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저는 동지들이 간담회를 통해 결론지은 “11명을 배제하고라도 합의하라”는 주문대로 교섭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교섭위원 사퇴와 관련한 신상발언은 여기까지로 하고, 저는 코비투쟁과정과 교섭과정, 조직운영과정, 집행부 회의과정 등에서 목도했던 부조리하고, 반조직적이며, 비양심적인 행위들에 대해자료를 정리하여 이후에 밝힐 예정입니다.





코비 여러분의 공동체, 코비 여러분의 커뮤니티는 과연 무엇인가요... 어제 OO동지가 코비 비공개카페에서 퇴출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씁쓸했습니다. 조직의 대표의 폭언에 대해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한 것에 대한 답변이 카페에서 퇴출이군요. 곧 저도 퇴출되겠지요. 저는 아직까지는 증권노조 소속이고 교섭위원이라는 권력이 있어 그냥 좀 두고 보시겠지만, 얼마가지 않겠지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동지들의 흔적을 지우겠지요. 





만일 게시된 글이 삭제되거나, 카페에서 강제로 퇴출된다면, 이후의 글은 공개적인 인터넷 공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카페에 머물 시간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스스로 탈퇴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코비동지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제 인생에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너무 나쁘거나 아픈 기억으로 남지 않기를 바랍니다.















○ 65명 선복귀 결정, 남은 11명은 사장 말을 믿자










이 결정은 2009년 2월 28일 총회에서 최종 결정되었고 이 날이 학습팀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다수에 의한 소수자의 희생 강요는 이 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관료주의와 패권주의의 대성공이었다.





우리는 미복귀자 중 공동 입장을 발표할 동지의 이름을 연명한 성명서를 총회 몇일 전 발표했다. 조직에 요구했던 사항은 "남은 1달의 기간이 있으니 11명 복귀에 대한 조직적 노력을 해달라", "2009년 7월 이내 복귀를 전제로 사장의 구두 약속을 녹취로 남기고 조합원에 공개한다", "사측이 불이행할 경우 모든 조합원은 8월1일부로 쟁의행위에 들어간다.", "위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근로자존재지위확인소송 취하가 불가능하다" 등 이었다.





그러나 집행부와 나머지 조합원들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먼저 복귀하고 사측이 약속 이행 안 하면 파업하겠다는 각서를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소송을 취하하지 못하겠다는 미복귀자 입장에 대다수가 화를 냈다. 지부 분열이다,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거냐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65명도 너무 힘들다, 왜 너희들만 생각하느냐고 말했다. 졸지에 우리는 ‘우리 이익만 추구하는’ 세력이 되어버렸다. 그런 강압적인 분위기가 좀 이상했던지 그나마 한 조합원은 이렇게 얘기했다. "실제로 우리는 저분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거다. 솔직히 말하자. 미안하다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라고.





한 간부는 기륭 투쟁을 예로 들면서 기륭이 왜 4년 넘게 갔는지 아느냐, 타결 국면이 있었지만 위로금을 두고 견해를 좁히지 못해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것이라고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기륭전자 동지들은 위로금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사측이 일부 조합원만 고용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반박했지만 사실관계는 이미 상관이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65명 선복귀 주장의 근거로 관련없는 학습팀 죽이기, 정인열 죽이기, 사퇴를 밝히며 글을 쓴 교섭위원 죽이기로 돌아갔다. 학습팀에게는 집행부 회의에 앞서 사전모의를 했고 지부 분열자라는 죄명을, 나에게는 프레시안에 지부의 치부를 드러내는 인터뷰를 해서  연대가 다 끊길 지경에 이르게 한 죄, 사퇴한 교섭위원에게는 돈으로 65명을 바꿔치기했다는 말에 격분하고 너무나 불쾌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역으로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학습팀 활동, 프레시안 인터뷰기사, 사퇴를 밝힌 교섭위원의 글이 아니었다면 65명 선복귀 결정을 취소하고 11명의 복귀를 위해 더 노력했을까?





처절하게 응징당하고 짓밟혔다. 자신들의 호봉제는 꼭 사수해도 11명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하겠다였다. 나는 너무 심정이 괴롭고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아 다시 총회를 잡아 논의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으나 여전히 그들은 분노한 채 거절했다.





조합원 일부를 배제하고 가는 흐름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흐름이었다라고 진실을 얘기해도 소용없었다. 정인열과 학습팀, 단식투쟁에 앞장선 동지들이 475일 동안 가장 열심히 투쟁한 동지들에 속했지만 그 과정은 이미 조합원들 머릿속에 없었다. 중요치 않았다.





이 날 받은 상처는 정말 깊었다. 그 어떤 때보다도 가슴이 쓰렸다. 1년 동안 1억이 넘게 CMS 후원을 해주신 분들, 코비 투쟁을 엄호하고 지키기 위한 사무 노동자들, 민주노조의 원칙을 실행한다고 코비를 지원해주셨던 많은 분들께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학습팀은... 이 날 결정적인 사건을 겪고 난 후 아직까지 패닉 상태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활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피투성이가 된 우리의 역량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현실과, 그나마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 우리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우리끼리라도 동지애를 돈독히 다지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그나마 우리가 덜 상처받고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나는 65명 선복귀 결정에 동의하지 못하며, 사태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책임이 있다고 밝히고 부지부장직을 사퇴했다.















○ "너의 죄는 생각없음"이라고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일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의 체포, 강제이주를 계획ㆍ지휘하였던 아이히만이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했을 뿐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생각없음’으로 일관한 코비 성원 전체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수없이 손을 내밀었지만 자신들의 입지가 곤란해질 것 같자 발 빼거나 모르는 척했던 조합원들, 처음부터 끝까지 무관심으로 일관한 조합원들, 그리고 그것이 권력인 것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적극 동조하며 친위대 역할을 하는 조합원들. 마치 지부의 분위기는 서슬퍼런 군부독재에서 알아서 기거나, 무관심한 채 살아야했던 한국의 과거 역사를 보는 듯 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조합원들은 아무것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 어떤 진실도, 공개도, 정보도 원치 않았다. 오로지 무슨 일이 있어도 지부장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종교 집단의 믿음 같은 것이 지부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부 내부의 성원들에게 진 것이 아니라 자본에게 진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나를 위해서 올 4월에 희망 퇴직했다. (퇴직한 부분에 대해서는 양해를 바란다. 정말로 정신이 피폐해져 코비와 떨어져야만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남겨진 우리 모두의 과제가 있다면 앞서 일어난 사실들을 양분으로, 변증법적인 거듭남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글이 단순하게 관료주의에 대한 보고서가 아닌 ― 앞으로도 모든 투쟁을 하는 조직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유념해야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단 한 분이라도 알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제 마무리 한다.










코비 투쟁을 통해 우리는 더 단단해졌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 조직이 돌아가는 이치, 뭐가 가짜이고 진짜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극한 어려움 속에서 자신에게 돌팔매질이 올 것을 알면서도 용기를 낼 줄 아는 진짜 동지들을 만났다. 그리고 평생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위해, 민중을 위해 언론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는 동지들을 만났다. 그 동지들에게 우리는 일생동안 후회하지 않을 것들을 배웠고, 얻었다.





그것이 앞으로 그저 ‘패배한 채로만 남겨있지 않을’ 우리들이 지닌 가능성이다. 학습하고, 실천하는 노동자로... <노사과연>






1) (2009.2.24 ― 위기의 민주노총, 길을 묻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2319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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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 코스콤 비정규지부의 475일 동안의 투쟁 ―우리는 결국...[2] 정인열 ∣전 증권노조 코스콤 비정규지부 부지부장, 미학세미나 팀원 2009-06-02 4363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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