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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 (1)
글쓴이 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E-mail send mail 번호 228
날짜 2011-06-04 조회수 3136 추천수 105
파일  1307192254_번역.hwp

  






























번역 : 이병진(양심수)















[번역자의 책 소개]





남부디리파드(1909년 출생)는 인도공산당(맑스주의) 정치국 위원이다. 그는 대학생이었던 1932년 학교를 떠나 시민불복종 운동(Civil Disobedience Movement)에 참여하였으며 1934년에 께랄라연합 콩그레스 사회주의당(the Kerala unit of the Congress Socialist Party)을 만들었다. 그는 께랄라의 콩그레스 위원회 비서를 역임하면서 인도공산당(Communist Party of India)의 창당에 기여하였다. 그는 인도공산당 총비서를 역임하며(1962-63년)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64년 인도공산당이 정치 노선을 둘러싸고 분화되면서 남부디리파드는 인도공산당(맑스주의)1) 창당을 주도하였다. 그는 1977년부터 1990년까지 인도공산당(맑스주의)의 총비서를 역임하였다.





이 책은 간디를 지도자로 내세우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비판적으로 보고, 계급적 관점에서 인도의 독립운동을 분석한다. 그는 인도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영국의 식민지배와 인도의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영국 제국주의자들로부터의 독립 투쟁 이후 부르주아들과의 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도 부르주아지들과의 투쟁을 ‘2단계 민족 투쟁(the second stage of the national struggle)’이라고 한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간디의 독립 투쟁 전략의 계급적 성격 즉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로서의 그의 한계와 영국제국주의자들과의 타협적 노선을 비판한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노동계급과 노동하는 대중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부르주아들은 영국 제국주의자들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으면서 노동계급과 인민대중들의 강력한 압박과 요구로 명목상 사회주의적 요소가 포함된 “혼합경제(mixed economy system)”와 비동맹 외교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인도의 독점자본주의를 형식상 은폐하기 위한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전략일 뿐 인도는 식민지 시대부터 성장하고 발전된 독점 자본주의가 지속되었다. 인도의 지배세력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내세워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바, 독립투쟁 과정에서 인도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인도의 독립과 그 계급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시각에서 서술되었으며 우리에게 시사점을 제공한다.















[편집자 주]





원주는 미주(①② 등으로 표기)로 역주는 각주로 처리한다. 역주는 이병진 동지의 주석에 편집부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한 것이다. 이병진 동지의 초역문을 편집부에서 교정을 보고 다시 이병진 동지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였는데 문제가 있다면 전적으로 교정자의 책임이다. (최상철)










저자의 서문










이 책은 말라얄람(Malayalam)어(語)로 ≪데사브히마니 신문(Deshabhimani daily)≫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1977년 4권으로 최초 출간되었다. 뒤이어 2판은 한권으로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해 준 Sarvashri B. B. Nayar, K. T. Zacharias, P. K. Sivadas, C. P. Narayanan 위 네 분의 노력으로 이 책이 나올 수 있었고 기쁘게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을 편집하고 출판해 주신 Shri Atmanand Bhat와 K. M. N. Menon 박사께, 그리고 색인을 만들어 준 M.S. Aleyamma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트리반드람(Trivandraum)에 있는 사회과학출판사(Social Scientist Press) 덕분에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독자들도 알게 되겠지만, 이 책은 1947년 8월 15일까지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 서너 장은 인도가 분단되어 인도연방(Indian Union)과 파키스탄이 만들어지는 이야기다. 이는 인간을 도살하고 재산을 파괴하는 최고의 정점으로 귀결되었다. 독립투쟁 승리의 기쁨은 인류역사의 커다란 비극으로 끝났다.





내가 신문에 기고한 글이 책으로 나오기 20년 전부터 나는 텐둘카르2) 의 8권짜리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에 대해서 지금과 똑같은 평가를 하였다. ≪월간 새 시대(New Age Monthly)≫에 연재 되었던 글은 ≪마하트마와 그 사상(Mahatma and the Ism)≫라는 제목의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간디의 삶을 재평가하는 것에 한정시켜서 그의 철학과 정치적 행동 경력의 진화를 추적하고 간디주의 실패의 과정을 기술하였다. 그 책의 논지와 이 책의 마지막 장의 논지는 같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이 책은 간디주의의 진화에만 한정시키지 않았다. 이 책은 간디주의의 철학과 정치 강령을 포함하여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이 조금 광범위하지만 이 두 책은 서로 보완적이다.





≪마하트마와 그 사상및 이 책의 말라얄람어 판이 출판되는 기간 동안에 분당 이전의 인도공산당 내에서 격정적인 논쟁이 있었다. 거의 10년 동안 당내 토론을 위한 문건들(articles)이 제출되었다. 나는 ≪인도의 사회주의적 패턴의 경제와 정치(Economics and Politics of india's socialist Pattern)≫라는 제목의 꽤 두툼한 책을 냈다. 이 책은 1947년 영국에서 지배체제를 물려받은 국민회의당의 계급적 성격과 정책들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당내의 위원들과 친구들과 토론하고 스스로 학습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책은 인도공산당(맑스주의)을 형성하는 이념을 명료화 시킨 후에 여러 내용을 다루었지만 나는 더 이상 가치가 없음을 발견하고는 2판을 내라는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1970년대 2권의 작은 책을 쓰는데 이용하였다. 그 책들은 ≪인도 계획경제의 위기(Indian Planning in Crisis)≫와 ≪갈등과 위기(Conflicts and Crisis)≫이다. 앞의 책은 독립 이후 경제 위기의 발전을 다룬다. 뒤의 책은 1947년에 처음 나타났던 정치적 위기를 현재 상황까지 다루었다. 이 작은 두 책은 ≪인도의 사회주의적 패턴의 경제와 정치≫의 새로운 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책들은 앞에서 출판했던 마하트마와 지금 이 책에서 다루는 1947년 독립 이전 부르주아들이 독립투쟁에서 지배 세력이었던 인도의 부르주아의 경제와 정치적 정책들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인도 부르주아들의 철학과 정치적 행동 계획의 비판은, ―간디를 카리스마적인 개인으로 만들고 그를 독립운동의 우두머리로 세운― 오늘날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국민회의당은 작년에 창당 1백주년을 대중적으로 기념하였다. 국민회의당(인디라)의 총재이며 수상이 1985년 12월 기념사를 했다는 것은 오늘날 국민회의당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국민회의당은 1백 주년을 자랑스러워하지만, 라지브 간디 수상은 당을 위기에 빠뜨려 비판 받게 만든 사람들을 정부와 당의 요직에 앉혔다. 수상 자신이 또는 지난 62년 동안 국민회의당이 독립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고 믿는 국민회의당의 지도자들이 38년 동안 그들이 한 일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한 답을 마지막 장 3개의 절인 “분단계획(The Scheme of Partition)”, “외과적 수술(The Surgical Operation)”, “독립 투쟁에서 권력과 지도자들(Leaders of Freedom Struggle in Power)”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와 국민회의당 지도자들에 의해서 오랜 기간 협상했던 마운트바튼 계획(The Mountbatten Plan)은 국민회의당 지도자들과 마하트마 간디에게도 고통과 굴종을 주는 씨앗을 포함하였다.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 하에 있었던 부르주아 지도자들의 전력과 전술은 교활한 쓰디쓴 열매였다. 그 계획은 영국과 협상을 하기 위한 대중 행동의 전략과 전술이었다. 두 개의 적대적 국가를 만들도록 잔인한 외과적 지배세력에게 인도를 떠나라고 요구하였고 그제야 그들은 떠났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전개되는 우리의 논지는 엎지른 우유를 보고 우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현재와 미래에 관한 논의다. 과거를 재검토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계획을 결정하는 것이다. 과연 서로 반대되는 것일까? 사실, 나는 지난 39년 동안 온 나라를 뒤덮는 정치와 경제 위기는 과거로부터 추적해야 한다고 겸손히 주장한다. 그것은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부르주아지들의 지도력의 계급적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 너무나 미미한 공산주의 운동은 ‘인도에서 나가라 투쟁(Quit India struggle)'의 승리를 지배자들의 거래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독립을 획득한 후에 분리되지 않은 인도공산당과 인도공산당(맑스주의)은 부르주아 정책들의 대안적 정책들을 제출하고 실천하였다.(집권 세력으로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을 반대하는 야당으로써)





분리되지 않은 인도공산당, 그리고 이후에 인도공산당(맑스주의)의 비판의 선상에서 나는 1970년대에 펴낸 ‘인도 계획 경제의 위기’와 ‘갈등과 위기’에 관해서 설명하였다. 나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앞의 두 권의 책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더 좋은 생각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차례 





저자의 서문










1. 시작글(Introduction)





2. 역사적 배경(The Historical Background)





3. 초기의 투쟁과 패배(The Early Struggles and Defeats)





4. 부르주아와 민족주의의 싹(Shoots of Bourgeois Nationalism)





5. 인도 국민회의: 초창기(Indian National Congress: The Early Years)





6. 틸라크의 시대(The Tilak Era)





7. 전쟁과 민족의 봉기(War-Time National Upsurge)





8. 간디의 시대: 융성과 퇴보(Gandhian Era: Surge and Set back)





9. 운동은 어디로? (Whither the Movement?)





10. 맞겨룸과 협상(Rivalries and Negotiations)





11. 새로운 융성(The New Upsurge)





12. 완전한 독립을 향해서(Towards Full Independence)





13. 소금 행진(Salt Satyagraha)





14. 협약 이후(After The Pact)





15. 2차 시민 불복종(Second civil Disobedience)





16. 시민 불복종 운동 철회 이후(After the Withdrawal)





17. 다시 왼쪽으로 (Towards the left again)





18. 맑스주의적 관점을 위하여(For a Marxist Perspective)





19. 부르주아 지도의 전술(Tactics of Bourgeois Leadership)





20. 수용 이후(After Office Acceptance)





21. 국민회의당의 위기(Crisis in the Congress)





22. 전쟁과 민족투쟁(The war and National Struggle)





23. 전쟁기간 동안의 긴장(Tensions during the war)





24. 1942년 투쟁(The 1942 Struggle)





25. 국민회의와 반대자들(The Congress and Its Opponents)





26. 국민회의-동맹 관계(The Congress-League Relation)





27. 와벨 계획(The Wavell Plan)





28. 혁명적인 대중 봉기(The Revolutionary Mass Upsurge)





29. 협상들과 꼬뮤널3) 봉기(Negotiations and Communal Riots)





30. 와벨 정권의 마지막 날들(Last days of the Wavell Regime)





31. 독립: 승리 또는 패배?(Independence: Victory or Defeat?)





색인(Index) 















영국은 인도에서 이중의 사명을 수행해야 했다 : 파괴의 사명과 재생의 사명 —낡은 아시아 사회를 파괴하는 것과 서구적 사회의 물질적 기초를 아시아에 구축하는 것... 모든 영국의 부르주아지는 마지못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하겠지만, 그들이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은 인민대중을 해방시키지도 개선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러한 해방과 개선은 생산력의 발전 여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생산력이 인민의 것으로 되느냐 않느냐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들이 틀림없이 하게 될 일은 이 해방과 개선을 위한 물질적 전제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부르주아지가 이 이상의 일을 한 적이 있는가?










칼 맑스, ≪뉴욕 데일리 트리뷴(New-York Daily Tribune)≫ 1853년 8월 8일4)










  





1. 시작글










우리의 역사가들은 아리안(Aryans)들의 도래(到來)와 함께 인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남인도 출신의 역사가들은 드라비디안(Dravidian)사람이 더 먼저 고대에 살았고 아리안보다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인도 역사의 두 흐름이 존재한다. 하나는 아리안들 중심으로 다른 하나는 드라비디안을 중심으로. 이 두 가지 흐름은 신화(mythologies)에 기초한다. 신화에 바탕한 역사를 쓰는 대신, 필자는 매 역사적 시대에 존재했던 생산수단(instruments of production)이 무엇이었는지 보려고 한다. 정치적 충돌, 전쟁 그리고 혁명을 야기했던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으며 생산수단과 함께 생산수단과 함께 생산을 지배했던 사회적 관계는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1).





비록 이들 모두가 역사적 유물론5)의 방법(the method of Historical Materialism)을 충분히 소화했다고 말 할 수 없지만, 요즘 들어 역사와 생산수단의 발전을 연관시켜 역사를 분석하려는 여러 학자와 역사가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들 학자들은 초기 역사가들의 관점과 관념을 강하고 예리하게 비판한다. 예를 들면, 1972년 로밀라 타파르(Romila Thapar)교수는 사르다르 파텔(Sardar Patel) 기념 강좌에서 “과거와 편견(Past and Prejudice)”이라는 강연을 하였다. 그 강연에서 그녀는 인도에는 두 범주의 역사가들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하나는 제국주의자들의 인도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학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반제국주의 투쟁에 공감하는 학자들이다. 두 신조의 학자들은 모두 그들의 편견에 따라 역사를 고찰하려 하며 자신의 정치적 편향에 맞는 “역사 이론”을 정식화하려 한다.





이것은 현대 인도의 역사 기술에도 유효하다. 예를 들면, 친제국주의 역사가들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England)에서 온 무역업자들이 미개한 인도를 개화시킨다는 제국주의자들의 주장을 강화시켜주면서 외세의 도래(到來)를 시대를 앞서는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반면에,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무역상들의 진출이 외세지배의 토대를 만들려는 것으로 역사적 사실들을 해석한다. 인도의 근대화와 진보를 위해서 서구세력이 오는 것이 아니다. 인도는 이미 세계의 문명국가들보다 진보하였다.





나는 인도 역사를 객관적으로 고찰하는 이는 이들 두 견해의 주창자들이 단언하는 주관적이고 협소한 계급적 이익과 견해를 모두 거부해야 한다고 다른 곳에서 밝혀왔다.1) 특히 나는 외세 지배의 뿌리 깊은 근거인 몇 세기동안 발전해온 인도사회체제의 고유한 취약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외국인의 지배는 인도의 고대와 중세 형태의 인도 사회의 기초를 파괴하였지만, 새로운 기반의 근대화에는 실패하였다. 근대화 과정은 독립투쟁에서 시작했다.





이 책은 인도독립투쟁사를 저술한 대부분의 저자와 다른 접근을 한다. 예를 들면, 친제국주의 역사가들은 남인도 지방에서 여러 형태로 일어난 초기의 반영 봉기를 경멸하였다. 반면에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이들 봉기를 민족독립 투쟁의 시작과 그 모델로 간주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사건들을 다르게 평가한다. 사실, 영국지배에 대한 인민들의 저항은 영국지배 자체 만큼 오래된 일이다. 벨루 탐피 달라바(Velu Thampi Dalava)와 파자씨 라자(Pazhassi Raja)의 지도하에 께랄라 지역에서 일어난 반영봉기처럼, 인도의 여러 다른 지역의 인민들은 영국이 온 나라를 지배하기 이전부터 일어났었다. 1857년 봉기는 광범위한 것이었고 지역 수준의 봉기로는 최고의 형태였다. 영국의 역사학자들이 “세포이반란(Sepoy Mutiny)”라고 이름붙인 이 광범위한 봉기는 민족 운동 역사의 마지막 단계였다6). 이 봉기는 농민대중과 이들을 착취하던 봉건 신사가 동맹하여 일으킨 높은 형태의 봉기였다. 봉건 신사들은 영국의 지배가 확립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바르나-자티(Varna-jati)관계와 마을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봉기에 동참했다. 동시에, 봉기는 특별한 유형의 민족투쟁 마지막 단계였다. 1857년 투쟁에 이어 일어난 여러 투쟁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1857년 봉기가 진압되고 26년이 지난 후 외국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한 또 다른 운동이 조직되었다. 인도국민회의(the Indian National Congress)가 만들어졌다. 1857년 봉기 및 초기 반영봉기에 참여했던 인민들과 달리 새로운 조직을 만든 사람들은 영국 지배와 외국문화의 ‘진보’성을 받아들였고 이것을 인도에 복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진보적인 변화를 도입했던 영국 지배자들이 이러한 변화가 인도에 도입되는 것에는 반대하는 것을 보며 괴로워했다. 이런 불만은 점점 확대․강화되었고 마침내 반영 대중투쟁으로 전환되었다. 1947년 8월 15일은 이 투쟁의 정점(頂點)이었다. 그러므로 친 국민회의파(Pro-Congress)역사가들은 인도국민회의당의 성장과 최후의 승리는 1857년 봉기 및 그 이전부터 인도의 다른 지역들에서 벌어진 대중봉기들의 계승이며 성공적인 정점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초에 인도 독립 25주년 기념으로 여러 책, 전공․연구 논문들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반영봉기에 대한 연구의 걸출한 결과이다. 이런 연구는 우리의 사료(史料)를 풍부하게 한다. 그러함에도 대부분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논리적 대답을 제공하는 것에 실패하였다.










1. 1857년 및 그 이전에 일어난 반란은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왜 그들은 탄압을 받았는가?





2. 1857년 반란의 탄압이후 등장한 민족독립운동은 왜 무장대중투쟁과 거리를 두었는가? 왜 일반대중들에게까지 운동의 구호(Slogan)가 ‘비폭력(non-violent)'이어야만 했는가? 운동의 지도자들은 왜 외국 지배자들이 ’위험‘하다고 한 무장대중투쟁을 회피했는가?





3. 종교와 카스트 이념에 기초한 종파주의적 정치가 어떻게 독립운동 초기부터 민족주의자들의 발목을 잡게 되었으며, 외국 지배자들은 이와 같은 장애물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어떻게 운동을 분열시킬 수 있었나? 독립 투쟁 과정에서 단일한 정치체(political entity)를 이루었던 인도가 어떻게 둘로 분열(인도연방과 파키스탄)되어 독립 이후 지속적으로 상호 충돌하게 되었는가?





4. 전체 인민들이 새로운 시대의 탄생으로 기뻐한 1947년 8월 15일에, 왜 한 세대 동안 해방투쟁의 수장이었던 마하트마 간디는 만족하지 못했는가? 왜 간디를 따르던 한 분파는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는데, 또 다른 분파는 그들(간디를 따르던 한 분파 ―역자)의 말과 행동 사이의 모순에 의해서 실망했는가? 왜 간디주의자(Ghandians)들 중에서 큰 분파가 이듬해부터 어떻게든 사람들을 조직하여 새로운 지배자와 대항하였는가?





 





간단히 말해서, 1857년 봉기로 정점에 올랐던 초기의 민족운동은 외국 지배자들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1885년에 출현했던 새로운 민족독립운동은, 겉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끝났지만, 인민들 앞에 놓인 목표와 목적들을 달성시킨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들을 일으켰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은 인도의 일부분의 지배자가 되었다. 영국이 인도 전체를 지배하기까지 1세기 가까이 걸렸다. 그리고 다시 1세기가 못되어, 1947년 8월 15일에 영국은 지배를 끝내고 인도를 떠났다.





이 기간 동안 인도의 인민들은 외국지배에 맞서 쓰라린 전투를 하며 싸웠다. 이 싸움에서 수많은 이가(thousands) 죽었고, 수백만 이상(millions)이 참여하여 승리하였다. 수많은 가정들이 가난으로 내몰렸고 인민들은 가혹한 압제에 직면했었다. 사실상, 영국이 이 나라를 떠나도록 강제한 것은 전투에서 인민들의 용기와 조직된 숙련성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투쟁하며 독립을 기다리던 애국자들의 바람처럼 되지 않았다. 1930년 이후 매년 1월 26일을 기념하면서 참여한 수십만의(thousands) 마을 사람과 도시의 인민들에게는 응당한 보상이 현실화되지 않았다. 사회, 정치, 문화 전선에서의 외국의 지배는 쓰러지지 않았다. 변화는 단지 정치적인 행정체제 뿐이었다. 백인 주인이 갈색 주인으로 바뀐 것이다.





민족 독립을 위한 싸움의 첫 단계에서는 봉건왕족들이 선두에 나섰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지도했다. 이들 부르주아지는 전자본주의적 체제를 없애지 않고 타협하였다. 그러므로 1857년까지 첫 단계와 1947년까지의 두 번째 단계로 나뉘는 독립투쟁의 두 단계를 재평가해야 한다. 두 단계 각각에 고유한 취약성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재평가 하여야 한다. 이 책에서 이와 같은 지향을 겸손하게 시도하려는 나의 관점은 역사적 유물론이다. 이는 일반적인 민족주의적인 역사가들과 매우 다른 접근이다.





비맑스주의 역사가들이 의문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첫째, 역사적 유물론이 독립적인 역사적 조사에 족쇄가 되지 않겠는가? 둘째, 다른 나라의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역사적 유물론이 인도에 의미가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역사적 유물론의 본질(essence)과 그것을 조사하는 방법(methods of investigation)을 설명해야겠다.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 중 가장 압축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공산주의자당 선언≫(간략히 ≪공산당 선언≫)에서 시작하자.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각 역사적 시대의 경제적 생산과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사회 구조가 그 시대의 정치사 및 지성사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 ; 그에 따라 (원시적인 토지 공동 점유의 해체 이래로) 역사 전체는 계급 투쟁의, 즉 사회 발전의 다양한 단계에서의 피착취 계급과 착취 계급, 피지배 계급과 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 그러나 현재 이 투쟁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동시에 사회 전체를 착취, 억압, 계급 투쟁으로부터 영원히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자신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 (서문: 1883)7)





 





나중에 위에서 요약한 역사적 유물론의 본질과 관련해서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오해가 대두되었다. 한 서신에서, 엥겔스 자신이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 입장을 명백히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청년들이 때때로 경제적 측면에 두어야 할 것 이상으로 무게를 두는 것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맑스와 나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적수들을 논박할 때 그들이 부인한 주요 원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 상호 작용에 참가하는 기타 계기들을 설명하는 데 응분의 지면을 할애할 시간과 장소와 기회를 항상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8) 1)





 





자아비판의 내용을 담은 같은 편지에서 엥겔스는 경제적인 요인과 비경제적인 요인 사이의 상호작용을 분명히 제시한다.










… 경제적 처지는 토대(Basis)입니다. 그러나 상부구조(Überbaus)의 다양한 계기들―계급 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 투쟁의 결과들―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 등등 ―법 형태, 그리고 또 이 모든 현실적 투쟁이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리에 반영된 것으로서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 등도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많은 경우에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이 모든 계기들은 상호 작용을 하며, 이 상호 작용 속에서 결국 경제적 운동은 무한히 많은 우연들(즉, 그 내적 상호 연관이 너무 멀거나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 연관이 없다고 간주하고 지나쳐 버릴 가능성이 있는 사물들과 사건들)을 통해서 필연적인 것으로서(als Notwendiges) 자신을 관철해 갑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론을 임의의 역사적 시기에 적용하는 것은 간단한 1차 방정식을 푸는 것보다 더 쉬울 것입니다.9) 1)










이 개념은 맑스와 엥겔스의 모든 포괄적인 저작들에서 심지어는 짧은 서신들에서조차 볼 수 있다.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맑스주의자들은 베다(Vedas)와 우파니샤드(Upanishads)를 믿는 현인들과 달리 맑스주의를 궁극적이며 영구적인 진리로 간주하지 않았다. 맑스주의자는 “다양한 방식들로 세계를 해석”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맑스주의자는 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관점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한다. 이것이 역사를 조사하는 맑스주의 방법(역사적 유물론)이다.










공산당선언이 쓰여질 때, 유럽에서는 폭력적인 혁명이 있어났다. 이 혁명에 참여했던 맑스와 엥겔스는 이 혁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혁명의 다양한 이론적 측면을 분석했다. 맑스가 쓴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의 계급투쟁≫의 재판 서문을 엥겔스가 썼는데, 그는 1848-49년 혁명의 교훈을 분석하면서 역사적 유물론의 적용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들을 던졌다.










이 글과 함께 재간행되는 이 저작은 맑스가 자신의 유물론적 견지에서 현대사의 한 토막을 주어진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설명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였다. … 일상사에서 나타나는 개별 사건들이나 일련의 사건을 평가할 때 궁극적인 경제적 원인들로까지 거슬로 올라가는 것은 누구에게도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 산업 및 세계 시장에서의 교역의 움직임과 생산 방법상의 변화를 나날이 추적하여, 임의의 시점에 이와 같이 복잡하게 얽히고 항상 변화하는 요인들로부터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은 … 불가능한 일로 남아 있다. … 이러한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은밀하게 작용한 다음에 … 강력하게 표면에 나타나기 마련이다.10)










소개글에서, 엥겔스는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의 계급투쟁≫을 평가하면서 맑스의 몇 가지 오류들을 지적한다.





 





맑스가 이 저작에 착수했을 때, 앞서 언급한 오류의 근원들을 피하는 것은 한층 더 불가능하였다. 1848-49년의 혁명 기간, 당시에 일어나고 있던 경제적 변화들을 추적하거나 더욱이 그 변화들에 대한 전망을 지닌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였다. 1849-50년 사이의 가을과 겨울, 즉 런던에 망명하고 있던 처음 몇 달 동안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맑스가 이 저작에 착수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2월 혁명 이전의 프랑스의 경제 상태와 2월 혁명 이후의 이 나라의 정치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들을 기술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서술은 아직까지도 결코 능가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사건들의 내적 연관성을 밝혀 주었으며 나중에 맑스 자신이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시험에서도 훌륭하게 통과하였다.11)










엥겔스는 맑스가 1848-50년 혁명의 한복판에서 저술했음을 그리고 훗날 맑스 자신의 연구결과에 따른 정식화에 있어 몇 가지 변화가 도입됨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우리는 이미 1850년 가을에, 적어도 혁명적 시기의 첫 장이 종결되었으며 새로운 세계 경제 공황이 발발할 때까지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혁명의 배신자로 파문당하기도 하였다. 우리를 파문했던 바로 그 사람들은 나중에, 비스마르크가 타협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했던 사람에 한해서지만, 거의 예외 없이 비스마르크와 타협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역사를 통하여 우리도 틀렸다는 것을 알았으며, 역사는 당시 우리의 견해가 환상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역사는 훨씬 더 진전되었다. 즉 역사는 당시의 우리의 오류를 불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조건들을 완전히 변화시키기까지 하였다. 1848년의 투쟁 방식은 오늘날 모든 점에서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는데...12)










그러함에도, 맑스와 엥겔스는 혁명 투쟁의 경험에 관한 자아비판(self-criticism)을 위해 그들을 제한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산당 선언≫ 집필 중에 그리고 그 이후에, 이전에 썼던 저작들을 신중하게 재검토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이전의 결론과 다른 결론으로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확신되는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새로운 결론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 중국 그리고 인도를 포함한 모든 나라들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과 통계 자료들을 모았다. 그 목적으로 여러 언어도 배웠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을 궁극적 진리를 깨달은 현자로 간주하지 않았다. 대신에 과학적인 연구자들로써 진리를 찾는데 헌신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를 포함한 맑스주의 역사 연구자들은 역사적 유물론의 접근법을 받아들인다.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모든 이는 이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연구자들이 제기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역사적 사실을 세심히 조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최근의 인도 역사 연구들과 해방투쟁 역사들이 그렇다. 이런 연구들은 가치 있는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많은 연구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관점에서 행해진다. 몇몇의 연구는 종교적 관점을 담고 있거나 협소한 지역이나 언어에 의한 시각에서 저술되었다. 이런 편견은 결론에 도달할 때에서 뿐만이 아니라 자료 분별과정에서도 인식해야 한다.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와 동시에 학자들처럼 역사적 사실들을 가지고 와야 한다. 이런 사실들이 역사적 유물론의 방법에 보다 풍부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비맑스주의 역사가들의 연구와 조사 결과들을 비판적인 조사하여 역사적 유물론의 방법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는 독립 투쟁을 다룬 역사가들 중 누구도 그들(비맑스주의자 ―역자)에게 논리적인 답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누군가 역사적 유물론의 시각에서 인도의 과거의 발전에 기초해서 독립 투쟁의 전 과정을 분석한다면, 인도에서 외국의 지배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인도에 있었던 사회체제의 본질과 외국의 지배에 의해서 변화된 이 체제의 본질을 분석한다면,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제시할 수 없는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시도하려는 것이다. (1장 끝) <노사과연>















1) E M S Namboodiripad, Indyacharitrathilekku Oru, Ethinottam(in Malayalam), Chintha Publishers, Trivandrum, 1995.





2) Ibid.





3) Engels to Joseph Bloch, September 21(22), 1890. 강조는 인용자의 것이다.





4) Ibid.





      






1) Communist Party of India(Marxist). 약칭 CPI(M).





2) Dinanath Gopal Tendulkar. [1909-1971] 인도의 저술가.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이기도 한데, 모스끄바에서 몽타쥐 기법의 선구자 세르게이 에이젠슈쩨인 휘하에서 영화 제작기법을 익히기도 하였다.





3) 꼬뮤널리즘(Communalism)은 ‘자공동체중심주의’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Communal Riots은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전달할 수 있는 번역어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서는 번역하지 않고 옮긴다.





4)  번역 출처: 칼 맑스, “영국의 인도 지배의 장래의 결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2, 박종철 출판사, 2005. p. 420, 424. 번역문 일부 수정(이하 동일). 맑스는 이 글을 7월 22일 런던에서 집필했다.





원문: Karl Marx·Friedrich Engels, Marx Engels Collected Works(MECW), vol. 12,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9. pp. 217-222. 저자의 글은 맑스‧엥겔스의 글을 모두 영어로 인용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원문은 실제 당시에 발표되었던 원문을 담고 있는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한다.





5) 원문에 역사적 유물론을 모두 대문자로 강조하고 있는데 이하에서 강조는 생략한다.





6)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세포이 항쟁’을 낮은 급료에 불만을 갖고 있던 세포이라 불리는 무슬림 용병들이 돼지기름을 총포기름으로 이용한다는 소문을 듣고 일으킨 반란으로만 알려졌다. 이와 같은 설명은 당시의 정세와 인도의 사회와 경제적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영국제국주의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국내에서의 세포이 항쟁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세포이 항쟁을 “민족 운동 역사의 마지막 단계(the end of a stage in the history of the national movement)”라고 규정하는 저자의 주장에는 보다 구체적인 학문적 검토가 요청된다. (아마도 저자는 1857년 이후 반영 민족운동의 ‘비폭력적’인 전개에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논지를 주장하는 것 같다. —최상철) 다만 저자가 지적하였듯이 세포이 봉기의 성격은 단순히 세포이 용병들이 일으킨 반영 봉기가 아니라 농민과 봉건 귀족들의 동맹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 회사를 만들어 중상주의적 식민지화를 시작하였다. 동인도회사는 인도 대륙내의 영주국가(일명  번왕국)들과 전쟁을 통해서 세력을 넓혔다. 250년 동안 인도의 농촌경제와 가내 수공업은 체계적으로 붕괴되었고, 인도는 영국의 산업혁명시기 대규모의 산업생산물에 필요한 원료공급지로 전락되었다. 농촌과 가내 수공업의 붕괴는 농민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세포이 항쟁은 단순한 군사적 반란이 아니라 농민을 포함한 민족적 성격을 갖는 봉기였다. 세포이 항쟁의 성격에 관해서 “아프가니스탄 4월 혁명보론 (2)”, ≪정세와 노동≫ 제65호(2011년 2월) pp. 96-104.에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 짧은 글이지만 세포이 항쟁에 관한 객관적인 시각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7) 번역출처: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83년 독일어판 서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 박종철 출판사, 2005. p. 373. 





원문: MEW(Dietz), 1987. Bd. 21. S. 3.





8) 번역출처: 엥겔스, “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6, 2000, p. 510.





원문: MEW(Dietz), 1987. Bd. 37. S. 465.





9) 번역출처: 같은 책, p. 508.





원문: MEW(Dietz), 1987. Bd. 37. S. 463.





10) 번역출처: 칼 맑스,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소나무, 1991. p. 16. ‘마르크스’는 맑스로 바꾸었음. 이하 동일함.





원문: MEW(Dietz), 1987. Bd. 22. S. 519.





11) 번역출처: 같은 책, p. 17.





원문: MEW(Dietz), 1987. Bd. 22. S. 510.





12) 번역출처: 같은 책, p. 20.





원문출처: MEW(Dietz), 1987. Bd. 22. s.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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