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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현장 >
제목 2010년 메이데이 집회와 노동자문화에 대한 고민 (1)
글쓴이 정은진|노동예술단 선언 “몸짓선언”, 자료회원 E-mail send mail 번호 145
날짜 2010-08-12 조회수 2818 추천수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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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을 보는 이들이 이리 많았던가? 2010년 수도권 메이데이 집회가 끝나고 많은 동지들이 집회 속에 한 부분이었던, 집체문선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오랜 활동 속에 무력감을 느끼던 동지가 눈물을 흘렸다고도 했고, 뒤풀이 자리에서 집체문선을 상기하면서 ‘나도 한 때 투쟁조끼를 벗었던 적이 있노라’1) 고백하는 동지들도 있었다고 한다. 듣자하니 꽤 많은 뒤풀이 자리에서 ‘집체문선’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물론 답답했던 2010년 메이데이 집회에 대한 신랄한 평가와 더불어.





‘집회가 짜증나서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갈 뻔 했는데, 마지막에 집체문선이 있어서, 그거 하나 덕분에 그래도 힘을 받고 갑니다’





그날 제일 많이 들은 말이다. 왜 우리의 힘을 모아내는 ‘집회’라는 공간이, 전반적으로 되려 힘이 빠지고 심지어는 짜증스럽게까지 되어가는 걸까?















2010년 메이데이 집회










이번 메이데이 집회 준비과정에서 기획하는 동지의 고민을 들었었다. 조합원들이 잘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발언을 최대한 줄이고 문화판 중심으로 만들어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런 고민에 대해 늘 반복되는 똑같은 얘기들이 질린다며 환호하고 기대하는 동지도 있었다. 하지만 집회 후 평가는 좋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장소, 예상치 못했던 민주당 등의 발언, 투쟁현장발언이 없었던 것, 문예공연...  다양한 평가지점이 있겠지만 먼저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투쟁상황을 짚어보자.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2009년 12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개악안 통과시 곧바로 총파업 돌입!’을 선포했다. 하지만 총파업은 없었다. 2010년 3월에는 민주노총 중집에서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근심위) 참여를 결정하면서 한편으론 4월28일 총파업투쟁과 메이데이로 이어지는 투쟁의 국면을 선포했다. 이후 중집에 의해 다시 총파업은 유보되고, 5월1일 새벽 근심위에서 타임오프제는 강행처리 되었다. 그 흐름 그대로 그나마 6월로 유보되었던 총파업도 5월13일 중집에서 폐기되었다.










때마다 분노하며 목청 높였더랬다. ‘정부가, 한국노총이, 민주당이 뒤통수를 쳤다! 참을 만큼 참았다! 좌시하지 않겠다!’





하지만 총노동의 전열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민주노조 깃발을 움켜쥐고 싸우는 것은 몇몇 현장의 몫으로 떨어졌다. 개악법에 대한 공동의 투쟁은 일단 사라지고 각 현장상황에 따라 각각 대응하기 바빴다. 현재는 조용하거나 버거운 싸움 속에 있다. 총투쟁의 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공통분모는 더 작아졌다.










메이데이는 이런 흐름 가운데 있었다. 이틀 전에 총파업이 유보되었고, 당일 뒤통수(?)를 맞은 날의 집회.





허나 분노로 치를 떨고 실천투쟁으로 뭔가 돌파구를 만들어낼 것이라 생각하며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온 동지들이 과연 있었을까? 투쟁의 날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물론 투쟁의 목소리를 내는 동지들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런 과정을 거쳐 흘러온 총연맹 집회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뭔가 하고자 해도 별반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당일 집회 내용도 분노를 끌어내 투쟁으로 조직하려는 노력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고 두리뭉실한 발언과 지방선거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투쟁을 조직하고 현재의 국면을 돌파하려는 진심은 느끼기 어려웠다. 순간 눈과 귀가 즐겁고 웃었을 수는 있었을 런지 모르지만 참으로 공허했다.















투쟁과 집회, 문예공연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의 집단으로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집회, 문화제는 때마다의 목적과 형식은 다를 수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착취계급의 단결의 공간이고 힘을 모아 함께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헌데 투쟁의 계획과 의지가 채워지지 않는데 대오가 집중하고 좋은 분위기로 가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문화제 기획을 제안받고 노동조합의 간부들과 만나면 대부분 처음 하는 말이 판을 아주 쌈빡하게 짜달라는 거다. 그럼 일단 동지들에게 묻는다. 이번 투쟁, 어떤 고민 속에서 계획하고 있고 현장의 분위기는, 집행부의 의지는 어떤지? 그리고 얘기한다. 그에 따라 문화제나 집회의 분위기도 달라지는 것 아니겠냐고...










물론 그렇다고 투쟁이 제대로 조직되지 않으면 감동적인 문예나 발언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은 좋지 않아도 그 만큼의 조건 속에서 진심으로 동지들의 마음을 울리는 판도 만들어낼 수는 있다.





상부구조가 일정한 상대적인 자립성을 가지고 토대에 대해 능동적인 반작용을 미치듯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 상호 간에 연관되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은 투쟁과 집회, 문화제라는 내용과 형식에서도 결코 다르지 않다.










능동적 작용에 대한 동의가 있었기에, 선언에서는 2010년 수도권과 부산에서 메이데이 집체문선을2) 연출했다. 많은 현장 문화패 동지들이 함께했고 우리 운동의 현재를 나누고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우리 모습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다시 투쟁하자는 우리의 진심이 통했는지 대오의 집중과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정말 많은 동지들이 집체문선으로 힘받았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집체문선에 함께했던 동지들과 평가를 진행했다. 15분 정도의 짤막한 문선이지만 전체 집회와 더불어 함께 평가를 진행했다. 수도권의 경우 집회 내용에 대해 끝까지 확인하고 문제제기하지 못한 것에 대한 평가, 전체 집회 준비와 부딪쳤던 부분 등에 대한 평가가 있었다. 또 오히려 적나라하게 민주노총의 결의수준이 드러나고 그에 따른 신랄한 비판을 받았어야 하는데, 우리의 문선으로 인해 집회가 그럭저럭 반성하고 투쟁하자는 내용을 그래도 가지고 마무리 되어 집행부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닌지 하는 솔직한 우려도 있었다.















집회 = 이벤트?










다양했던 투쟁의 공간이 점점 좁아진다. 좁아진 공간에 몸은 맞춰져 가고, 뚫고 나가려는 노력보다는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 당연시 되어간다. 갇힌 공간에 있는 좁은 무대에선 애써 준비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자연스레 그곳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여기서 다시 시작해 현장으로, 거리로 투쟁을 넓혀갈 가능성도 있건만, 일단 그 판을 주재하는 단위가 계급성을 잃어가면서 그 무대도, 집회도 본래의 성격을 잃어간다. 대중들은 점점 수동적이 되고 집회판은 이벤트인양 치러진다.










일상 시기에는 집회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좀 더 전선이 뚜렷하게 보이는 집회에서는 이벤트화된 집회의 패악이 드러나기도 한다.





‘끝장 단식투쟁을 진행하는 장기투쟁사업장에 힘을 모으기 위한 집회에서 펼쳐진 트로트와 춤’ (2008년 “기륭분회 투쟁 승리를 위한 금속노동자 결의대회” 중)





‘삶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전쟁터와 같은 현장에 생수 한병 들여보내지 못하고 멀리서 소리만 지르길 반복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코믹한 문예공연과 싱거운 농담’ (2009년 “쌍용자동차 투쟁 승리를 위한 민주노총 결의대회” 중)










상황과 동떨어져 흥미위주로 준비된 요소들은 도리어 투쟁대오의 힘을 빼고, 적들에 대한 분노와 투쟁의 의지를 노동운동 내부에 대한 짜증과 회의로 바꿔버리곤 한다.





물론 극한투쟁의 상황이라고 해서 늘 심각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기마저 투쟁상황에 대한 적극적 판단이 빠진 공연물이 배치된다는 건 그만큼 집회, 문화,  투쟁, 운동 자체에 대한 고민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얼마전 나름 인터넷을 달구었던 일 하나를 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행사’ 때 국가보훈처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빼고, ‘방아타령’ 연주를 검토하는가 하면,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 측이 조화가 아닌 축하화환을 보냈다. 실수였고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 하고, 이후에 국가보훈처에서 해명하는 글을 내기까지 했지만 결국 기념식 당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유가족들은 기념식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배제되었다.





이를 두고 ‘무개념’ 정부라는 말이 많았지만, 뭐 그들이 민중의 개념이 있으면 그 자리에 앉아 있겠는가? 그들의 실수(?)는 사실 본질을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다. 이명박 정권과 같이 상대적으로 투명한 지배계급들은 5.18 민중항쟁을 기념할 만한 역사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주재하는 단위의 생각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앞으로 한발짝 나아가야 하는 위험하지만 절박한 시기에 진행되는 ‘생뚱맞은 집회’의 반복은 어쩌면 주체들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암튼 ‘방아타령’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인터넷 실시간 검색 순위에도 올랐고, 많은 관심과 비판을 받았다. 그에 준하는 투쟁으로 폭발되진 못했지만 각기 다른 자리에서 여러 사람이 뜻을 모아 부른 감동적인 ‘임을 위한 행진곡’3)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등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냈다.










운동을 하는 누구라도 이 일에 대해선 문제의식을 가지고 얘기했을 것이다. 저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얘기할진데,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서는 말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집회를 자주 하는 우리는 전문가답게(?) 자꾸 관성화되어 가고 있다. 집회가 이벤트 같이 되어도, 공연에 성을 상품화하는 요소가 있어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젓는 필살기 정도로 넘어간다. 그러다보니 이런 문제들이 전체로 퍼지듯 스며드는 것이고, 정신차려보면 우린 절박한 투쟁의 날에 이상한 집회를 하면서 그냥 앉아 있는 게다. 










얼마전 한 노조의 문화담당자를 만나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들었다. 스스로 그 노조의 집회 연출권을 가졌다는 사람의 말이다.





‘우리가(++노조가) 집회 하면서 박준도 사고, ***도 사고...’





인간의 노동력마저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를 뛰어넘고자 투쟁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지향이 같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자본에 맞서 싸우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 아니었던가?










집회의 이벤트화는 단순히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짜증나는 행사로의 전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집회의 이벤트화는 그 내용을 흐트러지게 할 뿐 아니라 집회를 준비하고 함께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구조화한다. 운동단위들 내에서 자본주의적 질서를 재구성해낸다. 흥행(?)여부, 볼거리 제공이 집회기획 담당자의 업무가 되고, 그 속에서 문예일꾼들은 상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결국, 평등과 해방을 위한 우리의 투쟁을 갉아먹는 요소가 될 것이다. 심지어 노동자 문화를 담당한다는 사람의 생각이 이러하니... 해방투쟁의 길이 정말 멀고도 험하다.















바꿔 바꿔?










집회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몇몇 담당자의 업무로 미뤄지는 한 그 고민은 단편적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발언이 많다’, ‘재미없다’, ‘식상하다’...





집회에 대해 흔히 하는 말이다. 여기서 시작해 근본적인 고민까지 간다면 투쟁과 집회가 연결되고 그 속에서 발전적인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런 어려운 길보다는 좀 더 쉬운 방향으로 정리되곤 한다.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










물론 새로운 방법들은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이 새로운 것일까?





2008년 11월8일, 핫팬츠를 입고 가요챠트 1위를 달리는 상업가요의 춤이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 무대에 올려졌다. 집회에서 새롭고 신선한 것을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만난 다수의 조합원들은 오히려 당황스러워했다. ‘노동자의 딸들’이라 소개하면서 보여진 공연의 내용이 성의 상품화라는 측면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도 당황스러웠고, 좀 더 시민과 함께하기 위한 대중적인(?) 공연이었다는 주최 측의 의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본  네티즌들 중엔 오히려 황당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굳이 투쟁의 공간에서도 그런 공연이 필요한 걸까? TV, 인터넷, 심지어 거리에서도 눈만 돌리면 너무나 쉽게 볼 있는 것 아니던가?










개그프로그램이나 연예방송과 같은 재미를 기대하며 집회에 오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자본주의적인 자극점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건 오히려 해방의 길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는 지도부나 집회가 하나의 형식적인 업무가 되어 버린 실무자들이지 않을까?





그런 방법으로 대중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은 오히려 노동자 계급의 문화를, 투쟁을 병들게 할 뿐이다. 계급의 분노와 눈물, 웃음을 모아 투쟁하는 것이 아닌 잠깐의 대중의 흥분을 위한 것이라면 노동자 문화가 왜 필요한가? 차라리 자본이 그 엄청난 힘으로 만들어낸 화려한 상업문화를 보러 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우리 역시 자본주의의 공기를 마시며 일분일초 살아가기에 무엇이 자본주의의 찌꺼기인지 쉽게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권위적인 모습들, 불평등, 몰계급적인 요소들을 찾아내고 하나씩 제거해갈 때, 우리의 집회는 운동의 힘을 모으고 발전시켜낼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자본의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 아닌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노동자의 문화, 계급의 문화를 만들고 해방의 길을 앞당겨 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의 그림에서 노동계급은 자신을 재발견하였다.’― <케테 콜비츠>










몇 년 전 한 대학교에 민주노조를 만들고, 계약해지에 맞서 투쟁을 전개하는 환경미화 노동자들을 만났다. 학교관리자들로부터 온갖 욕설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옷이 찢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함께한 문화제에서 아줌마가 아닌 동지로 소개받은 한 여성동지가 마이크를 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민주노조를 알고 투쟁을 알게 되면서, 나이 50에 다시 첫사랑을 하는 것처럼 두근거립니다.’





그 말을 들은 나도 두근거렸다. 투쟁의 시작,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 새로이 알게 된 것들, 새로운 세상.. 그 동지들을 처음 만난 자리였지만 공감할 수 있었고 다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투쟁하는 동지들의 생생한 발언에 공감했던 적, 가슴 찡했던 적, 울었던 적, 웃었던 적... 아마도 한번 씩은 다 그래봤을 것이다. 투쟁하는 현장에서 동지가 나와 마이크를 잡으면 귀를 기울이게 되고 평조합원이 나와 살짝 떨면서 하는 발언에 집중하게 되지 않는가? 쓸데없이 겹치는 허공에 뜬 발언이 많아서 그렇지 발언 자체가 식상하고 짜증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슴 아픈 삶, 그리고 처절한 투쟁, 동지애, 전투를 앞두고 느끼는 떨림, 폭력적으로 연행되면서 느끼는 서러움, 끌려가는 동지를 보며 느끼는 분노...’





이 속에 우리의 감동이 있고 힘이 있다. 그렇게 서로를 확인하는 속에서 일어설 힘을 얻고 단결과 연대, 해방의 필요를 느낀다. 왜 이리도 삶이 힘든지, 왜 이렇게 우리의 삶과 투쟁이 비슷한지를 보고 느끼면서 어떻게 바꿔야 할지까지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애써서 찾아야 한다. 자본이 자꾸 숨기는 모습들, 그것을 하나 하나 찾아내고 보여지도록 자꾸 앞으로 내보여야 한다.










한동안 ‘식상하다’는 말이 참 많았고 문예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상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표현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될 것 같고...





고민에서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하던 나에게 팀 선배가 질문을 던졌다.





“식상하다고 하는 것, 그 식상한 것들을 정말 제대로! 표현해본 적은 있니?”










그러고보면 무엇을 식상하다고 말했던 걸까? 문화담당자 교육을 진행한 자료들을 보면, 정세자료가 있고 또 집회와 관련한 다양한 방식이나 진행방법이 있다. 하지만 대체로 이 둘 사이에 어떤 연계나 총체적인 고민은 없고 따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집중시킬 것인가? 어떻게 재미나게 만들 것인가? 계속 무언가 짠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만이 문화담당자의 역할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최근 진행한 한 문화담당자 수련회 프로그램에는 마술을 배우는 시간도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얘길하면 ‘시간도 없는데, 선수끼리 왜 이래요~’란 말이 돌아온다. 참 쉽게 넘어간다. 하지만 기본적인 투쟁의 내용이야말로 오히려 제대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겨울 정도로 얘기해도 또 확인하고 연결시켜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집회에서 우리의 문예공연에서 우리의 발언에서... 우리가 왜 투쟁하고 있는지, 무엇에 저항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어버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한 그녀가, 그가, 내가 자신을 재발견하고, 우리를 인식해 투쟁의 힘을 얻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렇게 될 때 그 안에서 해방의 전망도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다음에 계속... <노사과연>






1) 2010년 수도권 메이데이 집회 때 올렸던 집체문선에는 투쟁을 멈출 것을 요구하는 적들과 그에 맞서 투쟁하다 처참히 탄압받는 동지들의 모습 또는 스스로 투쟁머리띠를 풀고 투쟁조끼를 벗고 결국엔 민주노조의 깃발마저 빼앗기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정세와 노동󰡕, 2010년 5월호에 실었다.






2) 󰡔정세와 노동󰡕, 2010년 5월호에서는 수도권 메이데이 집체문선만 소개했지만, 부산에서도 지역 율동패 ‘좌측통행’을 중심으로 메이데이 집체문선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 ‘선언’에서는 연출로 함께했다.






3)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6807 ‘임을 위한 행진곡’...트위터에서 합창 -





5.18 광주 기념 트위터 떼창...방아타령 반발해 직접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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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 2010년 메이데이 집회와 노동자문화에 대한 고민 (1)[1] 정은진|노동예술단 선언 “몸짓선언”, 자료회원 2010-08-12 2818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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