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 따라 각종 세미나들을 찾아다니던 학부생 시절에 잘못 배운 게 하나 있다. 2차 서적에만 의존해 이론들의 언저리만 맴도는 버릇이다. 한 책을 읽다가 이해가 안 가거나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느껴지면 비슷한 다른 2차 서적을 찾아 관련된 부분을 보고 ‘추측하는’ 공부방법으로 그 시절을 보냈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내용이 없게 되니 입만 살아서 말만 많은 허세남(?)이 되어갔다. 나 혼자만 그랬던 건 아니었다. 내 주변의, 어쩌면 같은 세대를 살았던 ‘활동 좀 한다는’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보였던 일반적 풍경이었다. 근거 없는 다수의 해석들이 난무했고, 그 줄기를 따라 올라가보면 결국 각자 무조건적으로 의지하는 ‘명망있는’ 이론가(집단)들의 저작과 논문들만이 떠다닐 뿐이었다. 맑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복권’시키거나, 심지어 ‘뛰어넘었’다는 사람들의 책을 내 손에 쥐어주는 선배들은 많았지만, 맑스의 저작을 직접 같이 읽자고 말하는 선배는 거의 없었다. 그런 문화 속에서 나 또한 그런 선배가 되어갔다.

학부 마지막 2년에 현재 활동 중인 모 단체의 맑스주의 저작 읽기 세미나와 ≪자본론≫ 1권 강독 세미나를 참여하며 ‘원전읽기’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나쁜 버릇은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겨우 ≪자본론≫ 1권만 대충 읽어본 실력으로 맑스 경제학의 체계를 공부해 보겠다며 전형논쟁이니 공황론이니 하는 구체적 역사적 논쟁들에 신나게 빠져들었다. 물론 이번에도 그것들을 ‘정리해 놓은’ 2차 문헌들을 통해서였다. 그렇게 또 ≪자본론≫의 언저리에서만 뱅글뱅글 돌며 졸업을 한 후에 입대를 하게 되고, 한동안 ≪자본론≫ 2, 3권은 손때 하나 묻지 않은 헌책으로 책꽂이 자리만 차지하게 되었다.

제대 후 1년 반 동안 ‘겁도 없이’ 자본론 1권 세미나의 팀장을 두 번이나 맡았다. 그 기간 동안 2권은 속성으로 완독했지만 3권은 필요한 부분만 슬쩍 들여다보는 ‘땜빵 메우기’식으로 버텨나갔다. 내 공부를 챙기는 것보다 당시의 세미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게 우선적인 의무였다고는 하지만,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경제학 전공자로서 갖는 찝찝함과 행여 팀원들에게 거짓정보(?)를 흘리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뒤섞인 상태가 계속됐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작년 8월 당시 평소 친분이 있던 강성윤 팀장님께 “노사과연에서 열심히 배우고 널리널리 전파하겠습니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3권 세미나를 신청했다. 팀원은 팀장님 제외하고 총 3명. 이미 ≪자본론≫ 전체를 2회독 했다는 은정씨, 이번 강성윤 팀장님 세미나를 1권부터 시작해 살아남은 유일한 팀원이라는 현우씨, 날림으로 팀장 두 번이나 해먹은 나까지 (팀장님 표현을 빌리자면) ‘선수’들끼리 모여서 하는 세미나가 되었다. 이미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 세세한 설명의 부담없이 평소 궁금했거나 어려워했던 부분을 확인하는 방식의 편안한 세미나를 진행할 수 있었다. (나와는 다른 맥락으로) 세미나를 ‘날림’으로 한다고 자처하시는(!!) 강성윤 팀장님과 팀원들의 열렬한 호응 덕분에 약 2시간 가량의 짧지만 핵심을 찌르는 강독 후 다른 세미나팀을 뒤로하고 일찌감치 뒷풀이에 가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유쾌한 세미나가 이어졌다.

최근 몇 년 동안 참여했던 각종 세미나들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충만했던 세미나였다고 생각한다. 진행부담 없이 팀원으로 참여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쁜 버릇이 들어 있던 시기 동안 머리 속에 무작정 집어넣기만 했던 각종 논쟁과 입장들의 ‘원천’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혼자 맑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나름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이미 ≪자본론≫ 3권 안에서 맑스가 언급했던 내용이었음을 확인하면서, 한편으로 확인 받았다는 기쁨과 다른 한편으로 왜 진작 안 읽었나 싶은 한심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세미나에서 얻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무엇보다도 곧바로 물어보고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선배 혹은 선생님을 옆에 두고 맑스의 경제학을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좋았다. 물론 그와 같은 마음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이나 더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더 좋았다.

예정된 6개월을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된 ≪자본론≫ 3권 세미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공부했었는지 구구절절 후기에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이 세미나를 통해서 내가 결국 ≪자본론≫ 전체의 긴 여정을 완주했다는 것이고, 많은 것을 배우고 간다는 것이니 말이다. 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 개인적으로 신변상의 변화가 많았다. 짧지 않은 준비기간을 거친 후에 조만간 사회로 나가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자본론≫을 끝내고 나갈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가장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적 관점에 서 있어야만,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현실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학교를 벗어나 연구자가 아닌 신분으로, 내가 앞으로 발로 뛰게 될 직업 현장에서 맑스주의의 이론과 비판적 관점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이것이 이번 세미나가 나에게 던져준 문제다.

끝으로, 세미나를 충실하게 이끌어주신 강성윤 팀장님, 본 세미나보다 쉬는 시간 담배 한 개피를 더 기다리게 만들어 준 흡연 동지 지은정씨, 매번 팀원들 발제문을 먼저 프린트해주는 친절함과 언제나 세미나실을 수다방으로 꽃피워주는 유쾌함을 보여준 주현우씨에게 그 동안 너무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노사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