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장 국내의 정세를 보면, 이른바 ‘대권’을 결정하는 대선을 3개월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고, 눈을 들어 국제 정세를 보면, 1930년대 대공황과 그 귀결로서의 대살육과 파괴, 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ㆍ최장의, 또 하나의 대공황이 엄습하여 수십 년간 지속된 자본의, 독점자본의 일방적 지배가 도처에서 도전받고, 위협받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른바 ‘민중 주권’ 혹은 민중 집권, 민중 권력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각별한 의의가 있다 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이 포럼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은 것은 나로서는 과분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음에 약간 저어되는 바는 오늘 나의 발언이 혹시 이 포럼의 기획ㆍ조직자들의 목적ㆍ취지와는 상당 정도 어긋나는 게 아닌가 (물론 나는 바로 거기에 이 포럼에서의 나의 고유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하는 점이다. 내가 아는 한, 이 이른바 민중주권 혹은 민중권력의 문제와 관련한 담론은 이미 상당히 오래 전부터 국내에서도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것을 기본적으로 긍정적ㆍ적극적으로 평가ㆍ전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이 포럼 역시 그러한 전제 위에서 기획되고 조직되지 않았나 추측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포럼의 주최 측이 나에게 보낸 메일엔 이렇게 쓰여 있다.

포럼주제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은 하나는 올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열리는 이번 포럼에서 선거라는 절차가 시작되면 늘 무시되는 민중주권의 원리와 내용을 이론적으로 심도 있게 토론하고 실천적 경험을 풍부하게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중주권을 실현하는데서 관건이 되는 노동자ㆍ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어떻게 이루어내며 실제 선거에서 한 차원 비약하는 성과를 낼 것인가 하는 원칙과 방법론을 역시 전략적 이론의 토론과 실천적 경험의 공유를 통해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선거라는 절차가 시작되면 늘 무시되는 민중주권의 원리와 내용을 이론적으로 심도 있게 토론하고 실천적 경험을 풍부하게 공유하자”, “민중주권을 실현” ― 이렇게 되면, “민중주권”, 혹은 ‘민중권력’, 혹은 역시 주최측으로부터 받은 메일에 언급되어 있는 ‘진보적이거나 진보개혁적인 정권’이란 것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것이 된다.

과연 실제로 그러한가?

혹시 그러한 담론, 그러한 운동은 속류 민중주의(vulgar populism), 기회주의의 발로는 아닐까?

 *           *                 *

남미 등에서의 진보적인, 진보개혁적인, 혹은 민중적인 정권들의 등장은, 특히 베네수엘라에서의 볼리바르 혁명과 그 성과들, 그리고 그에 고무된 그러한 정권들의 등장은 물론 그 자체로서 대체로 긍정적이고 진보적이다. 특히 그 반제국주의적 성격이 그렇고, 신자유주의가 일방적으로 지배해온 장기간의 대반동기 속에서의 민중의 승리, 즉 민중의 의지가 제국주의와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지배계급, 지배세력들 ― 남미의 많은 국가들에서는 자본주의, 특히 독점자본의 지배가 지배적이지만, 봉건적 토지소유의 해체도 아직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을 극복ㆍ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메달의 한 면이다. 그 메달의 뒷면은 전혀 다른 그림과 글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베네수엘라를 포함해서 남미 국가들에서의 진보적인, 진보개혁적인, 혹은 민중적인 정권들의 성격과 그들의 ‘개혁’은, 예컨대, 쿠바에서의 그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컨대, 브라질의 룰라 정권처럼, 사실상 신자유주의와의 매끈한(seamless) 접합(joinㆍmergence)으로 나아간 경우는 도외시하더라도, 민중적 혹은 ‘사회주의적’ 개혁이 가장 진지하고 심도 깊게 추진되어 왔고 또 그만큼 거대한 성과가 있다는 베네수엘라에서조차 볼리바르 혁명이 전개되기 시작한 지 13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지배적인 생산양식은 자본주의이다!¹⁾

베네수엘라에 대한 국내ㆍ국외의 낙관적인 관측은 물론 베네수엘라에서의 상황의 전개를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비자본주의적 체제로의 이행”이라고, 그러한 이행과정이라고 평가한다.²⁾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비자본주의적 체제”라는 용어를 구사하고 있는 정치적 태도 혹은 의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그러할까? 과연 그러한 이행과정일까?

나는 솔직히 그러한 낙관적 관점에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지만, 역시 솔직히 그러한 낙관적 관점을 단정적으로 부인할 사실적 근거 또한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는 단정적으로 얘기하고 싶다.

첫째, 최근에는 그러한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지만, 한때 유행했던 것처럼, 베네수엘라에서의 볼리바르 혁명을 다른 지역ㆍ국가들에서의 운동ㆍ혁명에도 규범이 되는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식으로 전형화(典型化)ㆍ보편화 할 수는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혁명의 성과들을 충분히 높이 평가하지만, 그러한 성과는 여러 요인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달성된 것인데, 베네수엘라에서 그들 성과를 가능하게 했던, 불가결의 한 물질적 조건을 다른 대부분의 국가나 지역들은 가지고 있지 않거니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소수 다른 국가나 지역들의 경우, 여타의 정치적ㆍ사회적ㆍ문화적 조건과 전통이 베네수엘라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 물질적 조건이란 바로 석유, 거대한 석유자원과 거기에서 오는 수익이다! 베네수엘라와 같은 형태로 ‘혁명’이 전개되면서 거대한 석유자원과 거기에서 오는 거대한 수익 없이도 그러한 성과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극히 비현실적일 것이다. 혹은, 중동이나 북부 아프리카 일부 지역ㆍ국가에서 베네수엘라와 유사한 민중주의적 정권이 들어 설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 가능성이 높다고는 역시 전혀 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방금 베네수엘라의 경우 “단정적으로 부인할 사실적 근거 또한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베네수엘라를 제외한 남미의 다른 ‘진보적인, 진보개혁적인, 혹은 민중적인 정권들’의 경우는 모두, 우선 지금까지의 전개에서 판단하더라도, 사실상 절대적으로 사회주의 - 혹은 사회주의혁명 - 불임적(不姙的)이다. 나아가, 방금 말한 것처럼, 베네수엘라에서의 볼리바르 혁명의 성과들은 거대한 석유자원이라는 베네수엘라 특유의 조건에 크게 힘입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타 남미의 ‘진보적인, 진보개혁적인, 혹은 민중적인 정권들’이 그에 버금가는 성과들을 달성할 가능성 또한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크게 보면 같은 중남미 지역에서의 움직임이지만, 쿠바의 혁명과 베네수엘라를 포함한 다른 남미 국가들에서의 그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본질적으로 다르다. 쿠바에서의 혁명이 기본적ㆍ본질적으로 맑스-레닌주의적이라면, 남미의 다른 나라들에서 전개되고 있는 그것은 기본적ㆍ본질적으로 민중주의적이다. 거기에는 ‘타인 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소유’ 일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대한 어떠한 유효한 폐지, 폐지 강령도 없다.³⁾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그 착취를 완화하려는 것이고, 그를 통해서 그 착취체제를, 그 운동 주체의 주관적 소망과 상관없이, 온존ㆍ영속화 시키려는 헛된 시도이다. 그리고 다시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본질적ㆍ역사적으로는, 무척 심하게 들리겠지만, 반동적인 것이다.

하지만 물론,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그 착취가 아무리 완화되더라도, “한 극(極)에서의 부(富)의 축적은 동시에 그 대극(對極)에서의 빈곤과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 무지, 야만화, 도덕적 타락의 축적”⁴⁾을 수반하면서만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은 끝내는 그 내부에서 발전한 생산력과 그 적대적 생산관계의 모순의 격화로 보다 고도의 새로운 생산체제에 그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다.⁵⁾ 그것이 경제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역사의 진실이고 법칙이다.

*           *                  *

지금 세계의 노동자ㆍ인민은 신자유주의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적 몰(沒)과학, 민중주의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고 있다. 흐루쇼프에 의한 스딸린 격하 운동과 그에 의해 촉발된 중-쏘 분쟁 이후, 쿠바 혁명이나 베트남 민족해방ㆍ통일전쟁 등의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사회주의 혁명 운동과 노동자 국제주의가 기본적으로 약화ㆍ해체의 길을 걸어왔고, 수정주의ㆍ기회주의가 갈수록 득세ㆍ발호해온 결과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이 수정주의ㆍ기회주의는 고르바쵸프의 ‘뻬레스뜨로이까’에 이르러 극에 달하면서 마침내 동유럽과 쏘련의 사회주의 세계체제를 해체시키게 되었고,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극악한 반동이 사실상 세계 전체를 장기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주의 세계의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정치세력들’ 역시 그 대개가 사회주의 혁명 운동과 노동자 국제주의의 해체, 기회주의의 확산에, 노동자 대중의 사상ㆍ이론적 무장해제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는 그들에게는 여러 무기와 도구가 있지만, 그 중의 중요한 하나가 바로 그들의 ‘진보적인’, 혹은 ‘진보개혁적인’ 사상ㆍ이론과 운동, 즉 민중주의이다.

거기에는 일견 맑스도 있고, 엥겔스도 있고, 레닌도 있지만, 그리고 계급도 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있고,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의 이행ㆍ이행기의 문제도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구두선(口頭禪)이고, 개찬(改竄)된 것이고, 거세되고 형해화(形骸化)된 것이며, 흉하게 일그러진 것이다. 실제로는 계급, 노동자계급의 조직과 운동이 아니라 민중, 민중의 조직과 운동이 있고,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소부르주아적 개혁이 있으며, 과학이 아니라 ‘진보’라는 공허하고 무정형한 소리가 있는 것이다. 국가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이 아니라 소부르주아지의 감상적인 애국주의와 몰계급적인 개혁도구주의ㆍ편의주의만이 있는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서 사회주의 세계체제를 구축했던 20세기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그리고 그 과학의 비판적 계승ㆍ발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면적 부정과 청산을 지향하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부정과 매도, 청산이 발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이 주도하지 못하는 민중운동, 민중권력, 민중주권이 과연 어떤 내용과 성격을 갖는 것일 것이며, 역사를 얼마나 진전시킬 수 있겠는가?

과학적ㆍ혁명적 이론에 의해서 지도되지 못하는 노동자운동, 노동자ㆍ민중운동이 어떻게 혁명적ㆍ전위적인 전략적 주체를 획득할 수 있으며, 그러한 혁명적 전략적 주체를 갖지 못한 노동자 운동이 어떻게 혁명적 민중운동을 조직하고 주도할 수 있겠는가?⁶⁾

나는 이번의 포럼이 민중주의를 ‘진보’, ‘진보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찬양하고 지향하는 기회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적으로 지양하는 계기, 그리하여 해체된 혁명적 이론과 운동을 다시 세워나가는, 혹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새롭게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노사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