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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먼지 없는 방에 무얼 채워 넣어야 할까?
이 만화 ≪먼지 없는 방≫(김성희 저 ｜ 보리)의 주인공 정애정씨를 직접 본 건 지난 2월 연구 토론회 때였다. 토론회 발표자로 참여하셨는데 그 분을 보며 든 느낌은 이거였다.
‘해맑다.’ ‘순수하다.’ 그리고 ‘착하다.’
발표 내용과는 무관하게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난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해맑고 순수하고 착한 사람을 보면 기분 좋으니까. 토론회가 끝나고(정확히 말하면 뒤풀이가 끝나고 술이 좀 오른 상태에서) 난 그분에게 ≪정세와 노동≫에 글을 써 주십사 부탁했고 정애정씨의 글은 ≪정세와 노동≫ 4월호에 실렸다. 실린 글을 읽으면서도 토론회에서 느꼈던 그 모습만 떠올랐다 (그렇게 비장한 글이었음에도!). 그리고, 서평을 쓰기 위해 만화를 보면서 내 느낌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정애정씨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지 말라는 건 안 해. (남들이) 지키라는 거 다 지키면서...”
“삼성반도체는 우리에게 하나의 믿음이 되기에 충분했어요.”
남편 황민웅씨를 백혈병으로 떠나보낸 뒤 그는 대한민국의 보통 엄마들처럼 아이 생각만 한다. 여전히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생산라인에서 교대로 근무하면서 말이다 (남편을 그 지경으로 만든 그곳에서!). 그리고 교대 근무하면서 아이 키우는데 지장이 생기자 사무직으로 이직 요청을 하고 그것도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어린이집 교사 자격증을 딴,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 아이 잘 키울 생각만 하는 열혈 엄마로 살았었다. 그렇다. 정애정씨는 그냥 그렇게 살려고 했다. 남편과의 추억을 기리며 두 아이의 엄마로 그냥 그렇게 살려고 했다. 평범하게 평.화.롭.게.
그러나 뜻밖의 전화 한 통으로 그가 다시 차근차근 만들어 가려던 평범한 일상은 깨지고 만다. 황민웅씨의 죽음이 산업재해일지도 모른다는 동료의 전화, 남편의 병이 삼성반도체의 근무 환경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전화....그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집안에서 귀여움을 독차지 했을 막내에서,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삼성반도체에 입사해서 근사한 독립을 꿈꿨던 소녀에서, 한 남자를 만나 두 아이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려던 여인에서 이제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말 안 듣는 사람’의 길을 걷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삼성의 뜻을 거스르려 한다면 가장 말 안 듣는 사람의 길을 가려 한다는 뜻 아닐까?
이 만화를 보게 되면 반도체 산업이 정말 깨끗한 무공해 산업이며 ‘淸淨産業(청정산업)’이라는 화려한 수사가 매우 정확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청정’은 그 ‘깨끗함’은 노동자를 위함이 아니며 반도체가 먼지에 노출되면 해가 되기에(이윤창출에 걸림돌이 되기에!) 그리도 지독하게 깨끗함을 유지하려 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다. 수많은 화학약품과 가스를 노동자들에게 노출시켜서라도! 방진복을 입혀서 사람 몸에서 나오는 먼지를 차단해서라도!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반도체, 반도체 말은 많이 들었는데 도대체 그게 뭔데? 왜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건데? 라고 물어본다면 딱히 어떻다고 설명할 수가 없었으니까. 내가 직접 보질 못한 이유도 있지만 생각해보니 맨날 내가 아니 우리들이 봐왔던 반도체 공장의 모습은 새하얀 방진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진중한 모습으로 현미경을 보며 반도체판(wafer)에 작업을 하는 모습,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반도체칩이 전자제품 기판에 꽂혀지는 모습, 그리고 대형컨테이너를 실은 선박이 바다를 건너며 이 반도체 수출이 대한민국을 富國(부국)으로 만들어 준다는 아름다운 결말....이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적어도 이 만화를 본다면 그런 모습뿐만 아니라 다른 모습들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이 보지 못했던 다른 모습들 말이다. 반도체 공정이 복잡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 정도로 위험하고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작업을 하며 심지어 아직까지 밝히지 않은 알지 못하는 공정, 재료, 약품들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혹자는 삼성반도체 관련해서 전문가들이 모여 역학조사를 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왜 그렇게 일이 잘 안 풀릴까하는 궁금증을 갖고 계신 분들도 이 만화를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실 것이다. 그 전문가들이 과연 어떤 전문가들인지 그리고 어떻게 역학조사가 진행되며 삼성반도체는 어떻게 대처하고 무마시키는지 이 만화는 몇 마디 말, 글이 아니라 그림으로 화면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물론, 삼성반도체가 이 과정에서 백혈병 유족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덤으로 알려준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 분량의 만화는 사오십 분이면 다 봤을 텐데 보다가 괴로워서 여러 번 책을 덮었다. 주인공 정애정씨의 모습이 실은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리라. 삼성맨이 된 것이 자랑스러워 외출할 때도 IC카드를 목에 걸고 다녔다는 그의 고백에 뜨끔하지 않을 대한민국 인민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다고 이 만화가 마냥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정애정씨와 그와 함께 투쟁하는 동지들의 작은 승리에 용기를 얻으며 희망도 느낄 수 있다.
마무리 해야겠다. 그래도 나름 서평인데 어떤 분들이 읽으면 더 좋을까 생각해 봤다.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 추천한다. 세상이 이래도 되냐며 의식적인 인민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은 마음 한 구석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며 그래도 그나마 군사독재 보다는 지금이 더 낫지 않느냐며 자위하는 진보적인 인민들, 그래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자 멘붕에 빠져버렸지만 그래도 내 아이는 좀 더 나은 계급에 진입시키려고 오늘도 자본이 원하는 인간형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눈감고 지긋이 (두 눈 뜨고는 차마 못하지) 자신의 아이를 사교육 시장에 떠밀고,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토로하는 역시 자칭 진보적인 인민들, 그리고 사회공부, 역사공부보다는 스펙 쌓기에 몰두하며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몇 안 남은 기성세대를 보고 비현실적이다, 꼰대라고 충고(?)하는 현실적인 20대, 10대에게 일독을 권한다. 당신들이 어쩔 수 없다며 비현실적이라며 외면하고 있는 그것에 올곧이 부딪혀가며 작은 승리를 쟁취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이 만화 ≪먼지 없는 방≫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자, 이제 우리는 채워 나가자. 먼지 없는 방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고민해 보자. 어떻게 하냐고? 아직은 모르겠다고? 이 만화를 보라니까. ≪먼지 없는 방≫을 보라니까. 우리 같이 고민해 보자. 그래서 그 먼지 없는 방에 근사한 것을 가득 채워서 세상을 바꿔보자. 응?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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