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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1) ― 히틀러에서 허스트, 콘퀘스트, 그리고 솔제니친까지
글쓴이 마리오 소사(Mario Sousa, 스웨덴 공산당원) E-mail send mail 번호 99
날짜 2008-09-10 조회수 3661 추천수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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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역자의 말: 이 글은 스웨덴의 공산당원인 마리오 소사가 1998년에 쓴 글이다. 이 글에서 그는 그동안 쏘련에 대해 알려졌던 각종의 중상모략들, 특히 스딸린 시기의 문제들, 즉 1930년대 우끄라이나 대기근으로 수백만이 죽었다는 주장, 노동 수용소에 수백만이 갇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죽어갔다는 것 등의 이야기들이 순전히 날조되었다는 것을 쏘련의 문서고 자료 등을 바탕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 글은 4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며, 이번 호에서는 우끄라이나 대기근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번역․게재하였다.





연구소에서는 이 글과 1930년대 쏘련에서의 계급투쟁, 이른바 대숙청 문제를 다룬 마리오 소사의 다른 글(지난 호부터 󰡔정세와 노동󰡕에 연재했던 글), 그리고 쏘련과 독일의 전쟁이었던 2차 대전에 대한 각종 왜곡들을, 특히 스딸린그라드 전투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며, 반박하고 있는 또 다른 글, 이렇게 3편을 묶어 내년 초 단행본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성과를 거두어, 쏘련 사회에 관한 왜곡된 각종 견해들이 극복되고,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지반이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 모든 각주는 역자에 의한 것이다.]

























싣는 차례





독일이 자신의 영토로 차지하려고 했던 우끄라이나



윌리엄 허스트 - 히틀러의 지지자



우끄라이나 기근에 대한 꾸며낸 이야기



1998년의 허스트의 매스미디어 제국



52년이 지나서야 진실이 드러났다.



․ 로버트 콘퀘스트가 꾸며낸



이야기들의 핵심이다.



․ 알렉산더 솔제니친



․ 프랑코의 파시즘을 지지하다.



․ 나치, 경찰, 파시스트들



․ 국가 문서고가 선전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사기적 방법으로 사망자 수를 수백만으로 부풀렸다.





․ 고르바쵸프가 국가 문서고를 열다.



․ 러시아의 연구가 보여주는 것



․ 형사 체계로서의 노동 수용소



4십5만4천 명은 9백만 명이 아니다.



․ 내외부의 위협



․ 미국에는 더 많은 죄수들이 있다.



․ 중요한 요인- 의약품의 부족



․ 쏘련에 대한 거짓말들



․ 꿀락과 반혁명



․ 1937년의 숙청



․ 산업 사보타지



․ 절도와 위법행위



․ 쿠데타를 위한 계획



․ 더 많은 거짓말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쏘련의 노동 수용소(굴락, gulag)에서 벌어졌던 의문의 죽음과 살인들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듣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와 수백만의 반대파가 사형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런 이야기들은 서적과 신문,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에서 재차 반복되어, 지난 50년 동안 사회주의에서 희생되었다는 사람의 수는 수백만으로 껑충 뛰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이야기들과 이 숫자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누가 있을까?





그리고 또 다른 의문들: 이 이야기들의 진상은 무엇일까? 그리고 전에는 극비였지만, 1989년 고르바쵸프에 의해 역사 연구에 개방된 쏘련의 국가 문서고에는 어떤 정보가 있을까? 꾸며진 이야기[myths]의 저자들은,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수백만의 사람이 죽었다는 자신들 이야기 모두가 국가 문서고가 개방되는 그 날 확인될 것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했다. 그럼 문서고가 개방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었나? 그들의 이야기들은 사실로 확인되었나?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굶주림과 노동 수용소에 갇혀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 뒤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쏘련 문서 보관소에서 행해진 조사 보고서들을 연구한 후,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구금되었던 사람의 실제 숫자와 그들이 감옥에 구금되었던 기간, 사망자와 사형이 선고된 사람의 실제 숫자에 대해 구체적인 데이터 형태의 정보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실은 꾸며낸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필자, 마리오 소사[Mario Sousa]는 스웨덴 공산당(KPML(r))1)의 당원이다. 이 글은 1998년 4월 공산당 신문 󰡔프롤레타리아트󰡕[Proletären]2)에 발표되었다.





히틀러에서 허스트, 콘퀘스트, 솔제니친을 관통하는 명백한 역사적 연결이 있다. 1933년, 독일에서는 다가올 10년 동안 세계사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게 될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1월 30일 히틀러는 수상이 되었고, 법을 무시하고 폭력을 수반하는 새 정부형태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나찌는 권력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3월 5일 새로운 선거 실시를 공포하고, 이 선거에서 확실하게 승리하기 위해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모든 선전 기관을 이용한다. 선거 일주일 전인 2월 27일, 나찌는 의회에 불을 지르고, 공산주의자들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웠다. 이어진 선거에서 나찌는 유권자의 약 48%인 1천7백3십만 표를 획득했고, 288명의 의원을 확보했다(지난 해 11월의 선거에서 나찌는 1천1백7십만 표를 획득해, 196명의 의석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공산당이 금지되자, 나찌는 사회민주주의당과 노동조합 운동을 압박했고, 최초의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s]3)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이러한 좌익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의회에서의 히틀러의 권력은 우익의 협조로 커져갔다. 3월 24일, 히틀러는 앞으로 4년 동안 의회와 협의 없이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독재 권력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그 때부터 유대인에 대한 공공연한 박해가 시작되어, 유대인들도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좌파들이 이미 구금되어 있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독재 권력을 위해, 인기를 얻고자하는 노력으로 독일의 무장과 군사화를 강제적으로 제한하고 있던 1918년의 국제 협정4)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독일의 재무장은 무서운 속도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쏘련에서 죽은 이들에 관한 꾸며낸 이야기가 짜 맞춰질 때의 국제 정치 무대의 상황이다.















독일이 자신의 영토로 차지하려고 했던 우끄라이나










독일 지도부에서 히틀러의 측근에 있었던 선전장관 괴벨스는 독일 국민들에게 나찌의 환상을 심어주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종적으로 순수한 국민들이 넓은 공간에서 거주한다는, 이런 광대한 국민 생활권[lebensraum]5)을 가진 나라인 대독일[Greater Germany]6)에서 생활한다는 몽상이었다. 이 국민 생활권의 한 부분은 아직 정복되지도 않았고 독일에 병합되지도 않은, 본래 독일보다 훨씬 광범위한 독일의 동쪽 지방을 향하고 있다. 1925년 이미 히틀러는 그의 저작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이 독일 생활권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으로 우끄라이나를 가리켜왔다. 우끄라이나와 동유럽의 다른 지방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은 독일에 속해 있어야 한다. 나찌의 선전에 따르면, 나찌의 칼은 독일 민족을 위한 생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독일의 기술력과 계획에 의해, 우끄라이나는 독일을 위한 곡물 생산 지역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먼저 ‘열등한 존재들’인 그곳 주민들을 우끄라이나로부터 떼어놓아야 한다. 나찌의 선전에 의하면, 그들은 노예 노동력으로, 독일인의 집, 공장, 들판 ― 독일 경제가 필요로 하는 어디에서건 일하게 될 것이다.





우끄라이나와 쏘련의 다른 지역들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쏘련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이 전쟁은 사전에 잘 준비되어야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괴벨스가 이끌던 나찌의 선전성(宣傳省)은, 스딸린이 농민들에게 강제로 사회주의 정책을 받아들이게 할 목적으로 파국적 기근이라는 무시무시한 시기를 고의적으로 유발시켰다라고 하는, 즉 우끄라이나에서 볼쉐비끼에 의해 계획적 대량학살[genocide]이 저질러졌다고 하는 날조된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나찌의 캠페인의 목적은 독일 군대에 의한 우끄라이나의 ‘해방’이라는 세계적 여론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막대한 노력과 독일 선전물의 일부가 영국 언론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끄라이나에서 있었다던 상상의 ‘계획적 대량학살’을 둘러싼 나찌의 캠페인은 세계적 차원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히틀러와 괴벨스가 쏘련에 대한 그들의 중상모략적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도움을 그들은 미국에서 찾았다.















윌리엄 허스트 ― 히틀러의 지지자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는 나찌가 쏘련에 대항하는 심리전에서 도움을 구했던 억만장자의 이름이다. 허스트는 흔히 ‘황색 언론’이라고 일컫는 선정적 언론의 ‘아버지’로 알려진 유명한 미국의 신문 소유주이다. 윌리엄 허스트는 백만장자 광산업자이자, 상원의원이며, 신문 소유주인 아버지, 조지 허스트가 자신의 신문 󰡔San Francisco Daily Examiner󰡕의 관리를 그에게 맡겼던 1885년, 신문 편집자로 그의 이력을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허스트의 신문 제국의 시작이며, 그의 제국은 북미 사람들의 삶과 사고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는 그가 상속받은 광산의 주식을 모두 팔고, 언론계에 자본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매수한 것은 󰡔New York Morning Journal󰡕로 전통적인 신문이었으나, 허스트가 그것을 선정주의 삼류 신문으로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그는 얼마를 주고라도 기사거리를 샀으며, 보도할 잔혹한 사건이나 범죄가 없을 때에는 사건을 ‘각색’해서 싣는 것이, 그 신문사의 기자와 사진사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상 ‘황색 언론’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거짓말과 ‘꾸며진’ 흉악성이 진실인 것처럼 믿게 하는 것이다.





허스트는 이런 거짓말들을 함으로써 백만장자가 되었고, 신문업계에서 유력인사가 되었다. 1935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에 하나였고, 그의 재산은 어림잡아 2억 불에 달했다. 󰡔New York Morning Journal󰡕을 매입한 이후, 그는 계속해 미국 도처에서 일간 및 주간 신문들을 사거나 설립했다. 1940년대 그는 25개의 일간신문, 24개의 주간신문, 12개의 라디오 방송국, 2개의 국제뉴스 통신사, 영화용 뉴스를 공급하는 사업체인 코스모폴리탄 영화사[Cosmopolitan film company],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었다. 1948년 그는 미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 중 하나인 볼티모어에 있는 BWAL를 인수했다. 허스트의 신문들은 매일 1천3백만 부가 팔렸고, 독자는 거의 4천만에 육박했다. 미국 성인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매일 허스트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게다가 세계 도처의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의 뉴스 통신사와 영화, 일련의 신문들을 통해 허스트의 언론으로부터 정보를 얻었는데, 그것들은 세계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양으로 번역되고, 출판되었다. 이상에서 인용된 숫자들만 보아도 허스트의 제국이 수십 년에 걸쳐 미국정치에, 그리고 세계정치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미국이 쏘련의 편에서 2차 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반대하거나, 1950년대에는 매카시즘적 반공 마녀사냥에 찬성했던 것을 포함하여 여러 이슈에서 그의 제국은 자신의 간행물을 통해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 허스트는 극렬한 보수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이고 반공주의자였다. 그의 정견은 극우파였다. 1934년 그는 독일을 여행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내빈이자 친구로 대우를 받으며 히틀러를 접견하게 된다. 이 여행 이후 허스트의 신문들은 한층 더 반동적으로 되었고, 사회주의와 쏘련, 특히 스딸린에 반대하는 기사들을 끊임없이 실어댔다. 또한 그는 자신의 신문들을 공공연한 나찌 선전물의 용도로 쓰기 위해 노력했고, 히틀러의 오른팔인 괴링이 쓴 기사들을 연재했다. 하지만 수많은 독자들의 항의 때문에, 그는 이 기사들을 연재하는 것을 중단했고, 그것이 게재된 신문들을 시중에서 회수해야 했다.





히틀러를 예방한 뒤, 허스트의 선정적인 신문들은 쏘련에서 일어난 끔직한 사건들에 대한 ‘폭로’로 채워졌다 ― 살육, 대량학살, 예속, 통치자들의 사치와 인민들의 굶주림, 이 모든 것들이 거의 매일 주요 뉴스 기사로 다루어졌다. 나찌독일의 정치경찰인 게슈타포가 그에게 이러한 꺼리들을 제공했다. 신문의 1면에는 종종 쏘련에 관한 만평과 조작된 사진들이 실리곤 했는데, 거기에서 스딸린은 손에 칼을 든 살인자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우리는 미국에서 4천만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 곳곳의 수백만의 사람들이, 매일 이 기사들을 읽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끄라이나 기근에 관한 꾸며낸 이야기










쏘련에 반대하는 허스트 언론의 첫 캠페인들 중 하나는 우끄라이나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었다고 우겨대는 것을 중심축으로 진행되었다. 이 캠페인은 1935년 2월 18일 󰡔Chicago American󰡕지 1면 머리기사에 ‘쏘련에서 6백만 명이 굶어죽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면서 시작되었다. 언론 귀족이자 나찌의 지지자인 윌리엄 허스트는, 나찌독일로부터 제공된 자료를 사용하여 대량학살에 대한 날조된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대량학살이 볼쉐비끼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자행되었다고 말하며, 그들이 몇 백만의 우끄라이나 사람들을 아사로 몰아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문제의 진실은 전혀 다르다. 1930년대 초 쏘련에서 일어났던 일은 사실은 주요한 계급투쟁이었다. 땅 없는 빈농들이 부유한 토지소유자인 꿀락[kulak]에 대항에 일어났고, 농업의 집산화를 위한 투쟁, 즉 꼴호즈[kolkhoz]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직․간접적으로 1억2천만 명의 농민들이 연관된 이 거대한 계급투쟁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농업 생산은 불안정해졌고, 몇몇 지역에서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식량 부족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약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로 인해 전염병에 희생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갔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전염병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만연해 있었다. 1918년부터 20년 사이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2천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국민을 죽였다고 이들 나라의 정부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종류의 전염병에 직면해서 이들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차 대전기 동안 페니실린이 개발됨으로 해서, 이러한 전염병들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페니실린은 194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는 널리 이용되지 못했다.





허스트의 보도 기사들은 수백만 명이 우끄라이나에서 기근으로 죽었다고, 이 기근은 아마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유발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생생하고 섬뜩하게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허스트의 언론은 그들의 거짓말을 진실로 보이게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했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여론을 쏘련에 대한 극렬한 반대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날조된 거대한 신화 중 첫 번째 이야기의 기원이다. 서방 언론이 조장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켰다는 기근에 항의하는 흐름 속에서, 누구도 쏘련의 부인을 듣는 데, 허스트 언론의 거짓말을 전면적으로 폭로하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세는 1934년부터 1987년까지 계속 되었다. 50년 이상 동안 전 세계에 걸쳐 몇 세대의 사람들이 이러한 중상모략을 꾸준히 접하며 커왔고, 그리하여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품어 오게 되었다.















1998년의 허스트의 매스미디어 제국










윌리엄 허스트는 1951년 캘리포니아 비버리힐스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죽었다. 그는 매스미디어 제국을 남겨놓고 죽었는데,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그의 반동적 선전을 전 세계에 퍼뜨리고 있다. Hearst Corporation7)은 100개 이상의 기업으로 이루어진, 1만 5천명을 고용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들 중 하나이다. 오늘날 허스트의 제국은 신문, 잡지, 출판, 라디오, 텔레비전, 케이블 텔레비전, 뉴스 통신사와 다양한 다중매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52년이 지나서야 진실이 드러났다.










우끄라이나에 관한 그릇된 사실을 유포하던 나찌의 캠페인은 2차 대전에서 나찌독일이 패망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CIA와 M15가 나찌의 거짓말을 이어받았으며, 이 거짓말들은 그들이 쏘련과 선전전을 수행할 때, 줄곧 확고한 위치를 보장받았다. 2차 대전 후 일어났던 매카시즘적 반공 마녀사냥 또한 우끄라이나에서 기아로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무성하게 자라게 했다. 1953년, 이 주제에 대한 한 권의 책이 미국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끄렘린의 사악한 행위들[Black Deeds of the Kremlin]’이다. 이 출판물은 미국에 사는 우끄라이나 망명자들의 재정적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들은 2차 대전 시기 나찌에 부역했던 자들이다. 그런 이들을 미국은 정치적 망명자로 인정해 자신들 나라에 받아주었으며, 그들에게 ‘민주주의자’라는 칭호까지 선물했다.





레이건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1980년대 그는 반공주의 성전을 시작했다. 그 때 우끄라이나에서 수백만이 죽었다는 선전이 다시 부활했다. 1984년 하바드 대학의 한 교수가 ‘러시아에서의 인간의 삶[Human Life in Russia]'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는데, 거기에는 1934년 허스트 언론에 의해 만들어졌던 거짓 자료들 모두가 그대로 반복되어 있었다. 여기서 1930년대 나찌의 거짓말과 조작된 자료들이 되살아났지만, 이번에 그것은 미국 대학이라는 모양새 좋은 외투를 두르고 나타났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86년 또 이 주제와 관련되어, ‘비탄스러운 수확[Harvest of Sorrow]’이라는 제목의 책이 등장했다. 이 책은 영국정보부 출신의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라는 작자가 지은 것인데, 그는 지금 캘리포니아에 있는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이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그는 우끄라이나 민족주의 단체[Ukraine National Organisation]로부터 8만 불을 받았다. 이 단체는 1986년 ‘절망적인 추수[Harvest of Despair]’라는 영화를 만들 때도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 영화는 특히 콘퀘스트 저작에서 가져온 내용들을 많이 사용해서 만들어졌다. 이 시기 미국에서 주장하는, 우끄라이나에서 기아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1천5백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미국 허스트 언론에 의거해, 이 책 저 책, 이 영화 저 영화들에서, 우끄라이나에서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죽었다고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완전히 날조된 것들이다. 캐나다의 저널리스트 더글러스 토틀[Douglas Tottle]8)은 1987년 토론토에서 ‘사기, 기근, 그리고 파시즘 ― 히틀러에서 하바드까지 우끄라이나 대학살은 꾸며낸 이야기이다[Fraud, famine and fascism – the Ukrainian genocide myth from Hitler to Harvard]’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그는 이러한 위조된 사실들을 엄밀하게 폭로하였다. 특히, 그는 이 시기에 대한 영상자료로 사용되었던 굶주리는 아이들이 담긴 끔찍한 사진들이 사실은 1922년의 출판물들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1922년이라는 시기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전쟁으로 죽어가던 시기였다. 1918년부터 21년까지의 내전 기간 동안, 여덟 나라의 군대가 쏘련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토틀은 1934년 기근에 관련된 보도의 진상을 파악하고, 허스트 언론에서 출판된 잡다한 거짓말들을 폭로한다. 기근이 발생한 지역으로부터 보도기사와 사진들을 꽤 오랜 기간 동안 보내왔던 토마스 워커[Thomas Walker]라는 기자는, 사실 우끄라이나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었으며, 모스끄바에서도 단지 5일간 머물렀었다. 이 사실은 미국 신문 󰡔The Nation󰡕지의 모스끄바 특파원인 루이스 피셔[Louis Fisher]에 의해 폭로되었다. 피셔는 허스트 언론의 진짜 모스끄바 특파원인 엠 패롯[M Parrott]이 허스트사로, 1933년 쏘련에서의 풍작과 우끄라이나의 전진에 관한 기사들을 보냈으나, 출판되지 않았다는 것 또한 폭로했다. 게다가 토틀은, 우끄라이나 기근을 주장하는 기사들을 썼던 토마스 워커가 사실은 로버트 그린[Robert Green]이며, 콜로라도 주립 교도소를 탈옥한 죄수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워커 아니 그린이든 간에 그 작자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체포되었는데,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우끄라이나에 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스딸린이 조장한 기근에 의해, 1930년대 우끄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아사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1987년에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허스트, 나찌, 기관원인 콘퀘스트,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지어낸 거짓말과 날조된 보도로 수백만의 사람들을 속여 왔다. 정말이지 오늘날에도 나찌 허스트가 지어낸 이야기들이 우익의 이익에 봉사하며, 여러 작가의 새로운 책들을 통해 여전히 되풀이 되고 있다.





허스트 언론은, 미국의 많은 주들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 곳곳에 뉴스 통신사를 가지고 있는, 게슈타포의 거대한 대변자였다.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허스트 언론은 수십 종의 신문과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나중에는 텔레비전 채널을 통해, 세계 도처에서 게슈타포의 거짓말을 진실로 믿게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게슈타포는 사라졌지만, 쏘련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이 더러운 선전전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비록 자신의 후원자가 CIA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미국 언론의 반공주의 캠페인은 한 치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들의 직무는 평소와 다름없이 계속된다, 먼저는 게슈타포의 뜻대로, 지금은 CIA의 뜻대로.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노사과연>















― 히틀러에서 허스트, 콘퀘스트, 그리고 솔제니친까지 스딸린 시기 동안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어 죽은 사람과 기아로 죽은 사람이  수백만으로 추정된다는 역사















마리오 소사(Mario Sousa, 스웨덴 공산당원)





번역: 김해인(교육위원장)











1) KPML(r)은 Kommunistiska Partiet Marxist-Leninisterna(revolutionärerna)의 약어이며, 영어로는 Communist Party Marxist-Leninists(the revolutionaries)이다. 스웨덴 공산당은 1970년 10월, 이 이름으로 창립되었으며, 2005년 14차 당대회에서 지금의 Kommunistiska Partiet(영어로 Communist Party)로 이름을 바꾸었다. 스웨덴 전역에 40개의 지부를 두고 있으며, 원외 정당으로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당이다. 이 당은 개량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단호히 배격하며, 맑스-레닌주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2600명의 사람들이 당기관지 ‘Proletären’를 구독하고 있으며, 총 3200부를 발행하고 있다.





이 글의 저자 마리오 소사는 24명으로 구성된 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이며, 웁살라(Uppsala) 지역의 책임을 맡고 있다.






2) 정식 명칭은 ‘Marxist-leninist Proletären’로 스웨덴 공산당에서 발행하는 맑스-레닌주의 주간 신문이다.






3) 강제수용소(Konzentrationslager). 1933년 2월 제정된 ‘국민과 국가의 방위령’에 의하여 나찌가 국내외에 설치한 감옥이다. 공산당원ㆍ사회주의자ㆍ민주주의자 등 모든 반파쇼주의자와 나찌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자들을 일반국민으로부터 고립시켜 말살하고, 나아가서는 전 국민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이 수용소로 끌려가 기한도 없이 구금되었다.






4) 1차 대전에서 독일제국이 항복하고 휴전 조약을 맺은 것은 1918년(11월 11일)이 맞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에서 말하는 독일이 무장을 강력하게 제한 받은 조약은 1차 대전의 강화조약인 ‘베르사유 조약’이며, 이 조약은 1919년 6월에 서명되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1918년은 1919년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다만, 이 부분은 스웨덴어 원문에서 그냥 국제 조약[internationella överenskommelser]으로 되어있고, 영어․불어․그리스어 등의 번역본에서만 보인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번역자들의 오류가 있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5) 나찌독일이 영토 확장의 주요 동기로 삼았던 ‘(국민)생활권’을 말한다. 영어로는





   habitat, living space로 번역한다.






6) 독일어로 Großdeutschland. 19세기까지 대독일(주의)은 독일 통일에 있어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프로이센의 소독일(주의)에 대립되는, 오스트리아의 사상이었다. 나찌에 의해 이 사상은 유럽의 모든 독일민족(게르만)을 통합한다는 사상으로 정립된다. 1943년 공식적으로 나찌는 자신들의 국호를 대독일제국(Großdeutsches Reich)으로 부른다.






7) 정식 명칭은 Hearst Communications, Inc.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거대 매스미디어 그룹이다. 현재 16개의 일간신문과 49개의 주간신문을 발행하고 있으며, 여기에  Media News Group를 통해 43개의 일간신문과 72개의 비일간 신문사들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또 200개가 넘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는데, 그 중





   󰡔Cosmopolitan󰡕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방송사로는 미국 시청자의 18%가 보는 Hearst-Argyle Television 등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방송으로는 한국의 대부분의 케이블 방송을 통해 볼 수 있는 스포츠 전문 채널 ESPN과 히스토리 채널을 들 수 있다. 그밖에 다양한 매스미디어를 소유하고 있다.






8) 더글러스 토틀. 캐나다의 사진사이자 저술가이며, 노동조합 활동가. 탄광광부와 철광노동자로 일했다. 1970년대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멕시코계 농업노동자 운동에 참여했으며, 캐나다 매니토바주에서 인디언 원주민 농업노동자들과도 함께 일했다. 1975년부터 85년까지 캐나다 철광노동조합(United Steelworkers)의 기관지 󰡔The Challenger󰡕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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