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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진보전략회의 ‘현 시기 세계 경제위기의 성격과 전망’ ㅡ김수행 교수의 발언에 대한 소감
글쓴이 김철|회원 E-mail send mail 번호 111
날짜 2009-02-25 조회수 2902 추천수 128
파일  1235488524_김수행.hwp

  













이하 글은 2009년 1월 9일 진보전략회의 쟁점토론회에서의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발언에 대한 소감이다





















이하 글은 2009년 1월 9일 진보전략회의 쟁점토론회에서의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발언에 대한 소감이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연합뉴스의 토론회에 대한 기사로부터이다.기사는 다음과 같은 표제로 시작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자, 위기토론회”경제위기는 신자유주의 부작용 탓” 그리고 기사는 말미에서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꼽히고 있는 김수행 교수”(원문대로ㅡ인용자)의 위기극복 대안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 “케인스주의는 경기 순환을 안정시키고 완전 고용을 실현하기 (때문에 그러한 목적을ㅡ인용자) 위해서는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간단히 말해 “마르크스 경제학자, 위기토론회”에서 현 “경제위기는 신자유주의 부작용 탓”이라고 진단했는데, 그 근거로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김수행 교수의 발언을 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김수행 교수의 결론은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이고 따라서 은연 중에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이 그러하다고 암시하고 있다. 물론 박성민 기자의 기자적 양심은 정성진교수의 반론을 두 줄로 인용함으로써 구제되었다. 기사 자체의 논리전개는 둘째 치더라도, 이번 공황을 둘러싸고 케인즈주의적 대안이 횡행하는 가운데, 기사가 밝히는 대로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꼽히는” 김수행 교수의 케인즈주의적 경향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하 인용은 모두 김수행 교수의 토론회에서의 발언과 김수행 교수 번역의 ��자본론��에서이다. (표기된 페이지는 모두 ��자본론��(한글 개정판)의 것이다.)















1. 단계론의 문제 또는 현대자본주의 기점에 관한 견해










김수행 교수는 말한다.










현대 자본주의라고 하면 시대 구분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을 놓아야 단계든 뭐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자본론��3권 47장에 자본주의 지대의 기원이 있다. 맑스는 봉건사회 단계 구분을 했다. 노동지대의 단계, 생산물 현물지대의 단계, 화폐지대의 단계로 구분했다. 봉건사회가 자본주의사회로 넘어왔다는 거다. 자본주의로 넘어오는 과정에 농노들의 잉여노동 취득이 어떻게 변화했느냐로 단계를 구분했는데, 자본주의 단계를 구분하려면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 대한 생각이 없으면 단계 구분은 의미가 없다.










기대가 된다. 그런데 이후 사회에 대한 생각이란 뭘까? 김수행 교수의 말을 따라가보자.










예를 들면 경쟁자본(무정부성), 독점자본(조직화), 국독자(더 조직화), 사회주의(계획경제) 이거는 엥겔스의 안티뒤링에서부터 스탈린(과 그 이후)의 ‘경제의 계획화’ 쉐마를 따른 것이다. 이런 건 싫다. (틀렸다가 아니다ㅡ인용자).










그래서 새로운 단계론의 기준을 정하는데,










자본주의 이후 세상은 노동해방, 인간해방이라고 보면 단계 구분이 달라진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민주주의, 그래서 인민들의 필요 욕구를 충족하는 단계라고 이야기하면 충분하다. 내 생각은 지금의 자본주의는 아직도 자본가들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라고 이야기해도 문제가 없다고 본다.










“자본주의 이후 세상은 노동해방-인간해방이기 때문에 단계구분은 달라지는데”, 그 내용은 자본주의에 단계란 있을 수 없고 오직 하나의 자본주의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면 김수행 교수에게 있어서 단계구분의 기준은 노동해방-인민해방이고 그것은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민주주의의 실현인데,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여전히 이윤추구의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수행 교수에게는 해방의 미실현과 실현, 각 민주주의의 미실현과 실현, 자본의 이윤추구와 이윤추구의 폐절이 같은 의미이다. 역사의 진전에 대한 이러한 이분적, 따라서 비약적 인식은 그 자체로 노동계급운동의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고 혁명에 대한 공상적 관념이다. 또 그러한 계급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과 혁명에 대한 공상적 관념은 정반대의 결론, 즉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예비한다. 뒤에서 보듯이 김수행 교수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그의 이론적 정치적 견해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김수행 교수는 다시 말하길.










단계구분하려면, 자본주의사회를 어떤 사회로 바꾸겠다는 노력하겠다든지 그런 표현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만약 자본주의 이후 사회가 노동해방-인간해방 사회라 치면, 그리로 노력하는 과정에 어떤 식으로 구분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자꾸 생각해내는 것이 옳은데, 내가 볼 때 그런 방향으로 봐서는 이 자본주의 자체가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계론을 설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앞으로가 중요한 것이라는 정치적 발언인데, ‘노동해방-인간해방’이 기준이라면 당연한 말이다. 왜냐면 앞으로의 세상에는 단 두 단계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계급사회와 공산주의! 그런데 약간 주의할 점은 바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구분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자꾸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대목이다. 다음 사회로의 이행과정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앞으로 우리는 김수행 교수의 실용주의적 이행론을 보게 될 것이다. 덧붙여 이상의 의미에서 초두에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3권 47장의 자본주의적 지대의 기원에 대한 소개는 우리에게 그가 ��자본론�� 번역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킬 뿐이고, 그의 논리를 따르자면, 맑스도 부질없는 일을 한 것이다. 김수행 교수의 논리대로면, 봉건제는 오직 하나의 봉건제일 따름이며, 따라서 그러한 지대(잉여노동) 수탈 방법의 변천에 대한 분석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계론 또는 현대자본주의의 기점 문제는 현재 공황에 대한 역사적 궤적을 쫒음으로써 현재의 자본주의의 진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이론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정세판단을 위한 기본적인 요건이다. 맑스는 ��자본론��3권 47장에서 노동지대, 상품지대, 화폐지대가 두 가지 ‘동일한 토대’, 즉 ‘직접생산자의 토지에 대한 점유’와 ‘강제적인 잉여노동’이라는 토대에서 동일하지만(3권 p. 959, 960, 968)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그것의 수탈 방법의 차이를 나타내며, 화폐지대는 이후 자유로운 농민적 소유와 차지농에 의한 지대로 변하고, 이는 일부 부유한 지대지불농민의 자본가로의 전환과 무산의 일용노동자계급으로의 역사적 분화로 이어진다고 분석하였다.(3권 pp. 969~970) 이것이 맑스의 단계구분이다. 물론 맑스의 단계구분이 우리의 현 시기 자본주의 규정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봉건제 생산양식의 구체적 분석(생산력 발달에 따른 봉건제의 구체적 변모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그 객관적 조건에서 조망하였다는 점은 우리의 단계구분(생산력 발달에 따른 자본주의 축적 구조의 변모)과 동일한 방법이다.










단계론과 관련하여 정성진 교수와 채만수 선생이 공황주기에 대해 토론하던 중, 김수행 교수는 말한다.





 





장기파동 50년 주기 25년 정도는 호황 25년 불황 이런식으로 장기파동에 대한 이론은 콘트라티에프, 슘페터는 기술혁신을 가지고 그랬고, 만델은 이윤율변화를 가지고 그랬고, 지금 내가 보기에 왜 하필이면 주기가 50년이어야 되느냐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하나도 없다. 경험상으로 보니까 이렇게 됐고, 저렇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라는 것이 그런 긴 50년을 주기를 가지고 반복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개념을 도출하고 그 개념의 전개로서 이론이 성립한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올바로 정립된 이론은 현실을 잘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의 구체적 전개까지를 예언하는 것은 아니다. 맑스의 공황 주기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자.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 뒤에만, 자기영속적인 반복되는 순환...이 시작될 수 있다. 즉 기계공업이 확립되어 국내의 생산 전체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 기계공업의 덕택으로 해외무역이 국내 상업을 추월하기 시작했을 것, 세계시장이 신대륙ㆍ아시아ㆍ오스트레일리아의 광대한 영역을 차례차례 포섭해 버렸을 것, 그리고 끝으로 이러한 순환들의 주기는 10~11년이었지만, 이 주기가 불변이라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오히려 반대로 지금 설명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법칙들로부터 우리들은 순환의 주기는 가변적이며 또 점차로 단축되리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강조는 인용자)(1권 p. 864).










강조된 부분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경험적으로 지금의 주기는 10~11년 이었지만, 주기는 불변의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 법칙에 따르면 가변적이고 점차 단축될 수도 있다. 우리가 강조할 바는 맑스의 자본주의적 생산 법칙의 전개가 10년 주기 그 자체의 해당 연수(10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 이론적 수준의 분석은 기존의 경험된 10년 주기에 대한 연장 또는 단축의 관계를 예측할 뿐이라는 점이다. 김수행 교수는 경제학자들에게 예언자가 되라고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자는 동시에 무지(無知)자이지 않은가.










김수행 교수는 crisis를 공황이라고 번역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둘째로, ��자본론��에는 늘 이야기하는 것이 1825년부터 10년 주기의 산업 순환이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조심할 게, 처음에 나오는 회복국면이고 호황, 투기적 활황이고 그 다음에 economic crisis라고 했다. 그 다음이 depression이라 했다. 회복이라 했는데, economic crisis 번역(일본 사람들도 그랬고)을 공황이라 했다. 맑스가 살던 시기에는 금본위제도였기 때문에 투기적 활황이 와서 물건이 많이 생산되고 우리가 말하는 과잉생산되서 나중에 이야기할 것 같으면 그리고 물건이 안 팔린다 말이야 이거에요. 물건이 안 팔리면 기업이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넘어지는데, 넘어져야 되는데, 뭐 신용경색이라든지 화폐가 부족한기라 그런데 그 당시에는 금본위제였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낼 수가 없다고, 돈을 찍어내서 공급해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내려갔다 하면, 채무를 못 갚는다 하면 기업은 파산하는 것으로 연결이 되었다. 이 말이야. ... 사실 구별하려는 것은 crisis가 위기이고 crash가 공황이다. 위기는 병이 있으면 죽을지 살지 기로에 있는 것. 근데 맑스 시기에는 위기라는 것은 살아날 가망이 없이 그대로 crash로 넘어갔다. 경제위기인데 정부가 돈을 막 풀어가지고 호황으로 다시 갈 수 있느냐 없느냐 그 기로가 위기라는 개념이고(강조는 인용자) 확 빠져버렸으면 이건 돈을 아무리 풀어도 안 되는 공황국면이다. 이렇게 갈라했으면 좋겠다 생각. 1945년 이후 정부 재정금융정책 많이 해서 맑스 생각처럼 기업의 채무를 갚지 못하고 은행이 부실채권이 많아서 망하고 이러면 망하질 않고 정부가 돈을 확 풀어 버리니까 그냥 넘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주기라 하는 것이 옛날의 10년 주기가 아니고 주기가 자꾸 연장이 되든지 그런 문제가 생겼다. 이렇게 봐야되고 그래서 미국 같은 경우 2006년 하반기부터 위기 2008년 3월부터 공황에 빠졌다. 이렇게 보고 있다.










이에 대한 채만수 선생의 반론(“crisis, crash, panic 등은 같은 현상의 다른 표현이며, 이는 서구 사람들의 언어습관에 따른 것이다. 또한 불환제에서 공황시 유동성부족에 대한 국가의 지불수단 제공이 공황을 누그러트리는데 상대적 영향에 대한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그것이 오늘같은 상황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금본위제 하에서의 영국에서 금준비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굉장히 엄격하게 은행권 발행을 제한했던 1844년 필 은행법같은 경우에 경제위기가 닥치면 은행법 정지하고 지원한다. 상대적인 차이는 있지만 절대적으로 구분할 근거는 없다”)이 제기되자 김수행 교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1945년 이후 주기가 연장이 되고 이런 것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할까 이런 생각에서. 정부개입 주기가 연장이 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다.










우선 채만수 선생이 예로 들기도 했던 1844년 필 은행법의 경우를 보자. ��자본론��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1844년 은행법은 잉글랜드은행을 발권부와 은행부로 나눈다. 발권부는 보증준비(그 대부분은 국채)와 총금속준비금를 보유하며, 두 가지의 총액에 해당하는 은행권을 발행한다. 이은행권은 국민의 수중에 있지 않는 한 은행부에 남아있어 은행부의 현금준비금을 이룬다. 발권부는 국민에게 은행권과의 교환으로 금을 주고 금과의 교환으로 은행권을 준다. 국민과의 기타 모든 거래는 은행부의 담당이다. ... 공황이 닥치면 해외로의 격심한 금 유출이 발생하는 시기가 있으며, ... 해외로 5£의 금이 유출될 때마다 5£의 은행권이 회수되며, 이리하여 유통수단의 양은 그것이 가장 많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감소되는 것이다. ... 지금까지 두 번 즉 1847년 10월 25일과 1857년 11월 12일에 공황은 이러한 절정에 도달하였으며, 정부는 1844년의 은행법을 정지시킴으로써 잉글랜드은행을 은행권발행의 제한으로부터 해방(강조는 인용자)시켰는데, 두 번 모두 이것으로 공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3권 pp. 683~685)










채만수 선생의 반론에 대한 김수행 교수의 답변은 정부개입으로 공황의 주기가 연장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기의 연장과 공황의 발생 그 자체를 분할해서 생각해야 한다. 주기가 연장된다고 해서 공황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김수행 교수의 처음 발언은 금본위제 하에서 투기적 활황에서 바로 공황으로 가는 과정이 불환제로 바뀜에 따라 위기와 공황으로 분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기의 연장(예컨대 위기의 항상화나 연장 등에 따른 주기의 연장)에 대한 견해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과잉생산에 의해 위기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정부의 개입에 의해 공황국면까지 가지 않고 호황국면으로 갈 수 있다는 견해다. (인용문의 강조 참조). 따라서 그의 논리에 따르면 위기 시에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서 망하려던 기업이 망하지 않고 살아남아서 호황이 오는데, 그러다가 다시 과잉생산으로 위기가 오면 이것은 또 다시 중앙은행의 지불수단 공급으로 무마된다.1) 그의 논리를 따르자면, 위기는 올 수 있어도 중앙은행의 화폐금융정책만 적절하다면 공황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다만 호황과 (공황이 아닌) 위기만을 반복할 것이다. 또 현 시기 공황이 공황으로까지 치달은 것은 미국 정부의 2006년의 위기에 대한 잘못된 화폐금융정책의 탓이다. 이러한 김수행 교수의 견해에 대해 ‘자본주의는 과잉생산에 의해 경제위기에 도달할 수 있지만 정부가 화폐금융정책을 잘 하면 다음 호황으로 향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 영구번영론’이라고 이해한다면 완전한 왜곡일까?2)















2.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










김수행 교수는 말한다.










3권 3편에서 이윤율이 저하되는 경향, 왜냐하면 자본가들이 상대적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 점점 더 노동절약적인 기술 생산방법을 도입하니까 이윤율이 저하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올라가서 이윤율이 저하되는 경향이 있다. 상쇄요인에 가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그런 것은 착취하는 율이 자꾸 커지는 것이 아닌가, 생산재와 소비재의 값이 떨어져서 적은 금액으로 동일한 이윤을 얻을 수 있어서 이윤율이 올라간다. 두 가지를 모두 말한다. 항상 이윤율을 저하시키는 경향과 상승시키는 경향 두 가지가 있는데, 이윤율을 저하시키는 경향이 이윤율을 상승시키는 경향을 항상 이긴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저하하는 경향이 생기고, 상승하는 경향이 생기면서 나아가고, 그런 과정에서 상승시키는 경향과 저하시키는 경향이 서로 충돌해서 어느 경우에 공황을 만들어 낸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예를 들면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이렇게 내려왔다는 것을 맑스가 예언을 했다든지 예측을 했다든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본가들이 상대적 잉여가치(강조는 인용자)를 얻기 위해서 점점 더 노동절약적인 기술 생산방법을 도입”한다는 발언은 청중 김○○씨의 질문에 대한 응답에서도 다시 한번 반복되는데, ��자본론��번역자에 대하여 이런 기본적인 내용을 지적하려니 참으로 계면쩍다.(김수행 교수가 편의상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여기고 싶다. 물론 그냥 넘어가지는 않는다.) ��자본론��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이에 대응해 노동일의 두 부분들의 길이 변화로부터 생기는 잉여가치를 나는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감소함에 따라 저하하는데, 필요노동시간의 총감소량은 상술한 상이한 생산부문들 전체에서 일어난 노동시간 단축의 총계와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일반적 결과(노동력의 가치저하ㅡ역자 삽입)를 마치 각 개별 경우(자본ㅡ역자 삽입)의 직접적 결과이며 직접적인 목적처럼 취급한다. 그렇지만 개별 자본가가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켜 예컨대 속옷의 가치를 저하시킬 때, 그는 결코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켜 그만큼 필요노동을 단축시키려는 목적을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강조는 인용자) ... 상품의 현실적 가치는 각각의 개별적인 경우에 실제로 소요되는 노동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따라서 만약 새로운 방법(노동생산성이 더욱 높은 생산방법ㅡ인용자)을 채용하는 자본가가 자기의 상품을 12원이라는 사회적 가치로 판매한다면, 그는 그 상품을 개별 가치보다 3원 더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되며, 따라서 3원의 특별잉여가치를 실현하게 된다. ... 이러한 잉여가치의 증대는 ... 자본가 자신이 가지게 된다. 따라서 각 개별 자본가들은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상품가치를 저렴하게 하려는 동기를 가지게 된다. ... 그러나 새로운 생산방식이 일반화되고 그리하여 상품의 개별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차이가 제거되자마자, 이 특별잉여가치는 소멸한다.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의 법칙은 ... 경쟁의 강제법칙으로 작용해 그의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산방법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전체를 거쳐 최후로 일반적 잉여가치율(상대적 잉여가치ㅡ인용자)이 영향을 받는 것은,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생활필수품의 생산에 기여하는 산업부문에서 일어나서 노동력의 가치를 구성하는 상품들을 값싸게 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강조는 인용자)(1권 pp. 427~432)










간단히 말해 상대적 잉여가치의 증대는 상품의 개별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특별잉여가치를 위한 개별 자본가의 노동생산성향상이 경쟁에 의해 일반화된 결과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 잉여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특별잉여가치를 위해서, 또는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이다.(자신의 기계가 노동생산성이 떨어져서 상품의 개별가치가 사회적 가치보다 큰 경우)










청중 김○○씨의 반론(“맑스는 자기 진술의 일관성을 위해 이윤율저하는 경향 tendency, 상쇄요인은 요인 factor로 보았다. 상쇄요인이 이윤율 저하 경향을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요인자체가 경향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결론으로 자본주의의 위기나 불황은 필연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상쇄를 경향으로 보면, 자본주의 위기를 부정할 수 있는 것까지 갈 수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하여 위의 발언을 반복하는 데, 조금 다른 표현이 들어있으니 들어보자.










이윤율저하경향의 법칙이라 할 때, 상쇄요인/저하경향, 그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왜냐면, 자본주의에서는 상대적 잉여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새로운 기계를 자꾸 도입한다. 그래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올라간다. 당연히 착취율이 올라간다. 따라서 두 가지는 동급이다. 그래서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저하한다고 하면 문제가 뭐냐 하면, 가만히 놔두면 자본주의가 망한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가만히 놔둔다고 이윤율이 자꾸 이렇게(전체적으로 하향하는 진동곡선을 손을 들어 그리며ㅡ인용자) 떨어질 턱이 없다. 이윤율도 실제로 자기 사이클을 타고 간다.










자본론이 말하는 법칙 그 자체를 보자.










더욱이 자본구성의 이러한(v는 100으로 일정한데, c는 50, 100, 200, 300, 400으로 증가하며, 따라서 이윤율 p'은 66.6%, 50%, 33.3%, 25%, 20%로 감소하는 경우ㅡ인용자) 점진적인 변화가 어떤 개별 생산분야의 특징이 아니라 거의 모든 생산분야 또는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분야에서 일어나며, 따라서 그 변화가 그 사회의 총자본의 평균적 유기적 구성을 변화시킨다고 가정한다면, 가변자본에 대비한 불변자본의 이러한 점차적 증가는―잉여가치율 또는 자본의 노동착취도가 불변이라면―필연적으로 일반적 이윤율의 점차적인 저하를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달과 더불어 불변자본에 비하여, 따라서 또 운동되는 총자본에 비하여 가변자본이 상대적으로 감소한다는 것은 이미 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하나의 법칙(강조는 인용자)이다.(3권 p. 254)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달에 따라 사회의 총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져서 일반적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을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법칙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윤율 저하법칙은 왜 저하경향의 법칙이 되는가.










이 장의 첫 부분에서 제시한 가상적인 순서(바로 앞 인용문에서 인용자가 삽입한 바)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현실적 경향을 표현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불변자본에 비해 가변자본을 점점 더 감소시킴과 함께 총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점점 더 고도화시키는데, 이것의 직접적인 결과로 잉여가치율이나 노동의 착취도가 불변이거나 심하게는 증대하는 경우에도 일반적 이윤율은 계속 하락한다.(이 하락이 왜 이와 같은 절대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점진적인 하락의 경향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해서는 뒤에서(제14장에서ㅡ역자, 14장은 “상쇄요인들”ㅡ인용자) 설명할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일반적 이윤율의 점진적 저하경향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의 점진적인 발달의 표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특유한 표현―에 불과하다. (3권 p. 255)










상쇄요인들이 작용하여 그 일반법칙의 효과를 억제하고 취소하여 그 법칙에 하나의 경향일 뿐이라는 성격을 부여하고 있음에 틀림없는데(강조는 인용자),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 이윤율의 저하를 경향적 저하라고 묘사한 것이다.(3권 p. 277)










이윤율의 저하법칙은 상쇄요인들에 의해 경향적 저하로 바뀐다. 김수행 교수의 경향 대 경향의 관계도, 청중 김○○씨의 경향 대 요인의 관계도 아닌 법칙 대 요인의 관계로부터 관철되는 경향이다. 그렇다면 왜 ��자본론��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라 하여 저하경향을 법칙이라 하였는가. 김수행 교수는 유기적 구성이 올라가면 착취율이 올라가기 때문에 이윤율저하와 착취율 상승은 동급이라고 말하였다. 이윤율은 자본의 총가치에 대한 이윤율이며, 잉여가치율은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율이다. 현재의 논의 수준에서 잉여가치량과 이윤량은 동일하다고 가정되고 있지만, 이윤율과 잉여가치율은 같은 것이 아니며, 김수행 교수의 ‘동급’표현은 착취율의 증대가 이윤율의 저하를 완전히 취소할 수 있다는 양적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3권 p. 255의 인용문에서 인용자가 강조한 바와 같이 “잉여가치율이나 노동의 착취도가 불변이거나 심하게는 증대하는 경우에도 일반적 이윤율은 계속 하락한다.” 또 ��자본론��은 명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잉여가치율의 증대는 ... 잉여가치량을 결정하고 따라서 또 이윤율을 결정하는 데 공헌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그렇지만 이 요인은 일반법칙(이윤율의 저하ㅡ역자)을 폐기하지 못하며, 그 법칙을 하나의 경향으로서, (강조는 인용자) 즉 그것의 절대적인 관철이 상쇄요인들에 의하여 저지되고 지연되며 약화되는 법칙으로서 작용하게 만든다.(3권 p. 280)










따라서 착취율(잉여가치율)의 증대는 이윤율 저하법칙과 동급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의 상쇄요인에 불과한 것이다. 김수행 교수는 또 “생산재와 소비재의 값이 떨어져서 적은 금액으로 동일한 이윤을 얻을 수 있어서 이윤율이 올라간”다고 말하였다. 소비재의 경우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증대를 말한다.3) 자본론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의 강화는 가변자본에 비한 불변자본의 증가, 이리하여 이윤율의 저하를 내포하는 측면들이 많은데, 예컨대 한 노동자가 더 많은 기계를 돌봐야 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 경우―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기여하는 대부분의 방식에서 그러한 것처럼―잉여가치율을 증대시키는 바로 그 원인들이 또한, 총자본사용액이 주어져 있다면, 잉여가치량의 감소를 내포할 수 있다. (강조는 인용자) ...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방식들은 대체로 주어진 노동량 중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부분을 잉여가치로 전환시키는 것, 그리고 투하자본에 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노동을 사용하는 것에 근거하기 때문에, 노동의 착취도를 증대시켜주는 바로 그 원인들이 총자본으로서는 이전과 동일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강조는 인용자)는 것은 이미 지적한 것인데, 이것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의 진정한 비밀을 형성한다.(3권 p. 278)










김수행 교수는 소비재가 값싸진다는 것만을 보았지만 맑스는 그 뿐만 아니라(아래의 3권 p. 274 인용문 참조)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도 주목하였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증대는 그 자체로는 이윤율을 높이지만 그것이 달성되는 생산의 현장에서는 동시에 유기적 구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총자본의 양이 주어진 경우 가변자본의 양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높아진 잉여가치율에도 불구하고 잉여가치량은 줄어들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잉여가치량 자체는 증가한다.4) 이번에는 생산재, 즉 불변자본 요소들의 저렴화가 과연 이윤율저하 법칙을 취소하는지 보도록 하자.










동일한 잉여가치율 그리고 불변의 노동착취도가 저하하는 이윤율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불변자본의 물량이 증가함에 따라 비록 동일한 비율은 아닐지라도 불변자본의 가치, 따라서 총자본의 가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강조는 인용자) (3권 p. 254)










가변자본에 비해 불변자본의 양을 증대시키는 바로 그 발전이, 노동생산성의 증대에 의해 불변자본 요소들의 가치를 감소시키며, 그리하여 불변자본의 가치가, 비록 끊임없이 증가하기는 하지만, 그것의 소재량(즉 동일한 수의 노동력에 의하여 운동되는 생산수단의 소재량)과 동일한 비율로 증가하는 것을 저지(강조는 인용자)한다. 어떤 경우에는, 불변자본의 요소들의 양은 증가하면서도 그것들의 총가치는 불변이거나 심지어는 감소하기도 한다.(강조는 인용자)(3권 p.282)










김수행 교수는 인용자가 강조한 바, 불변자본의 총가치의 불변 또는 감소라는 특수한 가능성을 일반적 가능성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론��이 밝히는 바는 일반적인 경우에 생산력의 발전은 불변자본의 소재량의 증대에 비해 그 가치량이 같은 비율로 증대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증대하며, 특수한 경우에는 그 총가치가 불변이거나 감소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독자제현은 문맥으로 판단하기 바란다. 같은 예는 아니지만 이러한 특수한 경우에 대한 맑스의 특기할 만한 표현이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즉, 이윤율의 저하를 방해하는 위와 같은 요인들(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비율에는 당분간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생산방식의 개량이나 생산에 대한 인위적인 제약이 사라짐으로써 특수한 이윤을 얻는 경우ㅡ인용자), ㅡ물론 그것들도 결국은 이윤율의 저하를 더욱 촉진할 것이지만(강조는 인용자)ㅡ은, 예컨대 발명이 보편화되기 전에 그것을 이용하는 자본가는 일시적이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잉여가치의 증대 ...를 얻게 되는 경우를 포함하는가 포함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대답해야 한다. (3권 p. 279)










맑스는 특수한 경우로서 특별잉여가치와 같은 특수한 경우들에는 어떠한가라고 묻는다. 물론 잉여가치의 증대에 기여한다. 그러나 그것들도 결국은 이윤율의 저하를 더욱 촉진하는데, 이는 두 가지 측면이다. 하나는 해당 부문 또는 자본은 그 특수한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최대한 이 특수한 잉여가치를 더 누리려고 생산을 확충하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 자체가 일반화되면 또 다시 이윤율 저하의 일반적 조건이 되어버린다는 점에서다. 따라서 불변자본 저렴화의 특수한 경우도 생산의 일반적 확대의 지렛대로 이용될 수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결국 이윤율 저하를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덧붙여 “생산재와 소비재의 값이 떨어져서 적은 금액을 동일한 이윤을 얻을 수 있어서 이윤율이 올라간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생산력 발달에 따른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고도화, 따라서 생산규모의 거대화를 간과한 수리적 사고에 불과하다. 다음의 맑스의 주의를 보자.










잉여가치율의 상승이 불변자본(특히 고정자본)요소들의 현저한 가치감소와 결부되는 경우에는, 이윤율이 도리어 상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윤율은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장기적으로는 저하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개별상품의 가격하락 그것만으로는 이윤율에 관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강조는 인용자) 모든 것은 생산에 참가하고 있는 총자본의 크기에 달려있다.(3권 p. 274)










이로써 이윤율의 저하가 경향적 법칙으로 관철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김수행 교수의 “이윤율을 저하시키는 경향이 이윤율을 상승시키는 경향을 항상 이긴다는 이야기는 없다”는 발언은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특수한 경우(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잉여가치율 상승이 불변자본의 현저한 가치감소와 결부되는 경우’)에만 옳고 일반적으로는 그르다. 










김수행 교수는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저하한다고 여기면, 가만히 놔두면 자본주의가 망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래선 안 된다. 가만히 놔둔다고 이윤율이 계속 떨어질 턱이 없다. 이윤율도 실제로 자기 사이클을 타고 간다.’고 말하였다. 김수행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이윤율의 저하경향법칙에 대한 긍정이 자본주의 자동붕괴설에 대한 긍정과 등치되고 있다. 이러한 등치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역사의 진전에 대한 이분적, 비약적 인식, 따라서 계급운동의 가능성에 대해 부정하고, 혁명에 대한 공상적 관념을 지닌 김수행 교수의 머릿속에서만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김수행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자본주의 이윤율은 그 자신의 안정적인 사이클을 갖기 때문에 절대 망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앞서 말한 자본주의 영구번영론의 혐의는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밝힌 바와 같이, 일반적 이윤율의 저하를 일으키는 바로 그 원인들이 이 저하를 저지하고 지연시키며 부분적으로는 마비시키기까지도 하는 반대작용을 불러온다. (강조는 인용자) 이 반대작용은 그 법칙을 폐기시키지는 못하지만 그것의 효과를 약화시킨다. 이러한 반대작용이 없었다면, 일반적 이윤율의 저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저하의 상대적 완만성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법칙은 오직 경향으로서 작용하며, 그것의 효과는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만 그리고 장기에 걸쳐서만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강조는 인용자) (3권 p. 286)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은 밀물이라면 각 산업순환은 파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핵심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산업순환이 발생하는 과잉생산과 같은 수준의 운동이 아니며, 전자는 후자를 내포하며 후자는 전자를 그 일부로 지니는 운동이라는 것이다.5) 따라서 김수행 교수가 말한 바,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과 산업순환을 같은 수준에 놓고, 후자가 안정적이므로 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서로 다른 수준의 운동을 같은 수준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기적 순환은 이윤율 저하경향법칙과 동시에 작용하는 서로 다른 수준의 운동이다. 이로써 위기와 공황의 분화로부터 주기적 순환이 도출되고, 주기적 순환으로부터 이윤율의 저하경향법칙을 부정하는 논리적 가능성과, 이윤율 저하경향법칙은 작동하지 않으므로 그때그때의 산업순환은 과잉 생산에 의한 것일 뿐이며, 이는 적절한 중앙은행의 조치에 따라 공황으로는 이어지지 않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주기적 순환을 가질 뿐이라는 논리적 가능성은 부정된다.















3. 공황의 일반적 원인과 현 시기 공황의 원인과 대안










김수행 교수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저하하는 경향이 생기고, 상승하는 경향이 생기면서 나아가고, 그런 과정에서 상승시키는 경향ㆍ저하시키는 경향이 서로 충돌해서 어느 경우에 공황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였다. 바로 위의 3권 p. 286의 인용문에서 인용자가 강조한 부분에서 보듯이 “일반적 이윤율의 저하를 일으키는 바로 그 원인들이 이 저하를 저지하고 지연시키며 부분적으로는 마비시키기까지도 하는 반대작용을 불러온다.” 이윤율 저하의 법칙과 상쇄요인은 모두 사회적 생산력 발달의 자본주의적 표현이다.(3권 p. 255) 양자는 충돌하는 무엇이 아니라 이윤율이라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서로 겹치지 않는 힘이다. 따라서 양자가 ‘충돌’하는 일 따위는 없으며, 충돌로 공황이 발생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김수행 교수가 말하는 공황의 일반적 원인에 대해 들어보자.










원래 공황이라는 것이 실제로 왜 터지느냐면, 그 이전의 여러 가지 모순이 쌓여서 그것이 터지는 것이다. ... 과잉생산, 과잉축적 이러면 무엇에 대해 과잉인가. ... 자본가가 정상적인 이윤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생산물이 과잉이 되어버렸다. 정상적인 이윤율을 얻을 정도를 넘어서 투자해서 정상적인 기대한 이윤율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과잉생산 과잉축적, 양자는 거의 동의어로 써도 무방하다. ... 과잉생산, 축적이 사실은 보통 이야기하면 공황의 원인이다. 이윤율이 자꾸 떨어지면, 자본가들이 투자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졌든지, 할 수 있는 의욕도 없어져버렸든지 이렇게 되면 위기와 공황이 온다.










과잉생산, 과잉축적이 공황의 원인이라는 김수행 교수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김수행 교수는 위기와 공황을 분화하고 있는데, 그로부터 자본주의의 영구번영이 상정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공황에 대한 이러한 원인 분석은 그 자신에 의해 한갓 공문(空文)이 되어버린다. 그의 이론 안에서 과잉생산은 더 이상 공황의 원인이 아니라 위기의 원인이 된다. 또는 그러한 의미에서 공황의 원인은 위기 시 잘못된 정부의 화폐금융정책일 것이다. 이윤율저하와 자본가의 투자저하에 관한 김수행 교수의 다음 말을 들어보자.










상품이 안 팔린다고 하면, 소비재가 안 팔린다고 인식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나 (안 팔려서 문제가 되는 것은ㅡ인용자) 대부분이 생산재다. 기계, 설비, 원료. 이런 것들이 훨씬 많다. 이것들이 안 팔린다는 것은 결국 자본가들이 그것을 사서 생산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이윤율 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수요가 없다는 것은 사실은 크게 보면 소비재부문에서는 노동자 임금이 떨어져서이고 자본재의 경우는 자본가가 투자를 안 해서다. 후자가 더 크다. 자본가가 투자를 한다는 것은 기계, 원료를 구매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고용한다. 노동자가 소비재를 산다는 것은 자본가가 투자를 하기 때문에 살 수 있다. 이윤율이 낮아지면 (자본가가 투자를 안 해서 자본재가 안 팔리고, 고용을 안 해서 소비재가 안 팔리는 것으로ㅡ인용자)물건이 안 팔린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다.










이상의 발언에 채만수 선생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 “김수행 선생의 설명은 부분적으로 거꾸로인 듯 하다. 소비재가 안 팔려서 공황이 오는게 아니라, 이윤율이 낮아서 투자를 안 해서 생산재가 안 팔려서라고 했는데, 단면을 잘라서 보면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소비재가 안 팔려서 투자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자본론��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생산물이 팔리는 한, 자본가적 생산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 자본가치의 순환은 중단되지 않는다.  ...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상품의 큰 부분은 사실상 외관상으로만 소비에 들어갔을 뿐이며 현실적으로는 팔리지 않은 채 상인의 수중에 있고 아직 시장에 남아 있을 수 있다. (강조는 인용자) 상품들의 흐름이 차례차례로 시장에 나타나는 가운데, 마침내 이전의 흐름은 다만 외관상으로만 소비에 의해 흡수되었음이 발견된다. 상품자본들은 이제 시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 가격 이하로 판매된다. 이전의 상품 흐름들은 아직도 현금으로 전환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에 대한 채무의 상환기한은 도래한다. 상품소유자들은 지불불능을 선언하든지 또는 지불하기 위하여 어떤 가격에서라도 팔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 판매는 현실의 수요상태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다만 지불에 대한 수요(상품을 화폐로 전환시켜야 할 절대적 필요성)와 관계가 있을 뿐이다. 공황이 처음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강조는 인용자) 소비자 수요(개인적 소비를 위한 수요)의 직접적 감축이 아니라 자본과 자본 사이의 교환의 감퇴, 즉 자본의 재생산과정의 축소이다.(2권 pp. 87~88)










상품이 산업자본에 의해 직접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상업자본에 의해 판매된다는 유통과정의 존재, 또는 상업자본의 자립성이 최초의 소비재의 (지불수단을 지닌) 수요 부족(따라서 동시에 과잉생산)을 산업자본으로 하여금 바로 알 수 없게 하며,6) 따라서 이미 어찌 해볼 수 없는 소비재 판매의 적체가 발생한 이후에야 공황국면에 접어들게 되며, 이때에서야 자본은 낮은 이윤율로 인해 투자를 할 수 없게 된다.7) 따라서 우리는 공황을 일으키는 과잉생산과 짝을 이루는 과소소비는 소비재의 그것임을 알 수 있다. 자본재의 수요 부족은 단지 이미 낮아진 이윤율의 결과로서의 2차적 원인일 뿐이다. 또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성기는 과잉생산의 시기”(3권 p. 376)라는 표현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가 호황국면을 거치면서 공황을 예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공황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2차적 원인은 공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현 시기 공황의 원인에 대해 김수행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지금 금융공황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 (미국의ㅡ인용자) 주택산업에서 일어난 투기는 90년대 IT산업의 거품이 무너지고 9.11사태가 일어나고 이래서 미국경제가 위기국면으로 들어가니까, 중앙은행인 FRB가 금리를 6%에서 1%까지 낮출 정도로 엄청나게 자금을 공급했는데, 그것이 주택산업으로 들어가서 가격을 올리고 주택 건설도 많이 일어나고 주택 담보대출 모기지도 많이 나오고, 모기지 관련(모기지에 기본 한) 여러 파생상품도 많이 나오고 이러다가, 2006년 하반기 주택가격이 확 떨어지기 시작하고 주택산업에서도 과잉생산이 일어나고 모기지를 받은 사람들의 연체율이 올라가고 모기지 관련 금융상품 가격 폭락.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이번 공황. 그러므로 금융기관의 욕심이나 사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문제, 금융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전체의 문제다.










요지는 미국경제의 실물경제의 위기가 주택산업의 붕괴를 통해 드러난 것이므로 미국의 경제위기는 단지 미국 금융의 사리사욕 때문이 아니라는 내용. 김수행 교수의 분석을 해석해보면, 과잉생산에 의해 9.11 이후 미국 경제에 위기가 왔는데 중앙은행의 화폐공급으로 공황으로 빠지지 않고 경기가 활성화(주택산업을 포함해서)가 됐는데, 그 사이 과잉생산(주택산업을 포함한)으로 2006년에 다시 위기가 왔다. 9.11이 2001년에 있었으므로 위기의 주기가 5년으로 대폭 단축되었다. 앞서 김수행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정부개입으로 주기는 연장”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주기의 단축은 김수행 교수의 말처럼 정부개입에 따라 주기가 연장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공황 시 정부지원이,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파괴(감가)되었을 과잉생산을 존속시킴에 따라, 과잉생산을 일반화ㆍ항상화, 따라서 위기를 연장ㆍ심화시켰음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이것은 정부지원에 따른 위기의 연장ㆍ심화에 의한 주기의 연장이다. 그러나 김수행 교수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내용이다. 왜냐면 김수행 교수의 논리에 따르면, 중앙은행의 화폐공급이 위기를 위기 아닌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즉 정부지원에 따라 위기가 해소, 그의 비유에 따라, ‘생사의 기로에서 약을 줘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경제위기인데, 정부가 돈을 막 풀어가지고 호황으로 다시 갈 수 있느냐 없느냐 기로가 위기라는 개념”ㅡ앞에서 강조한 김수행 교수 발언 중) 그러나 필자가 이해하기로, 정부지원은 병자(과잉생산ㅡ공황)에 대한 연명시술인데, 이것은 죽음의 때를 미루기는 하지만, 그 연명시술 자체가 연명의 기간 동안 더욱 고통스럽게 하며(위기 심화) 종국에는 더 고통스런 죽음(더 큰 과잉생산으로 인한 격심한 공황)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계속 따라가 보자.










그런 가운데서 이렇게 세계적 대공황으로 폭발할 수 있던 것은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경제를 금융화 시키고 금융기관의 금융활동을 너무 활발하게 해가지고 생산적인 부문의 투자라든가 생산 활동이 많이 감축이 되고 고용도 늘지 않고 임금수준도 줄어들고, 이런 식의 경제의 바탕에 있는 가운데서 그와 같은 주택산업의 붕괴랄까 이런 것을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공황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김수행 교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금융화를 발달시킴으로서 미국의 공황이 세계적으로 파급되었고, 동시에 세계 각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실시한 실물부문에 대한 투자 축소로 인한 위축이 미국공황의 금융적 파급을 견디지 못하고 공황으로 빠지도록 했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미국이야말로 ‘신자유주의 종주국이자 선진국’이지 않은가. 이러한 신자유주의 분석은 바로 앞에서의 미국공황에 대한 분석에 추가됨으로써, 다음과 같이 바뀌게 된다.(김수행 교수의 공황 원인으로서의 과잉생산을 받아들이면) :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금융을 활성화하는 반면 실물 투자를 축소함으로써 과잉생산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어리둥절한 결론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이것은 김수행 교수가 신자유주의의 (예컨대 케인즈주의와 구분되는) 드러나 보이는 현상, 즉 금융화, 노동유연화 등만을 보았을 뿐, 신자유주의도 또한 자본주의라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과잉생산 상태이기 때문에 세계공황이 된 것이지,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인데, 미국만 과잉생산이 발생했고 나머지는 금융화로 인한 잉여 부족으로 과소생산이 일어나서 세계공황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김수행 교수의 대공황 극복책을 들어보자. 










지금의 세계적 대공황의 극복을 위해서는, 좌파들은 케인즈주의적 정책에 적대적인 태도를 많이 취하는데, 그럴 필요 있겠는가. 지난 1월 1일 매사추세츠, 뉴스쿨 교수들이 오바마에게 보낸 공개 선언문에 다음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 ... 대규모 재정확대프로그램, 더욱 푸른 경제(녹색경제) ... 사회적으로 균형적인 세력과 건강을 회복시켜주는 경제정책, ... 금융기관재편 및 규제하는 정책(국유화 포함), ... 국제적 협력과 조정의 원칙들. 우리 좌파가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인가, ... 이것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우리가 새로운 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케인즈는 ... 투자를 사회가 규제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좋은 아이디어인데, 이 아이디어가 자본주의라는 생산관계(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이 생산관계)를 조금도 손대지 않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해서 문제다. 맑스는 이를 부르주아 소셜리스트라 했다. 그래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여러가지로 연구해야 된다고 하겠다.










마치 대선 공약 같다. 김수행 교수는 단지 예를 든 것이므로 비판하지는 않겠다. 다만 김수행 교수는 맑스가 케인즈류를 부르주아 소셜리스트라 했듯이 케인즈주의가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전혀 손대지 않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건 그냥 하는 소리인 것 같다. 왜냐면 그의 논리대로라면 자본주의는 영구번영할테니 그것이 약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그에 의하면 혁명 아니면 현실의 한발자국 전진뿐인데, (뒤에서 보듯이 혁명은 공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대안은 바로 케인즈주의 뿐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김수행 교수가 직접 ‘왜 케인즈주의인가’를 말한다.










만약에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실업수당, 사회보장제도 문제 등. 공황이 오면 이런 미비 때문에 대중이 엄청난 생활의 곤란을 받을 것 아닌가. 이런 식의 사회보장제도나 복지사회 만드는 것도 굉장히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내면서 우리가 이 사회를 좀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든지 협동 단결을 만들든지, 이런 식이 아니고 처음부터 이런 것 없이 확 넘어간다.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싸움하는 과정에서도 단락이 많이 생기는 게 아닌가 걱정. 이 사회에서 진짜로 케인즈는 복지사회와는 관계 없지만 복지사회를 만들 수 있고 자본가 계급과 국가의 양보를 받든지 밀어붙여서 사회보장제도를 개선하거나 확장할 수 있다. 이것도 굉장한 큰 진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수행 교수에게 있어서 “케인즈주의는 복지사회와 관계없으면서 복지사회로” 가는 분열증적인 무엇인데, 여하튼 복지사회8)다.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하나는 “공황이 오면”(?, 이미 공황이 왔는데 다음 공황을 대비한 투쟁을 하란 말인가? 그의 관념 속에는 이미 자본주의는 영원하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듯하다.) 인민의 생활이 곤란하니 생계확보를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케인즈주의적인 것이 아니면 어디로 확 넘어가는 혁명일텐데, 혁명. 그건 안 되기 때문이다. (혁명에 대한 언급은 다음 인용문에서 다룬다) 그의 논리에 있어 자본주의는 영구번영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비참성의 대안은 케인즈주의 뿐이다. 따라서 캐인즈주의적 처방은 앞으로 나가는 단계에서의 하나가 아니다. 왜냐면 미래 사회에 단계는 필요 없고 있을 수도 없으며, 오직 자본주의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최종목표가 뭐고 당면과제가 어떻고, 당면과제를 해결해가면서 최종목표를 어떻게 달성해나가느냐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사실은 ‘모두가 반자본주의 혁명을 해야지 뭘 할 수가 있다’ 이래버리면 사실은 굉장히 큰 문제다. 그러면 한발자국도 사실 못나간다고 생각한다. 당면과제 모두 어려운데 그걸 하나씩 해결 안 해 놓고 말야, 그냥 한참 이건 뭐 반자본주의 혁명하자고 이렇게 내놓는 것은 엄청나게 무책임한 것이라고 사실 나는 생각한다.










김수행 교수의 최종목표(복지사회)와 당면과제(케인즈주의)는 앞에서 밝혀졌다. 여기에서는 그의 혁명관(?)에 대해 말해보자. 김수행 교수에게 있어 혁명을 말하는 자들은 전부 현실의 최종목표와 당면과제를 설정하지 않는 천둥벌거숭이들이며, 현실의 고난에 대해 무감한 공상가들일 것이다. 그러나 최종목표와 당면과제를 설정하지 않고, 현실의 고난에 무감한 그런 혁명은, 역사의 진전에 대한 이분적, 단절적 인식을 지닌 김수행 교수 자신의 관념 속에만 있다. 역사는 그의 공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며, 그의 공상을 무참히 그리고 무심하게 짓이기며 나아갈 것이다. 물론 모든 문제를 무매개적으로 혁명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하에서 절대적인 적대를 알고 있으며, 또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것은 단지 적대일 뿐만 아니라 강고한 억압이므로 그것이 혁명이 아니면 도저히 끊어지지 않는 사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김수행 교수는 혁명을 말하는 것이 무책임하다고 말한다. 어느 누가 지금 당장 (김수행 교수의 공상 속에 있는) 혁명을 하자고 준동하는가. 김수행 교수는 누구에게 무책임하다고 하는가. 적대를 알고 그것의 현상형태를 연구하고, 또 그것을 부수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에게 무책임하다고 하는가. 그들 모두 혁명의 한점에서 만나므로! 










김수행 교수는 자신이 설정한 가상의 인물을 비판하며 자신을 그에 반(反)하는 사람으로 세우는데, 그 인물은 김수행 교수의 관념 안에만 존재한다. 그 가상의 인물은 김수행 교수의 온갖 편견을 투영한 존재인데, 그 가상의 인물은 자본주의 다음 세상이 무엇일지 고민하지도 않고 그래서 현실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며(단계론에서 김수행 교수의 가상의 인물), 자본주의는 자동붕괴 된다고 생각(이윤율의 저하경향법칙에서)하고, 막무가내로 혁명만 외쳐대는(혁명이 무책임하다에서) 사람이다. 따라서 김수행 교수 스스로는 자신에게 있어서 다음 세상이 뭔지 고민하는 사람이 될 것인데, 다음 세상은 노동해방-인간해방의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그 주기를 따라 계속 발전할 것이므로, 노동해방-인간해방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세상(복지사회)이 되려면 혁명(되지도 않을)을 사고하는 계급운동보다는 케인즈주의적 청원운동이 낫겠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자신의 비과학성, 소부르주아적 정신이 빚어낸 환상에 불과하다.9) <노사과연>






1) 언제라도 공황으로 접어들 수 상태로서의 위기라면 필자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화폐공급을 통해 과잉생산의 파괴(감가) 없이 호황으로 반전하는 위기란 없다고 생각한다.






2) 김수행 교수의 위기와 공황으로의 분화에 대해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위기에서 공황으로 가는 과정을 단지 정부의 무능이나 역사적 우연에 내맡기기 보다는, 왜 위기가 공황으로 갈 수 밖에 없는지, 또는 어떤 국면에서 그것이 불가피한지를 논리적으로 분석해내는 것이 이론가의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3) 상대적 잉여가치와 이윤율의 관계는 바로 앞에서 말한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의 관계에서 해명되었다. 그러나 앞에서의 김수행 교수의 상대적 잉여가치에 대한 집착(?)을 고려하여 이하와 같이 부언하게 되었다.






4) “생산과정과 축적과정이 진행함에 따라, 취득가능한 그리고 실제로 취득되는 잉여노동의 양, 이리하여 사회적 자본에 의하여 취득되는 이윤의 절대량은 증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생산과 축적의 위와 같은 법칙들 그것이 불변자본의 양과 함께 그것의 가치를, 살아있는 노동으로 전환되는 가변자본부분의 가치보다 더욱 더 급속하게 증대시킨다. 그러므로 바로 그러한 법칙들이 사회적 자본에 대하여 절대적 이윤량의 증대와 이윤율 저하를 모두 일으키게 된다."(3권 p. 262)






5) 3권 15장에는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과 공황과의 직접적인 연관에 대한 문장들이 있다(예를 들어 p. 290,  310,)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이윤율저하경향법칙과 공황과의 관계에 대한 모든 논쟁’은 이러한 맑스의 논술의 비일관성에서 연원한다. 필자는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과 공황은 추상수준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은 보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자본주의 이윤율에 대한 규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따라서 공황의 시기에도 일정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반면 공황은 이윤율 저하경향을 자신의 여러 원인들 중의 하나로 삼으며, 양자는 역사의 특정 시점에서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6) ‘그렇다면, 산업자본이 직접 유통을 담당하면(물론 불가능하지만) 공황은 안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도 있다. 다음의 서술은 과잉생산 시에 동시에 과소소비의 상태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다. “직접적 착취의 조건들과 이 착취의 실현의 조건들은 동일하지 않다. ... 전자는 사회적 생산력에 의해서만 제한되며, 후자는 여러 생산 분야들 사이의 비례관계와 사회의 소비능력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그런데 사회의 소비능력은 절대적인 생산능력이나 절대적인 소비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분배관계―이것은 사회의 대다수 민중의 소비를 최저수준으로 인하하여 다소 좁은 범위 안에서만 변동할 수 있게 한다―에 근거한 소비능력에 의해 결정된다.”(3권 p. 293)






7) 산업공황의 시작점으로서의 상업공황. "상업자본의 운동은, 그의 자립화에도 불구하고, 유통영역 안에서 산업자본의 운동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자립화 때문에 상업자본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재생산과정을 그 장벽들을 넘어서까지 추진시킨다. 내적인 의존성과 외적인 자립성은 상업자본을 그 내적 관련이 공황에 의해 폭력적으로 회복되는 지점까지 몰고 간다. 그렇기 때문에 공황이 먼저 출현하여 폭발하는 곳은 직접적 소비에 관계하는 소매업이 아니라 도매업과 은행(사회 전체의 화폐자본을 도매업에 사용하도록 한다)의 분야라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3권 pp. 368~367)






8) 절대 ‘복지국가’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론적 애매함이 그의 이론가로서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주고 있다. 즉 이론은 짐짓 공산주의자스럽지만, 현실적 대안은 사민주의적이다.






9) 이 글은 김수행 교수의 발언을 녹취록으로 만들어, 그것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필자 자신도 토론회에 청중으로 참석했었다. 발언이라는 것은 항상 조리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필자의 비판이 김수행 교수 본인의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의도한 바를 곡해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바는, (발언에 대한 본문의 인용문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토론회 당시 김수행 교수는 “사실 ~라고 생각한다/느낀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는 글이 줄 수 없는 매력이고, 공간이 주는 유대감의 발현이다. 그것을 십분 이용한 이 글은 얄미운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진심에 다가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끝으로 필자는 김수행 교수의 도덕성, 사회적 업적 등에 대해 긍정한다. 비판의 핵심은 심지어 그의 케인즈주의라는 결론도 아니다. 바로 그 태도이다. 솔직하지 못한 태도,(이 ‘솔직함’이 도덕적인 무엇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이론의 이름으로 그 이론의 과학성을 파괴하고 운동에 해악을 끼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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