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세
현장
이론
기타
 
지난호보기
월간지/단행물
구독신청
세미나신청
토요노동대학신청
1
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 보론(2)
글쓴이 사사키 타츠오 E-mail send mail 번호 216
날짜 2011-03-07 조회수 2391 추천수 125
파일  1299490265_아프간.hwp

  













기획번역











[편집자 주: 이번호로 보론까지 번역이 완전히 끝났다. 그동안 번역하시느라 수고해주신 정혜윤 님과 리떼 님께 감사드린다.]















수탈기구










봉건적 왕조는 징세청부인과 같은 중간착취층을 내부에 놓으면서 그 자체가 전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수탈기구를 이루고 있었다. 이를 왕조의 세출 면에서 살펴보자. 표(4)「세기말의 드라우니왕조의 세출」을 참조해보자.










표(4) 18세기 드라우니왕조의 세출 (전액단위 1000루피)















































































































항목





전액





%





군사비





1460





31.6





  샤의 상비군



  병기류(대포 등)





1190



 270





 





왕실부가축





 390





8.4





  마구간



  코끼리



  당나귀



  낙타





 150



  50



  80



 110





 





왕실이외의 비용





1170





25.3





  규방



  주방



  기타





 560



 220



 390





 





샤의 개인적 비용





1200





26.0





  건설



  주변지(바르크, 아쿠츄)로의 보조  





 210



 185





4.5



4.2





합계





4615





100












군사비항목이 전체의 31.6%로 가장 많다. 게다가 상비군의 이동과 대포 등의 무기의 운반에 ‘왕실부가축’이 사용되었다. 즉 당나귀 및 낙타 등 동물을 기르는 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이 7.4%이다. 동물을 기르는 비용만으로도 비율이 크지만 그에 ‘군사비’를 더하면 40%가 된다. 논쟁할 소지도 필요 없이 군사무장국가이다.





다음으로 ‘샤의 개인적 지출’분이 26%이다. 이는 전체의 1/4이상이다. 게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왕실이외의 비용’으로서 25.3%가 있다는 것이다. 그 대부분은 규방과 그 주방비이다. 작가 이노우에는 중앙아시아를 방문했던 기행문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즈벡공화국 카라쿠무석탄의 오아시스도시 히바에는 1831년에 건설된 벽돌궁전(타슈 하우리)이 남아있다. 이 히바 한국(히바를 중심으로 하는 몽골계 봉건국가)의 한(왕)은 4명의 정부인과 그 이외의 40명의 여성을 궁전 내에서 규방에 거느렸다. (앞의 책『실크로드 아시아 최심층 쏘비에트(2) 「서투르키스탄의 거리에 대해」』)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의 전제국가에서는 왕 한명으로 여성을 원하는 대로 취했기 때문에, 그 외의 왕족, 귀족이 숨겨둔 여성을 포함하면 그 수는 수백 명, 수천 명이 되었다. 규방(하레무)은 왕족과 그를 둘러싼 유흥환락과 권력유지를 위해 존재했다. 그래서 앞에서 서술한 상인과 징세청부인들이 새로운 여성을 모집해 그곳에 오래 거주했던 여성과 교환 매매했다. 규방은 여성을 매매하는 인신매매시장이었던 것이다. 그녀들을 인간으로서 취급한다는 의식은 그들에게는 손톱 만큼도 없었다. 여성은 만능 노예였다.





게다가 이 표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인민(영주민)의 생활향상에 지출되는 비용과 산업의 발달을 재촉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지출항목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맑스는 아시아적 전제국가의 주요한 지출로서 군사비(국가 내외의 약탈)와 공공사업비(치수 관개공사)를 들고 있다. (맑스 「영국의 인도지배」, 앞의 책, 『맑스·엥겔스 전집』 제9권 p. 123) 앞에서 보았듯이 군사비는 과연 높은 비율이었으나 공공사업비는 없다. 드라우니왕조의 세출에서만 본다면 왕조는 인민으로부터 전적으로 수탈하는 것만 있어, 게다가 아무것도 환원하지 않는다. 그들 인민은 단순히 오로지 강제노동(부역)하고 수탈당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농노였다. 이 상태를 어떤 사람은 ‘전반적 농노제’(『아시아적 생산양식연구』小林良正, 大月書店, 1970년 p167)라고 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지속될 수 있을까.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내부모순의 발전에 의해 그 강고한 껍질이 부서지거나, 혹은 밖에서의 강한 자극이 의해 파괴되거나, 아니면 그 내부로부터의 힘과 외부로부터의 자극과의 긴장감이 함께 상호 침투하여 지양되거나, 어쨌든 발전을 멈추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왕을 비롯한 왕족, 신하 및 관료의 정치 경제력의 완만한 발전과 규방에서 보이는 부패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외부 세계와의 사이의 불균등발전에 자극받아 ‘전반적 농노제’의 존재 그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이 모순의 심화 확대가 다음의 발전단계로의 밑거름이 된다.





드라우니 왕조는 1834년 결국 붕괴했다. 그 왕조 말기, 즉 19세기에 들어서며 아프가니스탄에 밖에서 자극을 가져온 것은 우선 북쪽 나라인 러시아, 이어 영국이었다. 늦게 역사에 등장한 러시아 자본주의는 유럽에서 촉발된 부르주아혁명의 격랑에 시달리며 챠리즘타도와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스스로의 과제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 자본주의는 우선 흑해, 지중해, 카스피해, 중앙아시아 및 극동의 광대한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시장권의 확장을 추구했다. 19세기에 카스피해를 자기의 지배권에 넣은 짜르는 이윽고 중앙아시아의 3개의 한국(汗国、몽골계 봉건국가) 즉 코칸드, 푸하라, 히바를 러시아 보호국으로 했다. (그림,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진출 참조)





이노우에가 소개했던 1831년 건설한 히바한국의 왕궁은 1839년 러시아 페토로프스티 장군의 군대에 의해 공격받아 면화재배에 의한 모노컬처 식민지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어 그것은 이미 산기슭의 화재가 아니게 되었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은 이미 엥겔스가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정복(3한국의 보호국화)의 거대한 가치는 대 인도 작전의 공격기지의 중핵으로서 그 중요성이 있다”(「중앙아시아로의 러시아 진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제12권 p569)에서 말했듯이 영국과의 패권경쟁을 유발했다. 영국은 러시아에 대한 반격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직접적으로 강렬한 손상을 입혔다. 이는 다음절에서 '앵글로 아프간 전쟁'에서 다룬다.










러시아 차리즘에 있어 이미 하나의 난제는 농노제 해체의 문제이다. 그것은 남진정책과 동진정책과 병행해, 19세기 전체를 통해 러시아를 관철해온 문제이다. 데카프리스토(※)와의 싸움(1825년)을 비롯해,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나로드니키(※※) 운동과 농민 농노들의 거대하고 처절한 반란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에 있어 농노해방투쟁이 직접 아프가니스탄에 파급력을 가져 행정 수준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우니 왕조는 말할 것도 없이, 다음의 하라쿠샤이 왕조에 이르러서도 그 중세적 신분제의 지양을 압박하는 등 그것이 사실 지향되었다는 것을 역사의 문맥에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 데카브리스토: 19세기를 비롯한 러시아에서 귀족의 자제와 청년사관 등, 지배계급출신의 인텔리겐챠에 의해 만들어진 진보적 혁명적 단체<12월당>의 멤버. 짜리즘과 농노제의 타도를 목적으로 1825년 니콜라이 1세 즉위식 때 행동을 개시했으나 실패하고 시베리아에 유형 되었다.





※※ 나로드니키: 1860년대부터 20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러시아혁명운동의 소부르주아적 조류. 농민을 짜리즘과의 투쟁에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로드(인민)>을 이끌려 했던 혁명적 인텔리겐챠 그룹.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농민을 혁명의 주세력으로 생각했으나 인민 속에서의 대중적 활동에 실패해, 정부에 대한 개인적 테러를 나아갔다.















앵글로 아프간 전쟁










드라우니 왕조가 붕괴하고, 바라쿠쟈이 왕조(1834년~1929년)가 성립했다. 그리고 4년 후, 영국 식민지주의는 러시아 짜리즘의 패권적 움직임을 곁눈질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로의 영토적 야심과 이권을 추구해, 그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중국으로의 진출도 그와 병행되었다. 영국은 도합 세 번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해왔다.





 제1차 1838~42년(이하 제1차 전쟁)





 제2차 1878~80년(이하 제2차 전쟁)





 제3차 1919년~6월





앵글로 아프간전쟁은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에 있어 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물론 그것은 아프간 인민에 있어서는 사활이 걸린 것이고 그들은 그 침략에 대해 필사적으로 방위했다. 그 방위의 세월 속에서도 인민은 그들의 정체성, 즉 민족적 의식을 발견해, 확립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밖으로부터의 도전(침략)을 받은 것은 민족적 각오와 해방에 있어 신통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은 반영독립전쟁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의 사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서술하는 것은 보류한다. (※)










※ 엥겔스는 1857년에 『더 뉴 아메리카 사이클로페디아』에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기사를 보냈다. 거기서 엥겔스는 제1차전쟁의 경과를 꽤 자세히 싣고 있다. 동시에 그 전쟁 당시의 아프가니스탄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마르크스·엥겔스전집』제14권 p.69.)










그러나 이 기간의 전쟁 및 그에 관련된 몇 개의 특징에 대해서는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에 이 전쟁에 공통된 동기 및 배경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19세기 시작부터 중앙아시아의 영토와 이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와의 사이에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제국주의국의 특수한 대립이 이른바 영·러의 전쟁이었다. 러시아 짜리즘은 코카서스지역으로 남하해 흑해, 카스피해, 투르크, 페르시아(이란) 및 아프가니스탄으로 영역을 넓히고자 했다. 속칭 말하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이었다. 그간의 사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도록 하자.





유럽제국주의 열강, 특히 영국과 러시아의 아시아대륙 쟁탈을 둘러싼 싸움의 역사는 길고 또한 다양한 국면에서 전개되어왔다. 러시아 짜리즘에 의한 흑해에서 아시아 특히 시베리아, 극동 및 태평양만까지 광대한 지역으로의 패권 확장만을 보아도, 그것은 몇 개의 발전단계를 거치고 있다. 본 절에서는 제2차 전쟁과의 관련으로, 그 남진정책의 일례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1875년 이후 오스만투르크제국령 발칸반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불가리아에서 슬라브계 민족의 반 투르크 봉기가 일어나고, 기독교도의 농민 수천 명을 투르크 군이 학살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동방문제’로서 크게 문제시 되었다. 1877년 4월, 러시아 짜르는 기독교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투르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것이 이른바 러ㆍ투전쟁이다.(러시아와 투르크 양 제국 사이에서는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마치 숙원을 풀려는 듯이 몇 번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이 때 영국보수당 디즈넬리 내각은 러시아에 대항했다. 디즈넬리는 악어의 공허한 눈물로 투르크를 감쌌다. 영국은 영-인도네시아 군을 지중해의 마르타섬과 키프로스 섬에 파견했다. 이것은 투르크 령으로 침입해, 흑해, 지중해로 남하해 오려는 러시아군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은 이미 인도 아대륙의 근간부분을 영유해, 동인도회사(※)가 그 실권을 쥐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당시 유명한 고전적 해적회사로서 전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마침내 회사는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탐험대와 조사부를 파견해 지형, 기상상황과 함께 러시아짜리즘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은 러투전쟁으로 러시아의 움직임을 경계해, 헤라트와 칸다할에 영국주재사무소를 설치하고 싶다고 아프가니스탄을 압박했다. 당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영국의 ‘보호국’으로 보고 러시아와의 ‘국경국가’로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의 아프간국왕 쉐리 아리 칸은 이러한 이해를 갖은 조사부를 깨끗하게 국경에서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영국은 영국의 품위를 상처 입힌 것이라고 항의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왔고 결국 끝내는 영인(영국·인도)군을 출동시켰다. 이것이 1878년 11월의 제2차 전쟁이었다.





영국의 상하양원에서는 아프간전쟁을 두고 보수당내각과 야당자유당(브릿스톤등), 인도담당대신과 인도제국통독 등의 사이에서 심한 논쟁을 주고받았다. 양자는 ‘영국제국’의 권익을 지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러나 내정, 1880년대의 ‘대불황’대책, 전비의 인도제국의 부담 및 영국제면화제품의 인도수입관세 철폐문제에서는 날카롭게 의견이 대립했다. 특히 수입관세 쳘폐 문제에서는 영국본국의 면화자본과 재(在)인도영국자본이 시장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한편 이 시점에서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귀국은 우리 제국의 세력권 외에 있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말하자면 러시아는 침략 의도는 없고 외교적으로 온당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다.










※ 영국본국 정부와 그 국익을 대표하는 동인도회사, 후에는 인도제국과 사이에서는 소통이 항상 원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인도제국에 관련된 영국의 개별자본의 이해가 본국 자본과 정부와 대립하는 것도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1870년대부터 영국제 면제품의 인도에서의 수입관세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또한 인도인민의 비참함과 빈곤을 말하는 겁없는 회사직원이나 인도정부 직원도 있다. 양쪽 모두 러시아 남하에 대한 경계심은 공유하고 있었다. 다만 앵글로 아프간전쟁에서는 군사경비의 부담을 둘러싸고 본국정부와 동인도 회사와의 사이에 염연한 대립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인도측이 그 전비를 부담했다.(大阪外国大 『英米研究』15호 1987년 2월 「‘아프간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秋田茂 등의 제반 논문)





영국은 모든 영인군( 영국동인도회사, 후에는 인도제국양성 용병 페소이편성의 부대)을 출동시켰다. 1857년 동인도회사의 ‘세포이의 반란’ 이후 영국정부는 회사를 정부 아래 놓고 인도를 직접 지배하는 ‘인도제국’으로 했다. 그래서 본국 정부 인도담당상 직속 인도총독을 ‘제국’으로 파견하도록 했다.





엥겔스는 그의 초기의 역작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과거(1780년부터 1844년까지)의 60년간의 영국공업의 역사는 인류의 연대기에 있어 비교하기 어려운 역사이다”(『마르크스·엥겔스전집』제2권 p243)이라고 쓰고 있다. 이하 같은 책에서 단편적으로 발췌해 보면 영국의 주로 인도로부터의 원면의 수입(중량)은,





1771년~75년 연평균 500만 파운드 미만





1841년 5억 22800천 파운드





1844년 6억 파운드





그에 대해 영국으로부터 면제품의 수출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공업에 불가결한 에너지원은 석탄이었으나 노산바란드와 다람주의 탄광 수는





1753년 14곳





1800년 40곳





1836년 76곳





1843년 130곳





인구증가도 현저했다. 이른바 바민감과 셰필드의 인구증가는 다음 표와 같다.(생략―편집자)










“마치 마법의 지팡이의 일격에 의해 대지 속에서 나온 것 같다”라고 표현할 만큼 도시가 생겨났다. 노동자는 “자신의 말(馬)조차 여기에 있으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불결하고 구질구질하며 다 무너진 집”에 살며 감자만을 먹는다. 약 1000만 명의 아일랜드 노동자가 당시 이미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에서 노동을 했다. 그들은 “빈민으로 있으면서 영국의 노동자의 임금을 깎으며 힘든 일을 해내버렸다” 그들은 “집 30개당 1개의 비율로 변소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초과이윤의 추구를 지상목적으로 하는 식민지적 착취의 경험을 이때 이미 제국 내부에 축척해왔다.





중부 랭커셔지방의 1839년의 공장노동자 31만 9590명중 242,296명은 여성. 게다가 그중 11만 2192명은 18세 이하. 경공업에 있어 여성의 비율은 이하와 같다.





목면 공장 56.25%





양모공장 69.5%





생실공장 70.5%





아마방적공장 70.5%





그녀들은 장기간, 중노동으로 일하며 재해와 사고, 나아가는 언어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모욕을 받아왔다. 영국자본은 이제 국내에서는 착취강화의 여지를 그다지 남겨놓지 않았다. 엥겔스는 또한 제1차 전쟁 후 10년을 경과한 1853년, 영국의 해외시장의 확장에 대해서 말했다.










“아프간전쟁까지(러시아의 상품이 진출하는 것만으로는) 영국의 아시아 내륙무역은 제로에 가까웠다고 말해도 부당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사정은 일변하고 있다. 무역을 쉴새 없이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상의 명령―유령과 같이 근대 영국에 매달려 있는...이러한 숙명[fatum]―에 사정없이 떠밀려 영국의 무역은 인더스강부터 흑해까지 2개의 측면에서 아시아 내륙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맑스·엥겔스전집』제9권 p14 「투르크에 있어 진짜의 쟁점」)















취약한 왕조










영국,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 영토적 야심을 가졌던 시기, 이식하려고 했던 나라의 특히 왕조내부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당시의 지배자들은 외적에 대해 국가를 통일해가면서 싸우려는 의사는 거의 없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 치명상이었다. 왕위를 노리는 사람은 오히려 외부의 힘을 빌려 권력을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이른바 슈쟈 우루무라쿠는 제1차 전쟁 때 페샤와르에서 국민들이 모르게 영국과 거래해 안정된 왕위에 앉으려했다. 그 이후 오랫 동안 슈쟈 우루무루크는 “국가를 배반한 왕”으로서 인민에게 원망과 한탄의 적이 되었다. 슈쟈에 대항한 토스토 모하메드 한은 러시아의 힘을 빌리려했다. 제1차부터 제3차 전쟁까지 80년간 왕위에 앉았던 것은 8인이고 재위 기간은 평균 10년이었다.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는 난제에 당면해 얼마나 고생을 겪었는지, 정권이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왕들은 항상 복수, 암살의 위험에 떨었다. 살해되지 않는 경우에도 눈을 못 보게 되거나 해외추방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이렇게 왕조 내부는 취약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왕위를 노리는 사람 중에는 형제와 이복형제와 종형제와 그 외 근친자가 있었다. 중앙아시아, 아랍지방의 상층계급 속에 넓게 존재한 일부다처제가 그들을 상당히 배출했다.





이미 보았듯이 일부다처제는 고대노예제와 그에 이어지는 부족제 속에서 계승되어온 것이다.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이것은 예외는 아니었다. 7세기부터 8세기에 성문화된 코란에도 분명히 다처제를 용인하는 문언이 보인다. 코란 제33장 제4절에는 “동시에 2명 3명 또는 4명의 아내를 맞아도 좋다. 그러나 2인 이상의 아내를 동시에 취하는 것은 어렵다”라고 쓰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하메드(568~632)가 태어난 시대, 아랍 사회는 더욱 강력한 베트민족 유민을 중심으로 한 부족사회였다. 이츠츠도시히코(井筒俊彦)는 『이슬람탄생』中央公論社 1990년)에서 당시 아랍사회를 만연한 다신교와 유대교, 기독교의 일신교의 대립 속에서 무하메드가 “부족적 종교에서 세계종교”로 이슬람교를 변혁할 것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무하메드는 일부다처제가 온존한 부족사회의 하부구조까지 포함시켜 그것을 해체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에는 부족과 유목민 집단 간의 전쟁과 약탈에 의해 남편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남겨진 미망인과 아이들을 구제하는 것은 부족과 유목민의 의무였다. 그렇게 해 그들의 조직은 유지되는 것이었다. 일반의 부족원에 있어 만약 남편이 사망한 경우, 그 미망인은 남편의 형제가 이미 유부남일지라도 그의 부인이 되는 예가 있었다. 이것도 생명의 유지·자손의 존속이라는 부족방위책이었다. 따라서 서역, 중앙앙시아에 있어 그중에서 특히 이슬람교가 보급된 경우에는 일부다체제가 일반화 되었다.





이른바 20세기에 들어서며 하비브라 한은 그의 양자 아마누라 한이 일부일처제를 관철시키려고 했을 때, 여러 명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다방면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필요하다고 아마누라를 설득했다. 결국 그는 남자 23명 여자 25명의 아이를 두었다. 그의 자식들은 모두 적출자로서 취급되는 관습이 있었다. 왕자가 왕위를 노려 형제 간, 이복형제  간에 정쟁이 반복되었다. 때로는 2명이 동시에 왕좌를 가지게 되어 이중권력 상황이 되기도 했다. 왕조정권은 본질적으로 약하고 불안정한 정권으로서 계속 있어왔다.















아프가니스탄이 패배했던 요인










왕조는 외적에게 유리한 약점을 이렇게 내부에 가지고 있었다. 또한 아프간왕의 군세는 세계최강의 제국에 비해 열악하고 빈약하며 전투 때마다 패퇴해 괴롭고 쓰라림을 경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수준의 싸움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아프간전쟁은 전략적으로 보면 영국제국주의와 아프간왕국과의 대항이었다. 그것을 전술적으로 보면 혹은 전투의 사실상의 당사자라는 면에서 말하면 한쪽은 인도제국의 영인군=시파히, 속칭 말하면 세포이이고, 다른 쪽은 아프간인민들이었다. 전쟁은 그러한 대립 상극의 구도였다. 더욱 충분히 검토해보면 세포이 속에는 지금의 파키스탄 측의 파슈톤 출신자도 포함되어있다. 그렇게 되면 아시아 대륙 내의 동일한 민족과 근접민족이 제각기 지배자=고용주들에 의해 강제된 전투를 행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살육하는 관계였던 것일까. 이것은 그 전쟁의 특징이기도 했다. 더욱 교활한 것은 영국제국주의였다. 그들은 ‘인도제국’을 이용해 아프간전쟁을 치렀고 전비는 ‘인도제국’에게 부담시키면서도 승리하면 영토 및 이권은 자신의 것으로 했다. 영국은 이른바 타인을 총알받이로 내세워 상대를 잡으려 했다. (세포이군의 명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은 패배하지 않았다. 그 요인은 제2차전쟁에서 알 수 있다. 앞에 말했듯이 1878년 1월 영인군은 아프가니스탄을 향하여갔다. 칸다하라, 쟈라라배드 및 하이바루 코타루 고개의 3방면에서 250,000명의 군세로 공격해 이윽고 카불을 점령했다. 동시에 영국첩보기관은 아슈톤 민족의 분단책을 시행했다. 쉐리 아리 칸의 서거 후 모하메드 샤쿠브 칸이 왕위를 이었다. 친영파의 야크부 칸은 다음해 2월 영국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것으로 이 전투는 종료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9월이 되자 카불에 주둔하는 영국군이 아프간병의 공격을 받아 일진일퇴의 싸움이 이어졌다. 이후 1880년 7월이 되자 헤라트 통치자인 샤퓨톤민족의 모하메드 야유브 칸의 군대가 영인군을 무찔렀다. 세포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야영으로 매일 밤 등장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망령과 그것에 위협받는 자신의 꿈이 진짜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지내야했다. 결국 그들은 영국제국의 명예도 위협도 버린 채 지체 없이 도망치곤 했다.





영국의 정교하고 강력한 근대적 병기에 의한 공격에 아프간인민은 한발 두발 맞으면서도 저항의 에너지를 발휘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별도로 말하자면 내셔널리즘(민족해방의 에너지)이었다. 제3차전쟁의 경우 영국 측은 “기계화 된 정예부대 34만과 공군이 아프간국경에 집결해왔다. 이윽고 그 군세는 75만으로 증강되었다. 그 강대한 적에 대해, 겨우 38,000명의 아프간보병대, 8,000명의 기병대 및 4,000명의 포병대가 대치했다”(나플 카루핀 The Stuggle of the Peoples of Afghanistan for Independence and against the Blitish Colonialists, BY Naftul Khalifin "Afghanistan: Past ana Present" 앞의 책)





이러한 전력 차로는 같은 편의 군세는 금세 소모되어버린다. 승리의 전망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른바 가즈니방면에서 지휘를 담당했던 모하메드 나딜 샤는 “만갈 챠타케루, 샤도란, 아마샤이 및 쟈데 그 외의 부족에게 호소했다.” 낙타의 혹에 걸터앉은 샤튜론의 사자가 손에 쥔 격문은 “큰 임무를 앞에 두고, 부족 간의 불화를 그만두고 성전에 참가한다”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국경부근의 마스드 아베드쟈이, 카블헤루 및 캬제리의 부족들은 스스로 무기를 취하고 사심을 버리고 싸울 것을 명령받았다.”(앞의 책). 이렇게 부족민은 영국의 부족 분리책에 분노의 마음을 표현했다. 영국정보기관은 국경 가까이에서 ‘하이발 라이플멘’ ‘와쟈리스탄 스카우토’ 및 ‘모하메드 미리샤멘(민병)’이라는 괴뢰의 무장집단을 결성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싸움’ 속에서 아프간 측과 내통해 버리고 말았다.





파슈톤 부족에는 여러 가지 법률이 있었다. 그것은 파슈톤 누와레이라고 부른다. 부족 간에 싸움을 하다가도 공통의 적이 나타나면, 싸움을 그만두고 ‘협조’와 ‘향토애와 자위’ ‘야경’ 외적에 대한 ‘복수’ 등이 그 내용이다. 그 부족의 관습과 법률에 자세했던 J.스페인은 영국 전쟁당시 과거부터의 법률이 중용되었다고 쓰고 있다.(『실크로드의 수수께끼의 민중들 J.스페인 저, 刀水書房, 1980년)





다시 말해 부족사회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드리우니왕조와 그 이후 바라쿠자이왕조의 시대에 대략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부족제 사회 해체의 제1차적 내용은 하부구조(자연적인 토지의 공동점유·공동소유)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른바 그 하부구조가 해체되어도 여전히 상부구조, 이른바 법률, 습관, 기억 등은 길게 잔존한다. 그리고 그 잔존한 상부구조가 이른바 물질적인 힘을 가지고 일정하게 움직인다. 지금 일대전란을 만나서 그 상부구조 그 자체가  변혁, 변질을 압박받는 것이다. 지금까지 부족들이 법률을 축으로 생각해 동시에 움직였다면, 이제는 전쟁을 맞아서 그 법률이 변화해간다. 혹은 부족의 법률이 민족적인 것으로 변질해간다. 이른바 민족애와 조국방위로 변해간다. 파슈톤 민족의 몆개의 부족이 함께 운명을 서로 나누어가지며, 민족공동체로 지향되는 것이다. 또한 부족의 에너지를 고갈시킬 때까지 퍼 담아 아프가니스탄(파슈톤)의 내셔널리즘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같은 전쟁을 경험하는 중에 마음의 어딘가에 자신들을 멸시하는 영국 백인의 눈빛을 느끼며 식민주의자들의 편을 거부하는 의식도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싸움은 본질적으로 인민의 싸움이고 샤와 샤의 상비병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또한 이러한 진행은 이슬람교의 교의와는 대체로 관계없는 것이다.





이야기는 조금 빗나가지만, 1990년대 시작부터 아프가니스탄 무쟈헤딘은 반영(反英) 민족전쟁의 승리의 요인을 이슬람교의 지하드(이교도에 대한 성전)로 돌려났다. 그러나 이는 초기의 민족해방투쟁을 곡해하는 것이고 아전인수이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교의 이데올로기는 반영 승리를 고취시키지도 않았고, 이슬람 단체가 조직적으로 전투에 참가해왔던 예를 찾을 수 없다. 쟈말덴 아프가니의 예를 제외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슬람주의의 운동은 아직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성장하지 않았다. 만약을 위해 덧붙이면 인도아대륙에서는 19세기말에 인도무슬림은 힌두교도와 함께 반영운동에 합류했다. 이어 1920년대에는 전투적인 무슬림에 의한 치라화토 운동(오스만투르크의 칼리프옹호를 주장한 반영운동)이 회의파의 반영운동과 제휴했다. 아프가니스탄 무슬림은 이러한 이슬람의 사활이 걸린 사건에도 함께하지 않았었다.





군사적으로는 현저히 열세이면서도 거기에 발현된 대중의 에너지가 전쟁의 정치적 승리의 궁극적인 요인이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아프가니스탄 인민의 영국군에 대한 저항이 강력하다고 묘사해왔다. 그것은 또한 우직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의 더욱 상징적, 전형적인 사례를 하이발 계곡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일찍이 『카블 뉴 타임스』는 “하이발 계곡에서 생긴 일 ―그들은 한 번도 침략자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라는 영웅 서사시를 게재했다. 그 서사시의 내용은―1908년, 윌리엄, 코하토 지휘 하의 영국군이 그 계곡에서 산간의 아프리디와 신와리 부족을 8번에 걸쳐 공격해왔다. 그때마다 부족민은 저항했고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싸웠다”라고 전해진다.(Events in Khyber, "The Kabul New Times", 1986.2.16) 이 계곡은 유사 이래, 고금동서의 사람들의 교통을 방해해왔다. BC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동방원정 도상 통과저지, 아쇼파 왕조 때의 군대가 발루쿠로 가는 것을 단념, 게다가 떨어져 17세기에 인도 우갈군의 통과도 불가능했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험준한 교통의 요로와 함께 인민의 투쟁이 높은 민족정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셔널리즘의 경제적 기반은 어떠했을까. 아프가니스탄 측의 영세한 전력 중에, 그들이 사용한 무기의 하나는, 아프간총 ‘제쟈일즈’라는 것이다. 그것은 총신이 길고 명중률이 놓았다. 파슈톤족의 큰 거리에서는 그것이 많이 제조되었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아프간의 상업 자본은 한층 성장했다. 이윽고 그것은 병기, 탄약 및 군장품까지 만드는 수공업에 손을 댔다. 징세청부인은 왕과 장군들을 위해 무기를 조달하는 것으로 몹시 바빴다.





두 번째 요인은 이른바 영국 측의 오산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성장해온 내셔널리즘을 과소평가했던 것은 물론 영국 측이다. 게다가 영국은 제2차 전쟁 때 각지에서 규모가 큰 인민의 반영운동에 대처하는 것에 실패했다. 1857년, 동인도 회사의 용병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은 영국제국주의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 영국 본국정부는 동인도회사를 정부의 통제 하에 놓고 인도를 직접지배로 바꾸었다. 인도인민의 반영 저항에 대해 영국은 더욱 강경한 수단으로 탄압정책을 마구 펼쳤다.





“사건은 무엇보다도 영국의 전략에서 얻은 것으로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어(제3차) 군사작전은 쏘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의 영국의 쏘련간섭군의 붕괴와 연결되었다. 또한 쏘비에트 러시아의 전면적인 우세와 함께 인도에서의 인민의 해방운동이 촉진되었다. 폭동과 봉기, 철도와 통신선의 파괴가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인도지역에서 일어났다. 영국군에서 그중에서도 특히 세포이 탈주자가 속출했다. 대영제국의 위신은 의심할 바 없이 땅에 떨어져,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군사 활동의 지속이 곤란했다. 이러한 전선의 후위부대(병참, 보급임무)가 특히 약해졌다” (나프츠루 카루티브 앞의 책)





결국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서도 대(對)쏘 간섭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는 승리하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적 패배는 바꾸어 말하면 영국이 당면한 세계정세, 특히 쏘비에트혁명과 그에 연동한 심층부부터 솟아오르는 아시아 인민의 해방에너지를 인식할 수 없었던 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부터 영국은 후진 자본주의국 미국에 추격당하기 시작했다. 당시 발표된 여러 가지 경제통계에서도 미국의 수치가 영국의 그것을 상회했다.





아프가니스탄 인민은 앵글로 아프간전쟁을 통해 세계사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그 첫 번째는 국내적 수준에서는 그 싸움에 더해질 힘을 축척해, 이윽고 빛나는 민족 독립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서 『아프가니스탄 4월 혁명』에서 다루었던 4월 혁명 궐기의 역사적·사상적 원천은 이 싸움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두 번째는 국제적으로는 당시의 구미열강 간에 존재해온 팽팽했던 역관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부분에서 기여했다. 러시아와 영국과의 전쟁은 영국을 불리하게 미국과 영국과의 사이에서는 영국을 퇴조로 인도하도록 흐름을 바꾸어 주었던 것이다.















세포이의 명운










아프간전쟁을 어떻게 파악할까, 나는 지금까지 암중모색으로 이 전쟁의 위상에 대해 다루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확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한 한편으로는 이 전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빈곤했다. 일본에서도 연구자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른바 스즈키마사시(鈴木正四)의 『아시아민족혁명의 연구』(전게서)에서도 아오노히로야키(青野博昭)의 『현대아시아혁명의 고찰』에서도 민족독립전쟁으로서 아프간전쟁은 시야에 들어와 있지는 않는 듯하다. 물론 앞의 학자들은 제각기 주제에 관련한 범위 내에서 아프간전쟁에 관한 판단을 넓혀 왔다.





이미 말했듯이 영국과 러시아와의 시장쟁탈전으로서 그 전쟁을 파악하는 것에 큰 변경·수정의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파헤치고 들어가 그 전쟁을 영국의 인도아시아 대륙 및 그 주변의 영토와 이권 확대의 일부가 되었다고 위치짓는 것은 불가능할까. 만약 이렇게 위치짓는다면 영국제국주의와 인도아시아 대륙 및 주변 제반 인민과의 대립이 그 기본적인 구조가 된다. 물론 현실의 전투의 진척상황은 이러한 대립으로 나타는 것이 아니고 우여곡절을 겪을 복잡한 국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 절에서는 아시아 대륙인민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아프간전쟁에서는 그곳을 침략한 영국 측에 있던 세포이의 명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첸나이(마도라스), 문햐이(폼페이) 및 콜카타(캘커타)에 제각기 군사요지를 가진 상점을 지었다. 이것이 중상주의적 식민지화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 내륙을 잠식하기 위해 각지에서 약탈전쟁을 시작했다. 1757년에 프랏시의 싸움으로 벵골지방을 영유했다. 이때 동인도회사는 지금까지 고용하지 않았던 현지인을 비로소 병으로서 20명 채용했다. 이들을 일본에서는 속칭 세포이라고 부른다. 회사는 이후 매년 대륙의 안팎 어딘가에서 번왕국의 군대와 싸우면서 영지를 확대해갔다. 그 주가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57년 프라지의 싸움, 벵갈지방 제압





1768년 마이솔전쟁, 마도라스지방 제압





1775년~82년, 1803년~5, 17~18년, 마루타전쟁, 인도중앙부에서 데칸고원에 이른 일대의 진압





1814년~26년, 52년 버마전쟁





1838년~41년 제1차 아프간전쟁, 영국 측의 패배





1845년~46년, 48~48년 시크전쟁, 펀잡지방 정복





1857~59년 세포이의 반란, 민족독립전쟁










이렇게 침략전쟁이 거듭되면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한편에서는 그 경쟁상대가 되었던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동인도회사를 구축해왔다. 이렇게 영국은 명실상부하게 인도의 유일한 종주국이 되었다. 동인도회사의 입장에서는 아프가니스탄도 아시아 대륙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회사에 고용된 세포이는 처음에는 인도의 높은 카스트 출신자로서 그들은 고향에서 금으로 장식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세포이 군대 내의 계급승진은 대위까지고 그것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영국출신자에 비하면 현격한 박봉이었다.





1857년의 세포이의 반란직전의 영국병과 세포이의 수는 이하와 같다. 총병력 27만 9796명, 그 중 세포이는 23만 2224명으로 전체의 83%였다. 남은 4만 7572명(17%)이 영국인 병사였다. 그중 직접 본국에서 파견된 이는 반 정도인 2만 3000명으로 남은 이들은 인도에서 자원한 것이다. 세포이와 영국인과의 비율은 5대 1정도였다. 또한 23만 2224명의 세포이는 벵갈 관구에 22만 8631명, 폼페이 관구에 4만 3048명, 마도라스 관구에 6만 555명 배치되어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 전체를 넓게 통치하기 위해 수탈할 조직을 만든 것이다.





세포이는 말할 것도 없이 회사 측에 서서 싸우며 위의 전쟁에서 보았듯이 “영국의 인도 정복의 첨병으로서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P. 39)










"이러한 100년간(1757~1857년) 세포이가 영국에 고용되어 싸웠던 상대는 거의 인도·아시아 대륙 각지의 지배자였다“(같은 책 p. 57) 영국에 있어서는 멀리 유럽에서 그 첨병을 파견할 필요가 없어진만큼 정복, 지배의 비용은 낮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과 인도(의 문화)에 걸쳐있는 세포이라는 기괴한 계층“이 인도지배의 총체에 대해 반란으로 도전했다. 이 경제적 근원은 무엇인가. 이른바 별도의 표 ‘인도 영국의 면제품 수출상황’을 보도록 하자.















인도·영국의 면제품수출상황



































영국에서 인도로의 면제품수출고(단위, 야드)





인도에서 영국으로의 면반물 수출고(단위=반)





1814



1821



1828



1835





    818,208



 19,138,726



 42,822,077



 51,777,277





1,266,608



 534,495



 522,504



 306,086







19세기에 들어서며 급속하게 영국제품이 인도에 수출되고 있었다. 1814년, 영국에서 인도로, 81만 8298야드였던 것이 그 20년 후의 1835년에는 5177만 7277야드로 63배 증가했다. 다른 한편 인도에서 영국으로의 면반물의 수출은 1814년에 126만6608반에서 1835년에 30만6086반으로 4분의 1로 감소했다. 인도의 촌락공동체는 기본적으로 농업과 수공업으로 분업화되어 폐쇄적으로 일체화되어있다. 18세기 후반의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인도에 면화를 강제재배하게 해 그 면화에서 만든 제품을 영국에 수출하게 했다. 이것이 표와 같이 수출을 감소시켰다. 면화의 재배도 면직물의 생산도 감소하게 했다. 이것이 농촌의 파괴가 되어 농민이 ‘세포이의 반란’에 참가한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18세기 초기는 엥겔스가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쓰고 있듯이 영국자본주의의 부흥기였다.





‘세포이의 반란’은 자신들보다도 좋은 신분과 대우를 추구해, 동인도회사를 향해 ‘군사적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이는 농민을 포함한 인민의 ‘민족적, 정치적 반란’이었다. (맑스「인도문제」, 『맑스·엥겔스 전집』제12권, p229 )





맑스·엥겔스는 인도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기사를 남겼다. 1857년부터 58년에 걸쳐 맑스는「경제학비판요강」을 정리해, 후의 『자본론』으로 발전시키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세포이의 반란에 관한 기사를 22편, 엥겔스는 10편을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보내왔다. 맑스에 있어 이 일은 생계를 꾸리기 위한 것으로 그는 이에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했다. 반란상황의 묘사는 실로 자세하고 정확해, 논지가 일관된다. 당시 영국, 미국의 지배층에 대한 ‘생생한 폭로논문’이었다. 당시 이만큼 극명하게 기록된 문서는 이외에 없다. 맑스는 그 반란 속에서 필시 자신이 세웠던 가설의 실증을 시험해보았던 것은 아닐까.





이미 맑스는 1853년에 유명한 ‘인도의 영국지배’ ‘영국의 인도지배의 장래의 결과’(『맑스·엥겔스 전집』제8권)를 표현해왔다.





맑스의 인도론을 요약하면 ‘정체’된 아시아, 특히 인도에 있어 반드시 영국이라고 한정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국에 의한 역사적인 파괴와 창조를 통해 자본주의적 발전의 단계가 들어 오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 발전단계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더욱 진행된 인민 사이의 교역이 일어날 것이라고 쓰고 있다.










“장래, 위대한 사회혁명이, 이 부르주아 시대의 성과인 세계시장과 근대적 생산력을 우리의 것으로, 이것을 더욱 선진적인 만국 인민의 공동 관리로 두었을 때, 그 때에 비로소 인류의 진보는 피살자의 두개골로부터만 감로주를 빨아먹으려고 하는 저 소름끼치는 이교도의 우상을 더 이상 닮지 않을 것이다” (맑스 「영국의 인도지배의 장래의 결과」)










반란의 결과 영국은 동인도회사에 의한 인도통치를 그만두었다. 1858년, 인도를 ‘영국인도 제국’으로서 여왕에 의한 직접통치로 변화시켰다. 따라서 동인도회사의 첨병은 영인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과 대우는 이전과 같았다. 왜냐하면 세포이의 인도제국에 대한 충성심 없이는 인도제국 그 자체의 안정 존립을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 그리스, 호메로스의 신곡에 의하면 오림포스산의 신들은 향연에서 불로장생의 감로주를 마시는 관습이 있었다.(呉 茂一, 『그리스신화』상·하권, 新潮社 1979) 맑스는 불로장생의 술은 마시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초연하고 비정한 신들에게 계급지배를 보았을 것이다.

























반란이후










제1차 아프간전쟁에 참전했던 세포이들의 증언이 있다.










“최근의 아프간전쟁으로 인기 없던 지배자(슈쟈 우루무루쿠의 일―인용자주)에게 간섭했던 영국 동인도회사 군은 전쟁광이라 불리며 아프가니스탄의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미움을 받았고 수많은 패배를 기록했다.”










시타 라무(라는 세포이 등)는 이 당시 갑자기 포로가 되고 노예로 팔려버려 허겁지겁 탈주했었다는 비참한 과거를 기록했다. (長崎暢子, 앞의 책, 『インド大反乱一八五七年』p61)





또한 1857년의 세포이 반란으로 다시 황제로 추대된 바하도우루 샤 2세 등은 “제1차 아프간전으로 영국군·세포이군을 파괴적 위기에 빠뜨린 아프간 사람의 전투”를 알리고 있다.  세포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전역으로 회사군에서 탈주했던 것이다. 그 수가 너무 많아 회사군을 패배에 빠뜨렸던 것이다. 그러나 세포이 측에서 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소극적 저항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후  영국 식민지주의에 대한 그들 자신의 자기해방의 싸움은 20세기에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른바 1930년, 가루와리(지금의 파키스탄 중앙부)출신의 세포이가 상관의 발포명령을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다.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지방의 인도인 지도자 칸 압돌 갑팔 간이 영국관헌의 손에 체포되자 분노한 무슬림민중이 일어났다. 영인군의 장갑차가 들어오고 대규모 발포에 의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때 영인군 속에서 힌두교도 출신의 가루와리 소총대의 2개 소대가 발포명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대열을 떠나 무슬림민중과 함께했다. 다수의 병기가 인민의 것이 되었다. 페샤와르 거리는 4월 25일부터 5월 4일까지 인민의 자치지역으로 되었다. 함 닷트는 “그들 세포이에 대한 기억은 인민의 마음 속에 남겨있을 것이다. 자유 인도의 미래의 역사 속에서 그들의 기억은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인도』밤 닷트 저, 大形孝平 역, 岩波書店 1956년)





1919년 아프가니스탄이 영국과의 3차 전쟁에서 승리한 이래, 인접한 인도 인민은 한참 후에 영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반영국의 기운이 여기 페샤와르에도 파급되었다고 생각된다. 적극적인 반영 싸움은 다음의 두 가지 사건에서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제2차 대전 중인 1943년, 일본점령 하의 싱가포르에서 샨드라 포스 등의 지휘 아래 ‘자유 인도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 아래에 인도국민군이 창설되었다. 이 군대 중에는 영인군 속에서 탈주한 세포이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국민군은 일본군의 원조를 받아 영국의 인도지배에 대해 독립전쟁을 수행했다고 한다. “나아가자, 델리를 향해!” 지도자는 콜탈카와 닷카를 중심으로 한 벵갈지방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차지했다. 그러나 국민군은 일본군의 대영인도, 인펄작전에 참가해 일본군과 함께 무참한 패배를 당했다. 인도국민군이 영인군에 패배한 것은 구상, 전술에 있어 너무나 미숙, 치졸했기 때문이다. 속빈강정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영독립투쟁이라는 각인은 후세까지 전해졌다.





또 하나는 1945년 12월, 폼페이 앞바다에 정박 중인 영국함대의 인도인 해군수병이 기함의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파업사건이었다. 동원의 해소, 대우의 개선, 인종차별의 철폐 등을 요구하며 수병 파업위원회가 육상의 세포이와 인도노동자들에게 바다의 세포이와 함께 ‘할탈루’를 일으키도록 어필했다. ‘할탈루’는 동맹에 의한 일제폐점과 불매운동을 말한다. 이 어필은 넓게는 인도 노동자 인민에 충격과 용기를 주었다. 폼페이 50만 명의 시민이 그것에 응해 파업을 일으켰다. 또한 다음해 47년 봄에는 인도최남단의 트라반토후국(지금의 케라라, 타미나드주)에서 복원된 세포이가 토후국타파를 목표로 농민의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일련의 싸움은 인도독립을 보다 앞당기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해 8월, 인도아시아 대륙은 독립하고 세포이들은 제각기 독립국의 국군으로 편입되었다. 세포이의 역사에 새겨진 영광과 비참, 회환, 오욕과 진실은 인도역사 그 자체이다. 거듭된 아프간전쟁에 있어 영국제국주의의 패배는 아프간인민과 세포이, 그 양쪽의 많은 희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아프간인민은 세포이와 무력을 주고 받았으나 한 번도 후자에 대해 증오를 보이지는 않았다.















아프간인민과 세포이와의 형제적 연대여 영원하라










나가사키노부코(長崎暢子)는 그녀의 『인도 대반란 1857년』(앞의 책) 말미에서 “인도인은 크리미아전쟁(1853년~56년―인용자주)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역할과 이란정세(동인도회사의  페르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는 1856년~7년의 영국-페르시아전쟁의 발단이 되었다―인용자주), 아프가니스탄 정세(1838년~41년)와 앵글로 아프간전쟁을 보면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결말을 맺고 있다. 이는 중요한 지적이다. 이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아프가니스탄인민에 대해서도 들어맞는다. 즉 아프간인민은 영국과 러시아의 움직임은 말할 것도 없이, 인도인민, 특히 세포이의 움직임을 보면서 자국의 운명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영국의 아프가니스탄침략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그 중에서도 아프간 민족의 형성을 주제로 삼아왔다. 그 형성은 일정 정도 되었는데 그러한 반면 영국의 자본주의의 선례를 받아들인 것이 적었던만큼 아프가니스탄은 근대적 발전에서 멀어지게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또한 남는다.





역사가 하니고로(羽仁五郎)는 1932년에 ‘동양에 있어 자본주의의 형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중에 영국의 인도지배, 영국을 비롯한 구미열강에 의한 중국의 자본주의 시장화(개항화), 나아가 일본의 개항 및 명치유신을 ‘세계사적 법칙의 동양사적 표현’으로서 분명히 했다. 이 견해가 갖는 학술적 국제적 의의에 대해서는 이제 와서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후 그 견해에 대한 거부와 수정 혹은 보충이 다방면에서 이루어져왔다. 이른바 1511년의 포르투갈의 말라카지역 점령 이후 19세기의 말라카해역 식민지제국구상(『바다의 제국』白石 隆, 中央公論新社, 2000)에 있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고도의 상업자본 및 산업자본(마네파쿠제아)(※)의 발전이 보였다. 이 지역(해역)의 경제권에서는 서양과 동양과의 불균등발전의 격차는 꽤 컸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에서는 주로 러시아와 영국의 상호견제적인 침략 속에서 근대적(자본주의적)발전은 꽤 늦었다. 이것도 아프가니스탄인민의 반영투쟁의 승리의 아이러니한 결과이다.















※16~19세기까지 사이에서 이 지역을 포함한 아시아 해양국가에 있어 토착의 상업자본, 산업자본의 특징, 구조 등은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끝내고자 한다. <노사과연>










사사키 타오츠





번역: 정혜윤(회원)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214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 보론(2) 사사키 타츠오 2011-03-07 2391 125


우 156-060)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435번지 진안상가 나동 2층 (신주소: 노량진로 22길 33) 
(전화) 02-790-1917 / (팩스) 02-790-1918 / (이메일) wissk@lodong.org
Copyright 2005~2022 노동사회과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