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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현장 >
제목 청송감호소 윤치고 동지와의 인터뷰
글쓴이 인터뷰 및 정리: 최상철(운영위원) E-mail send mail 번호 146
날짜 2010-08-12 조회수 2787 추천수 129
파일  1281747717_청송감호소 윤치고 동지와의 인터뷰.hwp

  







보호감호제의 문제점과 청송감호소 인권유린을 폭로해온 윤치고 동지와 관련한 내용은 이미 󰡔정세와 노동󰡕에 두 차례나 소개된 바 있지만 아직도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온 윤치고 동지의 삶과 이야기는 충분히 소개되지 못했다. 동지의 삶은 국가기구의 지속적인 폭력에 외로이 저항한 무산계급 인민의 자기 역사이며, 해방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의 투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생계에 쫓기는 윤치고 동지가 어렵게 시간을 내주어 다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동지에게 감사드리며 부족하지만 함께 싸워갈 것을 다짐해 본다. 또 󰡔정세와 노동󰡕 7・8월 합본호의 발행이 늦어지면서 신속하게 윤치고 동지의 인터뷰를 알려내지 못한 점에 대해서 죄송스런 마음을 전한다.





8월 4일 11시 15에 SBS <뉴스추적> 「범죄자. 그리고 두 개의 교도소」가 방영되었다. 청송교도소에1) 보호감호제로 살고 있는 한 수감자가 ‘형기를 마치고도 오지의 교도소에서 속수무책으로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다’는 편지를 SBS가 입수하였고 이를 통해 취재하였다는 것이다. 방송을 통해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2) 윤치고 동지를 비롯한 청송감호소 출신 인사들과 인권운동가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2005년 8월 4일 「사회보호법」이 폐지되어 보호감호제는 법적 근거를 잃었다. 그럼에도 법무부의 ‘경과 규정’을 통해 사실상 보호감호제를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수감자 96명이 아직까지 보호감호제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고 최근에는 또 다시 알몸검색3)까지 받고 있음을 방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2003년 6월 8일에 방영된 MBC 「소리없는 사형선고, 청송감호소」 등을 통해 청송감호소 보호감호제 때문에 벌어진 인권유린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방송과 일련의 대중적 폭로를 통해 청송감호소 안의 끔찍한 폭력과 보호감호제의 문제를 널리 알 수 있게 되었다. 사회와 철저하게 격리된 감호제 때문에 출소 이후에 공중전화 사용도 제대로 할 줄 몰라 사회복귀에 심각한 제약을 겪고 있는 모습, 출소 이후에도 또 다시 범죄를 하게 되는 모습 등을 통해 보호감호제란 ‘교정・교화’를 대책없는 격리로서 대체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보호감호제가 아직도 ‘경과 규정’ 때문에 살아 있음에, 또 이귀남 법무부 장관과 형사법개정특별분과위원회(위원장 이재상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통해 다시 법적으로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에 분노하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후퇴하는 감옥 인권 문제에 대한 변혁운동 진영의 대응이 미약함은 우리가 끊임없이 극복해야 하는 자화상일 것이다. 인권의 문제를 순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문제로 치부하고 이에 대한 모든 투쟁을 포기하는 사회주의자가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작금의 현실을 통해 윤치고 동지의 표현대로 ‘자본주의 자체가 범죄’임을, 그리고 부르주아 법치국가와 인권은 양립할 수 없음을 재확인했다. 이 땅의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고 진정한 인권의 가치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싸워가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주석은 모두 인터뷰 정리자의 것이다. 또 이제까지의 윤치고 동지와의 인터뷰 기록과정에서 오류가 있다면 전적으로 정리자의 책임임을 밝힌다.)  










얼마 전 양천경찰서에서 고문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윤치고: 대구 갱생보호소 출신 친구들이 양품점을 도둑질 하는데 망을 봐주고, 그 댓가로 쌍방울 속옷과, 내복, 쾌남 스킨을 얻은 적이 있다. 그 친구들이 먼저 강도 절도로 잡혀 들어왔고 나는 망을 봐주고 속옷을 얻었는데 잡혀서 강도, 절도로 몰렸다. 그래서 1986년 당시 부산 동부에서 서부경찰서로 이송이 되었는데, 거기서 완월동 인신매매단에 걸린 여자를 도망치게 해준 과거를 이유로 고문을 바았다. 알다시피 부산 완월동은 허가된 공창4)이나 마찬가지였다. 부산 서부경찰서는 완월동에서 먹여살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기가 막히게도 깡패들, 인신매매단이 여자들을 빼돌린 게 나라고 지목했고, 그들과 경찰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고문을 당하였다. 인신매매단에 끌려온 여자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고문을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당시 형사들은 죄명은 공범이 다 불었으니 필요없고 오직 그 인신매매단에 걸린 여성의 행방만을 물으며 고문했다.





그리고 청송감호소 1감호소에 있을 때 88년도인가 89년도인가 당시 경찰들을 고소했다. 그런데 무혐의 처리되었다. 이 때문에 부산까지 갔다 왔는데, 인신매매단에 걸린 여자를 구해주었는데 표창장을 주지는 못할망정 고문을 시켰다니까. 검사한테도 그렇게 얘기했다. 당시 고문 형사들은 오히려 검사 앞에서 “니 부산 내려 오지 마라”하면서 공갈을 쳤다. “윤치고 니 나오면 보자. 부산에 있나 못 있나”며 폭언을 했다. 당시 검판사들은 고문당했다고 해도 잘 듣지도 믿지도 않았고, 심지어 어떤 판사는 “죄 지었으면 고문 당해야지” 하고 말하기도 했다. 그나마 고문당한 것을 참작해서 형을 좀 빼주면 다행이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억울한 기억에 수 차례 헛웃음을 내뱉으셨다.)










당시 구해준 여성은 어떤 분들이었나?










윤치고: 충무 여자하고 서울 여자 둘이었다. 나이는 대략 26에서 27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찰서에 깡패와 포주가 와서 나에게 ‘이 사람이다’ 하면서 가르쳐줬다. 그 때 저녁에 엄청나게 고문을 당했다. 내가 도망시켜줬는데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나쁜 놈들이다.










이것 때문에 무고죄를 뒤집어 쓰시지는 않았는가? 당시 가해자의 이름은 기억하는가?










윤치고: 아니다. 그냥 고문에 대한 무혐의 처리로 끝났다. 내가 고소를 했으니 가해자의 이름은 어딘가 기록이 있을 텐데 아마 집에 있던가 싶기도 하고 당장은 확인이 안 된다.





그 당시에는 절도, 강도와 같은 범죄자들은 잡히자마자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보면 된다. 고문은 일상적이었다. 이 사람들(경찰: 옮긴이)은 건수를 올려야 되기 때문에5) 한 번 걸리면 그 동네의 범죄는 다 뒤집어 씌우려 했다. 고문에 장사가 없다. 고문을 안 당하기 위해서 팔과 배를 긋는 이도 있었다.










고문을 안 당하기 위해서 자해를 했었다는 뜻인가?










윤치고: 그렇지. 나도 그렇게 했었다. 징역보다 고문이 더 겁났다. 고문을 당하면 안한 것도 했다고 할 지경이 된다. 옛날에는 교도관이든 경찰관이든 왜정시대 때 있었던 고문을 물려받아 그대로 했다.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기 같은 고문들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당시 고문은 경찰서 내 지하실에서 주로 자행되었다. 탁구대, 당구대가 놓여있는 일종의 휴게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고문을 주로 했다. 퇴근 이후 관련자들만 조를 짜서 진행되는 형태였다.










이번에 CCTV로 드러난 고문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완화된 형태일 것이지만 고문이 다시 공개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고통스러운 기억이겠지만 당시에 어떤 고문을 받으셨는지, 어떤 형태의 고문이 진행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윤치고: 발바닥 등 온몸을 뚜드려 패는 것은 기본이고, 냉면 먹다 남은 고추냉이와 고춧가루를 물수건에 묻혀 코에 씌웠다. 전기 고문6) 같은 경우는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와 같은 습기찬 곳에. 심지어는 요도를 쑤시기도 하였다.





정치범이 아닌 이들에 대한 고문은 ‘범죄’라는 약점이 잡혀있기 때문에 더 일상적이며, 잔인하다. 형사들이 약점을 잡은 여성을 여관에서 윤간한 일도 있었다. 경찰들은 합법적인 범죄를 자행하는 것이다. 떡검도 마찬가지다. 구속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만약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그랬다면 뇌물수수, 성매매 특별법으로 구속되지 않느냐.










감옥에서의 교화과정에 대해서도 말씀해달라.










윤치고: 꼭 한 마디 하고 싶다. 종교로 교화하려고 하는데 소용없다. 종교 자체가 자본주의 아닌가. 그 자체가 죄악이다. 청송에 있을 때 개신교, 불교, 천주교 등 종교 집회가 있었다. 나는 나가지 않았다. 결박되어 독방에서 개밥 먹을 때 징벌이 두 달이라면 성경책을 봐야 징벌을 좀 감면해주는 거야. 한 10일 15일, 나는 그러지 않았다. 꼬박 묶여 있었고 풀어주지도 않았다. 두 달을 거의 채우고 며칠 전에 풀어주더라.










보호감호소 안에서 노동과정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윤치고: 그거는 내가 거의 일을 안해서, 나는 오랜 독방에만 지내야했다. 내 옆에 대도 조세형 씨가 있었다. 나도 훈련 형식으로 노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훈련 자격증이 있어야 빨리 나갈 수 있다고 해서 진행되었다. 정비공장에 3급 자격증 하나 따려고. 거기서 입소자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폭동이 일어났다. 교도관을 인질로 잡아서. 당시에는 인권이란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비대 400명이 완전무장해서 진압을 시작했고 결국 나는 독방에 갇혀야 했다. 청송에는 당시에 경비대 본부가 있어서 전국에 다 배치했었다. 제일 앞에 있다가 최루가스에 맞아 기절했다. 하루 종일 뚜드려 맞고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그걸로 1년 동안 독방에 있었다. 청송 출소 이후 당시 청송 소장, 보안과장을 고소했다가 무고죄로 원주에 수감된 이야기는 저번에 했고.










안에 있을 때 치료과정은 어떤 식이었는가?










윤치고: 의무과에서 행정을 담당했는데 치료를 받는다기 보다는 형식적인 것이었다. 의무과장이 산부인과 출신이었던 적이 있는데 산부인과 출신이 내과도 하고 외과도 하고 치과도 하고 이거는 짬뽕으로 전문성이 없다. 재소자들 감호자들이 알아서 주사놓고 교도관들도 주사놓고 그러다 쇼크사로 죽은 이도 있었다. 그런 것들이 밖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오랜 감옥과 보호 감호생활 동안에 샤워는 어떻게 하셨나










윤치고: 60-70년대에는 이가 있고 위생상태가 엉망이었다. 80년대에는 좀 나아졌는데 독방에 물이 나와 그나마 좀 나았다. 물은 나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을 때도 있고 계속 나올 때도 있었고. 실질적으로 좋아진 것은 김대중 이후부터라고 보는 게 맞겠다.










최근 언론에서 아동 성폭력 범죄를 비롯한 흉악범에 대한 보도가 증가하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사형제 폐지가 아니라 거꾸로 중단된 사형집행을 되살리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윤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사실상 큰 범죄는 예전에 사형을 집행할 때 더 많았다. 75년에 17명을 죽인 김대두 연쇄 살인사건, 하룻밤 새에 56명을 죽여 세계 10대 살인 사건에 오른 바 있는 82년 우순경 사건, 도끼로 6명을 죽인 63년도 고재봉 사건, 94년 지존파 사건, 같은 해 온보현 사건, 막가파가 96년도 생매장도 했었고, 그리고 화성 연쇄 살인사건으로 10명 죽은 거7)... 이거 다 사형집행이 있을 때 사건이라고. 사형집행을 한다고 해서 범죄가 약화되고 이런 것은 없다. 나도 교도소에서 사형수와 많이 있어봤는데 사형당할 거니 더 악랄하게 하고 간다는 심리는 오히려 많이 있는 거야. 사형이 있고 없고 여부는 범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본주의 자체가 인권을 말살하고 자본주의 자체가 범죄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미국의 자본주의다. 미국이란 나라 전체가... 초등학교에서 자기 반 친구를 총으로 쏘는 일이 일어나는 나라는 미국 뿐이다. 그런 미국을 본 땄는데 범죄가 안 일어날 수가 있겠는가.










극악한 인권유린적 요소 때문에 폐지되었던 보호감호제를 다시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청송감호소의 인권유린을 고발하신 윤치고 동지께서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윤치고: 내가 청송감호소에서 출소한지 10년이 넘었는데, 나와서 사회생활 해보니까 청송 감호소에 갈 사람은 (이 부분에서 그대로 써달라며 강조하심) 이명박이 하고 스폰서 검사, 법무부 장관, 한나라당 의원들 이런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야 말로 진짜 죄를 너무 많이 짓는다. 걸핏하면 전쟁일으킬라고 하고. 전쟁 일어나면 저거는 미국 다 도망간다. 총도 안 쏠 것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청송에 가야지 배가 고파서 빵 훔치고 라면 훔치고 도둑질 한다고 청송감호소에 보호감호로 연장받아 오래 살고 이런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전쟁은 사람을 말살시키는 것이며 큰 죄다. 옛날 6.25 때도 이승만이도 저거는 낙동강에서 무너졌으면 도망가려고 수영비행장에 비행기도 대기시켜놓았다. 이명박도 마찬가지다. 이중국적을 허용하려는 친일파 한나라당은 전쟁나면 미국으로 가버리면 끝 아닌가. 남아 있는 사람만 다 죽어버린다. 민중들에게 도둑질하고 세금 떼어먹는 것들이. 전쟁일으키려 하고 민중들에게 사기치는 것들이 청송에 가야한다.





보호감호제라는 자체는 잘못이다. 이중처벌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다. 법을 어겼다면 그 법에 따른 처벌을 하면 되는 것이지 재판도 없이 자기 멋대로 감옥생활을 연장시키는 것이 보호감호제다. 보호감호로 수용되는 이들은 대다수가 서민들 출신이다. 강자들이 이런 제도를 만들어 놓고 외부적으로 좋은 명분만 걸어 놓는다. 실질적으로 나쁜 놈들은 청송에 가지도 않는다. 청송보호감호소가 부활한다고 해서 범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범죄를 없애려면 사회주의 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이 말 꼭 써달라.















미국은 인권을 말하며 세계 각지를 침략하지만 오히려 미국의 인권이 형편없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윤치고: 그렇지. 세계적으로 범죄도 제일 많고, 살인도 제일 많이 하고. 감옥에 간 인구도 많고. 그런 나라를 배운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이명박이도 자기 나라에서는 큰 소리치는데 밖에 나가서는 미국에 쩔쩔매고... 





이명박이는 원래 고향이 일본이고 현대 건설 노가다 십장이고 사기나 치던 그런 놈이다. 그러니 천안함 사건 같은 조작과 사기도 계속된다. 그러니 미국은 좋다지.















이명박이 인권을 군사정권 시절로 되돌리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싸워야 하겠는가










윤치고: 이명박이가 들어올 때 한나라당이 들어올 때는 인권이 후퇴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그 뿌리가 자유당, 박정희 아닌가. 그 사람들이 다 박정희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고대 나온 이명박이가 박정희에게 목숨을 구걸해서 현대건설에 들어갔잖아. 데모 안하겠다고 충성서약을 했지 않는가. 박정희를 아버지로 생각하고 배우고 정주영한테도 배우고. 거기서 순 사기치는 것만 배웠지 않는가.





인권 문제는 야당 쪽에도 문제가 있다. 첫째는 단결이 안 된다. 시민단체고 야당이고. 너무 안일한 대처를 하더라.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한나라당 밀어붙이는 식으로 우리도 그거 반만 하면 된다. 투쟁을 하는지 마는지 걸핏하면 뭐 하다가 말아버리고. 끈기있게 밀어붙이자 이거야. 이명박이가 4대강 밀어붙이는 식으로 우리는 왜 밀어붙이지 못하는가 이거야. 야당이 왜 못하냐 이거야.










동지께서는 한나라당에 대한 공격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시각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야당은 한나라당을 제대로 공격할 수 없는 세력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민주당은 4대강 문제에서도 적극적이지 않은 것은 건설자본의 떡고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세력이기에 그렇다.










윤치고: 그렇지 의심이 가지. 겁을 내고 또 약점이 너무 많으니까.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이명박 정권 들어서 사회복지가 약화된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기초수급제도도 까다로워지고, 경제도 살린다더만 후퇴되고. 약자들이 굉장히 피해를 보고 있다. 부자들은 덕을 보는데.










대표적인 인권유린 악법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윤치고: 국가보안법은 한나라당의 명찰이다. 그걸로 밥 벌어 먹고 살았고 그게 없으면 유지가 안 된다. 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나라인데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말이 안 된다. 있는 자체가 문제다.










한국의 운동가들에 대해서도 하실 말씀이 많으실 텐데...










윤치고: 오랜 기간 이곳저곳 감옥생활을 하면서 양심수로 알려진 이들을 보았지만 대개는 ‘잡범’ 출신인 이들과 잘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쪽에서 그렇게 나오는데 나도 구태여 그들과 섞이려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약간 교류가 있었던 김문수 이야기와 장기수 선생님들 이야기8)는 저번에 했고, 청송보호감호소 소장과 보안과장에 대한 무고죄로 형을 살아 원주에 있을 때 당시 전국공무원노조 위원장이었던 권승복 동지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권승복 동지는 내가 감옥에서 만난 다른 정치범들과 달리 사람이 괜찮았다.










마지막으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윤치고: 내가 지나온 삶이 꼭 세상에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 나는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던 부산 형제 복지원에서 고아로 자라났다. 태어나서 눈을 떠보니 고아였다. 국제상사 고무공장에 다니다 17살에 없어진 물건에 대한 죄를 뒤집어쓰며 부산 북부경찰서9)에 끌려가면서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후 한 차례 더는 죄가 없는 데도 뒤집어 써서 감옥에 가야했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어울릴 수 있는 친구가 없어 서리꾼들의 망을 봐주다가 또 감옥에 가야했다. 먹을 게 없어 빵이나 라면 훔치는 것 때문에 감옥에 가고 또 보호감호 처분을 받아 사회와 격리된 채 그렇게 오랫동안 지내왔고 갖은 수모를 당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전과자라는 것 때문에 어디가서 내 이야기를 대놓고 하지 못한다. 내 이야기를 인터넷에 널리 퍼뜨려 달라. 나는 인터넷에 검색을 할 줄은 알지만 올리는 것은 아직 못한다. 내 이야기는 소설이 되어도 좋을 것이고 영화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이 땅에서 나와 같은 불행이 더 이상 없길 바란다. 양심있고 능력이 있는 이들이 꼭 소원을 이루어주길 바란다. <노사과연>






1) 청소교도소는 주민들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대한 항의 때문에 8월 2일부터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법무부가 공표한 「법무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 일부개정령」에 따라 청송교도소를 ‘경북북부교도소’로 바꾼다는 것이다.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삼청교육대, 보호감호제 등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역사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2) 방송에 대해서 아쉬운 면이 있는데 그것은 천안개방교도소와 청송교도소를 비교하면서 천안개방교도소의 장점을 부각하는 식으로 논의를 이끌어 간 점이다. 개방교도소 형태의 운영은 환영할 만한 지점이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교도소 운영은 전체 ‘교정・교화 시설’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모범수’에만 한정되는 것임을 좀더 꼼꼼하게 지적했다면 보다 바람직했을 것이라 판단한다.






3) 놀랍게도 보호감호 수용자가 아닌 성균관대 김명호 동지도 알몸검색을 받았다고 알려왔다. 현재 감옥 인권의 현실이 군사 파쇼정권 시절로 후퇴하고 있음을 분명해 보인다.






4) 1907년 경 일제에 의해 부산 완월동 지구는 집창촌으로 조성되었는데 당시의 이름은 ‘미도리마찌(綠町)’였다. 강제합방 이후 이 지역은 일제시대에는 합법적인 공창지구로 재편되었다. 해방이후에는 공창에서 사창으로 변경되었지만 1950년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여성들이 성매매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비극이 담겨있었다. 그 이후에도 국가 권력의 승인(혹은 묵인) 하에 대대적으로 성매매가 벌어졌던 곳이며, 한 때는 동양 최대의 성매매 지구로 알려진 바도 있다. 윤치고 동지의 ‘허가된 공창’이라는 표현은 이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과도한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현재 완월동은 ‘완월동 사창가’라는 부정적인 인식에 대한 주민항의로 인해 충무동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5) 이번에도 강북경찰서장 채수찬의 실적주의로 인한 처사가 고문과 같은 사태를 불러왔음을 내부고발(?)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CCTV도 없고, 인권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이니 얼마나 더욱 더 혹독한 인권유린이 있었겠는가.






6)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전씨 파쇼 정권 때 김근태에 대한 고문에 대해서 과장되었다고 변론한다.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지 말라 한다. (관련 동영상은 검색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후안무치함에 광우병에 걸린 소가 웃을 지경이다.






7) 녹취를 정리하면서 검색을 통해 연도 등의 정보를 재확인 했는데, 윤치고 동지는 이 사건들에 대해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화성연쇄 살인 사건의 경우 제 8차 살인의 범인만 밝혀졌고 나머지 9 건은 현재까지 미궁에 빠진 채 수사가 종결되었다.






8) 대구에서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을 만난 이야기와 김문수와의 인연 그리고 김문수의 화려한 변신을 바라보는 윤치고 동지의 소회는 󰡔정세와 노동󰡕, 2009년 2월호, 「<인터뷰>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청송감호소 인권유린을 세상에 알린 윤치고 동지ㅡ」를 보라.






9) 윤치고 동지의 말씀에 따르면 현재는 부산진 경찰서 관할 구역이라고 하는데, 현재 부산 북부경찰서와 부산진 경찰서가 둘 다 있다. 각각의 경찰서가 언제 설립되고 관할 구역이 어떻게 변했는가는 조사해보지 못했다.
















노사과연 네 수정했습니다. 2010-08-14 10:02:17
보스코프스키 이것도 첨부파일은 안 보이네요... 첨부파일도 등재요... 2010-08-12 17: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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