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세
현장
이론
기타
 
지난호보기
월간지/단행물
구독신청
세미나신청
토요노동대학신청
1
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2)
글쓴이 사사키타츠오(佐佐木辰夫) E-mail send mail 번호 114
날짜 2009-03-25 조회수 3432 추천수 153
파일  1237935544_아프간.hwp

  






























아마누라개혁과 그 평가










헌법운동과 아마누라 개혁은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상에서 어떻게 위치지어야 할까. 이 운동이 가장 고양되었던 1920년 7월 모스크바에서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2차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유럽에서의 혁명의 전진과 아시아에서의 민족해방운동과의 연대, 혹은 총체적으로 세계혁명을 관장하려는 것이었다. “민족ㆍ식민지문제 소위원회”의 토의 내용을 근거로 아마누라 개혁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레닌은 그 자리에서 유명한 ‘민족ㆍ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보고했다. ‘영국에 억압당하는 인도와 그 외 제민족의 지위의 견지’에 출석한 마나벤드 나타 로이1)는 레닌의 보고내용 중 다음의 문언을 삭제하도록 요구했다. 그것은 레닌의 “공산당은 식민지에 있어 부르주아민주주의 운동을 지지한다”라는 것이었다. 로이는 공산당은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지지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어 소위원회에서 식민지의 부르주아민주주의운동의 성격과 용어를 둘러싸고 약간의 논쟁이 이어졌다. 식민지ㆍ반식민지의 운동은 일면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제국주의ㆍ식민주의에 대한 일정한 타격을 주는 것으로 즉 반제측면을 가진다는 것이다. 결국 소위원회에서는 식민지ㆍ반식민지의 운동은 부르주아적 측면과 반제ㆍ반식민주의의 측면을 모두 가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말해 아프가니스탄운동은 상기의 국내 제 개혁을 볼 때 봉건성을 부정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 개혁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영국식민지주의에 대한 민족해방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인민은 제3차 앵글로 아프간 전쟁에서 싸워 승리했다. 제2차 앵글로 아프간전쟁(1878~80, 후술)에 포병중위로 참전해, 제1차세계대전후 육군 대신이 되었던 이스턴 처칠과 같은 이는 아프가니스탄인과 쿠르드인에 대해 독가스를 사용할 것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아프가니스탄인민에 있어 당시 영국제국주의는 하늘을 함께 일 수 없는 적이었다.





그렇다면 특수 민족해방운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아프가니스탄운동은 러시아혁명(1905년)과 쏘비에트 혁명(1917년)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쏘비에트 역사가 중에는 레닌의 지도아래 마치 그러한 혁명의 연장선상에 레닌이 아프가니스탄의 싸움을 성립시킨 듯이 묘사한 것도 있다. 이것도 일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후의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쏘련의 꼭두각시국가였다고 매도하는 서방의 주장과 구별을 지을 수 없게 돼 버린다. 또한 이것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인민의 내발적 주체성이 매몰되어버린다. 그게 아니라면 아프가니스탄 인민자신의 내발적 주체성이라는 문맥에서 이 운동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아프가니스탄 독립과 내정개혁은 당시 세계혁명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종래 무시 혹은 경시되어온 측면의 아프가니스탄 인민 자신의 마그마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투르크 입헌혁명에 단초를 준 투르크인민ㆍ노동자에 의한 토착 혁명운동이 내적으로 존재했고, 거기에 쏘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영향을 아프가니스탄이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종합하면 쏘비에트 사회주의혁명과 이슬람권에 있었던 반제ㆍ반봉건ㆍ친사회주의 투쟁의 총화가 세계혁명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프간청년운동ㆍ아마누라개혁은 부르주아혁명이었고 아프가니스탄 근대사상에서 그 제1페이지를 장식하는 전환점이었다. 이는 후에도 되돌릴 수 없는 구조적 혁명을 동반했다. 제2차 󰡔세라지 우루 아크바루󰡕지의 발간과 청년아프간운동이 비합법으로 출발했을 때, 전부라고는 할 수는 없어도 저변 인민의 바람을 담은 혁명의 이념은 눈부실 정도로 빛났다. 그러나 그 개혁은 아마누라가 헌법을 제정했을 때 인민의 요구를 선취해 별도의 경로를 걷기 시작했다. 즉 인민의 지지 없이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바뀌어갔다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그것의 패배 원인은 이미 개혁을 담당해야 하는 주체의 계급적 성격 속에서 일정 정도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저널리스트 츠지야 로쿠로우(土屋六郎)는 아마누라의 방식을 “부르주아 없는 부르주아혁명”이라고 쓰고 있다. (󰡔아시아리뷰󰡕 35 가을호, 제3호, 󰡔아사히신문사󰡕, 1978년) 즉 츠지야는 이 개혁의 계급적 주체는 취약하고 애매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 운동의 계급 주체로는 왕족 속의 진보적 부분, 지식인 및 소시민층의 혼합세력이었다. 그러한 세력에 의한 개혁이라면 가령 밧챠 사카오가 출현하지 않았다고 해도, 개혁은 오래가지 못하고 같은 곤란이 생겼을 것이라는 점은 예측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혁명은 어중간하게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전의 농노, 유목민 및 수공업 직인이 몰락하고(그러면서 부르주아지가 성장할 때―편집자) 그 혁명운동(부르주아 혁명운동―편집자)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다음의 사실에서도 통찰할 수 있다.





아마누라와 타루지 등의 간부는 밧챠 사카오로부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개혁 방침을 내걸고 각각의 부분들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한 조건아래 관료와 무장한 이들이 매우 쉽게 군문에 배반하기도 하고 스파이를 움직이기도 하고 나아가 우두머리들을 끼고 도망쳐 행방을 감추기도 했다. 이때 아프가니스탄의 역사가 모하메드 알리는 그의 저서(“Progressive Afghanistan" by Mohammad Ali, Kabul, 1993, p. 21)에서 ”정부의 관리들은 (밧챠 사카오)사건에 대해 냉담한 방관자로 되어버렸다. 그 속에는 약탈자를 인식하거나 위험을 헤아리는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고, 역으로 잘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사실 경과를 더듬어 가면 결국 관료와 장수들은 반동의 무장투쟁파가 복수심을 가지고 많은 개혁안을 무너뜨리는 것을 허락했고 그들의 정권의 붕괴를 앞당기는 것에 한 역할을 담당했다.





개혁의 내용에는 시작부터 민족의 해방과 인민의 자유ㆍ생활의 향상이라는 대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의와는 무관하게 그들 자신의 힘을 균형을 살펴 빨리 자기 자신의 안전을 따져보는 기회주의자였다. 대의의 관철과 자기 내면의 근대적 자아의 확립, 그들 사이에서 왕정복고운동이라는 긴장을 소홀히 여겼던, 즉 내면의 변혁 없는 개혁의 부분이 많았던 것일까. 운동에 참가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 변혁과 향상이야말로 운동의 강약, 양부를 판정하는 지표였기 때문일까. 개혁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중립주의 외교










반동의 첨병이기도 했던 뱟챠 사카오는 겨우 9개월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덧없는 싹이 패한 것일까, 혹은 저변부터 부서진 것일까, 반동파의 두목들에 있어 아마누라개혁을 매장하는 선에서 사카오가 그 일역을 담당하면 그는 이미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이어 나딜 샤가 왕위를 이었다(1929년). 나딜 샤는 제3차 반영전쟁에서 카즈니 방면 방위군 지휘자로서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도 겨우 3년이었고, 또한 암살의 연쇄 속에 희생되었다. 그의 황태자 샤빌 샤가 약관 19세로 왕위를 이었다. 1932년의 일이었다.





눈을 세계로 향하면 1929년에 세계대공황이 발발했고,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각국의 인민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고통 받으며 도탄의 고통에 날이 새고 저물었다. 인민 생활의 고통이라는 점에서는 아프가니스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에 1935년부터 38년까지 ― 그 기간 동안 일본에서는 2.26사건과 일본국의 중국침략이 이어졌다 ―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한 일본인 농업기사 부부의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아프가니스탄 주요 도시에는 아직 수도, 전기가 거의 보급되지 않았다. 건물 내에 화장실 시설이 없었고 옥외에서 용변을 보았다. 램프를 켜고 생활했으며, 겨울이 되면 이리떼가 설산에서 카불까지 내려와 방범견조차 침묵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빈궁이 극에 달해 고용되었던 사람들이 차례차례로 주인의 가재를 훔쳐나가곤 했다. “이 나라는 부족함이 매우 심해, 이제는 단념해서 서있을 기력조차 잃어버렸다”. 일본인 농업기사는 당시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 거주생활을 차례차례로 엮어냈다. (󰡔일본인이 본 30년대의 아프간󰡕, 尾崎三雄, 石風社, 2003)





이 시기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눈에 띌만한 경제ㆍ국가발전전략은 작성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것은 중립주의 외교정책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후발국 아프가니스탄은 영러 그레이트 게임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가 그야말로 오랜 과제였다.





제1차 대전 중 아프가니스탄은 외교권의 반을 영국에 장악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할 것을 종용해왔다. 당시 왕 하히브라한은 그 문제에 주저하며 망설였다. 이에 투르크에서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모하메드백 타루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타루지는 말하기를 “영국은 유럽전선에 병력을 집결하고 있기 때문에 동방까지 손이 닿지 않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영불협상의 적이었던 독일과 오스만투르크에 호의를 보여야한다. 투르크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범이슬람주의에도 마음을 가질 것. 그렇게 하면 영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외교상 균형을 취할 것이다”. 이렇게 밉살스러울 정도로 표적을 명중시키는 타루지의 구상에 그동안 오리무중이었던 한은 마음이 움직여 그렇게 했다. 이렇게 아프가니스탄은 한명의 군사도 전장에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The Struggle of the Peoples of afghanistan For Independence and Aganist the British Colonialists, by N.Khalfin, "Afghanistan : Past and PRESENT ' 전게서)





이어 1931년 아프간-쏘비에트 중립상호불가침조약이 양국정부에 의해 체결되었다. 제2차 대전이 일어난 1941년, 아프간정부는 “국가 간 분쟁에 중립의 입장을 보유할 것”을 선언했다. 로야지루간은 국민에게 정부의 공식정책(중립)을 지지하도록 호소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연구자 도날드 윌버는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이 중립주의 입장은 중요한 의의가 포함되어있다. 이 정책은 아프간인민의 역사적 경험이 배양한 것이다”





즉 이 정책은 영국의 침략에 저항했던 인민의 수난과 인고에서 생겨난 지혜이고 쏘비에트 와의 신뢰양성의 결과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아시아에 있어 두 번에 걸친 전쟁에 인민의 의사로 참전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 중의 하나였다. 이는 전화를 면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국제적인 위신을 높여주게 되었다.





또한 전후인 1955년, 미국은 대쏘련 포위망의 일환으로 바그다드(중동) 조약기구를 창설했다. 여기에 투르크, 이란, 이라크 및 파키스탄이 가맹했으나 아프가니스탄은 가입을 거부했다.





이와 병행해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아시아ㆍ미주의 신흥독립국과 함께 반제ㆍ반식민지주의의 입장에서 적극 중립ㆍ비동맹주의 외교를 진행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인도, 유고슬라비아, 인도네시아 및 이집트 등과 함께 비동맹운동의 제창ㆍ추진국의 하나였다. 아프간 인민은 평범하고 용렬한 국왕을 지원해, 반제ㆍ중립ㆍ비동맹의 외교노선을 지켰다.





아프가니스탄과 매우 닮은 상황인 나라가 캄보디아이다. 그 나라의 지도자이고 왕자였던 노로돔 시아누쿠는 갖가지 세평에 시달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집정을 한 초기의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있어 그는 망설임 없이 중립주의 외교를 추구했다.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타이왕조시대이래 그러한 세력에게 억눌려 영토는 잠식되었다. 1959년 시아누쿠는 중립법을 공포하고 영세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그 이후 미국의 인도네시아 3국에 대한 공격, 캄보디아-베트남 간의 분쟁, 폴포트 정권의 등장이 이어졌다. 그러나 시아누크가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비동맹운동에 적극적이었다는 명예로운 사실은 국제적으로 인상을 남겼다. 반대로 대부분 되돌아보지 않고 있는데 나지부라정권의 비무장 국가론이다. 나지부라는 1988년 11월 26일, UN에서 아프가니스탄을 영구적 평화와 비무장 국가로 할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89년 9월 제9차 비동맹제국수뇌회의에서도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분명히 했다. 이렇게 대국의 사이에 있는 소국과 주변국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냉전체제 아래에서 몹시 시달리면서도, 단지 자국인민의 해방만이 아니라 진지하게 세계평화에 공헌하려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대로 명기하고 싶다. 이것도 아프가니스탄이(일국만이 아니지만) 현대사회에 제기한 과제일 것이다.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둘러싸고










쟈빌 샤 왕조가 발족하고 30년이 경과했다. 그때 왕조가 비로소 잡게 된 것이 국가자본주의적 발전전략이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이 쏘련과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하는 중에 찾아냈던 것이다. 도상국의 발전전략에 관련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 논쟁과 ‘국가자본주의’(강조는 필자)의 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쏘련과 아프가니스탄이 그 발전계획을 책정하기 시작했던 1950년대 후반에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즉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권력아래 국가자본주의’가 도상국의 개발이론이 되었다.





쏘비에트 경제학자 모데스테 루빈슈타인은 1956년, ‘발전도상국에 있어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A Non-Capitalist Path for Underdeveloped Countries, by Modeste Rubinstein, 'New Times", July 5 and august2)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루벤슈타인은 발전도상국, 특히 인도의 쟈활할랄 네루 정권의 국가기업의 경제활동을 소개하고, 그것이 국가경제를 리드했다고 한다. 이것이 즉 사회주의 경제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그 방향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재빨리 인도공산당 서기장 아죠이 고쉐가 그에 반론하는 논문 ‘인도발전의 길’(On India's Path of Development, by Ajoy Ghosh, "New Age", Monthly Oct.)을 발표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른바 ‘비자본주의 발전의 이론(길)’논쟁이 시작했다. 후자가 전자를 부채질해, 이윽고 그것을 흡수했다.





고쉐는 그의 논문 속에서 ‘루벤슈타인이 몇 가지 정식화하는 것들은 타당하다’, 또한 ‘인도국가자본주의가 진보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벗의 당인 쏘련 공산당원의 이론에 일정한 경의를 보이며 평가를 보냈다. 고쇄의 논문 중에 나오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발표된 것과 사실, 2. 제2차 계획, 3. 농업문제, 4. 인도정부의 정책 ― 인도 공산당의 분석, 5.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다.





제각기 위의 내용을 언급하는데 할애하면서 고쇄는 루빈슈타인이 인도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지 못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인도공산당은 네루정권에 의한 중공업발전을 위한 공기업의 확대에 대해 평가했다. (쏘련은 1955년 인도의 비라이제철소 건설원조협정 조인이래 인도와의 사이에서 중요한 경제협력 관계를 취해왔다.) 이 점에서는 고쇄는 루빈슈타인의 설에 동조했다. 그러나 고쇄는 “루빈슈타인 논문의 기본적 주장은 오류이고, 또한 그가 제시한 주요한 테제는 아무 근거도 없다”라고 말하며, “평화적 수단에 의해 사회주의ㅡ이 길을 간다는 객관적 조건이 인도에 존재한다”라는 루벤슈타인의 주장은 놀랄 만큼 그릇된 견해라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고쉐는 인도에서는 아직 영국자본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그들과 인도 독점자본(타타, 비루라재벌 등등)이 상당 정도 정치적ㆍ경제적으로 제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벤슈타인은 그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인도에 있어 중심과제의 하나는 농업이다. 그러나 그 과제도 또한 무시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루벤슈타인은 인도뿐만 아니라 이집트, 비루마(미얀마), 인도네시아 및 세이론(스리랑카)을 시야에 넣었기 때문에 논쟁은 넓게 아시아, 아프리카 및 라틴아메리카까지 이르렀다. 1965년 2월, 아루제에서 개최된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경제 세미나에서 쏘비에트 대표단장 소로도 니콜라(쏘련 아프리카 연구소소장) 은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그것은 국제적 분야에서는 적극적 중립주의이고, 경제 분야에서는 국유부문의 강화와 국가경제의 발전이다. 정치 분야에서는 민주주의의 원리의 확립과 민족적 대중적 제정당으로의 의존이다.”(󰡔아시아ㆍ아프리카연구입문󰡕, 江口朴郎․ 岡倉古志郎․ 蝋山芳郎, 青木書店, 1965년)





‘발전의 길 논쟁’이 도달한 도달점은 하나가 아니었다. 우선 이집트공산당의 경우 이 당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빨리 결성되면서 나세루의 등장과 쏘련의 아수완하이댐 건설 원조(1956년)속에서 당의 이론적 혼미함이 깊어졌다. ‘발전의 길’ 이론에 유도되어 그에 몰두했다. 이윽고 나세루정권에 의한 탄압(1959년)도 더해져 당의 활동은 동요했고 정체되기에 이르렀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은 나세루, 네루 및 스카루노 등의 반제ㆍ반봉건민족 부르주아지에 의한 민족해방운동과 반제ㆍ반봉건민주주의의 노동자인민의 당과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 혹은 후자가 전자를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지를 말해주는, 즉 도상국에 있어 사회주의혁명의 문제에 당면했다.





결국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권력 아래에서의 국가자본주의의 길들이기’를 혼란 없이 자국에 바르게 적용한 것은 쿠바와 베트남이었다. (중국에 있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이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하면서도 혼란의 끝, 중도에 그것을 구속하게 이르렀다.) 1965년 2월 체 게바라는 쏘련 대표 소로도니콜라가 출석한 아루제 경제연대 세미나에 참가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세미나는 발전도상의 독립국의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킬까, 또한 그를 위해 사회주의국가는 어떻게 도상국에 원조ㆍ협력할 것인가가 테마였다. 체 게바라는 그 세미나에 있었다. “호혜란 무엇인가? 후진 제국에게 셀 수 없는 땀과 고통의 보상인 1차 상품을 국제시장가격으로 팔고, 현대 자동화한 대공장에서 만들어진 기계를 국제시장가격으로 파는 것일까? 2개의 국가 간에 이러한 관계가 완성된다면, 사회주의라고 말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제국주의적 착취의 공범자가 되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일까”(체 게바라, “알제에서의 연설" 󰡔현대혁명의 사상 4, 제3세계의 혁명󰡕, 筑摩書房, 1970년)





게다가 그는 역설했다. “현재 해방으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국가의 발전은 사회주의에 의해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에게는 우리 형제들이 착취의 철저한 폐지의 길에 곧게 의식적으로 들어오도록 제 조건을 갖출 의무가 있다...”





게다가 베트남의 경우 호치민은 “북부는 반드시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도기의 최대의 특징은 뒤떨어진 농업국으로부터 자본주의발전거치지 않고 바로 사회주의로 진행하는 것이다”(“당의 30년의 활동” 1966년, 󰡔호치민선집󰡕, 제3권, 신일본출판사 1968년, 강조는 인용자) 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국가자본주의적 계획경제










1953년 쟈빌 샤 왕조아래 그의 사촌인 사루다루 모하메드 다우도는 국방상겸 정보상에서 수상으로 승진해 바로 내각을 꾸렸다. (다우도는 1973년 궁정쿠데타를 결행해, 샤왕조를 타파했다―후술) 동시에 그의 형제인 모하메드 나이무를 외상으로 해 입각시켰다. 그들 형제는 그 내각에서 절대적인 발언력을 발휘했다.





형제의 내각 만들기에는 정권욕 이외에 2가지 동기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1951년에 전 내각이 실패한 경제정책을 수정하는 것이다. 즉 아프가니스탄은행의 무화, 석탄 등의 채굴과 수력발전 등의 개발계획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수출입은행에서 신용보증을 얻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는 계획에 큰 지장을 초래했다. 또한 이는 미국 측으로부터 말한다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원조경쟁에 있어 쏘련에 패배한 것이 된다. 전전까지 전개된 영러 그레이트 게임은 전후에는 미쏘 사이에서 형태를 바꾸어 새로운 게임으로서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당시의 새로운 세대를 대표한 근대주의자 다우도 등에 의해 쏘련의 발전 약진이 눈부시게 비추어졌다는 것이다. 이 발전방법을 아프가니스탄이 활용할 수 없는 것일까 생각했다. 도날드 윌바는 “다우도는 아프가니스탄의 북부산간지역으로부터 흘러나온 암 타리아강 하류 부근의 쏘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의 그 급속한 발전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Afghanistan-its people, its society, its culture" 전게서, p. 219.)





아프가니스탄과 매우 유사한 기상 조건의 중앙아시아에 있어 대약진의 정보가 그들 눈에 띄게 되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 차리즘의 느루케스탄의 총독은 타시켄트를 수도로 해, 1867년에 브하라 히바 및 코칸도한국을 수중에 넣었다. 1885년, 그 지역 일대는 면공업의 원면공급지로서 재배면적이 4만 데샤치나(1데샤치나는 약 1헥타르)였다. 면화재배의 모노컬처(mono culture)로 식민지였다. 이것이 혁명전의 1915년에는 약 13배 이상의 54만 데샤치나에 달했다. 이미 1861년 러시아에서는 ‘농노해방령’을 발표하고 중앙아시아에서도 그것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혁명 후 중앙아시아에서도 철도건설이 이루어졌는데 거기에도 농노였던 인민이 철도노동자로서 약 2만 명이 참여했다. 쏘련 정부는 농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24년 이후 장기에 걸친 석탄ㆍ반석탄 초원지방의 토지ㆍ수리계획을 수행했다. 그것과 전후로 면화의 재배면적을 한층 확장했다. 그러자 그 일대는 세계유수의 면화공업 콤비나트가 되었다. 황량한 대평원이 오아시스가 되어 그중에 높은 굴뚝이 하늘을 향해 내밀기도하고 크고 작은 다양하고 무수한 파이프 류가 건물주변을 둘러싸게 되었다. 그러한 근대적 공장 군들이 겨우 반세기만에 출현한 것이었다. 나는 1980년대에 비로서 약 10일간 이 지역을 방문한 일이 있다. 끝없이 높고 넓은 대평원 위의 창공은 희미하게 곡선을 그리며 무한한 저쪽의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흰 눈이 일순 내렸다 녹아버렸다. 다만 투명한 대 공간, 그 아래에 선 흰 빌딩 속에서도 면방직작업을 했던 우즈베키스탄의 여성들이 섭씨 30도를 넘어선 혹서에도 불구하고 점식식사 후에 브도우나무 선반아래 모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젊은 여성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공기가 건조하기 때문에 고온에도 견디어 내는 데는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 가깝게는 타시켄트 공업지대가 있었다. 다우도들은 아프간의 땅에 그러한 광경을 갈망해왔을 것이다. 그것을 실현하지 않을 것인가! 아프가니스탄은 쏘련보다도 수년 혹은 백년도 늦어졌다. 개발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다우도 내각이 중점을 둔 정책은 이하의 네 가지이다.





● 민간기업의 발전촉진책에서 재정ㆍ금융ㆍ상업 및 공업의 국가관리로의 전환





● 경제발전정책의 강고하고 우선적인 추진





● 외국의 보증과 차관의 대량유입





● 파슈톤 문제에 계속 천착함(파키스탄 사이의 국경문제=듀란토 라인)





요약하면 외자를 받아들여 국가가 그것을 자원삼아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1956년, 다우도가 UN에서 행한 연설에 따르면 “공기업과 민간 기업의 모든 국내의 경제활동을 국가가 지도해, 규제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국가가 지도해 규제하는ㅡ후에는 계획이라고 하는ㅡ그 경제 혹은 ‘국가독점자본주의’란 어떤 것일까, 다소 본래의 취지로부터 빗나가지만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러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은 다름 아닌 레닌이었다. 레닌은 1917년 9월 중순에 발표한 “임박한 파국,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레닌전집󰡕, 제25권, 大月書店, p. 348) 중에서 이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혁명적 민주주의 국가 아래서 국가자본주의적 독점”이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쏘비에트 혁명성공 후에는 그것이 “쏘비에트 권력아래에서의 국가자본주의”라고 바꾸어 말하고 있다. 레닌은 이 개념을 고정된 것으로서, 학자풍으로 세부까지 정의해 다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쟁취 후의 상황의 변화 ‘공산당좌파’ 등과의 논쟁과 자신의 생각의 심화 속에 강조점을 이동시키면서 그 개념을 “사회주의를 향한 일보”로 하고 있다. 이듬해 1918년 5월 레닌은 ‘<좌익적>인 유아와 소부르주아성에 대해’라는 제목을 단 기사를 󰡔푸라우다󰡕에 개제했다 (󰡔레닌전집󰡕, 제27권, p. 327). 거기서는 ‘러시아에 현존하는 사회=경제제도의 제 요소’를 열거하고 있다.





1. 가부장적인 즉 현저한 정도의 현물적인 농민경제





2. 소상품생산(곡물을 파는 농민이 대다수)





3. 사경영적 자본주의





4. 국가자본주의





5. 사회주의





레닌은 국가자본주의를 어떻게 위치지었던 것일까. “국가자본주의란 우리가 일정한 틀에 끼워 넣은 자본주의이다” (󰡔레닌전집󰡕재33권, p. 283.) 끼워 넣은 후에 그것을 사회주의경제로 이행시킨다는 것이 그 최종 정식이었다. 따라서 그 정식을 권력기반이 약한ㅡ아프가니스탄과 같이 언제 국왕암살사건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ㅡ발전도상국에 충분한 검토 없이 가져오는 것은 큰 비약이고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모하메드 다우도는 그것을 다함께 수행했다.





1956년 1월 아프가니스탄과 쏘련 과의 사이에서 맺어졌던 경제협력협정으로부터 발전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는 쏘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일억 달러의 신용을 연 2%의 이자, 30년의 기간으로 받은 것이었다. 신용의 반환에는 외국통화를 사용하지 않고 아프간 전통적 수출품목인 면화, 양모, 건조과물 및 피혁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제1차 계획(1956~6년), 제2차(62년~66년), 제3차(67~71년)의 기간 중 51년부터 68년까지 쏘련으로부터 아프간으로의 원조총액은 6억 달러였다. 원조 품목은 무기부터 이나고와 밧타의 구제용 방충망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어 국가자본주의체제 관련연표”를 앞 표에 두었다.





이하, 아프가니스탄에 있어 인프라기반으로, 쏘련과 그 외의 원조를 살펴보도록 하자.










● 전원(電源)개발ㆍ수리계획





아프가니스탄 주요 4도시의 연간 강수량은 카불 318밀리미터, 칸다할 171, 하라토 245, 및 쿤도스 233으로 그 평균은 241밀리미터다. 그것은 동경의 연간 강수량의 1500밀리미터의 1/6에도 미치지 못한다. 요약하면 여기는 건조 지대이다. 중앙아시아와 옛날 실크로드에 낭만을 품은 여행자와 역사가들은 이 지방의 카레즈에 특별한 이미지를 상상한다. 그러나 지하 깊이 수십 미터 더욱이 지중에 횡혈식 수킬로미터에 걸쳐 고지부터 배어나오는 지하벽류수를 모으는 카레즈의 수량에 의해 과연 근대적 국가의 기초가 되는 공업을 흥하게 할 수 있을까. 답은 명백하다. 공업화는 그 수량으로는 결정적으로 불충분하다. 중앙아시아에 있어 사회주의적 수리계획의 경험이 이미 인류 앞에 유감없이 보였다.





이 시기, 파미루고원과 힌즈쿠스산맥의 눈이 녹은 물을 모아 설원개발에 공급하는 것이 일대 착안점이었다고 말해야한다. 이러한 것에 착안하여 사업을 추진했던 주체들은, 당시 쏘비에트 사회주의의 건설자로서 뉴딜시대의 미국 테네시 협곡개발 계획자들 가령 리리엔솔2) 등이 있었을 것이다.





카불 가까이 나구루에 수력발전소가 건설된다면 수도로 전력과 물을 보낼 수 있다. 앞에 소개했던 1935년부터 카불에 거주했던 미야자키미치오(宮崎三雄)의 기록에 따르면, 거리 안에서는 수돗물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전게서). 거기에 드디어 상하수도가 부설되면서 근대도시로 변화되었다. 또한 시내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최대 규모의 쟌구라크 자동차수리공장과 세판공장이 쏘련의 원조로 세워졌다. 카불 남 가스니시에서는 그 부근의 시루가강에 사루다댐이 만들어져, 시내로의 급수와 함께 그 하류 부근 2만 헥타르의 건조지에 관수계획이 세워졌다. 헤루만도강(아프가니스탄 남서부 이란 국경 가까운) 유역의 댐, 수력발전 및 수리공사는 1958년, 미국이 원조한 것이다. 쟈라라밧도 개발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 자동차 간선도로





아프가니스탄에는 철도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자동차도로의 건설이 서둘러졌다. 쏘련, 미국 및 서독일 등이 그 건설공사를 청부맡았다. 카불부터 북부 마쟈랴리프를 거쳐 쏘련과 국경, 우즈베키스탄에 이르는 도로는 쏘련이 공사를 맡았다. 그중에도 힌즈쿠시산맥 속에서 해발 3570미터 산지를 넘어서는 사란고개, 그 아래를 빠져나가는 터널공사는 난공사였다. 전장 2400미터, 아프간인 노동자 13000인, 쏘련의 기술자 600인으로 햇수로 10년을 요했다. 그곳 완성 이전에는 라쿠다의 걷는 고개였던 카불-쏘련 국경 간의 도로 200킬로미터를 단축했다. 카불부터 동쪽 국경의 아무다리아강까지 8일이 걸렸으나 터널이 관통하면서 차로는 겨우 8시간의 거리가 되었다. 이 도로의 완성이 가져온 경제적 효과는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것이었다. 현재에도 그 위업과 영향은 전해져오고 있다.





그 땅 마쟈리샤리프부터 헤라토, 헤라토부터 칸다하루로의 자동차도로도 세워졌다. 카불부터 남 칸다루까지 315마일(약500km)은 미국이 원조했다. 또한 북서부의 시바루간 주변에는 천연가스 굴착이 쏘련 원조로 이루어져, 수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마쟈리샤리프에서는 수력과 천연가스 에너지의 이용에 의해 비료공장도 건설되었다. 시기는 약간 후가되지만 아프가니스탄과 쏘비에트와의 무역액의 추이를 살펴보자.





1972년 689,000루불





1974년 1,224,000 루불





1975년 1,320,000 루불





1976년 1,540,000 루불





1975년 현재 아프가니스탄 공기업에서 생산된 것의 3/4는 쏘련의 원조를 받은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도로건설공사 전체의 70%, 수력발전의 60%를 쏘련이 원조 부담했다.















쟈라라밧드 유전(遺傳)










다우도부터 시작된 국가자본주의적 발전계획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그것을 쟈라라밧드시를 예로 들어보자





카불부터 동 카이불 고개방향으로 100킬로미터에 쟈라라밧드시가 있다. 거기에는 오래전부터 부루왕조의 겨울 별궁이 있었다. 왕족들에게 있어 겨울 적설로 막힌 카불로부터 온난하고 깨끗한 물에 둘러싸여 녹음이 가득한 쟈라라밧드로 가는 것은 그 이상 없는 열락과 사치였다. 1936년 가을, 두 번에 걸쳐 그 땅에 다리를 놓은 농업기사인 미야자키미치오(宮崎三雄)는 이하의 관찰기록을 남기고 있다.





미야자키는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각지를 돌며 아프간 농민은 지면에 단순히 작물을 심을 뿐 손질도 거름도 주지 않는 ‘약탈농법’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유목으로부터 정착한 농업으로의 과도기에 있었다고 규정했다.





그로부터 20년 후 다룬타 고루게라는 협곡에 수력발전시설과 저수지가 건설되었다. 그 하류 500헥타르의 넓이의 건조지에 한해가 닥쳐 그것이 농경지를 바꾸었다. 쟈라프밧드 계곡에는 핫다와 가지드바드라는 이름의 과수원이 만들어졌다. 원래 토지 없는 농민9000인 남짓이 그 과수원과 올리브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70년대 말에는 수천 톤의 감귤류와 올리브유가 수출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아프칸 최초의 국유국영의 기계화된 농업기업이었다.





레오니이드 테프린스키는 그의 논문 속에서 “경작에 전혀 맞지 않고 혹은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조건에 휘둘렸던 수천 헥타르의 토지에서, 수확을 예상할 수 있는 농업이 영위되고 있다”고 잘 쓰고 있다.(Ssoviet-Afghan Cooperation: Lenin's Behest Implemented, by L.Teplinsky, “Afghanistan: Past and Present” 전게서.)





가지드바드 농원에서는 부근의 농장과 농가에 큰 묘목과 우량한 혈통의 송아지를 배포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4월 혁명 이후 여기에 두 개의 국영농장의 개설이 준비되었다. 시대가 한참 뒤이지만 1980년대 후반의 쟈라라밧드에 대해 말해두고 싶다. 1988년 그 땅에 일본의 기록영화촬영 쿠루 일행이 들어왔다. 카메라는 쟈라라밧드 교외의 올리브농원과 올리브유제조 공장의 안팎을 찍었다. 가족을 반혁명파와의 싸움으로 잃기도 한, 부루카를 벗어던진 여성들이 씩씩하게 일하기도 했다. 그 영화는 “살아나라 칼레즈”라고 한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서술에 도움을 얻기 위해 본서에서 종종 이 영화의 장면을 언급하곤 했다.





1989년 2월 쏘련군은 완전히 철수했다. 그러자 파키스탄령 페샤와르에 거점을 둔 반혁명 지하드측은 약 2만의 병력으로 일제히 쟈라라밧드을 공격했다. 그들은 부근의 전원시설, 댐 및 농공 복합체를 파괴하고 쟈라라밧드시를 초토화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때쯤 나지부라정권은 트럼프를 하러다닌다는 소문이 종종 흘러나왔다. 그러나 정부군 1만은 심한 공방전의 결과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렇다 해도 제1차 5개년 계획이래 건설된 제반 시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해 4월 나지브라 대통령은 혁명 기념집회에서 쟈라라밧드 공방전의 승리를 칭찬했다. 그들은 그 땅을 지속적으로 녹색지대로(에버그린) 변용해 장래의 아프가니스탄 농공복합체 개척지로서 재건할 것을 주장했다.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아프간인으로서는 결코 장신이 아닌 그는 연탁에 양손을 놓고 긴장감 속에서 그의 날쌔고 사나운 용모를 빛냈다. 그때에는 아직 승리의 여신이 여기저기 떠돌고 있었지만, 그의 정권은 그 후 3년 후에 붕괴했다. 쟈라라밧드 복합체는 모조리 태워졌고 녹색지대(에버그린)의 꿈은 모조리 붕괴했다. 쟈라라밧드라는 한 국가의 한 지역의 유전(遺傳) 속에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이 투영되어있는 듯 했다. 이에 내가 구태여 이 1장을 여기에 삽입한 이유이다.














경제 전략의 문제점










다우도를 중심으로 하여 추진된 국가자본주의전략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는 1963년에 사임해 쫓겨났다가, 1973년 쿠데타라는 형태로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여기에서는 그때까지 전략의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전략은 대부분 쏘련의 원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북부에 있는 천연가스 채굴해 수출하고, 수원개발과 수리시설에 의해 면화, 모피의 생산을 확대했다. 1968~69년의 통계에 따르면 경제성장은 인구증가율 2.5%에 대해 3.5%였다. 또한 천연가스 개발은 전년도보다 10%증가했다 (󰡔카불 타임즈 연보󰡕 1970년). 이것들이 카불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화와 공업화, 쟈라라밧드에 있어 농업의 복합체 등으로의 발전 등은 당시 지역의 상업발전을 크게 촉진했다. 또한 도로 다리 등의 인프라도 정비되었다.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고용창출에 의해 근대적인 노동자계급의 형성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아프가니스탄에 있어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한편 외국으로부터 경제원조, 특히 쏘련과 미국ㆍ서독일 등의 동시병행적인 차관을 받아들이면서 식민지주의의 개입을 허락하게 되었다. 이는 이른바 1958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융자에 의한 헤루만드 강 개발과 도로건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미국으로의 원리금상환을 위해 쏘련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30년 기한 연 2.0%의 장기저리의 원조를 끌어들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천칭으로 하여, 상대하는 요소로서 양자의 힘을 이용해 그 경쟁에서 일정의 이익을 얻어내려고 한다면 사회주의국의 신뢰를 기대하는 것을 불가능하다”(체게바라 “아루제에서의 연설”). 이러한 건에 대해서는 쏘련이 아프간정부에 항의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도 포함해 헤루만드강 개발사업은 지체에 지체를 거듭해 완성되었다. 동경대학 서남힌드쿠슈조사대의 1967년의 보고에 따르면 “5개년계획에 의해 선택된 헤루만드 강의 대규모적인 근대적 관개개발에 관한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보고서는, 염천(炎天) 아래 근대적인 수문의 핸들을 바라보는 노인(가뭄에 농업용수를 간절히 원하는 원주민ㅡ편집자)의 표정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 사실 헤루만드강 개발을 견학한 우리들이 가장 인상을 받은 것은 망막한 사막지대에 종횡해 올라간 수로보다도 완전히 미국풍으로 건설된 기술자용 숙소, 에메랄드 색으로 물을 가득 채운 수영 풀이었다. 석탄을 녹음으로 바꾸는 인간의 예지보다도 그것은 미국의 경제력ㆍ정치력의 상징으로서 우리 눈에 비추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물과 사회󰡕, 동경대학서남 빈드쿠슈조사대, 동경대학출판회, 1969년)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도상국의 경제개발과 신식민지주의에 대해 꽤 논의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국가의 정치가, 관료들은 그 문제에 전혀 관여하여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사과연>















사사키타츠오3)(佐々木辰夫)





번역 :정혜윤(회원)






1) 로이(1890~1945년) 인도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 공산주의인터내셔날(코민테른)의 집행위원.





󰡔레닌전집󰡕31권, 대월서점, p. 135, p. 553 “민족ㆍ식민지문제소위원회의 보고”, 󰡔코민테른 자료집󰡕1권 대월서점, p. 245, p. 573. 이 두 권은 같은 문제를 수록하고 있지만, 용어와 다른 약간의 차이가 있다. 또한 로이는 ‘보충테제’를 발표했지만 그것은 양쪽 다 수록되지 않았다.






2) D․E 리리엔솔은 TVA(테네시 협곡개발회사)의 부사장, 미국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뉴딜시대인 1934년, 아프가니스탄을 국가로서 승인했다. 그 때 미국은 그 해 시작했던 TVA의 구상을 아프가니스탄에도 들여왔다. 그러나 사실상은 1958년부터 시작한 아프가니스탄판 헤르만도강 개발계획부터 TVA구상은 착수되었다.






3) 1928년 출생, 도시샤(同志社)대학졸업, 실직 중일 때부터 오키나와ㆍ아마미를 비롯해 일본각지를 외딴섬ㆍ벽지를 정력적으로 걸었다. 후에 중학교에서 일을 잡을 수 있었다. 동시에 1960년대 인도ㆍ오키나와 그 밖에 지역에 관한 르포를 󰡔신일본문학󰡕과 관서인들이 하는 문학ㆍ사회운동의 동인지󰡔표상󰡕󰡔변혁자󰡕등에 발표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주로 이란혁명, 아프가니스탄혁명에 대해 󰡔사회평론󰡕에 집필했다. 저서로는 󰡔아하곤쇼코(阿波根昌鴻)- 그 투쟁과 사상󰡕(2003, スペース伽耶)이 있다.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112 [기획번역]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2)[1] 사사키타츠오(佐佐木辰夫) 2009-03-25 3432 153


우 156-060)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435번지 진안상가 나동 2층 (신주소: 노량진로 22길 33) 
(전화) 02-790-1917 / (팩스) 02-790-1918 / (이메일) wissk@lodong.org
Copyright 2005~2022 노동사회과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