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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1930년대 쏘비에트공화국에서의 계급투쟁 ― 쏘련공산당 (CPSU)의 숙청과 정치재판 ―
글쓴이 Mario Sausa E-mail send mail 번호 96
날짜 2008-07-18 조회수 5801 추천수 175
파일  1216317677_대숙청.hwp

  













930년대 쏘비에트공화국에서의 계급투쟁 ― 쏘련공산당
















1930년대 모스크바의 정치재판과 쏘비에트 공산당으로부터의 제명, 혹은 숙청은 부르주아 선전자들에게는 두 가지 최대 이슈다. 그것들은 부르주아 대중매체에 의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거론되면서, 이 기간의 숙청, 정치재판, 그리고 쏘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완전한 거짓과 잘못된 상상을 대중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을 막고 자본주의를 필연적인 것으로써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쏘비에트 공화국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장에서는 쏘비에트 공화국의 역사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부르주아지의 거짓말들을 반박하고 볼셰비키들이 혁명 이행기에 맞닥뜨렸던 곤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 글의 한 부분은 이 지역에서 역사조사를 근거로 했다. 나머지 부분은 1930년대에서 40년대에 쓰여졌던 문헌과 문서들에 근거한 것으로,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오래 전에 망각되었거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1930년대의 사실들










우리는 독자에게 1930년대 쏘비에트를 보여줌으로써 이 글을 시작하지만, 사실상 그 시기는 쏘비에트 공화국 역사에서 결정적인 10년이었다. 1차, 2차 5계년 계획이 실행되고, 농업에서의 집산화가 일어난 것도 이 시기였다. 국민소득은 1929년 2900만 루블에서 1938년 1억 500만 루블로 증가하였다. 10년간 360% 증가는 산업화 역사상 유일한 것이었다! 고용된 노동자 수는 1930년 1450만 명에서 1938년 2800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산업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은 1930년 991루블에서 1938년 3447루블로 상승하였다. 전체 예산에서 사회 문화적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도 1930년 대략 20억 루블에서 1938년 350억 루블로 증가하였다. 1930년대 초 전체 산업 부문에서 하루 최대 노동시간은 7시간으로 바꾸었으나(광부들의 노동시간은 더 적거나 같은 정도였다), 1930년대 말엽에 이르면 나찌 독일의 전쟁 위협으로 재개정되어야만 했다.










1930년대에 쏘비에트 공화국의 생산량은 인류 역사상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을 정도의 속도로 성장했다. 1930년 초기 총 산업 생산액은 2100만 루블이었다. 8년 뒤 총 산업 생산액의 가치는 1억 루블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두 수치는 1926-27년의 시세에 따른 것이다). 한 국가의 산업생산액이 8년 사이에 거의 5배가 되었다! 1930년 초 이 지역에는 1억1800만 헥타르 (1헥타르=1만 평방미터)에 온갖 농작물의 씨를 뿌렸었다. 1938년에는 1억3690만 헥타르에 씨를 뿌렸다. 동시에, 농업부문에서 집단농장화를 수행함으로써 농업에서의 집산화, 현대화와 관련한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였다. 1930년 초 쏘비에트 공화국의 트랙터들의 수는 3만4900개였다. 1938년에는 48만3500개가 되어, 8년 사이에 거의 14배가 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복식수확기는 1700개에서 15만3500개로, 수확기는 4300개에서 13만800개로 증가하였다.










1930년대 쏘비에트 공화국의 인문학의 발전 또한 두드러졌다. 1929년 총 학생수는 대략 1400만 명이었던 것이 1938년에는 약 3400만으로 증가되었고, 일부 강의만을 듣는 인원까지 포함하면 4700만 명 이상이었다. 모든 도시민의 거의 3분의 1은 학교 교육을 받았다. 1930년대 초 인구의 33%가 문맹이었다 (1913년 67%). 그러나 1938년 문맹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 기간 동안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 수는 20만7000명에서 60만1000명으로 거의 3배가 증가하였다. 도서관의 수는 1933년 4만개였으나, 1938년 7만개가 되었다. 도서관 보유 도서량도 1933년 8600만권에 비해 ’38년에는 1억26만권으로 엄청난 보유량에 이르렀다. ’30년대에, 쏘비에트 공화국의 이념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에서의 강점과 쏘련이 모든 시민을 동등하게 대우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또 다른 증거는 일반적으로 필수 교육과정이 모든 민족의 각기 다른 언어로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새로운 책들과 교과서들, 전에는 글자형태로 조차 존재하기 어려웠던 언어들로 된 강의록들과 함께 엄청난 인문학적 작업을 대표한다. 처음으로 그들 자신의 언어로 된 문헌이 여러 국가들에서 출판되었다. 이것은 1930년대 쏘비에트 공화국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자료가 되었다. 이 글을 읽을 때 그것을 알아두기 바란다.1)















공산당의 발전










1930년대 수백만 명의 새로운 회원들이 쏘련공산당 (CPSU(b))에 가입했고, 생산과 사회 발전을 위한 투쟁에 참가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입당과 생산의 엄청난 증가는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당은 기존 회원과 새 회원들을 정당과 사회적 업무에 따라 평가해야 했고, 공산주의자로서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이들을 제명하거나 숙청해야 했다. 이 작업은 끝이 없었다. 관료정치, 부패, 기회주의, 권력의 남용에 대한 투쟁은 ’30년대 내내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성공할 수는 없었다. 사회주의 사회는 실수를 교정하기 위한 비평과 토론을 전제하고, 새로운 방식들을 찾는다. 그러나 숙청 또한 외부 정책의 이유로 중요한 방식이 되었다. 










1930년대 쏘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외부의 위협은 새로운 형태의 적들과 함께 증가하였다. (경제)봉쇄, 사보타지,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략의 위협과 함께 사회주의 쏘비에트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슬라브민족을 절멸시킬 목적을 가진 새로운 적들이 출현했다. 나찌즘은 다른 무엇보다도, 공산주의를 쳐부수고, 동쪽에 새로운 식민지들을 얻어 독일 경제의 노예 노동자로서 그들을 이용한다는 약속을 하고 1933년 1월 독일의 권력을 획득했다. 1925년 히틀러는 이미 그의 책 Mein Kampf에서 정복을 위한 이러한 계획에 대해 썼다: “그러므로 우리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대외정책에 있어 전쟁 전 독일과는 다르다. 우리는 유럽의 남서부로 향하던 진군을 멈추고 우리의 시선을 동쪽으로 돌릴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전쟁이전 시기 식민지와 무역 정책을 중단하고, 미래의 영토 정책으로 넘어갔다. 오늘날 유럽의 새 영토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주로 러시아와의 국경선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2)










1930년대 쏘비에트 공화국의 성장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찌 독일을 이기고, 쏘비에트 공화국에게 승리를 안겨준 힘이 되었다. 공산당 내의 불순분자들에 대한 투쟁과 숙청은 국가의 안전과 생산성의 성공을 위한 조건들이었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이것을 간과하고 있다.










숙청을 바라보는 부르주아지의 근거 없는 사회적 통념은 정권을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피의 박해였는데, 그것에 의하면 권력에 굶주린 관료주의가 광범한 행정과 폭력적인 기구를 이용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점차 증가하는 반대론자들과 심지어 “진짜”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사실상 대량 살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살 뒤에는 물론 억지 의심과 병적인 행동으로 무장한 스탈린이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에 따르면, 스탈린은 모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그의 모든 적들과 고참 볼세비키들을 제거하려고 오래 전부터 계획했었다. 이것이 부르주아 역사가들과 문필가들이 30년대에 10년간 진행된 숙청과 정치재판을 서술한 방식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나라들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수감, 학대, 처형해 온 부르주아 계급이, “진짜” 공산주의자들을 박해한다고 사회주의 쏘비에트 공화국을 비난하는 것을 볼 때, 단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부르주아 역사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상황은 더 좋지 못하다. 1945년 이래로, 그들은 쏘비에트 공화국의 조건들이 그들이 꾸며낸 통념과 정반대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물질적 증거들을 점유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스몰렌스크의 문서들










숙청, 생산성의 발전, 그리고 정치 재판들에 관한 사실들은 쏘비에트 공산당 역사의 필수요소들이며, 다른 여타의 기록들과 마찬가지로 당의 문서들로 발견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문서들은 1989년 고르바초프이전까지는 외국의 연구자들에게 차단되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다. 방대한 양의 문서들이 1945년에 이미 서유럽과 미국으로 넘어왔다. 역사는 단순하지만 꽤 놀랍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나찌 독일이 쏘비에트 공화국을 침략했을 때, 그들은 모스크바 근처 레닌그라드까지 진격했다. 1941년 이후 독일군들은 서쪽 주들을 정복하고 있었고, 그곳은 스몰렌스크 시의 중심이었다. 이 서부지역은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쏘비에트 공화국의 행정단위 중 하나였다. 이 당시 이 지역의 인구는 약 6500만 명이었고, 면적은 600*240km로, 14만4000 평방킬로미터였으며, 이는 대략 스웨덴(스웨덴은 45만 평방킬로미터, 영국은 24만3500평방킬로미터)의 3분의 1이다. 스몰렌스크에서 독일군들은 몇 가지 이유로 퇴각하는 쏘비에트 군에 의해 파괴되지 않은 서쪽 지역에 관한 문서들을 발견했다는데, 이 문서들은 1941년 독일로 넘어왔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45년 스몰렌스크 문서들은 독일의 미국 점령지로 넘겨졌다. 스몰렌스크 자료들은 쏘비에트 공화국과 동맹한 미국에 속하게 되었지만, 미국의 장교급 자본가들의 생각에 문서가 미국으로 옮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스몰렌스크 문서들은 오늘날 미국 국가 문서국 (the US National Archives)에 보관되어있다.










스몰렌스크 문서들은 매우 방대하다. 몇 가지를 제외하면 서부 지역 공산당의 주요 활동 모두가 거기에 있다. 내용은 회원 명부, 토론을 발췌한 모든 정치적 지령들, 회의의 논쟁거리들에서부터 이 지역 주기관, 수사국 조직에까지 이르고 있다. 농업 정책과 산업 전략들에서 노동자들의 매년 휴일 계획에 이르기까지 정치 활동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다. 서부 지역의 당의 숙청에 대한 문서들도 거기에 있다. 스몰렌스크 문서들은 분명 쏘비에트 사회 내부의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해줄 금광임에 틀림없다. 특히 쏘비에트 공화국과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관점을 증명할 사실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스몰렌스크 문서들은 아직까지 거의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역사가인 Merle Fainsod는 이 문서들을 연구한 첫 인물이었다. 1958년 그는 이 주제에 대해, Smolensk Under Soviet Rule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아주 편향적인 시각으로 책의 대부분에서 쏘비에트 권력 기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표현했을 뿐이다. 몇 가지를 제외하면, 스몰렌스크의 문서들은 사실상 그 이후로 손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이 문서의 존재는 서유럽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스몰렌스크 자료들에 남겨진 쏘비에트 서부 지역의 정치적 활동이 서유럽의 대중매체에서 보여졌던 괴물같은 거짓말과 근거없는 통념과도 같은 날조된 이야기와는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서는 수십만의 인민의 삶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의 모음으로 쏘비에트 공화국에 대항하는 전쟁 선전물로 이용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Merle Fainsod의 책 Smolensk Under Soviet Rule은 대학 강단과 대중매체를 통해 서유럽 전역에 퍼진 1930년대 이루어졌던 정치재판과 쏘비에트 공산당에서의 숙청에 대한 사회적 허구의 근간이 되었다.















독자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는 새로운 사실들










1985년에 스몰렌스크 문서들의 새로운 연구에 기초한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미국의 역사 교수 J. Arch Getty가 저작한 책 제목은 Origins of the Great Purges - The Soviet Communist Party Reconsidered, 1933 - 1938였다. 이 책은 쏘비에트 공화국의 역사에 대한 대단히 가치있는 자료와 통계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Getty는 1993년 미국에서 스탈린 시절 동안 쏘비에트의 범죄자 처우(현존작가가 쏘련의 역사에 대한 거짓말을 쓴 것, 즉 From Hitler to Hearst, from Conqest to Solzhenitsyn, 1998)에 관한 러시아 연구논문들을 출간시킨 주요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이 러시아 연구 논문들은 지난 몇 십년동안 자본주의 대중매체에서 퍼져왔던 거짓말들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 저자는 15년 후인 1999년 ‘The Road to terror - 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cheviks’ 라는 제목의 ’30년대 쏘비에트에 관한 새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은 일찍이 비밀이었던 쏘비에트 문서들을 자료들로 담고 있어, 처음으로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접근가능하다. 그러나 Getty가 지적했듯이, 문서들은 엄청난 분량에서 뽑아졌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 서류들이 과연 가장 중요한 것들인가? 또는 “모든 역사적 자료들이 그렇듯 그것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읽혀질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이 옳게 번역되었는가?에 대해서 질문할 여지는 있다3). 거기다가 누군가는 Getty가 남긴 글, 즉 “이 연구는 모든 질문을 다루고 있지는 못하다......우리가 외국의 정책, 농업 또는 산업, 또는 문화 전반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4). 이 들 질문들 속에 나타난 정책들이 과연 볼세비키 당의 모든 투쟁에 관한 것들인가? 그 문서들은 당에서의 많은 내부 토론들을 설명해 주지만, 1930년대 쏘비에트 공화국의 발전에 대해서는 거의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Getty의 연구는 쏘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몇몇 거짓말과 허구들을 깨뜨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독자적인 판단의 가능성을 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독자적인 결론들을 이끌어 내기 위해 중요하다. 이 문서가 쏘비에트 공화국에서 나왔을 때, 그것들의 전체를 이해하고 뒷받침해줄 수 있는 영향력있는 인물들이 유럽에는 없었다. Getty는 쏘비에트 공화국의 계급투쟁의 조건들을 이해하기에는 제한된 능력을 가진 부르주아 저술가에 불과했다. 예를 들면 1930년대 내부 투쟁으로 인하여 볼세비키 자신들이 스스로 몰살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In The Road to Terror에서는 1930년대 쏘비에트 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적 발전에 대한 한마디 언급도 없다. 단 한마디 언급도 없다! 게다가 나찌 독일의 위협에 대한 내용은 The Road to Terror의 635페이지의 노트에서  종속절로 단 한 줄, 총 6구절만이 언급될 뿐이었다. “그 시기에 엘리트, 당 관료들은 독일 파시즘의 성장과 집산화의 약화로 계속되는 위기를 느꼈다” 가 전부였다5). 이것이 전부였다!










쏘비에트 공화국에서 ’30년대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나찌 독일의 침략 위협에 맞서 전투를 준비하는데 모든 역량을 쏟는 것이었다는 점을 명심하자. 만약 이런 사실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면, 불가피하게 잘못된 결론에 이를 것이다. 만약 볼세비키들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대한 국가를 발전시키는 대신에 자신들을 파멸시켰다면, 나찌는 쏘비에트 공화국과 슬라브민족들을 말살하고 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쏘비에트 공화국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나찌를 무찔렀다. 많은 연구들이 현실을 왜곡한 잘못된 근거에 기초한 연구결과를 독자에게 강요하고 있으며, 온갖 음모와 우둔함에 가득차 있고 헌책방의 싸구려 탐정 소설 수준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쏘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유럽의 연구의 특징은 엄청난 양의 거짓말과 지난 50년간 유럽의 대학 강단에서 흘러나온 반쪽짜리 진실에 있다.















“대숙청의 기원” (“Origins of the Great Purges")










이 글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Getty의 두 책자인데, Origins of the Great Purges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통계들과 내용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그가 그 후에 쓴 The Road to Terror와 대조된다. 서문에서부터 당신은 놀랄 것이다. 우리는 교수들이 그렇게 솔직히 애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스웨덴의 학자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 Arch Getty 교수는 서문에서 스몰렌스크 문서들은 쏘비에트 공화국의 숙청에 대한 서유럽의 해석들이 “억측”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6).










첫째, 이 연구 결과는 30년대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이 스탈린과 그의 수족들에 의해 “일관되게 계획되고 준비되어 수행된 유일무이의 현상 (대숙청)”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연구는 “레닌(과 스탈린)시대의 고참 볼세비키들을 숙청의 목표로 삼았다”는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7). 게다가 Getty는 ’30년대 쏘비에트 공화국에 대해 들어왔던 것들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충분한 역사적 증거를 갖지 못한 학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는 분명 쓸모없는 것이다. 1958년 Fainsod가 그의 책 Smolensk under Soviet Rule을 출간할 때에는 직접적인 갈등은 없었다. Fainsod는 대숙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34년 11월의 Kirov의 대학살은 어느 때보다도 확장된 계속되는 숙청들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고, 1937년 주 당 지도부의 사실상의 대량 살상을 불러왔다.”8)










Getty의 저작은 단지 모든 시시한 역사 왜곡자들의 논거를 제거한 것이 아니다. Getty는 오랫동안 기본 “텍스트”로 여겨져 왔던 Fainsod의 Smolensk under Soviet Rule 그 자체에 질문을 던졌다. Smolensk under Soviet Rule에 대해 Getty는 “1933-9년의 사건들이 계획된 테러가 아니며 하나의 현상이나 과정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1933-6년의 지도부 숙청은 단순히 1937년 정치적 테러의 서곡은 아니었으며 그것과는 오직 간접적인 관련이 있을 뿐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9).





우리는 1930년대 숙청에 대한 Arch Getty의 사실들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우리는 Getty의 통계로부터 우리의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다. 우선 우리는 1920년대 쏘비에트 공산당의 상황에 대한 짤막한 배경지식을 독자에게 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1920년대 숙청들의 역사에 대한 요약










혁명의 승리 이후, 공산당이 다수당이 되자, 레닌과 당 지도부는 당과 정부 기관에 스며든 몇몇 불순분자들의 존재를 인정해야 했다. 그들은 출세를 위해 당원이 된 사람들이었다. 1919년 11월 제 8차 당 대회에서 레닌은 이 문제를 제기했다. 레닌에 따르면 “집권당에 모든 불순분자들이 집착하는 것은 한편으론 자연스러운 일이다10).” 그렇기 때문에 당원들의 활동을 평가하는 것이 중요했다. 레닌의 제안에 따라서 당은 모든 당원들의 재등록작업을 수행했다. 모든 당원들은 당원 집단 앞에서 그의 활동들에 대해 답해야 했고,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퇴출되었다. 그것은 당의 첫 정화 작업이었다. 기회주의 분자들을 숙청함으로써 당을 강하게 만드는, 이러한 방식은 다가올 다년간의 공산당을 특징지었다.










당원 숙청의 일반적 기준은 부패, 수동성, 당율 위반, 알콜중독자, 범죄, 그리고 반유대주의였다. 계급적 기원을 숨기는 부르주아 개인들과 쿨락들을 퇴출시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당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이들과 그들의 계급적 배경을 인정한 이들은 아니다.) 물론 그들의 과거를 숨긴 이전 제정 러시아의 관료들도 제명되었다. 그러나 제명된 당원들은 중앙 조정 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고, 그러면 그들은 더 높은 단계에서 재검토되었다.










상당히 많은 수가 당에서 추방되었다. 수백 명 당원들의 일반 총회에서의 결정은 규정에 따라 당 중앙보다도 엄격했다. 숙청을 시작하고 기준을 정했던, 당 중앙위원회는 우선 가장 평당원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당의 타락한 공무원들과 그들의 동조자들을 엄격하게 단속했다.










이것은 힘든 작업이었다. 부패한 관료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난에서 벗어날 수천가지 교묘한 술책들을 알고 있었다. 결국 제명당한 대다수는 수동성, 정치적 무지, 나쁜 술버릇으로 당 비서들에게 고발당하고도 자신을 변론하지 못한 평당원들이었다.















1920년대 숙청들










레닌과 당 지도부는 1919년 당원들의 재등록 이후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재등록 정책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계속해서 노동자들과 다른 계급들 중 신뢰받는 사람들을 선거하는 과정없이 계속 새로운 구성원들이 당에 유입되었다. 결국 새로운 숙청들이 1921년, 1928년, 1929년 일어났다.










아래 표는 이 시기에 제명된 당원들의 백분율이다. 다른 년도에는 제명당한 당원들의 숫자가 3-5% 차이가 날 수 있다.

























































1920년대 대숙청들1)



(Getty; Origins of the Great Purges)





                                           백분율(%)





1919





재등록





10-15





1921





숙청





25





1928





7개 지역 재검토





13





1929





숙청





11












1929년 숙청과 관해서, 그 원인들에 대한 상세한 서술이 있다. 그것은 사실 좋은 정보를 제공하고 적어도 숙청이 당 내의 반대 분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사회적 통념을 없애고 있다. 1929년 1억5300만 명의 당원들이 심사를 받았다. 이 중 17만 명, 즉 11%가 제명되었다. 중앙조정위원회에 재심사를 요청한 사람들 중 3만7000명은 다시 입당되었다. (이는 제명당한 당원 중 22%에 해당한다.) 스몰렌스크에서는 제명되었던 당원들 중 43%가 재입당 되었다. 그들을 좀 더 분석한 결과 제명된 대다수는 지방 당 공무원들이 수동성으로 제명시킨 노동자 계급 평당원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당원들이 당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더 어렵게 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29년의 숙청2) [12]



(Getty; Origins of the Great Purges)





제명된 이유





백분율(%)





개인 수행 능력 부족





22





외국인과 그와 관련된 이들





17





수동성





17





범죄자들





12





당규율 위반자들





10





기타





22












Getty에 의하면, 정치적인 이유로 제명된 이들은 ― “분파적 행동" 또는 반대행위 ― “당규율 위반자들” 속에 포함되고, 그나마 이들 중에서도 10%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된 당원은 1929년 전체 숙청 중에서 1% 미만이다11). 이것은 “스탈린주의자들이 그들의 모든 반대자들을 제거했다.”는 근거 없는 사회적 통념과는 다르다. 게다가 부르주아지들은 숙청된 이들이 쿨락 노동작업장에서 죽음을 당했거나 실종됐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 또한 사실과 다르다. 제명당한 당원 중 오직 범죄자들 ― 절도, 횡령, 공갈, 사보타지 등 ― 만이 법정에서 다뤄졌다. 다른 이들은 단지 당원으로써 주어지는 의무와 당원에게 주는 지원없이 평범하게 살았을 뿐이다.















1930년대 쏘련공산당 (CPSU(b))에서의 숙청










이제 1930년대의 쏘비에트 공화국으로 넘어가보자. 1930년대 숙청은 항상 사회주의를 훼손시키고 쏘련이 억압의 국가라는 근거 없는 사회적 통념을 다시금 강조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다뤄졌다는 점에서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가장 유명한 역사 위조자 중에는 전 영국비밀경찰 요원이었던 Robert Conquest, 파시스트 Alexander Solsjenitsyn과 쏘련 사회민주당원인 Roy Medvedev가 있다. 역사위조자들 중 스웨덴 사람들로는 실패한 시인 Per Ahlmark, 완전히 실패한 ‘역사가’ Staffan Skotte와 Trotskyite Peter England (최근 Royal Academy of Military Science회원으로 선출된)와 몇몇 비밀요원들 (Gerner, Salomon, Karlsson 등)들이 있다. 자본가들과 CIA, MI5 정치 경찰들은 미국과 영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학자들도 매수했다. 스웨덴에서도 자본가계급과 정치 경찰 Sapo에서부터  Stockholm, Uppsala, Lund 등의 대학교에 이르는 흔적들이 있다.





역사 위조자들을 색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무지를 이용해 사회주의를 수세에 놓이도록 하고 공산주의자들을 그들의 역사로부터 격리시킨다.










Robert Conquest는 전후로 쏘비에트 공화국과 사회주의를 왜곡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Conquest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비밀조직 중 하나인 영국에서 훈련된 정보요원이다. Conquest는 쏘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정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주요원이 되었다. 그는 정보를 조작함으로써 검은색을 흰색으로도 바꾸었다. ’50년대 말엽 Conquest는 돌연 영국비밀요원을 그만두었다. 그 후 우리는 그가, CIA가 그의 책을 출판한! 미국에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CIA가 영국보다 더 많은 돈을 줘서 미국으로 갔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CIA는 그에게 대학의 연구직이라는 제법 괜찮은 위장직도 제공했다. Conquest가 쓴 책들은 수십 년간 CIA에 의해 전 세계 자본주의 대중매체로 퍼져나갔고, 불행히도 많은 이들에게 그것들은 진실이 되었다.










Conguest의 가장 잘 알려진 저작 “The Great Terror - Stalin's Purges of the Thirties"는 1968년 출판되었고, 부르주아계급에게는 사회주의에 대한 강력한 무기들 중 하나로 쓰이고 있다. 그 책의 일부는 Conquest가 영국비밀요원이었을 당시의 자료들에 근거하고 있다. 그 자료들은 매우 의심스러운 곳에서 나왔다: 나찌 협력자들, 망명자들, 테러리스트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Conquest의 엄청난 거짓말들을 역사적 사실들로 격상시켜 간행물과 책에 기꺼이 인용했다. 예를 들면, 수석강사 Peter Englund는 1994년 2년 Moderna Tider에서 1937년 쏘비에트 공화국에 대하여 거짓들을 8페이지나 늘어놓았다. 같은 내용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의 책 “Letters from point zero” (Brev från nollpunkten)에서도 나타난다. Englund에 의하면, Conquest가 말한 거대한 재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12). 하지만 Conquest는 “진실은 소문의 형태로 퍼질 수 있다.” 또한 “보증할 수는 없지만, 소문의 출처는 고위 정치인이나 치안당국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책에서 출처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13). 파시스트와 나찌 협력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과 풍문들”이 Conquest가 ’30년대 쏘비에트 공화국에서의 ‘테러’라고 주장하는 바의 출처였으나 “역사가” Englund에게는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역사가들은 “소문과 풍문들”을 역사적 근거로써 받아들이지 않는다.















1933년의 숙청들










1930년대 당에서는 세 번의 대숙청이 있었다: 1933, 1935, 1937-38.





1933년 처음의 숙청은 농업 협동조합이 쏘비에트 공화국 전체에 퍼져 커다란 진전을 이루고, 산업 생산도 전에 없던 진전을 이룬 열광적인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당은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길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1930년대 첫 3년간 수십만의 새로운 당원들이 선출되었다. 대공습 때문에, 당 지도부는 새 당원들에 대한 평가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당 지도부들은 기회주의자, 부패한 관료주의자, 범죄자, 반유대주의자, 알콜중독자 혹은 당 기강을 무너뜨리는 회원들을 색출했다.










당은 숙청들이 개개인의 사생활을 깊이 파헤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은 채 동지적인 분위기 속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지도했다. 또한 당 지도부는 평당원들이 지방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힘을 실어주었고, 지방 당 지도부들이 수동적이고 정치적으로 무지한 평당원들을 추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고했다. 1929년의 실수들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었다. 회원들의 총체적인 발전에 초점은 맞춰졌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의 당 활동 참여가 증가하고, 정치적 지식이 향상될 때까지 지원자 혹은 동조자 자격으로써 당원 자격을 유지시켰다. 추방은 되도록 피했다.










그러한 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1933년 숙청은 중앙 위원회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다.  영토가 너무 방대한 쏘비에트 공화국에서 지방 당 비서들의 막대한 권력은 때로 치명적으로 나타났다. 지방 당 비서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자신들을 비판하는 이들은 물론 그들의 친지들까지도 처단했다. 단지 숙청에서의 실적을 위해서, 몇몇 지방 비서들은 많은 평당원들, 노동자들, 농부들을 내쫓았다; 이들 중에는 제명되어서는 안 될 충실한 당원들도 있었다. 추방된 사람들 대부분은 1930년에서 1933년 사이에 입당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당의 모든 이슈들을 알만한 시간이 없었다. 대부분이 당 프로그램과 맑스-레닌주의를 깊이 학습할 수 없었고, 당 비서들은 이들을 너무 무지하다고 평가했다. 그 외 그들의 작업 환경이나 가족 문제로 모든 당의 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사람들도 있었다. 1933년 숙청동안 당원과 지원자들 중 18.5%인 79만2000명이 제명되었다.














































































1933년 추방들3)



(Getty; Origins of the Great Purges)





추방 이유





백분율





도덕적 타락, 출세주의자, 관료주의자





17.5





체류자, 과거력을 숨긴 체류자





16.5





당규율 위반자





20.9





수동성





23.2





기타





17.9





자료에서 언급 안 된 부분





4.0












1934년 중반에 끝난, 1933년 숙청은 당 내의 심각한 갈등을 드러냈다. 중앙위원회는 부패한 관료들을 추방하기를 원했으나, 가장 많이 추방된 이들은 ― 전체의 4분의1 ― 수동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 지도부가 제명의 기준으로 채택한 사항이 아니었다. 중앙위원회의 지시를 무시하고 지방 당 지도부들은 관료주의적인 방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 반작용의 결과는 4분의 1의 수동적인 사람들의 추방으로 나타났다. 중앙위원회는 지방 당 지도부들의 당 지시 불복종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으나, 그 이후의 상황에서 보여주었듯이, 이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쏘비에트 공화국이 살아남기 위해 발전을 도모함에 따라 이후 수년간동안 시기적절한 것으로 되었다.










Getty에 의해 발견된 또 다른 통계들은 1933년 숙청이 스탈린에 반대하는 고참 볼세비키들을 겨냥한 것 ― 레닌과 같이 혁명을 이끌었던 고참 당 간부들 ― 이라는 Conquest 및 다른 우파들의 주장을 의심하게 한다. Getty에 의하면 그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제명된 대다수, 3분의 2가량이, 1928년 후에 입당하였다. 제명된 이들의 분포를 보면 농업 노동자/농부들이 23%, 공무원이 대략 14.6%였고, 62%가 노동자였는데, 레닌 정권에서부터 당 간부를 맡았던 이들보다는 평범한 노동자들이 압도적 다수인 85%였다. Robert Conquest의 The Great Terror에서 1933년의 숙청에 대해 정치적 이유로 십만 명이 넘는 당원들이 추방되었다는 암시를 한다. 만약 누군가가 숙청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았다면, 이러한 그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했을 것이다.















“Proverka" ― 1935년 당원증 검사










1933년의 숙청은 전국 각지 정당 단체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당원 명부는 사실과 달랐다. 당원의 숫자는 명부의 총계와 달랐다. 많은 당원들이 이동하였고, 당을 떠났으며, 당원 명부에 기록되지 않은 채 죽거나 제명되었다. 지방 당 비서들은 5개년 계획과 집산화에 따른 경제적 재원을 받아갔다. 이러한 이유로 또는 순수한 과실로 또는 당원 명부를 제대로 업데이트 하지 않은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당 재정회계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 중앙은 모든 당원들의 당원카드를 수정해야만 했다.










1934년 10월 중앙위원회는 모든 당원들을 새롭게 재등록시키기로 결정했다. 중앙위원회는 지방 곳곳에 대표자들을 보내 당 서류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가능한 등록 작업을 돕도록 했다.










Ostrovskij 동지는 스몰렌스크의 시위원회로 보내졌다. 그는 당 문서들을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책임자를 선정하는 등 몇 가지 간단한 작업부터 시작했다. 당원증을 잃어버린 당원들에게는 철저한 조사가 진행된 뒤에라야 새로운 당원증이 발급되었다. 그는 또한 1935년 1월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당원 명부를 제작하였고 시위원회의 지도아래 모든 위원회에서 이 과정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Ostrovskij동지가 다루기에는 이미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다른 지역의 중앙위원회 대표자들도 같은 경험을 했다. 1935년 4월 말로 갈수록 새로운 등록은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스몰렌스크 시위원의 보고서를 보면 “당 서류 조사 과정에서 특히 주의 깊게 다뤄져야 할 많은 자료들이 유실되었음이 밝혀졌다.”14) 라고 말하고 있다.















1930년대 초기의 공산당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이것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부르주아언론들은 서유럽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쏘련공산당 안에 총체적으로 눈 먼 규율이 통치를 했으며, 그 공산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이 주의 깊게 등록되고, 그것도 되도록이면 긴 인명부위에 몇 번씩 통제되고 함으로써, 그 누구도 이렇게 전체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통제, 그래서 그 사회를 지속시켰다고 알려져왔고, 또한 막대한 권력을 가진 당관료들을 배출하기위해 막대한 돈이 들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러한 통제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 거짓이다. 사실 이 모든 주장들을 거꾸로 뒤집어야 진실에 훨씬 더 가깝다. 생산을 위한 투쟁속에 몰두하느라 그리고 그 결과 계속적으로 세계적인 기록을 세우는 전에 없던 놀랄만한 생산량의 증대 속에, 많은 지방 당 비서들은 당의 다른 문제들에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생산량 증대가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거라는 생각에 다른 모든 것들은 하찮게 여겼다. 심지어 당의 근본문제에 대해서도 ― 특히 권력에 대한 ― 다시 말해, 당원들이 오직 자신의 당원증만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도 많은 곳에서 우선 관심사가 아니었다. 대개 당원증은 당 기구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서 발급되고, 또 전국에 걸쳐 수천 개씩 사라졌다. 모든 당원증 분실자는 재발급 받을 수 있었다. 카드 분실에 대한 조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제명된 당원들도 당원증을 가지고 있고, 아무도 이들에게 당원증을 반납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당원이 사망한 경우, 가족이 아닌 경우, 규정에 따라, 당원증은 당에 반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당원증이 범죄에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 당 지도부들은 엄청난 생산량의 증대가 다른 모든 어려움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















20만 당원증이 남용되다










1935년 초 중앙위원회는 20만 개 이상의 당원증이 남용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대부분은 분실 혹은 도난당한 것들이다. 1000개 이상의 사용되지 않은 당원증이 당 기관에서 도난당했고 당에 등록도 안 된 사람들에게 4만7000개의 당원증이 주어졌다. 당원증은 중요한 문서다. 당원증을 가진 사람은 중요한 문서들이 보관되고 중요한 모임이 열리는 나라 안의 모든 당 시설들에 출입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당원증은 적들, 스파이, 반대분자들과 외국 요원들에게는 매력적이었다. 우려한 바대로, 이들은 공산당 당원증을 쉽게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을 비밀스런 활동을 하는데 이용했다. 1935년 한 해 동안에는 당원증에 있는 충실한 당원이라는 사실은 믿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들은 적일 수도, 스파이 혹은 파괴공작자일 수도 있었다.










1935년 5월 13일 중앙위원회는 당 문서들에 대한 새로운 국가적 통제 ― “preverka" ― 를 시행했다. 당원증 관리를 Malenkov의 대리인인 Ezhov가 이끄는 중앙위원회의 문서과에 위임하여 중앙에서 통제하게 하였다. 통제란 각 당원에게 작업장과 지역 사회에서 그들의 삶, 역사, 일, 그 외 다른 모든 것, 즉 당원 명부를 업데이트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사실들에 대해 심문하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그 과정에서 어떠한 불일치가 발생하면, 그 사람들에 대한 밀착 감시가 수행되었고, 그동안 당원증은 중지됐다. 당원임이 확인되지 않으면 이들은 제명되고 당원증은 반납됐다. 제명된 이들은 모두 당 규칙에 따라, 고등 기관에 재심을 요청할 권리를 가지고, 새로운 조사와 결정이 2주내에 이뤄져야 했다.















볼세비키 명령










이제 “우리 당에서 볼세비키 명령을 소개”할 시간이다15). 중앙위원회는 특히 문제의 근원지인 지방 당 지도부들에게 강조하여 말했다. 즉 “중앙위원회는 지역 당 지도부들에게 경고한다. 만약 그들이 이 중요한 사업에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 중요한 일에서 질서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중앙위원회 VKP(b)는 당에서 추방하는 것을 포함한 강력한 벌칙을 줄 것이다.”16)










초기 숙청들과는 달리, 1935년 당원증 검사는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이유는 없었다. 1935년의 숙청은 당원증이 진짜인가 아닌가에 달렸다. 이것은 중요하다. 부르주아 언론에서는 1935년 조정이 당 지도부에 반대하는 분자들을 숙청하는 일환이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우리는 후반부에 이것에 대해 다시 다룰 것이다.















당원증 검사 결과는 어땠는가?










그러나, 정작 검사 책임을 맡은 지방 당 비서의 대다수는 그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 일을 중앙위원회가 요구했던 우선순위목록에 두지 않았다. 그저 빨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음을 보여주는 보고서들이 중앙위원회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방 당 비서들의 책임은 거의 제로에 가까왔다. 특히 서부지역의 문제들은 심각했다. 중앙위원회는 지역 두 번째 당 비서 A.L.Shil 대표와 조사 위원회 지방 대표인 Kiselev를 당원증 검사의 잘못된 사례로써 공개적으로 비판했었다. 서부 지부의 지도자, 당 비서 Stepanov는 당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그의 지부에서 당원증의 진위여부를 검사하는데 당원 당 최대 5분의 시간만을 썼다. 중앙위원회가 개별검사에서 매우 심오한 질문들을 요구했으나, 그는 단지 얼마나 많은 당원들을 검사하고 거짓 당원들을 적발하는 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중앙위원회는 일 처리에 있어 이러한 관료주의적 방식에 반대했다. 그들은 전면 조사를 통해 목록의 당원들이 진성당원임을 확신하기를 원했다.















새 당원증 검사










중앙위원회는 당원증 검사가 실패할 거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1935년 6월 27일 중앙위원회는 당원증 검사의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이제 일반 당원 대회가 이뤄져야 했다. 당원에서 제명당한 이들은 항변할 기회를 가지게 됐다. 이로써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중앙위원회는 그동안 “당원조사업무”를 잘못 수행한 당 비서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는 당원들에게 모임에서 비판과 자기비판을 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었고, 이로써 거대한 논쟁의 장소로 변해갔다. 무언가를 숨길거리가 있었던 당 비서들은 지방 당 지도부의 잘못을 폭로하는 지속적인 감시에 당황했다. 몇몇은 그 운동이 숙청보다는 당원증 검사에 있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논쟁의 충동을 억제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당원들의 비판을 멈출 수는 없었다. Getty는 Origins of the Great Purges에서 우리에게 1935년 7월 있었던 스몰렌스크 마을 위원회의 당 대회에서의 고발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대회에서는 616건의 고발이 이뤄졌다.

















































































1935년 7월 스몰렌스크에서 “Proverka" 동안의 고발들4)



(Getty: Origins of the Great Purges)





쿨락, 상인, 가문들





226





타락자, 알콜중독자, 오입쟁이, 강령위반자





143





공무상 부정부패, 절도, 횡령





106





당원증 분실 혹은 의심스런 당원증





62





트로츠키주의자, 멘셰비키 등등





28





백군장교들, 제정러시아 관군





41





반유대주의자들





10





합계





616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고발된 3분의 1이상이 쿨락과 신경제정책 (NEP) 동안 부유해진 사람들이다. 또 다른 3분의 1은 심각한 도덕적, 경제적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다. 고발된 사람들 중 소수(5%미만)만이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6건의 고발 중 1건이(약 17%), 의원과 공무원의 범죄 행위와 관련되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당원증 검사 결과 조사된 180만 명 중 17만 명, 약 9.1%가 당에서 추방되었다.










1935년 7월 당 대회는 거만한 당 공무원과 패거리들에 반대하는 토론장이 되었다. 자유분방한 비판과 자아비판의 장을 만드는 것이 당의 정책이었음에도, 이것이 사실 가장 낮은 지위의 당원에게 적용될지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적어도 이 기간에는, 상황은 급진적으로 평당원의 호응으로 바뀌었다. 스탈린은 비판과 자아비판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했고 치명적 실수, 즉, “타락한 기간요원들”이 자신의 잘못을 토론장에서 기꺼이 토론하지 않는 실수에 비판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1935년의 당원증 검사는 또 다른 당의 치명적 결점을 보여주었다: 당원증이 위조되기 쉬워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새 당원증은 당장 해결되어야 할 문제였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노사과연>















번역 : 편집부










[편집자주: 저자인 마리오 소사는 스웨덴공산당원이다. 1930년대 구쏘련에서진행된 이른바 “대숙청”에 대한 글이다.





본 연구소에서 저자의 허락을 얻어 앞으로 10여회에 걸쳐 번역ㆍ연재할 예정이다.





이른바 “대숙청”은 한국에서 “스탈린주의”가 악명을 얻는 주요한 이유이다. 이글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1)  J.V. Stalin, Works, vol. 12, Moscow 1955, p. 242;





    J.V. Stalin, Works, vol. 13, Moscow 1955, p. 288;





    J.V. Stalin, Problems of Leninism, Peking 1976, p. 874.






2) Adolf Hitler, Mein Kampf, London 1939, p 360.






3)  J. Arch Getty & Oleg V. Naumov, The Road to Terror –- 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sheviks, 1932-1939, New Haven 1999, p 25.






4) J. Arch Getty & Oleg V. Naumov, The Road to Terror –- 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sheviks, 1932-1939, New Haven 1999, p. 27.






5) J. Arch Getty & Oleg V. Naumov, The Road to Terror –- 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sheviks, 1932-1939, New Haven 1999, p 327.






6)  J. Arch Getty, Origins of the Great Purges –- The Soviet Communist





    Party Reconsidered, 1933-1938. New York 1985, p. 3.






7)  J. Arch Getty, Origins of the Great Purges –- The Soviet Communist





    Party Reconsidered, 1933-1938. New York 1985, p. 3.






8) Merle Fainsod, Smolensk under Soviet rule. London 1959, p. 222.






9) Getty 1985, p. 6.






10)Vladimir I. Lenin, Collected Works, Vol 30, Moscow 1965, p 186.






11) Getty 1985, p 46.






12)  Peter Englund, ”"Den otroliga bilden av Stalin 1937”", Moderna Tider 1994:40, p 26;





   Peter Englund, Brev från nollpunkten, Stockholm 1996, p 72.






13) Robert Conquest, The Great Terror –- Stalin’'s Purge of the Thirties, New York 1968, p 569.






14)  Getty 1985, p 54.






15)  Getty 1985, p 54.






16) Getty 1985, p 54.
















해인 이 글은 연재된 것보다 남은 연재분이 훨씬 많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일독을 권합니다. 2차 대전에 관한 논쟁 역시 출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계속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08-09-08 17:00:32
지나가다가 진실이 밝혀지긴....
원래 반대파를 없앨 때, 여러 놈 싸그리 잡아가는 법.
전두환이 김대중 죽이려고 했을 때, 삼청교육대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 잡아가둔 것이나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이 바로 그 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사실은, 스탈린은 대숙청기간 동안 10월 봉기에 개입했던 고참 볼셰비키를 모두 반혁명분자로 몰아 죽였다는 점이다.
위의 통계를 통해서 증명이 되는 것은 숙청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그리고 관료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통계를 통해서 당연히 정치적 의도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런 것은 원래 표면적인 통계를 통해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를 캐내서 밝혀지는 것이다.
즉 통계로부터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광범위하게 관료적으로 숙청이 벌어졌다는 사실 뿐이다. 그 정치적 의도는 숙청과정에서 정치적 중요성을 가지는 사건들을 분석함으로써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중요했나? 1929년 숙청 당시, 이미 당에서 제명된 트로츠키가 소련에서 추방되었으며, 1930년대 대숙청 당시에는 부하린,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이 처형되었다. 그리고 내전을 승리로 이끈 붉은 군대의 명장이 투하체프스키가 처형되었다. 트로츠키와 연계하고 나치독일의 스파이였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러했나? 소련공산당도 80년대에 모두 사실과 다르다고 인정했다. 서방 부르주아지의 악선전이 아니라 소련공산당이 인정한 것이다.
또한 이 글의 저자는 소련의 엄청난 생산력은 치켜세우면서도 전쟁 초기 그 막대한 생산력을 파괴시키는데 일조한 스탈린의 전술적 오류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우선 1930년대에 소련군 내부 숙청에 들어가면서 투하체프스키 등 실전 경험이 풍부한 명장들을 몰살시킴으로써 초반 승부에서 대독전을 이끌 장군이 없었다. 사실 당시 소련은 병력 수나 무장 면에서 독일군과 대등하거나 앞서 있었다. 그럼에도 초반에 압도적으로 밀렸다는 것은 첫째, 군부숙청이 오류였다는 것을 반증하며, 둘째, 최고사령관을 자처한 스딸린의 전술이 엉망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은 히틀러가 독일군을 광활한 소련 영토에서 분할하여 진격함으로써, 즉 장거리 원정군이 보급로를 길게 만든데다가 여러 개로 이를 분산시킴으로써 패배를 자초한데다가, 스딸린이 전쟁 후반에 작전권을 명장 주코프에게 이양함으로써 소련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즉 훗날 후르시초프가 고백했듯이 스탈린 덕분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지만 승리한 것이다.
2008-08-17 17:5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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