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의 정치적.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연구소

“어떻게 오셨죠?”

의사가 무덤덤하게 물었다.

“며칠 전부터 마른 기침을 조금씩 했는데, 어제 밤부터는 마치 이가 들뜬 것처럼 이도 몹시 아프고, 귀도 아프고, 눈도 아프고... 기침 할 땐 목도 날카롭게 아프고... 가래도 조금 있고... 지난밤엔 너무 아파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어요.”

그랬다. 몇 년 만에 단단히 든 감기에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동네 병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아침 일찍이 의사를 찾아가 내 고통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증상을 자세히 말해주어야 의사가 보다 잘 진단할 수 있을 테고 그래야 나는 이 고통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목감기가 잔뜩 들어 목소리는 쉬고 크게 말할 수도 없는 상태라 더 이상의 증상을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족 중에 고혈압이나 당뇨나...(또 여러 개를 나열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있나요?”

의사가 혈압을 재기 위해 혈압계를 팔에 감으며 물었다. 뜻밖의 질문이라 나는 의사에게 되묻고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 의사는 혈압을 쟀고, 이후, 청진기를 가슴에 갖다 대었고, 목 안을 살핀 후 진료를 마쳤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진료용 모니터 화면에서 처방약을 고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의사 선생님! 나 많이 아파서 왔거든요. 진료를 마쳤으면 환자한테 가타부타 뭐라고 말해줘야 하는 거 아녀요?’

내 상태야 내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의사라는 전문가로서의 권위가 담긴, 그러나 실은 좀 뻔한 소견으로 위로를 얻고자 했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요즘 감기 오래간다, 꾸준히 약을 챙겨 드시라, 따뜻한 물 자주 마시고 푹 쉬시라, 차도 없으면 다시 내원하라 등등...아쉬운 건 나였으므로 나는 소심하게 내 상태가 어떠냐고 의사에게 물었다. 그제야 의사는 목은 붓지 않았고 약을 처방해 줄 테니 잘 챙겨먹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속내를 드러내었다. 고혈압은 아니지만 높은 편에 속하니 나중에 검사를 받아보라고!

‘아, 그렇지! 내가 또 깜빡할 뻔 했군!’

그 병원은 나뿐만 아니라 식구들이 감기나 속이 불편해서 세 번 정도 방문했던 동네 가정의원이었다. 그때마다 의사는 정확한 원인은 정밀검사를 통해서야 알 수 있다며 검사를 권유했다. 감기 정도이고 속이 조금 답답할 뿐인데 꼭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 의사는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매우 불쾌하게 반응하곤 했다.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행동은 환자를 대상으로 자신의 전문지식을 이용하여 불필요한 검사 등을 요구하며 수익을 올리려는 얄팍한 속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몇 개월 전 가벼운 수술을 받게 되었다. 아마도 건강검진을 하지 않았다면 알 수도 없고 수술도 하지 않았을 질병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사서 고생을 한’ 셈인데, 아래 메모들은 내가 어떻게 사서 고생했는지, 그리고 질병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건강검진을 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차 안에서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때마침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한 여성의 육성녹음사연을 들려주고 있었다. 15년차 중고부부가 느닷없이 선고 받은 암이라는 질병 때문에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속으로, 또 저 뻔하고 뻔한 방송용 사연들... 하면서도, 나도 치유가 힘든 병에 걸리면 저럴까, 생각했다. 기운 달리고, 의욕 없고, 또 한편으론 초연해 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고통은? 그 고통을 어떻게 참지? 그러나 고통의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웠으므로 그 생각은 시나브로 사라져갔다(12.26)

오랜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풀었다. 얘기하다 보니 나이도 나이니만큼 건강 얘기가 빠지지 않았고 보험은 당연히 곁들여지는 사이드메뉴가 되었다. 친구들은 보험을 들지 않은 나를 보고 무지하다며 실비로 암보장이 되는 보험 하나라도 가입하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진단 나오면 안 되고 약 먹으면 안 되니까 하루라도 빨리 서두르라는 팁도 잊지 않았다(1.9)

작년 말에 한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오른쪽 유방 쪽에 뭔가 의심되는 것이 보이니 상급의료기관에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란다. 물론 나는 지금 어떤 것도 예단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나이가 조금씩 좋지 않은 것들이 퇴적되는 시점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질병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대응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병이 들고 죽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만약 내게 어떤 위중한 병이 발견된다면? 지금 죽어도 나 개인으로서는 어떠한 미련도 없지만, 질병의 고통의 크기가 어떨지 다소 두렵기는 하다. 그러나 가족에게 피해를 주며 살다가 가고 싶진 않다. 이 세상 열심히 살았는데 품위 있는 죽음을 마지막 선물로 받을 수는 없을까? 너무 과한 소망일까?(1.10)

결국, 정밀검사를 거부하지 못했다. 나는 시트에 뉘여 몸을 스캔 당한다. 의료진은 정밀검사가 필요한 곳에 마취주사를 놓고 구멍 뚫고 마구 쑤셔 대 살 몇 점을 떼어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 대책 없이 당하는 느낌. 모든 의심을 담아 증폭시키는 병원에서는 그저 관대한 처분만 기다리는 법정 앞 죄인처럼 다소곳한 태도만 요구될 뿐이다. '네', '아니오', '평소 그런 적 없는데요', '기억이 안 나네요'...

아프지 않은데, 혹시나 있을 질병을 두고 의료진은 내 몸 여기저기를 이리저리 쑤셔대고 있고, 나는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그걸 거부하지 못하고 무장해제 된 채로 누워 있고... 이 모든 게, 어처구니가 없다!(1.25)

오늘 병원에 가서 지난 주 조직검사와 촬영술, 그리고 초음파검사 결과를 들었다. 유두종세포가 있으니 제거수술을 해야 하고, 또 수술과정 중에 조직을 떼어 내 암세포가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이 필요한지 나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의사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처럼 말해 버렸으므로. 병원의 마력은, 일단 거기에 들어서면 사람의 의지와 평소 신념이란 게 정말 아무 쓸모도 없게 된다는 데 있다. 그게 못 마땅하다면? 안 아프면 된다! 젠장!(2.1)

오른 쪽 유방 아래 유두종세포 절제수술. 아침 8시에 수술실에 들어감. 간호사를 포함하여 10명 정도의 의료진이 내 곁에 달라붙고 분주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임. 프로포폴 10ml, 하는 말이 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의식을 잃음. 눈 뜨세요, 하는 말이 들림. 시각은 9시 30분. 5시 반경 퇴원. 얼굴 붓고 가슴도 부어 있음. 극도로 피곤함.(2.21)

메모는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부터 수술 받는 날까지 있었던 일들을 짧게 기록하고 있다. 메모에 잘 나타나 있듯이 나는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부터 사실 실체도 불분명한 그 무엇인가에 눌려 있었다. 검진 결과, 혹시라도 암과 같은 질병을 진단받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심, 그리고 높은 의료비에 대한 심리적이고 현실적인 부담감 등이 미리부터 나를 제압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나만 이런 공포심, 두려움, 불안에 떨고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평소 나는 질병에 대한 진단과 의료 진료에 대해 비판적인 편임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의 검사와 수술 앞에 어이없게도 이렇게 나약하게 허물어졌다. 의료행위를 받으면서 어느 한 순간도 해방되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항상 긴장해야 했고 항상 불안했다. 몇 차례의 좀 더 면밀한 검사가 필요하다거나, 수술을 해봐야 한다거나, 정상수치를 약간 벗어났다거나, 수술하고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거나... 이런 말 앞에 의연해 지기란 쉽지 않았다.

과학과 의료시스템이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지만, 불행하게도 동시에 ‘사람 몸에 가격을 매기는’(인용: 영화 《식코》에서) 일도 덩달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평생 살아도 알지도 있는지도 모를 질병들이 조기발견・조기치료라는 명목의 건강검진이란 시스템 아래에서 억지로 끄집어내어지고, 온갖 첨단기구에 의한 검사들을 강요받는다. 방송·언론·광고 등은 어떠한가. 끊임없이 질병에 대한 공포감과 두려움을 재생산해내지 않던가. 이쯤되면 의료행위의 목적이 사회구성원의 건강한 삶에 있는지 아니면 돈벌이에 있는지 혼란스러운데, 혼란스러울 것도 없다! 의료산업은 돈벌이에 목적이 있다! 자본가(의료산업자본가)는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의사)에게 계약에 의거해(실제로는 계약 따윈! 하며 무시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노동행위(그것이 때론 양심에 반하는 의료행위더라도)를 강제한다! 진주의료원 사태를 보자. 수익성악화, 재정적자를 이유로 공공의료기관을 폐쇄하였다. 왜? 공공의료기관을 민영화하여 서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돈을 짜내려하는 속셈 아니겠는가.

몇 차례의 검사와 수술을 위해 소개받은 곳은 이름 난 대학병원이었다. 솔직히 만약 큰 병에다가 오랜 시간 투병을 하고 비용이 많이 들 것으로 예상되었다면 아마도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친구들처럼 보험을 들지도 않았고(그렇다고 보험 들겠다는 것은 아니다), 모아놓은 돈도 없고, 더군다나 믿는 구석도 없으니 매우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 병원은 외형상 거의 호텔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세련되고 쾌적했으며 의료진들도 매우 친절했다. 예전의 권위적인 의사의 태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의료진의 의료행위도 매우 세분화되어 있는 듯 보였다. 환자 한 명을 두고 여러 명이 돌보고 있었는데 서로 유기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는지는 시간상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외형상 훌륭해 보이는 이 의료서비스가 모두에게 열려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처음부터 두려움 따위로 안절부절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학병원의 훌륭한 의료서비스는 지불능력이 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지 치료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작은 예를 들자면, 대부분의 대학병원은 입원할 때 상급병실을 강요하고 있는데(다인실은 언제나 없다!), 나 또한 울며 겨자 먹기로 2인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상급병실이용은 비급여대상이었으므로 나는 1박2일의 숙박료로만 거의 40만원 가까이 내야 했다. 과연 특급호텔 숙박료에 버금갔다! 그밖에 검사에 드는 비용과 수술비 등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한 달 벌어 한 달 살아가는 사람이 큰 병이라도 걸리면 빚더미에 내려앉는 건 시간문제 아닌가. 그런 병원들은 그야말로 마스크 쓰고 휠체어 타고서 텔레비전에 얼굴 비춰주는 소위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자들이나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었다.

한 사회를 알고 싶으면 최저층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저소득층이 이용하는 공공의료기관을 폐쇄하는 사회, 장기입원환자들을 병원 밖으로 쫓아내는 사회, 이윤창출을 내지 않는 인간생명은 정리되는 사회,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큰 병에 걸리지 않도록 기도하며 노심초사해야 하는 사회, 국가와 의료산업과 금융산업과 매스미디어가 한 통속이 되어 국민에게 질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조장하고 국민의 건강을 담보 삼아 그들의 파이를 키워나가는 데 열 올리는 사회... 아닌가???

나는 병원이나 의약품에 많이 의존하는 편은 아니지만, 밤새 침대 끝자락을 붙잡고 아픔을 참을 이유도,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면서 고통을 참아낼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아프면 돈 걱정 없이 훌륭한 의료행위를 통해 치료할 것은 치료받으면서 건강하게 살고 싶다. 이런 건강권은 인간이 사는 동안 마땅히 추구하고 누려야 할 기본권이 아니던가. 현대의학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질병의 치유를 누릴 수 있도록 봉사하고 기여해야 한다. 의료천국이라고 하는 쿠바가 미국의 봉쇄정책 가운데에서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료의료를 펼칠 수 있게 된 것은 생산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인간생명에 대한 가치가 달랐기 때문이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이런 가치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 것이다. 하지만 희망 한 조각마저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사회적 모순이 커질 대로 커져 거대한 폭발력을 발휘하는 그 날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노사과연>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532	의료서비스는 무슨?!	배은주｜회원	2013-07-15	1936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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