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세
현장
이론
기타
 
지난호보기
월간지/단행물
구독신청
세미나신청
토요노동대학신청
1
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 (2)
글쓴이 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E-mail send mail 번호 233
날짜 2011-07-15 조회수 2802 추천수 127
파일  1310735640_i.hwp

  













기획번역
















번역 : 이병진(양심수)















[2] 역사적 배경















Ⅰ. 외국 지배 이전의 인도










역사적 유물론을 만든 사람들이 인도나 아시아의 나라들에 무지하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유물론은 인도나 현재 인도의 문제들에 관해서 적실성(relevant)이 없다는 논전이 벌어졌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예를 들면, 맑스와 엥겔스는 그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부르주아지 민주혁명과 그 혁명의 일부분이었던 노동계급 운동을 기본관점으로 전 세계를 바라보면서 사회변혁을 위해 노력했던 학자적인 혁명가들이다. 혁명적 활동의 일환으로 그들은 당대의 유럽학자들이 연구한 자료들에 기초해서 세계 자본주의 발전을 배경으로 인도의 발전을 분석하였다. 오히려 비맑스주의자들이 맑스와 엥겔스의 연구 결과를 인정하였다. 맑스와 엥겔스의 글을 읽어 본 사람은 그들의 저작들을 통해서 인도에서 일어나는 사회 변혁을 깊이 이해 할 수 있고 다른 역사 연구자들이 결코 밝혀내지 못했던 인도 역사 발전의 본질을 인식하게끔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많은 기사를 기고하였다. 1850년대에 쓰여진 이 기고문들은 인도에서 영국 지배의 역사를 비판한 중요한 글이다. 이 기사들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국인들이 “세포이 반란”(Sepoy Mutiny)이라 부르는 독립투쟁이 시작되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 투쟁이 진행되자, 사건이 발전되는 하루하루의 상황을 관찰하여 몇 편의 글을 썼다. 이 글의 대부분은 맑스가 썼지만 맑스와 엥겔스는 인도의 발전에 대한 생각들을 지속적으로 교환하였기 때문에 글들에는 두 사람의 사상이 함께 담겨있다. 인도에 관한 기고문들은 ≪인도에서 최초의 독립전쟁에 관하여, 1857-1859≫의 이름으로 모스끄바의 외국어출판사(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에서 출판되었다. 이 기고문들을 읽지 않는다면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적실성 있는 인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도에 관해서 무지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고문의 글들에는 당대 최고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에서 자본주의 발전과 관련된 세계 자본주의 본질과 발전 그리고 그것의 미래를 결정하는 요인들에 관한 맑스의 관점이 녹아 있다. 특히 ≪자본론≫을 포함한 그의 글들에는 영국의 지배자들이 수집한 통계자료, 보고서, 영국의회 자료들, 신문기사들을 통해서 드러난 자본주의의 진짜 특징을 보여준다. 영국의 통치자들이 수집한 사실들과 그 사실들에 기초한 의견들을 가지고 맑스는 지배 세력과 반대의 관점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사례로써 인도에 접근하였다.





그렇지만 맑스의 인도 분석이 완벽하거나 오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맑스가 인도에 관해서 쓴 글들의 한계를 지난 몇 십 년 동안 인도와 외국의 연구자들이 밝혔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인도의 과거와 영국지배자들에 의한 인도의 변화와 그 변화의 결과에 의한 인도의 미래를 분석하였다. 비록 그의 분석이 세세한 부분까지 일치하지는 못했지만 놀랄 만큼 정확했다. 특히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도 노동자 계급의 전망이 탁월하다. 선진 자본주의의 모든 국가들에서 목격되듯이, 인도에서도 구래의 전(前)자본가 세력과 새로운 자본가 세력 사이에 충돌이 진행되고 있었다. 맑스의 접근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된 부르주아지들에 대항해서 성장하는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를 촉진하였고 낡은 것들과 싸울 수 있는 새로운 발판을 제공하였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가 행한 가장 혁명적인 부분.”을 언명한 .≪공산당 선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다른 계급들은 부후하며 마침내 현대산업의 국면에서 사라진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특별하고 본질적인 생산물이다.”





인도에는 맑스와 엥겔스가 정치적 활동을 하였던 유럽과 구별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낡은 것과 새 것과의 투쟁이 인도에서는 토착민들(natives)과 외국지배자들(foreign rulers)사이의 투쟁으로 형상화 되었다. 인도에서는 토착봉건 왕들과 오래된 사회제도가 낡은 것을 대표하였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힘이 외국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낡은 것과 새 것의 대립은 토착민 자신들이었다.





맑스는 인도에서 낡은 사회제도를 붕괴시키는 데에 한에서 외국의 지배자들을 인정(sympathetic)한다. 그러나 낡은 것이 외국지배의 억압과 착취로 대체되면서 맑스는 외국지배의 고통과 그에 맞서는 혁명을 이야기한다. 두 번째는 그 당시에 인도에는 아직 노동자계급이 나타나지 않은 점이다. 그 당시의 모든 유럽국가들에는 비록 그 힘은 작았지만, 이미 노동자 계급이 등장하고 있었다. 유럽의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들이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과정에서 부르지아지 옆에 서서 조직화된 힘을 만들었다. 낡은 것과 새 것과의 투쟁에서 새로운(노동)계급이, 지배계급의 “무덤을 파는”(dig the grave) 계급, 등장했다. 인도는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봉건제를 붕괴시켜 자본주의적 관계를 설립하여 인도를 지배하려는 외국지배자들과 낡은 사회제도를 보존하려고 싸우는 반동적인 봉건세력들 사이의 투쟁이었다. 맑스는 이 두 세력에 대해서 언급했다. 1853년 6월 10일 기사에서 맑스는 말한다. “나는 힌두스탄의 황금기를 믿는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 그러함에도 힌두스탄이 영국에 의해, 과거의 모든 힌두스탄 왕국들에서 겪었던 고통을 훨씬 능가하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무제한적인 비참한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미주1)





맑스는 같은 기사에서 인도와 이탈리아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이탈리아가 시시때때로 정복자의 칼에 의해서 다른 민족 집단들(different national masses)로 나뉘어졌듯이, 우리는 마호메트, 무굴, 영국의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도시와 마을들 수 만큼 독립적이고 갈등하는 소국들로 분해된 힌두스탄을 발견한다.” 미주2)





맑스는 민족주의자들이 “수세기의 역사를 지닌” 것이라며 자랑하는 인도 사회상을 주목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을 경멸했다. 그는 그것의 파괴에 눈물짓지 않았다. 맑스는 말한다.










우리는 시골스런 마을 공동체들이 해롭지 않게 보여도, 동양의 전체주의의 견고한 기초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을 공동체는 미신을 도구로 저항하지 못하게, 전통규범으로 노예화시키고, 모든 웅장함과 역사적 동력들을 제거하여, 인간을 가능한 작게 만들어 족쇄를 채웠다. 우리는 가련하게 땅 한 조각에 집착하고, 제국들을 조용히 붕괴시켰고, 말할 수 없는 잔인함으로 대도시의 민중들을 살육하였고, 그들을 자연재해의 희생물로 바치고, 이런 모든 것을 황송하게 하사하시는 침략자의 희망 없는 전리품인 원시적 자기 중심주의(barbarian egotism)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천박하고 후진적이고 흐리멍텅한 생활, 이렇게 드러난 수동적인 것의 이면에 모순에 찬 야만성, 목적없고 무제한적인 파괴의 힘과 살인이 힌두스탄의 종교의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작은 공동체들이 카스트와 노예에 의해 오염되었고, 인간을 환경의 주인이 아니라 외부적 환경에 종속시키고, 자기 발전의 변혁을 가로 막고,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어 자연을 숭배하게 하여 왕, 원숭이, 시바, 소 앞에 무릎 끓게 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주3)










쇠퇴하고 낙후된 인도 사회를 붕괴시킨 영국에 대해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국은 인도사회 전체의 틀을 붕괴시켰으며 이를 재건설하려는 어떠한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인도는 그들의 고대 문명을 잃었고 새로운 것을 얻지도 못했다. 영국은 현재 불쌍한 힌두들에게 특별한 우울함을 주었다. 영국이 과거의 전통과 역사로부터 분리된 힌두스탄을 지배하였다.” 미주4)





인도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맑스는 아래와 같이 썼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인민대중을 해방시켜 줄 수도 없고 물질적으로 그들의 사회조건을 개선시키지도 못 할 것이다 … 인도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들은 그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새 사회의 열매를 따 먹지도 못할 것이다. 또는 힌두인 자신들이 영국이 씌운 멍에를 벗어 던질 만큼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그 열매를 얻지 못할 것이다. 미주5)










정리하면, 맑스는 영국의 인도지배가 몇 세기 동안 사회진보를 가로 막았던 인도의 사회체제의 뿌리를 끊어내는 “역사적 도구(instrument of history)”로 기능한다는 역사적 진실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영국의 비인간적인 침략과 강도짓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았다. 맑스는 이야기한다.










본국 안에서는 존경스러운 형상의 부르주아 문명이 식민지에서 그들의 형체가 발가벗겨지면서 그들의 위선적이고 본래적으로 타고난 야만성이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재산의 수호자들이다. 그러나 벵갈, 마드라스, 봄베이에서 일어나는 농업혁명을 보호할 수 있을까? 그들은 탐욕이 없다고 하면서 인도에 큰 도둑놈인 클라이브(Clive) 경을 보내놓고 흉폭한 약탈을 그만둘까? 유럽에서 신성한 국가부채에 관해서 재잘거리는데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 투자한 자금의 배당금을 포기할까? 신성한 종교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프랑스 혁명과 전투를 벌이면서 동시에 인도에서의 개신교의 선교를 허용할 수 있나? 돈을 벌기 위해서 오리사와 벵갈의 사원에서 순례자들을 내쫒지 않고 크리쉬나(Juggernaut) 사원 안에서의 매춘과 살인을 동반하는 고역을 그만둘 수 있는가? 미주6)










맑스와 엥겔스는 영국지배 세력과 인도 봉건세력이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는 본질을 폭로함으로써 인도에서 민주역량의 성장을 위한 새로운 혁명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우리는 16세기부터 서서히 인도를 지배한 유럽인보다 더 오래된 고대문명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인도문명이, 사회적 삶이, 경제적 기초가 유럽의 무역 상인들에 의해서 총체적으로 붕괴되었다. 외국 무역 상인들이 이런 힘을 사용하게끔 민족주의자들이 길잡이가 되었다. 그리고 외국의 무역상들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외국의 지배자들이 왔다. 말하자면 상대적으로 하등한 문명에 의해서 위대한 고대문명이 멸망하였다.





역사의 경험에 의하면 이것은 모순이다. 물론 하등한 문명이 우월한 문명을 정복한 사례들이 있다. 그런 사례들에서는 정복자들이 피정복자들의 문명에 동화되었다. 인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맑스가 이야기 한다. “인도를 정복한 아랍, 터키, 타타르(Tartars), 무굴인들은 곧 힌두화되었다. 역사의 불변의 법칙에 따라, 야만적인 정복자들은 그들의 신민들의 우월한 문명에 의해서 그들 스스로 정복당했다.” 미주7)





앞선 정복자들과 달리, 외국 무역 상인들은 인도 문명을 파괴시키려 하였다. 자본주의 국가들 중에서 최고로 막강한 영국이 인도에 오면서 그 파괴의 과정은 최고점에 이르렀다. 왜일까? 맑스는 그 이유를 이야기한다. “영국은 (인도보다 : 번역자) 우월한 최초의 정복자였다. 그러므로 힌두문명에 접근하지 않았다. 영국은 토착공동체를 깨뜨리고 토착수공업을 제거시켰고 위대하고 위계적인 토착사회를 평준화시키는 방법으로 힌두문명을 파괴하였다.” 미주8)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힘의 사용이 힌두문명의 파괴에만 국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영국이 광폭적인 범위에서 야수적 힘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힘의 사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유럽의 국가들은 중국, 인도, 이란, 이집트와 같은 동양의 문명에 뒤처져있었다. 그러나 14세기와 15세기에 새로운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에 기초해서 새로운 문명을 일으켜 동양의 나라들을 추원하였다. ≪공산당 선언≫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미국의 발견, 희망봉횡단이 부르주아지의 성장을 위한 신선한 대지를 열었다. 동인도와 중국시장, 미국의 식민지와, 식민지 무역, 교환수단과 상품의 증가는 상업, 항해, 산업을 성장시켰고 이전에 결코 알지 못할 정도로 혁명적으로 봉건제를 흔들어, 급격하게 발전하는 추동력이었다.










그 결과는? 공산당 선언은 계속해서 기술한다.










부르주아지는 지배권을 장악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봉건제, 가부장제적, 목가적인 모든 관계(idyllic relation)를 종식시켰다. 그들은 “타고난 상하관계(natural superiors)”와 결부되어 있던 봉건적 유대를 몰인정하게 산산조각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냉정한 “현금지불”과 같은 노골적인 이기심의 관계를 만들었다. 그것은 천상의 종교적 열정을, 기사도의 열광을 이기적인 계산이라는 차가운 물에 빠뜨렸다. 그것은 인격의 가치를 교환가치로 만들었다. 사라질 수 없고 셀 수 없는 자유들을 무의식적인 하나의 자유―자유무역(Free Trade)으로 만들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종교와 정치적 환상으로 감추어진 것들을 착취를 위해서 모두 벗기고, 부끄럼을 느끼지 못하는 철면피로, 직접적인 잔인한 착취로 대체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장과 발전은 인간의 삶의 모든 측면에 끼친 이런 변화들의 총합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비문명인”이라고 했던 유럽 상인들이 일으킨 변화의 결과는 새 삶과 영감을 주었다. (자본주의: 번역자) 경주가 시작되자, 그 당시 발전한 국가들이었던 인도, 중국, 이란, 이집트가 인류사회의 진보경주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진보적 성취를 얻게 된 유럽인들을 도와 공산당선언에서 묘사했듯이 자본주의 성장과 발전이 진행되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앞선 나라였던 인도가 왜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퇴행하였을까? 인류사회의 진보경쟁에서 뒤쳐진 유럽인들이 어떻게 인도를 제치고 선두에 섰을까? 맑스는 이 질문들의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맑스의 사후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몇 편을 글을 갖게 되었다. 그 글들에 근거해서, 필자는 대략적인 결론들을 내린다.





1. 아리안들의 침략으로 비아리안 부족민들의 (생산양식은: 번역자) 파괴되었고, 아리안들에 의해서 새로운 (농업) 생산양식이 발전되었다. 아리안과 비아리안 사회가 병합되면서 새로운 사회들이 등장하였다.





2. 부족사회 체계가 해체되고 생산양식이 진보하면서 전체 사회의 생산능력이 증가하였다. 계속해서, 생산활동이 다면에 걸쳐 생겨났다. 이는 노동의 분화를 일으켜서 특정한 집단의 인민들이 특정한 직업을 갖게 되었다.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원시적 착취에 기반한 새로운 생산관계(Chaturvarnya)가 성장하였다. 이 새로운 생산관계는 생산양식과 생산력의 증가를 반영한 복잡한 카스트제도로 전환되었다.





3. 고대 그리스, 로마, 서아시아 국가들의 노예제와 인도에서 발달한 바르나 카스트제(Varna - caste system)는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없다. 이 두 제도의 기본적 특징은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모순이다. 다만 한 가지 점이 다른데, 노예제는 다수의 인민들을 공개적으로 노예를 만들어 착취하였다면 인도는 카스트로 은폐시켰다.





4. 바르나-카스트 제도가 존재하면서, 이 착취제를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특별한 종교와 이데올로기-철학적 틀이 만들어졌다. 이는 노예제에서의 종교와 철학과는 다른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힌두인들이 “신성한 인도문화”라 부르는 힌두교, 힌두철학, 힌두문화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5. 고대 서아시아 국가들과 인도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착취제도가 있었지만 이들 지역에서 고대 시대에 생산에서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산과정이 자급-자족(self-consumption)이었다. 생산된 부의 작은 양만 다른 이들에게 판매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필요한 소비품은 소규모로 구매하였다. 달리 표현하면 “상품생산(Commodity production)”이라 부르는 생산양식이 두 제도에서 모두 미미하였다.





6. 바르나-카스트 제도는 노예제보다 상품 생산의 진보가 느렸다. 인도에서는 카스트제도가 마을 자급자족적 특징을 만들었다. 마을에서 필요한 소비품들은 마을에서 전통적으로 세습되는 직업가들에 의해서 충당되었다. 그래서 마을을 벗어난 물건들의 교환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7. 이와 달리, 노예제에서는 착취하는 계급은 노예들로부터 전유한 잉여물들을 팔아 돈을 벌어 향락의 생활을 즐기려는 동기가 있었다. 그래서 노예제가 있었던 서아시아 국가들은 마을 자급자족적인 카스트제도가 있었던 인도보다 상품교환이 활발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국가들의 착취계급들은 상품으로 바꿀 수 있는 부의 약탈이 필요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이 인도에 대규모로 침략하였다. 마을 자급자족적인 인도의 착취자들은 이 침략을 방어하지 못했고 침략자들에게 패배하였다.





8. 그러나 : 마을 자급자족적 카스트제에 기반한 사회 제도의 기초를 붕괴시킨 침략자들은 없었다. 심지어 새로운 이슬람 종교의 부흥을 위해 비무슬림 종교인들과 성전(jihad)을 벌이는 이들조차 카스트제도와 자급-자족적 마을들을 파괴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힌두 카스트 중에는 차츰 “무슬림 카스트(Muslim caste)”가 형성되었다.





9. 생산 영역에서 침략자들은 상품 생산의 증가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전체의 생산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착취계급의 수요에 필요한 사치품들이었다. 착취계급들이 증가한 생산물들을 차지하려 시작하면서, 시장에서 판매되는 상품의 양도 증가했다. 그러나 이런 상품교환의 증가는 여전히 상층 계층에만 국한되었다. 하층 계층은 시장에서 소비를 위한 물건을 생산하고 구매하는 일이 극히 제한되었다.





10. 착취계급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서아시아의 침략자들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은 자급-자족적 마을들이 유지되었다. 침략자들, 왕들, 장군들은 농촌에서 생산관계와 사회제도를 바꾸지 않았다.





11. 여기에서 우리는 서아시아 침략자들과 유럽 상인들이 인도에 온 이후 사건들과 영국의 지배를 설립한 것의 차이점을 분명이 볼 수 있다. 베다 아리아인들로부터 무굴에 이르기까지 외국의 침입자들과 달리 유럽의 상인들은 인도에 그들의 제도를 심기 위한 씨앗을 가져왔다. 그들은 ‘인도 문명’―마을 자급자족과 카스트―을 그 뿌리부터 자르는,  상품생산 제도의 대리인을(agents)이었다.





그들은 자국의 착취계급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사거나 물건을 파는 단순한 상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경제 제도 즉, 자본주의를 대표해서 세계 곳곳을 누비고 인민들을 세계시장의 생산과 소비로 밀어 넣으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국가에서 혁명을 퍼뜨렸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교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려는 임무를 수행하며 인도에 왔다.





힌두 또는 이슬람 양식의 인도문명은 생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인도의 지배자였고 그들 스스로 인도화되었던 지금까지의 모든 침략자들은 새로운 (외국)자본주의에게 권력을 양도하였다. 인도의 마지막 왕국들, 무굴 제국이 무너졌고 새로운(영국)제국, 외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요약하면, 사회진보의 경쟁에서 최고의 앞에 있게끔 인도를 도운 “위대한 고대문명”이 자본주의 시대인 근대 인류의 역사에서 뒤로 밀려났다. 자랑스러운 부를 생산했던 “고대문명”이 결국 가난뱅이가 되었다. <노사과연>










미주)





1) “The British Rule in India”, in On the First Indians War of Independence, 1857-59, p. 15





2) Ibid, p. 14 





3) Ibid, pp. 20-21





4) Ibid, p. 16





5) “The Future Results of the British Rule in India, Ibid, p. 38





6) Ibid, pp. 38-39





7) Ibid, p. 34





8) Ibid.





[편집부 : 바로잡습니다.]










≪정세와 노동≫ 2011년 4월호에 게재된 “마오주의자들의 폭력에 대한 사회학적 질문”의 주석에 오류가 있어서 지면을 빌어 정정합니다. 101쪽 주석 1번은 아래와 같이 수정합니다. “낙푸르는 마하쉬트라 주에 있으며 중부 인도에서 가장 큰 도시다.” 마하쉬트라의 주도는 뭄바이입니다. 또 106쪽 주석 9번도 수정합니다. 아루나찰 프라데시는 네팔과 직접적으로 접경하고 있지 않고 이 지역의 게릴라는 네팔의 마오주의자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아래와 같이 수정합니다. “중국과 인도의 1962년 전쟁이 일어난 주이다. 주 경계선에 인접한 국가로는 버마, 부탄, 중국이 있으나 인도에 위협이 되는 국가는 중국 뿐이다.” 지적해주신 독자분께 감사드립니다. 주석에서 나타난 오류는 번역자와는 전혀 무관하며 편집부에서 주석을 추가하면서 발생한 것입니다. 잘못된 정보에 혼란을 겪으셨을 독자 여러분 그리고 감옥에서 힘든 번역 작업을 하셨던 번역자에게 사과드립니다. <끝>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231 <기획번역>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 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2011-07-15 2802 127


우 156-060)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435번지 진안상가 나동 2층 (신주소: 노량진로 22길 33) 
(전화) 02-790-1917 / (팩스) 02-790-1918 / (이메일) wissk@lodong.org
Copyright 2005~2022 노동사회과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