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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21)
글쓴이 하르팔 브라르 E-mail send mail 번호 235
날짜 2011-07-21 조회수 2178 추천수 79
파일  1311236369_번역2.hwp

  













번역











번역:편집부 




















7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하에서 계급투쟁의 기제들에 대하여






























“우리가 만드는 모든 진보의 걸음마다 계급투쟁은 점점 더 조용해질 것이라는 취지의 썩은 이론을 분쇄하고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





                                             스탈린, 1937















 





23장





일국에서 공산주의










MF는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일국에서 공산주의”로 승격시켰다.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로 돌아가서 스탈린은 선언했다:”










“‘그러나 발전은 거기에서 멈출 수 없다. 우리는 앞으로, 공산주의를 향하여 가고 있다. 우리의 국가가 공산주의의 시기에도 또한 남아 있을 것인가?’” (스탈린의 언급―편집자)






“그리고 그는 답했다:










“‘그렇다. 만약 자본주의국가들의 포위가 지속되고, 외국군의 침략 위험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러할 것이다.” (스탈린의 언급―편집자)










여기에 스탈린 동지의 위의 말들에 대한 MF의 언급이 있다:










“위에서 인용된 스탈린의 보고의 그 부분으로부터 그가 일국에서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는 것이 떠오른다. 이러한 명제는 1920년대에 뜨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수행되었던 ‘일국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전체적인 주장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한다. 그것은 또한 맑스-레닌주의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국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엉터리이고 적대적인 포위의 가능성에 관한 조건들에 의해 더욱 더 엉터리가 된다. 공산주의 사회는 계급들의 종말과 국가의 사멸을 전제하는 것이고 마오가 말하듯이, ‘전지구적으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체제의 폐지’에 의존하는 것이다. 오직 공산주의가 달성되었을 때에 최종적인 승리를 말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p. 16)










혹자는 스탈린 동지에게 “공산주의 사회는 계급들의 종말과 국가의 사멸을 전제한다”고 가르치려고 생각하는 반(半)멘세비키, 반뜨로츠키주의적인 CFB의 ‘이론가들’중의 한 사람―지도적 인물들 중의 하나―(ML을 추가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의 엉터리 같은 광경을 비웃지 않을 수 없다. 이 공식은 CFB의 발견이 전혀 아니다. 맑스가 이 발견을 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스탈린은 오래전에 CFB의 온정적인 보호와 도움 없이도 이 공식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CFB가 그러듯이 그것을 기계적 방법으로 단순히 암기한 것이 아닌데, 그러함에도 미사여구와 공식들을 배우는 자신들의 기계적 암기의 방법으로 스탈린을 변형시키려 노력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위에서 인용된 언급들에서 스탈린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스탈린은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포위가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쏘련에서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가능성이라는 순전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추상에서는 이러한 문제의 정식화는 가능하고 합당한 것이다. 1939년에, 위에서 진술된 대로, 착취계급들은 폐지되었지만 발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쏘비에트 사회는, 어떠한 사회주의 사회라도 혁명의 날로부터 절대적으로 그러하듯이, 당시에 공산주의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자본주의 나라들이 쏘련을 군사적으로 공격함이 없는 상황에서 발전은 계속하여 어떻게 되는가? 쏘련이 수십년 동안 홀로―아마도 수세기 동안―다른 나라들에서 승리한 혁명의 결합이 없는 가운데 공산주의로 향하는 길에서 계속하여 어찌해야 하는가? 그것이 이 물질적 그리고 문화적 조건들―그것의 성취는 ‘각자로부터는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그의 필요에 따라’라는 공식을 실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에 도달해야 하는 자신의 발전의 과정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경우에서는 쏘비에트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가 되었을 것이고 그러나 국가는 자본주의의 포위 때문에 여전히 폐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방금 올바른 것으로 그러나 이 정세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것으로 묘사했던 위의 독특한 정세에 대해, “공산주의사회는 계급들의 종말과 국가의 사멸을 전제한다”는 공식을 적용하려 시도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 공식은 방금 가정되었던 정세를 예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자본주의의 포위가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쏘련에서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가능성이라는 추상적이고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이것이 그가 생각하기에 일어날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확실히 아니다. 가능성의 영역은 현실성보다 훨씬 더 넓다. 가능성은 현실성은 차치하고 잠재성조차 아니다1). 한 나라에서 자본주의의 포위가 여전히 존재하는 가운데 공산주의 단계에 도달한다는 정세에 대하여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그리고 스탈린이 한 모든 것은 이것이다―은 가능하지만, 실천적으로 그러할 것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어떤 한 나라가 공산주의 사회의 보다 높은 국면에 도달하기 오래전에, 보다 있을 법한 것은, 혁명이 다른 나라로 확산되거나 혹은 결국에는 다른 어딘가에서 실패한 혁명, 사회주의는 포위하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또한 그 주어진 나라에서 파괴될 것이다. 왜냐하면 스탈린이 CFB가 생각하기 오랜전에 ≪레닌주의의 기초≫에서 지적했듯이, “단 한 나라의 세력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위한 완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확보하는 것, 복고에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사회주의를 최종적으로 공고화하는 것 그리고 간섭에 맞서서 그 나라를 완전히 보증하는 것”이 물론 매우 어렵기 때문이고, “국제적 자본이 우리를 평화롭게 내버려둘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집 11권, p. 58)





주어진 사회주의 사회에서 발전은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로 향하여 진행될 것이고 그러나 이 방향으로의 발전은 이러한 모순―외부적 그리고 내부적―을 통하여 진행될 것이어서 완전한 공산주의가 달성되기 전에 세계혁명이 될 것인지 아니면 공산주의 방향으로 진행하는 사회의 전진이 멈출 것이다.





그리하여 추상적으로는 부정하지 않으면서, 스탈린에 의해 예견된 이러한 정세를 추상적으로 인정하고 생각하면서도, 혹자는 그것이 발생할 것이라고 의지해서는 안 되며, 혹자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직면하고 있는 계급투쟁의 과제들을 거부해서는 안 되며, 혹자는 꿈이라는 이름으로 현실 생활로부터 스스로를 추상해서는―스스로를 분리해서는―안 된다. 스탈린 동지가 꿈의 이름으로 쏘비에트 사회가 당시에 직면하고 있던 계급투쟁의 과제들을 거부했다고 생각할 가장 사소한 한 조각의 증거도 없다. 반대로 혹자는 그의 언급들이 18차 대회에 대한 그의 연설의 그 부분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거기에서 그는 쏘비에트 국가를 “낡은 박물관”으로 추방할 것을 당시에 요구하고 있던 당내의 일부 동지들을 반박하고 있다. 혹자는 그의 연설의 이 부분에서, 위에서 보여진 대로, 그는 주요하게 국가를 유지하는 것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MF가 그렇게 많이 투덜댄 그 언급들은 그 문제에 대한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정식화였고 계급투쟁의 문제에 대한 거부가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폐지를 잘못 요구하고 있던 동지들에 대해 단지 말하고 있다. 동지들, 이러저러하게 쏘비에트 국가는 상당한 기간 동안 유지되어야 한다. 국가의 폐지의 과제는 미래에 속하는 것이다. 계급투쟁의 문제들에 더 매달리고 쏘비에트 사회의 외부적 그리고 내부적 적들에 대해 싸우고 그리고 국가의 폐지에 대해 덜 매달리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올바르다.





‘일국에서 공산주의’의 문제를 떠나기에 앞서, 우리는 ‘초제국주의’에 대한 카우츠키의 이론에 대한 레닌의 견해들을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이 매우 유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 즉, 가능성(possibility―추상적 가능성:역자)과 잠재성(probability―현실적 가능성:역자)의 관계에 대한 일정한 명확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우리가 카우츠키의 반혁명적인 초제국주의 이론을 스탈린 동지의 쏘련에서 공산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언급들과 비교하는 것은 오직 가능성과 잠재성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반복한다. 그것을 넘어서서 둘 간에는 전혀 유사성이 없다.





카우츠키의 ‘평화로운’ 초제국주의 이론에 대한 레닌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는 잘 알려져 있다. 레닌은 단지 카우츠키의 “맑스주의와의 공공연한 절연”만이 후자를 “‘평화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꿈”으로 이끌 수 있다고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주장했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를 “제국주의 시대를 특별히 특징지우는 정치적 갈등들, 경련들 그리고 변혁들”을 직시하기를 거부하는―도피하려는―그리고 본질적으로 소부르주아적인 꿈들 그리고 “‘평화로운 초제국주의’를 바라보는 순진한 기대”에서 도피처를 구하려는 소부르주아적인 바람 탓으로 돌렸다. 다른 말로 하면, 카우츠키의 ‘평화로운 초제국주의’ 이론의 기초는 전쟁, 정치적 경련들 등과 같은 소부르주아에게 가장 불쾌하고, 가장 역겹고 그리고 혐오스런 갈등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속물의 반동적인 바람, “이미 도달한 제국주의 시대―갈등들, 재난들, 경련들, 전쟁들 그리고 혁명들로 가득 찬 시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리고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상대적으로 갈등이 없는, 상대적으로 재난이 없는 초제국주의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실천적으로 “평화로운 초제국주의” 이론은 제국주의 시대가 부과하는 가혹한 혁명적 과제들을 포기하고, 대신에 현재의 제국주의 시대의 임박한 종언에 대해 소망하는 꿈을 꾸는 것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첨예한’ 전술을 요구하지 않는, 초제국주의의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대”로 그것을 교체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리하여 레닌주의는 카우츠키의 부조리한 “평화로운 초제국주의” 이론과 화해할 수 없이 대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안심시켜서 본질적으로 소부르주아적인 “초제국주의”라는 꿈 속에서 잠들게 한다. 그 초제국주의는,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분쟁이 없고, 상대적으로 경련들이 없고 그리고 현재의 시대―대중들을 평화로운 것과는 거리가 먼 현재의, 제국주의적인 시대에 의해 부과되는 과제들과 직면하게 준비시키는 것이 필요한 그러한 시대―에 특징적인 대변동이 없다고 한다.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이론에 담긴 쓰레기에 대한 레닌주의의 비화해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레닌 동지가 쓴 바로 동일한 글, 즉, <NI 부하린의 제국주의론과 세계경제에 대한 서문>에서 다음의 글월을 발견하는데, 거기로부터 바로 앞선 글에서의 인용 표시들에서 나타나는 줄과 표현들이 취해진다:










“그러나 혹자는 추상적으로 제국주의를 뒤따르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 즉, 초제국주의가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아니다. 추상적으로는 혹자는 이러한 국면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미래의 쉬운 과제들에 대한 꿈의 이름으로 오늘날의 고된 과제들을 거부하는 사람은 기회주의자가 된다. 이론적으로는 그것은 실제의 생활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발전에 기초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꿈의 이름으로 그것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전이 모든 기업들과 모든 국가들을 예외없이 집어삼키는 단일한 세계 트러스트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으로의 발전이 이러한 압력 하에서, 이러한 속도로써, 이러한 모순들, 갈등들, 그리고 경련들로써―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족적, 기타 등등―진행되고 있어서 단일한 세계 트러스트가 도달되기 전에 각각의 민족적 금융자본이 ‘초제국주의’의 세계 연합을 형성하기 전에, 제국주의는 불가피하게 폭발할 것이고, 자본주의는 그것의 대립물로 전화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추상적으로는 레닌은 제국주의를 뒤따르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 즉, 초제국주의의 국면조차 부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면은, 레닌은 말한다, 생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발전이 “모든 기업들과 모든 국가들을 예외없이 삼켜버릴 단일한 세계 트러스트의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면이 생각될 수 있다면, 레닌이 정확하게 주장하듯이, 그러면 그 나라에서 발전이 공산주의의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을 때, 추상적으로 왜 일국(쏘련)에서 공산주의가 성취되는 것이 가능하다고(자본주의의 포위 때문에 국가의 폐지없이) 생각될 수 없는가? 그러나 실제적 실천에서는 모든 잠재성(probability)에서 볼 때(현실적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생각할 때―역자), 초제국주의의 단계 혹은 ‘일국에서 공산주의’의 그것은 도달되지 않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는 그것의 대립물 즉, 사회주의로 전화될 것이다.





초제국주의의 문제는 가능성과 잠재성 간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가능성과 잠재성 간의 관계가 두 경우에, 즉, 초제국주의와 일국에서 공산주의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끌어들여졌다. 우리의 견해로는 초제국주의는 비록 추상적으로는 생각될 수 있지만, 역시 추상적으로는 생각될 수 있는 ‘일국에서 공산주의’처럼, 실천적으로 달성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스탈린의 ‘일국에서 공산주의’ 가능성에 대한 추상적 정식화는 초제국주의에 대한 카우츠키의 정식화와는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즉, 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안심시켜서 평화로운 초제국주의로 접근한다고 하는 본질적으로 소부르주아적인 꿈속에서 잠들게 하기 위해, 계급투쟁의 과제들을 회피하기 위하여 그의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강화시킬 필요성을 강조함에 의해, 쏘련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오늘의 계급투쟁들을 위해 준비시키고 있는데 동시에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쏘련에서 공산주의의 추상적 가능성을 생각하고 부정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더욱이, 스탈린은 쏘련에서 공산주의 건설의 이론적 가능성을 제기함에 의해, 공산주의를 향한 쏘비에트 인민의 앞으로의 행진을 돕고 있었다. 쏘련이 착취계급들을 제거했으나 아직 다른 나라들에서 승리한 혁명에 의해 결합되지 못했을 때 쏘련이 스스로를 발견했던 정세에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한 걸음에 7리그2)를 가는 걸음걸이로 공산주의 사회의 방향으로 행진하는 것의 가능성은 쏘비에트 사회의 가일층의 발전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있었다.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공산주의의 방향으로 그들의 가일층의 전진에 앞서서 세계혁명을 기다리면서, 이 가능성을 부정하고 무위로 지내고 썩어가는 것일 것인데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을 성취할 가능성조차 부정한다면, 그 방향으로 전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스탈린이 그의 가능성(즉, 쏘련에서 완전한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과 카우츠키가 그의 가능성(평화로운 초제국주의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은 의미가 정반대로 대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탈린이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의 효과는(동시에 거대한 외부의 그리고 내부의 계급투쟁들을 준비하고 직시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장 첨예한 계급투쟁의 형태―를 강화하면서) 사회주의 건설과 공산주의의 방향으로의 운동을 공고화하고 가일층 전진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탈린이 이 가능성을 제기한다는 것에 대해 어떤 비판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카우츠키는 반대로, 평화로운 제국주의의 가능성을 제기함에 의해, 기회주의를 확산시키고, 대중들을 안심시켜서 잠들게 하고 제국주의의―평화로운 것과는 거리가 먼―시대의 특징들을 감추고 그리고 이 시대에 프롤레타리아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들을 회피한다. 그리하여 레닌이 카우츠키에 대해 그 가능성(레닌 스스로 추상적으로는 부정하지 않았던 가능성)을 제기한다는 것에 대해 공격함에 있어서 완벽하게 정당했는데 왜냐하면, 그 가능성은 교란의 방식으로, 혁명이 직면하고 있는 혁명적 과제들의 부인의 방식으로 카우츠키에 의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24장





‘민족주의적 타락’










두 번째의 주장은 쏘련에서 ‘민족주의적 타락’에 관한 것이다. 스탈린의 시기에 쏘련에서 민족주의적 타락이 압도적이었다는 어떠한 증거라도 있는가? 쏘련이 그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보다는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의 규범에 의해 인도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지할 수조차 있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면 MF가 그의 주장의 기초로 삼는 사실들은 무엇인가? MF의 사실들(문자 그대로 MF의 사실들인데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의 유일한 제조자이기 때문이다)은 다음과 같다:





그의 글의 18페이지에서 그는 쓰고 있다:










 “대략 인민전선 운동을 시작하는 시기부터 쏘련의 민족적 입장에 대한 관심이 국제공산주의 및 노동자 운동의 이해들보다 정책에서 우선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러한가?





혹자가 이 실체가 없는 일반적 주장을, 볼세비키 당과 “볼세비키들의 주도력에 크게 의존하여 탄생하였던 보다 약한 당들 사이에서 코민테른에서 지배적이 되었던 균형잡히지 않은 관계”에 관한 보다 초기의 주장과 연계한다면, 혹자는 MF에 따르면, 고려 중인 시기 내내, 볼세비키 당이 코민테른을 이용(그 표현의 최악의 의미에서)했고, 쏘련의 민족적 이익을 위해, 그리고 다른 곳에서의 혁명을 희생하여, 우애적인 당들의 신임과 신뢰를 악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MF는 이 주장을 어떻게 입증하는가? 그것을 주장함에 의해서. 그의 주장을 실증함에 있어서 그는 어떤 증거를 제출했는가? 도대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MF는 코민테른이 쏘련의 민족적 이해들의 추구를 위한 단순한 도구,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입증할 단 하나의 사실―단 하나의 사례―도 제출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당들의 대표들이 쏘련공산당으로부터 나온 “지령들”을 단순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떠한 증거도 제출하지 못했다. 그는 어떠한 증거도 제출하지 못했고, 어떠한 증거도 제출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용할 수 있는 이러한 증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증거가, 코민테른에서 쟁점들이 자유롭고 철저한 논쟁 후에 결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그 증거들은, 코민테른이 볼세비키들(이들을 MF는 빈정거리면서 “모든 지혜의 저장소”로서 규정한다)로부터 그들이 주욱 늘어서서 지시들(여러분이 좋다면 지령들)을 받기 위해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서 혁명을 배신하는 것을 대가로 쏘비에트의 민족적 이해들을 옹호하기 위해 때때로 함께 모이는 충성스런 사람들의 평화롭고 무미건조한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증거들은 코민테른의 토론에서 논쟁이 없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매우 흔한 일이었으며 더욱이 이 논쟁들은 한편으로 쏘비에트 대표단과 다른 한편으로 일정한 다른 대표 간의 논쟁들로 전혀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증거는 쏘련공산당(볼)의 높은 지위의 성원에 의해 서명되고 배부된 테제들에 대해 쏘비에트 대표가 수정안을 도입해야만 하는 부러워할 것이 없는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3).





물론 쏘련공산당(볼)에 의해 제기된 테제들이 다른 당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이들 테제들이 올바르다는 이유 이외의 다른 이유없이 받아들여진 많은 경우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아마도 ‘민주주의’의 견지에서, 그리고 “볼세비키 당의 지령들”의 수령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코민테른의 다른 당들의 대표들이 때때로 쏘련공산당(볼)에 의해 제기된 올바른 테제들을 거부했어야만 했다고 MF는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한 종류의 ‘민주주의’는 그러나 본질적으로 반혁명적이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에 대립된다.





코민테른의 정책들을 MF는 피상적으로 검토하기 때문에, 그는 그것들에서 비난할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의 정책들이 일반적으로 올바랐다는 것이 “성급한 가정”이 될 것이라고 그가 주장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코민테른의 정책들을 그가 파악하기 시작할 때마다, 그는 코민테른의 정책이 올바랐고 그리고 즉, 어쨌거나 이들 정책들을 가장 일반적이고 실체가 없는 방식―예를 들면, “코민테른의 정책이 일반적으로 올바르다고 하는 것은 성급한 가정이 될 것이다”라고 읊조리는 것에 의해―을 제외하고는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꽁무니를 뺀다. MF가 일반적 비난들의 영역을 남겨두어야만 하고 코민테른의 실제적인 정책들에 대한 토론에 들어가야만 하는 때에, 그는 또한 퇴각해야만 한다. 다시금 그는 코민테른의 정책들이 “실제적 고려들에 의해 지시된다”는 것을, “국제적 투쟁의 조건들이 변화했고,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기의 시기에 많은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비틀거리는 상태의 완강한 옹호자들로서 스스로를 폭로했다”(p.12)는 것을, 그리고 “디미트로프에 의해 규정된 통일전선의 개념은 주요하게 올바르다”(p.13)는 것을, “디미트로프가 파시즘에 맞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종식시키고 노동자들의 권력 그리고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한, 오랜 기간의 투쟁의 단지 한 부분이었다”(p.14)는 것을, 그리고 기타 등등을 인정하고 도망친다.





그러면, 코민테른에 의해 추구된 정책들은 올바랐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들이 올바랐다고 하는 것은 “성급한 가정”일 것이다! 그러면, 코민테른의 정책들은 올바랐던 것이 입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쏘련공산당(볼) 이외의 당들은 이들 정책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쏘련공산당(볼)의 “지령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코민테른이 “국제적 투쟁의 조건들”에 기초하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데 왜냐하면, 다른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돕는 것은 별도로 하고, 그것은 또한 쏘련의 입장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범죄가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쏘련의 민족적 이익들에 봉사하기 위해 코민테른을 이용하는 것에 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입증된다... 충분하다!





MF는 그의 주장을 입증하는 단 하나의 사실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느 것에서 쏘련은 고려 중의 시기 동안에 자신의 민족적 이익들을 도모하기 위해서 코민테른을 이용했는가?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느 것에서 쏘련은 고려 중인 시기 동안에 “자신의 민족적 이익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국제적인 공산주의 및 노동자들의 운동”을 배신했는가?





MF의 주장을 입증하는 아무 사실도 없다면―그리고 위에서 보여진 대로 아무 것도 없다―그러면 그것의 기초는 무엇인가? MF의 천박한 글을 깊이 탐구해보면, 분명한 것은 그의 악의적이고, 비방적이고 그리고 근거가 없는 주장들의 기초는 세계혁명에 대한 그의 꾸며진 관심이 아니라 쏘비에트 혁명에 대한 그의 실제적 무관심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쏘련이 실제로 따랐던, 복잡하지만 철저하게 과학적이고 철저하게 혁명적인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면 쏘련이 생존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지 아닌지에 대해 그는 매도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글에 완전히 명백하게 나타난다. MF가 쏘비에트 혁명의 세계혁명에 대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완벽하게 명백하다. 스탈린이 쏘비에트 혁명을 세계혁명의 보조물―한 부분―로서 간주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스탈린에 반대하는 MF의 비방적인 비난들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계혁명이 노동계급의 유일한 국가(당시에)와 아무 관련이 없는 듯이 언제나 세계혁명을 당시의 혁명적인 쏘련으로부터 고립하여 바라보았던 사람은 MF와 그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명백하다. 그들은 계속하여 세계혁명의 이익들을 쏘련의 혁명적 이익들에 대립시킨다. 그들은 쏘련에게 모든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쏘련이 다른 인민의  혁명을 만들어야만 했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쏘비에트 혁명에 대해 어떤 의무들도 없다고 간주한다. 이 세계에 대해 MF에 의해 설교된 유형의 어떤 ‘국제주의’의 결핍도 결코 없었는데, 그는 쏘비에트 혁명의 세계혁명에 대한 관계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그는 그리하여 뜨로츠키주의자의 방식으로 쏘련을 ‘민족주의적’ 정책을 추구했다고 탄핵하며 돌아다니는데, 사회주의 쏘련을 옹호하여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제기된 싸움이 쏘비에트 혁명에 도움이 되는 만큼 “국제 공산주의 및 노동자들의 운동”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동일한 방식으로 쏘련에 의해 해외의 혁명운동들에 주어진 도움들은(그것들은 매우 많았다) 그것이 이 운동들에 도움이 된 만큼 쏘비에트 혁명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이 운동으로부터 우리가 쏘비에트 혁명을 잘라낸다면, 우리가 쏘비에트 혁명의 이익들을 임의의 방식으로 추상한다면, 그 당시의 “국제적인 공산주의 및 노동자들의 운동”은 무엇이겠는가?





MF는 이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사람도 아니고 마지막 사람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스탈린의 시대에도 또한 코민테른의 강령이 그것의 내적 내용에서 그다지 국제주의적이지 못하다―그것이 성격에서 ‘너무 러시아적’었다―고 간주했던 MF 유형의 ‘국제주의자들’이 코민테른을 둘러싼 써클들에서 존재하였다. 이들 사람들의 그릇된 국제주의에 대한 스탈린의 반박을 여기에서 재현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쓸모있는 것이다. 여기에 스탈린 동지가 말했던 것이 있다:










“이러한 의견[코민테른의 강령이 ‘너무 러시아적’이다]에 대해 근거를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강령 초안이 쏘련에 대한 특별한 장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인가? 그러나 그것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혁명은 그 성격에서 민족적이고 그리고 단지 민족적인 혁명이고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은 국제적 혁명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왜 그것을 세계혁명운동의 기지라고 부르고, 모든 나라들의 혁명적 발전을 위한 도구라고 부르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국이라고 부르는가?”





“우리 가운데에는 쏘련에서 혁명이 배타적으로 혹은 주요하게 민족적 혁명이었다고 간주했던 사람들―예를 들면 우리의 기회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실패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였다. 아마도 기회주의자들의 발걸음들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코민테른 주위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우리의 혁명은 유형에서 민족적인 그리고 오직 민족적인 혁명인가? 그러나 우리의 혁명은 쏘비에트 혁명이고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쏘비에트 유형은 다소간 다른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하여 의무적이다. 레닌이 쏘련에서 혁명이 발전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 쏘비에트들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했던 것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부터 그것의 성격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의 유형에 관해서도 우리의 혁명이 두드러지게 국제적인 혁명이라는 것, 주요하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어떤 나라에서도 따라야 할 양식을 제기하는 것임은 따라나오지 않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혁명의 국제적 성격은 쏘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게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과 피억압 대중들을 향한 어떤 의무들을 부과한다. 이것이 레닌이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른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과 승리를 위하여 가능한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것으로부터 무엇이 따라나오는가? 우리의 혁명은 세계혁명의 부분이고, 세계혁명운동의 기지이고 도구라는 것이 적어도 따라나온다.”





“의심의 여지없이, 또한 쏘련에서 혁명은 모든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들을 향한 의무들을, 그것이 실행하고 있는 의무들을 갖고 있고 모든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한 어떤 매우 중요한 의무들을 갖고 있다. 이들 의무들은 내부적 그리고 외부적 적들에 대한 그것의 투쟁에서, 쏘련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교살하기 위해 계획된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에서 쏘련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하는 데에, 제국주의 군대들이 쏘련에 대한 공격의 시기에 쏘련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측으로 직접적으로 넘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옹호하는 데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쏘련에서 혁명이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쏘련에서 혁명의 승리가 세계를 관통하는 혁명을 위한 승리라는 것이 따라나오지 않는가?”





“이 모든 것 후에, 쏘련에서의 혁명에 대해 세계를 관통하는 혁명운동과 고립된 그리고 아무 연계도 없는 오직 민족적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아무 연계도 없이 고려된다면, 세계 혁명운동에 대해 도대체 어떤 것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만약에 코민테른의 강령이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격과 과제들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무시한다면, 모든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들을 향한 그것의 의무들을 무시한다면, 그리고 쏘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한 모든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들의 의무들을 무시한다면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다루는 코민테른의 강령의 가치는 무엇이겠는가?” (“코민테른의 강령”, 1928년 7월 5일에 행한 연설, 저작집 11권, pp. 157-159)










이리하여 MF가 고려 중인 시기의 세계혁명운동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완벽히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쏘련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연계 밖에서 고려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쌍한 그리고 거만한 MF와 달리, 그 시기의 역사에 대해 특히 코민테른의 역사에 대해 실제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코민테른의 강령뿐만 아니라 정책들이 어떤 하나의 민족적 당의 강령과 정책들이 아니었다는 것은 완벽하게 명백하다. 그것들은 스탈린동지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오직 ‘문명화된’ 민족들의 강령과 정책들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것들은 세계의, 모든 민족들의, 모든 사람들의, 흑인과 백인의 모든 공산주의 당들을 포괄했다.





코민테른에 대해 한 무더기의 왜곡들을 입 밖에 내고, MF는 전형적으로 트로트 방식으로 빨리 걸어서, 독일-쏘비에트 불가침 조약에 대한 반혁명적인 뜨로츠키주의적 왜곡들에 지나니 않는 몇몇의 왜곡들을 입 밖에 낸다. 그는 그의 글 18페이지에서 말한다:










“지배적이던 환경 속에서, 쏘비에트 정부는 협약에 서명하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는데, 1939년 11월에서 1941년 6월 사이의 쏘비에트의 행위와 코민테른 정책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포기에 다름 아니었다.”










MF는 위의 주장을 어떻게 입증하는가? 그것을 주장함에 의해. 이 주장의 증거로서 그의 글에는 문자 그대로 단 하나의 단어도 있지 않다.





사실 이때까지 MF에 의해 언급된 시기 동안에 독일-쏘비에트 불가침협약에 대해 그리고 쏘비에트 정책의 수행에 대해 공격했던 유일한 사람들은 뜨로츠키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쏘비에트 정책을 공격해야만 하는 것은 완벽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쏘비에트의 정책은 제국주의에 대한 형세를 역전시켰는데 그때 제국주의는 볼세비즘을 분쇄하기를 희망하고 있었고 지금은 제국주의 자신들 간에 쓰라린 전쟁에 말려들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나찌 독일을 쏘비에트 러시아에 반대하여 돌리기를 희망했던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이제는 나찌 독일과 싸움을 해야만 했다. 쏘비에트와 코민테른 정책의 수행은 상이한 나라들의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쏘련을 절멸시키는 전쟁에서 단결하는 대신에 각자에 대한 파괴의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던 정세를 만드는 데에 적지 않은 정도로 기여했다. 이 관점에서, 제국주의자들이 스탈린 동지, 쏘련공산당(볼) 그리고 코민테른을 공격해야만 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인가? 우리가 제국주의자들이 제국주의를 약화시키는 데에 대하여 쏘련공산당(볼), 코민테른 그리고 스탈린에 대해 감사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뜨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이전의 발행물4)에서 1930년대에 그들이 파시즘의 요원이 되었고 쏘련의 패배를 위해 일했다는 것을 보인 바 있다. 그리하여 파시즘의 뜨로츠키주의 요원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에 대하여 뜨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 관료주의”를 공격하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그러므로 전세계의 맑스-레닌주의자들과 진보적 인민은 논의 중인 시기 동안에 쏘비에트와 코민테른 정책의 수행을 극단적으로 복잡하고 위험스러운 국제 정세에 대한 레닌주의의 전술의 적용에 대한 모범으로 간주했는데 그 정세는 파시즘의 패배와 국제적인 제국주의의 약화를 초래했다. 이제 영국에서의 반수정주의 운동에서, “1939년 11월과 1941년 6월 간의 쏘비에트와 코민테른 정책의 수행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포기에 다름아니라고” 간주하는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자라난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이들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전혀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지도하고 제국주의를 약화시킨 데에 대하여 여전히 화가 나있고 스탈린 동지를 여전히 용서하지 않은 반수정주의운동에서 제국주의의 요원들이라고 단지 결론내릴 수 있을 뿐이다.















독일-쏘비에트 불가침 협약에 대한 사실들의 요약










여기에 제국주의와의 전쟁의 문제에 대해 쏘련의 입장을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논쟁의 여지없는 사실들이 있다.





첫째로, 그것은 제국주의와의 전쟁에 휩쓸려들지 않으려는 쏘련의 노력이었다.





둘째로, 이러한 전쟁을 회피하는 것은 전적으로 쏘련에 맡겨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면, 제국주의가 쏘련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려 한다면, 후자는 홀로 싸워야만 하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주요 제국주의 나라들―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연합된 공격에 직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셋째로, 이 목적을 위하여, 한편으로 파시스트적인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적인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구분들이 철저하게 활용되어야 했다. 제국주의의 두 그룹 간의 구분들은 스탈린의 상상의 허구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실제적인 것이었고 고려 중인 두 그룹들의 국가들의 물질적 이해들에 기초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이 일정한 국가들이 치고 나가게 하고 다른 국가들이 뒤에 처지는 것을 야기했다. 세계의 예전의 분할은 더 이상 세력균형에 조응하지 못했고 이리하여 세계의 새로운 분할이 필요했다. 이것은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바로 그 이유였다. 이것이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이 그들의 경제의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앞으로 치고나가면서, 시끄럽게 굴고 있던 바로 그 이유였다. 오래된 제국주의 나라들, 주요하게 영국과 프랑스는 새로운 주자들, 주요하게 독일과 비교할 때 그들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발전에서 뒤쳐졌고 세계의 예전의 분할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새로운 분할을 요구하면서, 파시스트 국가들은 민주주의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물질적 이익들을 침해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이러한 이해갈등을 쏘련이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넷째, 이 목적을 위하여, 쏘련은 매우 복잡한 대외 정책을 추구하면서, 만약에 이러한 침략이 발생할 경우에, 침략자들에 대한 집단적인 행동을 위하여 파시스트 국가들에 의한 침략을 방지하기 위한 민주주의적인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집단적인 안전보장 협약을 맺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섯째, 민주주의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에 의해 지배되어 쏘련과 집단적인 안전보장 협약에 서명할 것을 거부하고, 파시스트 국가들, 특히 나찌 독일에 대한 그들의 양보 정책을, 그 침략의 방향을 쏘련을 향한 동쪽으로 돌리고자 하는 노력으로 계속했을 때, 쏘련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조국의 이익들을 보호하는 일정한 다른 방법을 시도해야만 했다. 쏘련은 1939년 8월 23일에 독일-쏘비에트 불가침 협약에 서명함에 의해 민주주의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대외 정책에서 형세를 역전시켰다.





여섯째, 이 협약을 서명함에 있어서, 쏘련은 자신이 독일과만 싸우지 않겠다고 보증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 안전보장에 동의하는 것을 거절함에 의해 독일과의 전쟁에 쏘련을 휩쓸리게 하려고 시도했던 그 열강들에 대해 독일이 싸울 것을 보증했다. 1939년 9월 1일에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략했다. 이틀 후에 앵글로-프렌치 최후통첩이 만기가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상태가 되었다.





일곱째, 협약의 추가적인 비밀 조항들은, 앞으로 보여질 것이지만, 전쟁이 실제로 쏘련에 닥쳤을 때 쏘비에트의 방어에 사활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던 쏘비에트 ‘이익의 영역들’을 보호하는 데 충분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일-쏘비에트 불가침 협약은 쏘련이 영원히 그것의 밖에서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전쟁에 쏘련이 돌입하기 전에 쏘련의 방위의 준비 정도를 강화하기 위해 2년의 극히 가치있는 기간을 쏘련에게 가져다 주었다.





전쟁이 마침내 쏘련에게 강요되었을 때, 쏘련은 나찌 독일과 그들의 동맹국들에 맞서서 동맹들의 최고의 그리고 영광스러운 승리에서 가장 영웅적인 기여를 했다. 적군(赤軍)과 쏘비에트 인민은 쏘련에서 나찌를 패배시키고 베를린까지 그들을 추격하고 그 과정에서 나찌의 군화발 점령에서 각 나라들을 해방시키고 동유럽에 사회주의를 가져옴에 의해서, 그들의 완강함을,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의 완강함과 우월성을 보여주었다.





모든 혁명적이고 정직한 부르주아 역사가들과 정치가들은 위의 요약에 동의한다. 오직 가장 완고한 반공산주의자들, 특히 뜨로츠키주의자들이 그것에 논쟁을 감히 걸려고 한다. 뒤에 이어지는 것은 위의 요약의 실증이다.















쏘련은 다가오는 전쟁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스탈린과 쏘련공산당이 쏘련이 독일과 싸워야만 할 것임을 깨닫지 못했고 쏘련이 독일의 선의에 의존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헛소리이다. 사실은 다음과 같다,










“그는(스탈린) 불가피한 전쟁을 빗겨가거나 혹은 적어도 지연시키려 했지만, 쏘련은 동쪽과 서쪽에서 위협을 받았고 대외관계들의 행위는 더욱더 복잡해졌다. 그는 거대한 책임들을 수행했는데 오직 예외적인 육체적 정력, 날카롭고 규율 잡힌 지성, 그리고 강철 같은 자기규율의 사람만이 이러한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이안 그레이, op cit, p.293)





“내부적 그리고 외부적인 스탈린의 정책에 근본적인 것은, 전쟁이 임박하고 있고 쏘비에트 러시아가 힘을 모을 수 있기 전에 우리를 유린할 수도 있다는 확신이었다. 즉각적인 집단화와 앞뒤 가리지 않는 공업화를 요구한 것은 이러한 생각이었다. 잃어버릴 시간이 없었다. ...” (앞의 책, pp.295-296)










일찍이 1925년 1월에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전쟁의 전제조건들이 무르익고 있다 ...” 그리고 계속하여 경고하기를, “ 우리의 기치는 여전히 평화의 기치이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다면, 우리는 팔짱을 낀 채 앉아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나서야만 하게 될 것인데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으로 나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저울에 결정적인 무게를 던지기 위해 나서야 하는데, 그 저울을 기울어지게 하는 무게이다.” (스탈린, 전집, 7권, pp. 13-14) 










모든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도이처가 “찬란하게 충족된 예언”이라고 부르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포함하고 있는 그의 1931년 연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선진적인 나라들보다 50년 혹은 100년이 뒤쳐져 있다. 우리는 10년 안에 이 거리를 따라잡아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하든가 아니면 우리가 패하든가.” (스탈린, “사업집행부의 과제들”, 전집 13권, p.41)










그의 전기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나찌의 대외정책을 명확하고 솔직하게 틀을 잡았다:










“우리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의식적으로 우리의 전쟁전의 대외정책 방향 밑에 선을 긋는다 ... 우리는 남쪽으로 향하는 끝없는 독일의 운동을 멈추고 우리의 눈을 동쪽에 있는 땅으로 돌린다. ...”





“우리가 오늘날 유럽에서 땅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우선적으로 러시아만을 마음에 둘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런던 1984, pp.598과 604)















집단적인 안전보장을 달성하려는 쏘비에트의 노력과 비침략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유화정책










쏘련은 나찌가 1933년 1월에 권력에 다가가는 광경을 즐길 수가 없었다. 이는 쏘련에게 유례없는 위험한 정세를 조성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쏘련의 대외정책의 강조점은 세계 평화의 보전과,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당시 존재하는 세계의 분할의 유지에 객관적인 이해가 있었던 민주적인 제국주의 나라들과의 집단적인 안전보장 협약을 체결하는 노력에 있었다.










“대외정책의 수행에 있어서, 스탈린은 커다란 주의, 자제 그리고 현실주의를 보여주었다. 그는 러시아의 공업과 군사적 힘을 건설할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는 항상적으로 동쪽과 서쪽에서 도발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그는 격노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능한 한 전쟁의 발발을 지연시켜야 한다는 최우선의 필요에 대한 시야를 잃지 않았다. 그가 세계적 사안들에서 평화와 군비철폐에 가장 큰 강조를 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는 집단적인 안전보장의 정책을 추구하였다. ... ” (이안 그레이, op. cit. p.296)










집단 안전보장의 정책은, 사회주의 쏘련이 전쟁을 피하고 평화가 요구되었던 사회주의 건설의 과제를 달성하는 데에 있어서 절실했고, 그리고 비침략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은 침략적 국가들에 의한 전쟁을 피하고 혹은 그들의 초기의 패배를 보장하는 데에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추구되었다.





1939년 3월에 쏘련공산당 18차 대회에서 연설하면서 그리고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스탈린은 말했다:










“비침략 국가들, 우선적으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이익을 모든 면에서 침해하는 침략자 국가들에 의해 전쟁이 수행되고 있다. 후자(영국, 프랑스, 미국)는 후퇴하고 퇴각하고 있고 침략자들에게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비침략국가들을 희생하여 진행되는, 세계와 영향력의 범위에서, 공공연한 재분할을 목격하고 있는데, 저항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시도도 없고 심지어 그들의 측에서 어떤 묵과조차 있었다.” (스탈린, ≪레닌주의의 문제들≫, 모스크바, 1953년 p.753)










쏘련과 집단적인 안전보장 협정에 들어가는 데에 객관적인 이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그들의 증오에 의해 압도되어, 각각 네빌 챔벌레인과 에두르드 달라디에르에 의해 이끌어졌던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이러한 동맹을 결성하는 것을 거부했다.





스탈린은 물었다.










“그것(비침략국가들의 유화정책)이 비침략국가들의 약화 탓인가?”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아니다! 결합된, 비침략적인, 민주적인 국가들은 의문의 여지없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파시스트 국가들에 비해 강하다.”





“ ... 주요한 이유는 비침략적인 나라들의 다수가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집단적인 안전보장의, 침략자들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의 정책을 거부했고 비개입의 입장, 중립의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비개입 정책은 독일이 스스로를 쏘련과의 전쟁에 휩쓸리게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모든 교전국들을 전쟁의 수렁에 가라앉게 하려는, 그들을 이 점에서 은밀히 격려하려는, 그들이 서로를 약화시키고 지치게 만들려는, 그리고  나서는 그들이 충분히 약해졌을 때, 신선한 힘을 갖고 무대에 등장하여, 물론 ‘평화의 이익을 위해’ 나서서, 그리고 약해진 교전국들에게 조건들을 명령하려는 ... 열망, 바람을 드러내는 것이다.”





“값싸고 용이한 것!” (앞의 책, p.754)










나아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나찌에 넘겨주었던 뮈니히 협정을 언급하면서, 스탈린은 계속하여 말했다:










“... 혹자는 쏘련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는 것을 떠맡는 것의 대가로서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이 독일에 넘겨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앞의 책, p.756)










쏘비에트의 대외정책의 과제들을 틀지우면서, 스탈린은 “신중해야 하고, 우리의 나라를 그들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불 속에서 밤을 꺼내게 하는데 익숙한 전쟁도발자들에 의한 분쟁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필요를 강조했다.(앞의 책, p.759)





쏘비에트 정부는 1938년 9월 28-30일에 소집되어, 체코슬로바키아를 파시스트 독일의 부드러운 자비에 맡겨버렸던 뮈니히 협의에 포함되는 것은 고사하고 의논대상도 못되었다. 동시에 서구 열강들은 국제연맹의 후원 하에 대규모의 집단적 안전보장 동맹을 위한 쏘비에트의 제안들에 반응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윈스털 처칠이 이러한 맥락에서 말했던 것이다:










“쏘비에트의 제안은 사실상 무시되었다. 그들은 히틀러를 반대하는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고, 무시―경멸은 말할 것도 없고―당했다. 이는 스탈린의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사건들은 마치 쏘련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나중에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W.S. 처칠, 제 2차 대전, 1권, p.104)










동일한 책에서 처칠은 쏘비에트의 계획이 전쟁을 상당기간 회피하거나 혹은 적어도 지연시킬 수 있었을 것임을 그리고 쏘련이 역할해야 할 때였음을 인정하고 있다. (234-251페이지를 보라)





그러나 비침략국가들의 반공산주의가 일시적 승리를 얻었다. 영국의 외무장관이었던 로드 핼리팩스는 히틀러에게 1937년 11월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와 영국정부의 다른 성원들은 총통이 많은 것을 얻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그의 나라에서 공산주의를 분쇄하고, 그는 공산주의가 서유럽으로 향하는 길을 막았고 독일은 그리하여 볼세비즘에 반대하는 서구의 보루로 간주되는 칭호를 획득했다. ...”










“영국과 독일의 친선을 위한 근거가 준비되었을 때, 네 개의 커다란 서유럽 열강들은 유럽에서 지속적인 평화의 토대를 결합하여 세워야만 한다.” (독일의 외교정책에 대한 문서들: 1918-45, 1권, 런던 1954, p.55)






























쏘련이 자신의 정책을 밀고나가다










쏘련공산당의 지도부가 파악했듯이,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의 이익들과 갈등했던 유화정책이 조만간에 이들 나라들에서 제국주의의 강력한 대표자들에 의해 반대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쏘련은 집단적인 안전보장 동맹을 체결하려는 자신의 노력을 밀고나갔다.





1939년 3월 15일에,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로 행진해 들어갔다. 서구의 여론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강탈에 의해 격분되었다. 챔벌레인은 화난 공중의 그리고 의회의 반응에 의해 뚜렷하게 충격을 받았다. 영국정부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 주재 영국대사가 쏘비에트 외무장관인 막심 리트비노프를 방문하여, 독일이 루마니아를 공격한다면 쏘비에트의 반응이 어떠할지 물었다. 리트비노프는 같은 날 저녁에, 그러한 위험을 미리 막기 위해서 영국, 프랑스, 쏘련, 폴란드 그리고 루마니아의 대표들이 긴급하게 회동을 해야 한다는 제안으로써 대답했다. 영국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대신에 더 이상의 침략이 있을 경우에 네 개의 나라들이 서로 간에 협의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의해 화가 났지만, 쏘비에트 정부는 폴란드가 또한 참가국이 된다는 것을 조건으로 그것에 동의했다. 폴란드 외무 장관인 콜 벡은 챔벌레인 처럼 반쏘비에트적이었는데 참가하기를 거부했고 대신에 폴란드-영국 상호 원조조약을 제안했다.





1939년 3월 31일에, 쏘련과의 사전 협의없이, 폴란드-영국 조약이 침략에 대해 폴란드를 방어한다는 것을 영국 단독으로 보증하는 내용으로 공표되었다. 4월 13일에 그것은 그리스와 루마니아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이안 그레이가 타당하게 관찰하듯이: “독일이 폴란드 혹은 루마니아를 공격한다면, 영국은 쏘련의 지원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유없이 모욕하는 방식으로 두 정부는 주의깊게 쏘비에트 정부를 무시했다. 처칠, 에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챔벌레인의 정책의 어리석음을 지적했다.” (이안 그레이, op.cit. p.306)





극단적인 국내의 압력 하에서, 영국정부는, 4월 15일에, 쏘련에게 쏘련이 일방적으로 보증을 할 것을 제안했다. 쏘련정부는 독일의 공격의 경우에 쏘련에 대한 어떤 원조도 그것이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 4월 17일에 쏘련정부는 영국-프랑스-쏘비에트의 상호 원조조약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군사적 협정을 포함하고 있었고 발틱해로부터 흑해에 이르기까지 쏘련과 접경하는  모든 국가들의 독립을 보증하고 있었다. 챔벌레인과 핼리팩스는 그것이 폴란드와 독일을 불쾌하게 하고 그것이 영국으로 하여금 핀란드와 발틱 국가들의 방어에 말려들게 한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그것을 거절했다.










“스탈린에게 불가피한 결론은 영국 정부의 지도자들이 쏘비에트 정권에 대한 적대에 의해 눈이 멀어서 전쟁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서조차, 독일에 반대하는 쏘비에트 러시아와 의 동맹을 그들은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안 그레이, 앞의 책, p.307)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 써클들에게는 쏘비에트와의 연합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비위에 거슬렸고 ... 일부 지도적인 서구의 정치가들은 나찌즘을 볼세비즘에 반대하는 믿을 만한 방벽이라고 간주했고, 그들 중에 몇몇은 그 방벽을 성을 공격하는 망치로 전화시킨다는 생각으로 장난을 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와의 동맹에 대한 불가피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 중에서조차 일부는 독일을 러시아와 처음으로 맞붙게 하는 것이 건전한 정책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도이처, op.cit. pp. 413-414)










5월 3일에 리트비노프는 외교 인민위원으로의 자리에서 몰로토프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명백한 경고로서 역할했을 것인데 왜냐하면 리트비노프라는 이름은 집단적 안전보장에 대한 노력과 매우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쏘련은 집단적 안전보장 동맹을 위한 작업이라는 정책을 밀고나갔다. 영국정부는 쏘련과 협상하라는 증대하는 공공의 압력 하에 있었다. 6월 2일에, 쏘비에트 정부는 새로운 협정초안을 제출했는데 그것은 보증받는 나라들과 세 참가국들의 책임의 정도를 특정했다. 쏘비에트의 제안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영국정부는 협상에 속도를 내기 위해 모스크바로 대표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비록 챔벌레인과 핼리팩스는 이전에 개인적으로 베를린에 간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스크바로는 외무성의 2급관리를 보내서 고의적으로 면목을 실추시켰는데, 이는 “실제적인 모욕”이었다. (처칠, 앞의 책, p.304)5)





7월 17일에, 몰로토프는 군사적 협정의 결여 속에서 정치적 협약에 대한 계속된 논의에서 결론지어진 점이 거의 없다고 선언했다. 영국정부는 몰로토프의 선언에 대하여 모스크바로 군사적 사절단을 보내기로 동의함에 의해 반응을 했다. 쏘비에트 정부가 희망했던 제국의 참모장인 로드 고르트를 보내는 대신에, 챔벌레인은 더 나이든 은퇴한 해군제독인 리지널드 플렁케트-어니-얼-드랙스 제독을 지명했는데 그는 7월 23일에 가장 느린 교통수단으로 그리고 가장 느린 경로로 출발했는데(“대화하면서 매우 천천히 갈” 것을 지시받은 거래를 하면서) 그는 8월 11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더욱이 놀랍게도 쏘비에트 측은  영국의 대표단이 단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어떤 협상할 권한도 없이 왔다는 것을 발견했다.










“확실한 것은 만약에 서구의 정부들이 그를(스탈린을) 히틀러와의 전쟁으로 몰아가기를 원했다면, 그들은 그들이 실제로 했던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영국-프랑스 군사 대표단은 11일간의 귀중한 날들 동안 출발을 연기했다. 그들은 가능한 가장 느린 보트로 도중에 여행을 하면서 5일을 낭비했다. 그들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자격과 힘이 명확하지 않았다. 거의 히틀러의 지배하에 있는 뮈니히로, 수상들이 날아가는 것을, 자신들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던 정부들이, 러시아와 동맹을 협상하는 데에는 장관급의 관리들도 보내기를 거부했다. 군사적 회담을 위해 보내진 군인들은 예를 들면 폴란드와 터키에 보내진 사람들보다 더 권한이 없었다. 스탈린이 동맹을 의도했다면, 그가 취급받은 방식은 거의 그로 하여금 그의 의도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 계산된 것 같았다.” (도이처, 앞의 책, p. 425)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12일에, 군사적 협정에 대한 회담이 시작되었다. 쏘비에트 대표단의 지도자인 마샬 보로쉴로프는 대표들에게 쏘비에트 부대들이 폴란드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됨이 없이는 그들이 폴란드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통지했다. 폴란드 사람들은 그들이 쏘비에트의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것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스탈린이 당시에[1938년 9월 경에] 그의 행위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면, 그가 비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앞의 책, p.419)










그리고 나아가:










“뮈니히의 쓰여지지 않은 최대치는 러시아를 유럽으로부터 배제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큰 그리고 아마도 큰 서유럽의 열강들은 러시아를 배제하기를 원했다. 동유럽의 작은 민족들의 정부들도 또한 커다란 곰에게 비명을 질러댔다: ‘네가 있는 곳에 머물러라, 너의 굴에 머물러라.’ 언젠가 뮈니히 전에, 프랑스와 러시아 사람들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방어를 위한 연합된 행동들을 토의하고 있을 때, 폴란드와 루마니아 정부들은 러시아 부대들이 체코슬로바키아로 가기 위해 통과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붉은 군대―그리고 붉은 공군조차―에게 통과의 권리를 부정했는데 단순히 그들이 공산주의를 두려워했다는 것 때문만 아니라 그들이 히틀러에게 아첨한 것이었다.”





“독일과 친선에 대한 새로운 시도라는 생각이 스탈린의 마음에 형성되었던 것은 뮈니히의 얼마 후였음이 틀림없다. ...” (앞의 책, p.419)










프랑스와 영국의 정부는 또한 이 조항을 거부했다. 8월 21일에 불명확하게 산회되었던 논의들을 계속하는 것은 그 환경 속에서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후에 쏘비에트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쏘련과 동맹을 체결하는 것에 대해 완강하고 일관되게 거부하고 있음을 깨닫고서,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할 것을 결정했다.










“그의(스탈린의) 일차적인 관심은 쏘비에트 공업과 군대가 힘을 모을 수 있기 위하여 여전히 시간을 얻는 것이었다. 마지못해 그는 이제 히틀러와의 협정의 가능성으로 전환했다.” (이안 그레이, op. cit. p.309 그리고 처칠, op.cit. p.306)










스탈린이 왜 독일과의 불가침 협정에 동의했는지에 관해, 도이처는 말한다:










“그가(스탈린) 히틀러의 승리를 거의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은 똑같이 분명하다. 그의 목적은 이제 시간, 시간 그리고 다시 한번 시간을 버는 것이었고 그의 경제적 계획들을 진척시키는 것이었고 러시아의 힘을 건설하고 그리고 나서는 다른 교전국들이 지쳐버렸을 때 그 힘을 저울에(scales) 던지는 것이었다.” (앞의 책, p. 430)




















쏘비에트-독일의 불가침 협정이 서명되다










독일이 일찍이 1939년 4월 17일에 독일-쏘비에트 관계들의 정상화를 위해 쏘련에 접근했었고, 그리고 이어지는  쏘련 정부에 대한 접근들이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독일 대사, 프리즈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백작은 8월 4일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나의 전체적인 느낌은 쏘비에트 정부가, 영국 및 프랑스가 쏘비에트의 모든 바람들을 충족시킨다면 그들과 서명할 결의가 현재 되어 있다는 것이다. ... 쏘비에트 정부를 전환하게 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당한 노력을 요하는 것이다.” (처칠, op.cit. p.305)










8월 14일에 독일의 외무장관 요하힘 폰 리벤트로프는 슐렌베르크에게, 몰로토프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통신문을 읽어주도록, 전신으로 지시했다.:










“두 나라의 완전한 만족을 위해, 해결될 수 없는 발틱해와 흑해 사이에서의 어떤 문제도 없다. ... 나는 총통의 견해들을 M 스탈린에게 설명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단기간 방문할 준비가 되어 있다. ... 오직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만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 (≪독일 외교정책에 관한 서류들 1918-45≫, 시리즈 D, 7권, 런던 1956, p.63)










8월 16일에 슐렌베르크는 몰로토프를 만났고 그에게 리벤트로프의 통신문을 읽어주었다. 같은 날 밤에 그는 베를린으로 몰로토프의 그 통신문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보고하였고 추가적으로 몰로토프가 “독일 정부가 어떻게 하여 쏘련과 불가침 협정을 체결하는 생각이 내키게 되었는지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전했다. (앞의 책, p.77)





리벤트로프는 같은 날에 답변을 보냈는데, 슐렌베르크에게 지시하여 몰로토프를 다시 만나서 다음을 그에게 전하도록 지시했다:










“독일은 쏘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비행기로 8월 18일 금요일 이후 언제라도 모스크바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총통으로부터의 완전한 권한에 기초하여 독일-러시아의 관계들의 전체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그리고 상황이 된다면, 적절한 협정에 서명하기 위해서이다.” (앞의 책, p. 84)










8월 17일에 몰로토프는 슐렌베르크에게 그것의 “바로 얼마후에” 불가침 협정의 체결이 뒤따를, 무역 협정을 시작할 것을 제안하는 서면 답변을 넘겨주었다. 8월 18일에 리벤트로프는 슐렌베르크에게 전보로 “최초의 단계”, 무역협정에 서명하는 단계가 완수되었다고 통지했고 그가 모스크바로 “즉각적인” 여행을 하도록 허용받을 것을 요구했다.





8월 19일에 슐렌베르크는 몰로토프가 다음과 같이 동의했다고 답변했다:










“...라이히 외무장관은 8월 26일 혹은 27일에 모스크바로 올 수 있다.”





“몰로토프는 불가침 협약 초안을 내게 넘겨주었다.” (앞의 책, p.134)










8월 20일에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긴급한 개인적인 전보를 보냈는데 쏘비에트의 불가침협정 초안을 받았고 리벤트로프가 8월 22일에 혹은 늦어도 23일에 모스크바에 갈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청원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8월 21일에 그 방문에 동의하면서 대답했다:










“쏘비에트 정부는, 폰 리벤트로프씨가 8월 23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데 동의한다고, 내가 당신에게 통지하는 것을 지시했다.” (앞의 책, p. 168)










리벤트로프는 8월 23일에 대표단의 영수로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같은 날 밤에 그는 스탈린의 영접을 받았다. 믿을 수 있는 설명에 따르면, 그 만남은 냉랭했고 우호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리벤트로프의 수석 부관인 가우스는 그를 수행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리벤트로프는 우호적인 독일-쏘비에트 관계들에 관한 다소 긴 문구를 서론에 삽입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거부했는데, 지난 6년 동안 나찌 정부에 의해 똥거름 통을 뒤집어 쓴 후에, 쏘비에트 정부가 갑자기 그들의 대중에게 독일-쏘비에트 우호선언을 제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런 까닭에 이 문구는 서론에서 삭제되었다.” (처칠, op. cit. p.306)










그 협정은 서명되었다. 비밀 프로토콜 하에서 발틱에서 “리투아니아의 북구 경계선은 독일과 쏘련 양측의 이익의 영역들의 경계를 의미한다...”는 것이, 그리고 폴란드의 경우에는 “... 독일과 쏘련 양 측의 이익들의 영역들은 대략 나루강, 비스툴라강 그리고 사우강의 선에 의해서 경계지워질 것이다”는 것이 동의되었다.  (독일 외교정책에 관한 문서들, op. cit. p.264)





다른 말로 하면, 쿠르존 선은 이 경계가 되었는데 그리고 10월 혁명 후에 쏘련으로부터 폴란드가 장악했던 그 선의 동쪽 지역에서는 쏘련이 원하는 어떤 행동이라도 취할 수 있다는 것에 독일은 동의하였다.















쏘련은 왜 8월 23일에 협정에 서명했는가










8월 31일에 쏘비에트 최고회의에서 연설하면서, 몰로토프는 “독일-쏘비에트 불가침 협정이 영국-프랑스-쏘비에트 협상들을 혼란시켰다는 허구”를 일소했다:










“쏘비에트-독일의 협정의 체결이 영국과 프랑스와의 상호원조를 위한 협상들을 혼란시켰다는 허구를 퍼뜨리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 실제로는,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 반대가 진실이다. ... 쏘련은 독일과 불가침 협정에 서명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프랑스, 대영제국과의 협상들이 ...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써클들의 책임으로 실패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몰로토프, ≪쏘비에트 평화정책≫, 로렌스 & 위셔트, 런던, p.20)










결정적으로 반쏘비에트 작가인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카조차도, 독일과 불가침협정에 서명하는 쏘련의 결정은 가장 마지못해 하는 것이었고 강요된 차선책이었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쏘비에트-독일의 협상들의 충격적인 특징은 ... 쏘비에트 측에서 수행되었던 극단적의 조심성과, 협상에서 문을 닫는 서구에 대한 장기간의 쏘비에트의 저항이었다.” (E.H.카, ≪뮈니히로부터 모스크바까지: II≫, <쏘비에트 연구에서>, 1권, 1949년 10월, p. 104)










동일한 에드워드 카는 “자본주의의 옹호자”로서 챔벌레인 정부가 독일에 맞선 쏘련과의 동맹을 거부했다는 것을 주목하면서, 독일과의 불가침협정에 서명하는 것의 결과로서 쏘련이 얻은 이득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했다:










“1939년 8월 23일의 협정에서, 그들은[쏘비에트 정부] 다음을 확보했다: (a) 공격으로부터 면제된 숨 쉴 공간; (b) 극동에서 일본의 압력을 완화함에 있어서 독일의 도움; (c) 쏘비에트 국경 너머 동유럽에 존재하는 거점의 수립에 대한 독일의 동의; 이 거점들은 잠재적인 독일의 공격에 대한 방어선이었고 단지 그럴 수만 있었다. 독일의 공격 가능성은 쏘비에트에게는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협정에 의해 획득된 것은 쏘련이 종국적으로 히틀러와 싸우게 된다면, 서유럽의 열강들은 이미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것의 보장이었다.” (앞의 책, p.103)










8월 23일 협정에 서명함에 뒤따르는, 위의 타당하고, 간명하고, 그리고 찬란하게 요약된 쏘련에 대한 이득들 후에, 독일과의 이 불가침협정에 서명함에 있어서 쏘련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포기”를 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여전히 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비열한 생각들을 하게 만들고 발언하게 하는 것이, 무지인지 혹은 악의인지를 말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귀머거리는 없다는 것이다.





비록 적대적이지만, 도치처조차도 히틀러 독일과 8월 23일 협정에 서명함을 통해서 쏘련이 얻은 또 하나의 이득, 즉, 도덕적 이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쏘련]의 도덕적 이득은 독일이 침략자이고 그들 자신의 정부는 끝까지 평화를 추구했다는 것을 그들의 인민들이 명백히 인식함에 있었다.”










우리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인류를 나찌 독일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데에 중요하게 기여했던 쏘비에트 외교 정책의 이 뛰어난 솜씨에 대해 경탄과 감사로써 언제나 되돌아 볼 것이다. 결과들은 바로 쏘련이 예상했던 것이었다. 협정의 서명 일주일 후에 즉, 9월 1일에, 나찌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틀 후에 그들의 최후통첩이 실효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언했다. 그들 모두 쏘련을 질식시키려 계획했었던 제국주의자들은 서로 간에 싸웠던 반면에, 쏘련은 종국적인 전쟁에 대비하여 준비할 수 있는 2년의 귀중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그 전쟁은 1941년 6월 22일 04시 정각에 발생했고, 162개 사단, 3,400대의 탱크 그리고 7,000문의 대포를 가지고 바르바로싸 작전의 형태로 독일의 침략이 히틀러에 의해 시작되었다. 쏘련의 영웅적인 방어, 쏘련이 싸웠던 거대한 전투들, 쏘련의 전설적인 승리들은 민간의 전설이 되었고 여기서 더 이상의 언급을 요하지 않는다.6)





하나의 마지막 지점: 쏘련에 적대적인 써클들은 쏘비에트가 폴란드 동쪽의 쿠르존으로 진격한 것을 폴란드의 나머지에 대한 나찌의 침략과 점령과 동일시한다. 그 두 개는 성질에서 상이하다. 첫째로, 쏘비에트 부대들은 10월 혁명 후에 폴란드에 의해 강탈당하기 전에 그들의 것이었던 영토로만 이동했다. 둘째로,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쏘련은 나찌의 폴란드에 대한 침략 후에 16일 동안이나 기다렸다는 것이다.










“[1939년] 9월 5일에 리벤트로프가 러시아에게 폴란드의 그들의 몫으로 진격해 들어오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을 때, 스탈린은 아직 진격 명령을 발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폴란드를 패배시킴에 있어서 손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았고 ... 폴란드의 붕괴가 완전히 의문의 여지가 없기 전까지 움직이는 것을 거부했다.” (도이처, op,cit, p.432)










폴란드 국가가 붕괴했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명확해졌을 때, 쏘비에트 부대들은 쏘련의 방위와 쏘비에트 부대들이 쇄도한 영토의 인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폴란드에 (9월 17일에) 들어갔다. 진실은 쏘비에트 군대가 지역의 주민들에 의해 해방자로서 영웅들로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1939년 10월 31일에 쏘비에트 최고회의 연설에서 몰로토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부대들은 단지 폴란드 국가가 붕괴하고 실제적으로 존재하기를 멈추었을 때에 폴란드의 영토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 사실들에 대하여 중립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사건들의 결과로서 우리는 우리 국가의 안전에 관한 긴급한 문제들에 직면해야 했다. 더욱이 쏘비에트 정부는 폴란드의 붕괴의 결과로서 그 운명이 포기된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로루시에서의 우리의 형제들에 대해 조성된 예외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몰로토프, op,cit, pp.31-32)










그리고 나아가:










“적군(赤軍)이 이들 지역들로 진격했을 때, 적군은 향신의 멍에, 폴란드의 지주들과 자본가들의 멍에로부터 해방자로서 우리의 부대들을 환영했던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인들에 의해 보편적인 동정심으로써 환영을 받았다.” (앞의 책, p.33)










이들 지역으로 쏘비에트의 진격은 나찌의 점령과 몰살의 공포로부터 백만의 유태인을 포함한 1300만 인민을 구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쿠르존 선의 동쪽의 영토에 대한 쏘비에트의 입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찌에 의해 침략된 다른 지역을 보아야만 했을 것이다! 매우 기묘한 ‘국제주의’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실제로는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우익 편이기도 하다. 보수당 국회의원 로버트 부드비가 1939년 9월 20일에 하원에서 한 연설로부터의 다음의 말로써 이러한 ‘사회주의자들’과 ‘국제주의자들’을 영원히 부끄럽게 하자:










“쏘비에트 정부 측에서의 이러한 행동은 자기보전과 자기방어의 관점으로부터 ... 취해졌다고 가정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러시아 부대들에 의해 취해진 행동은 ... 독일의 국경을 상당히 서쪽으로 밀어부쳤다. ...”





“나는 러시아 부대들이 폴란드-루마니아 국경을 따라 있는 것에 감사한다. 나는 독일 부대보다는 거기에 러시아 부대가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1939년의 독일-쏘비에트 불가침 협정≫이라는 그의 책에서 빌 블란드에 의해 인용됨,  1992년에 스탈린 협회에 제출된 뛰어난 논문).















스탈린이 부르주아 민족주의로 고발당하다










그러나 MF는 다른 모든 문제에서 처럼, 스탈린에 대해 적대적인 반(半)뜨로츠키주의 노선에 의해 자신이 이끌려지는 것을 발견했는데, 스탈린의 계산에 대해 그는 아마도 시도는 했을지라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없었다. 그의 글 19페이지에서 그는 스탈린을 계속하여 후려친다:










“전쟁 동안에 나찌 침략자들에 대한 민족적 감정의 고조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있었는데 그러나 스탈린은 쏘비에트 국가가 기초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들과 양립할 수 있는 지점을 훨씬 더 넘어서 이것을 고무했다. 그는 전쟁의 초기 시절에 러시아 제국의 과거의 정신을 자극했다:”





“우리 위대한 조상들―알렉산더 네프스키, 디미트리 돈스코이, 카주마 미닌, 디미트리 포자르스키, 알렉산더 수보로프 그리고 미하일 쿠트조프―의 대담한 이미지가 이 전쟁에서 여러분에게 영감을 주기를! 위대한 레닌의 승리의 기치가 여러분의 길잡이가 되기를!”










MF가 인용하는 이 구절은 1941년 11월 7일,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있었던 적군의 퍼레이드에서 스탈린의 연설로부터 따온 것이다. 그러한 언급들이 이루어진 맥락은 이것이다: 쏘련은 자신의 물질적 힘과 자신의 대의의 정당함 때문에, 쏘련이 쏘비에트 인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파시스트 억압자들의 멍에 하에 떨어진 유럽의 노예화된 민족들을 위한 해방전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겨야만 했다. 여기에 스탈린 동지가 그의 언급들을 한 맥락이 있다:










“동지들, 적군(赤軍)과 붉은 해군의 병사들, 지휘관들과 정치위원들, 남녀의 게릴라들이여, 전 세계가 여러분을 독일 침략자들의 약탈하는 무리들을 분쇄할 수 있는 세력으로 기대하고 있다. 독일 침략자들의 멍에 하에 떨어진 유럽의 노예화된 민족들은 여러분을 그들의 해방자로서 기대하고 있다. 위대한 해방의 사명이 여러분의 몫으로 떨어져 있다. 이러한 사명의 가치가 있기를! 여러분이 수행하고 있는 전쟁은 해방의 전쟁이다. 정의의 전쟁이다. 우리 위대한 조상들―알렉산더 네프스키, 디미트리 돈스코이, 카주마 미닌, 디미트리 포자르스키, 알렉산더 수보로프 그리고 미하일 쿠트조프―의 대담한 이미지가 이 전쟁에서 여러분에게 영감을 주기를! 위대한 레닌의 승리의 기치가 여러분의 길잡이가 되기를!”










스탈린의 위의 언급들로부터 그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들과 양립할 수 있는 지점을 훨씬 넘어서” 민족적 감정들의 고조를 고무했다고 결론짓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명심해야할 첫 번째 점은―그리고 이것은 MF 유형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잊는 점이다―방어해야할 국가가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었다. 둘째로, 스탈린은 여기에서 정의의 전쟁, 외국의 침략에 맞서 해방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던 쏘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러시아의 애국자들(MF는 그들을 “러시아 제국의 과거의 정신들”이라고 부르며 언급하고 있다)의 이름들이 언급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왜냐하면 이들 “위대한 조상들”은 또한 외부의 침략에 맞서 러시아의 방어를 위하여 그들의 시대에 싸웠었다. 쏘련의 인민의 위대한 애국전쟁의 맥락에서, 그들의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그들의 애국주의를 당시에 보여준 “위대한 조상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완벽하게 합당했다. 알바니아의 노동당과 전체 알바니아 인민은 알바니아의 독립을 위하여 싸운 봉건적 지주인 스칸더벡의 “정신을 자극하기”를 계속한다. MF는 알바니아 노동당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들과 양립할 수 있는 지점을 훨씬 넘어서”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고무했다고 간주하는가? 셋째로, 스탈린 동지는 쏘비에트의 남녀 무장부대들과 게릴라 단위들에게 쏘비에트 인민만이 아니라 “유럽의 노예화된 민족들”의 해방을 위해서도 싸워야 한다는 사명을 주고 있다―매우 이상한 민족주의이다, 이것은! 그리고 넷째로, MF는 스탈린이 그의 연설에서 “러시아 제국의 과거의 정신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그가 또한 위대한 레닌의 정신을 자극했다는 것을 ‘잊고 있다’:










“위대한 레닌의 정신과 그의 승리의 기치는 23년 전에 그것들이 그러했던 것처럼[즉, 1918년의 내전과 간섭전쟁의 시기 동안에] 지금 이 애국전쟁에서 우리를 격려한다.”





“위대한 레닌의 승리의 기치가 여러분의 길잡이가 되기를!”





“레닌의 기치 하에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










레닌 정신의 자극에 대해서는 MF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악마가 성수를 피하는 것처럼 스탈린 동지의 연설의 이 부분을 피한다7). 혹은 MF가 레닌의 정신을 “러시아 제국의 과거”의 정신들의 하나로서 아마도 간주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혹자가 스탈린 동지의 이 연설을 위대한 애국전쟁에 대한 모든 그의 연설들의 맥락에서 읽는다면, 혹자는 하나의 그리고 오직 하나의 결론, 즉, 만약에 스탈린의 연설들이 민족적 감정을 포함하고 있고 호소하고 있다면, 이러한 호소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들과 양립할 수 있는 지점을 훨씬” 넘어서 결코 가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애국주의, 혹자의 사회주의적 조국에 대한 사랑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MF들은 어구들과 공식들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들은 단 한 순간도 그것들의 의미를 숙고하지 않는다. 그들은 제 1차 제국주의 전쟁 동안에 레닌이 조국의 방위라는 슬로건을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스런 배신으로서 탄핵했다는 것을 명백히 들었던 적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레닌이, 그 조국이 사회주의적인지 혹은 제국주의적인지, 피억압자의 조국인지 혹은 억압자의 조국인지와 무관하게 조국의 방위에 대해 언제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라도 반대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의의 전쟁들을 부정의의 전쟁들로부터, 제국주의 상호 간의 전쟁들을 제국주의에 대한 전쟁으로부터 구별할 수 없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조국의 방어를 고무했다고 스탈린을 신경증적으로 탄핵하는 것이 나온다. 어떤 반만 구워진 MF와 같은 ‘맑스주의자들’이 그러하듯이, 모든 환경 속에서 조국의 방어가 죄악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면, 그러면 민족 해방의 전쟁들(예를 들면, 베트남 인민의 투쟁과 같은) 그리고 제국주의의 간섭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방어를 위한 전쟁들(간섭과 침략에 맞선 쏘련의 전쟁과 같은 것)은 사회주의의 배신으로서 탄핵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MF들이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의도적으로 혹은 비의도적으로 도달하는 결론 그것이다―그리고 이러한 결론에 도달함에 있어서 그들은 맑스-레닌주의와 총체적으로, 절대적으로 그리고 회복할 수 없이 절연을 한다.





스탈린 동지의 연설들과 당시의 역사를 읽는 것으로부터, 쏘비에트 인민이 사회주의 조국의 방어와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파시스트 침략자들의 멍에 하에 떨어진 유럽의 노예화된 인민의 방어와 자유를 위하여 파시즘에 맞서 싸운다는 슬로건으로 동원되었다는 것이 완벽히 명백해진다. MF에 의해 겨누어진 민족주의라는 고발은 그리하여 검증의 시련을 견디지 못한다.





쏘련의 “민족주의적 타락”에 관한 그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하여, MF는 20페이지에서 여전히 또 하나의 ‘증거’를 찾아낸다. 이 ‘증거’는 독일에서 대중적 봉기의 어떤 희망도 품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일리야 에렌버그에 대한 MF의 인용인데 왜냐하면:










“대중적 운동을 위하여 당신은 인민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독일에서 가지고 있던 것은 수백만의 프리쯔들과 그레첸들, 탐욕적이고 어리석은 대중들, 일부는 뻔뻔스럽고 다른 사람들은 소심한데 그러나 여전히 생각하거나 혹은 느낄 수 없다.”










이것이 쏘련공산당(볼), 쏘비에트 정부의 정책, 혹은 스탈린의 그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것은 도대체 어떤 관련이 조금도 없다. 에렌버그는 러시아의 유대인 조직에 속했는데 그리고 그는 독일 파시스트들에 의한 유태인 박해에 대해 매우 감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했다. 에렌버그는 쏘련공산당(볼)의 당원이 아니었다.





쏘련공산당(볼)과 스탈린에 관한 한, 독일의 인민은,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는 ... 탐욕적이고 어리석은 대중들”로 간주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반대로, 히틀러 파시스트들의 배후를 붕괴시키고 “압도할” 것이 틀림없는 혁명적 세력으로서 고려되었다. 쏘비에트의 공식적인 선전은 전쟁 동안에 쏘련공산당과 스탈린의 이러한 올바른 입장을 반영하였다. 여기에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역할에 대한 스탈린의 언급들 중에서 하나의 사례―혹자가 언급할 수 있는 많은 사례들 중에서―가 있다:










“유럽의 배후만이 아니라 독일 부대들의 독일의 배후가, 분출하여 히틀러주의 모험주의자들 압도할 준비가 되어 있는 화산을 대표하고 있다.” (1941년 11월 6일에 행한 연설)










위대한 애국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연설들에서 뿐만 아니라 쏘비에트의 선전에서 위의 생각이 다시 또 다시 반복되어 있는 셀 수 없는 사례들이 있다. 철면피한 거짓말쟁이들과 직업적인 중상자들(MF와 같은)을 제외하고 누가 이 모든 것의 견지에서, “모든 독일인들을 야만화된 가학주의자로서 간단히 처리하는”, 쏘비에트의 “선전의 끊임없는 반복이 파시즘에 대한 어떤 실제적 이해도 막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일리야 에렌버그의 죄에 대하여 스탈린을 회초리로 치는 MF의 속임수는 이제 명백하게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즉, 부르주아적 속임수이고 그것에 대한 부정직한 속임수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렇지 않은가, MF씨―틀림없이 CFB라는 반(半)뜨로츠키주의적이고 반(半)수정주의적인 써클들의 그리고 유사하게 ‘맑스주의적’인 조직들의 밖에 있지 않은! 





다음의 ‘증거’가 MF에 의해 생산된다:










“추측하건대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약간의 권위를 입히기 위해, 스탈린은 나찌들이 실제적으로 민족주의자들이 아니었다는 특수한 의견을 표명했다: ‘히틀러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들로 간주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들은 그럴 수 없다. 실제적으로 히틀러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이다.’”










다시 한번, 그 앞에서는 저속한 플리트 거리의 저널리즘의 기준과 실천조차 매우 품위있게 보이는 새로운 깊이를 추량하면서, MF는 위의 스탈린의 언급을 그 맥락으로부터 찢어버린다. 히틀러주의자 파시스트들은 모든 나라를 침략하고 있고 민족들을 강도, 살인, 약탈, 강탈 그리고 학살에 종속시키고 있다―모든 것은 독일 제국주의의 이익에 따라, ‘위대한 독일 제국’을 창출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반동적이고 백인조적인, 제국주의적인 본질을 독일과 다른 민족들에게 감추기 위해서, 파시스트들은 그들 스스로를 ‘민족적 사회주의자들(National Socialists)’이라고 부름에 의해 그들의 가증스런 범죄들―외국의 민족들과 국내의 독일 인민의 진압―을 계속하여 범하고 있다. 스탈린은 그의 연설에서 이들 파시스트들의 사회주의자들 혹은 민족주의자들이라는 주장들을 반박했다. 그가 말하기를 파시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들은 독일과 다른 나라들의 노동계급의 가장 사악한 적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민족주의자들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들은 독일을 방어하는 데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독일 제국주의의 이익에 따라 다른 민족들을 진압하는 데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하기를 히틀러주의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정당한 이름, 즉, 제국주의자들이라고 불려야만 한다. 그로부터 MF가 위의 언급들을 찢어버린, 스탈린 동지의 연설 전체로부터 인용할 것을 공간이 허용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음의 중요한 문단들은 그것의 적당하고 합당한 맥락을 복구하는데 충분할 것이다:










“‘민족적 사회주의자들’은 누구인가?”





“우리 나라에서 독일의 침략자들 즉, 히틀러주의자들은 대개 파시스트들이라고 불린다. 아마도 히틀러주의자들은 이것을 틀렸다고 보고 완고하게 스스로를 ‘민족적 사회주의자들’이라고 계속하여 부른다. 그리하여 독일인들은 우리가 히틀러주의 당, 독일 침략자들의 당, 유럽을 약탈하고 있고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비열한 공격을 조직하고 있는 그 당이 사회주의 당으로 확신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가능한가? 사회주의와 유럽의 민족들을 약탈하고 억압하고 있는 짐승 같은 히틀러주의 침략자들 사이에 공통된 것이 무엇인가?”





“히틀러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로 간주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들은 그럴 수 없다. 실제적으로, 히틀러주의자들은 지금은 민족주의자들이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이다. 히틀러주의자들이 독일의 땅을 통일하고 라인 지구, 오스트리아 등을 재통합하는 데에 종사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들을 민족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근거가 있는 것으로서 가능했다. 그러나 그들이 외국의 영토들을 장악하고 유럽의 민족들을 노예화하고―체코인들, 슬로바키아인들, 폴란드인들, 노르웨이인들, 덴마크인들, 네덜란드인들, 벨기에인들, 프랑스인들, 세르비아인들, 그리스인들, 우크라이나인들, 벨로루시인들, 발틱 나라들의 주민들 등―그리고 세계 지배를 위해 뻗어가기 시작한 후에, 히틀러주의 당은 민족주의 당이기를 멈추었는데, 왜냐하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제국주의 당, 합병과 억압의 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주의 당은 제국주의자들의 당이고 세계의 모든 제국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약탈적이고 강탈적인 제국주의자들이다.”





“히틀러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로서 간주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들은 그럴 수 없다. 실제적으로 히틀러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공공연한 적들, 악명높은 반동들, 그리고 노동계급과 유럽의 민족들에게서 가장 초보적인 민주적 자유들을 강탈한 흑백인조들이다.”





“... 사실상 히틀러 정권은 짜르 하의 러시아에서 존재했던 그 반동적인 정권의 복사물이다. 히틀러주의자들이 짜르 정권 처럼, 노동자들의 권리들, 지식인들의 권리들 그리고 민족들의 권리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짜르 정권이 조직했던 것처럼8) 중세적인 유태인 학살을 조직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히틀러주의 당은 민주적 자유들의 적들의 당이고, 중세적 반동과 흑백인조적인 학살들의 당이다.”










그러면 위의 맥락에서 스탈린이 파시스트들에게서 ‘민족적 사회주의자들’이라는 칭호를 부정한 것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아마도 MF는 ‘민족적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불릴 야수적인 히틀러주의자들의 권리를 논박하기를 원하지 않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MF는 스탈린 동지에게 던지는 비난의 연막 하에서 그 권리를 단지 교활하게, 알아차릴 수 없게 그리고 암묵적으로 인정하기 보다는 공공연하게 파시스트들의 이러한 권리를 선언할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이것이 MF의 입장이라면―그리고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면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아야만 한다: MF씨 당신은 누구의 편인가? 당신은 파시즘과 어두운 반동의 세력들의 편인가 아니면 당신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민족적 해방의 세력들의 편인가?





위에서 진술된 것의 견지에서, 한 조각의 의심도 없이, 고려 중인 시기 동안에 쏘련의 ‘민족주의적 타락’에 관한 MF의 주장이 총체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노사과연>











1) 역자주 : 여기서 가능성은 possibility를 의미하고 현실성은 actuality를 말하고 잠재성은 probability를 말한다. possibility가 있더라도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probability가 되는 것인데 즉, possibilty는 추상적 가능성을 의미하고 probability는 현실적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2) 리그(league) : 영ㆍ미의 거리의 단위. 약 3 마일.





3) 코민테른 6차 대회(1928년 7월 17일-9월 1일)에서, 부하린은 국제 정세에 대한 그의 테제들을 배부했다. 이 테제들은 일반적 규율과 달리 쏘련공산당(볼)의 대표에 의해 검토되지 못했다. 이 경우에 이들 테제들은 많은 지점들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입증되었고 쏘련공산당(볼)의 대표는 그것들에 대한 20개의 수정안을 도입해야만 했다.





4) 이 모음집의 다른 곳에서 발행된, ≪혁명적 레닌주의에 대한 반혁명적 뜨로츠키주의의 투쟁에 관하여≫ 시리즈를 보라.





5) 스탈린에 대해 그들이 엉터리 같은 비난을 할 때에, MF와 그가 속한 조직, RCI는 스스로 영국에서 지도적인 마오주의자들이라고 자랑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무지는 마오쩌둥 동지의 글들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필적한다. 1939년 9월 28일자, 즉, 쏘비에트-독일 불가침 협정의 서명 한 달 후에 쓴 마오쩌뚱의 글 <쏘련과 전인류의 이익들의 일치>를 읽는 수고를 그들이 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완전히 그릇된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마오쩌뚱 선집≫ 2권, pp.275-83에서 찾을 수 있는 이 탁월한 글을, 읽어 볼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는 동시에, 우리는 여기에서 그것으로부터 중요한 단락들을 재현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쏘련이 세계전쟁의 발발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세계가 평화롭게 남아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현재의 전쟁은, 영국 및 프랑스와의 상호 원조조약 대신에, 독일과 불가침 협정을 쏘련이 체결함에 의해 촉진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견해가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기에 걸쳐 쏘련의 대외 정책은 평화의 정책이었고, 그 자신의 이익들과 압도적인 인류의 다수의 이익들 사이의 긴밀한 연계에 토대를 둔 정책이었다. 그 자신의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하여, 쏘련은 언제나 평화를 필요로 하였고 세계적 규모에서 평화를 위하여 다른 나라들과 자신과의 평화적인 관계를 강화하고 반쏘비에트 전쟁을 막을 필요가 있었고 파시스트 나라들의 침략을 제어하고, 소위 민주적인 나라들의 전쟁광들을 억제하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발발을 지연할 필요가 있었다. 쏘련은 오랫동안 세계평화의 대의를 위하여 커다란 정력을 쏟아왔다. 예를 들면, 쏘련은 국제연맹에 합류했고, 프랑스 및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상호원조 조약에 서명했고 평화를 원하는 것으로 보이는 영국과 모든 다른 나라들과 안전보장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연합하여 스페인을 침략한 후에 그리고 영국, 미국 그리고 프랑스가 명목적인 ‘불개입’의 정책,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들의 침략에 대한 묵인의 정책을 채택했을 때, 쏘련은 ‘불개입’ 정책에 반대했고 스페인공화국의 군대에게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한 그들의 저항에서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후에 그리고 동일한 세 개의 열강들이 동일한 ‘불개입’ 정책을 채택했을 때, 쏘련은 중국과 불가침협정을 체결했을 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중국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히틀러의 침략을 묵인하고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켰을 때, 쏘련은 뮈니히 정책의 뒤에 있는 사악한 목표들을 폭로하는 데에 있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폴란드가 이 해의 봄과 여름에 화급한 문제가 되고 세계전쟁이 발발할 것인지 일촉즉발의 상황에 있을 때, 쏘련은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한 상호원조의 조약의 체결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챔벌레인과 달라디에르의 성실함의 완전한 결여에도 불구하고 4개월 동안 영국과 프랑스와 협상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제국주의적 정책, 전쟁을 묵인하고, 부추기고 그리고 확산시키는 정책에 의해 가로막혔고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세계평화의 대의는 망쳐지게 되었고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발발했다. 영국,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정부들은 전쟁을 막기 위한 진정한 의도가 없었고 반대로 그들은 전쟁이 발생하는 것을 도왔다. 쏘련과 관계를 트고 평등과 호혜에 기초한 상호원조의 실제적인 효과적인 협정을 체결할 것에 대한 그들의 거부는 그들이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원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모든 사람들은 동시대의 세계에서 쏘련에 대한 거부는 평화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 전형적인 영국 부르주아지의 대표인 로이드 조지조차 이것을 알고 있다. 쏘비에트-독일의 불가침 협정이 체결된 것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였고 독일이 자신의 반쏘비에트 활동들을 중지하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반대하는 협정을 포기하고 쏘비에트 국경의 불가침성을 인정하는 데에 동의했을 때였다. 영국,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계획은 독일을 부추겨서 쏘련을 공격하게 하고, 그리하여 그들 자신은 ‘산 정상에 앉아서 호랑이 싸움을 지켜보고’ 쏘련과 독일이 서로를 지치게 한 후에 내려와서 접수하는 것이었다. 쏘비에트-독일의 불가침조약은 이 구상을 분쇄한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과 전쟁을 묵인하고 부추기고 세계전쟁을 재촉하는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계획들을 간과하고서는, 우리의 순진한 친구들은 이러한 계획을 세운 자들에 의한 달콤한 선전에 속아왔다. 이들 교활한 정치인들은 스펜인에 대한, 중국에 대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침략을 억제하는 데에 최소한도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침략을 묵인했고 전쟁을 부추겼고, 서로를 공격하고 서로 간에 침묵하고 그리고 나서는 서로를 이용하는 어부들의 속담에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들을 ‘불개입’이라고 완곡하게 묘사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한 것은 ‘산 정상에 앉아서 호랑이 싸움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전세계를 통들어 매우 많은 사람들은 챔벌레인과 그들의 파트너들의 꿀 같은 말에 바보가 되어서, 그들의 미소 뒤의 살인적인 의도를 보지 못하고 혹은 쏘비에트-독일의 불가침 조약이 단지 쳄벌레인과 달라디에르가 쏘련을 거부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키려고 결심한 후에 체결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쏘련이 마지막 순간까지 세계평화를 보전하기 위해서 매우 노력했다는 사실은 쏘련의 이익들이 인류의 압도적인 다수의 이익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6) 반공산주의적인 신임장과 친제국주의적인 동정심이 완벽하고 그리고 따라서 스탈린 혹은 그가 이끌었던 쏘련에 대해 어떤 부드러운 점이 있다고 비난받을 수 없는 오스트리아의 토피치 교수는 고려 중인 쟁점에 대해 이것을 말해야 했다:












“ ... 주요 사건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나로 하여금 ... 스탈린이 유일한 실제적 승리자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는, 그가 물론, 당시에 그의 대상에 대한 명확하고, 광범한 토대의 사고를 가진 유일한 정치가였다는 확신에 도달하게 했다.” (어니스트 토피치, ≪스탈린의 전쟁≫, 런던, 제 4 계급, 1987, p.4)





나아가: “1939년 여름의 사건들은 정치가다운 자질과 세계를 지향하는 정치적 전망에 대한 히틀러의 결여의 치명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그가 그의 러시아의 맞수(스탈린―편집자)에 비해 매우 열등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정치적 지혜, 그리고 정치적 스타일에 관해 보면, 그들의 관계는 체스 고수와 일개 도박꾼의 관계와 같고, 모스크바가 처놓은 덫으로 총통이 학교 학생처럼 떨어졌다는 주장은 거의 과장된 것으로 불릴 수 없다. 그 악마같은 그루지아인(스탈린―역자)은 서구 열강들의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히틀러를 속여넘기기 위해 요구되었던 교활함을, 쏘비에트 공산당의 내부적 투쟁들에서보다 백배나 더, 적용할 필요가 명백히 있었다.” (앞의 책, p.7)












히틀러-스탈린 협정에 대해 동일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조약의 체결 후에 히틀러와 리벤트로프는 스스로를 최고의 수완을 가진 정치가들로 간주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신에 그들의 행동들은 정치적 재능의 놀라울 정도의 결여를 드러내었다. 스탈린은 협정들의 내용과 어구들에 대해 철저히 숙고했던 반면에 그의 반대편의 성원들은 독일에 대하여 그 치명적인 문서들로부터 나오는 결과들을 주의깊게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이 명백히 없었다. 사실상, 두 조약들은 독일을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에 연루시키고, 정세를 러시아에 의존하게 만들고 그리고 만약에 기회가 생긴다면 독립적 힘으로써 상황을 종료시킨다는 쏘비에트의 장기전략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멀리 내다보면서, 스탈린은 이러한 계획의 실현을 위한 호의적인 출발점을 얻는 것에 대해 이 초기의 단계에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p.4)












쏘련이 전쟁에 대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방심한 틈에 당했다는 뜨로츠키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써클들에서 꽤 널리 퍼진 전설을 마주하면서, 그리고 쏘비에트의 우월감에 대해 언급하면서, 토피치는 말한다: “... 그것은 결코 완전히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며 그것은 어느 정도는 적군(赤軍)의 실제적 힘과 군수산업의 효율성으로부터 끌어내어진다. 이 두가지의 실제적 가능성은 최초의 달들의 중대한 손실로부터 특별한 속도로 회복하고 그리고 나서는 계속 증가하는 다수의 사람과 자원을 적에게 퍼부을 수 있었다는 것을 러시아 사람들이 보여준 것에서 입증되었다. 당시에 중요한 산업지역과 원료 생산 지역들이 상실되었고,  수많은 군수 공장들이 우랄까지 그리고 우랄 너머로 이전되어, 대체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성취들은 더욱 더 놀라운 것이다. ...”





“수적인 이러한 우세는 단지 대략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는데, 그러나 많은 지역들에서 공격자들의 힘과 전쟁의 첫 해에 러시아의 손실을 비교함에 의해 보여지는 바와 같이 그것은 매우 명백했다. 그 작전 초기에 독일의 군대는 동쪽에서 3,050,000명의 병사, 7,184문의 대포, 3,580대의 탱크 그리고 2,740대의 항공기 이상을 갖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 7월 중순까지 비알리스토크-민스크 그리고 스몰렌스크에 대한 포위 작전과 관련된 독일의 수치에 따르면, 적어도 642,000명의 포로가 잡혔고 4,929문의 대포 그리고 6,537대의 탱크가 포획되거나 파괴되었다. 이러한 수치는 부정확하거나 과장되기 쉽지만, 그것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쏘비에트 쪽에서의 증거들의 견지에서 믿을 만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쏘비에트 정보국은 전쟁 첫해에 다음과 같은 손실을 말하고 있다: 4,500,000명의 사람이 죽거나 부상당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22,000문의 중포, 15,000대의 탱크 그리고 9,000대의 항공기의 손실이 있었다. 이것은 또한 영국의 군사전문가 존 에릭슨의 판단이기도 하다: ‘쏘비에트 쪽에서의 자료에 근거한 스탈린의 수치들을 적용해보면, 쏘비에트의 우월성은 탱크에서 적어도 7대1이었고, 항공기에서 독일의 것은 그 비율에서 4혹은 5대 1정도로 열등했다.’”





“항공기와 탱크들의 많은 수는 비록 구식이었지만, 전쟁의 발발 시에 이용할 수 있는 상당한 수의 새로운 유형의 것이 있었다. 1941년 한 해만 최초의 여섯 달 동안에 2,653대의 폭격기와 전투기가 현대적 디자인으로 만들어졌고 6월 중순까지 군대는 KW와 T34 유형의 1,861대의 탱크들을 받았다. 전설적인 T34는 독일의 상응하는 것에 비해 명백히 우월했고, 그것의 적수들의 당시의 반(反)탱크 무기들에 거의 견딜 수 있었다. 1939년부터 1941년 6월 22일까지 7,000대 이상의 장갑차가 인도되었고 그리고 1941년에 약 5,500대의 모든 유형의 탱크들이 인도되었다. 동력화 단위들-계획단계의 그것들 뿐만 아니라 이미 작전 중인 그것들을 포함하여-을 장비하기 위하여 16,600대의 새로운 유형의 탱크들이 이용가능했고 약 32,000대가 계획되었다-거대한 숫자였다. 탱크들의 이러한 눈사태가 단지 방어목적을 위해 의도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있을 법하지 않다. 새로운 쏘비에트 디자인의 것들과 어떤 식으로든 비교할 수 있는 독일의 탱크의 유일한 유형은 판저 IV였는데 그것들 중에서 단지 618대 만이 동부의 전쟁에서 초기에 작전가능했고 다른 경우에서는 동력화된 것은 주요하게 캄프왜건 II와 III(장갑 자동차들)이었다.”





“1941년 초에는 월생산이 단지 250대의 탱크들과 중야전포에 머물렀다.”





“쏘비에트의 대포에서 우월성은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기록 문서들은 1939년 1월 1일부터 1941년 6월 22일까지 적군이 합계 29,637문의 야전포와 52,407문의 참호박격포들 받았고 탱크의 포들과 합쳐서 대포와 박격포가 총 92,578문에 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들 중에서 로켓 발사기들(스탈린의 오르간)은 공격자들에게는 특히 불쾌한 놀라움이었다.”





“이것들과 다른 수치들은 조국의 군사적 및 산업적 힘에 대한 쏘비에트의 믿음은 단순한 ‘신기루’이상의 훨씬 더한 것임을 충분히 보여준다. 이 시기의 쏘련은 미래의 초강대국의 핵을 이미 포함하고 있었다.” (pp.73-74)












토피치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군사적 힘뿐만 아니라 다른 가정들에서 독일에 대한 과대평가와 쏘비에트에 대한 과소평가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 가정들은 독일군이 쏘비에트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이 동쪽으로 국경을 넘었을 때, 그들―총통으로부터 보통의 병사에게까지―에게는 그들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고 그 뒤에는 스탈린이 그들을 위해 준비된 사악한 놀라운 일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리고 종국에는 파멸이 끝없는 소모 속에서 잠복해 있다는 느낌을 종종 가졌다.” (앞의 책, p.103)












쏘련에 대한 그들의 기습공격의 전술적 잇점을 통해 얻어진 그들의 최초의 성공들 후에, 나찌들은 승리가 이미 그들의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고 미래에 대한 환상적인 계획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쏘련이 ‘진흙발을 가진 거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거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제국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많은 수의 사람과 자원을 침략자에게 퍼부었고 그리고 곧 증대하는 수의 새로운 유형의 탱크와 무서운 로켓 발사기가 전장에 나타났다. 14일의 승리는 양측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싸우는 적어도 4년간 계속되는 전쟁으로 발전했고, 그리고 최초의 주(週)들의 극적인 승리는 제 3공화국의 종말의 시작이었음이 입증되었다.” (p.115)












토피치는 일본과 1941년 4월의 중립 조약에 대해 또한 언급하고 있다.





그것에 서명함에 의해, 쏘련은 독일과 1939년 8월의 불가침 협정을 통해 서쪽에서 얻었던 것을 동쪽에서 성공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토피치 교수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해 말하게 하자:












“이 협정의 조문들은―하나의 가능한 번역에 따르면―쏘비에트가 독일을 공격할 경우에, 일본이 의무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며,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태평양에서 일본이 행동할 경우에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것인데,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스탈린은 독일과 충돌 전에 배후를 안전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아마도 그는 다른 더 중요한 목표들을 추구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기민한 움직임은 소망한 결과를 곧 가져왔다. 협정에 서명한 직후에 그리고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고무되어, 일본 육군과 해군은 남쪽으로 그들의 팽창을 강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나라의 전략적 위치와 원료자원의 공급을 개선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한 이 방향에서 중국에 대한 압력을 넣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행동이 영국과 미국과의 충돌을 결과할지라도 그들은 그 결과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고리 가펜쿠가 특별한 명료함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스탈린의 계획들은 더욱 멀리 나아갔다: 남쪽으로의 일본의 침투는 동시베리아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고 도쿄에 의해 행해지는 목조르기에서 숨쉬기가 힘들었던 중국을 안도시킬 것이고 그리고 일본을 미국과의 전쟁에 연루되게 할 것이었다. 결국에는, 이것은 일본에 대해 재앙을 의미할 것이고 그러나 그것은 또한 영국제국의 허약함을 폭로할 것이고 중앙아시아에서 광범한 인민 대중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강화하고 나아가 자유를 위한 아시아의 투쟁을 강화할 것이었다.”





“히틀러와의 협정이 서쪽에서 ‘제국주의 전쟁’의 속박을 풀었듯이, 일본과의 중립협정은 아시아에서 동일한 목적에 봉사할 것이었다. 크레믈린은 영국, 미국 그리고 일본 사이의 치열한 투쟁들이 아시아에서 인민 대중들을 화나게 하고 일으켜 세우고 그리고 그리하여 쏘비에트 지도 하에 혁명을 위해 준비하게 되기를 희망했다.”





“그리하여 중립협정은 침략적인 자본주의 열강들의 팽창주의적 정책들을 쏘련으로부터 돌려서 ‘비침략적인’ 열강들로 향하게 교란하는 스탈린의 포괄적인 전략의 구성적 부분을 형성했다. ... 히틀러가 동쪽에서 매달리지 않게 하는 것에 동의함에 의해 서구의 민주주의들과의 일정 종류의 대리 전쟁에 말려들게 하는데 이미 성공했고 이제는 일본을 부추겨서 영국과 미국과의 대결로 말려들게 하기 위해서 일본에게 유사한 보호를 제공하는 것을 의도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다시 한번 중립협정을 사용함에 의해 또 하나의 잠재적인 공격자가 쏘비에트의 이익들의 도구로 되었고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항하여 이용되었다. ...” (pp.95-96)





“쏘련과의 새로운 협정이 어느 정도로 토교를 고무하여 그것의 결정을 하게 하였는지는 논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일본은 이 방향에서 위협이 전혀 없었는데 특히 쏘비에트 부대들이 독일과의 갈등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이든지―스탈린이 중립 협정으로 의도했던 바와 같이―일본은 서구 열강들과의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p.124)












토피치는 계속한다.












“진주만은 스탈린에게는 특히 커다란 승리였다. 마침내 쏘비에트는 두 개의 전선에서의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대신에 영국과 미국이 이제는 하나의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p.125)





“스탈린의 계획에 따라, 일본―쏘련에게는 긴장과 고통의 계속적인 원천―이 영국과 미국에 맞서는 것으로 전환되었고 빠져들게 되었다. 이 목표는 1941년 4월 13일의 중립 협정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이 협정은 쏘련이 독일과의 전쟁을 위해 필요로 했고, 동쪽에서 모스크바가 방패를 확보하게 했고, 동시에 일본에 유사한 보증을 주어서 그 나라로 하여금 자유롭게 영국과 미국과의 무장충돌을 하게 했다. 일본에 대한 루즈벨트의 거친 정책은 크레믈린의 의도와 전적으로 부합했고 결과적으로 진주만 공격을 초래했다-이것은 극동에서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을 의미했고 레닌에 의해 고안되고 스탈린에 의해 발전된 교묘한 개념이 대부분 실현되었다는 증거를 제공했다.” (p.135)












우익이고 발끝까지 반공주의적인 토피치는 쏘련의 레닌주의적인 외교의 성공에 올바르게 분개하고 있고 다음의 말로써 비통하게 불평한다:












“이런 방식으로 쏘련은 순수히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서구 열강들에 중대한 패배를 안겨줄 수 있었다. 적군(赤軍)은 영국 혹은 미국의 군대에 대해 무기를 빼들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독일과 일본에 의해 그들에게 행해졌다. 영국과 미국은 물론 쏘련으로 풍부한 물자들을 배로 실어날랐다―동쪽에서 독일의 승리를 막기 위해 필요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히틀러에 맞선 전쟁과 스탈린의 심리ㆍ전략적인 술수―정당하지 않은 파시스트의 공격의 신화와 제 2전선에 대한 계속적인 요구들―에 의해 야기된 감정들의 영향 하에서, 위대한 민주주의의 정치가들도 대중들도, 직접적으로 군사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적이 반드시 가장 위험스러운 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스탈린이 거장다운 방식으로 발전시켰던, 간접적이고 은밀하고 그리고 극적이지 않은 전진의 기술들을 통하여 그 교활한 그루지아인(스탈린-역자)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서구 열강들의 약점은 힘의 수단들의 결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재능의 부족에 있다.”












오직 뜨로츠키주의 반혁명분자들과 약간의 ‘반수정주의’ 얼뜨기들만이 독일과의 불가침협정 그리고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타당한 역사적 맥락에서 보는 것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다. 





7)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약간의 떨림이 있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종교적 정신을 자극한다는 고발들이 그렇게 하는 것의 있을 수 있는 결과인 듯했기 때문이다.





8) 틀림없이 MF는 스탈린 동지의 이 문장을 “전쟁의 초기 시절에 러시아 제국의 과거의 정신들”에 대한 또 하나의 자극으로서 간주하는 일정한 방식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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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3 기획번역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21) 하르팔 브라르 2011-07-21 2178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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