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억압의 정치학≫(상)‧(하)는 채만수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이 그 동안 발표했던 글들의 일부를 모아 엮은 책이다. 이 글들은 처음부터 단행본 출간을 목표로 쓴 글이 아니다. 당시의 정세상의 요구에 따라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월간 기관지 ≪정세와 노동≫과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현장에서 미래를≫에 발표했던 글들이 대부분을 이룬다. 이러한 이유로 내용에서 중첩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십여 년 전의 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세세하게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중첩과 ‘당시 정세글’이란 한계마저 노동자계급운동의 정치적‧이념적 발전에 기여함, 정확히 표현하면 운동의 과학적 원칙을 정립하는 데 유효하다는 것에 비하면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못한다.

노동자계급 운동의 독자성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 지난해 대선에서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한국노총의 현직 산별위원장과 지역본부장이 똬리를 틀고 있는 문재인 후보 캠프에 민주노총 출신인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 이경훈 전 현대자동차지부장과 박홍귀 전 기아자동차지부장 등이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안철수 후보 캠프에도 민주노총 출신의 수많은 인사가 결합했다.

앞에서 언급한 명망가들만이 아니라 사무금융연맹의 수십 명의 전·현직 임원이, 전국사회보험노조 간부 100여 명도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이미 지난 총선에서 연출된 모습이다.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노동운동 상층부의 행태는 노동자계급 운동의 독자성을 부정하며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에 투항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현시기 가장 반동적 계급(새누리당)에 비해 문재인과 안철수의 집권이 진보적 정권교체라고 왜장친다. 그리고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이 행한 개혁에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반대해서 현실적으로 그 사회의 수구·보수 세력의 이해에 기여할 경우,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 사회의 가장 반동적 계급의 이해에 종속되는 사태를 야기한다고 저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독점)부르주아지의 한 분파라는 사실을. 문재인과 안철수를 위시한 개혁세력이 우리 사회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에 비해 개혁적이라고 하더라도 ‘개혁적 부르주아’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난 대선에 민주노총이 각 후보 캠프로부터 회수한 민주노총 요구안에 대한 답변서를 보면, ‘한미FTA 폐기’를 당연히 반대한 박근혜보다 ‘한미FTA 폐기’와 관련해 ‘수정’을 선택한 문재인이 개혁적일 수 있다. 그러나 한 대선토론회에서 “한미FTA 폐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 국가 간에 체결된 경제 협정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고 말한 문재인 또한 독점자본과 제국주의의 정치적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 운동진영은 개혁세력인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를 어떠한 전술원칙하에 대응해야 하는가? 피억압의 정치학 제5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계급 운동의 독자성”에서 저자는 맑스와 엥겔스의 글을 인용하며 대응방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이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그런데 예비적으로 얘기해두자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의 관계,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은 19세기 중엽 독일의 ‘노동자계급 운동’에서도 중요한 문제의 하나였고, 이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좌·우 편향, 기회주의가 발생하곤 하였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반동세력들과 권력을 다투고 있던 1848년 혁명 이후의 수년간에는 그러한 혼란은 더욱 심각했다.

그리하여 맑스와 엥겔스도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1850년 3월에 동맹원들에게 보내는 중앙위원회의 호소”라는 짧은 글이다.¹⁾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위해서 전체 사회를 변혁하려는 것과는 아주 멀고, 그들에게 현존의 사회가 최대한 견딜 수 있고 편안하게 되는, 그러한 사회상태의 변화를 위해서 노력한다. ……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많건 적건 은폐된 적선을 통해서 노동자들을 매수하고자 하고, 그들의 상태를 당분간 견딜 수 있게 만듦으로써 그들의 혁명적 힘을 분쇄하려고 한다.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가 도처에서 억압을 받고 있는 지금,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대동단결과 화해를 설교하며,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손을 내밀어 민주당 내의 모든 색조를 포괄하는 거대한 반대당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 그러한 통합은 단지 그들에게 유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전적으로 불리하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힘들여 획득한 자신의 모든 독자적인 지위를 상실하고, 다시 공식적인 부르주아 정당의 추종자로 전락할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그리하여 결연하게 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무엇보다도 동맹은 공식적인 민주당과 나란히 독자적인 노동자당의 비밀 및 공개적인 조직을 만들고, 각 단위 조직을 부르주아적 영향을 받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와 이해가 토론되는 노동자협회의 중심, 중핵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부르주아 대중은 …… 승리가 결정되자마자 그것을 스스로 독점하고, 노동자들에게 진정하고 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소위 지나침을 방지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승리의 과실로부터 배제한다. …… 투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투쟁 후에도 노동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요구와 나란히 자신의 고유한 요구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승리의 첫 순간부터 불신은 더 이상 패배한 반동당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동맹자에게, 공동의 승리를 독식하려고 하는 정당에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처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후보와 나란히 노동자후보를 내세우는 것.... 당선의 전망이 전혀 없는 곳에서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힘을 타산하고, 자신들의 혁명적 태도와 당의 입장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후보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은 이 경우에, 예컨대 그렇게 함으로써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반동파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준다고 하는 식의 민주당의 허튼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모든 공문구는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독자적인 행동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이 성취할 것임에 틀림이 없는 진전은 몇몇 반동분자의 대의기관 출석이 초래할지 모르는 불이익보다 한없이 중요하다.²⁾

저자는 맑스와 엥겔스의 글을 인용하여 어떤 세력과 동맹을 맺고 연합하여 누구와 싸울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구체적 상황에 따라서 시기별로 다를 수 있는 전술 원칙을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과 동맹하거나 연합하고, 그들과 대항하여 싸울 것인가에 대해 설명한다. 사실 나는 이 문제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잘못된 방향으로 결정하면 노동자계급 운동을 좌익 모험주의로 이끌거나 아니면 우익 기회주의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 운동의 기본적 태도 및 일반적 전술 원칙 등을 제시해준다.

피억압의 정치학(상)·(하)는 제7부까지 있고, 그 중에 제5부의 제목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이다. 900페이지가 넘는 두 권의 책에서 내가 감명을 받고 인용하며 서평을 쓴 내용은 단지 7분의 1이다. 즉 여기에는 쓰지 못했지만, 내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정치적·사상적 입장을 세우고 벼리는 데 자양분이 되는 내용이 많다. 특히 제2부 "전쟁과 평화", "제7부 사회주의 ―20세기와 21세기"에서 이전에 잘못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고 많은 부분은 고치게 됐다. 회원 여러분도 천천히 읽으면서 저처럼 정치적·사상적 혼란(?)에 빠지지 말길 바란다. <노사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