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세
현장
이론
기타
 
지난호보기
월간지/단행물
구독신청
세미나신청
토요노동대학신청
1
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현대에 계속 계승되는 10월 혁명 ㅡ사회주의의 깃발을 계속 내거는 쿠바혁명, 혁명 50주년ㅡ
글쓴이 山下勇男(노동운동연구가) E-mail send mail 번호 115
날짜 2009-03-25 조회수 3220 추천수 147
파일  1237935605_쿠바.hwp

  













쿠바는 2009년 1월 1일 혁명승리 50주년을 기념하는 날을 맞이하였다




















쿠바는 2009년 1월 1일 혁명승리 50주년을 기념하는 날을 맞이하였다.





우리들은 작년11월8일에 도요쿄에서 개최하였던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 91주년 기념집회”에서 주일쿠바대사관 안드레스 곤살레스 바제스텔 참사관이 참석하는 가운데 이날을 축하하였다. 나는 이 집회에서 아메리카제국주의의 끊임없는 반혁명적 간섭을 이겨내고 반세기에 걸쳐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지켜왔던 쿠바 인민의 위업을 찬양했고, 중남미에서 진행 중에 있는 변혁과정에 대한 쿠바 혁명의 기여, 공헌을 회고하면서 현대라는 시대에 대해서 투철한 역사의식을 획득해야 함의 중요성을 호소하였다.















쿠바사회에 밀어닥친 새로운 곤란들










쿠바는 2008년 8월부터 9월에 걸쳐 두 번의 대형 허리케인을 맞아 크나큰 피해를 당했다. 9월 15일 주일대사관이 기자회견에서 발표하였던 “예비적 피해조사보고”에 따르면, 피해총액 50억 달러, 주택파손 44만4000호(그 중 완파된 것은 6만 3249호)에 달했다. 피해가 특히 컷던 곳은 피나르 엘 리오(Pinar del Rio), 청년의 섬, 오르긴, 라스 투나스, 카마구에이의 각 주이고, 주택 파손 외에 수확기의 농작물ㆍ송전설비ㆍ통신설비 등의 기초 인프라, 학교ㆍ병원ㆍ복지시설 등 전반에 미치고 있었다. 진심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참가자 모두에게 지원캄파(kampaniya; 대중에게 호소하여 자금을 모음)의 갹출을 호소하고자 한다.





10월에 EU는 루이 미셀 유럽위원을 하바나에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허리케인 피해의 복구 등으로 최대 2500만 유로를 지원하였다. EU는 2003년 반혁명활동가의 체포를 이유로 부당하게도 쿠바와의 외교관계 단절을 포함한 “제제”조치를 발동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선택하여 “제재”조치를 해제하고 경제지원에 나섰던 EU의 진의는 무엇인가? 거기에 어떠한 의혹이 숨겨져 있을지라도 경제봉쇄를 완강하게 해제하려고 하지 않는 미 부시정권에 비하면, EU가 월등히 좋은 정치 감각을 구비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설상가상으로 마침 그때 세계금융공황의 여파가 확산되어 원래 어려운 살림사정이 더욱 어려움을 격고 있다고 전해진다. 원유ㆍ곡물가격의 급등, 수출의 일익을 담당하는 니켈(매장량 세계 4위)의 국제가격의 하락이 외화부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외화수입의 제일위를 차지하는 관광사업도 악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한 영향들로 일본으로부터의 수입대금의 결제도 늦어지고 무역보험의 적용이 정지되는 사태가 생기고 있다고 일부상업지가 보도하였다(8월19일󰡔日經󰡕). 그후 양국 간의 협의가 이루어지고 무역보험의 보장이 재개되었다고 할지라도 쿠바 경제가 안고 있는 고난 그 자체가 당연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로 하여금 쿠바 지원에 나서게 할 수 없는 우리들의 힘없음을 새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부터 괴롭고 고통스러운 화제가 되어버렸다. 쿠바는 과거 반세기에 걸쳐서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반혁명적 간섭을 이겨내었고, 사회주의의 깃발을 단호히 내걸고서 수호해왔다. 경제봉쇄의 누적피해액은 쿠바 외무성의 계산에 따르면, 약 9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쿠바는 필요한 식량이나 의료기구 등을 높은 수송비를 들여가면서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주식인 쌀을 먼 거리에 있는 베트남으로부터 수입해야 한다. 만약 경제봉쇄가 해제되면, 코앞에 있는 캘리포니아로부터 싼 수송비용으로 주식인 쌀을 수입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CIA에 의해서 조직된 망명 쿠바인에 의한 1960년의 군사적 침략ㅡ피그스만 사건(Bay of Pigs Invasion), 프라야히론 침공사건 (Invasión de Playa Girón, 3일 만에 격퇴)ㅡ으로 상징되는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반혁명적 간섭은 거듭되는 카스트로 암살음모의 발각, 화학무기의 공중살포, 간첩전 등등과 함께 이 반세기 동안 그칠 날이 없었다.





게다가 더욱 몰아붙여지듯이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걸쳐서 쏘련ㆍ동구의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로 인한 타격이 쿠바를 덮쳤다. 쿠바는 1972년 이래 경제상호원조조약(러시아어표기 SEV, 영어표기 COMECON, 1949년 창설)에 가맹하였고 사회주의공동체 나라들과 협력하여 경제ㆍ사회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런 버팀이 한꺼번에, 문자 그대로 붕괴되어 버렸고 쿠바는 전무역고의 85%을 잃었다. 연간 1300만 톤의 국제가격 이하로의 석유와 사탕의 바터(barter)무역이 정지했고, 사탕수수를 수확하기 위한 트랙터를 비롯한 각종 농기계를 생산하는 공장의 조업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쏘련 붕괴가 한창일 때 열렸던 쿠바공산당 제4회대회의 개회식에서 피델 카스트로 제1서기가 했던 다가올 곤난과 투쟁결의에 찬 연설을 회상한다. 그것은 제3차 대전의 발발이라든가 세계를 뒤흔들었던 1962년의“쿠바 위기”를 사이에 두는 아메리카 제국주와의 혁명의 성부를 거는 투쟁의 나날과 함께, 쿠바 혁명이 마주하게 되었던 최대 위기의 가을이었다.















쿠바혁명과의 연대의 여러 가지 경험










우리들은 기관지󰡔思想運動󰡕, 기관지󰡔社會評論󰡕을 통해 쿠바혁명의 의의, 그 사상과 실천을 일본 노동자ㆍ인민에게 널리 알리는 활동에 종사하여 왔다. 1994년 8월과 2001년 5월1), 두 번에 걸친 방문단의 파견에도 몰두하였다. 그것들은 과제의 크기에 비하면, 사소한 것에 불과하였지만, 우리들은 과거 40년 동안 쿠바의 동정에 끊임없이 계속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그러한 활동 속에서 나 자신이 조직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던 1994년 8월의 방문 때의 쿠바 방문의 일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방문단은 총20명. IFC, 국제노동운동연구협회, 인민의 힘, 활동가집단사상운동의 네 개 단체가 공동 주최하였다. 8월 10일 나리타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멕시코시티 경유 비행시간이 15시간 30분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현재는 나리타~멕시코시티 간에 정기편이 취항하고 있다. 올 때는 샌프란시스코 혹은 로스앤젤레스ㅡ멕시코시티 경유이든가, 국교가 있는 캐나다의 밴쿠버 경유 하바나행 직행편에 탑승하든가 하는 방법 이외는 없다. 쿠바는 지리적으로 보면 우리 일본인들에게는 아주 멀리 있는 존재이다. 도중에 멕시코시티에서 일박, 현지시각 8월 15일 밤에 하바나로 들어가고, 15일 하바나에서 출발하기까지의 5일 동안의 짧은 체류였다.





1994년은 어떤 시기였는가? “평화기의 특별한 시기”라고 불리었던 이 시기 동안에도 1993년부터 1994년에 걸치는 시기는 쿠바에게는 아주 엄중한 시련의 시기였다. 쿠바는 미국의 플로리다반도로부터 150마일(240K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아메리카로부터 발신되는 전파는 방해받지 않는다. 첩보전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때, 쏘련ㆍ동구의 사회주의체제가 와해됨에 따라서 생긴 곤란이 한창일 때에, 고국을 떠난 망명자들의 공작이 끊이지 않았다. 방문단이 출발하는 직전의 8월 5일, 경찰관 두 명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곰타이야에서 뗏목을 엮어 무모하게도 플로리다반도를 향하는 “영웅들”이 속출하였다. 경비정이 탈취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미정부는 이 시기에 불법출국자에게 시민권을 주는 불안전화 공작을 강화하고 있었다. 다만 단기의 외부관찰자의 눈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까닭도 있으나, 보도되고 있는 만큼 사회적 긴장이 감지되지는 않았다. 머물고 있던 호텔의 식사, 수리되지 않는 급탕설비, 달러지폐를 탐내는 아이들과의 가두에서의 만남 등에 의해서 위기의 진행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쿠바인들의 상냥함, 구김없는 명랑함은 위기의 와중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위기의 시기를 참고 견디어내고, 타개하기 위한 정책이 재평가되고 있었다. 쿠바의 농업은 국영농장이 중심이었지만, 그 국영농장을 협동농장(협동산업기본단위=UBPC)으로 전환하는 실험도 그 하나였다. 정부와의 계약을 초과한 농산물을 자유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농업노동자의 인센티브를 높이고 수확양의 확대를 도모하고 있었다. 외자의 도입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1990년대 이후이고 관광객용 호텔의 건설과 운영에서 스페인 자본이, 니켈광산의 개발에서는 캐나다 자본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쿠바다운 것은 외자의 도입에 있어 진출기업에 의한 노동자의 모집, 결국 노동력의 상품화=노동력의 매매를 허용하지 않고, 사회주의로부터의 이탈을 거부하는 입장을 관철시키고 있는 점이었다. 개인이 외화를 소지함을 허용하는 정책도 시작되고 있었다. 달러 샾을 세우고 개인이 소지하는 달러를 흡수하는 것으로 심각한 외화부족을 보충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은 아메리카에 친척이 있어 달러 송금을 받는 자들이나 관광업 등에 종사하고 있어 달러를 손에 넣을 기회가 있는 자들이나, 그렇지 않는 자들 사이에 경제 격차가 생긴다. 부득이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고섭(苦涉)의 선택이었다.





쿠바에 대해서 꼭 알려주고 싶은 일들 중의 하나는 민주주의의 실천이다. 쿠바에 대해서 던져지는 “일당독재”라는 악매 만큼 진실과 떨어져 있는 편견, 왜곡의 유래가 없다. 우리들이 방문하였을 때, 쿠바의 재정은 화차(火車)의 상태였다. 공장이 조업을 정지하고 있어도 노동자에게는 계속 임금이 지불되어야 한다. 실업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와 같이 당연히 징세 시스템이 있지 않으므로 사회적 서비스를 일부 줄인다든지 가격을 올린다든지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인민권력전국회의(일원제 의회)에게 무상의 교육과 의료를 일부 유료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인민권력전국회의는 이 법안 심의에 거의 2년의 세월을 보냈다. 저 위기적 상황의 한 복판에서이다. 대의원은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주민조직 등으로부터 선출되었으나, 그들은 정부의 제안을 각각의 출신 모체로 가지고 가서 대중토의에 붙인다. 우리 부르주아 의회에서와 같이 다수를 믿고서 강행 처리한다든지 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대중토의에서 집약된 의견은 다시 인민권력전국회의에 가지고 들어가서 다시 심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을 반복하고 나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린다. 한정된 재원의 배분을 어떻게 다시 짜서 처리하였는가는 알 수 없지만, 정부가 제안을 철회하고 교육과 의료의 무상제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였던 것은 쿠바가 계급지배를 폐지하였던 국가이기 때문이고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를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토양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자본제 사회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무엇인가 초라하고 내실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우리에게 몇 년에 한 번 거의 백지위임에 가까운 한 표를 던지는 “권리”가 주어져 있을 뿐이다. 2005년 9.11의 소위 우정선거(郵政選擧)에서 압승하였던 현 자민당ㆍ공민당 정권 아래의 대의제민주주의와 쿠바의 그것에서는 달과 자라, 운니의 차이(달과 자라의 차는 운니지차, 천양지차를 의미함)를 볼 수 있다. 총리의 머리를 세 번 갈아 끼운 끝에 다음의 선거를 더 유리하게 싸울 기회를 노리면서 의도적으로 해산 시기를 연기하고 정권의 자리를 계속 눌러앉으려는 꼴이다. 한 표를 던지는 것은 우리들에게 주권의 행사가 아니라 바로 주권의 포기를 의미한다.





쿠바에서의 민주주의의 실천은 이때, 결국 “평화기의 특별한 시기”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실행되고 있다. 2007년 7월, 몬카다 병영습격2) 55주년기념집회에서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제1부의장(당시)의 연설을 기회로 쿠바에서는 경제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중토의가 시작되었다. 2007년 9월 이후 2008년 3월까지 토의 참가자는 500만 명 이상, 25만 번 이상의 집회가 열렸고 130만 건 이상의 제안이 접수되어있는 실정이다.















인터내셔널리즘의 사상과 실천










쿠바의 강인함의 비밀은 여러 가지 열거될 수 있으나, 그 중 하나는 나라가 직면한 곤란을 솔직하게 국민 앞에 밝히고 극복의 길을 공동으로 찾으려고 하는 노력 속에서 찾아진다. 나는 지도자의 그런 정치 자세에 대한 존경과, 깊은 공감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말했는가는 기억나지 않으나 “가난함을 서로 나누어 가짐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는, 머리만 유난히 크고 아는 체 하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에 나는 마음 깊이로부터 분노를 느낀다.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가난함을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맨 안쪽에서 쿠바혁명은 왜 계속 견지될 수 있었는가? 쿠바의 강함의 둘째 비밀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인터내셔널리즘의 실천에 있다. 쿠바의 인터내셔널리즘이라고 하면, 그 하나,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서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민족해방투쟁으로 의용군을 파견하여 맨 앞장서서 지원하였던 일이 떠오른다. 겨우 20명의 부대로 이동 중에 볼리비아 산중에서 게릴라가 전사하였던 때는 1967년. 2008년은 게바라 탄생 80주년을 맞이하였다. 쿠바가 지원하였던 1980년대의 앙골라해방투쟁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쿠바에서의 인터내셔널리즘의 실천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식자(문맹자)교육이나 의료 지원을 위한 3만 명의 교육자ㆍ의사를 개발도상국으로 파견하였고, 유학생을 무상으로 받아들였던 일 등은 쏘련 ․ 동구사회주의 체제의 와해에 수반하는 가장 곤란한 시기에도 변함없이 계속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최근의 데이터를 살펴보겠다. 쿠바는 10년전에 식자교육프로그램󰡔나도 할 수 있다󰡕를 개발하였다. 대상언어 14개. 중남미를 중심으로 28개국, 300만 명 이상을 문맹으로부터 해방하는 원조를 하였다. 유네스코로부터 두 번의 표창을 받았고 작년 6월 하바나에서 열렸던 식자ㆍ기초교육 이베로 아메리카(Ibero-America) 회의에는 30개 나라로부터 1000명이 참가하였다.





아메리카주도의 확대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FTAA(미주자유무역지역) 구상에 대항하여 쿠바와 베네슈엘라가 2004년 12월에 공동선언을 발표하여 기초가 다져진 ALBA(아메리카 민중들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계획, 본지 146호)는 현재 볼리비아, 니카라구아, 도미니카, 온두라스를 더한 6개 나라들로 확대되었다. 2004년부터 이 공동선언에 따라 쿠바가 베네수엘라와 협력하는 “기적의 계획”이 시작되었다. 백내장 등으로 시력을 잃거나 잃을 위험에 있는 100만 명이 이미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고, 대상을 다른 중남미 나라들로 더욱 확대, 2016년까지 600만 명을 치료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피폭당했던 아이들을 받아들이고 치료하는 활동은 우리들이 방문했던 쏘련붕괴 후의 1994년 당시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후 규모가 축소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들었다. 이러한 사업들은,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자면, 쿠바인민이 자신들의 생활을 절약함으로써 실천하여 왔던 그런 활동이다.















전진하는 중남미혁명에 대한 쿠바의 기여










쿠바는 고립되어 있지 않다. 이는 1990년대 말 이후의 중남미 정세의 격변에 촉발되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유엔총회에서 17년 연속, 게다가 근년에는 압도적 지지를 받아 아메리카의 경제봉쇄의 해제를 촉구하는 결의가 채택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물론 그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 이전에 쿠바혁명은 중남미 국민들 사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중남미 정세는 최근 10년 동안에 극적인 변모를 이루었다. 1998년의 베네슈엘라 대통령선거에서 우고 챠베스가 당선된 이래로 중남미의 정치 지도는 크게 교체되었다(본지 전호 27쪽 “중남미의 혁명 지도”참조3) ). 이런 변모를 촉발하여 발전시켰던 기초에 50년의 긴 세월에 걸쳐 아메리카제국주의의 봉쇄공격에 맞서 이겨내고 사회주의의 깃발을 계속 들고 전진하는 쿠바 인민의 투쟁이 있었다.





나는 현재 중남미 정세의 특징을, 사회주의 쿠바가 선봉에 서서 이끌고 있고,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투쟁에 나서고 있는 베네슈엘라와 볼리비아가 그것을 따르고 있으며, 아메리카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의 자립을 지향하는 중도좌파정권의 나라들을 후위로 하는, 3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찾는다. 내걸어지고 있는 정치목표, 사회변혁의 속도가 다른 나라들이, 제국주의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중층적인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통합과정의 최전선에 ALBA가 서 있다. ALBA는 제국주의의 정보독점에 대항하는 텔레슬(남미의 텔레비전, 가맹국 7개국, 2005년 5월 개국), ALBA은행(가맹국 5개국, 2008년 3월)의 설립으로 그 사업 범위를 확대해 왔다. 석유수출국인 베네슈엘라는 중미ㆍ카리브 나라들에게 낮은 가격으로 석유를 공급하는 페트로카리브(Petrocaribe, 2005년 5월 협정, 가맹국 18개국)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 4개 나라로 1991년에 발족하였던 남미남부공동시장(MERCOSUR)에 베네주엘라가 가맹(2006년 7월)하는 등, 중층적인 통합과정이 추진되어, 남미 12개국으로 구성되는 남미나라들의 연합(UNASUR, 2008년 5월)으로 결실 맺게 되었다. 남미 7개국이 가맹하고 IMF(달러)지배로부터의 이탈을 지향하는 남미은행(BANCOSUR, 2007년 12월)의 설립은 장래의 공동통화의 도입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러한 통합과정의 추진을 중남미 사회주의혁명의 전진과 직선적으로 결합시키는 일은 경솔한 생각일 것이다.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걸었던 베네슈엘라, 볼리비아에서 자본주의로부터의 탈각, 전환은 금후에도 전진과 정체, 때로는 후퇴를 반복하는 복잡한 투쟁을 거쳐야 한다. 상대적 다수를 형성하는 중도좌파정권의 진로는 국민들의 금후 투쟁의 귀추에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1980-90년대의 채무노예제 시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에서는 이제는 잘 살아갈 수 없다는 대중의식이 형성되어 왔음이 중요하다.





사회주의 쿠바의 존재, 그 고투의 역사를 제외하고 현재의 중남미를 이야기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승리한 혁명의, 아니 승리해가고 있는 혁명의, 후에 계속되는 투쟁으로의 무의식적인 연대정신은 쿠바혁명을 관철해가고 있는 근본정신이다. 사회주의는 일국적으로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자국의 혁명은 세계혁명의 불가결한 한 고리이고, 전 인류의 해방 없이는 자국의 혁명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쿠바 혁명 50년의 흐름은 인터내셔날리즘의 사상과 실천의 살아있는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지금도 여전히 세계의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을 계속 고무시키고 있다.















1970-80년대의 중남미에 대한 회고










현재 중남미 정세의 전사를 구성하는 투쟁들, 즉 쿠바 혁명의 승리 이래의, 넓게 말하면 더욱이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의 민족해방투쟁 이래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은 나의 능력밖에 있다. 여기에서는 1990년대에 시작한 중남미 정세의 새로운 전개의 직접적 계기가 되고 그 변화를 객관적으로 준비해왔던, 1970년대 이후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진행하겠다.





중남미 나라들의 1980년대는 “잃어버린 시대”, 1990년대는 “절망의 시대”라고 불리어진다. 1970년대 전반기에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제한 전략을 발동함으로써 석유가격이 급등한 결과, 중동 산유국들에 쌓여있던 오일머니는 아메리카의 금융자본 아래로 집적되었고, 그 집적된 돈은 아메리카제국주의의 괴뢰ㆍ군사독재정권하의 중남미 나라들에게 “수입대체형산업의 육성”이라는 선전으로 사상 드물게 보이는 고금리로 대부되었다4). 대부되었던 자금의 일부는 과두세력의 호주머니를 채워주었고, 다른 일부는 아메리카로부터의 공업제품(생산수단)의 구입에 할당되었다. 도중의 경과를 생략하지만, 이 계획은 아주 훌륭하게 실패했다. 1980년대 초에 레이건정권이 성립하고 강한 아메리카=강한 달러=고금리정책이 채용되자, 그것이 중남미 나라들의 채무반제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고, 많은 나라들이 파산상태에 빠졌다. 수백 %, 천 수백%에 달하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국민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중채무국이 채무불이행(디폴트, default)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반제의 연기조정(리스케줄, reschedule), IMF에 의한 긴급융자가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것은 중남미 나라들을 구제하는 것 같은 치장을 하면서도, 실은 아메리카 금융자본이 나누어야 할 “손실”을 일시 대신 떠맡으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IMFㆍ세계은행ㆍ미재무성의 3자 합작에 의한 “워싱톤 컨센서스”5)가 책정되었고, 공적 부문들의 해체ㆍ사유화(미 다국적기업에 의한 초저가로의 매수), 재정적자의 축소라는 명목에서의 사회보장지출 등의 철저한 감축이 IMF의 융자조건(컨디션널리티; conditionality)으로 강요되었다. 자국의 통화주권을 포기하는 소위 달러화 정책을 단행했던(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에콰도르6), 국유자산의 매각을 추진한 결과, 결국에는 팔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않았다고 전해지는 아르헨티나와 같은 참상을 넓혔다. 후에 신자유주의 정책이라고 불려지게 된 제국주의의 착취ㆍ수탈 강화 공격은 1973년에 칠레 아헨데 정권을 정복시켰던 CIA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피노체트의 반혁명쿠데타가 있은 후, 시카코 학파의 프리드만이 그린 시나리오로 최초로 칠레를 덮쳤고 급기야 중남미 전역을 덮쳤다.





나는 1970년대 말부터 쿠바의 카스트로의장이 거듭 반복해서 중남미 나라들에게 채무불이행(디폴트)을 호소해왔음을 기억하고 있다(예를 들면 “우리에게 자유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ㅡ채무를 끊든지 민주주의의 죽음을 선택하든지 길은 하나” 본지 58-59호). 공적 자금과 민간 자금(이라는 이름의 금융독점으로부터의 대부)의 합계 이자지불이 9-11%도 넘는 고금리로 인해 눈덩어리 처럼 불어 반제액은 원금의 몇 배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이상과는 다른 문맥에서 회고해 보면, 1975년의 베트남 전국토해방으로 시작되는 반제ㆍ민족해방투쟁의 고양기와 겹친다. 베트남인민의 완전한 승리에 고무되었던 민족해방투쟁들은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독립(1979년),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1978년), 이란의 호메이니 2월 혁명(1979년), 짐바브웨의 독립(1980년), 중남미로 눈을 돌리면,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의 승리(1979년), 그레나다의 모리스 비쇼프가 이끈 인민정부의 수립(1979년) 등에서 보이듯이 세계적으로 파급, 확대되었다. 중동의 많은 산유국들은 반동적 왕제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1970년대 전반기의 OPEC의 석유제한전략의 발동을 세계의 정세에서 보면, 그것은 발전도상국이 자국의 자원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려고 하는 투쟁의 한 고리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반영하여 1970-80년대는 사회주의 세계체제와 결합한 비동맹국운동이 아주 큰 힘을 발휘하였던 시기였다.














20세기 현대사 속의 쿠바혁명










중남미에는 19세기를 관철하는 독자적인 민족해방투쟁의 전통이 있다. 그것은 쿠바의 호세 마르티(Jose Marti)나 베네슈엘라와 볼리비아의 시몬 볼리바르( Simon Bolivar, 1783-1830), 니카라과의 산디노 등의 지도자와 그 사상으로서 중남미 독자의 혁명적 전통을 형성하여 왔다.





그러나 현재의 중남미의 투쟁을 20세기 초두 자본주의의 최고이자 최후의 발전단계인 제국주의 단계로의 도달, 그 아래에서의 1918년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를 기원으로 하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시대”, 즉 현대사의 기본적 발전방향ㅡ세계사적 또 국제적 연관ㅡ으로부터 따로 떼어놓는다든지, 혹은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지배와의 관련에서만 논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1917년에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개시하였던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 사업은 우여곡절, 흥망성쇠를 반복하면서 세기를 넘어서 현재에도 계속 되고 있다. 중남미의 투쟁도 역시 이러한 역사의 큰 너울 속에 있다.





쿠바가 이런 투쟁의 최전선에 계속 서 왔으며 현재도 계속 서고 있다. 쿠바 혁명을 지탱하는 힘ㅡ그것은 사견이기는 하지만 첫째로 어떤 곤란 속에서도 사상과 이념의 전선에서 기죽는 일없이 계속 투쟁해오고 있다는 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데올로기투쟁의 관제고지를 버리지 않고 계속 투쟁하여 오고 있다는 점에 있다7). 그리고 둘째로는 사회주의 공동체나라들, 세계의 노동자계급, 발전도상국의 인민들을 어디까지나 끌어당기는 쿠바 혁명에 대한 열렬한 집념, 물심양면에 걸치는 원조, 연대의 활동이 있었다. 쿠바의 사회주의 건설을 반쏘ㆍ반스탈린주의와 연결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헛수고로 끝날 운명에 있다. 쏘련ㆍ동구의 사회주의 체제의 결여를 지적하고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점과, 반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다르다. 쿠바 혁명의 지도자들은 10월 사회주의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던 러시아 노동자계급에 대한 경의와 쏘련의 원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거듭 표명해왔다.





우리는 중남미에서 진행 중인 변혁과정의 장래에 대해서 일부러 낙관적이다고 할 의도는 없다. 1990년대 이후의 세계정세는 베트남인민이 승리하였던 1970년대와는 다르고 3대 혁명조류들ㅡ사회주의 세계체제, 자본주의 나라들의 노동운동, 발전도상국들의 민족해방투쟁ㅡ중 첫째와 둘째의 전제를 결여하고 있다. 세계의 노동자계급과 국제공산주의운동, 특히 제국주의 나라들의 그것은 신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계체제 해체의 타격을 받아서 기본적으로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제국주의 나라들의 많은 공산당ㆍ노동자당은 수정주의의 당으로 변질하고 급격히 힘을 잃어버렸다.





때마침 1920-30년대의 재래(再來)를 생각하게 하는 세계공황이 발발하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중엽까지 제1차 대전 후의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의 한계가 노정되었고 그 위기로부터 강행탈출을 도모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개하였던 나머지, 더욱 확대된 규모에서의 위기가 도래하였다. 자본주의의 체제적 위기는 이제는 누가 보아도 분명하게 노정되어 있고, 동시에 수정자본주의적 연명책으로의 회귀가 위기의 처방책일 수 없다는 한계도 또한 분명하게 노정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그 깊이 뿌리박힌 부패성과 기생성은 자신이 역사의 무대로부터 즉각 퇴장해야 할 존재임을 증명하고 있다.





2008년 11월 14일부터 2일 동안 워싱턴에서 소집되었던 금융정상회담(summit)은 종래의 G7에 개발도상 국가들을 포함한 13개국(EU를 1개국으로 계산)을 더한 G20으로 “국제협조”를 연출하였다. 개발도상국들을 끼워넣고 책임을 분담(전가)하여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는 제국주의의 의도가 틈 사이로 엿보인다. 금융적 또 재정적으로 선택 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하고 “구제”하려고 하고 있는 것은, 파탄의 좁은 입구로 몰려있는 개별 금융자본 등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이다.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에게 위기를 전가하고 수탈을 철저히 하는 이상, 자본주의가 체제로서 살아남아 연명할 여지는 더 이상 없다.





중남미의 장래도 또한 오늘의 대공황을 계기로 위기의 전가를 하락하지 않는 세계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의 투쟁이 발전하는 여하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2008년 11월 8일, HOWS[혼고우(本鄕)문화포럼워크스스쿨]의 주최로 개최되었던 “러시아 10월사회주의 혁명 91주년ㆍ쿠바 혁명 50주년기념회집회”에서 주최자를 대표로 해서 발표했던 필자의 보고에, 당일은 시간 부족으로 충분하지 못했던 곳을 중심으로 하여 대폭 가필한 것이다. 본문 중의 시제의 표기는 본 호의 발표 일에 맞추어 변경하였다.) <노사과연>















번역: 김성칠(편집위원)






1) 小川町시네클럽 취재반의 활동. 통역을 포함한 5명으로 구성. 그 성과는 현지취재 다큐멘타리 󰡔VIVA! 쿠바 ―칼리브에 부는 새로운 바람󰡕(연출ㆍ편집=新田進)에 종합되어 있다.






2) 1953년 7월 26일, 피델 카스트로 등이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타도를 위하여 무장봉기. 산타아고 데 쿠바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였으나 실패, 체포, 투옥되었다. 쿠바혁명의 출발점으로 되었던 투쟁으로서 매년 이 날을 기념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쿠바혁명을 선도하였던 카스트로 그룹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7월26일 운동”이라고 불렸다.






3) 이 지도의 농담을 구분하여 칠함은 논의의 여지가 있음. 어떤 기준으로 “사회주의”라 규정하는가에 따라 논의가 갈라진다. 권력의 성격, 지배적 생산양식 등을 기준으로 해서 현 상황을 기계적으로 재단한다면, 베네슈엘라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중남미에서 진행되는 변혁과정은 권력 탈취로부터 시작하는 고전적 혁명형태와는 양상을 달리하고 있으며 권력의 획득과 생산관계의 변혁이, 장시간에 걸치는 동시 진행으로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사회주의 쿠바와 사회주의를 지향하여 투쟁을 진행시키는 베네슈엘라와 볼리비아를 구별하고 이것에 연대하는 중도좌파정권 아래에 있는 나라들과의 3층 구조라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4) 소위 오일 달러의 환류 메카니즘을 논하였던 것에는 宮崎義一󰡔世界經濟を どう見るか󰡕(岩波新書, 1986)이 있다. 이는 케인즈주의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나 이 시대를 알기 위한 귀중한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






5) 1989년 책정. 재정규율, 공적 지출의 감축, 세제개혁, 금융자유화, 경쟁력 있는 외환시장, 무역 자유화, 해외직접투자 유입의 촉진, 국영기업의 민영화, 규제완화, 재산권의 법적 보장으로 구성되어 있다(吉川久治 “失われた10年”と中南米”󰡔經濟󰡕, 2005년 6월호)






6) 2006년 11월, 에콰도르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코레아정권이 성립하였으나, 2008년 현재 통화주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7) 나는 이것과 관련해서 두 종류의 인용을 들겠다.





A: “우리의 무기는 사상입니다”





엘리안 곤살레스의 귀국을 촉구하는 행진이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에 주하바나 미국이익대표부의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던 자식들을 향하여, 1999년 12월 23일 “호세 안토니오 에체베리아”쇼샬 그룹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쿠바공화국 피델 카스트로 루스박사가 했던 연설. 박사 자신이 검토한 후 상세사항을 가필하였다. 이하는 그것의 발췌.





“우리는 고성능 무기를 사용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고성능무기는 사상입니다. 우리들의 고성능 무기는 토론입니다. 우리들의 고성능 무기는 원칙과 혁명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고성능 무기의 비축은 다함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 행진한다든지 집회에서 “엘리안을 돌려달라!”, “엘리안은 돌아와야 한다!”, “엘리안을 구하자!”, “엘리안에게 자유를!”라고 절규할 때, 고성능무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방어법은 없습니다. 이 고성능 무기는 사기(士氣)이고 이성이며 실예(實例)이고 인상적일 만큼의 결의를 다져 정의를 수호하려고 하는 단결한 국민의 이미지입니다. 굴복하지 않는 국민, 따라서 결코 꺽이지 않는 국민, 노인도 성인도, 피오네르(Pioner)도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이 무기를 가지면 우리 국민은 무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이 사상을 세계의 구석구석에까지 두루 미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富山榮子 譯󰡔經濟封鎖下を生きるカリブの社會主義Ⅳ󰡕2000년판 IFCC出版會)





B: “이념의 종자를 뿌린다.” 호세 마르티탄생 150주년 “세계균형을 위한 국제회의”(2003년 1월 29일 하바나)에서의 피델 카스트로의 연설. 이하는 그것의 발췌.





“나는 위대한 투쟁이라는 것은 무기의 전쟁터가 아니라, 이념의 전쟁터에서 투쟁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 있는 다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난 경우도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떠한 힘, 무기, 전략ㆍ전술에도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무진장한 지성과 자각으로부터 생겨나는 안티테제가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를 협박하고 부정, 불합리, 지속불가능한 사회적 경제적 세계질서에 종속시키도록 하는 세련된 괴멸적 무기에 대치하여 우리는 이념의 종자를 뿌린다. 그리고 자각을 훨씬 높인다! ”( 󰡔思想運動󰡕 2004년 1월1ㆍ15일호)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113 현대에 계속 계승되는 10월 혁명 ㅡ사회주의의 깃발을...[1] 山下勇男(노동운동연구가) 2009-03-25 3220 147


우 156-060)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435번지 진안상가 나동 2층 (신주소: 노량진로 22길 33) 
(전화) 02-790-1917 / (팩스) 02-790-1918 / (이메일) wissk@lodong.org
Copyright 2005~2022 노동사회과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