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르주아적 관점과 노동자계급의 관점

대통령 선거가 임박할수록 그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세워 ‘박정희 시대’를 ‘재현’시키려는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 간의 대립과 긴장이 크게 높아가고 있다. ‘유신 독재’, 고문, 군사쿠데타를 통한 ‘헌정 중단’, 정수장학회와 같은 무법적인 재산 강탈과 그 장물의 향유 등을 둘러싼 고발 및 비판, 한 마디로 이른바 ‘과거사’와 관련한 직간접적인 공방은 물론, ‘과거가 아니라 미래’니, ‘경제민주화’니, ‘복지’니, ‘국민통합’이니 하는 온갖 위선적ㆍ기만적 캠페인들 역시 모두 바로 그 ‘박정희 시대’의 재현 여부를 판가름할 ‘대선’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음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다. 그리고 그 대립ㆍ공방은 이른바 ‘대권’이 걸려 있고,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이해가 다른 만큼 당연히 치열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이 치열한 대립과 공방의 겉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우리는 기묘하게도(?)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서로 정면에서 이해를 달리하는 이 두 세력이,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 쌍방의 대부분이 전적으로 동일한 지평에 서서 동일한 것을 척도로 삼아 역사를, 세상사를 재단하고 있으며, 동일한 것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상호가 내세우는 바로는 말이다!

다름 아니라,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지평이며, 그러한 척도이며, 그러한 지향이다. 혹시 다름이 있다면, 한쪽은 그것을 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내세우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그저 주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물론 쌍방은 서로 상대방의 ‘진의’를 의심하고, 서로 그것을 까발리려고 하고 있다. 즉, 겉으로 들이대는 척도만 비슷하게 보일 뿐 서로 간에 서 있는 지평도, 그 지향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쌍방이 서로의 ‘진의’를 그렇게 의심하며 까발리려는 적의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바는, 적어도 쌍방의 주관적 지평과 척도ㆍ지향, 혹은 적어도 내세우는 바의 그것들이 동일하다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그리고 우리의 이 시대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아니, 그것으로 충분한가?

민주주의를 논하는 많은 정치학자들은 대개가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를 ‘일반 민주주의’라고도 규정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라고도 규정한다. 여기에서, ‘일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일반’으로 주장하고 이해하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그것이 절차적 민주주의인 한에서는 박정희 시대를, 즉 박정희 일당의 무도한 권력 장악과 권력 행사를 그러한 척도에 비추어 판단하고 엄중히 비판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데에, 나아가 역사와 정세 일반을 분석ㆍ평가하는 데에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라는 지평에 머물러, 그러한 척도로만 재단해서는 안 되고, 하물며 그러한 지향에만 머물러서는 더더욱 안 된다.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라는 지평ㆍ척도는 그야말로 부르주아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이어서, 사회의 계급적 분열과 대립을 은폐하고 있고, 그만큼 몰역사적ㆍ몰과학적이기 때문이다.

소부르주아지야 본래, 그 사회ㆍ경제적 지위도, 그 관념도 모두 부르주아지와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는 계급ㆍ계층이기 때문에, 아무리 크고 아무리 그럴 듯하게 들리더라도 언제나 그들의 목소리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부르주아지와 노동자계급인데, 우선 착취하고 억압하는 지배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가, 하물며 독점부르주아지가 사회의 계급적 분열과 대립을 은폐하고, 그리하여 몰역사적이고 몰과학적인 사고로서 스스로를 기만하며 대중을 기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몰역사적이고 몰과학적인 사고와 기만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계급적 이해에 합치하기 때문이다. 이미 1873년에 맑스는 이렇게 언명하지 않았던가?!

경제학이 부르주아적인 한, 즉 자본주의적 질서를 사회적 생산의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발전단계로서 파악하는 대신에, 거꾸로 사회적 생산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모습으로 파악하는 한, 경제학이 과학일 수 있는 것은 다만, 계급투쟁이 아직 잠재적이든가, 혹은 단지 개별적인 현상으로서만 나타나고 있는 동안뿐이다.¹⁾

맑스의 이 언명이 비단 경제학에뿐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일반, 역사과학 일반에도 해당되고, 따라서 정세의 분석과 판단의 기본적 관점과 방법에도 해당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피착취ㆍ피억압 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의 경우는 어떤가?

우선,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한 것처럼, 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은 물질의 생산수단들만을 소유ㆍ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생산수단들, 사상의 생산수단들 역시 소유ㆍ지배하며, 따라서 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²⁾ 오늘날 박정희 시대를 혐오ㆍ비판하며 그 재현을 저지하려고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서 있는 이념적 지평ㆍ척도ㆍ지향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그리고 표방하는 바로는, 박정희 시대를 재현하려는 자들과 같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한 한에서 그들은 지배계급의 정치적 대표로서의 박정희 일당 및 그 계승자들과 투쟁하고 있지만, 이념적ㆍ사상적으로는 그들과 한편이거나 그들의 포로인 셈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의 투쟁은, 설령 그것이 어떤 일정한 상황 덕분에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이내 곧 패배로 반전을 거듭하면서, ‘박정희 시대’, ‘박정희 체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그 수렁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박정희가 피살된 지 오늘로 만33년. 그간의 투쟁과 그 승패, 그리고 그 승리의 패배로의 반전(反轉)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바로 여기에 선진노동자들의 또 다른 임무가 존재한다.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역사와 정세를 분석ㆍ판단하고, 그러한 관점과 판단을 노동자 대중에게 널리 보급하며, 그 투쟁을 지도해야 하는 임무가 그것이다.

2. 박정희 시대 등장의 배경과 의의

‘박정희 시대’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고 가장 먼저 문제 삼는 것은 아마 ‘유신 독재’일 것이다. 두발ㆍ미니스커트 단속에서부터 긴급조치, 고문, 투옥, 인혁당 사건의 사법살인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에 걸친 그 시대의 파쇼 악행들이야말로 가히 가장 극악한 파쇼의 전형이었으니, 사람들이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러나 ‘유신 독재’는 그것이 아무리 극악했을지라도 박정희 정권의 후기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 혹은 박정희 시대의 본질적 의의는 그것의 전기, 특히 그것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은, 아니 이른바 진보지(進步紙)들의 지면을 메우고 있는 이름난 역사학자들이나 정치학자들조차 대개는 이를 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신 독재’를 그렇게 돌리는 것처럼, 박정희 정권의 등장 또한 박정희라는 인간과 그 일당의 정치적 야심과 기질 탓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이야말로 전형적인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관점, 즉 몰역사적이고 몰과학적인 관점이다.

혈서로서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일제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장교가 되었고, 일제가 패망하자 재빨리 ‘광복군’으로 변신했으며, ‘해방’ 공간에서는 사회주의가 득세하는 듯하자 또 다시 재빨리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세가 불리하자 전향한 그의 끈질긴 출세욕, 정치적 야심에, 그 전향과정에서 팔아넘긴 수백 명 동료들의 목숨 값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삶의 여정 속에서 저지른 수많은 잔혹한 범죄와 살생 때문에 평생을 어쩔 수 없이 ‘철두철미한, 잔혹한 반공투사’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 박정희의 이력은 물론, 왜 그 수괴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고 박정희였는가를, 왜 그가 적임자였는가를 훌륭히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왜 1961년이라는 정치적ㆍ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러한 자를 수괴로 하는 그러한 정권, 그러한 군사파쇼 정권이 등장했는가는 결코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의 본질은 바로 이 점에, 즉 왜 1961년이라는 정치적ㆍ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러한 군사파쇼 정권이 등장했는가에 있다. 그리고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역사적ㆍ정치적 상황, 즉 역사적 맥락 속에서 벌어지던 당시의 계급투쟁만이 그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박근혜의 역사인식에 문제 있다고 비난하는 ‘진보적’ 역사학자들이나 지식인들, 정치가들의 역사인식보다는 “5ㆍ16 군사 쿠데타도 ‘10월 유신’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불가피했다”고 담담히 말하는 박근혜의 역사인식이, 물론 극히 반동적이긴 하지만, 훨씬 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5ㆍ16 군사 쿠데타를 통한 박정희 정권의 등장도, 친위 쿠데타를 통한 ‘유신 독재체제’의 확립도, 그것들을 박정희라는 인간과 그 일당의 정치적 야심이나 기질 탓으로 돌리는 대신에, 당시의 역사적ㆍ정치적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나 그를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박정희 시대를 재현시키려는 자들의 역사인식의 문제는 그들이 ‘5ㆍ16 쿠데타나 10월 유신 쿠데타가 당시의 상황에서는 불가피했다’고 말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불가피했는가를 솔직히 얘기하지 않는 것, 그것들이, 제국주의 및 그에 부역하는 극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불가피했던 것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마치 절대 다수의 노동자ㆍ민중의 이익을 위해서 불가피했던 것처럼 거꾸로 설명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군사 쿠데타를 통하여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던 1961년 봄은 역사적ㆍ정치적으로 어떤 시점이었으며 어떤 상황이었던가?

이승만 정권의 파쇼적 억압으로 억눌려 있던 범민중적 저항, 계급투쟁이 4월 혁명에 의한 그 정권의 붕괴를 계기로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시점이었고, 그러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 및 그와 연합한 토착 지배세력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범민중적 저항, 계급투쟁을 압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었고 상황이었다. 박근혜의 표현대로라면, 그 압살이 “불가피한” 시점이고 상황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를 연 5ㆍ16 군사 쿠데타는 그렇게 4월 혁명의 압살이었고, 파쇼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계기로 터져 나오던 범민중적 저항, 계급투쟁의 압살이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직접적으로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거치면서, 그리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일제 치하로부터 민중적 의사에 반하여 조성된 당시의 현상(現狀), 즉 착취ㆍ억압체제를 뒤집어엎으려는 민중적 저항ㆍ계급투쟁이 대대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저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압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당시 그것은 무력으로써만, 즉 군을 동원해서만 가능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박정희를 수괴로 하는 군사 쿠데타였던 것이다.

5ㆍ16 군사 쿠데타, 박정희 정권의 등장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는 것은 사실은 당시 대통령 윤보선이 쿠데타 보고를 받고 뇌까렸다는 유명한 말, “올 것이 왔다”는 말에 상징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올 것이 왔다”? ― 바로 이 한 마디로서, 대통령이었던 그 역시 당시의 정세 속에서 민중적 혁명의 진전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어떻게든 그것이 압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자백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바로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 얼마나 대대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공포와 반격이 얼마나 절박했던가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4월 혁명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으로부터 불과 15년, 이승만 정권의 수립으로부터는 불과 12년, 그리고 종전(終戰) 혹은 휴전(休戰)으로부터는 불과 7년이 채 안 되는 1960년에 발발했다. 4월 혁명이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계기들로부터, 아니 그 결정적 계기들로부터 이렇게 가까운 시기에 터져 나왔다는 것은 그 짧은 기간에 벌어진 일들, 그 질서가 얼마나 반민중적이었던가를 웅변하는 것이며,³⁾ 좌우익 간의 대립ㆍ투쟁을 포함하여 그간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노동자ㆍ농민의, 민중의 체험의 기억이 아직 얼마나 생생했을까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의 압제가 제거되자 곧이어 민중적 요구와 투쟁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기존의 체제ㆍ질서 전체는 갈수록 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수많은 민중적 요구와 투쟁 가운데에서도 제국주의와 토착의 지배세력에게 가장 커다란 공포로서 다가왔던 것은 성질상 필시, 전쟁 중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대적으로 저질러진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 책임자들을 처벌하려는 움직임과 어용 대한노총 체제를 해체시키면서 자주적인 단결과 투쟁의 길로 나아가던 노동자계급의 동향이었을 것이다.

32년 전의 광주학살이나 그보다 더 오랜 이른바 인혁당 사법학살의 기억과 충격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생생한가를 고려하면, 저질러진 지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은 대량학살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것이, ― 아직도 이렇게 노예적인 언어로서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 그것이 가질 수밖에 없었을 폭발력이 저들에겐 정말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듯한 공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구성,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에서 노동자계급은 물론 아직 상대적으로 소수에 머물렀지만, 그 계급적 속성상 그들은 사상ㆍ이념적으로도 투쟁적으로 민중 선도적일 수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급격히 팽창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조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들은 박정희ㆍ김종필 일당이라는 정치ㆍ정보 장교들, 정치군인들을 내세워 민중적 저항ㆍ계급투쟁을 파괴ㆍ압살하고 나섰다. 혹은 저들의 입장에서는, 박근혜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파괴ㆍ압살에 나서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리고 저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소위 ‘혁명공약’이라는 것의 맨 머리에 명확한 어조로 솔직히, 위협적으로 밝혔다. 이렇게 ―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ㆍ강화한다!

“지금까지”, 즉, 미군정 하에서도, 자유당의 이승만 정권에서도, 민주당의 장면 정권 하에서도 “반공태세”가 결코 “형식적”이었거나 “구호에 그”쳤을 리 만무하니, 저들이 혁명ㆍ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하려 했던 일이 무엇인가는 사실은 이 소위 ‘혁명공약’에서부터도 명확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확고부동한 반공국가, 확고부동한 예속적 반공국가를 주조(鑄造)해내려는 것이었고, 그것도 공포정치를 통해서 그것을 주조해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것을 주조해내는 데에 대체로 성공했다. 쿠데타 후 이른바 ‘민영이양’까지의 2년 반 가까운 기간이나 ‘유신 독재’와 같은, 혹은 ‘위수령’, ‘계엄령’이라는 이름으로 수시로 군을 동원한 노골적인 고강도 공포정치를 통해서는 물론, 특히 ‘중정’이라는 말로 상징되던 일상화된 공포정치를 통해서도!

물론 저들이 상대적으로 확고부동한 반공국가를 주조해내는 데에는, 저들의 표현을 빌면, ‘비약적인 경제발전’,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비약적인 자본주의 발전, 따라서 비약적인 생산력 발전도 불가결한 요소, 주요한 지렛대로 작용했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의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결코, 저들 박정희 시대를 재현시키려는 자들이 선전하는 것과 같은 것, 즉 박정희 정권의 독자적인 정책이나 지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박정희 정권 이전에 민중적ㆍ농민적 압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봉건적 토지소유, 즉 지주-소작관계의 해체로서의 농지개혁, 그것도 현물의 지가상환은 물론 전쟁비용을 농민에게 전가한 현물의 토지수득세의 납세 의무를 수반한 농지개혁의 필연적 후과(後果)였고, 따라서 소농민층의 대대적인 분해, 즉 몰락과 빈곤화,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화를 수반한 것이었다. 농민층의 이러한 빈곤화ㆍ몰락과 저임금 노동자화는 미국으로부터의 잉여농산물의 도입과 이에 기초한 저곡가 정책에 의해서 특히 급속히 진행되었는데, 이 역시 박정희 정권 이전부터 일관되게 추진ㆍ실행돼온 것이었다.⁴⁾

아무튼, 저들은 ‘확고부동한 반공국가’를 주조한다는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방금 말한 것처럼, “대체로 성공”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계급 분열과 대립ㆍ투쟁은, 더구나 한국적 그것들은 ‘확고부동한 반공국가’ 따위를, 그것도 ‘확고부동한 예속적 반공국가’ 따위를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들이 “대체로 성공”하는 데에도 긴 시간과 거듭된 노골적인 공포정치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거듭된 ‘계엄령’, ‘위수령’이 필요했고, 마침내는 ‘유신 독재’라는, 그리고 나아가 전두환 정권이라는 참으로 장기적인 노골적 공포정치, 파쇼가 필요했고, 광주학살이 필요했다.

혹시 ‘유신 독재’ 시대와 전두환 정권 시대는 그 노골적이고 장기적인 공포정치ㆍ파쇼 때문에 오히려 반독재ㆍ반파쇼 민주화 투쟁이 활성화된 시대라는 반론을 펼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유신 독재’의 시대는 반독재ㆍ반파쇼 민주화 투쟁이 활성화되었을 뿐 아니라 크게 대중화된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투쟁의 활성화는 어디까지나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로의 사상ㆍ이념적 지평과 지향의 커다란 후퇴를 수반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따라서 이 시대 역시 ‘반공국가’가 주조된 과정의 시대임에는 변함이 없다.

1980년대, 그러니까 전두환 정권의 시대는 보다 복잡한데, 누구나 아는 것처럼, 이 시대는 반독재ㆍ반파쇼 민주화 투쟁이 활성화되고 대중화된 시대일 뿐 아니라 압살되었던 사회과학이 다시 부활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사회과학의 부활’은 극소수 진보적 지식인들과 학생 사이에서의 일이었을 뿐 아니라 너무나 장기간에 걸친, 너무나 철저한 압살을 당한 후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 부활이 자립할 수 있는 생명력을 얻어 성숙하기까지는 상당히 장기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세는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1980년대 말 ― 1990년대 초에 발생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해체로 대대적이고 장기적인 반동이 저들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진보적 학생들까지 휩쓸어버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러한 사상ㆍ이념적 상황은 사실상 박정희 정권 초기의 그것보다도 훨씬 후퇴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일당이 ‘민정이양’을 한다며 실시한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의 11개 시도별⁵⁾ 득표 상황이 흥미롭다.

당시 “선거전은 박정희와 윤보선 후보의 대결로 압축되는 상황...(에) 도달”, 박정희는 4,702,640표(투표율 85%에 총투표수 11,036,175표의 42.6%), 윤보선은 4,546,614표(41.2%)를 얻어 불과 15만 6026표의 차로 박정희가 당선되었는데, 이는 서울과 경기에서 윤보선이 압도적으로 다수표를 얻은 반면, 전남과 경남, 경북, 그리고 제주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한 결과였다. 이를 두고 ≪위키백과≫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선거에서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던 윤보선은 의외의 전개에 궁지로 몰리게 되고 막판에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으며 색깔론을 제기했으나, 오히려 전라도 도민의 분노를 사게 되는 역풍이 불어오고 박정희에게 몰표를 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⁶⁾ (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위키백과≫의 이러한 판단, 즉 “전라도 도민의 분노를 사게 되는 역풍이 불어오고 박정희에게 몰표를 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판단은 그다지 정확한 게 아니다. 아래 각주에 싣는 표⁷⁾에서 보는 것처럼, 윤보선은 전라북도에서보다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제주도에서 더욱 참패를 당했고, 전라남도를 포함해서 이들 지역은, 주지하다시피, 모두 빨치산 투쟁 등 좌익적 활동이 다른 어느 지역들보다도 월등히 강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으며 색깔론을 제기했으나, 오히려 전라도 도민의 분노를 사게 되는 역풍이 불어오고 박정희에게 몰표를 주게 되는 계기가 되”는 당시의 사상ㆍ이념적 분위기는 현재의 정서로 볼 때 무척 흥미롭거니와, 오늘날과는 판이한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는 박정희와 그 일당이, 나아가 그 배후의 어떤 거대한 세력이 박정희 일당의 공포정치를 통해서 ‘확고부동한 반공국가’를 주조한다는 목적을 대체로 성공적으로 달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박정희와 윤보선의 이러한 지역별 득표 상황은 ‘영남 대(對) 호남’이라는 오늘날의 비극적 지역주의 또한 박정희 시대에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주조되었으며, 따라서 그 해소는 노동자계급이 그 계급의식을 회복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도 말해주고 있다.

3. 박정희 시대는 아직도 지속ㆍ발전되고 있다

30년 전 오늘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의 질펀한 술자리⁸⁾에서 울려 퍼진 몇 방의 총소리와 함께 희대의 살인마ㆍ독재자 박정희도, 그 정권도 끝장을 맞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박정희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면면히 지속되고 있고, 오히려 성장ㆍ발전하고 있다.

나는 앞에서 박정희와 그 정권의 임무는, 민중적 의지를 압살하고, ‘확고부동한 반공국가’를 주조(鑄造)하는 것이었다고 말했고, 또한 그와 그 정권은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대체로 성공했다’고 말했다. 즉, 아직도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주조된 이 사회의 기본 틀이 여전히 유지ㆍ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의 죽음과 그 정권ㆍ유신체제의 폐지도, 6월 항쟁과 그 해 7-9월의 노동자 대투쟁도,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도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주조된 이 사회의 기본구조를 전혀 건드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 등은 오히려 그것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주조되어, 이후 계속 유지ㆍ발전된 것은 부르주아적 사회구조뿐이 아니다. 사회와 역사를 보는 관점 또한, 따라서 지향하는 사회상(社會象) 또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주조되고, 이후 계속 성장ㆍ발전되어 왔다. 다름 아니라 바로 역사와 사회에 대한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관점과 지향이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사회를 부르주아적 반공국가로 주조함에 따라서 부르주아적 사상과 그 아류로서의 소부르주아적 사상이 이 사회의 지배적 사상으로 주조되었던 것이고, 드디어 오늘날에는 그것이 절대 다수의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의 머릿속까지도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선 관련 여론조사에서 박정희 딸 박근혜의 지지율이 40%를 오르내리는 것도, 양대 부르주아 정당(이나 ‘안철수 캠프’ 같은 그 아류들)이 이 나라의 정치판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도,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내걸고 정치판에 나선 세력들이 사실상 하나 같이 소부르주아 정당화ㆍ정치세력화하고 있는 것도, 그들 중 상당수를 포함하여 상당수의 ‘좌파적’ㆍ‘혁명적’ 활동가들이라는 자들이 사실은 극우적 세계관ㆍ역사관과 그러한 실천을 좌익적ㆍ혁명적 언사로 포장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도 모두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중이, 그리고 저들이 바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주조된 이념과 사상의 담당자이고, 그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모두 바로 박정희 시대가 아직도 면면히 지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성장ㆍ발전되고 있는 현상(現象)들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그 사상ㆍ이데올로기의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즉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기죽고 절망할 필요는 물론 전혀 없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가 기죽고 절망해야 할 근거는 전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무릇 사물이 성장ㆍ발전한다는 것은 그 내부에서 그 대립물 또한 성장ㆍ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변증법, 즉 사물의 운동법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따라서 박정희 정권이 주조해낸 사회의 발전은 그 매장인들도 동시에 양산하고 있는 것 아니던가?!

그리하여, 우리는 이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참담하게 보일지라도, 바로 거기에서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노동자 대중에게 사회의 계급적 분열과 그 이해관계의 화해 불가능한 대립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강조하면서!

그리고 목소리 큰 여러 기회주의적 경향들, 좌익적ㆍ혁명적 언사로 포장된 반동적 경향들과 단호히 투쟁하면서! <노사과연>

     (자료: http://ko.wikipedia.org/wiki/대한민국_제5대대통령_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