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3일, 노동사회과학연구소 부산지회 연구토론회 발제문>



8․15 해방에 관해서, 아직 운동진영 내에 통일된 견해는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민중적, 운동적 관점에서 올바로 규명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이, 민중이 주인된 미래를 개척해 나가기 위해, 혁명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른바 학교 현장에서 배웠고, 그러기 때문에 마치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8․15 해방은 강대국에 의해 주어진 해방이다”는 논리가 왜 ‘잘못된’, ‘위험한’ 관점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이 글을 쓰는 필자의 관점만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강변하고 싶지는 않으나, 최소한 적어도 “지배계급의 관점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번 연구토론회를 통해 “지배계급의 논리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운” 8․15 해방의 성격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히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1.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한 식민사관 및 그에 대항한 사학의 흐름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계급이 식민지 국가 피지배 계급의 힘을 빼는 논리는 늘상 한 가지였다.

“너희는 보잘 것 없다.”, “너희 역사는 늘 패배주의적이었다. 그러니 무릎 꿇어라.”, “우리가 너희를 보살펴 식민지로 다스려 주는 것을 고맙게,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왜? 너희의 별볼일 없는 역사를 우리가 윤택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논리에서 탄생한 것이 식민사관이고, 식민사학이었다. 여기에서는 일제가 조선을 영구히 식민지로 삼기 위해 만든 기관 및 이 기관들을 중심으로 유표한 식민사관들을 다루고자 한다. 1910년대 식민사관을 제조한 진원지로 첫 번째에 해당하는 곳은 중추원이다. 중추원이라 하면 일제가 한일강제병합 이후 그에 협조한 조선인(즉, 친일파)들을 회유하기 위한 기관으로 인식되어 있다. 물론, 틀림없는 얘기지만,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 중추원이 식민사관을 만들어내고 유포하는 구실도 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 산하에 조선사를 편찬하는 기구를 두는 방식으로. 이것이 1922년 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뀌고, 다시 1925년 조선사편수회¹⁾로 개칭된다. 뒤를 이어 1930년대에는 청구학회²⁾가 만들어진다. 이들은 과연 어떤 이론들을 생산했을까?

(1) 타율성론

한마디로 조선에, 조선 민중에게 자율적, 자주적 능력이 없다는 이론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

“너희 조선은 시종일관 중국의 속국으로 살아왔다. 중국에서 바람이 불면 너희는 흔들렸고, 자주적으로 일어서 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러니 우리 일본이 중국을 대신에 너희 조선을 지배한다고 해도 이상하거나 나쁠 것은 전혀 없다. 너희는 매양 그랬으니까.”

이 타율성론에서 파생된 것으로 대표적인 게 반도사관³⁾이다. 대륙에 붙은 반도라는 지형 자체가 어쩔 수 없이 타율성이라는 매커니즘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 내지 ‘속방’이라는 게, 제국주의 종주국과 식민지의 관계와 동일하다는 식의 논리처럼 역사에 대해 무지하고, 천박한 논리도 없다. 중국은 한대 이후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근거하여, 주변국가들을 제후국으로 간주하고 천자에 대한 정례적인 사대(事大)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주변국은 중국에 대해 조공을 바치고, 중국은 주변국에 대한 답례로 하사품을 내림과 동시에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해주는 책봉 정책을 통해 상호 간의 정치적 관계를 유지시켜 나갔다. 비록 조공이 형식상으로는 천자국과 제후국, 즉 종주국과 속국의 모습을 띠었지만,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불과했을 뿐, 실제로 정치적인 주종관계를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조공·책봉 관계는 주변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해 중국과의 마찰을 피하고, 자신의 통치영역 및 그 주변에 대해 권위를 세우기 위해 중국의 권위를 채용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상호공존을 바탕으로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형성한 것이었다. 고구려와 신라도 그런 방식의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바 있는데, 그런 사실 하나로 오늘날 우리는 신라가 고구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2) 임나일본부설

삼국시대 한반도 남쪽에 임나일본부가 있어서, 일본이 백제와 신라로부터 조공⁴⁾을 받았다는 이론이다. 즉, 한반도 남쪽을 임나일본부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를 통해 일제는 조선 민중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옛날에도 그랬으니, 지금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을 하등 이상하거나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라.”

(3) 당파성론

이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일본의 어떤 학자는 우생학⁵⁾적인 연구결과까지도 끌어들였다 한다. 무슨 말일까?

“조선인의 피에는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어 당파싸움이 계속되었으며, 이는 결코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성리학자들이 당으로 쪼개져서 정쟁을 펼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이를 전체 역사로 확대하여 일반화시키는, 즉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결코 채용해서는 안 될 오류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혹은 비슷한 유형의 당쟁이 일본에 없었느냐면, 결코 아니다!  일본도 헤이안 시대 이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까지 몇 백년의 역사가 다이묘(봉건 영주)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세력 싸움으로 점철된 역사이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당파성론은 조선인의 본성을 폄훼하기 위해 가공해 낸 억지 이론일 뿐이다.

(4) 정체성론

조선의 역사에 발전이란 것은 없었고, 옛날의 농업국가가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을 통해 일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너희 식민지 조선은 우리 일본에 대해 고마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고대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심하고도 한심한 조선이 일본 덕에 근대화되었으니까!”

이렇게 ‘역사’를 동원한 식민지 정당화론에 맞서, ‘역사’의 이름으로 조선 역사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조선이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이론들도 있기 마련!!

(5) 민족주의 사학

이름 그대로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사학이다. 주로 1920년대에 활동한 사학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신채호와 박은식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신채호에 대한 사실만 간단히 약술한다.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라는 저서에서 ‘낭가’를 강조한다. 여기에서 ‘낭’은 화랑도의 ‘낭’을 의미한다. 왜 그가 화랑도에 주목했을까? 산천을 누비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정신, 진취적인 기상, 이런 것들의 집약적인 표현이 화랑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1930년에 발표한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며, 이런 투쟁을 통해 역사가 발전해 왔다.”

물론, 그가 말하는 ‘아(我)’는 조선이고, ‘비아(非我)’는 주변 국가(민족)들을 뜻한다. 역사가 주변 국가(민족)와의 투쟁 과정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도 일제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고, 그 싸움을 통해 역사의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6) 사회경제사학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가 이 흐름을 대변한다. 1920년대에 들어온 사회주의를 반영한 사학이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해 당시 일제의 식민사학의 대표적인 이론인 정체성 이론을 통렬히 비판한다. 즉, 사회경제사학이 가장 강조점을 두었던 것이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변화․발전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발전법칙에 따라 발전하며, 이는 어느 나라, 민족에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갖는다. 이 사학은 유물사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유물사관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관념에 두고 있지 않고 물질에 있다고 보는 사관이다. 이 사관에 따르면 역사에는 발전의 법칙이 있고, 그 발전의 논리적 순차는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사회주의(실제의 이행은 이와 사뭇 다르다)이다. 자본주의까지의 어떤 생산양식이건 자체의 모순(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에 터한)을 가지고 있고, 이 모순이 임계점에 이르러 폭발했을 때 혁명 등의 수단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이론이다. 이런 패턴은 지역에 따라 시간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핵심적인 틀에 있어서는 유사하다. 즉,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위에서 잠깐 약술했지만, 일제의 식민사관 중 정체성론을 통박하는 데 이 사학이 아주 유용한 학문으로 역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체성론의 핵심은 조선의 역사가 일본의 고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인데, 사회경제사학에 따른다면 그런 역사란 있을 수 없다. 일본 역사가 발전했듯, 시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조선의 역사도 발전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2. 민중의 편에 선 역사가 참된 역사!

왜 민중의 편에 서서 역사를 보아야 할까? 우선 민중이야말로 어느 시대를 통해서나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해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노예제 사회의 노예 소유주를 제외한 수많은 평민들, 봉건 사회의 왕과 봉건 지주(영주) 및 고위 성직자(불교 승려, 가톨릭 대주교, 유학자 등)들을 뺀 농노와 수공업자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소수 자본가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소수 정치인 등을 제외한 노동자․농민․도시빈민․소부르주아 하층 등은 모두 민중이다. 우리가 어느 한 편에 설 수밖에 없다면, 이들 다수의 편에 설 때에만 역사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소수 정치 지도자와 사상가들에 관한 역사는 인구 구성상 어쩔 수 없이 사회의 극소수에 관한 역사이다. 그리고 그들에 관한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정치사나 사상사가 되어 인류의 삶 가운데 극히 제한된 영역만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인류가 이룩한 생산력의 발전과 경제구조의 변화, 그에 따라 일어난 정치․문화적 변화 등을 모두 포함하는 역사야말로 인류의 진정한 역사이다. 또, 민중의 편에 선 역사가 참된 역사가 될 수 있는 것은 민중이야말로 사회의 변화 발전을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차별, 소수 지배자들의 지배를 당연하게 여기는 거꾸로 된 역사는 그러한 차별이 철폐되는 사회적 진보와 변혁 그리고 발전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중은 그러한 차별의 철폐를 통해서만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어느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식민지가 되거나 제국주의 침략을 받을 때 가장 고통을 받는 계급계층 또한 민중이다. 그래서 민중은 언제나 그들이 속한 민족의 자주 독립과 해방을 위해 제국주의 침략자 및 그에 부화한 소수 지배계급에 대항해서 싸우게 된다. 그러므로 민중의 편에 선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적 입장에 선다는 것과 같은 뜻을 지닌다. 따라서, 민중의 편에 섬으로써만 우리는 다수의 전체적인 역사, 즉 ‘과학적인 역사’에 이를 수 있고 나아가 과학적인 역사의 도움을 받아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앞당겨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민중의 편에 선 역사 이해라고 해서 완전 무결하고 절대적으로 진실된 역사라고 맹신해서는 안 된다. 민중의 계급적․당파적 이해를 대변하는 역사는 다른 사회 계급계층을 대변하는 역사보다 훨씬 진실에 가까운 역사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올바른 태도이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민중의 요구와 희망 또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역시 변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민중은 남녀(여남)가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민중이 역사를 썼더라도 아마 남녀(여남) 차별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그 논리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지금은 남녀(여남)가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렇듯 민중의 역사 이해 또한 사회의 발전 과정에 따라서 점차 발전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사회의 발전이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에 결국 민중의 입장에 선 역사라 하더라도 계속해서 새로 쓰여져야 할 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통박하고자 하는 8․15 해방에 대한 지배적 담론인 ‘주어진’ 해방이라는 담론은 그 자체로 반민중적이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이 관점이 움직일 수 없는 관점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 발전에 부수하여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바뀌어야 하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왜 그것이 반민중적 담론일까? 후에 상술하겠지만, 이 담론을 수용하게 되면 해방에 있어서의 민중의 역할을 사실상 사상, 무시하는 것으로 되고, 미 제국주의의 역할을 강조하게 되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주어진 해방’ 담론은 변형된 ‘타율성론’ 이다!

3. 조선민족의 해방에 대한 기성 담론 뒤집기!

그 동안 학교 교육 및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이식된, 우리 민족의 해방에 대한 주된 담론은 '주어진 해방', '어부지리로 얻은 해방'이란 담론이다. 여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민족의 해방은 식민지 지배자인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이라는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일제를 패망으로 몰고 간 주된 힘이 어디에서 나왔느냐인 것이다. 그 힘의 원천이 소위 미국에 의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지역의 원자탄 투하 덕일까? 그렇게 본다면 너무 단순하고 즉자적인 시각일 것이다. 일본의 패망에 있어서 미국의 역할이 컸다는 점에 있어선 필자도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역시 주지하는 사실이겠습니다만, 미국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우리가 '태평양전쟁'⁶⁾이라고 부르는 전쟁의 핵심 지역은 미국과 접전을 벌이고 있던 태평양 해상이 아니라 만주와 북중국, 그 중에서도 동만주 지역이다. 일본이 전쟁을 도발한 궁극적인 목적은 동아시아 대륙을 제패하는 것에 있었고 만주는 바로 이러한 대륙침략의 교두보였던 것이다. 미국조차 가장 막강한 부대라고 평가했던 관동군을 이 지역에 배치한 이유가 이에 있는 것이다. 이들이 지닌 위력은, 미국이 독자적으로 이와 대결할 때 1년 이상의 전쟁과 100만 명 이상의 군사적 희생을 각오해야 할 정도였다. 이런 관동군을 포함하여 일본 육군의 대부분과 대결한 것은 기실 미군이 아니라 아시아 민족과 쏘련이었다. 특히 동만주 지역에서의 조선 민중과 중국 민중의 항일 무장투쟁은 일본의 대륙침략에 대해 심대한 차질을 일으켰다.

물론, 8월 15일에 단행된 일본 군국주의의 괴수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의 직접적인 요인은 6일(히로시마)과 9일(나가사키)의 원자탄 투하에 의한 것이었고, 김구 선생이 개탄하였다시피 광복군 병력이 한반도로 진공해 결정적으로 일본군을 몰아낼 기회를 놓친 측면은 있다. 대단히 아쉬운 지점임은 맞다. 하지만,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측면들을 과장해 우리 민족의 해방이 외세에 의해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당시 우리 민족을 둘러싼 객관적인 조건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 전쟁은 파시즘 진영과 반파시즘 진영 간의 전쟁이라는 측면과, 제국주의 국가 간의 상호 대립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지닌 전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국제 반파시즘 진영(미국과 쏘련을 포함한)에 의한 일본 군국주의 타도는 하나의 필연이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 순수하게 일본을 '축출' 한다는 설정이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아울러,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일본 군국주의 타도에 있어서 우리 민족이 극히 중요한, 핵심적인 역할 및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교두보가 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혹독한 억압의 대상이 된 반면, 그것의 당연한 결과로서 일제의 패망으로 인한 '혁명의 결정적 시기'를 보다 손쉽게 맞이했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민중 자신의 힘으로 주권을 손에 넣고 자신의 요구에 따라 자주적으로 그 주권을 행사했는가'에 있는 것이다.

정말 외세에 의해 해방이 주어진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1)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의 ‘조선의 독립’ 언급

우리가 투쟁의 과정을 통해 얻은 단순하고도 명징한 진리지만, 지배자들은 민중이 싸우지 않는 이상 그들이 민중으로부터 탈취한 것을 절대로 내놓으려고도 심지어는 양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비록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단서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조선민중의 독립을 향한 열망과 투쟁이 그만큼 치열했고, 독립투쟁의 역사가 얼마나 피와 땀으로 서려 있었는지를, 그러기에 조선의 독립은 정당성을 가지고,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 제국주의 지배자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데 어째서 ‘주어진’ 해방인가?

(2) 독립운동역량들의 끈질긴 노력들

국내에서는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이 움직이고 있었다.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진 징후들을 여운형은 여러 통로를 통해 접하고 있었고, 결정적인 시기에 그들로부터 정권을 인수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관내에서는 우한(무한)의 한커우(한구) 지역에 있던 조선의용대가 이동한다. 일부는 충칭(중경)으로 이동해 그곳에 있는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고, 나머지는 옌안(연안)으로 가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된다. 이 조선의용군은 조선독립동맹의 산하부대로, 해방 후 북(조선)에 들어와 혁명세력과 결합하게 된다. 이른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원래 외교독립론에 근거해 각국 외교관서들이 입주해 있고, 프랑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특징을 지닌 상하이에 근거를 두어 활동을 벌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봉창․윤봉길 등 한인애국단의 활약을 통해 중국 정부(장개석)로부터의 승인과 지원을 얻을 수 있었고, “직접 총을 들고 한반도로 진공해 일장기를 끌어내려야만 세계질서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김구의 의지로 광복군을 창설했고 영국군과 연합해 미얀마 등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항일무장세력은 1936년 5월 5일, 조국광복회⁷⁾를 건설하여 장백현 일대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기 시작했다. 국내로도 정치활동가를 파견하여 항일운동세력과 연계를 맺어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건설한다. 1932년 4월 항일유격대를 결성한 항일무장세력은 한중 국경지대에서 민족해방투쟁을 강화할 만큼 역량이 성장해 있었다. 그들은 적이 강대하게 보일 때가 가장 취약한 때라 판단하고 항일무장역량과 조국광복회를 비롯한 항일조직역량을 총동원하여 대부대에 의한 국내진출계획을 세운다. ‘국내진공작전’이라 명명된 이 계획은 총 세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김일성 부대의 별동대인 최현부대의 두만강변 북부국경일대로의 진출, 다른 하나는 린장(임강), 창바이(장백) 일대로의 진출, 마지막 하나가 적의 공격이 두 지역에 집중되어 있을 때 김일성 부대가 혜산 방면으로 들어가서 총성을 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돌발사태가 생겼으니, 일본 국경경비대가 대대적으로 동원되면서 최현부대가 그들에게 포위되는 위기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항일무장세력에게는 최현부대를 구출하면서도 국내 진출에 성공하기 위한 작전이 필요했다. 김일성 부대는 그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니, 이 작전이 역사에 남을 ‘보천보 전투⁸⁾’이다. 그 때가 1937년 6월 4일! ‘금성철벽’ 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경계가 삼엄하였지만 항일무장대오는 압록강을 건너 국내진공에 성공하였다. 보천보에 대한 입체적인 정찰활동 후 한 발의 총소리를 신호로 김일성 부대의 전투는 삽시간에 전개되었다. 일본 통치기관들이 화염에 쌓였고 보천보의 민중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김일성 부대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억세게 싸워나갑시다.”라는 연설을 하고 철수했다. 이 전투는 비행기도 탱크도 동원하지 않았던 조그마한 전투였지만, 일제에 큰 충격을 주고 국내 민중들에게 조선 해방의 희망을 안겨준 전투였다.

보천보 지역 근처 지양개에서는 항일무장세력의 면모를 과시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지양개 민중들과 함께 한 지양개 군민경출모임이었다. 단오를 앞두고 보천보 전투를 전개했던 항일무장세력은 이곳에 집결해 민중들과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해 먹고 그네도 뛰고 노래도 부르며 춤도 추면서 흥겨운 경축모임을 가졌다. 이 항일무장투쟁은 새세대 청년운동가들이 군대를 조직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⁹⁾ 이후 일제의 조선민중에 대한 수탈과 억압의 강도는 더욱 심각해졌고 농민들의 소작쟁의와 반일투쟁이 연거푸 일어났다. 농민은 투쟁위원회를 구성해 10만이 참여하는 추수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 투쟁은 경제투쟁이면서도 일제를 반대하는 정치투쟁과 밀접히 결합시켜 나감으로써 시종일관 일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또 이 과정에서 조선과 중국 양국 민중들 간의 단결력이 높아졌고, 대내외 진보적 역량들과의 연대가 공고해졌다. 이런 조선민중의 항일투쟁경험을 분석하면서 새세대 청년운동가들은 무장투쟁을 결심한다. 마침내 1931년 12월, 그들은 명월구¹⁰⁾에서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항일전쟁을 선포한다. ‘무장에는 무장으로!’

새 세대 청년운동가들은 항일유격대의 결성을 위해 무기와 사람을 준비하기 위한 투쟁을 펼쳤다. 총알 하나 없었던 그들은 두만강변의 모든 곳에서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대중운동을 전개하고 병기창을 만들어 무기를 직접 만들었다. 또한 적위대와 소년선봉대, 소년탐험대 등 반(半)군사조직의 훈련을 강화하고 대열을 확대하며 정치군사적으로 준비된 청년들을 군사조직으로 묶었다. 1932년 4월 25일, 드디어 항일무장세력은 항일유격대 창건식을 갖고 무장투쟁과 대중운동을 강화하여 전민족적 항쟁으로 조선의 해방을 이룩할 것을 결의한다. 이후 항일유격대는 만주에서의 수많은 전투를 통해 승리의 경험을 쌓고 힘을 기른 뒤 마침내 국내로 진공한다. 이 역사적 사건이 바로 보천보 전투였고 이는 조선의 해방을 위한 전민항쟁의 신호탄이었다. 항일무장세력은 항일전쟁을 선포하면서 백두산에 근거지를 설치해 국내로 진공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는다. 이 곳은 압록강, 두만강 주위의 대산림 지대에 둘러싸여 있어 유격전을 전개하기에 유리할 뿐 아니라 광범한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형성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항일무장세력은 이곳을 거점으로 해서 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조선 해방의 서광을 앞당겼다. 이곳은 국외의 항일무장세력과 국내의 항일운동세력이 하나가 되어 조선해방을 위한 전민항쟁을 전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전략적 거점이 되었다. 또, 위에서 약술했지만 중국의 중경에서는 임시정부(주석: 김구)가 이끄는 한국광복군이 조직되어 국내 진공을 위한 맹훈련에 돌입하고 있고 연안(옌안)에서는 1942년 조선독립동맹¹¹⁾이 조직되어 화북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역시 국내 진공을 꾀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도 1944년 8월, 여운형을 중심으로 서울에 ‘건국동맹’이 결성되어 국외 독립운동세력과 연락을 계속 취하면서 해방을 맞을 날을 적극 준비해 나갔다. 물론 항일무장역량들의 국내, 특히 서울 진공이 미국의 원자탄 투하와 뒤이은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좌절되었지만, 이 부분만을 부풀려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고 단정짓듯 말하는 것은 이같은 피어린 투쟁들에 대한 모욕이기도 할 뿐더러 역사를 대단히 단편적으로, 협소하게 보는 시각이 아닐까 한다.

(3)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의 행정권 인수, 3일간 총독부 앞에 의연히 게양된 태극기

마침내 1945년 8월 15일이 밝았다. 이 날, 건국동맹(해방 후 바로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된다)을 비밀리에 조직해 활동하던 여운형은 총독부의 엔도 정무총감을 만난다. 그 배경을 보자. 쏘련을 중심으로 한 반제 반파시즘 역량의 단결과 투쟁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이지만 일시적으로 이들과 연합한 미국에 의해 무참히 패배한 일제, 특히 그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는 한국에서 전민항쟁이 일어날 사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조선 체류 80만 일본인의 안전과 재산의 보호, 10만 군대의 해체와 철수 등 항복 후의 사태를 염려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이전에 지극히 경계하고 탄압한 장본인인 여운형을 교섭 상대로 삼은 것이다.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지은 ≪나의 아버지 려운형≫에 따르면, 이날 엔도 정무총감의 표정은 지극히 침울했으며, “우리는 망했소”라며 여운형 앞에 고개를 떨구었으며 그 추한 몰골을 여운형이 대단히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다. 이때, 여운형은 총독부의 행정권 인수인계 요청에 동의하면서, 다음의 5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1. 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 조선의 수도인 경성에 3개월 분의 식량을 확보할 것.

3. 치안의 유지와 건설사업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말 것.

4. 조선의 추진력인 학생들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 것.

5. 조선 내 각 사업장에 있는 일본 노무자들을 조선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킬 것.

조선총독부 자신들에게는 얼마나 굴욕적인 조건인지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그럼에도 이를 수용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행정권을 넘겨주었고, 그에 따라 총독부를 비롯한 주요 건물에 태극기가 의연히 게양되기에 이른다. 여운형은 8월 17일, 부서 결정을 완료하고 ‘치안의 확보,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량의 일원화, 교통․통신․금융 및 식량대책의 강구’ 등 건국준비위원회의 설립 목적을 표방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로부터 극히 신속하면서도 광범위하게 건국준비위원회가 도처에 건설되었으며 8월 말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지방 수준에서부터 인민위원회로 신속히 전환했고, 북조선의 상당 부분과 남조선의 일부 지역¹²⁾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당해 지역 민중들의 손에 의해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인민위원회는 대체로 조직부, 선전부, 치안부, 식량부, 재정부를 갖추었으며 지역적 특성에 따라 보건후생, 귀환동포, 소비문제, 노동관계, 소작료 등의 문제를 다루는 부서를 설치했다. 전체적으로 지방의 인민위원회들은 그 내용에 있어 유사한, 사실상 일치하는 강령을 내걸었는데, 한 예로 경남 통영 지역의 인민위원회는 모든 일본인 재산의 반환, 모든 토지와 공장의 노동자 농민 귀속, 모든 남녀의 동등한 권리 향유 등을 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이 인민위원회들은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와 신뢰를 받았다. 그 외 건국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적 조직으로 8월 16일 건국청년치안대가 조직되었으며,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치안조직들과 통합하여 건국치안부로 재차 출범했다. 또, 일제에 강제 징집되었던 사병들을 중심으로 국군준비대가 창설되었으며 약 6만여 명의 인원을 확보하면서 그 중 일부는 군사훈련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공장들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조합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해 자주적으로 관리해 나갔다. 농민들은 모든 곳에서 농민조합을 결성한 뒤 일본인과 친일 지주들로부터, 빼앗긴 토지를 되찾거나 소작료 인하를 단행했다. 소위 ‘주어진 해방’이란 논리로 이러한 모습들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그래도 조선 민족의 힘만으로 된 게 아니고 미국이나 쏘련의 역할도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보고, 더 심도 있게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4. 변혁의 주된 역량, 다른 나라 해방의 사례들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의 주된, 핵심적인 담지자는 주지하다시피 노동자 계급이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의 억압, 착취를 겪는 모든 계급계층과의 연대연합 없이 체제를 뒤엎을 수는 없다. 그리고 대단히 특수한 조건, 전쟁과 파시즘에 직면한 상황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역량이라면 비록 자본가 계급의 성원이라 하더라도 연대, 연합할 수 있다. 맑스레닌주의는 피억압국과 종속국의 ‘민족부르주아지’는 일정 조건이 갖춰진다면 민주변혁의 참가자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물론 철저하지 못하며, 노동계급의 혁명적 진출을 두려워해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속성을 이들은 지니고 있지만)되는 점도 아울러 밝혀둔다. 게다가 제국주의와의 투쟁은 당해 식민지 민중들만의 ‘순수한’ 투쟁만으로 그 승리가 담보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투쟁에 우호적인 모든 국제역량의 지원과 지지를 수반하여야 그 승리가 가능하다. 주지하다시피 조선민족의 해방은 식민지 종주국인 일제의 패망을 결정적 조건으로 하여 이뤄진 것이다. 파시즘과 세계대전이라는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위에서 약술했지만 국제 반파시즘 진영(미국, 영국 등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제국주의 국가들도 일시 포괄하는)의 단결에 의한 일본 군국주의 타도는 하나의 필연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러기에 ‘주어진 해방론자’들이 잘못 이해하는 기본 바탕에 깔려 있는, “순수히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 일제를 축출한다”는 가정은 말 그대로 성립 불가능한 이야기일 따름이고, ‘과학’이 아니라 ‘공상’이다. 그리고 위에서 상술하였다시피, 이 과정에서 조선민중의 각종 항일역량이 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유념하기 바란다. 결론짓자면, 조선 민중은 한반도가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교두보가 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혹독한 억압의 대상이 되었던 반면, 일제의 패망을 조건으로 “혁명을 위한 결정적 시기”를 보다 손쉽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민중 자신의 힘으로 주권을 장악하고 그 주권을 자주적으로 행사하였는가?”에 있는데, 위에서 상술한 인민위원회의 존재, 자주적 치안조직, 노동조합, 농민조합 등의 활동이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다. 이 문제를 세계 정세로 결부시켜 구체적으로 논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 진영과 반파시즘 진영과의 대립이라는 성격과,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로 치고받은 전쟁이라는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는 전쟁이다. 이의 결과물로, 제국주의 진영은 미국, 영국 등 일부 국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급격하게 그 지위가 약화되었다. 당시 피억압 민족들의 정치적 독립과 사회주의 변혁은 이같은 제국주의 세력의 패배에 터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 제국주의 열강과 그 지원을 받는 국민당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던 그곳 민중들은 그에 더해서 일본 군국주의의 군사적 침략에 봉착했다. 이에 따라 주요 모순이 일본 군국주의와 중국 민중의 대립으로 전화되었던 것이다. 이 때 국민당은 사실상 일본 군국주의에 타협했고, 오히려 공산당이 항일 투쟁에 적극적이었고, 토지 문제 등에 있어서도 진보적인 구실을 했는지라 민중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일본 군국주의는 중국 민중을 포함한 국제 반파시즘 진영의 단합된 투쟁으로 중국에서 패배하였다. 이제 중국 민중에게 던져진 과제는, 제국주의 열강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미처 진용을 재정비하지 못한 틈을 타서 반동적인 국민당 세력을 제압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는데, 중국공산당과 민중은 그 과제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것이다.

베트남의 경우도 그렇다. 그 나라는 오랜 세월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경험했다. 그러던 차에 일본 군국주의가 이곳을 침탈해 주인의 지위를 강탈한 것이다. 그랬다가 중국의 경우처럼, 베트남 민중들의 투쟁과 국제 반파시즘 진영의 역할로 말미암아 패망하여 물러가게 된 것이다. 이 지역의 변혁운동을 지도하던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쏘련, 미국, 영국 등 연합국과 협력하면서 정권 탈취를 준비했다. 1945년 8월 13일부터 15일에 걸쳐 열린 인도차이나 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회의는 전국에서 총봉기하여 정권을 탈취하자는 결의를 통과시키고 총봉기를 지도할 위원회를 조직했다. 8월 16일부터 17일에 걸쳐 베트민은 전국 각지의 각계 각층과 애국단체 및 국외의 베트남 거류민 등 대표자로 구성되는 100여 명 규모의 전국인민대표회를 소집했는데, 회의는 인도차이나 공산당 및 베트민¹³⁾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권을 탈취하여 완전한 독립의 기초 위에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한다.”, “무장인민을 확대하여 베트남 해방군으로 한다”는 내용을 기본으로 하는 10대 강령을 제정하고, 호치민을 주석으로 하는 민족해방위원회를 조직했고, 이 역량을 기반으로 8월 24일 일제의 괴뢰 바오다이 황제를 퇴위시키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렇듯 베트남 민중 역시 제국주의 열강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가 함께 무너지는 결정적 시기를 이용하여 봉기를 단행해 독립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동부 유럽 제국들도 비슷했다. 나치 세력의 침공은 이 지역의 봉건질서를 크게 교란시키는 구실을 했다. 한편으로 파시즘에 대한 저항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이 민중 속에서 급격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치 침략세력이 패퇴한 후, 기존 봉건지배세력은 나치에 협력하거나 전쟁 중 망명을 했던 탓으로 정치적 파산을 면키 어렵게 되었고,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비록 이 지역에 진주한 쏘련군의 구실이 있었지만) 사회주의자들이 인민정부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에 견주었을 때, 조선 민족의 '해방'이 국제 반파시즘 진영의 승리를 조건으로 하여, 제국주의 세력의 지위가 급속히 약화된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피억압 민족의 해방에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의 일부인 것이다. 단지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 장악을 노리고 있었던 미국에 의하여 이 조건들을 활용한 독립국가 건설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하는 데에 실패했을 뿐이다. 그것을 두고, '주어진 해방'이니 하며 단정짓는 것은, 역사의 발전법칙에 대한 몰이해의 소산임과 동시에, 그런 말을 하는 당사자들이 주관적으로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외세(미 제국주의)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시켜주는, 그리고 분단을 수용하는 친제국주의적 수사 및 민족사에 있어서 민중의 역할을 협소하게 보는 고루한 견해에 불과하다.

남조선 지역에 대한 군정을 선포한 맥아더의 포고문 일부를 인용하겠다.

제 4조 모든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하에서 발포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또는 공공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미제는 조선 민중의 항일무장역량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몹시 두려워하고 혐오하였기 때문에 이를 포고문에 반영하였던 것이다. 반파시즘 진영을 주도한 쏘련 측을 대표하여 북조선에 들어온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을 인용한다.

“조선인민들에게! 조선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驅逐)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땀과 노력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인민이 영웅적으로 투쟁하여 꾸준히 노력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일제의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자!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일하였는가? 왜놈들이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사람들을 멸시하고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도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버렸다. 조선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조선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들을 회복시켜라! 새 생산 기업체를 개시하라! 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의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및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의 조선 민중과 중국 민중의 항일투쟁을 인적, 물적으로 지원한 게 쏘련이다.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미국조차 대단히 두려운 상대로 여겼던 관동군을 패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 일본이 발목잡힌 채 만신창이가 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원자탄을 투하했다 해도) 미국이 그같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겠는가? ≪찢겨진 산하≫라는, 여운형․김구․장준하의 가상 대화를 중심으로 씌어진 책에 의하면, “일제 식민지를 경험하고 해방된 조선 민족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준 쪽이 있다면, 그것은 쏘련이었지 미국이 아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소위 ‘주어진 해방’논리는 한 마디로 말해 “미국이 조선 민족에 해방을 선사한 나라이고, 흉악한 공산주의로부터 한국민을 구출한 은혜로운 나라이니, 그들에 감사하고 분단을 수용하라”는 논리이다.

5. 지배계급의 담론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워지기!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지만, 지배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한사코 유지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피지배 민중들의 정치적 각성 및 자신네 지배담론으로부터의 이탈을 대단히 두려워한다. 세계대공황에 봉착해 이제 파시즘과 전쟁으로 회귀하는 것 말고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이 없게 된 ‘애물단지’ 자본주의! ‘애물단지’ 자본가 세상! 진정 끝장내고 노동자 계급이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 변혁을 이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의식적으로 우리는 지배계급의 담론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아니,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언론지상을 통해 보고 듣는 것, 학교 등지에서 배워온 것들이란 게 실은 자본주의 체제,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것 투성이이지 않은가? 우리가 무심결에 쓰는 말 한 마디라도 “혹시 이게 자본가 계급이 좋아할 말이 아닌지?”라고 스스로 되묻고, 최대한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에 걸맞는 쪽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예를 들어보자. 공식적으로 ‘민주화운동’으로 복원된 역사적 사건인 광주항쟁을 두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광주사태’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 표현에는 광주 민중들의 투쟁을 다음과 같은 태도로 대한 세력, 계급의 이해가 녹아 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지난 18일 수백 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제기된 평화적 시위가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동한 데 기인한 것입니다.

<경 고>

1. 지난 18일에 발생한 광주지역 난동은 치안질서를 매우 어지럽히고 있으며, 계엄군은 폭력으로 국내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하여는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2. 지금 광주지역에서 야기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법을 어기고 난동을 부리는 폭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의 주민 여러분은 애국심을 가진 선량한 국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량한 시민 여러분께서는 가능한 한 난폭한 폭도들로 인해 불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거리로 나오지 말고 집안에 꼭 계실 것을 권고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아끼는 고장이 황폐화되어 여러분의 생업과 가정이 파탄되지 않도록 자중자애 하시고 과단성 있는 태도로 폭도와 분리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계엄군의 치안 회복을 위한 노력에 최대한의 협조 있기를 기대합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저항에 대한 살벌한 경고가 번뜩이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광주사태’란 말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쓰는 것은 사실상, “나는 그 당시 광주에서 계엄군이 폭동을 진압한 일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그러는 순간, 민중들의 자기해방 투쟁을 중심으로 보는 관점은 사라지는 것이고 지배계급 우위의 관점이 들어서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인상 투쟁에 대해, 나름 진보적이라는 언론조차도 “물가인상에 약간은 영향을 미친다”는 식으로 악선동하는데, 노동자 계급 사상으로 무장하지 않는 이상, 임금인상 투쟁이 물가상승을 불러온다는 지배계급의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애쓰지 않는 이상, 노동해방과 사회변혁에 올바로 헌신하겠다는 태도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8.15 해방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단 하나! “주어진 해방이었지 않느냐?”는, 학교 현장에서 배워왔던, 기실 분단을 유지하고 미제국주의의 남한 강점을 옹호함으로써만 그 생명과 기득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남한 지배계급의 입장이 담겨 있을 따름인 그 논리를 벗어던지지 않는 이상, 분단의 철폐와 통일, 그것과 맞물려 진행되고 진행될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 변혁에의 올바른 헌신을 기대하기란 어렵다고 감히 단언한다. 이 글을 쓴 필자는 10년 전 민주노동당에서 ≪제국주의와 한국사회≫라는, 진주 경상대의 ‘진보적’ 교수진이 지은 책을 학습했다. 그 때 강의를 담당한 당시의 민주노동당 지도급 인사가 8.15 해방에 대해 “주어진 해방”이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바로 그 인사, 그 인사가 몸담은 민주노동당이란 정당이 어떤 정당인가?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볼모로 붙잡고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틀 내에서 노동자계급에게 개혁과 복지, 진보를 선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고 사민주의를 옹호하는 인사다. 그 사민주의는 제국주의의 2중대, 신자유주의의 어릿광대임이 세계사적으로 입증되었고, 한국에서도 특히 이명박 집권 이후 그 지도자들의 ‘묻지마 야권연대’ 전략, 통합진보당 창당, 신자유주의자 문재인․안철수 진영으로의 투항 등 너절한 모습을 노정하면서 이념적으로 파산했음을 대중적으로 입증했다. 또 겉으로는 자신들이 가장 원칙적인, 국제주의적인 사회주의자라고 표방하는 뜨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한다. 그들은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김하영)라는 책을 통해, 조선의 해방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탄핵, 공격하고 조선의 해방이 미군과 쏘련군의 탱크에 의해 ‘선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그들이 과연 이후 전개될 반제국주의 투쟁, 반자본주의 투쟁을 이끌 수 있을까? 단언컨대 불가능할 것이며, 그들은 그들의 사상적 원조인 뜨로츠키가 그랬던 것처럼, 결정적인 시기에 제국주의의 주구 노릇을 할 것이다. 이들의 행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바는 아래와 같다.

“주어진 해방”이란 시각과 과감히 단절하자!

지배계급의 논리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워지자!

역사에 대해 노동자 계급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최대한 노력하자!

다음과 같이 결론지으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조선의 해방은 비록 아쉽고 쓰라리지만, 결코 주어진 해방이 아니다. 당시 여타 피억압 민족들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국제 반파시즘 진영의 승리에 터해, 제국주의 진영의 약화에 터해 쟁취한 해방이다. 다만, 일제를 대신한 미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에 효과적으로 맞서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민중들은 전평 등 민주노조운동, 인민위원회 건설, 모스크바 3상 회의 이행촉구 운동, 제주항쟁, 여순항쟁, 빨치산 투쟁 등 영웅적인 투쟁으로 맞섰으며, 이 때문에 미제국주의로서도 형식상 독립국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기화로 한반도 전역을 집어삼켜 중국과 쏘련을 바로 코 밑에서 위협해 보려던 게 저들의 속셈이었으나, 무참히 좌절되었으며, 남한 민중들은 그 이후 민주화 투쟁,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을 통하여 서서히 미제국주의와 그에 결탁한 남한 지배계급의 힘을 약화시키고 역사를 전진시켜 왔다. 이 역사를 어떻게 단칼에 ‘주어진 해방’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미제국주의에 의한 남한 강점 및 민족분단을 인정하는 논리에 다를 바 아니며, 그에 맞서 피흘려 싸워온 역사를 송두리째 깔아뭉개고 부정하는 행위에 다를 바 아니며, 엄연한 의미에서의 식민사관, 타율성 논리에 불과하다.” <노사과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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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성, 「한 눈에 사로잡는 한국사 강좌」, 도서출판 들녘, 1987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1988

소볼레프 외 저 ․ 김영철 편역, 「반제민족통일전선 연구」, 1988

정선 외 저, 「21세기 역사이야기」,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