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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한스 아이슬러 선집: 음악의 반란자(1)
글쓴이 한스 아이슬러 E-mail send mail 번호 113
날짜 2009-03-25 조회수 4285 추천수 134
파일  1237935467_아이슬러.hwp

  













연재에 들어가기에 앞서















연재에 들어가기에 앞서










��정세와 노동�� 2009년 2월호부터 만프레드 그랍스(Manfred Grabs)가 편집한 한스 아이슬러(1898-1962)의 선집 “음악의 반란자”(Hanns Eisler, Selected Writings, A Rebel In Music, Seven Seas Books, DDR, 1978)를 번역하여 연재한다. 이미 국내에도 1987년 동녘 출판사에서 알브레히트 베츠(Albrecht Betz)의 Hanns Eisler: Musik einer Zeit, die sich eben bildet, 1976(제목을 “한스 아이슬러: 바로 이때 형성된 시대의 음악” 정도로 직역할 수 있다. 아직 독일어 원본은 입수하지 못했다.)을 ��음악의 혁명, 혁명의 음악—한스 아이슬러의 생애와 음악��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어판 ��ハンス․アイスラ― 人と音楽, 晶文社��(한스 아이슬러 인간과 음악, 쇼분샤)을 근간으로 하여 출판된 바 있다. ��음악의 혁명, 혁명의 음악—한스 아이슬러의 생애와 음악��의 출판은 당시로서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지만 중역을 하다보니 세세한 부분에서 많은 오류가 있다. 상대적으로 빌 홉킨스(Bill Hopkins)가 번역한 영어판 Hans Eisler Political Musici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는 악보와 사진을 충실히 담고 있고 꼼꼼하게 번역을 하고 있다. 알브레히트 베츠의 책은 저자의 눈을 빌어보는 한스 아이슬러를 볼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직접 작곡자 자신의 글을 통해 예술가의 음악관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앞으로 연재할 선집은 생소한 사람을 위해서 한스 아이슬러를 소개할 수 있는 글을 다소 길지만 인용한다. (지면상 인용문에 있는 주석은 생략한다. 원문은 김수연의 "노래운동의 현실과 새로운 단계", ��예술운동론Ⅰ��, 하늘 땅, 1991, pp. 232-233.을 보라. 










(상략) 또 이들은 ‘새벽’의 노래들이 음악적으로 서양의 고급음악, 유럽 혁명가요를 전범으로 삼고 있다고 하여 비판한다. 서양의 고급음악을 전범으로 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싶다. 그리고 이전 시기 노동자계급 혁명가요의 역사를 귀중한 경험으로 삼는 것은 노동자계급 음악운동에서는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남의 나라 운동의 경험을 본받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있다. 선율을 차용하는 것이 국제 노동자 음악운동에서 배워올 점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 독일의 노동가요가 노동자계급의 이념을 대중에게 가져가기 위해 어떠한 음악적인 고민과 활동을 했는가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1930년대 독일의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이슬러의 경우를 보면, 노동자합창단을 지도하는 가운데 대중이 음악을 듣는 방법,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독특한 감성과 반응을 배운다. 뿐만 아니라 아이슬러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진군을 표현하기 위한 치밀한 음악적 고민을 한다. 그의 투쟁가에서 엿보이는 안정감 있는 투지ㆍ공세적 정서ㆍ짜임새 있는 음의 조직화는 바로 이러한 고민의 결과이다. "연대의 노래 Solidaritätslied"ㆍ"로터 베딩 Roter Wedding"1) 등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대중에게 노동해방의 관점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또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한다. "비밀의 행진, Der Heimliche Aufmarsch"2)ㆍ"자루던지는 사람의 발라드, Ballade von den Säckschmeiβern (밀이나 커피 등의 짐을 나르는 사람을 지칭함)"ㆍ"검둥이 짐의 발라드, Ballade von Neger Jim"(옮긴이 주: 검둥이라는 단어 때문에 인종주의적인 것으로 독해한다면 오해이다. 미국 인종차별에 대해 풍자곡이다.)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렇듯 독일의 노동자음악운동은 현실의 다양한 측면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노동해방의 관점에서 노동자대중을 계급투쟁의 전선으로 이끌어내는 데에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이러한 노동자음악운동의 전사(前史. 옮긴이: 인용원문의 한자가 잘못되어 있기에 문맥상 바로 잡아 인용한다. 원문에는 前使로 되어있다.)에 대해 그 역사성과 조건으로부터 분리하여 노래 자체를, 그 정서를 비슷하게 옮겨온다거나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남의 나라 역사니까 우리와는 무관하며 볼 필요도 없다는 식의 반대도 옳지 않다. (하략)










인용문에서는 한스 아이슬러의 음악을 1930년대 독일노동운동과 관련해 언급했지만 그의 활동은 반파시즘 망명투쟁 그리고 이후 동독 사회주의 건설과정에까지 지속된다. 국내에도 아이슬러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여러 음반들이 들어오고 있고 소수의 음악 애호가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그 정치적ㆍ사상적 측면과 배경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배제가 된 상태이다. 한국에서 한스 아이슬러는 1980년대 이후 민중음악 진영에서 일부의 작품번안과 선율 차용 정도로 도입된 것을 제외한다면, 음악 전공자의 유학을 위한 독일의 음악대학 이름으로 아니면 음악 매니아를 위해 거래되는 상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물론 쏘련과 동유럽 등 사회주의 국가의 예술 모두가 금지목록에 올라서 합법적으로는 접할 수조차 없었던 파쇼적인 시대를 생각하면 그것조차도 투쟁의 성과이다. 1980년대 초반 한 라디오 디제이는 심야방송에서 동구권 대중 음악을 그대로 소개할 수가 없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음악은 스메타나의 후예들, 헝가리 음악의 경우 리스트의 후예들이라고 돌려서 소개해서 무사히 넘어갔다고 한다. 또 소위 동백림 간첩사건으로 모든 음악이 금지되었던 작곡가 윤이상의 딸 윤정이 참여한 서독 대중음악 밴드 뽀뽈부(Popol vuh)의 멤버를 소개할 때는 서양식으로 ‘정윤’이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3) 지금에서는 웃지 못할 일화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대중음악에 대한 검열과 심의가 강화되고 있고, 반정부투쟁에 대한 파쇼적 탄압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화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오래된 과거가 우리의 발목을 잡을 미래가 될 수도 있음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이번 호에서는 맛보기로 편집자 만프레드 그랍스의 서문을 번역한다. 음악전공자가 아닌 사람의 서툰 번역이라 앞으로 연재하면서 오역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관심있는 분들의 날카로운 지적과 비판을 기대한다. 한스 아이슬러는 상당히 많은 논쟁거리를 던져준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없이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접근에 그치게 될 것이다. 20세기 사회주의가 남긴 위대한 예술은 몇몇 해외 투쟁가요나 영화 등등의 단편적인 것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거의 유산을 성찰하며 계승하고자 하는 동지들에게 그 거대한 조류를 조금이나마 알릴 수 있다면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아래에는 역자가 빈소년 합창단 공연을 보고 나서 노동자 합창단에 대해 든 고민의 단상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보려 한다. 길게 서설을 풀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한스 아이슬러라는 사람에 대해 대다수가 거의 혹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세와 노동�� 독자들에게도 한스 아이슬러는 무척이나 생소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며 번역 중간 중간에는 독자들이 거의 사전지식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주석을 달 것이다. 길어지는 도입부에 대해 또 지나치게 많은 주석으로 내용의 흐름을 끊게 되는 것에는 양해를 구한다. 아래 글은 원래는 연구소 홈페이지 미학 세미나 게시판에 가볍게 올렸던 것인데, 보완해서 글로 옮겨보라는 전성식 동지의 조언이 있어 다시 정리해보았다. 또 부족한 실력에도 감히 용기내어 이번 연재를 시작할 수 있게 자료 입수에 여러 도움을 주신 포크 매니아 심규현님, 최재완님, IDLB님, 네이버 블로거 sirio2222님 그리고 노사과연 미학 세미나 팀원들에게 연대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빈 소년 합창단 공연을 보고 난 후 노동자 합창단에 대한 고민의 단상










얼마전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이벤트를 했었다. 빈 소년 합창단이 내한을 하는데, 그 꼬마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적으면 추첨해서 당첨자에게 티켓을 준다고 하였다. 평소 음악을 좋아함에도 빈 소년 합창단의 성격이 심각하게 보수적이기 때문에 이벤트에 대해서는 그다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연구소 발행서적 홍보하는 셈치고, 서준식 선생님 ��옥중서한�� 소개글을 몇 자 적었다. 그런데 그만 당첨이 되어버렸다. 당첨을 알고 난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용산에서 학살이 벌여졌다. 1월 22일 공연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2시간을 할애하는 공연에 참석하고 나서 내용에 대한 글을 적고 공유하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세미나 팀원 ‘동’님과 함께 공연장에 같이 갔다. 티켓이 1인당 2매라 더 많은 분들과는 함께할 수 없었다.





빈 소년 합창단은 황실음악의 전통을 있는 반동의 긴 역사를 지닌 합창단이다. 한국에서 유명했던 어린이 합창단으로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이 있는데, 그 아이들도 파쇼정권의 선전홍보 수단이었다. 물론 빈소년 합창단이 더욱더 '유서가 깊은' 합창단이다. 선명회 합창단은 냉전 당시 여러 서방 제국을 방문하여 공연하여 ‘한국을 알렸’고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괴뢰 월남 정권에 가서 공연을 하기도 한 바 있다. 또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과 빈소년 합창단과의 교류도 있었다.





공연장 세종문화회관은 데모하러 갈때 아니면 갈 일이 거의 없었다. 공연 보기 얼마 전에 거기 노동조합사무실에 잠깐 들렀고, ��정세와 노동�� 2008년 12월호에서 소개한 세계장애인의 날 투쟁대회에 참석했었다. 그 전에도 그곳은 지나다니는 길목이 아니면 데모하는 장소였을 뿐이고 공연장에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하고 있던 ‘루벤스 바로크 걸작전’ 간판이 눈에 들어왔는데, 전시회 공연을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은 대다수의 한국의 무산계급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매표 창구 왼쪽에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넓은 홀에 사람들이 차근차근 모여들어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장으로 들어서면 파이프 오르간이 눈에 들어왔다. 파이프 오르간을 갖춘 공연장은 한국에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파이프 오르간 사용을 위한 대관규칙은 상당히 까다롭기에 대중음악의 경우 대관하는 것 자체가 거의 힘들다. 물론 대형교회도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경우가 있지만 비종교적 행사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객석은 3층에 대략 3천석 이상 들어가는 큰 규모였다. 이 정도 시설이면 어지간한 공연은 충분히 다 수용할 수 있어 보였다. 함께한 동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런 공연은 미리 기업스폰서 등으로 수입을 맞추어 놓고 입장권 티켓은 부수입으로 잡는다고 한다. 넓은 객석은 저와 같은 무료티켓 관람자들이 있음에도 빈자리가 많이 눈에 띄어서 경제공황의 여파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잘 갖춰진 공연장이 널리 인민들에게 개방될 날은 언제인가 싶었다. 머리 속에는 벌써 새 세계의 가극이 무대에서 펼쳐지고, 공연장을 가득 채운 인민들이 감동의 순간을 함께하고 있었다.





공연은 빈 소년 합창단 전원이 아니라 빈 소년 합창단 슈베르트 팀의 것이었다. 합창단은 걸어 오면서 익숙한 선율의 그레고안 성가를 부르며 등장했다. 내용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 스테반이 순교 직전 하늘이 열리고 예수가 야훼 오른편에 있음을 보았다는 내용의 가사라고 한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일정하게 순차적으로 상승하는 선율의 알레고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교회 음악이다. 암흑의 중세 시대 신에 대한 ‘경건’한 찬미를 위한 곡이고 규칙적인 상승과 하강이 있을 뿐 격렬한 화음의 도약은 없다. 만약에 당시 교회 음악에서 이슬람 수피교도의 카왈리4) 음악 등에서 보이는 증4도 등의 격렬한 음의 비약을 사용했다면 당장 악마의 음악을 한다고 화형을 당했을 것이다. 그 다음 곡은 칼 오르프의 까르미나 부라나 중 "운명의 여신이여"를 불렀다. 실력이 너무나 뛰어나다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후렴 “내 육신의 건강에서나 내 영혼의 덕목에서나 운명”에서는 초반 “늘 차오르다가 또한 이지러지는구나”보다 한 옥타브 높은 음역으로 올라가는 데 말끔하게 처리하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극적이며 장중한 곡을 무리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학습과 교육으로 가능했던 것이리라. 한 음악 애호가에게 동서유럽을 막론하고 유럽권 유소년 오케스트라 합창단이 한국의 시립 오케스트라 수준 이상이라는 발언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실제로도 그런지는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빈 소년 합창단의 공연을 보니 실력이  정말 뛰어났다.





지휘자 앤디 이코체아는 피아노 반주와 함께 지휘하거나 혹은 피아노로 첫 음만을 치고 아카펠라 곡을 지휘했다. 뛰어난 실력의 소년의 독창이 강조되기도 하였고, 젬베와 탬버린 같은 타악기가 활용되기도 하였다. 대충 해외 자료 번역해 만든 것 같은 안내책자가 3천원이나 했는데, 연주 곡목들은 책자에 소개된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런 경우 자막으로 곡을 소개하는 세심한 배려 같은 것은 없었다. 공연 곡들은 중세 귀신들의 노래에서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가곡들 그리고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한국의 민요에서 뮤지컬 음악까지 다양했다. 놀랍도다! 이토록 '다채로운' 보수적 레퍼토리라니.





24명의 합창단원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일본, 독일, 보스니아, 헝가리 등 비교적 다양한 국적의 구성이었고, 지휘자는 페루 출신이었다. 아리랑에서는 일본 소년의 독창부분이 강조되었다. 서구인이 보기에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같은 동양일 것이고 동양 민요는 동양인이 부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지 않았나 싶다. 이들의 한국민요 해석은 선율과 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에게 아리랑은 경기 아리랑 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도 이들에게 장단이란 개념이 없을 뿐더러 구성진 음의 떨림도 없다.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밋밋하다. 들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의 아리랑 해석이었다. 아마도 이런 식의 민요해석이 빈 소년 합창단과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과의 교류 등을 통해 서구에 널리 퍼지지 않았나 싶었다. 오스트리아 민요공연 때는 전통복장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하였고, 앙코르 공연에는 한국 관객들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동요 "곰 세마리"에 맞추어 춤도 추는 영악한 모습도 보였다.





공연 내내 저 꼬마들의 '실력'을 보며 파시즘의 위험이 다가오던 시기 독일에서 노동자 합창단을 운영했던 한스 아이슬러의 고민과 실천이 어떠했을까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정규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합창단을 운영했던 아이슬러는 노동자들의 독특한 반응과 음악에 대한 태도를 익히고 그에 주목하며 합창단을 운영했다. 그는 끊임없는 노동자와의 교류를 통해서 노동자들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합창곡을 투쟁의 무기로 사용했다. 1월 13일 “울산 미포조선 고공농성 투쟁 승리를 위한 영남 노동자 대회”에서 노래하던 노동자 합창단 동지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겨울 거리에서 열악한 앰프 장비에 맞추어 노래 부르던 노동자 노래패 동지들은 음정도 불안했고 자신감도 부족해 보였다. 이에 비해 세종문화회관은 최고의 공연시설이었고 음향도—대편성의 경우 어떨지 못 들어 보았지만—피아노 반주에 중규모 합창단 공연을 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로 훌륭해 보였다. 여기에 빈소년 합창단이라는 '명성'까지 더해졌는데 열악한 조건에서 운영되는 노동자 노래패의 모습이 겹쳐졌다. 꿈꾸는 미래는 드높지만 아직 열악한 현실에 낙관적인 상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2월 14일 토요일 2시 서울역에서 연구소도 참여하고 있는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서 싸우는 공동투쟁본부" 주체의 집회가 있었고, 이어서 비정규직 노동자 대회가 이어졌다. 민주노총 비대위 위원장인 임성규 공공운수연맹 위원장의 대회사가 있었다. 그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반성이 느껴지지 않는 사과로 연설의 도입부를 열더니, 이내 ‘애국심’을 거론하며 좌중을 아연실색하게 하였다. 경제공황 시기에 애국심을 거론하는 것은 심각히도 위험한 발언이다. 공황기는 주체의 역량과 투쟁의 과정에 따라 혁명적 정세로 이행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애국주의와 파시즘의 광풍과 세계대전으로 갈 수도 있다. 이러한 시기 중요한 역할을 해야할 노동자 대중조직 민주노총의 비대위 위원장이라는 자가 애국심을 거론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명박이 생각하는 애국심이 우리가 생각하는 애국심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느니, 만나서 경제 위기를 풀기위해 대화를 하고 싶다고 요청한다느니 발언을 하였는데 연단으로 물건이 날아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어이가 없어 분개하는 것을 넘어서 끔찍하고 두렵기까지 하였다. 이것이 1차 대전 시기 ‘제국의 전쟁을 제국에 대한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을 무시하고 제2 인터내셔널의 파산을 알린 사회 배외주의자들의 발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과오가 집대성이 되어 파시즘과 노동자 계급을 조국과 인종을 위한 전쟁으로 내몬 2차 세계 대전이라는 광기로 가득 찬 잔혹한 학살의 역사를 가져온 것이 아니었겠는가! 민주노총 관료들의 타락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것을 눈과 귀로 확인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중들이 이명박 퇴진 그 이상을 요구하는데 그 꽁무니조차 따라 가지 못하고 반동적 언사를 내뱉는 것이 현재 민주노조 운동이 처한 위기의 현실이다. 그나마 집회 중 다른 연사의 발언에는 적어도 그 정도의 스파이 같은 발언은 없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쌀쌀한 바람에 기분까지 안 좋아졌는데 다행스럽게도 희망의 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민중가수 서기상의 "노동의 새벽", "열사가 전사에게" 공연에 이어 몸 피켓을 착용한 25인 정도 규모의 혼성 합창단이 무대에 등장했다. 몸 피켓에는 “비정규직 해고금지, 비정규직 철폐/최저임금 대폭인상, 생활임금 보장”이라는 구호가 적혀있었다. 국립오페라 합창단이라 하였다. 얼마 전 민중언론 ��참세상�� 기사에서 1년 계약의 비정규직 노동자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는 합창단의 노동자가 얼마 전 해고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상황에 대해 어렴풋이 알던 터라 이들이 어떻게 집회 공연을 할지 기대가 되었다. 이들의 첫 곡은 교회 성가풍의 곡이었는데 메시지는 희망찬 분위기였다. 쌀쌀한 바람에 전문 공연장이 아닌 야외 앰프 시설에 키보드 반주로 진행하는 합창이었음에도, 이들의 실력은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될 정도로 훌륭했다. 성가풍 곡이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긴 하였는데, 한스 아이슬러도 교회 음악 전통에서 비롯한 칸타타나 오라트리오를 노동자 계급의 것으로 재전유하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 다음에 발언이 이어졌다. 초보 발언자 동지는 종이에 적은 것을 황급히 읽어 내려가며 이제까지 국립오페라 합창단 동지들이 겪은 상황과 투쟁을 알렸다. 다음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이어졌다. 이 곡은 한국의 투쟁하는 인민의 노래를 넘어서 전 세계에 널리 퍼진 자랑스러운 투쟁가가 되었는데 간결하고 인상적인 합창편곡이 돋보였다. 집회 참여 대중들은 앵콜을 연호하였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 곡의 짧고 힘찬 합창곡을 더 선사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아마도 집회 참여 대중들에게 지휘자의 동작은 아마도 일본 애니메이션 "노다메 칸타빌레"를 모체로 제작했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 지휘자의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지휘자는 적당히 위트를 섞은 큰 동작으로 지휘하였다. 지휘자에게 과도한 역할을 부여해온 역사는 서구 고전음악의 권위주의가 확고화 되어 가던 과정에 부합하지만 지금의 시기에 그 정도까지의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너무 이르지 않은가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국립오페라 합창단 동지들이 스스로 노동자로 정체성을 재규정하고 또 투쟁의 무대에서 인민대중들과 함께 호흡한 것에 연대와 지지의 박수를 보냈다. 아직은 합창곡의 내용에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인 투쟁의 목소리를 형상화해내는데 이르지 못하였지만, 현실 운동의 일보 전진과 함께 새로운 예술적 형상화와 전형이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끝까지 집회에 참석하여 몸피켓을 두른 채로 용산 희생자를 위한 모금함을 돌리던 합창단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도 자랑스런 노동자계급 운동의 전진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켜내면서 싸워가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빈 소년 합창단 공연을 관람 한 이후 이래저래 고민거리가 늘어났다. 노동자 문화예술운동의 전진은 노동자계급운동의 전진이 없이는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노동자문화예술운동의 전진은 노동자계급운동의 전진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열악한 환경에서 자신들의 예술적인 재능을 노동자계급운동의 한 걸음을 위해 헌신하는 동지들의 노력이 질적으로 도약하고 그것이 운동의 중요한 축이 될 수 있길 바란다. 마침내 우리들의 실력으로 저들의 예술적 역량을 압도하여 저들조차 노동자계급의 예술에 감동하고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그날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날이 다가 왔다라면 그때는 이미 억압과 착취의 폐절의 시기를 바로 눈앞에 남겨둔 시점일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고민 해결의 실마리를 한스 아이슬러의 음악에서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서문





형성 중인 새 세계를 위한 음악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음악 인사를 꼽아보면 한스 아이슬러는 그 중 꼭 들어가야만 한다. 우리는 현대 음악의 “고전” 작곡가를 말하면 먼저 쇤베르크(Schönberg)5), 스트라빈스키(Stravinksky), 바르톸(Bartók)6) 그리고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를 생각한다. 이들 모두는 현대 음악의 성장에서 각자 특유한 양식과 독창적인 작품으로 대표된다.





현재 한스 아이슬러에 관한 견해는 분분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의 전작품(全作品, oeuvre)이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예술적 업적이란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이슬러는 과도기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배경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노동계급 운동의 이념을 채택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일했지만 그 체제, 이데올로기와 그 음악조류를 부정했다. 그는 미적 기준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착취와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계급이 자기화할 수 있는 음악을 창작해야 하는 곤란하고 모순된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독일 민주공화국(German Democratic Republic. 동독)에서 생애 말년에 이르러서야 투쟁의 관점을 개선하는 하는 것과 그가 함께 작업했던 사회의 구성원에 대한 생각에 만족했을 뿐이다.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아이슬러를 가리켜 말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최선두주자로서, 창의력을 진보와 평화 또 새롭고 올바른 사회와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능동적으로 사용한 훌륭한 모범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의 음악은 혁명의 호민관의 불꽃같은 언어와 더불어 생생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노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총애이며 시련의 고개를 넘은 무기입니다.”





부르주아 예술 평론가는 아이슬러와 같은 예술가를 비방하거나 무시할 뿐, 그를 인정한다는 일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스 하인츠 스투켄쉬미트7)의 견해를 보면, 반공주의에 의해 시야가 완전히 가리워지지 않았던 이 누구나라면 1930년까지 아이슬러가 음악 활동에서 “둘도 없는 배역”을 연기하고 있었음을 또 “부르주아지 콘서트 프로그램에 등장하지 않았음”을, 그는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곡가이며 무엇보다 근로인민들에게 대중적이었음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음악학자는 후일 한스 아이슬러가 독일민주공화국 사회주의 음악문화의 대표자로서 “순수히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 당 미학”에 반대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역이 되었다. 그들은 위장한 반체제자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의도로 사회주의 국가 외부 서독(Federal Republic of Germany)에서 아이슬러 작품을 1970년에 등장시킨다. 브레히트 보이콧이 타파된 이후 아이슬러는 공연장에서 연주되고 토론 모임에 거론되는데, 그의 음악은 브레히트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 때문이다.8) 최근 자본주의 체제 위기에서 연유하는 제국주의 국가에서의 계급적 차이의 증대와 함께, 최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음악의 최고 위대한 거장의 작품이 부흥했다. 갑작스런 흥미의 고조로 인해 아이슬러의 작품은 부르주아 음악학의 존중을 받는다. 그들은 쇤베르크가 그를 베르크9)와 베베른10)과 함께 일컬어 “가장 재능있는 젊은 작곡가이며 내가 가르친 가장 훌륭한 제자”라고 아이슬러에게 내린 칭찬을 상기한다. 이렇게 아이슬러는 신비엔나악파11)의 주목할만한 인사가 된다. 어떤 이에게는 그의 딜레마12)는 쇤베르크에 영향받은 가치있는 작품들에 더해질 뿐이며, 그는 자신을 공산주의 선동가로 분주히 활동해야 했다.13)





아이슬러가 정치는 음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음악가로서의 그가 정치와 관련있다는 것은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는 음악을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대중으로부터 유리시키는 사회 체제는 비판해야 하며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왜냐면 그것은 인간과 예술을 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이슬러가 노동계급의 주력군과 동맹을 맺은 이유인데, 노동계급의 역사적 과제는 사회적 관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혁하며 새롭고 더욱 고결한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는 이 결정이 특별한 미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다른 기회가 없다. 우리는 부르주아지 혹은 노동계급의 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양육받는다... 제자는 스승을 따른다.”라고 아이슬러는 인정했다. 그는 단지 자신을 제자로서만이 아니라 “전할 것을 위해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노동계급의 전령으로 여겼다. “무언가를 전한다는 것, 달리는 전령이 된다는 착상은 소년 시절부터 노동계급에서 배운 진정으로 위대한 착상입니다14)... 유용한 무언가를 해야 전해질 수 있겠죠.”





그는 단지 관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시위대와 어울려 그들과 그 자신의 노래를 불렀다. 그는 아지프로 극단의 뒤뜰로 회의실로 따라갔으며, 노동자들의 회의에도 참여하고, “바리케이드의 리하르트 타우버15)인” 에른스트 부쉬16)와 함께 연주했으며, 노동자합창단과 함께 긴밀한 관계에서 작업했다. 그의 대규모 오라트리오 형식의 교육극 "조처(브레히트 각본)"17)는 1930년 12월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초연되었으며, 그때 그는 합창단에서 노래했다.





아이슬러의 노래는 모든 한계를 극복했다. 쏘련에서는 노동자의 위대한 과업을 고무시켰다.18) 중국 팔로군19)과 함께 런던, 파리, 디트로이트에서 노동자들은 아이슬러의 노래를 불렀다. 스페인 내전 시기에 아이슬러의 노래는 용기와 자신감을 고무하였다. 투쟁에서 숙련된 이 비타협적 예술가가 독일 땅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국가(國歌)20)를 작곡했다는 것은 분명히도 의미심장한 것이다. 아이슬러가 노동계급의 요구를 맑스-레닌주의의 관점에서 노래해낸 프롤레타리아 투쟁가들 이를테면 "연대의 노래(Solidaritätslied)"와 "통일전선의 노래(Einheitsfrontlied)"21)는 자유와 인간 정의의 송가인 "라 마르쎄예즈", "인터내셔널가", "동지여 대담하게 전장으로!"22)와 나란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이슬러에게 음악과 예술은 일반적으로 “계급투쟁의 교사”였다. 그럼에도 그는 음악의 기능에 관해 다양한 장르의 사용, 혹은 소재의 특성과 테마의 다양성에 있어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았다. 음악로서는 물론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아이슬러의 탁월성이다. 반면에, 다종다기한 요구는 음악가로서의 자신을 현실에 긴밀히 결부시켰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표현키 위한 자극에 스스로를 표현했다. 따라서, 그의 성악곡은 어린이를 위한 무반주 곡에서 오페라 연작가곡까지, 기본적인 행진곡에서 정교한 공연가곡까지, 긴급히 작곡한 가요(chanson)에서 거대한 형식을 요구하는 칸타나와 오라트리오에 이르기까지 걸쳐있다. 많은 곡들은 영화 음악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특히 부수음악23)으로써—이고, 특히 아이슬러의 음악이 없는 브레히트의 연극은 상상할 수 없다. 아이슬러의 교향곡과 실내악은 공연용 성악곡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공연사업을 위해 작곡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의 음악은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것일 진데, 그 이유는 도발적인 특성과 선동적이며 불온한 표현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작품이 부르주아 집단에서 그렇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다.





아이슬러는 뛰어난 역량의 작가인 동시에 이론가인 보기 드문 작곡가이다. 그는 수많은 시를 썼으며 파우스트 오페라를 위한 대본을 썼는데 아쉽게도 파우스트 오페라는 작곡할 수가 없었다.24) 횔덜린25)에서 브레히트까지 다른 시들로부터 곡의 가사를 가져오는 것은 그의 습관이기도 했는데, 그것들을 작곡에 효과적이고 영리하게 차용하고 있다. <계속> <노사과연>





 










한스 아이슬러





번역: 최상철(운영위원)































1) 옮긴이 주: "연대의 노래"는 전세계적으로 워낙 유명한 노래라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투쟁가 "다시 바리케이트 위에" 같은 곡은 "연대의 노래"의 선율을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터 베딩”은 에리히 바이네르트(Erich





   Weinert)가 작사한 곡으로 “붉은 베딩”[��ハンス․アイスラ― 人と音楽, 晶文社�� p. 88에서는  Wedding을 영어철자와 같다는 이유로 ‘붉은 결혼식(赤いウェディング)’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베딩은 베를린의 한 구역의 이름으로 현재 높은 실업률로 베를린에서 상당히 빈곤한 지역이다. 일본어판을 근거로 하고 있는 한국어판도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하여 ‘붉은 혼례식’이라고 오역하고 있다. ��음악의 혁명, 혁명의 음악 —한스 아이슬러의 생애와 음악�� p. 102]이라는 뜻이다. 이 곡은 노동자 계급의 힘찬 진군을 묘사하는 라장조의 절도있는 행진곡이다. 4분의 4박자의 곡으로 ‘걷는 속도의 4분음표’ 반주에 예기치 않은 당김음이 대조를 이루어 전개된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초창기 스윙 재즈의 기법을 행진곡과 결합해서 표현해 낸 것으로 노동자들의 공세적인 활기에 탄력성을 더해낸 작품이다. Hans Eisler Political Musici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p. 85.





   "로터 베딩"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일반화된 작법을 사용한 진부한 행진곡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당대로서는 최신기법을 반영한 획기적인 곡이다. 






2) 옮긴이 주: 한스 아이슬러의 "비밀행진(Der heimliche Aufmarsch)"은 한국에서도 "투쟁의 물결"이라는 제목의 번안곡으로 서대노예련, 노찾사 등이 불렀기에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곡은 바로 이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민중문화운동연합의 노래분과 ‘새벽’이 "오월의 노래3"을 만들 때 모체가 되었던 곡이다. 당시 새벽의 한계는 서양선율의 차용 여부가 아니라 1987년 이후 당당하게 자신의 독자적인 흐름으로 자리매김한 한국 노동자계급의 대중적 투쟁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인텔리겐챠와 노동자계급 운동의 혁명적 결합의  중요성을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는 예술운동에 있어서도 과제이며 향후 한국의 변혁운동에 있어서도 주요한 과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3) 1980년대 “음악이 흐르는 밤에”를 진행하던 디제이 성시완의 일화. 한 번은 몰래 금지곡을 내보내던 것을 방송국 관계자가 알아채고 “어제 금지곡 2개 방송하셨더군요”하던 관계자에게 “어제 방송한 곡 모두가 금지곡이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당시 방송했던 곡은 라틴아메리카 누에바 깐씨온의 대표밴드인 뀔라빠윤(Quilapayun)을 비롯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단 성시완씨는 사회주의 예술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예술을 금지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서였다. 누에바 깐씨온이 무엇인지 궁금한 분은 누에바 뜨로바 관련해서는 ��정세와 노동�� 2006년 7・8월 합본호에 실린 역자의 졸고 "쿠바 혁명과 예술 운동 —누에바 뜨로바(Nueva Trova)를 중심으로"를 읽어보길 바란다.






4) 카왈리 음악의 대표자는 파키스탄 출신의 누스라트 파티 알리 칸(Nusrat Fateh Ali Khan)이다. 카왈리 음악에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을 똑같이 신성한 것으로 본다. 이주 노조에 대한 탄압이 극악 무도하여 최근에는 거의 열리고 있지 못하지만 이주 노동자 관련 문화제에서 이와 비슷한 조류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5) 역자주: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오스트리아 출신 음악가로 한스 아이슬러의 스승이며 20세기 현대음악의 혁명이라 할만한 12음기법을 시도한 선구자이다. 12음기법(dodecaphonic 혹은 twelve-tone system)은 기존의 고전음악과 달리 조성이 없고 한 옥타브 안에 있는 반음을 포함한 12음에 균등한 위상을 부여한 작곡기법을 말한다. 기존의 화성관념에서는 불협화음은 해소(Auflösung, 불협화음을 협화음으로 이행시키는 것.)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12음기법에서는 기능화음이 유명무실하게 되고 불협화음은 해소되어야 할 필연성을 가지지 않게 되어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쇤베르크는 “불협화음의 해방”(Emanzipation der Dissonanzen)이라 칭했다. 12음기법에 대해 아이슬러는 비판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최승운 옮김, ��음악의 혁명, 혁명의 음악—한스 아이슬러의 생애와 음악��, 1987 pp. 261-273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이슬러의 글 "현대음악의 사회적 근본문제"를 보라. 앞으로 연재할 영어판 선집에도 그 글이 실려있으니 책을 못 구하시는 분은 연재를 꾸준히 읽어주시면 되겠다. 12음기법은 무조음악의 발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말년의 루카치는 무조(無調)음악의 출현과 관련하여 ‘모든 음조체계는 특정한 시대와 사회역사적 징후로서 출현한다는 사실, 각 체계의 모든 디테일들이 그 발생의 측면뿐만 아니라 작용의 측면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겪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무조음악의 출현은 ‘새로운 음조체계의 탄생’이라 일컫는다. 루카치, ��미학�� 제3권, 미술문화, 2002. p. 127.





   아이슬러는 쇤베르크의 제자였으나 후일 예술지상주의자인 스승 쇤베르크와 정치적・음악적 견해의 차이를 단호하고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연재되는 글에 한스 아이슬러 자신이 스승 쇤베르크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한 내용이 나올 예정이다. 또 앞서 소개한 책 알브레히트 베츠(Albrecht Betz)의 ��음악의 혁명, 혁명의 음악 —한스 아이슬러의 생애와 음악��을 보면 쇤베르크와 아이슬러의 관계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아이슬러는 자신의 스승과 정치적으로 단호히 결별했음에도 자신의 스승에 대한 관료주의적 비판에 대해서는 스승을 옹호하는 태도를 취했다. 물론 아이슬러는 쇤베르크의 음악을 젊은 프롤레타리아 작곡가들이 무비판적으로 들어서도, 무비판적으로 복제해서도 안 된다고 분명한 어조로 언급하고 있다.






6) 역자주: 루카치는 아도르노의 바르톸 비평을 비판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바르톸의 음악적 몰락은 전위음악에서 일탈하여 작가에게는 생소한 민중음악적 경향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루카치는 아도르노의 민중예술 개념이 추상적이고 심지어는 파시즘의 개념인 '토착적인 것(das Völkische)'과 융합될 위험마저 보인다고 비판하며 음악의 불특정한 대상에 대한 추상적 해설을 하는 형식주의자라 비판한다. 루카치, ��미학�� 제3권, 미술문화, 2002. p. 150-151. 루카치는 아이슬러-브레히트와 대립했는데 브레히트 루카치 간의 리얼리즘 논쟁은 특히 유명하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도 리얼리즘 논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문예를 매개로 한 해방투쟁의 방향을 규정하였다.






7) 역자주: Hans Heinz Stuckenschmidt. 1901-1988. 19세부터 베를린에서 음악평론가로 활동. 아르놀트 쇤베르크, 모리스 라벨 등에 관해서 평론함.






8) 역자주: 브레히트와 아이슬러와 관련해서는 음반 "Der Brecht Und Ich. Hanns





   Eisler In Gesprächen Und Liedern", Berlin Classics, Germany 2006가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수입음반이기에 독일어를 모르면 내용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다.





   역자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단언하자면 국내의 브레히트 연극은 그 음악을 제대로 구현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음악은 고사하고 그 정치적・역사적 의도조차 제대로 살렸는지, 백번 양보해서 작품에 대해 제대로 이해나 하고 상영했던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브레히트의 반(反)히틀러 풍자극 "저지할 수 있었던 아르투로 우이의 집권"은 "달수의 저지가능한 상승"이라는 제목의 ‘출세기’가 되어버렸다. 또 철저한 소부르주아 비판극 "소시민의 칠거지악"은 "도시녀의 칠거지악"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것은 한국사회의 온전하는 봉건적 가부장성 때문에 ‘유효성’이 있다고 최대한 관대하게 봐줄 수도 있겠다. 어처구니가 없는 사례가 또 하나 있다. 1990년대 말에 한국에서 공연한 브레히트의 반전풍자극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 귤에서 탱자가 된 것을 감상해 보자. 당시 이윤택이 연출하고 손숙이 주연을 하여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상연되었는데, 이 당시의 선전문구가 대략 이렇다. "러시아에는 고리끼의 ��어머니��가, 독일에는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 그리고 한국에는 이윤택의 "어머니"가 있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은 그 내용이 전혀 다르며 또 작품에서 형상화되는 어머니의 역할이 판이하게 다르다. 브레히트의 작품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자식들이 그렇게 전쟁에서 죽어갔음에도 전쟁터에서 장사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며 수용자로 하여금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다. 이런 식의 ‘낯설게 하기(Verfremdun-g)’는 이제는 극 연출의 기본적인 기법이 되고 심지어는 시트콤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이윤택의 "어머니"는 반전의 메시지와 통렬한 풍자와 수용자의 사고과정을 흔들게 하는 변증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한 기구한 여인의 한’으로 “승화”되어 버렸다. 더할 말이 없다. 당대의 아방가르드였던 브레히트의 작품은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렸지만 그 고전에 대해 이해자체도 온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허접한 패러디만이 난무하고 있다. 브레히트의 초기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어버렸으니 새삼 놀라울 것도 아니지만 해도 너무하지 않는가!





  그나마 필자가 알고 있는 긍정적인 사례는 2003년 경 사회진보연대 연극팀(?)에서 브레히트 극을 연구하고 당시 3・8 여성의 날 문화제와 대학로에서 열린 집회에서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짧은 집회극을 상영했던 정도이다. 부디 필자의 무지로 수많은 긍정적인 사례들을 모르고 있는 것이길 바란다. 1980년대 운동의 고조기에는 마당극 등 다양한 형식의 예술적 실천이 대중투쟁과 함께 결합하였다. 또 역자가 활동가로서 많은 부분 배웠던 한 선배 동지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노동자대회 전야제에는 노동자들의 노래 대회 형식의 문화마당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동자들의 대중 집회에서 문화예술은 공연은 민중가요 공연과 몸짓 공연과 정도로 획일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향후 변혁적인 노동자 대중 예술과 투쟁이 결합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9) 역자주: 알반 베르크(Alban Berg). 쇤베르크의 문하생 출신으로 아이슬러보다 먼저 활동하던 오스트리아 현대 음악가. 그의 1935년작 바이올린 협주곡은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을 발전시킨 것이다.






10) 역자주: 안톤 베베른(Anton Webern) 역시 쇤베르크 문하생 출신이다.






11) 역자주: New Vienna School. 앞서 언급한 베르크와 베베른이 대표주자로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을 이어받았다. 음렬주의와 표현주의로 이들을 규정할 수 있는데,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상당히 난해한 음악이다. 아이슬러는 이들과 궤를 달리 했다.






12) 역자주: 앞에 언급한 곤란하고 모순된 과제를 말한다.






13) 역자주: 한스 아이슬러가 자콥 세퍼,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및 쇤베르크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인용하겠다. 인용원문에서 ‘쇤베르그’로 표기된 부분은 전부 독일어식 발음 쇤베르크로 바꾸었다. 아래 인용은 한스 아이슬러가 어떻게 부르주아 음악발전의 산물을 변증법적으로 전유하여 딜레마를 극복하였는가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유추하자면 비약이 심한 것이겠지만 맑스가 헤겔의 관념론적인 변증법을 어떻게 자신의 무기로 삼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사상인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전환시킨 것과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음악운동은 프롤레타리아의 문화적 삶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현대의 음악들을 대중화해서 뒤쳐져 있는 힘이 전위들을 따라 잡을 수 있게끔 해야한다. 자콥 세퍼, 쇼스타코비치 등 훌륭한 혁명음악 작곡가가 많지만, 대다수의 생산 대중 사이에서는 현대의 노동자 음악에 대한 몰이해와 기술상의 어려움 때문에 아직껏 이들의 음악이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의 음악가들은 음악을 하는 태도에 있어서 비판적이어야 하며, 작곡가는 사회활동과 노동자계급의 투쟁과정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우리는 음악에 있어서의 지식인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정치적 사고의 방법과 혁명적 태도를 배워야 한다.





   음악일반에 내재하는 난점과 모순들은 현대적 양심이 지닌 특징적 성격인 동시에, 부르주아 음악의 탄생과정, 성장, 최고도로 발전하기까지에 이르는 과정과 실체 속에서 보여지는 특성이다. 오늘날의 음악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 두 사람이며, 쇤베르크의 12음기법과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가 끼친 영향은 후기 부르주아 양식을 사실상 대변한다. 나의 스승 쇤베르크는 현대의 가장 위대한 부르주아 작곡가이지만, 그의 음악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실상이 우리에게 보여지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그의 음악은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쇤베르크의 창조물은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현대음악 중에서도 가장 가치있는 것이며, 지난 40년 동안 그의 다재다능함은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으므로 우리들이 그의 정치적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를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찬양하게 한다. 그러나 쇤베르크의 표현주의도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도 무언가를 단단히 부여잡으려 애를 썼지만 끝내 실패에 그치고 말았고, 와해된 음소재를 한데 결합시키는데 있어서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우리 시대의 음악이 가진 의무는 음악을 사회의 보다 숭고한 형식의 하나로 인도하고 그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며, 그렇게 되면 이 혐오와 곤욕스러움과 자기 학대의 음악은 보다 즐겁고 유쾌한 것으로 될 것이다.





   출처: 대중 음악 무크지 ��무지카 노바�� 3호, "저항의 노래 예술의 대중화를 위하여 Hanns Eisler & Kathe Kollwitz", pp. 32-33.






14) 역자주: 한스 아이슬러는 김나지움 시절이던 1912년부터 진보적인 청년운동이나 중학생 사회주의 단체와 접촉하고 있었다.






15) 역자주: Richard Tauber. (1891~1948) 오스트리아의 전설적인 성악가. 테너.






16) 역자주: Ernst Busch. 아이슬러와 함께 했던 탁월한 가수. 날카롭고 카랑카랑한 금속성 목소리의 선동가수로 현재까지 많은 레코딩이 남아 있다. 사이트 유튜브(http://youtube.com)에서 그의 이름으로 검색한다면 많은 곡들을 들을 수 있다. 웹사이트 주소는 http://www.ernst-busch.de/이다.






17) 역자주: 브레히트의 희곡 "조처"는 한마당 출판사에서 나온 오제명의 ��브레히트의 교육극��에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이당시 브레히트와 아이슬러의 과제는 레닌의 이론을 프롤레타리아의 의식 속에 교훈적인 형태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희곡 "조처"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레닌의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을 사전에 학습해야 한다. 교회 음악 양식인 오라트라오 형식은 당시 다수의 노동자 합창단이 이를 고생스런 훈련을 통해 습득하고 있던 것이었다. 브레히트와 아이슬러는 이러한 조건에 대해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이용한다고 하는 변증법적인 행동을 취했다. 후에 브레히트는 교육극에 대한 저술에서 “원형의 모방은, 원형에 익숙해진 후 새로운 연기에 의해 그것을 비판하는 일과 똑같이 중요하다”라고 쓴 바 있다. 알브레히트 베츠 ��음악의 혁명, 혁명의 음악—한스 아이슬러의 생애와 음악��, 동녘, 1987 pp. 110-111. 참고로 교육극이라는 용어는 논쟁적인 것이며 혹자는 학습극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사과연 미학 세미나팀에서도 브레히트 교육극과 관련한 세미나를 진행한 바 있다.






18) 역자주: 앞서 언급한 알브레히트 베츠 ��음악의 혁명, 혁명의 음악—한스 아이슬러의 생애와 음악��는 1920~30년대 독일노동운동의 상황과 아이슬러의 음악과의 관련성을 잘 그려내고 있지만, 쏘련 사회주의와 아이슬러의 음악과의 관련성에 대한 소개는 지나치게 쏘비에트 예술과의 갈등적인 측면만을 부각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비밀의 행진, Der Heimliche Aufmarsch"은 나치의 국가와 인종을 앞세운 대쏘 전쟁은 바로 당신 프롤레타리아를 향한 전쟁이기에 노동자 농민이 무장하여 이를 분쇄하고 싸울 것을 고무하면서, 낡은 사회의 폐허에서 건설되는 사회주의 세계공화국(Sozialistische Weltrepublik)을 찬양하고 있는 곡이다.






19) 역자주: 1938년 아이슬러는 영화감독인 조리스 이벤스(Joris Ivens)가 제작한 영화 "4억"의 음악을 담당했는데 이 영화는 중국의 대장정을 다룬 것이다. 음반





    "Hans Eisler: Orchestral Works・Mathias Husmann", CPO, Germany 1993 해설지에서.





   이 기록영화는 부실한 시각자료(visual material. 한국어판 ��혁명의 음악 음악의 혁명��에서는 일본어판의 ‘写真資料’를 그대로 옮겨 사진자료라고 했는데 독일어 원문을 대조해보지는 않았지만 영문판을 살펴보고 또 영화제작이라는 정황을 고려할 때 시각자료가 엄격한 번역일 것이다.)에 근거한 것이기에 많은 부분을 아이슬러의 음악에 의존하였다. 중국의 음색과 리듬을 흉내내지 않고서 동북아시아의 분위기를 표현해낸 것이 이 영화 음악의 성과이다. 자세한 내용은 알브레히트 베츠 ��음악의 혁명, 혁명의 음악 —한스 아이슬러의 생애와 음악��, 동녘, pp. 175-176(영어판은 Hans Eisler Political Musici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pp. 172-173)을 보라.






20) 역자주: 폐허에서 부활하여(Auferstanden aus Ruinen). 작사자는 요하네스 로베르트 베허(Johannes Robert Becher; 1891-1958). 3절로 구성된 혼성 제창곡. 3분 남짓한 길이로 수려한 화성이 인상적이다. 인터넷 상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가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유튜브(http://youtube.com)에서 ‘national anthem





   of DDR’ 정도로 검색하면 들을 수 있다. 다음이나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에서 ‘동독국가’로 검색하면 번역된 가사 내용도 볼 수 있다.






21) 역자주: “연대의 노래”는 브레히트와 공동작업으로 빛난 대공황 시기 정치선동 영화 "쿨레 밤페 혹은: 세상은 누구의 것인가?(Khule Wampe oder: Wem gehört die Welt?)"에서 사용되었다. 영화는 제5회 서울 국제 노동 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다. 다만 아쉽게도 상영 당시에 온전한 한글 자막으로 상영되지 못하였다. ��영화판의 적들"에 시나리오를 충실하게 번역하여 수록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길 바란다. 기회가 된다면 온전한 한글 자막으로 재상영해야 하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통일전선의 노래는 이미 ��정세와 노동�� 2008년 5월호, pp. 6-9에서 소개한 바 있다. 둘 다 각국의 언어로 널리 불린 국제적인 투쟁가이다.






22) 역자주: 영어판 선집에는 “Workers, Unite for the Battle(노동자여 전투를 위해 단결하라)!”로 표기되어 있고 실제로 이렇게 영역된 가사로 나온 악보가 존재한다. 악보를 보시길 원하는 분은 검색엔진 구글에서 ‘Workers, Unite for the Battl-e’로 검색하면 pdf파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제목은 “Смело, товарищи, в ногу” 러시아어를 영어로 직역하자면 “Bravely, comrades, to arms”이다. 이곡은 레오니드 뻬뜨로비치 라딘(Леонид Петрович Радин)이 1896년(혹은 1897년. 러시아에서 이 당시는 차르 니꼴라이 2세 치하에서 노동운동이 격화되는 1900년도를 예비하던 시기였다.)에 작사했으며, 선율은 전래 러시아 민요에서 가져온 것이다. 절제된 감정으로 부르는 힘있는 투쟁가이며 혁명과정에서도 러시아 인민과 함께 한 곡이다. 위에 열거된 다른 곡들처럼 각국 언어로 널리 불렸으며, 현 러시아 대중음악계에서도 이 곡을 재해석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http://www.marxists.org/history/ussr/sounds/lyrics/smelo-tovarishchi.htm에서 가사를 볼 수 있으며 곡을 들을 수 있다.






23) 역자주: incidental music. 이 음악은 극과 긴밀히 결부된 것으로 고대 그리스 극에서 연원하며 중세 예배극(liturgical drama)로 전통이 이어진다. 셰익스피어의 ��12야��, 괴테의 ��에그몬트��에 붙인 베토벤의 곡에서 근대적 예를 볼 수 있다.





   Willi Apel, Harvard Dictionary of Music, Second Edition, Revised and





   Enlarged, London, 1970. p. 405





   아이슬러는 특히 히틀러 집권 이후 망명시기에 많은 영화 음악을 작곡했고 아도르노와 함께 Composing for the films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또 아도르노와 함께 현악 4중주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아이슬러의 음악관을 아도르노류와 등치하려 해서는 안 된다. 아이슬러가 음악 활동의 초기와 미국 망명기에 아도르노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2차 세계대전 후 아도르노를 분명한 어조로 비판한다. “덜떨어진 맑시즘(half-baked Marxism)따위로 모든 청산주의적 경향을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저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특징이다” Hans Eisler Political Musici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p. 244. 한국어 판 ��혁명의 음악 음악의 혁명��은 238쪽을 보면 되는데 독어판과 대조를 해봐야겠지만 중역을 통한 오역이 심한 것 같다.






24) 역자주: 아이슬러가 요한 파우스트 대본을 쓴 것이 1953년이다. 이윽고 이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고 논쟁이 치열해지자 아이슬러는 요한 파우스트에 대한 작곡을 포기한다. 이와 관련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예술가에 대한 제재이고 검열이다라는 식의 속류적인 비난은 거부한다. 아마도 이에 대해 온전히 평가를 내릴 수 있으려면 맑스-엥엘스 대 라쌀레 간의 ‘지킹엔 논쟁’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제 논쟁의 역사에 대한 전반적이고 종합적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고 있으나 당대에 아이슬러에 대한 비판은 20세기 사회주의가 관료주의를 극복해내지 못한 한계로 봐야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당대의 아이슬러의 대본이 새로운 사회주의적 전형을 창출하는데 부합했던 것인지도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요한 파우스트 논쟁과 관련한 책으로 한스 분게가 편집한 단행본 Die Debatte um Hanns





   Eislers "Johann Faustus" : eine Dokumentation만 해도 400쪽에 가까운 분량이고 아직 입수조차하지 못하였다. 추후 보강된 학습을 통해 차근차근 결론에 도달하려 한다.






25) 낭만파 시인 횔덜린에 대해서는 3장의 LP로 구성된 아이슬러의 작품집 중 제 6면을 들으면 된다. "Hanns Eisler Kassette, Wergo, Wer 60064, 1975 Side 6"에 한스 분게와 한스 아이슬러의 육성 그리고 실제 횔덜린의 시를 차용한 가곡으로 14분 44초가 구성되어 있는데 아직 독일어 실력이 너무나 부족한 관계로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다. 소장 중인 엘피를 파일로 변환했으니 혹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항상 기다리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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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 한스 아이슬러 선집: 음악의 반란자(1)[1] 한스 아이슬러 2009-03-25 4285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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