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동구와 소련의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맑스주의는 박물관에나 전시해야 할 낡은 사상이라고 선전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오늘날 많은 사상들이 맑스주의를 대신하여 진보사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렇게 진보사상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것들이 과연 정말로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일까? 우리는 이런 것을 따져보아야 할 처지에 있고, 아울러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철학에는 어떤 과제들이 제기되고 있는지를 명확히 하면서, 이를 해결해 나가야 할 책무를 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정세와 노동]은, 부르주아 강단에서 소위 '진보사상'으로 널리 소개되고 있는 주장들을 노동자 계급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글들을 소개하기로 하였다. 이번 호와 다음 호에는 미국의 존 롤스의 '정의론'과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적 행위이론'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 마끼노 히로요시(牧野廣義) 교수의 글 "롤스, 하버마스와 사적 유물론"([経済] No. 121, 2005年10月号, 新日本出版社)을 싣는다.

머리말

사적 유물론과 그에 기초한 사회과학은 지금까지 사회운동․사회변혁의 이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동시에, 사적 유물론은 현대 사회가 제기한 새로운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그리고 현대의 사회철학․사회사상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서 이론적인 심화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 이후 미국나 유럽의 사회운동과 연결되어 전개해 온 자유주의(liberalism)나 비판적 사회이론은 일본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국의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정의론이나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rbermas, 1929- )의 컴뮤니케이션적 행위이론은 법철학이나 사회학 분야를 넘어 오늘날 사회과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약육강식의 불공정한 '구조개혁'이나 이성적인 토론을 무시한 힘의 논리가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사회주의나 컴뮤니케이션적 이성을 정면으로 내세우는 논의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 진보적인 이론도 현대사회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사회운동․사회변혁의 방향성을 명시하는 점에서는 이론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는,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과제를 보다 명확히 하는 관점에서, 롤스와 하버마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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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롤스의 정의론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흑인의 공민권운동․여성해방운동․베트남반전운동 등이 고양되었다. 이런 운동들을 배경으로 존 롤스의 [정의론](1971년)은 법철학․윤리학 분야에서 이론적인 문제들을 제기했다. 영국과 미국의 사회사상에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했던 19세기의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 이래 '공리주의'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또 철학자나 윤리학자들은 언어분석에 집중하여 도덕의 내용이나 선이나 정의 등은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롤스는 공리주의에 의해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지향하여 효율적인 사회시책을 벌이는 것만으로는 소수자의 권리나 이익이 희생당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7-18세기의 사회계약론을 현대의 게임이론과 결합하여 부활시켰고, 사회조직의 기본적 원리로서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 원리는 사회이론 속에서 '정의'라는 규범을 제시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영국과 미국의 사회사상이나 윤리학의 방향을 크게 전환시켰다.

롤스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논의를 전개했다. 그는 먼저 사회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일치하여 합의할 수 있는 정의의 원리를 탐구한다. 그 원리란, 각자의 권리와 의무를 정하고, 사회적 협동의 편익과 부담을 적절하게 배분하는 원리이다. 그때, '원초상태'(original position)라는 것이 가정된다. 여기에서는 먼저 각 구성원들은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이고 타인의 이해에는 무관심하다고 가정된다. 그 다음에 각 구성원들은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으며, 정치현상이나 경제이론 등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현재 및 장래의 사회적 지위나 능력에 대해서는 완전히 알 수 없는 '무지의 베일' 속에 있다고 가정한다. 여기서부터 각자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고려하면서 판단을 거듭하여 타인과 합의할 수 있는 일치점을 찾아낸다. 여기에서 각자는 다음의 하나의 원리에 도달한다. 그것은 [정의론]에서는 여러 가지 고찰을 걸쳐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다(제3장 46절).

제1 원리 ― 각자는, 모든 사람의 동일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 가능한, 평등하고 기본적인 자유의 가장 광범위하고 전체적인 체계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제2 원리 ―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a)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최대의 이익을 받도록. 나아가, [다음 세대를 위한] 정의에 부합하는 저축의 원리와 양립하는 방식으로.

  (b) 공정한 기회의 균등이라는 조건 하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무와 지위에 수반한 불평등일 것.

제1 원리는 '자유의 원리'이다. 이에는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체의 자유, 정치적 자유가 포함된다. 이 제1 원리가 가장 우선시된다. 제2 원리의 (b)는 기회 균등의 원리다. 이것이 두 번째로 우선시된다. 제1 원리와 제2 원리의 (b)는 '평등의 원리'이다. 제2 원리의 (a)는 '차등의 원리'라고 불린다. 그것은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최대의 이익을 받도록 한다는 조건에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차등)을 승인하는 원리이다. 이 원리는 '우애의 원리'이다. 여기에서 분배되는 것은 '사회적 기본재'이고, 그것은 권리, 자유, 기회, 소득, 부, 자존심이다. 차등의 원리는 “천부적인 재능의 분배를 공동의 자산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분배가 주는 이익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데 합의한다(17절)”는 것이다. 이 원리는 또한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교육의 역할도 중시한다.

롤스는 이상과 같은 정의의 두 원리를 근간으로 한 '입헌민주주의' 제도를 논한다. 그것은 ① 원초상태에서의 정의의 두 원리의 확정, ② 헌법제정집회에서의 평등한 시민의 자유와 입법권의 확정, ③ 입법단계, ④ 재판관이나 행정관에 의해 룰(rule)의 적용이라는 네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 이 네 단계가 진행돼감에 따라서 '무지의 베일'은 서서히 사라지고, 각자의 보다 구체적인 조건에 적합한 입법과 사회정책, 행정과 사법이 이루어진다. 특히 경제시스템에서는 '분배의 정의'를 보장하기 위해서 정부는 다음 4개의 부문을 갖게 된다. 즉 ① 배분부문에서는 경쟁적인 가격시스템을 유지하고 부당한 시장지배력의 형성을 방지한다. ② 안정부문에서는 완전 고용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③ 이전(移傳)부문에서는 사회적 최소치(social minimum 최저한도 이상의 사회보장)를 보장한다. ④ 분배부문에서는 조세와 재산권을 조정한다. 그를 위해서 상속세, 증여세, 누진과세 등을 활용한다.

나아가 롤스는, 이상에서는 정의를 선에 우선하는 것으로 논해 왔지만, 선에 대해서도 숙고된 합리성에 의해서 선택되는 합리적인 인생계획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하는 등 도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롤스의 정의론은 자유와 평등의 권리의 근거를 밝히고 시민적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론을 전개함과 동시에 복지국가의 실현을 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진보적인 이론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2. 롤스의 정의론을 둘러싼 문제점

그러나, 롤스의 문제제기는 독창적이긴 하지만, 아울러 많은 비판과 논쟁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그런 비판에 답하는 방식으로 롤스 자신이 이론을 전환시키고 있다. 여기에서는, 롤스가 정의를 사회적 기본재의 배분문제로 제시했던 것에 대한 비판(하버마스도 이 점을 비판한다)은 일단 제쳐두고, 정의의 두 원리의 도출과 그 내용에 관련된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롤스의 [정의론]에는 이론의 전개방법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롤스의 독창적인 발상은 게임이론이라는 사고방식을 살림으로써 사회계약론을 합리적인 선택이론으로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 설정에는 많은 비판이 따라붙었다. 그것은, 개인들이 비록 자기 자신의 정보에 관해서는 '무지의 베일' 속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정치나 경제에 대한 일반적 지식이 일치해 있을 리 없고, 전원 일치로 합의할 수 있는 원리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점이다. 또한 롤스는 '차등의 원리'를 게임이론의 '맥시멈 룰(maximum rule)'과 대응시키고 있다. 그러나 '맥시멈 룰'은, 복수의 선택지 각각 최악의 결과를 예상하여 최악의 정도가 가장 낮은 선택지를 취한다는 룰이다. 예컨대, 어떤 특수한 효과를 지닌 극약(劇藥)을 제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하는 경우, 그 제조로 빚어지는 최악의 결과로서 대참사가 예상된다면, 그 극약은 제조하지 않는다는 룰이다. 그러나 그것은 롤스의 차등의 원리라는 사고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사고방식에서는 최악의 결과를 개선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효율을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롤스 자신이 엄하게 비판하는 공리주의와 다름이 없는 것으로 된다.

이상과 같은 비판에 대하여 롤스는 [정의론] 이후의 논문들에서는 정의의 두 원리를 합리적인 선택이론으로서 도출하는 방법을 철회해가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주의](1993년)에서는 자유주의를, 인간론이나 도덕론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이론으로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정치영역에 한정된 '정치적 자유주의'을 제시하는 것으로 바꿨다. 그리고 정의의 두 원리도, 가치관이 다른 여러 가지 포괄적인 이론 간의 '서로 중첩되는 합의'로서 제시하였다.

둘째로, 롤스가 제시한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관계에도 문제가 있다. 롤스는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하고, 타인의 이해에는 무관심한 개인'을 가정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는 "천부적인 재능의 분배를 공동의 자산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분배가 주는 이익을 함께 나누어 가진다"고 하는 평등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양자를 양립시키기는 대단히 곤란하다.

자유지상주의(리버타리아니즘, libertarianism)를 주장하는 노직(Robert Nozick)은 롤스의 평등주의 및 거기에서 도출되는 복지국가의 구상을 엄중하게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한, 개인이 정당하게 취득한 것은 개인의 소유물이며, 그것을 타인에게 분배하는 원리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로운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는 '최소국가'여야 한다. '분배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취득물을 다시 배분하는 '복지국가'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공동체주의'(콤뮤니타리아니즘, communitarianism)는, 롤스의 '자유주의' 가 고립된 개인을 전제로 정의를 선에 우선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다시 우선시하는 것을 엄하게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산델(Michael Sandel)은 롤스가 전제하는 개인은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부담 없는 자아'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현실의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 '상황에 의해 제약받는 자아'이며, 다름 아닌 공동체 속에서의 '공통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민의 공동성을 중시하는 '시민적 공화주의'의 활성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롤스의 정의론은, 자유와 평등을 양립시켜, 개인의 자립과 공동을 결합시키기 위한 충분한 논리를 결여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셋째. 그러면 정의의 두 원리의 도출이나 자유와 평등의 제기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방향으로 해결 가능할까? 먼저, 정의의 두 원리는, 그것을 합리적 선택이론으로부터 도출하는 자체가 곤란할 뿐만 아니라, '서로 중첩되는 합의'의 이론으로는 그 합의의 근거를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자유와 평등은, 현실적으로 서로 모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롤스와 같은 형식적인 논의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근대사회가 자유나 평등을 인권으로서 확립해온 현실적인 과정을 근거로 하여, 다름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기초가 되는 인간의 사회적․역사적 실천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실제로, 롤스가 부활시키려고 했던 사회계약론은 17-18세기 시민혁명의 이론이었다. 사회계약론이 상정했던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은 시장 경제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형성 속에서 성립됐던 시민(부르주아지)의 입장 표명이었다. 자유는 시민의 경제적․정치적․정신적 활동의 자유였고, 평등은 봉건적 신분제의 해체와 상품소유자의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유․평등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의 자유였고, 빈부의 격차나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노동운동이나 여러 가지 사회운동은 실질적인 자유나 평등의 실현을 위해서 참정권, 노동권, 교육권, 생존권 등을 요구하였고, 모든 인간의 존엄을 기초로 한 인권과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운동의 과정은 사람들의 공동․연대․단결의 의의를 명확히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게다가 인간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서 형성되는 '공동'의 방식은, 롤스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우수한 능력을 '공통의 자산'으로 활용하고 그 성과를 혜택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분배한다'고 하는 일방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능력은 다면적이기 때문에, 다양한 개성과 능력을 지닌 개인들이 서로 협력하고 그 성과들을 함께 서로 나누는 상호적인 것일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와 같은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통한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새로운 제도의 실현과정으로 인식함으로써만 자유․평등의 객관적 근거와 발전방향을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하여 사회적 공동체 속에서 인격적 자율을 형성할 수 있는가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정의'란, 공정한 룰로서 합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룰의 객관적인 근거도 명백히 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도 역시 현실적인 사회생활 속에서 그 모순을 해결하는 이론과 실천으로서 해명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계속)《노사과연》

이론

롤스 ․ 하버마스와 사적 유물론 (1)

마끼노 히로요시 (牧野廣義)

번역: 김성칠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