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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기타 >
제목 ≪자본론≫ 1권 강독 후기
글쓴이 노은호|≪자본론≫ 1권 읽기 쎄미나 팀원 E-mail send mail 번호 482
날짜 2012-09-20 조회수 2077 추천수 67
파일  1348131683_c.hwp

  

























1841년 4월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마르크스는 교수직으로서 직업적 꿈을 이루길 바랐지만, 1842년 5월 브루노 바우어가 국가나 종교의 기반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대학교에서 완전히 해임된 후에는 영영 그러한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 사이 마르크스는 1842년 3월부터 ≪라인신문≫에 기사를 써오고 있었는데 1842년 10월에는 신문사 사주인 헤스의 권유로 ≪라인신문≫의 편집장이 된다.










이때 라인 주는 사유지 숲에서 나뭇가지나 잔가지들을 긁어모으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구금하는 법을 제정하는데, 이것이 마르크스에게 경제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최초의 동인을 제공한다. 이 기사를 준비하면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1)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책을 탐독한다. 정치경제학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생시몽, 시스몽디, 샤를 푸리에, 프루동, 루이 블랑과 로버트 오웬, 제임스 밀 등을 읽었다. 이 때 마르크스는 경제학이 다른 모든 사회과학의 기반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그 어느 것도 경제 법칙과 유물론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자신을 엄습했던 이러한 의문의 해결을 위한 첫 번째 시도의 작업으로서 헤겔법철학 비판에 착수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법 관계들과 국가 형태들은 시민 사회라는 이름 아래 그 총체를 총괄하고 있는 물질적 생활 관계들에 뿌리박고 있으며, 시민 사회의 해부학은 정치경제학에서 찾아져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가 1843년 여름이었는데, 6월에 막 결혼을 하고나서 예니와 함께 바트크로이츠나흐에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이후 1843년 10월 마르크스는 파리로 갔고 아르놀트 루게와 함께 이듬해 2월 유일한 창간호인 ≪독불연보≫를 간행한다. 1844년 초여름 무렵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비로소 고전경제학의 위대한 이론가들이 세운 개념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에 뛰어드는데 프로이센 숲의 나무 도둑들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경제학 분야에서 읽은 것들이 너무 개략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때 완성한 글이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이다. 이 무렵 ≪독불연보≫가 잘 안 되면서 마르크스는 1844년 5월에 파리에서 발행되는 독일인 신문인 ≪포어베르츠≫에 프로이센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기고하는데 프랑스 내무부는 독일황제의 요청으로 ≪포어베르츠≫의 편집자들과 기고자들의 추방을 명령한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는 1845년 2월 파리를 떠나야 했고, 브뤼셀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시작한 정치경제학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토대와 상부구조, 생산력과 생산관계, 경제적 생산조건과 물질적 변혁 등 유물론적 역사파악 등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에 도달한다. 이때 1845년 9월 무렵 엥겔스와 공동작업의 결과가 ≪독일이데올로기≫이다.










1848년 3월 벨기에 정부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어긴 망명객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에서 마저도 떠나야 했고 프랑스에 잠시 머물다가, 4월 쾰른으로 가서 ≪신라인신문≫의 대표 편집인이 된다. 1849년 5월에는 ≪신라인신문≫이 정부의 폭력적 전복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프로이센 정부가 마르크스에게 추방을 명하자 5월 18일 ≪신라인신문≫은 폐간호를 발행했고, 6월 마르크스는 파리로 갔다가 8월에 파리에서 런던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영주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중단된 마르크스의 경제학 연구는 1850년에야 비로소 런던에서 재개되는데 대영 박물관은 마르크스에게 정치 경제학의 역사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마르크스는 영국에서 경제상황, 물가 및 공황에 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도서관에서 그는 화폐, 임금, 자본, 투자, 노동자의 생활 조건 등을 연구했으며 아침 일찍 그곳에 가서 저녁 7시까지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은 후 담배를 피우면서 책상에서 연구를 했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점점 더 열정적으로 경제를 연구했다.










그러던 중 마르크스는 생계 때문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기고를 하기도 하고, 또 인터내셔널에서 정치 활동을 하면서도 꾸준히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며 원고를 집필한다. 1857년 무렵에는 정치경제와 관련된 자신의 책에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한 기본개요≫라는 제목을 붙일 작정도 했다. 1858년 2월 2일자의 라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책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작품 전체가 ①자본, ②토지 소유, ③임금 노동, ④국가, ⑤대외 무역, ⑥세계 시장의 6부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1859년 1월 21일의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서문에서 ①자본을 다루는 제1권의 제1편이 1. 상품, 2. 화폐 또는 단순 유통, 3. 자본 일반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특히 이 부분이 나중에 쓰일 ≪자본론≫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2) 1859년 1월 15일자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화폐에 관한 원고가 마침내 완성되었고, 이 책은 노동과 자본에 관한 책보다 먼저 출간될 것이라고 알린다. 즉 전체적인 제목은 ≪자본론≫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자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으며 오로지 1. 상품, 2. 돈 또는 단순유통, 이 두 장만 포함된다고 말한다.










1861년부터 1863년 사이에 마르크스는 이전의 경제학자들의 ‘잉여가치이론’을 자세히 연구해 1,500페이지 분량의 저서를 집필할 것을 계획하는데 이 원고는 20세기 들어와 ≪잉여가치학설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1862년부터 1863년 사이의 겨울 동안 마르크스 일가의 물질적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마르크스는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찾을 생각까지 했다. 그는 철도사무소의 일자리에 지원을 해보았으나 그의 알아보기 힘든 필체 때문에 허사가 되기도 했다. 1863년 여름 내내 마르크스는 최악의 상태였다. 옹, 두통, 폐질환, 간질환 등이 점점 더 빈번하게 출현해 한 달 이상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고 일을 할 수가 없었다.










1864년 9월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이 무렵 4년 동안 중지 상태에 있는 대작 집필을 다시 시작했고, 그 책의 제목을 ≪자본론≫으로 결정한다. 1864년 11월 29일 마르크스는 쿠겔만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본에 관한 내 책이 내년 말에 완성될 것”이라고 썼다. 1864년 12월 ≪자본론≫ 세 권의 전체 초고가 완성되었고, 1866년 9월에는 ≪자본론≫의 제1차분 원고를 마이스너출판사에 보내게 된다. 1867년 9월 14일 드디어 ≪자본론≫ 1권이 출간된다. 마르크스가 젊었을 적 ≪라인신문≫에서 일 했던 이후로 줄곧 품어온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과 연구가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상 ≪자본론≫ 1권을 강독한 후기를 쓰기로 했는데, 마르크스에 관한 짤막한 소개 글에 더 가까운 것이 되어 버렸다. 나는 무엇보다도 ≪자본론≫ 1권의 저자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어떤 생각과 관심을 가졌었는지, 정치경제학을 연구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고, 그 때까지 삶의 처지는 어떠했는지, 저자의 삶을 함께 이해해 보고 싶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마르크스는 젊었을 적부터 품어 왔던 노동소외의 극복, 계급투쟁의 역사를 뿌리 뽑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역사적 사명, 잉여가치의 착취 소멸과 노동의 사회화를 통한 보편적 인간 해방 등 모든 관련된 문제들의 이해와 해결을 위해 현대 사회의 자본주의 정치경제를 철저히 해부해야 했을 것이다.  그 길고 험난한 작업의 결과가 ≪자본론≫ 1권의 출판이다.










≪자본론≫ 1권을 읽는 동안에 나는 부르주아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마르크스의 특유의 유머와 풍자, 촌철살인의 명료한 비판을 직접 체험하는 소중하고 즐거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또 다른 한편 이 천재적인 저자가 어려운 삶의 환경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작업에 매진했던 그 열정과 천재성에 무한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어떤 과학이 다 그렇듯이 ≪자본론≫이라는 저작 또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케인즈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경제적 관점에서도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에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고 적용도 되지 않는 낡아 빠진 경제 입문서다”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나는 케인즈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마르크스가 젊었을 적 생각했듯이 세계를 인간 해방과 노동 해방이 이루어지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천상의 세계로 만들고 싶다. 이 천상의 세계는 예전에는 신이 거주하던 피안의 영역에 세워졌지만 지금 우리는 현실적 운동으로서 바로 지금 여기서 그것을 이루려고 한다. 갈수록 광포화 되고 비인간화 되어 가는 자본주의 경제 공황의 세계 한복판에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갖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자본론≫이 그저 150여 년 전에 어떤 불순한 사상을 지닌 약간은 유명한 천재가 쓴 이해하기 힘든 경제 관련 참고 서적이 될지 아니면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론≫ 1권이 이제까지 부르주아 계급의 머리 위로 떨어진 폭탄보다 더 가공할 폭탄이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다.










이상 -끝- <노사과연>
















1) 정치경제학의 명칭은 ‘political economy'다.  그런데 경제학의 명칭에 붙은 ’political'이라는 형용사는 정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스어 oikos(집)와 nomos(규범, 법)의 합성어인 ‘economy'의 의미는 본래 가계의 경제를 규제하는 법을 뜻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가정경제라는 말이다. 이것이 규모가 커지면서 ’economy' 앞에 'political' 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 가정경제가 아니라 국가경제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2) 이것이 이른바 소위 ‘Plan 논쟁’으로서 ≪자본론≫이라는 저작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연구 전체의 계획에서 하나의 일부분을 차지할 뿐인 미완성 저작인가 아니면 독자적인 완결적 의미를 가지는 저작인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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