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이었다. 원래 긍정의 힘을 믿고 열심히 살아서 정치적, 경제적 성공(돈 많이 벌고 명예도 얻고)을 꿈꾸던 보수주의자이던 나. 그러던 놈이 선배와 이야기를 하며, 책을 읽으면서, '진보'라는 이름에 끌려 막연히 진보신당에 가입한다. 2010년 여름에 진행된 동희오토 노동자들의 투쟁 소식을 당 게시판을 통해 보면서 예전에 보려 하지 않았던 이 자본가 세상의 더러운 면들을 하나씩 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정의를 바로세우리라."며 큰소리 뻥뻥치며 부모님 용돈 타 쓰면서 신림동 고시원에 살던 철없는 놈은 혼자서 드문드문 양재동, 보신각 등에서 하는 집회에 조용히 나갔다 조용히 오게 된다. 한 달에 한 번.

어느덧 때는 가을이고 2주에 한 번 '외로운' 집회참여가 이어졌다. 진보신당 게시판을 보니 당에서 "재능교육 갈비연대"를 한다고 한다. 외로운 투쟁을 끝장내고 함께 투쟁하기 위해 혜화동 재능본사로 달려갔다. 예전에 당원 동지 한 명을 만난 적은 있지만, 투쟁 주체인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눈, 동지들과 함께 투쟁한 첫 날이었다. 재능 조합원 동지, 진보신당 동지, 새로고침 동지, 그밖의 많은 동지들...

그리고 이 분들을 만났다. '행신동 세입자 투쟁위원회'의 김혜자 위원장, 김철규 사무국장 동지. '행신동? 고양시잖아!!'(나는 2003년부터 고양시에 주소지를 두고 있는 고양시민이다.) 고양시에서 고양시청과 대명건설에 맞서 싸우는 중이라 하신다. 그것도 자그마치 8년째(작년 기준)!! 아... 같은 고양시에서 살고 있던 나는 왜 이분들의 싸움을 못 봤을까!! 태어나서 철거민 분들과 처음으로 만난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8년 동안 이어진 긴 싸움 이야기를 듣는다.

행신동에 세입자로 살고 있던 2003년 초 어느 날. 건설회사에서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며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킬 때부터 싸움은 시작됐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건설 자본은 용역깡패를 고용해 집들을 모조리 강제로 철거한다. 김혜자 위원장 가족의 집은 2005년에 철거당한다. 2005년부터 시작한 길거리 천막생활. 어느덧 6년째(작년 기준)이다.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 여름에는 지긋지긋한 더위, 도로의 매연, 먼지, 시끄러운 차 소리... 8년 싸우는 동안 60세대의 세입자들은 건설자본과 고양시청, 고양경찰들의 탄압에 못 이겨 한 집 두 집 떠나고, 이제는 위원장 가족만 남았다.

강제 철거 이유는 하나다. 자본가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고양시청과 고양경찰이 한 짓은 더 심각하다. 고양 시민이 아무런 대책 없이 하루아침에 쫓겨났는데 고양시청은 손을 놓고 있고, 경찰은 용역깡패의 폭력을 못 본 체 한다. 집에서 쫓겨나 천막농성을 하는 동안에는 수십 차례 천막마저 철거해버린다. 심지어는 부부를 동시에 구속해서 아이들만 외딴 천막에 남기는 만행을 저지른다. 하지만 철거민 가족은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

김혜자 위원장님과 바로 그 주 목요일부터 매주 서울 삼성동 대명종합건설 건물 앞에서 하는 집회에 참석했다. 자본가 세상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착한 자본은 있을 수 없다."라는 사실은 분명해지지만, 대명종합건설은 유독 악랄하게 자본의 본 모습을 대놓고 드러낸다. 어느덧 투쟁이 한 해를 더 넘겼다. 분노할 때 같이 분노하고, 웃을 때 같이 웃으며 농성장에 가면 가족 같은 따듯한 느낌을 받는다. 자본의 살인적인 폭력이 이 땅 곳곳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게 보인다. 아, 이놈의 자본가 세상.

 2010년, 천막 강제철거를 하고 건설 자본가 보호에 앞장섰던 한나라당 강현석 시장 임기가 끝난다. 2010년 6월 2일, 야5당과 시민단체가 힘을 합친 일명 '고양 무지개 연대'로 민주당 최성 시장이 당선된다. 야당 시장이 당선됐으니 자본가 하수인 노릇을 그만두려나? 최성 시장은 시장에 취임하면서 전임 강현석 시장과는 다르게 시민단체, 진보정당들이 포함된 공동시정운영위를 구성, 운영하면서 '개혁적인' 시정을 운영하겠다고 약속한다. 또한 처음에는 행신동 철거민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 대명종합건설과 협상 자리를 주선하기도 했다. 9월 3일, 철거민 동지들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최성 시장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천막 철거를 유보시키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2011년 3월 10일, 최성 시장은 "협상이 결렬됐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가족이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있는 천막을 강제 철거했다. 시민들의 혈세를 낭비하여 150명의 인원과 갖가지 장비로!!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돌아갔다. 인간의 탈을 쓰고 할 짓이 아니다! 동지들과 함께 용역, 공무원, 경찰들과 심하게 몸싸움을 벌였다. 차 밑에도 들어갔다. 아... 적들은 우리의 열배다. 천막은 무너지고... 놈들은 물건을 닥치는 대로 차에 실었다. 남은 것은 어떤 동지가 챙겨둔 밥통과 커피포트, 수저 뿐. 개혁적인 이미지로 사기 쳐서 당선된 시장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고양시를 다녀보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라는 문구가 써진 연두색 배경 꽃무늬 간판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그걸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아무리 화려한 말로 꾸미려 해도 불쾌한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이번 강제철거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다.

행신동 SK뷰3차 아파트 앞에 있던 천막 철거 후, 행신동 철거민 가족은 철거를 자행한 자들의 중심지인 고양시청 앞에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서 김혜자 위원장은 3월 24일부터 죽을 각오로 관 속에서 소복을 입고 잠을 자며 투쟁하는 '관 속 투쟁'을 시작했다. 이날 밤, 철거민 동지들을 피해 숨어다니던 최성 시장을 김혜자 위원장이 발견하고 강제철거에 대해 항의하자, 시청 남성 직원들, 경비들 10여명이 달려와 김혜자 위원장을 강제로 끌고 가면서 소복 윗도리를 잡아 뜯는 성폭력을 저질렀다. 그 사이 최성 시장은 도망간다. 성폭력을 저지른 경비 한 명은 술에 취해 있었고, "근무시간이 아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떼거지로 달라붙어 시장을 보호하려 한 것이 근무시간에 하는 일이 아니고, 뭔가? 설사 근무시간이 아니더라도, 근무시간이 아니면 성폭력을 맘껏 저질러도 좋다는 이야기인가? 이외에도 관속에서 자고 있는 김혜자 위원장의 관을 막대기로 건드리고, 연대 동지에게 주먹질을 해서 얼굴에 멍이 들게 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탄압.

고양시청은 지역 신문을 이용해 악랄한 여론전을 벌여 왔다. "개발지역에 살고 있던 세입자가 아니고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세입자이다.", "수억을 요구하고 있다.",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뜨리고 있다." 등등...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한 것은 앞서 말한 강제철거를 "6년 끌어온 철거민투쟁 '종지부'"라고 표현한 《경인일보》의 신문기사다.

2011년 3월 28일, 김혜자 위원장 부부는 굶어죽을 각오로 단식투쟁을 시작한다. 오늘로 벌써 단식투쟁 27일째다. 그저께 집회 때 보니까 두 분 다 얼굴이 반쪽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반 년 남짓 철거민 싸움, 노동자 싸움, 등록금 싸움 등에 몸을 담그면서 이 모든 싸움들의 근본원인이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을 느꼈다. 자본가 세상의 모순을 그 누구보다도 심하게 겪어왔으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는 행신동 철거민 가족의 싸움을 온 몸과 맘으로 지지한다. 존경한다. 목숨을 건 단식투쟁, 하루 빨리 승리해야 한다. 저들의 탄압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우리도 진화한다. 우리의 선전 방식은 갈수록 치밀해지고 있다. 고양시 꽃 박람회가 다음 주 금요일(2011.4.29)부터 열린다. 그 때까지 시청에서 행신동 철거민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으면 올해 고양시 꽃 박람회는 없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고양시가 쥐고 있다. 자본의 노예 노릇을 충실히 하느냐 아니면 이제까지의 잘못된 시정을 뉘우치고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치느냐. 고양시의 현명한 결단을 바란다. 어떤 이유로도 자본과 권력이 인간의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없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투쟁경과에 대한 상황 서술은 진보넷 투쟁속보 게시판(http://go.jinbo.net/commune/list.php?board=cool)의 정리된 글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행신동 철거민 투쟁에 동지들의 뜨거운 지지와 연대를 부탁드립니다.(김혜자 위원장 : 010-8297-4281, 김철규 사무국장 : 010-5577-4281) 《정세와 노동》에 행신동 철거민 소식을 싣게 해주신 최상철 동지와 노사과연 가족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투쟁!!

2011년 4월 23일 토요일

이문동 자취방에서

고양시민 한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