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지 않아?”

“응 힘들어 죽겠어.”

“......”

대학생 시절. 학교와 재단을 상대로 재단퇴진투쟁을 벌이며 점거농성을 할 때였다. 다음날 돌릴 선전물을 준비하며 농성장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는데 한 친구가 술에 취한 채 찾아와 컴퓨터와 씨름하던 내 옆에 한참을 앉아 있더니 툭하고 던진 말이다. 물론 소위 ‘운동권’이 아닌 친구였다.

“그렇게 힘든 걸 왜 해? 다른 애들처럼 그냥 학교 다니고 수업 듣고 술 먹고 놀고 그렇게 살면 되잖아.”

“그래. 그런 것도 좋겠다, 그치?”

“...... 관두고 싶단 생각은 안 해봤어?”

“왜 안 해? 하루에도 열두 번은 관둬야겠다고 생각하지”

“......” 

잠깐 말이 없다...

그제서야 모니터에서 눈을 돌려 그 친구를 쳐다봤다. 의외라는 표정...미안한 듯한 감정... 복잡한 듯한 눈빛...이 녀석 모르긴 해도 당시 내가 하고 다니던 꼬라지로 봐선 ‘저 놈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투쟁!”이라고 외쳤을 놈이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 싶다.

아마 내 입에서 “그럴 수야 없지. 학우들을 위해, 그리고 이 땅 민중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데 이까짓 힘든 것 정도가 문제겠니? 어떻게 관두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니?”

뭐...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 예상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나 많이 관두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왜 관두지... 않고 있는 거야?”

“뭐... 관두기 싫다는 생각은 하루에 열세 번 하거든.”

데카르튼가 하는 사람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다던데 적어도 나에 관한한 “나는 갈등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게 더 맞지 싶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극심한 피로에 ‘그냥 다 집어치우고 잠이나 잘까?’ 하는 생각을 열두 번은 하고 있으니... 그럼에도 여러분들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아마 '그래도 쓰자‘라는 생각을 열세 번 했기 때문일 게다.

뭐... 더 살아보면 완전한 무갈등의 경지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지만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의미인 ‘불혹’에 접어 들어봐도 여전히 유혹에 갈등하고 있는 거 보면, 딱히 더 먹는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을 듯하다.

아 물론 ‘불혹’이라는 말이 틀린 건지 내가 덜 된 인간인진 모를 일이니 오해들은 마시길...

여튼 그 때 그 친구가 내게 물었던 말. 실은 내가 요즘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묻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게 사실이다. 어찌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에 15만 볼트가 넘는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에 올라 비닐천막 하나와 합판으로 100일을 넘게 버티며 싸울 수 있는지... 어찌 해고에 맞선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을 8년 동안이나 지속할 수 있으며 어찌 2000일이 넘는 날을 길거리에 천막 치고 잠들면서도 포기하지 않는지... 어찌 살인적 폭력이 난무하는 투쟁의 현장에 물러섬 없이 그리 맞서 있을 수 있는지...

나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투쟁을 그리 오래 하며 힘들지 않은지... 관두고 싶지 않은지...

하지만 묻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때 내가 그 친구에게 대답했던 마음과 비슷하지 싶어서이다. 그들은 어벤져스라는 영화에 나오는 헐크나 스파이더맨 같은 슈퍼울트라 초인들도 아니고 부동심의 경지에 이른 부처님 가운데 토막 정도 되는 이들도 아닐 것이기에... 그저 매분 매초 매시간 갈등하는 나와 다르지 않은 이들일 것이기에. 너무나 확고해서 너무나 완벽해서 한 치의 흔들림 없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숱한 갈등 속에 단 한 번이라도 더 혹은 그 이상으로 마음이 그 투쟁의 자리로 향하고 있어서 그럴 수 있으리라 여기기에.

언젠가 권투를 잘 하는 어떤 사람도 링 위에서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의 차이를 얘기한 적 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는 사람은 자신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점만 인식하는데 이기는 이는 자신이 그렇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 상대도 그렇다는 것을 인식할 줄 안다는 거다. 월등하여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이가 아니라 똑같이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을 열두 번 할 때 상대도 그러니 서서 버텨야 한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더 하는 이가 승리자가 된다는 거였다.

해서 하는 말인데... 늘 갈등하고 힘들어 하는 나는 결코 못 난 나가 아니다. 단 한 번의 갈등도 미련도 없이 아침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지 못한다 하여 나를 미워할 일도 폄하할 일도 아니다. 3분만, 5분만 하며 추운 아침 이불을 파고 들어가는 내 모습이 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일 게다.

조금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요즘 이러저러한 일들로 또다시 ‘노노갈등’이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들린다. 저들 자본과 권력은 이데올로기적 공격 무기로 이 말을 참으로 적극 활용한다.

참... 하물며 하나의 개인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대립적인 요소들 간의 갈등과 통합이 자연스러운 존재의 방식일 뿐 아니라 발전을 향한 합법칙성일진데 어떻게 그 다수의 노동자들이 갈등이 없이 존재하겠나? 노동자들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단결의 구호는 갈등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갈등을 발전적으로 품은 채 통합되어야 한다는 말 아니겠나?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유식한 말로 ‘변증법’이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갈등 지옥, 통합 천국’이라는 논리야 자나깨나 ‘국민대통합’을 외치시는 저들 지배자들의 지배이데올로기일 뿐이고.

갈등 하는 나... 힘들어 하는 나... 모두가 안정되게 통합되어 잔잔한 호수물결처럼 동요가 없어 보이는데 나만 유독 왜 이리도 폭풍치는 바다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괴로워할까...라는 생각......

이제 그만 갈등하고 있는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길... 흔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흔들리기 때문에 비로소 나를 살아있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됨을... 생각하길...

윤동주라는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으려 그리 괴로워 하셨다는데,

그리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겠다 하셨는데...

몇 점 부끄럼 있어도 그리 많이 괴로워들은 말았으면... 몇 점의 부끄럼을 거쳐야 비로소 진짜 부끄럽지 않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삶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노사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