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싸움)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다 이겨 놓고 내가 이겼음을 확인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 손무가 한 말이다.

머...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는 우리네식 생각으론, 언뜻 그럴듯 하긴 해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말이라 여겨질 법도 하다.

혹은 “다 이겨 놓고 싸워야 한다면 도대체 언제 싸울 수 있는 것이며 이기지 못했으면 싸움도 하지 말란 말이냐?”고 투덜거릴 수도 있겠고 싸움을 회피하려는 이들의 비겁한 변명거리로 이용되기도 할 법하다.

또한 어떤 경우는 이길 수 없음이 거의 확실해 보여도 적들의 도발에 앉아 죽을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싸움에 임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쟁, 혹은 싸움이라는 행위의 본질을 설명한다는 측면에선 저 말은 옳다.

음... 뜬금없이 맑스의 노동가치론이 떠오르는 건 머지?

유동상태에 있는 노동력 즉 노동과정 그 자체는 가치를 형성하는 과정일 뿐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를 가지는 것은 노동력 그 자체이고, 노동과정을 통해 형성된 가치란 노동이 대상화된 응고물이다...

흠... 유동상태에 있는 전투과정은 승리를 형성, 즉 확인하는 과정이지 승리 그 자체는 전투할 수 있는 능력에 이미 담지 되어 있는 것이고 또한 그 전투과정이 형성한 응고물이 승리의 실체다?....

에구구 먼가 비슷한 것 같기두 하고... 어쨌든....

이 손무의 말을 노동자 자본가 간의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정말 인정머리 없게 얘기하자면 사실은 저 본질에 충실치 못하기 때문에 싸움에서 판판이 지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게다.

우연히 티비에서 모 이종격투기 시합과 그에 관련된 광고를 보았다. 그 이종격투기 선수들이 치르는 싸움의 전장은 과연 어디일까?

잉? 뭔 소리? 그야 당연히 적, 즉 상대와 마주 선 시합장 — 그 이종격투기는 그 시합장을 ‘옥타곤’이라고 부르더라. 복싱으로 따지면 ‘링’ 정도가 되겠지 — 이 전장이지.

과연 그럴까? 선수들이 그 옥타곤에서 치르는 싸움의 시간은 짧게는 몇 초이고 길어야 20분을 채 넘지 않았다.

시합만을 봤다면 그들의 전장은 그 옥타곤이라 말했을 것이며 그곳에서 전투가 치러지고 있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합을 광고하기 위해 만든 영상물을 보면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그 20분의 싸움을 치르기 위해 피땀을 흘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몇 개월 혹은 몇 년의 과정이 광고 영상에 담겨 있었다.

그 과정이 그들에겐 피를 토하는 사투의 과정이었다...

결국 상대와 맞선 20분은 싸움 그 자체가 아니라 싸움이 만들어낸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일뿐, 진짜 싸움의 과정은 그 20분을 준비하기 위해 피땀을 쏟으며 사투를 벌인 수개월 혹은 수년간의 훈련과정이며, 따라서 진정한 전장은 옥타곤이 아니라 피땀으로 얼룩진 훈련장이라 봐야 할 게다.

“아! 자본하고 싸우기도 바빠 죽겠는데 우리 내부 분열되고 갈등하는 거 해결하느라 정신 없으니 도대체 뭔 투쟁이 되겠냐?!!”

현장 활동가들로부터 참으로 많이 듣는 말이다.

그들의 답답함과 울분이 어떤 건지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제법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분열되고 갈등하는 거 해결하느라 소진할 바엔 자본과의 전장에 한번이라도 더 나가는 게 진정한 운동이라 여기시는 헌신적인 활동가들을 투쟁 혹은 집회의 현장에서 자주 보게 된다.

“어찌 그리 맨날 혼자 집회 나오셔? 조합원들 좀 데리고 나오거나 노조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좀 나오시지.”

농담 반 타박 반으로 말을 던지면 이내 자괴감 반 냉소 반의 표정을 지으며 이리 말한다.

“에이... 가망 없어. 암만 말해봐야 말 들어쳐먹지도 않고...”

그래... 확실히 말 들어쳐먹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투쟁하자. 집회가야 한다”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 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게다.

혹은 싸워야할 적들은 자본가들이고 그 싸움의 현장이 저기 있는데 내부에서 우리끼리 싸우고 있는 거에 발목 잡혀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는 게 못 견디게 답답할 게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싸움터에 나가 구호 외치고 몸싸움도 하고 가두 행진도 하는 건 훨씬 덜 힘들고 덜 소진하고 덜 괴로운 일일 테다.

하지만... 괴로우니까 싸움이다. 답답한 그 곳이 진짜 싸움의 현장이다.

“형. 우리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자본과 싸우는 과정 아닐까요? 그러니까 자본과 싸우기도 바쁘다는 말은, 사실은 우리 내부의 분열과 갈등 그 자체와 싸우느라 바쁘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가망 없다고, 전혀 말 들어쳐먹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그들을 가망 있게 하고 말 들어쳐먹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함께 대화하는 과정. 이 도대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과정이 바로 형이 열심히 하고 있는 투쟁 그 자체이지 않을까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노동해방투사였던 고 이소선님도 생전에 “전국의 노동자가 단 하루만이라도 완전히 단결하자.”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었다. 그 분에게 투쟁은 아마도 자본가의 멱살을 그 분 손으로 잡아 넘어뜨리는 과정이 아니라 전국의 노동자를 단 하루만이라도 완전히 단결해 총파업으로 모든 걸 멈추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을 게다.

나도 투쟁한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 당연히 그 투쟁의 상대는 자본가계급일 것이다. 하지만 난 자본가들과 대면하고 직접적으로 자본가들과 치고받고 싸우지 않으며 그럴 일도 없다.

난 무대에서 선동한다. 춤으로 노래로 말로 선동을 하지만 그 춤과 노래와 말 중 자본가들을 향한 것은 없다. 자본가들이 보라고 춤을 추지도 그들이 들으라고 노래하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대부분 노동자들, 우리들을 향한 것들이다.

또한 같은 의미와 이유로 난 나의 동지들과 함께 학습하고 토론하고 논쟁한다. 자본과 한 테이블에서 논쟁하지도 않고 그럴 일도 없다.

결국 우리를 향한 끊임없는 선동과 학습과 토론. 이것이 진정한 내 싸움의 과정이고 그걸 행하는 곳이 나의 전장이다. 결국 자본가계급을 이기는 것. 그것은 그러한 내 싸움의 과정이 만든 결과이고 언젠가 그 순간이 와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건 역시 그 싸움의 과정이 만든 결과로서의 승리를 확인하는 의미일 뿐일 게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자본과의 투쟁현장이 의미 없는 곳이란 말은 결코 아니다. 그곳도 싸워야 할 전장이다.

다만...지금 우리가 가장 어렵다고, 가장 괴롭다고, 가장 가망 없다고 느껴지는 그 싸움이 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훨씬 본질적이고 치열해야 할 싸움임을...

그 치열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다면 입버릇처럼 말하는 한줌도 안 되는 자본을 넘어뜨리는 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될 것이기에...

“형. 투쟁 잘하는 소문난 투사잖아요. 갑시다. 싸우러. 형이 가장 무서워하는 상대가 있는... 현장으로! ^^” <노사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