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들어가며

필리핀의 양대 노총 중 하나인 Kilusang Mayo Uno(May 1st Movement, 이하 KMU)는 1984년 이래로 매년 노동절에 즈음하여 국제연대대회(International Solidarity Affair, 이하 ISA )를 개최하고 있다. 필자는 노사과연을 대표해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오산이주노동자문화센터와 공동으로 한국 대표단을 구성하여 지난 4월 24일~5월 5일, 약 열흘간의 일정으로 필리핀 마닐라 등지에서 개최된 ISA에 참가했다. 올해로 28회째를 맞은 2012 ISA는 특별히 필리핀 광산 노동에 대한 연대임무를 포함해 <고조되는 빈곤, 억압, 군사주의 한가운데에서: 노동자계급이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자!>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처음 대회 참가를 권해 주신 채만수 소장님과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도와준 연구소, 사전준비부터 무사 귀국까지 부족한 필자와 함께 고생한 신인철(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이정아(오산이주노동자문화센터) 동지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가.

나. KMU와 필리핀 노동운동사

인천국제공항에서 약 4시간 날아가면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필리핀은 대만과 인도네시아 사이에 위치한 약 70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로 인구는 약 9200만이다. 섬들의 면적을 모두 합치면 한반도의 1.5배 정도 되지만, 실제로는 무인도가 많고 가장 큰 2개의 섬인 루손 섬과 민다나오 섬의 인구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필리핀 정세와 노동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후니 지리니 하는 것보다 그들의 역사를 훑어 봐야 하지 않을까.

1)스페인 식민지배와 노동계급의 형성

중세 필리핀은 이슬람 왕국을 중심으로 많은 토속 도시국가들이 느슨하게 공존하는 상태였다. 봉건적 왕조의 구색을 갖춘 곳도 있었지만 원시공산사회에 가까운 체제도 공존하고 있었다. 1521년 필리핀은 서구 문명과 처음 조우하는데, 바로 스페인 선단을 이끌고 최초로 세계 일주를 했다고 알려져 있는 포르투갈인 에르난도 데 마가야네스, 즉 마젤란이었다. 직후 선교라는 대의를 걸고 필리핀을 침략한 스페인은 16세기 중반부터 필리핀을 식민지배하기 시작했으니,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식민역사를 지닌 비극적인 국가이다. 스페인 식민지배자들은 필리핀 원주민들을 반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범선을 이용해 멕시코를 오가는 태평양 무역의 거점으로 필리핀 원주민들을 식민 노예화했다. 식민지배 초기부터 가톨릭 사제는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광대한 장원의 영주였고, 설교대는 지배 계급의 프로파간다의 장이었으며, 고해성사는 그들의 정보부 역할을 하며 교회에 절대적 권력을 부여했다. 그 후 무력과 신념으로 무장한 식민 총독부와 교회는 필리핀에 봉건적 생산양식을 지배적인 것으로 정착시키고, 본국에 협조적인 원주민에게 관직을 부여해 지배 계급의 열매를 나누어 주었다.

300년간 이어진 식민 지배 끝에, 19세기가 되었을 때 필리핀은 한편으로는 식민 총독부의 관료들이 필리핀 토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농민들을 쥐어짜 자본주의 세계로 수출하기 위한 원료와 작물을 생산하는 한편, 수출을 위한 철도, 항만 등이 건설되면서 산업 노동자 계급이 출현하는 반봉건-반자본주의사회로 변모한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300년 이상 누적된 제국주의의 식민 봉건 지배의 모순이 폭발하고 새롭게 발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미약하게나마 민족적, 정치적으로 각성하면서 독립전쟁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1896년 필리핀 최초의 전국적 노동자 조직 카티푸난은 전인민의 무장봉기를 호소하며 독립을 선언하고 혁명국가를 건설한다. 하지만 서구의 시민혁명에 영향을 받은 계몽주의∙자유주의적인 민족 엘리트들이 이 혁명을 도둑질한다. 1898년 스페인과 미국은 꾸바 독립 문제를 두고 전쟁을 일으키고, 마닐라 앞바다에서 양국의 아시아 함대가 격돌한다. 미제국주의는 이 전쟁에서 필리핀의 독립을 지지∙지원한다는 약속을 빌미로 필리핀 민족 엘리트들의 협조를 얻어낸다.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후 1898년 필리핀에는 “강력하고도 자비로운 미국의 보호 아래에” 최초의 독립정부인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는데, 당연하게도 민족독립을 위해 혁명에 참가했던 필리핀 민중들은 미국의 개입에 크게 분노했고, 공화국 정부와 미제국주의는 무자비한 억압과 학살을 통해 이들의 독립 요구를 틀어막았다. 이로써 제2식민지배, 미제에 의한 식민시대를 맞는다.

2)미제국주의 식민통치와 세계대전에 맞서

미제는 스페인 총독부의 봉건적 제도들과 매판 부르주아지를 그대로 이용해 친미적 관료주의를 공고히 하고 필리핀 민중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미제는 필리핀을 태평양 전체를 자신들의 영해로 만들기 위한 환태평양 전략을 시작하는 군사적, 경제적 거점으로 삼기 위해 운송․통신 시설을 급속히 개선시키는 한편, 공공교육을 도입하고 영어를 공용어화 하는 등 문화․정치적으로도 식민지 교화에도 힘썼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 사회는 급속도로 자본주의화되고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각성도 고조되었다. 1930년이 되면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필리핀에 최초로 공산당(CPPI 또는 KPK)이 건설되는데, 미제국주의는 공산당이 건설되자마자 극렬히 탄압하였다. 하지만 30년대 후반부터는 파시스트 전쟁에 대비해 공산당에 탄압을 중지하고 반혁명분자들을 침투시켜 회유책을 편다. 이들 반혁명분자들로 인해 변질된 공산당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제의 괴뢰정권에 적극 충성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게 된다. 하지만 1942년 미제가 패퇴하고 일제가 마닐라를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협조적인 제2공화국을 세움에 따라 미제 부역자들의 권세가 급격히 추락한다. 이 틈을 타, 공산당에 남아 있던 혁명적 당원들이 항일인민군(후크)을 창설하고 반파쇼, 민족독립 투쟁을 전개한다. 후크군은 반동 지도부와 일제 양쪽을 상대하며 영웅적으로 투쟁하여 일제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1944년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자 다시 돌아온 미제에 의해 결국 다시금 탄압받는 신세가 되고 만다.

3)종전 후 미제의 신식민지배 아래에서

종전 후 미제의 개입 하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이 선거에서 미국의 간택을 받은 과거 일제 부역자 마누엘 로하스가 대통령이 된다. 로하스는 당선 직후 필리핀 공화국(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제3공화국이자 현재의 필리핀 국가)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이로써 필리핀은 형식상 식민지배에서 독립했지만, 미제는 이후 매판 지주와 부르주아 가문을 신식민지배의 앞잡이로 이용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필리핀을 참전시키고, 필리핀에 아시아 최대 규모로 미군을 주둔시키고, 제국주의 독점자본이 수월하게 필리핀의 천연 자원을 수탈할 수 있도록 불평등 무역조약을 강요하는 등 신식민지 지배체제를 굳혀갔다. 이들 친미정권은 공산당과 후크군을 탄압하여 민중투쟁의 싹을 잘라버리고 교회와 손잡고 어용노조를 조직하여 노동운동을 쇠퇴시켰다. 공산당은 지하로 숨었으며 무장조직은 와해되었다.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은 계속 되었지만 그들의 조직은 정부의 탄압과 어용노조의 침투를 방어해내지 못했다. 이렇게 운동의 암흑기가 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1960년대 말 자본주의 세계 공황이 필리핀 사회를 휩쓸고 국제 곡물가가 급락하면서 마르코스 정권은 IMF 차관을 받게 되는데, 때문에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외세의 내정간섭이 심해졌다. 이 시기에 지식인들과 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어지며 민중투쟁과 연대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공산당이 재건되고(1968년, CPP) 마오주의에 근거한 당의 군사 조직으로 신인민군(NPA)이 창설된다. 거세어지는 저항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서 마르코스 파쇼 정권이 1972년 계엄을 선포하고 독재체제로 이행하려 하자 1973년, 민중 운동은 물론이고, 학생 운동, 반식민지 민족주의 운동, 소부르주아적 시민사회운동까지 아우르는 민족민주전선(NDF)라는 통일 전선체가 조직된다. 필리핀공산당은 NDF에 참가하여 ‘마르코스 파시스트 독재정권과 그 배후에 있는 미제국주의’를 명확히 겨냥한 민족민주 혁명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전위로써 노동 현장에 침투하여 어용노조를 전복하고 민주노조를 조직하며 노동계급을 교육하는 데 힘썼다. 이렇게 하여 필리핀의 전투적이고 혁명적 노동운동인 ‘5월1일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조직된 노조들이 1980년 전국 노총인 그들의 운동의 이름을 따 KMU를 결성하였다. 최초에 전국적으로 35개 지역노조와 10개의 연맹노조가 참여하였다. 비슷한 과정을 거쳐 1985년에는 농민조직인 KMP(Kilusang Magbubukid ng Pilipinas, 필리핀농민운동)도 만들어졌다.

마르코스 독재정권은 계엄령 선포 이후 어용 노총인 필리핀노조회의(TUCP)를 결성․지원하고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파쇼 정권을 유지하였다. 1981년에는 계엄을 해제하는 등 유화책으로 돌아서는가 싶다가, 1983년 최대의 정적 베니뇨 ‘니노이’ 아키노 2세의 암살을 계기로 거대한 저항에 직면하고 지지 세력을 모두 잃고 만다. 마르코스 정권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1987년으로 예정되었던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당겨 재신임을 받고자 했으나, 1986년 2월 선거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져 군부 개혁 세력의 쿠데타(미수)와 거대한 대중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마르코스는 결국 이 대중저항 운동 앞에 3일 만에 하야를 표하고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 대중저항 운동은 베니뇨 아키노 2세가 마지막으로 활동했던 정당명을 따서 피플파워 혁명이라고 불린다. (마닐라 국제공항인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역시 그의 별명 니노이를 따서 명명한 것이다) 마르코스 하야 이후 1986년 선거에서 야권 단일 후보로 마르코스에 맞섰던 코라손 아키노(베니뇨 아키노 2세의 아내)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피플파워 혁명이 완성된다.

4)피플파워 혁명 이후의 KMU의 내적 투쟁

피플파워 혁명은 파쇼 독재를 타도하였으나 이전부터 이어진 부르주아 과두 또는 독재 체제까지 타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완의 혁명이다. 그 증거로 무엇보다도 베니뇨 아키노 2세나, 부인 코라손 아키노 모두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제국주의에 부역하여 치부한 매판 지주 집안 출신의 엘리트라는 사실과, 피플파워 정권 이후 현재까지도 소수의 ‘정치가문’들이 돌아가며 집권하는 부르주아 과두정 형태의 정치 체제가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어머니 아키노(11대), 다음은 마르코스의 6촌 라모스(12대), 그 다음은 영화배우 출신의 에스트라다(13대), 그 다음은 마르코스에 앞서 대통령이었던 마카파갈의 딸인 아로요(14대), 그리고 현재는 베니뇨 아키노 3세, 바로 11대 대통령 코라손 아키노의 아들이 15대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민중의 저항 운동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식민통치에 부역한 매판 엘리트에 대한 청산이 일체 일어나지 못했던 점, 또 그러한 엘리트 가문들이 대토지 지주 계급으로써 다수의 농민 계급을 소작농으로 부리는 반봉건적 생산 양식(하시엔다 체제)을 폐절하지 못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혼재하고 있다는 점 등이 사회 전반을 휘감은 혁명적 기운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조악한 형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피플파워 혁명 이후 부르주아 양당제가 정착되어 가는 한편, 소수정당 비례대표제 등을 도입하여 기존의 운동권을 제도권, 의회주의로 포섭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KMU는 1986년 부르주아 선거를 보이콧하고 1989년 천안문 사건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는 등 혁명적인 노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80년대 말부터 지도부와 공공연히 갈등하는 개량주의, 계급협조주의 노선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수년간에 걸쳐 KMU는 내적으로 치열한 노선 투쟁을 통해, 철저한 혁명 노선을 수호하는 데 성공했으나 안타깝게도 이 노선 투쟁의 결과로 상당수의 구성원들이 분열하였다. 현재 KMU는 어용노총인 TUCP에 이어서 2번째로 규모가 큰 노총이다. 그 밑으로 기독교보수주의 계열의 FFW, 사민주의 계열의 NCL, APL, 뜨로츠키주의 계열의 BMP 등이 있다.

또한 현재 공식적으로 KMU는 필리핀공산당이나 신인민군과의 모든 관계를 부인하고 있다. 1991년 주필리핀 미군철수를 조건으로 신인민군은 “공식적으로” 무장해제를 했고, 이 때 무장해제한 당원들이 하산하여 노동 운동이나 농민 운동으로 많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미군 재주둔의 빌미가 될 것을 염려해 모든 관계를 부인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KMU는 필리핀식 지주-소작제인 하시엔다 체제 폐지,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지하자원 채굴 등 주요 산업 국유화, 부패한 관료 엘리트의 타파와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내세워 봉건주의, 제국주의, 관료자본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다.

다. 국제연대대회(International Solidarity Affair, ISA)

살펴본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혁명적 노동 운동의 핵심적 주체로서 KMU는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에 근거한 다양한 국제 연대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미 1984년부터 이어져온 ISA이다. 매년 KMU는 세계의 노동자, 노조활동가, 노동변호사 등 노동운동가들을 초청해 각국의 정세를 교환하고, 투쟁 방법을 공유하고, 연대를 강화해오고 있다. 올해 개최된 28회 ISA는 <고조되는 빈곤, 억압, 군사주의 한가운데에서: 노동자계급이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자!>라는 대주제 아래,

― 세계 곳곳에서 고조되는 빈곤과 억압에 대한 이해와 연대

― 현재 진행 중인 공황의 짐을 노동자 민중에게 씌우기 위한 긴축정책의 규모와 심각성에 대한 공유

― 빈곤, 억압, 군사주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제국주의에 대한 노동계급과 노동조직의 투쟁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이해 향상 및 저항의 경험을 공유

― 연대의 밤을 통해 “빵과 장미 파업” 100주년을 기념

이라는 4가지 목표를 가지고 4월 25일부터 5월 4일까지 열흘간의 일정으로 진행됐다. 국제 대표단들은 한국(3), 호주(4), 독일(2), 벨기에(1), 일본(1), 미국(1), 총 6개국에서 12명의 대표단이 참가했으며, KMU 및 필리핀 노동운동가들이 함께 했다. 주로 전∙현직 현장노동자로써 노조에 적을 두고 있는 활동가들이 참가했으며 당(독일, 벨기에)이나 연구소(한국)에서 참가한 경우도 있었다. 각국 대표단 구성은 표와 같았다.

28회 ISA 행사는 크게, 필리핀 광산 노동에 대한 연대임무(ISMM), 노동절 집회 참가, ISA 토론회와 연대의 밤, 이렇게 3부분으로 진행됐다.

1)광산 노동에 대한 국제 연대 임무(International Solidarity Mission on Mining)

KMU가 올해 ISA 행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다름 아닌 광산노동에 대한 연대임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은 구리, 니켈, 금 등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지역이다. 자원 매장량으로 치면 금은 세계 3위, 구리는 4위, 니켈은 5위를 차지하며, 그 외에도 크롬, 망간, 자철광 등 희토류 자원도 풍부하다. 이 지하자원에 대한 수탈은, 이미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금 등 귀금속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독립 이후에도 군부나 독재정권과 결탁한 초국적 자본에 의해 이어져오다가, 부르주아 혁명 이후인 지난 1995년, “외자 유치”를 목적으로 초국적 자본에게 대주주로서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광산법 개정,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이어진 광업 촉진 정책에 힘입어, 필리핀 전국에 걸쳐 이루어지면서 심각한 환경 파괴와 노동 착취가 자행되고 있다.

필리핀 광산 문제는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환경문제를 중심으로 필리핀 국내외에서 수차례 제기된 문제이지만,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2001년 집권한 아로요 정권이 중국, 대만, 호주, 일본, 캐나다 등의 초국적 광산 자본들과 유착하여 공공연히 친자본 정책을 펴자, 국내의 민족 부르주아지와 좌파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아나키적 환경운동가까지 연대하여 투쟁을 전개하면서부터이다. 중앙정부 뿐만 아니라 지방정부의 관료들도 광산 회사의 일정 지분을 받고 노골적으로 유착 행태를 보여 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10년 정권이 교체되면서 많은 시민운동 활동가 등이 자신들이 지지한 새 정권의 정책 전환을 기대했으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했던가, 새로 집권한 아키노 정권은 아로요 정권의 광산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이번 광산 연대임무는 필리핀의 환경 운동 정당인 KALIKASAN, 노동인권단체인 CTUHR, 그리고 ISA 전체를 주최한 KMU 등이 주도적으로 기획하였고, 필리핀금속노조(MWAP), 벨트란센터(CBBRC), 산업보건안전 및 개발 연구소(IOHSAD), 필리핀 통합전자네트워크(iPEN) 등이 함께 하였다. ISA 참가한 외국 대표단은 2팀으로 나누어 각각 3박 4일 동안 광산지역 한군데에 체류하면서 현지 실태를 파악하고, 마닐라로 돌아와 기자회견과 공동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한국 대표단은 호주(일부)와 벨기에 대표단과 함께 루손 섬 북부 코딜리에라 산악 지대에 위치한 만카얀이라는 소도시를 찾았다. 코딜리에라 지대는 루손 섬의 1/3정도를 차지하는 필리핀 최대의 산악 지대로, 이미 스페인 시대부터 채굴이 활발히 이루어진 광산지대이며, 현재 가장 산업화가 많이 진행된 루손 섬에 있는 만큼 각종 개발 사업에 시달리면서 여러 가지 투쟁의 경험이 녹아 있는 지역이다. 덕분에 이 지역에는 수많은 풀뿌리 조직들이 조직되어 있으며 이중 130여개 조직들은 다시 코딜리에라 민중연합(CPA)이라는 연합체를 이루어 환경, 여성,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만카얀 지역에는 1980년대 이전에는 주로 구리 광산이 운영되면서 소규모의 재래식 채굴이 이루어졌으나, 1980년대부터 금광이 발견되면서부터 중장비가 투입된 대규모 채굴이 시작되면서 환경문제와 노동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제국주의 광산 기업 레판토의 철수와 채굴정지, 환경과 지역 공동체를 보전할 수 있는 광산 운영으로 전환 등을 목표로 세이브 만카얀 운동(SMM)이라는 지역 조직이 가장 활발히 저항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레판토는 현재 만카얀 지역에서 가장 대규모 광산을 운영하고 있는 중국계열의 자본이다. 2002년 레판토 노조 지도부 선거에서 KMU의 지원을 받은 민주노조가 승리하면서 레판토 노조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민주노조는 지난 10년 동안 3차례의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부조리한 노동 환경 개선과 임금 인상, 비정규직 철폐 등을 목표로 투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판토 자본은 꾸준히 비정규직을 늘리면서, 조합원들에 대한 회유와 해고 압박, 어용 노조 지원을 통해 노조 파괴에 힘 쏟고 있으며, 특히 아로요 시절 정부 시책에 따라 광산 자본을 보호하기 위해 지역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부터 노조는 격렬하고 전투적인 투쟁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현재는 해고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비공식적으로 CPA와 연대하여 대규모 채굴 중단, 초국적 기업과 군부대 철수, 환경과 공동체 친화적인 민주적 광산 운영을 목표로 투쟁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회사가 문 닫는 것을 목표로 투쟁하는 노조라니! 이러한 아이러니는 바로 초국적 자본의 대규모 채굴로 인한 지역 파괴가 원인이었다. 지역 파괴라는 것은, 첫째로 금 채굴을 위해 점점 더 갱도가 깊어짐에 따라서 지반이 침식하여 인명을 위협하는 산사태가 빈번히 발생하고, 지하수가 매몰되어 고산지역에는 식수 및 농업용수가 고갈되는 등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 둘째, 채굴에 사용된 화학약품이 무분별하게 폐기되고 지하의 유독가스가 유출됨에 따라서 생태계와 주민의 건강을 해치는 환경 파괴가 자행된 것, 셋째로 노조 파괴 공작, 자본 보호를 목적으로 한 지역 군사화,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외지인의 증가로 인해 지역 공동체가 분열되고 지역 경제가 붕괴하는 것 등 지역 전체에 걸친 총체적 황폐화를 말한다. 이러한 지역 파괴를 겪은 노동자들이 바로 자신들의 직장을 폐쇄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조합원이 이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아직은 비공식적으로 투쟁하면서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한다.

국제대표단은 레판토 광산 노동조합의 해고노동자들이 꾸리고 있는 만카얀 노동센터에서 머물면서 이틀간은 CPA가 조직한 코딜리에라의 날 2012 행사에 참가하고 마지막 셋째 날은 지역 주민들과 해고노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지역 실태조사를 펼쳤다. CPA는 매년 코딜리에라의 날 행사를 통해 지역 조직들을 집결하고 연대의 장을 열어 왔는데, 올해에는 특별히 대규모 집회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표단 역시 지역의 환경 단체, 여성 단체, 노동 조직들과 연대하여 집회에 참가했다. 우선 레판토 지사로 행진하여 환경 파괴 및 노동 탄압에 대해 항의 집회를 진행하고,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광장에서 문화행사를 짧게 가진 다음, 다시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중대 주둔지를 찾아가 군사 시설 철수를 촉구했다. CPA가 작성한 지도에 따르면, 코딜리에라 지역 전역에 걸쳐서 새롭게 채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광산 사이트 옆에는 모두, 크고 작은 군부대가 파견되어 있었다. 이 지도는 제국주의 독점자본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국 국민에게도 주저 없이 총부리를 겨눌 수 있는, 필리핀 사회의 신식민지적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집회 다음 날은 만카얀 노동센터에서 여성조직 가브리엘라가 조직한 레판토노동자가족연대(TBML) 회원들과 공동체 문제, 환경 문제, 여성 문제 등에 대해 대담회를 가지고, 이어서 노조활동을 이유로 해고된 레판토 해고노동자들을 인터뷰했다. 해고노동자들과의 대담은 주로 열악한 광산 내 노동환경과 안전조건, 임금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레판토 철수 후에 국영화나 공영화에 대한 준비 사항 등에 대한 질문도 꺼내보았지만, 대담이 장시간 이어지다 보니 그 피로감으로 인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하였다.

3박 4일의 현지 일정 뒤에 (실제로는 오가는 이동에 만 하루가 걸렸기 때문에 현지에 머문 기간은 3일도 채우지 못했다) 마닐라로 돌아와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 장에는 진보정당의 국회의원도 함께 참석하였고 필리핀 주요 언론의 취재진들이 모여들었다. 필자의 경우에는 한국에서도 매스컴을 탄 적이 없는데(!) 필리핀 언론의 쏟아지는 관심과 플래시 앞에서 몹시 쑥스러운 발표를 했다. 다음날 필리핀 진보매체 ≪인콰이어러≫를 포함해 주요 일간지에 관련 기사와 사진이 실린 것을 보니 여전히 부끄러우면서도 뿌듯하게 느껴졌다. 기자회견 이후에는 각국 대표단 전체 회의를 통해서 공동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였다. 추후 보고서가 완성되면 필리핀 국회 및 ILO에 제출할 계획이다.

마닐라로 돌아온 직후에 있었던 총회 때, 독일 대표단의 한 동지가 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석탄 광산에서 25년간 일한 은퇴노동자로, 현재는 독일 맑스-레닌당의 전업조직책으로 일하고 있다)

“광산과 같은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21세기의 인간의 삶의 질을 맞추기에는 너무 비싼 산업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 모든 비용을 필리핀과 같은 제3세계에 떠넘기고 있다. 독일도 2018년까지 석탄 광산을 모두 폐쇄하고 카자흐스탄에 광산 기술을 이전하는 대신 석탄을 공급받는 방식의 자원 정책을 펴고 있으며, 독일 광산 노조에서는 이러한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고 직장을 지켜내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해서 투쟁하고 있다.”

코딜리에라 지대의 생태와 공동체, 인명을 해치는 것은 금광이 아니었다. 그것은 환경이나 노동자의 안전 같은 인간의 생존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무한정적인 증식을 목표로 움직이는 야만적이고 악랄한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문제라는 것을, 필자는 광산 연대임무를 통해 분명히 관찰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생태운동, 인권운동 등이 진정 생태 문제와 인권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무엇보다도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를 명백히 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만나지 않는다면 결국 좌익 님비(NIMBY) 운동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여실히 깨달았다.

2) 마닐라 노동절 집회와 필리핀 주요 노동현안

KMU는 스스로 “전투적이고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를 당당하고 서슴없이 사용하는 급진적 노조이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KMU는 반제, 반자본 투쟁을 명백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으며, 1990년대 초반 개량주의, 계급협조주의를 분쇄하기 위한 내부 노선 투쟁에서도 승리하였다. 사전에 이런 내용들을 어느 정도 공부를 하면서, 마닐라에서의 “전투적인” 노동절 집회를 내심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산 연대임무를 다녀와 기자회견을 한 날은 4월 30일, 노동절 전날이었다. 그날 오후 참가 대표단은 KMU를 방문했다. 밖에서 보기에는 전국 단위의, 필리핀에서 2번째 규모의 노동본부 사무실이라기에는 초라한 3층 건물이었지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맞이해준, 마당을 크게 감싸고 있는 거대한 플랭카드에 그려진 제국주의에 맞서는 노동자 농민의 투쟁을 그려낸 커다란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마당 한가운데는 아직 제작 중에 있는 아키노 대통령의 전신모형이 있었다. 대통령 모형은 대나무 뼈대에 골판지로 가죽을 붙이고 신문지 종이죽과 페인트로 살을 붙이는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연대의 뜻을 표하고 작업을 돕겠다는 이야기를 했고, KMU의 미술부장은 흔쾌히 브러시와 풀통을 나눠주었다. 우리가 풀칠을 하면서 종이죽을 붙이고 있는 동안, 그는 이리저리 돌아가며 모형이 정말로 ‘대통령 같이’ 보이도록 고민하고 지시를 하였다. 집회 준비를 하면서 대통령 모형을 이렇게 정성들여 만드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다름 아닌, 내일 있을 화형식을 위해서였다! 한참을 창작 활동에 열중한 뒤에 사무실 내부를 안내해달라고 부탁해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사무실 안에는 곳곳에 한 달 동안 준비했다는 노동절 집회 준비물로 채워져 있었다. 특히 합판으로 된 피켓은 수천 장이 있는 듯 했다. 그것도 인쇄된 것이 아니라 일일이 손글씨로 작성된 것들이라 무척 놀라웠다. 사무실 3층 회의실에서는 내일 집회를 대비한 전술 브리핑이 이뤄지고 있었다. ISA 대회를 준비한 국제부 사무실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연대의 징표나 연대 요청 내용들이 벽에 붙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한국에서 온 강정마을 해군기지 투쟁에 대한 연대 요청도 있었다.

본래 필리핀의 기후는 4월말에서 5월초에 이르는 기간이 연중 가장 덥고 건조한 시기로, 학교도 방학 철이고 많은 직장에서도 휴가를 주는 계절이다. 아니나 다를까, 5월 1일 노동절 역시 아침부터 몹시 더웠다. 아침 10시까지 각자 약속한 장소로 집결 후, 집회 시작. 집회의 시작은 마닐라 시내 동서남북 4군데 거점에서 나누어 시작했다. ISA 대표단은 남쪽 미 대사관 근처 거점에서 출발하기로 했는데, 집회 시작 때 이미 조합원들과 정당인, 활동가 등이 수천 명이 모여 있었다. 각각의 거점에서 출발한 단위는 시내 주요 지점을 행진하며 피케팅을 하고, 점심시간에 맞춰서 키아포 성당이 있는 시내 중심가 미란다 광장으로 시간을 맞춰서 동시에 진입할 계획이었다. 우리가 속한 단위에서는 미 대사관으로 행진해 짧게 항의 집회를 하고 다시 마닐라 구 시가지를 끼고 미란다 광장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미 대사관 앞에서는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성조기를 불태우는 등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전에 전술 회의를 철저하게 한 덕분인지 4방향에서 출발한 각 대오는 시간에 맞추어 미란다 광장으로 행진해 들어갔고, 한낮 시간이라 무척 덥고 힘든 상황에서도 이때쯤 집회 참석 인원은 수만 명에 달한 것으로 보였다. 미란다 광장에 어제 만든 대통령 모형이 등장했는데, 완성된 각하의 몸통은 개의 몸통이었으며 등에는 미제의 군사 무기를 한가득 지고 있었다. 모두 집결한 인파는 대통령께 뜨거운 환영을 헌정한 뒤에 밀착경호로 호위하여 대통령 궁이 있는 멘디올라 가로 다시 행진을 시작했다. 짧은 행진 동안 시내의 많은 시민들이 응원과 지지를 보내왔고 집회 참가자도 계속 늘어났다. 중간 중간 큰 쇼핑몰 건물 입구를 지키는 사설 경비원들이 샷건으로 무장을 하고 경비를 서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된 집회에 참가한 수만 인파라면 어느 자본이든 두려워하지 않으랴.

멘디올라 평화의 문 광장에 도달했더니, 그곳에는 어제 보았던 거대한 그림으로 꾸며진 대형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굳게 닫힌 평화의 문 뒤편으로는 철조망을 휘감은 바리케이트와 흰색 군 차량을 탄 무장 병력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평화의 문에서 대통령 궁까지 이어지는 멘디올라 가는 마닐라에서 가장 부촌이라고 하니, 저들에게 복무하는 병력들이 철저하게 지키지 않을 수 없으리라. 곧이어 대통령 모형까지 도착하자, 무대 위에서 집회를 진행하던 집행부는 대통령에게 화형을 언도하고, 먼 곳까지 행차하신 각하는 곧 화형을 당했다.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보기 힘든 불장난 광경에 감격과 전율이 흐르는 바로 그 순간, 별안간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더웠던 날씨 탓인지 무섭게 쏟아지는 열대성 소나기는 집회 대오를 삽시간에 흩트려 놓았지만, 그 빗속에서도 무대 위의 지도부는 뜨거운 선동과 열변으로 집회를 이어갔다. 비록 비 탓에 몇몇 참가자들이 대오를 이탈해 돌아가 버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 정도 이어진 집회를 끝까지 참가한 많은 동지들이 있었고, KMU 지도부도 흔들리지 않고 준비했던 모든 프로그램을 소화했다. 교사노조, 공무원노조, 산별노조 등 각 단위 지도부들의 연대발언과 시국발언이 이어졌고, 국제대표단도 무대에 올라 연대와 지지의 뜻을 담은 발언을 하였다. 노래, 춤 등 단위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이 준비한 공연과 문화 행사도 있었다. 인상 깊었던 점은 어느 단위에서든 공연단으로 참가한 조합원들이 20대 젊은이들부터 은퇴한 것으로 보이는 장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 아닌가. 오래 살아남는 것, 이것이 사회주의자의 커다란 하나의 미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노동절 집회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진 현재 KMU의 핵심 투쟁 과제는 다음과 같았다.

비정규직 문제

21세기 들어 지난 10여 년간 필리핀 정부는 외자와 초국적 기업을 경제 성장의 주동력으로 삼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구조 안에서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해 온 것이다. 따라서 외국인 투자에 대한 각종 세제혜택과 군 및 경찰력을 동원한 노동탄압, 노동 관련 법규 개정 등 친자본 패키지를 유인책으로 제공하고 있다. 지난 2007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한진중공업의 수빅조선소 또한 당시 정권의 적극적인 구애에 의해 부산에서 이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필리핀의 비정규직 관련 법안은 2002년 등장했다. 여느 비정규직법이 흔히 그러하듯이, 필리핀의 경우에도 ‘보호’를 빙자해 비정규직을 고착화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노노갈등을 부추기는 몇 가지 장치들이 숨어 있다. 예를 들어, 사용자는 비정규직을 6개월 이상 채용할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하여야 한다는 규정 덕분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5개월마다 직장을 옮겨 다녀야 한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결사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기존 노조에 가입하지 못하게 막는 동시에, 기존 노조가 나서서 비정규직들을 조직하려고 하면 불법 행위로 몰고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위에서 예로 든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의 경우, 약 21,000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데, 이중 1,000명가량이 관리직이고 20,000명의 생산직 노동자들이 주야간 2조 2교대제로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리직은 대부분 본국에서 파견된 한국인들이고 생산직 20,000명은 전원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5개월마다 사내 하청업체 사이에서 적을 옮겨 다니면서 재계약하는 형태로 근속한다. 한진 수빅조선소에서는 조업시작 후 지난 5년간 이미 밝혀진 것만 40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산재나 과로로 인해 사망했지만 한진 자본은 간접고용임을 들어 하청업체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비정규직 투쟁의 가장 큰 걸림돌은 비정규직에게 조합 활동을 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KMU가 주도한 노동절 집회에서 모든 단위들이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 하에서 정규직 노조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비정규직 권리 보장을 외치는 것들 볼 수 있었다.

최저임금 인상 투쟁

필리핀은 한국과 달리 최저임금이 지방 자치 단위로 적용된다. 그 이유는 지역별 물가 차이를 반영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KMU는 최저임금제를 전국 공통으로 인상 적용하는 문제를 가지고 이미 수년 전부터 투쟁해 왔으나 안타깝게도 올해도 승리하지 못했다. 필리핀 정부는 KMU의 투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바로 노동절 아침에 최저임금 인상 불가 방침을 발표했는데, 덕분에 격분한 노조들의 발언이 집회 내내 이어졌다.

필리핀의 최저임금은 일당으로 적용되는데, 최저임금이 가장 높은 마닐라 지역은 약 11불이다. 올해 한국 최저임금 4,580원을 일당으로 환산하면 약 33불 정도가 되니, 한국의 1/3정도인 셈이다. 올해 KMU의 투쟁 목표는 전국 공통 3불 인상이었는데, 이에 대해 정부는 단 한 푼도 인상할 수 없다고 발언했고, 어용노총 TUCP 위원장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최저임금 인상투쟁은 좌절됐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KMU는 여전히 전국 공통 일당 3불 인상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참고로 3불이면 필리핀 4인 가족이 하루 동안 먹는 쌀값 정도라고 한다.

반미반제 반군사주의 투쟁

2001년 필리핀 아로요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미국 본토, 뉴욕에서는 “9.11 사태”가 벌어진다. 이를 기회 삼아 미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필리핀 정부도 신속히 지지를 발표했다. 또한 자국 내에서도 “테러”와 전쟁을 한답시고 민다나오 섬의 이슬람 무투파(모로 전선)와 루손 섬의 잔존 신인민군(NPA)을 대상으로 즉결사살을 포함하는 악랄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고, 동남아시아에서의 미군의 교두보 역할을 자처하며, 1999년 채결된 미-필 방문군협정을 근거로 사실상 미군의 재주둔을 허용했다. 이후 아로요 정권 내내 이어진 준계엄 수준의 안보태세는 “작전명: 자유 수호(Oplan Bantay Laya)” 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이 기간 동안 네슬레 노조 위원장을 포함해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 좌파 지식인, 혁명가 등 약 1,200명 이상(추정)이 백색테러 등 비사법적 방식으로 살해됐다. 2010년 필리핀 인민들은 투표를 통해서 정권을 교체했지만, 새로 들어선 아키노 정권도 변함없는 친미 성향으로 미제에 복무하고, 지난 정권의 반인권 범죄를 깨끗이 청산하기는커녕 반공의 기치 아래 좌파 척결에 무엇보다 힘쓰고 있다. 오히려 더 교묘해진 새 정권의 모습은 ‘작전명: 협동작전(Oplan Bayanihan)’이라는 프로젝트에서 엿볼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저발전 지역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인데, 이 과정에서 농촌 주민들을 통해 무장 게릴라 대원들을 색출하고, 농촌 지역에 무장 게릴라의 침투를 방지하여 마오주의 무장 투쟁을 붕괴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이다.

KMU는 노동절 집회에 미 대사관으로 행진하는 프로그램을 포함했다. 우리 국제대표단도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미 대사관을 찾아가 미군철수와 민족해방을 외치며 집회를 가졌다. 미 대사관은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마닐라의 가장 중심가이자 가장 전망 좋은 관광지에 위치하고 있기에, 이날 집회에는 ISA 국제대표단뿐만 아니라 관광차 필리핀에 체류하던 많은 외국인들도 참가했다. 대사관까지 1미터라도 더 접근하기 위해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도 발생했고, 집회장소 부근으로 무장병력이 탑승∙대기 중인 군 차량이 투입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성조기를 소각하고 차량을 이용해 간이 발언대를 만들고 목소리를 높이는 KMU 지도부의 전투적 집회가 인상 깊었다.

3) ISA 토론회와 연대의 밤

노동절 다음날은 ISA 원탁토론회가 계획되어 있었다. 마닐라 시내의 기독노동교육연구소(EILER)에서 장소를 협조 받아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EILER는 KMU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KMU의 조합원 교육용 교재를 발간하고, 노동자 교육 과정도 제공하며, 노동 계급의 관점에서 정세를 연구 분석하는 진보적 연구소이다. 이 토론회를 통해서 ISA의 본래 목적인 각국의 정세를 교환하고 투쟁을 공유하는 자리를 가졌다. 사전에 배포된 ISA 초대 및 안내장의 지시에 따라, 다음과 같은 5가지 토픽에 맞추어 사전에 발제를 준비하였다.

― 치솟는 물가와 임금인상 투쟁

― 비정규직화에 맞선 투쟁

― 긴축정책에 맞선 투쟁

― 빈곤, 억압, 군사주의에 맞서는 투쟁과 그 어려움

― 국제 행동을 통한 반제국주의 투쟁의 고취

모든 참가국들은 공통적으로 자국 내 비정규직 문제와 국영/공공부문의 민영화 문제를 토로했고, 각국의 정세 이슈로 일본의 경우 탈핵 문제, 미국의 경우 홈리스와 노숙 문제, 독일의 경우 리비아 등지에서 이뤄진 나토의 제국주의 침략전쟁 등을 특별히 다루었다. 주최국인 필리핀의 KMU는 미군 주둔 문제, 천연자원과 노동계급에 대한 제국주의 초국적 기업의 수탈,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인권침해 등을 중점적으로 고발하였다. 한국 대표단은 주요 현안으로 쌍용자동차투쟁, 한진중공업투쟁, 강정마을투쟁, 4/11총선과 노동자 정당의 붕괴 등을 발제문에 포함시켰고, 발제 시간을 통해서 특히 쌍용차, 강정에 대한 지지와 후원을 호소하였다. 그 중에서 강정 이슈에 대해서는, 역시 미군 주둔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일본 대표와 필리핀 활동가들과 함께 미제국주의 태평양 군사전략에 대해서 포괄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발제와 토론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28차 ISA 단결지점

①비정규직 문제에 맞서: 모든 참가국들이 겪고 있는 문제로 각국에서의 투쟁 상황을 서로 참고해 투쟁을 고도화

②군사화 문제에 맞서: 군부대 건설 및 미군 재진입 반대, 테러와의 전쟁을 빙자한 군사화 반대,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동맹 반대

③제국주의와 초국적 기업의 착취에 맞서: 2013년 페루에서 개최될 세계 광산 노동자 회의 지지, 각국에서 진행되는 초국적 기업에 대한 투쟁에 대해 꾸준히 정보교환

④노동운동의 탄압에 맞서: 각국 정부 및 입법기관을 통해 필리핀 정부의 인권 탄압에 대해 항의 전달

― 이상의 단결지점을 중심으로 연대와 경험을 공유하고 변혁 운동을 지속한다.

이상의 결론을 가지고 공동 성명서 등을 채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ISA 행사 자체가 예상했던 것 보다는 느슨한 행사였고, 참가한 각국 대표단들의 배경이 다양하여 하루짜리 길지 않은 토론회를 통해서 응집력 있고 확고한 결론을 이끌어내기에도 조금 무리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날 저녁에는 KMU 사무실에 모두 모여 28회 ISA를 마무리하는 연대의 밤을 보냈다. 올해는 ‘빵과 장미’ 파업이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에, KMU는 연대의 밤을 통해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또한 이 자리를 빌려 여성 노동자들이 받아온 억압과 그들의 운동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뜻도 전해왔다. 토론회가 끝난 뒤에 모두 함께 KMU 사무실로 이동했다. 사무실에는 KMU 식구들이 정성들여 준비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선 준비한 순서에 따라 각국 대표단 별로 돌아가며 연대의 뜻을 담아 준비한 문화 공연을 선보였고, 한국 대표단은 “여성해방 노동해방”의 뜻을 담아 투쟁가 ‘딸들아 일어나라’를 불렀다. 음식과 노래와 함께 열흘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며 배우고 느낀 점들을 서로 나누며 연대의 정을 두텁게 쌓았다. 특히 중간에 특별한 손님이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었다. 바로 한국 이주노조 전 위원장 미셀 카투이라 동지였다. 지난봄부터 필리핀에서 지내던 그는, 한국 이주노조와 함께 노동절을 보내고자 4월 30일 인천으로 입국했으나, 유효한 비자와 합법적인 방문 목적에도 불구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이유로 한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5월 1일 아침 공항에서 불법적으로 추방당하여, 필리핀으로 강제 귀국된 것이었다. 우리 연대의 밤에 합류한 그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각국의, 특히 한국의, 탄압에 대해 항의해 달라는 뜻을 호소했다. 실제로 필리핀은 수출산업이 취약하기 때문에, 수많은 필리핀 노동자들이 세계 전역으로 ‘수출’되어 이주노동자로써 차별과 억압 속에서 일하며, 본국으로 송금하는 외화를 통해 필리핀의 국제 수지를 맞춘다고 한다. 덕분에 필리핀 정부는 인력 수출이 어려워질까봐 자국민 이주노동자가 외국에서 겪는 폭력과 고통을 짐짓 무시하기 때문에 필리핀 노동자들이 스스로 ‘국제 이주노동자(미그란떼, Migrante International)' 이라는 국제 조직을 만들어 각국에 나가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돕고 있다. 한국에도 카사마코라는 필리핀 이주민 공동체가 있는데, 본국의 미그란떼와 긴밀히 연계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차별과 억압 속에서 스스로 각성한 노동자 조직을 통해서, 연대하고 상호 지원하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현지 이주노동자조직을 선도하고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미셀 전 위원장의 강제 출국 소식은 ≪시사IN≫ 등 국내 언론에 기사가 나가기도 했으며, 현재 이주노조는 미셀 전 위원장에 대한 탄압 중지 요구를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라. 마치며

2008년 금융공황 이후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붕괴를 진단하는 이들도 있지만, 필자는 이번 필리핀의 혁명적 노동 운동을 경험한 것을 계기로, 각국의 정세를 공유한 결과, 전 세계의 자본과 지배계급은 여전히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당면한 세계 대공황에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독점자본과 결탁한 국가는 2008년 공황 이후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하고 일체의 계급타협을 기각하여,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한편 민중복지 지출을 삭감하고, 그렇게 확보한 재정으로 사회기반산업이나 금융 등 주요 독점 사업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자본가 계급의 이윤 확보를 위해 두 팔을 걷고 나서고 있었다. 특히 이것이 어느 국가나 지역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구미, 북미 등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동아시아의 주변부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 전반에 걸쳐 동일한 “위기 탈출 전략”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였다. 마치 레토르트 패키지로 된 정책 묶음이 있어서 다 같이 공동구매라도 한 듯 말이다. 이렇듯 한줌 밖에 되지 않는 지배 계급은 각국의 정부라는 채널을 통해서 철저히 연대하고 공조하여 노동계급을 쥐어짜면서 ‘이윤 획득’이라는 자신들의 본연의 책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동시에 저들은 파쇼적 인종주의와 민족이기주의를 자극하면서 절대 다수의 노동계급의 연대를 훼방 놓고 있다. 이는 멀리 볼 것도 없이 한국의 경우에도 오원춘 사건에서 이자스민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 극우언론이 보여준 행태나 미셀을 강제 출국시킨 한국 정부의 행태에서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투쟁은 기만과 위선을 일삼는 민족이기주의 이데올로그들의 거짓선동을 분쇄하고, 철저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국제 정세를 분석하고, 세계 각국의 노동운동과 적극적으로 다원적인 연대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노사과연>

참고문헌

박승우(2005). <필리핀의 노동운동: 사회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운동의 대위법적 결합>. ≪월간 노동사회≫ 2005년 3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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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학(2003). <아시아 노동운동의 현황과 과제 2.필리핀>. ≪월간 노동사회≫ 2003년 12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Amado Guerrero(1987). ≪필리핀 사회와 혁명≫. 정종길 역. 공동체.

Ecumenical Institute for Labor Education and Research(1989). ≪진정한 노동조합운동≫. 일꾼 자료실 역. 만민사.

<끊이지 않는 이주노조 위원장의 ‘저주’>. ≪시사in≫ 2012년 5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