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근 5년입니다.

그간 연구소를 뒤돌아보면, 초기에 같이 했던 사람들 중에 몇몇이 이런저런 이유로 연구소를 떠나는 아픔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한 5년이었습니다. 회원도 늘었고, 기관지와 이론지도 꾸준히 발행되고 있습니다. 쎄미나 등의 연구ㆍ교육활동도 꾸준히 그리고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회원의 지역적 분포는 물론이고, 연구ㆍ교육활동도, 전국적이라고까지야 할 수 없지만, 서울이라는 지역적 제한을 훨씬 넘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외 연대활동에도 성실히 참가하고 있고, 재정도 넉넉하진 못하지만, 대체로 안정되어 있습니다. 연구소 밖의 활동가들이나 연구자들은 우리 연구소의 발언에 적대적일지언정 그것을 무시하진 못합니다.

이만하면, 크게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체로 성공적인 5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점을 연구소의 조직현황과 직접적인 활동, 그 성과에만 맞추어 바라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연구소는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입니다. 그래서 창립 5주년을 맞는 총회에 즈음하여 우리는 우리 사회 노동운동의 정치적 상황, 이념적 상황을 톺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지난 5년의 우리의 활동에 대한 평가가 결코 앞과 같을 수만은 없습니다.

모두가 일찍부터 익히 알고 있고 고민하고 있는 일이지만, 그동안 우리의 운동은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전진하긴커녕 크게 후퇴한 것이 사실이고, 또한 후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20세기 사회주의의 성과와 경험의 사실상 일체를 아예 “타도해야 할 자본주의였다”고 주장하는 반쏘ㆍ반공주의가, 극악한 종파주의가 최근 꼬뮌주의니, 코뮤니즘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일부 내로라하는 활동가들, 내로라하는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득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많은 ‘진보적’ 활동가, ‘진보적’ 지식인들이 떼로 나서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온존시키면서도 모두에게 ‘기본소득’이니 ‘보장소득’이니 하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정신 나간 주장을 해대고, 그에 대한 비판이랍시고 그에 필요한 재정을 조달할 수 있느니 없느니 부질없는 숫자놀음이나 하고 있는 꼴을 보노라면, 사실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후퇴 정도가 아니라 그 타락과 혼돈이 극에 달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소위 기본소득에 대해서 한 마디 하자면, 모든 이에게 그것을 절대로 보장할 수 없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그 자체가 문제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온존시키고도 모든 이에게 소위 기본소득을 보장할 수 있다는 듯이, 그리하여 그 본심은 기본소득을 보장하기 위해서 자본주의를 온존ㆍ발전시키고 ‘수정’하자고 주장하는 저들의 가증스러운 대중기만이 문제이지, 절대적으로 숫자놀음을 하자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만 지양한다면 오늘날 인류가 획득한 이 고도의 노동생산력으로 모든 이에게 저들의 기본소득 이상을 보장하지 못할 것도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공황을 맞아 극우정권의 폭력을 등에 없고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자본의 공격과 그에 맞선 여러 현장의 피나는 투쟁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심화돼가고 있는 민주노총의 무기력, 쉽사리 멈출 것 같지 않은 그 무기력은,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노동자 대중 속에 광범하게 번져 있는 체념과 냉소는 노동운동의 이러한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후퇴와 혼돈의 이면(裏面)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지난 5년간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왔는가 하는 자책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열심히 했습니다.

거대한 힘으로 뒤로 구르고 있는 이 반동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기에는 우리의 힘은 당장은, 당장은 당랑지력(螳螂之力)처럼 무력한 그것일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그러나 결국은 해낼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역사라고 자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러한 각오로 임하고 밀어붙입시다. 그렇게 밀어붙입시다.

그런데 그렇게 밀어붙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문제의식을 다시 새로이 해야 할 것입니다.

운동이 왜 이렇게 지체되고 후퇴하고 있는지, 목적의식적으로 그 원인을 찾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찾는 노력을 합시다 ― 목적의식적으로!

우리가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긴장감을 잃고 게으르지는 않았는지? 타성적이지는 않았는지?

정세는 철저히 그리고 비판적으로 추적하고, 분석ㆍ대응했는지?

이론의 과학성은 끝까지 철저하게 추구했는지?

보다 더 치열한 사상적ㆍ이론적ㆍ이데올로기적 투쟁, 전쟁이 필요한데도 한 자락 속물근성 때문에 ‘진보 주류’, ‘진보적 지식인들’의 시선과 평가를 타산하며 패거리주의에, ‘인품’에 굴복하지는 않았는지?

기본적으로 올바르고 과학적인 노선을 지향해왔지만, 혹시 협소한 ‘노동자주의적’ 의제에만 매달려 시야ㆍ문제의식의 전체성을 잃지는 않았으며, 그리하여 대중적 설득력과 친화력을 잃지는 않았는지? 최근의 예를 들면, 4대강 문제나 세종시 문제처럼, 범계급적ㆍ범민중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를 노동자계급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고, 해석하고, 싸우면서 그러한 과정 속에서,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세우고 강화하려는 노력은 성실히 해왔는지?

우리의 활동과 문제의식을 보다 많은 활동가, 대중 속에 재생산하고 확대재생산하는 방법ㆍ방안은 진지하게 모색하고 시도해왔는지?

저 자신은 이들 문제에 대해서 부끄럼 없이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우리 사회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상황을 둘러보십시오. 타락했다는 말이 적절할 만큼 이 혼돈에 빠져 있는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상황을 볼 때. 저는 바로 우리의 어깨, 우리 연구소를 포함한 우리 주위의 선진적 분자들의 어깨 위에 커다란 사회적ㆍ역사적 임무가 주어져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리하여 위의 문제들에 우리 모두가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자신 있게 대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반동의 수레바퀴를 멈추는 일은 그만큼 더 더디고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창립 5주년을 맞는 이번의 총회가, 바로 우리가 이들 문제의식을 다시금 새롭게 하고, 목적의식적으로 운동의 정치적 정체ㆍ후퇴의 원인을 찾아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 각오를 다시 다짐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노사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