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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
글쓴이 사사키타츠오 E-mail send mail 번호 110
날짜 2009-01-20 조회수 4677 추천수 145
파일  1232462101_아프가니스탄 4월혁명.hwp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











 










[역자 주:  연재를 시작하며





이 글은 ��アフガニスタン4月革命、佐々木辰夫,スペース伽耶,2005��의 일부를 번역한 글이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호에 실린 글은 그 중 서장과 1부 일부의 글로, 아프가니스탄 4월 혁명 이전의 이야기들이다.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앞으로 총 6~7회에 걸쳐 번역문을 연재할 계획이다. 아프가니스탄 4월 혁명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아프가니스탄 문제의 과거와 미래를 짚어볼 것이다.] 















서장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는 우리들의 통상 인식―파키스탄, 중국, 구쏘련연방, 이란 등에 둘러싸여, 유라시아대륙의 다소 좌측 중앙에 위치한 실크로드의 한 작은 국가라는 이미지―을 넘어서,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중대한 수많은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본서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4월혁명(1978년 4월)에 초점을 맞추어 매일 매스컴에서 떠들썩하게 말하는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눈을 돌리면 그 지역일대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며, 비탄에 잠기고, 매일 매일의 생활도 유지되기 어려워, 이미 눈물조차 말라버린 상황이다. 눈과 바람에 끊어진 건물들은 전대미문의 상태로 파괴되고 유실, 혹은 소실되어 그 형태를 알 수조차 없다. 바미얀 유적지를 비롯한 인류의 유산은 이제 수복과 복원도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어,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있다.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사회의 파멸과 혼란은 극한에 달해, 지역사회가 부지런히 만들고 닦아 완성해온 공동체의 근본들이 무너져 이제는 재건이 곤란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매일 매일의 양식을 찾아 헤맬 뿐이다.





이러한 전화와 피난은 아프가니스탄 유사 이래 경험해온 대 각제민족의 유입에 의한 역사적 사건 이상의 규모와 내용을 가지고 있다. 즉 기원전 300년대의 알렉산더의 이른바 ‘동방원정’, 또한 7세기이래의 아랍ㆍ투르크계 무슬림의 침입과 이슬람화, 나아가 13세기의 몽골계 칭기즈 칸의 침략ㆍ파괴ㆍ약탈ㆍ대량살상 등등의.





이러한 전화와 재난이 어떻게 이 땅에서 일어난 것일까. 다각적으로 생각을 요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유래와 원인을 손쉽게 사회주의체제와 쏘련군의 아프가니스탄의 ‘침략’에서 찾아, 마치 모든 악의 근원은 쏘련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문제를 정리해버리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지배적인 조류이다. 그러나 이 지배적 경향 속에서도 도대체 1978년에 아프가니스탄 인민에 의해 실행된 4월혁명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조차 제대로 실증적으로 구명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그 혁명과 반혁명의 ‘싸움’속에서 전자가 패배한 요인을, 사회주의세계체제의 붕괴 때문으로 설명해버리려는 경향도 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혁명의 패배와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사이에는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전적인 인과관계가 있는지 어떤지, 이것도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석방식에는 중요한 아프가니스탄의 노동자ㆍ인민의 내재적ㆍ주체적 해방에 대한 투쟁의 역사와 실상이 ‘포스트냉전’의 스크린 속에서 매몰되어버렸다. 이것으로는 피와 땀을 흘리며 그들이 희구하고 실천해온 반봉건ㆍ민주주의의 운영이 하나도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세계의 매스컴은 쏘련의 군사지원(1979년 12월)부터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중 폭격(20001년 10월)까지를 내용의 차이가 전혀 없이 돌이켜보지 않거나, 이것이 마치 일사천리로 급진전 된 것 같이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에 반한다.





각각의 사상ㆍ사건의 내용의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크게 시대구분을 해보자.










Ⅰ. 1978년 4월혁명부터 1992년 4월의 나지불라 정권의 붕괴까지―혁명과 반혁명과의 ‘싸움’





1978년 4월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ㆍ인민에 의한 4월혁명이 실행되어,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나지불라정권이 국제반혁명(무자헤딘)에 의해 타도되면서 그 국가도 해소되었다. 반혁명파에 의한 혁명의 방해와 공화국 공격에 맞서 공화국 정부는 방위상 부득이하게 쏘련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쏘련은 1979년 12월부터 동국에 주둔했고 1989년 2월 자발적 의사로 제나바합의에 의해 철수했다.










Ⅱ. 1992년 4월의 정권붕괴에서 2001년 10월의 미국 아프가니스탄 공격개시까지―반혁명파벌집단 간의 전투





나지불라정권 타도 후 반혁명파 제 집단은 서로 한결같이 전란에 나날을 보냈다. ‘내전기’라는 사람도 있다. 94년, 무자헤딘 중에서 파생된 탈레반 군사집단도 그에 가담해 전란은 배틀로얄식으로 한층 격화되었다. 그들은 약 10년에 걸쳐 외국에서 반입한 엄청난 수량의 병기ㆍ탄약ㆍ군사물자ㆍ자금 등을 물처럼 썼고 상대 파벌의 병사들을 살육했다. 따라서 정책을 만들고 민생안정을 위해 통치하는 것은 전혀 없다고밖에 할 수 없다.










Ⅲ. 2001년 10월의 미국 공격부터 현재까지―미제국주의와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





2001년 10월, 부시정권은 9.11동시다발테러의 범인과 공범자가 아프가니스탄에 있다는 명목으로 공중폭격을 개시했다. 반혁명파의 일부였던 북부동맹은 군사적으로는 국토의 10%밖에 장악하지 않았었다. 이에 이들은 미국 폭격을 호기로 받아들여 이윽고 그 군사지원아래 국토의 90%를 장악하고 있던 탈레반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탈레반은 금세 패배했다. 전투는 탈레반 대 미영ㆍ북부동맹 제휴군과의 사이에서 일어났으나 그 피해는 다수의 일반시민과 국토에 가해졌다. 이 전투는 전략적으로는 미제국주의와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이었으나, 곧 미ㆍ영 등의 연합군이 칼자이를 대통령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을 포함한 파벌집단에 의한 테러들은 후에도 멈추지 않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시기구분을 보면 Ⅰ,Ⅱ, 및 Ⅲ의 시계에는 각각 독자의 대립축이 있었으나 그러한 대립축과 각 시기의 제반 현상과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다. 예를 들어 쏘련군이 철수하고 나지불라 정권이 붕괴한 후에는 반혁명파에 있어서는 오히려 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내건 이념(이슬람의 대의)을 현실화해야했다. 그런데도 오히려 싸움을 자기목적화해 방약부인하게 싸우고만 있을 뿐이다. 또한 부시정권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공격의 이유를 쏘련군의 주둔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를 아프가니스탄 근로인민의 측에서 포괄적으로 통일적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없을까, 즉 무자헤딘파벌 간의 전투도 부시의 아프간공격도 그것은 혁명(인민의 권리옹호, 생활의 안정과 향상 및 근대국가로의 지양ㆍ신국가 건설)을 깡그리 쓸모없이 만드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아프가니스탄인민의 위업이라고 해야 할 4월혁명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왜 이러한 혁명은 일어났으며, 이에 선행하는 어떠한 역사적 조건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만약 이 질문들에 대해 분명히 할 수 있다면, 그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제반 사건들을 이해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아프가니스탄 우호협회(*)의 일원으로서 종종 그곳을 방문해 아프가니스탄에 관련된 제반 문제를 부분적, 단편적으로 추적해왔다. 이전 과정에서 행한 오류는 불충분함을 가능한 고쳐 보완하면서 4월혁명의 전체상에 근접하고자 시도했다. 이를 통해 19, 20세기의 아프가니스탄의 발자취를 가능한 더듬어나가면서 재차 이를 검증해보고자 생각했다.





* 일본아프가니스탄 우호협회 : 1983년‘아프가니스탄을 아는 회’로서 발족해, 87년에 개칭했다. 초대회장은 다나카토시오(田中稔男)씨였다. 동경, 오사카, 나고야를 비롯해 전국에서 연대운동을 하고 있다. 83년부터 86년까지 매년 우회방문단을 현지에 파견, 여타 국제회의와 국제교류 등으로 대표파견. 구호물자의 제공, 영화회, 강연회 등의 다채로운 활동을 계속해왔다.















Ⅰ.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 전사










혁명의 선구자 자말 앗 딘 알 아프가니 (Jamal ad-Din al-Afghani)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이란, 중앙아시아 및 중국은 러시아짜리즘과 영국제국주의가 서로 석권해와 이른바 그레이트게임을 사이에 두고 흔들리며 움직였다. 그 일대는 세계경제의 연쇄 속에서 편입되었다. 그러나 제각기 지역의 봉건성과 후진성 때문에 경제발전은 크게 방해받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생각 있는  사람들은 생각하다 지쳐버렸다. 무지몽매한 데서 광명을 찾아내야 하는 길에서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프가니와 타루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시대에서 노동하는 인민의 의사와 전망을 대변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이름을 알렸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이드 자말딘 앗 딘 알 아프가니(1838~97, 이하 아프가니로 약칭), 이란에서는 그를 이란인으로서 취급해, 아루 아사다바디 또는 쟈라라바디라고 불렀다.





아프가니는 카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름은 세이드 사프델이었다. 소년시절부터 지정의가 뛰어나 19세에는 어느 왕자의 교육을 임시로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왕자가 왕위계승을 둘러싼 싸움에 말려들면서 그것이 내란으로 발전되자 그는 싫증을 느껴 아프가니스탄을 뒤로했다. 메카순레를 목표로 이란에 들어와 그 이후 그는 잠시 고국에 돌아갔던 때를 제외하면 모두 해외에서 지냈다. 이집트, 투루크, 이란, 인도, 게다가 유럽의 런던, 파리, 베를린 및 뻬쩨르부르크 등을 걸어 돌아다니며 마음이 편할 때는 없었다(��아프가니스탄 도우디��No3, 5 「19세기의 어느 아프간 정치사상가」 사탈다이 저, 카불 발행, 1989년)





나는 어느 날 카불의 길을 걸으며 문득 투명한 공기에 높게 치솟은 4각 기둥의 대리석 건조물을 바라보았던 적이 있다. 그것은 아라비아어가 새겨졌던 무덤 앞의 푯돌이었다. 후에 그것이 아프가니의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보고 나는 약 100년 전 그의 고국에 대한 망향의 마음과 카블 시민들의 그에 대한 한없는 경애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슬람교의 부패, 타락의 원인을 오스만투르크의 칼리프제(이슬람 예언자의 후계자를 수장으로 하는 정치체제) 중에서 찾아낸 그는 중세의 신비주의(스피) 중에서 이슬람의 진정한 모습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 정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슬람의 개혁을 목표로 ��코란��을 특히 깊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신은 인간이 자신의 상태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한, 결코 어느 민중의 상황을 바꾸거나 해주지 않는다”(��코란��제13장 11절)라는 문구를 특히 문제 삼게 되었다. 즉 이슬람 신앙에 있어 신도의 주체적 계기에 역점을 두고 이슬람 개혁에 경도되어갔다. 이렇게 신도의 행동을 끌어내는 것으로 깊이 잠들었던 무슬림의 의식을 각성시켰다. 이러한 작업과 동시에 점점 그 자신은 위기의식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만약 이슬람원리주의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아프가니는 망설임 없이 고전적인 이슬람원리주의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최근의 ‘원리주의’에 마이너스의 이미지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도츠카카즈오(戸塚和夫)의 제언에 따라 ‘이슬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한다. (��이슬람주의란 무엇인가��戸塚和夫저, 岩波書店, 2004년)





아프가니는 이윽고 많은 유럽의 지식인과 이데올로기를 접촉해 유럽 과학의 선진성에 주목했다. 1883년 그는 프랑스의 문인 에르네스토 루난과 논쟁을 시작했다. 그의 주제는 이슬람의 개혁과 유럽의 과학ㆍ기술을 둘러싼 것으로, 크고 난해한 내용을 포함했다. 에드워드ㆍ사이드는 그의 저서 ��문화와 제국주의2��(大橋 洋一 역, みすず書房 2001년) 중에서 그의 논쟁을 흥미 깊게 호의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이드는 “유럽제국주의는 비유럽원주민의 협력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라고 논술하고 있다. 그 장에서 그는 유럽인과 아랍원주민과의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존재하는 것을 독자에게 인식시키고자 하고 있다. 그래서 아래의 논쟁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루난은 이미 시작부터 일반적인 유럽인의 대 아시아인식, 바꾸어 말하면 아랍 민족에 대한 우월감과 인종차별의식, 문화적으로는 유럽인의 아랍인에 대한 오만함을 드러내며 아프가니에게 이견을 피력했다. 루난은 이슬람교를 유대교와 기독교보다도 저차원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에 아프가니는 이슬람이야말로 ‘양질’이고 서양은 이슬람으로부터 많은 것을 채용해, 스스로 개선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과학의 분야에서도 이슬람은 서양의 과학에 앞선다. 예를 들어 지금은 이슬람교가 후퇴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모든 종교에 공통된 것이다...”





맹렬한 논쟁과 싸움이 오갔지만 동시에 어느 쪽이나 상대의 장점과 좋은 점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루난은 그 논쟁 후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넓혀 소르본대학에서 이슬람 강좌를 개설했다. 아프가니는 구미과학을 매개로 해 이슬람의 개혁과 진보를 더욱 촉진시켰다.





아프가니는 “각지에서 탄환이 되어 날아오는”신문기사를 수없이 집필했다. 그 영향은 아프리카 대서양만부터 먼 동인도네시아까지 이르렀다. 그는 1871년부터 79년까지 이집트에 체류했으며 이집트의 맑스주의자 앙팔압둘마르크는 이집트 민족해방운동추진의 입장에서 비마르크스주의자 아프가니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압둘마르크는 우선 이집트 해방사를 두단계로 나누고 있다.





(1) 유럽의 패권에 대한 이집트인민의 싸움과 이집트 국민국가의 재건의 단계 (1798~1882년)





(2)독립과 민주주의를 목표로 해 영국의 점령 지배에 대한 투쟁의 단계 (1882년~1939년)





아프가니는 (1)의 시기가 되기 전부터 거주하여 (2)의 시기에 반영국 투쟁에 영향을 주었다. “이윽고 1789년의 프랑스혁명의 사상은 이집트에서 시초 단계의 사상과 행동방향의 틀을 크게 만들어내 넓혀갔다. 정치적인 이슬람 부흥운동의 시초가 된 아프가니는 프랑스인민이 자유에 대한 요구를 높이는 것을 칭송했다. 또한 그의 제자였던 제프 무하멧트 압도우는 이슬람원리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시작한 진짜 창설자였으나 그는 프랑스혁명에 직접 접촉하지 않고 이슬람 언어로 사상의 자유의 입장을 옹호했다. 이 두 사람의 사상가는 파리에서 잡지 ‘단단한 고삐’를 합쳐서 18호까지 발행했다(1884년 3월 13일부터 10월16일까지). 그것은 자유사상에 대해 이슬람 국가 사람들의 의식의 각성을 불러일으켰다”(��민족과 혁명�� 앙왈압델마르크 저, 熊田亨역, 岩波書店, 1977년)





또한 아프가니의 활동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슬람 제국과 인도 등으로 전개한 그의 광대한 사상이, 이슬람체제에 대한 예리한 비판, 부패와 악행에 대한 용서없는 폭로, 낡은 이데올로기와의 열렬한 논쟁 등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각지에서 처음에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지만, 잠시 지나면 그 곳에서 정치와 사상의 면에서 물의를 빚어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어 결국 국외추방처분을 받게 되는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었다. 1882년 인도에서 쫓겨왔을 때 그는 “이슬람 대지에는 폭정이 심해서 그것을 피해 살아갈 땅도 없다”라고 푸념했다.





이란에서 담배보이콧사건(1891년)과 아프가니와의 연결된 에피소드를 회고해보자.





1889년 이란의 카자루의 아침이라는 샤는 유럽에 있는 만국박람회로 출석하러가는 길에 오랜 친지였던 아프가니와 재회했다. 그때 샤는 “만년을 불신자들 속에서 지내는 대신, 페르시아에 돌아오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또한 “높은 지위도 할당해주겠다”라고 넌지시 비추었다. 아프가니는 그에 대해 냉정하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왕에게 제시했다.





● 페르시아에 헌법을 발포할 것





● 선거 준비를 할 것





● 문명각국과 마찬가지로 앞에서는 누구든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





● 외세(영국)에 넘겨 준 극단적인 이권을 파기할 것.





이러한 조건으로도 샤는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하고, 그러한 민주주의를 이란에 받아들이려 했다. 아프가니는 이란에 돌아가 샤의 측근의 한 사람이 되었다. 샤의 추종자와 종교계의 원로들은 아프가니가 제시한 조건을 하나하나 철회하도록 샤를 압박했다. 이에 샤는 외국에 준 이권을 파기하기는커녕 반대로 영국회사에 이란왕조의 담배전매권을 팔았다. 왕조는 돈이 떨어져 괴로운 상태였다. 그 담배전매권은 수출과 국내소비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국내의 흡연자들은 일부러 영국회사의 브랜드가 붙은 담배를 구입하는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터무니없었기에 커다란 대중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흡연보이콧 사건이다. 이란 이름의 알 아사다바디(아프가니)는 난국을 벗어나 테해란 교회의 낡은 성소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피로하고 쇠약해진 몸을 돌보지 않고 일부러 런던까지 도망쳐, 이윽고 한번 머물렀던 적이 있었던 콘스탄틴노플에 자리 잡았다. 페르시아에 그가 살아갈 땅은 없었다.





아프가니는 1897년 3월 9일 서거했다. 속칭 말하는 큰 별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그의 유서가 있다.





“죄인이 되는 것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머지않은 죽음도 두렵지 않다. 다만 막 뿌려진 종자가 열매를 맺는 것을 이 눈으로 끝까지 보지 못하고 깨달을 수 없다는 것, 이것만이 마음의 짐일 뿐이다. 폭정은 오리엔트의 인민을 무너뜨렸고 우민주의는 그들의 자유로의 외침을 압살시키고 있다. 궁중의 불모의 토양 대신에 인민의 비옥한 토양에 종자를 싹트게 한다면 사태는 급격하게 호전될 것이다. 그래서 당신, 페르시아의 인민들에게 최대의 희망을 걸어왔으나 한 사람의 남자를 배제한다면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용기를 가지고 당신이 용기를 가지고 흔들리게 해야 하는 것은 청년의 전통이라는 중압일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아프가니 같은 인물을 어떻게 특징 짖고 위치지어야 할까. 그는 단순히 아프가니스탄의 민족해방운동의 초창기에 나이브하고 미분화된 이데올로기를 가졌던 것뿐일까.





서방과 동방, 유럽과 아시아가 구성한 문명과 역사의 큰 문맥 속에서 본다면 그는 유럽인이 제시한 이른바 “동방문제”에 진실로 정면에서 대치한 극히 적은 동양인의 한사람이었다. “동방문제란 유럽 열강이 투르크제국의 쇠퇴와 내부분열을 이용해 발칸 중동으로의 진출에 개입하면서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발생한 일련의 국제분쟁을 가리키는 유럽 측의 호칭이었다” (��이슬람사전��, 岩波書店, 2002년)





당시 유럽에서 밀려오는 다양한 정치적, 사상적 경제적인 조류들에 대해 투르크제국의 안에서는 그것을 저지하면서 자신들의 허영과 부패를 지적하고, 아랍ㆍ이슬람의 약점을 바로잡으며 유럽에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아랍과 이슬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 중 한명이 바로 아프가니이다.





아프가니 사후, 이란에서는 1905년~6년에 입헌혁명이 일어났다. 이어서 1908년~9년에는 헌법이 부활했다. 투르크에서는 1908년 투르크청년혁명당을 중심으로 혁명이,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헌법운동이, 마치 아프가니를 따르는 운동같이 일어났다. 이러한 운동도 또한 ‘동방문제’에 대한 그들 인민의 해답이었다. (아프간헌법운동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캐나다의 고명한 이슬람학자(필프레드.C.스미스)는 그의 저서(��현대에 있어 이슬람�� 中村 広治郎 역, 紀伊国屋書店, 1974년)에서 제2차대전 이후의 이슬람세계의 상황을 400페이지로 정리해, 그 서두에서 약 25페이지를 아프가니의 활동과 의의규명에 맞추고 있다. 스미스는 19세기말의 아프가니 활동이 아랍ㆍ이슬람세계에서 두 번의 세계대전이후의 민족해방운동 및 이슬람 각국의 독립이라는 격심한 변화 속에서 큰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가져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스미스는 아프가니 속에서 읽어야할 키워드는 이슬람에 있어 내적개혁과 유럽식민지주의에 대한 이슬람ㆍ아랍의 외적방위라는 두 가지라고 말한다. 두 가지 키워드로 이슬람의 신비주의(이슬람주의),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및 로칼리즘의 개화ㆍ발전을 설명한다. 그 원심력은 예를 들어 이집트의 아랍내셔널리즘과 시오니스트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민의 싸움까지 이르고 있다.





스미스는 아프가니의 경외할만한 빛나는 별과 같은 활동가와 그에게 매혹당한 이들의 리스트를 이집트, 투르크, 시리아, 이라크, 이란 및 인도부터 열거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모하메드 타루지(1865~1933년)라는 이름을 들고 있다.





헌법운동과 그 담당자 ―모하메드 백 타루지―










20세기 초에 아프가니스탄은 하비브라한 왕의 치정아래 있었는데, 부패가 심하고 대영국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며 인민들은 정치에 대해 불신했고 증오했다.





1903년 아프가니스탄의 지식인과 학자들은 격주간 신문을 발생하기 위해 결사를 만들고 싶다고 한에게 신청했다. 한의 동의를 얻어 1906년 ��세라지 우라 아쿠바루��(뉴스의 램프)라는 뜻의 신문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발행되었다. 그 신문은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새로운 문명, 정보 및 세계 속의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린다”라고 발간 목적을 밝히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주의는 이 신문의 발간을 금지했다. 그러나 300인 남짓의 결사원들은 이에 기가 꺾이지 않고 연속발행 운동을 계속했다. 그 배경에는 러시아짜리즘 상부구조의 쇠퇴와 분열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의 1905년 혁명과 국회소집이라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안 아프간인들은 모스크바가 매우 가까운 것으로 생각해왔다. 또한 이 시기에 러일전쟁(1904~5년)으로 일본이 러시아에게 승리하자 카불시민은 이 뉴스를 마치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슬퍼했다고 한다.





이어 1909년, 결사원들이 왕에게 한통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 요점은 ‘국가 아래 행정제도를 복속시킬 것, 국가에 입헌정치를 도입할 것’ 이었다. 왕은 ‘이 선의와 신뢰에 의한 평화적인 요구에 대해 그 리더와 활동가들을 살해할 것’으로 대답했다. 즉 왕은 그 청원서에는 왕제폐위의 사상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읽어낸 것이다. 왕은 하필이면 이 국가의 왕인 자신을 향해 이런 종이쪼가리를 더럽히는 것에 큰 모멸감을 느끼고 크게 격노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일본에서 민선의원설립입건백서의 제출(1874년)과 그 후의 명치유신정부의 탄압의 흐름을 방불케 했다. 이를 ‘제1차 헌법활동’ 혹은 ‘입헌파의 운동’이라고도 했다. 이 운동들은 햇빛을 보지도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러일전쟁에 있어 일본의 승보를 들었던 사람 중에는 망명을 한 지식인 모하메드 백 타루지가 있었다. 타루지는 전 국왕의 친정을 비판하고 긴 해외추방처분상태에 있었다. 하비브라한은 타루지의 식견과 솔직함을 꿰뚫어보고 귀국할 것을 허락했다. (1904년) 그는 외국들의 큰 발전을 보고 한을 설득해 신문을 발행했다. 1911년 ‘세라지 우라 아쿠바루’지의 재간행을 두고 제2차 헌법운동이라고 한다. ‘세라지 우라 아쿠바루’지는 ‘새빨갛게 활활 타오르는 인민의 호민관’으로서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이 신문은 국내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운동의 추진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빛은 멀리 국외의 독자에게까지 전해졌다. 러시아 짜르정부와 영국인두정청은 이 신문을 수상쩍게 보게 되었다. 편집장 타루지는 몇 개의 언어를 구사해 이슬람교의를 익혀 프랑스혁명의 사상을 가지고 사설을 집필했다. 그는 제2차 헌법운동의 핵이었으며 사령탑이었다.





타루지의 아버지 그람 모하메드 타루지는 델리어가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는 또한 도스톰 무하메드 한 왕의 시대에, 관연서가였다. 타루지의 아버지는 1880년 친영파의 왕자 압돌 라만이 왕위를 잇는 것에 반대한 탓에 일가 36인과 함께 해외유형의 벌을 받았다. 아버지는 일생 귀국하지 못하고 시리아 다마수카수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아버지와 함께 해외생활을 한 타루지는 아버지 사후 귀국하자 역시 라만의 치정을 비판했다. 이 때문에 타루지도 또한 라만의 노여움을 사 해외로 추방되게 되었다. 그들 부자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타루지는 처음에는 파키스탄의 쿠웨이트와 카루치에서 우루도어를 배우고 다음으로 바그다드로 옮겨가 그 곳에서 아라비아어와 프랑스어를 익혔다. 게다가 그는 시리아, 투르크에 머물면서 무정한 이국에서 망향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층 더욱 아라비아어를 습득했다. 그는 유럽의 문명, 과학, 기술의 장족의 진보에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다른 한편 그는 진보한 거리 바그다드, 다마스카스, 콘스탄티노플 등에서는 광대하면서 그 이상 없었던 오스만투르크제국의 호화현란한 문화와 그 난숙하고 썩어빠진 몹시 불안하고 위태로운 위기(특히 불안정하고 작은 계기로도 최악의 사태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 종말을 예상시키는 광영을 보고 아연했다. 타루지와 아프가니의 해외유랑은 17년간 거듭되었으나 두 사람이 직접 접촉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타루지는 어느새 아프가니라는 선배의 길을 자신이 따라가는 것을 발견했다. 타루지에게 있어 이슬람은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투르크인, 아랍인 및 페르시아인의 이슬람 권력자들은 무능력하고 유럽식민지주의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스만투르크의 칼리프제에 저항하는 젊디젊은 ‘청년투르크운동’이 있었다. 아프가니가 계속 외쳐왔던 이슬람내부개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뒤에 ‘청년투르크운동’은 귀국한 타루지에 의해 ‘아프간청년운동’으로서 개화되었다. 그는 전제와 억압에 대해 저항할 것을 자신의 중심과제로 삼고 많은 지식인과 활동가와 동지의 연을 맺었다. 또한 해외추방 때에도 그 이국땅에서 ‘국제법’논문을 해석해 자국에 보내왔다.





후에 그에 의해 정식화된 비밀결사 ‘헌법운동’(마슈타라)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하나) 아프가니스탄은 정치적, 국가적 독립을 쟁취할 것





(둘) 국왕관료가 행하는 업무를 인민의 대표에게 양도할 것, 왕제를 공화제의 방향으로 전환할 것





(셋) 식민지주의, 제국주의의 정책을 금지할 것





(넷) 교육의 향상, 출판의 자유, 국어의 보급 활동을 위해 힘쓸 것





타루지는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는 아프가니를 상당히 넘어서 구체적으로 반제, 반봉건 투쟁을 추구했다.





왕족계급 말단의 일원이었던 타루지 부자가 2대에 걸쳐 저항과 투쟁을 해온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일반적으로 사회의 상층계급의 사람이 구체적인 사회모순에 당면해,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변혁의 주체로 일정한 지적능력과 재력이 동반된다. 긴 역사의 동력 속에서 타루지는 어디까지나 과도기의 짧은 위안이었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왕조사 속에서 왕족내부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계승의 싸움이 반복되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인민이 그 싸움에 직접 관계해 그것을 사회변혁으로까지 전개하는 경우는 없었다. 타루지 부자의 투쟁은 왕위후계 다툼과 전혀 질이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반영을 주장하는 아유부칸을 지지해, 친영종속의 왕 압돌 라만의 등장을 저지시키고자 노력했고 또한 그의 왕의 친영 정책을 비판했다.





친영파 라만은 아프가니스탄과 영국 영 인도와의 사이에 국경, 속칭 말하는 ‘듀란드 라인(Durand Line)’의 경계구분에 동의했다. 그는 후세에 있어 파슈톤 민족분단의 원인이 되는 대대손손의 화근을 남겨둔 것이었다. 오늘날 여전히 이 국경을 사이에 두고 같은 파슈톤족이 아프간 측과 파키스탄 측으로 갈라져 전쟁을 벌이고 있다. 타루지 부자 같은 왕족의 한부분에서 압둘라만 왕족에 대한 비판과 반대―그것은 아프간 민족해방운동을 선구적으로 뒷받침하는 특이한 궤적이었으며 또한 부자의 결단은 역사의 심판에 있어 이성의 승리였다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혁명적 왕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그 왕족에 의한 해방 개혁운동도 한계를 드러내며 인민에 의해 극복되게 되었다.















국가독립










1919년 2월 하비불 한이 암살된 후 그의 삼남 아마누라한이 왕위를 이었다.





그는 왕위를 잇자 조속히 국가독립을 선언하고 개명군주의 모습을 보이고자했다. 그때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외교권은 영국에 장악되어 있었다. 즉 아프가니스탄은 외국과 외교관계를 체결하려고 할 때, 영국의 허가가 필요했다. 영국의 보호국인 것이다.





아마누라는 레닌과 종종 서간과 메시지를 교환했다. 그는 사회주의 쏘련과 외교관계를 맺어 대등한 입장에서 우호조약을 조인했다 (1912년). 그러나 아마누라 단지 한 사람이 그 가신과 관료를 거만하게 부리며 그러한 모험적인 대사업을 해치웠다고 보는 것은 다소 무리한 얘기이다. 아마누라는 이미 근대화운동을 추진해온 타루지들에 주목해 그들에게 경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타루지들은 아마누라를 경계했다. 또한 아마누라의 아내는 타루지의 딸(소라야)이었다. 즉 아마누라에게 있어 타루지는 의부였다. 그러한 관계와 더불어 아마누라는 왕자시절 청년 아프간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그 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후에 바리한은 아마누라왕조의 국방상이 되었고 그 밖의 활동가들도 자리를 맡게 되었다. 따라서 아마누라는 타루지와 바리한 등의 식견과 열정에 의해 개명군주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2차 헌법운동 혹은 청년 아프간운동










제1차 헌법운동은 지식인들 300명 정도의 결사원에 의한 활동이었으며, 단기간의 신문발행과 그에 의한 국왕의 경계심을 부추긴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제2차 타루지들의 운동으로는 신문발행과 병행해 수천 명이 카불이외의 도시에서도 비밀지부를 만들어 리플렛과 팸플릿을 배포하고 집회를 열었다. 그들의 생각은 ‘상인과 반봉건적 지주’, 특히 그 안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대표했다. 이 청년아프간운동의 정치적 대립자는 영국식민지주의와 그에 관계했던 아마누라 한의 이복형제, 전 국왕의 형제 등이 대표하는 낡고 고루한 아프간 지배층이었다. 이 지배층은 봉건적 질서, 부족적 유제, 종교적 제례 및 식민지적 종속에 매달려있었다.





청년운동의 담당자들은 다음의 세가지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하나) 궁중 내의 개혁파 살롱





(둘) 궁중 밖의 입헌파 인텔리층





(셋)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각각의 개인들





이 운동이 목표로 한 개혁의 분야는 광범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용도 복잡하고 포괄적인 정강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활동의 내용과 성격으로 보아 시기구분하면 다음의 3기로 나눌 수 있다.





● 제1기 계몽기 1911~19년





이 시기는 전술했듯이 제2차 ‘세루지 우라 아쿠바루’지의 발간과 비공식적인 조직 활동으로 왕자 아마누라한과 그 전열을 같이했다. 오로지 민족독립과 반봉건의 캠페인이었다. 단지 이 시기에 주목해 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1917년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과 그 공격ㆍ영향이 세계를 들썩이게 했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어떠했을까. 아프가니스탄에는 발군의 정보통들이 있었고 이 정보들을 넓고 깊게 해석할 능력을 습득한 타루지의 존재를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세루지 우라 아투바루지에 그 혁명뉴스를 누구보다도 빨리 게재했다고 여겨진다. 나는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추정할 수 있다. 즉 후에 (1919년) 타루지는 아마누라 왕조의 외무대신이 되어, 아마누라가 레닌에게 접촉하는 순서를 취했다. 이는 구체적인 사실로서 쏘비에트 혁명과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승인과 연결된 하나의 선이 펼쳐진 것이다.















제2기 개혁전기; 1919년~24년










이 시기 아마누라가 왕위를 이으며 독립을 선언하고 타루지가 외상, 바리한이 국방상에 취임했다. 아마누라 왕조와 청년운동이 합류해 관민일체의 운동이 되었다. 영국이 제3차 아프간전쟁(※) 공세를 취한 것은 이때였다(1919년 5~8월). 따라서 이 정권은 조국방위 전시내각이라는 성격을 겸비했다. 적군(赤軍)을 모델로 한 병사위원회도 결성되었다. ‘1923년 헌법’의 제정(후술)과 병행해 쏘련, 영국(거의 21년)이외의 국가와 광범위하게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외교관계의 수립에 외상 타루지는 전력을 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제2기 이후의 개혁을 통칭 ‘아마누라 개혁’이라고 한다.










제3차 아프간전쟁 ;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이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정규병 3만, 민간병사가 12만이었다. 이에 비해 그들이 쫓아버린 영국군은 인도병(세포이드인―인용자 주)을 합쳐 34만의 원정군이었다. ‘복원을 바라는 영국병사(세포이드를 포함한)의 욕망과 군사비를 전전의 한계까지 절하시킨 영국(인도제국―인용자 주)의 조세담당자의 욕망’이 원정을 방해했다. 영국은 완전히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민족혁명의 연구��, 鈴木正四 저, 青木書店, 1972년, p. 193 재인용)

























제3기 개혁후기; 1924년~29년










제정된 헌법에 기반해 내정의 분야, 특히 사회, 경제, 교육에 있어 많은 개혁이 이루어지기도하고, 개혁안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후 밧챠 사카오 등의 반란으로 개혁은 정지되고 역사적 발전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후퇴했다.















1923년 헌법










헌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에 입헌파의 운동이 목표로 한 것은 우선 달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23년 헌법이란 당시 ‘아프가니스탄 국가기본법’이라 불렸다. ‘기본법’은 국가의 독립을 규정하고 왕이 국가의 최고권한을 가지는 것이다. 파슈톤족의 관습으로 있는 로야 지루가(부족의 원로회의)를 국가의 최고자문기관으로 하고 여기에서 조약과 왕위의 승인 등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결정한다. 의회에 상당하는 자문회의, 나아가 정부 내에 각료회의의 설치를 규정하고 있다.





인민에게도 일정 정도의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 기본법에는 인민의 요구를 취합해 그들의 것을 다소 들어주려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흠정헌법이기 때문에 인민의 권리옹호는 현저하게 제약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른바 법제 면에서 권리를 부여했다고 해도 인민의 생활과 권리를 뒷받침하는 경제적 기반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개혁프로그램이 가져온 개혁의 의의를 살펴보고자한다.





아마누라 개혁의 목표는 첫번째로 국가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진시키는 것, 두번째로 그를 위해 발전을 저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아마누라 정권에 의한 사회주의 쏘련을 비롯한 중근동(中近東)과 유럽제국과의 우호관계의 수립은 내정에 있어 자본주의적 발전과 그를 상보하는 관계였다. 그 당시 자본주의세계는 베르사유체제와 워싱턴체제아래 이른바 상대적 안정기(1921~29년)에 이르고 있었다. 제 외국에서 선진과학기술과 근대 각 제도를 도입하기에 형편이 좋았고 따라서 점차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세부설명>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해 기본적으로 국가재정의 기초를 이루는 토지세는 모두 현물공조에서 금납세로 바뀌었다. 또한 유목민에 대한 도로세와 유초세는 폐지되었으나, 가축은 과세의 대상이 되어 금납세가 되었다. 금납세란 현물지대에서 화폐지대로 전화한 것을 말한다. 그 목표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적 산업전반의 창출과 발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새롭게 ‘국유지 매각법’이 제정되었다. 대상이 되는 토지의 상당 부분은 파라구사이드 왕조의 국가적 소유지였다 (주지하다시피 아시아적 봉건적 전제국가에서는 토지는 기본적으로 국가소유였다). 동시에 토지의 사유제도를 새롭게 합법화해, 토지매매(전매, 저당을 포함한)도 인정했다.





국유지는 원래 봉건영주, 상인, 고리대금업자, 원징세청구인 및 고급관리, 군인에게 염가로 불하되었다. 이렇게 ‘봉건지(영)주 = 소작(고농) 관계’는 ‘자본주의적 지주=소작관계’로 이행을 준비했다. 이를 근대적 토지소유로의 이행이라고 볼지 반봉건적인 것이라고 볼지는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그러나 후에 인민민주당(PDPA)의 문헌에서는 아프간사회를 규정하는 데에 ‘반봉건적 생산관계’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동시에 아마누라개혁 자체가 불충분하고 불철저했다는 평가와 연결되는 견해일 것이다). 이러한 정책을 원활히 실현하기위해 국립은행의 설립이 예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반란의 발발(밧챠 사카오의 난)과 기존 은행가의 설립반대 때문에, 아마누라 재임 중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국립은행은 1938년이 되어 겨우 설립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의 전개에는 제약이 있어 자본의 원시축척도 또한 예상대로는 진행되지 못했다.





제2의 목표인 자본주의적 발전을 저해하는 세력의 영향을 제거하는 것은 가능했던 것일까.  이 과제는 개혁파에 있어서도 무엇보다도 냉정한 정치적 계급적 대결을 선명히 하는 것이었다. 아마누라는 원수로서 인민의 위에 높게 군림하면서도 개혁의 깃발을 흔드는 한 왕좌에서 내려 개혁의 반대세력과 대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적들은 아마누라의 종교개혁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그 주된 것은 다음과 같다.










<종교개혁>





● 와크프(종교시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몰수





● 새로운 시민법을 제정하고 비종교적 재판소를 설치한다.





● 교육의 비종교화, 공교육의 장에서의 종교교육의 금지





● 무라(이슬람학자)의 자격의 재심사를 실시해, 진보적인 무라를 등용한다.





이러한 개혁은 이슬람 성직자층의 경제적ㆍ사회적ㆍ신분적 특권을 거의 박탈하고 있다. 남아 있었던 것은 각 개인(신도)의 종교적 관습과 양심뿐 이었다. 또한 일련의 개혁은 사실상 타루지가 발안한 것으로 투르크 청년운동 혹은 투르크청년혁명(1908년)이 만들어온 종교와 정치, 종교와 공교육의 분리, 종교의 세속화에 발을 내딛은 것이었다. 종교는 원래 개인의 내면의 사상ㆍ신조에 관계된 것으로 국가권력의 개입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개혁파의 주장이었다. 멀게는 프랑스혁명의 사상이 아프가니 등의 활약을 통해 반입된 것이었다.





보수 반동적 종교계는 이러한 종교개혁에 대해 분노의 마음을 발산했다. 아마누라는 마치 우리 속에서 맹수와 대적하듯이 그의 적대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교육>





11세 이상의 남녀에게 공학제를 한다. 또한 중등교육의 보급과 함께 여학교의 설립도 가능하게 되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해외로의 유학의 길을 열었다. 교육의 법제 면에서는 현저하게 비약적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학교는 그로부터 30년간 거의 세워지지 못했고 민가와 모스크를 빌려 학교로 사용되었다.





 한편 사회의 최저변의 빈곤층, 이른바 농민(봉건적 고농), 가축보육수가 적은 유목민, 수공업자들은 개혁에 의해 어떤 수혜를 받았을까. 확실히 왕에 대한 무상노무제공(노동지대), 인민에 대한 강제적 부과 제도 및 농노제 등은 금지되었다. 이는 객관적으로는 큰 진보였고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조치들이 바로 재물을 비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빅토루 코간은 앞의 책에서 “당시의 노동이 봉건지주에 바치던 지대(소작료)는 생산고의 45%였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확대재생산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이것이 이른바 ‘동양전재정치의 강고한 기초’(「영국의 인도지배」��마르크스-엥겔스전집�� 제9권, 대월서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성의 권리옹호>





일부다처제의 금지, 여성의 차도르와 브루카(전신을 감는 것)의 강제착용 철폐도 결정되었다. 아마누라개혁 속에서 주목해야할 한 가지는 여성해방에 대한 그의 의욕이 특별히 강력했다는 것이다. 아마누라는 아버지 하비부라한이 ‘복수의 아내를 갖도록’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애 일부일처제를 지켰다. 아버지 하비부라는 정부 4인과 그 외 2인의 아내를 가졌으며 그의 아들은 도합 23명, 딸은 25명이었다. 한편 아마누라의 의부였으며 외무대신인 타루지는 시리아 출신의 여성(이름은 라스미야)을 아내로 맞아 아마누라에게 앞서 일부일처제의 가정생활을 영위했다.





중근동에서는 다처제가 전 세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어느 정도 되었을까. 나는 그 통계를 알지 못한다. “일부다처제는 19세기를 시작으로 카이로에서는 20인에 한 명꼴로 2명의 아내를 가지는 정도였다”(��이슬람 사전��, 앞의 책).





그러나 과도기에는 그보다 좀 더 많다고 알려져 있다. 오늘날 아랍ㆍ이슬람권에서는 정치지배자와 경제적 부유층 사이에서는 더욱 다처제가 지배적이다.





특히 왕족들은 세습의 왕제유지의 수단으로서 많은 적출자를 낳아야 하고 그들에게 유산을 분할 상속했다.





‘왕궁’ ‘왕의광장’ 및 ‘왕의 모스크’등을 유지하는 것을 포함해 그들은 왕조를 일족으로 만들어주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왕들은 ��코란��을 논거로 다처제를 정당화하고, 하렘을 소유해온 예가 많다. 앞에 기술한 하비부라한이 그 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되살아나라, 칼즈��(土本典昭ㆍ熊谷博子ㆍ압돌라티프 감독, 일본ㆍ아프가니스탄 합작, 1989년) 속에서 벽돌과 토벽에 둘러싸인 집에서 웅크리고 앉은 여러 명의 여성들이 제각기 아이를 옆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파루다’(남성의 입실을 금지한 여성만의 공간)속에서 있는 것이 허락된 여성의 인터뷰였는데, 그 여성들에게 ‘다처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여성들은 일제히 토해내듯이 거부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장면은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특이한 장면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다처제를 이슬람교와 연결짓는 것만큼은 다처제의 이해에 불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하메드(568~632년)이전부터 존재해온 부족사회에서 그 기원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의 저서 ��가족ㆍ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마르크스-엥겔스 전집, 제3권, 대월서점)에서 우선 인류의 기원을 야만, 미개 및 문명기로 나누고 있다. 일부다처제는 야만에서 미개로 과도기적 노예제의 산물로 여자노예에 대한 남성의 지배로서 위치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발전의 과정은 또한 소유제의 발전으로―즉 공동소유에서 사적소유로의 이행―설명하고 있는데, 엥겔스의 논거를 보자.





“토지를 공유하고 공동작업을 행하는 가부장제 세대공동체는....모권제 가족으로부터 개별가족으로의 가도에 중요한 역할을 행하고 있다.” “사실상, 일부다체저는 분명히 농노제의 산물이고 개개의 예외적인 지위의 사람에 한정되었다. 세무인식의 가부장제 가족에서는 가부장 자신과 그 외에는 기껏해야 그의 아들 2, 3인만이 일부다처제의 생활을 영위했고 남은 이들은 1인의 아내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리엔트 전역에서는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일부다처제는 부자와 귀족들의 특권으로, 주로 여자노예의 구입에 의해 이루어졌다. 인민대중은 일부일처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앞의 책,  65페이지) 엥겔스는 인도와 티베트의 일부다처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남녀의 수가 사회제도에 상관없이 동수라면 일부다처제도 일처다부제도 전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결혼 가족형태는 제각기 사회의 산물이면서도 한정된 사람들만이 그 특권을 행사한다.





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및 캄보디아에서는 다처제가 관습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오랜 기간 존속했다. 캄보디아의 시아누쿠는 6인의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나, 1976년 제정된 ‘민주캄보디아헌법’에서는 “남녀는 모든 점에서 완전히 평등하고, 일부다처제는 허락되지 않는다”고 규정되었다 (��붉은왕국 샤누쿠와 크메르 루즈��大橋久利, 河出書房新社, 1975년). 부족사회에서는 토지의 공동소유와 부족민을 일정수 확보하는 것이 지상의 과제였다. 전쟁과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그 사회에서는 부족민, 그 중에서 특히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종족보존을 위해서였다. 부족 간의 싸움에서 우선은 처음으로 여성과 아이들을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전쟁 후 화해할 시 그 보증으로서 여성과 아이들을 상대부족에게 공여해왔다. 재해사변으로 생겨난 고아를 지키는 것 또한 부족원의 의무였다. 미망인과 그 유아는 망부의 형제가 아내로 맞아 그곳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었다. 다처제의 기원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이것은 이른바, 과부구제의 최소한의 사회보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랍 이슬람권의 오늘날 왕족의 다처제는 사회보장 따위는 결코 아니었으며, 부족적 다처제에서 이행한 봉건적 다처제의 유제였을 것이다. 부족사회의 지표는 토지의 공동소유ㆍ공동사유이며, 봉건사회의 지표는 토지 및 인민의 사적소유이다. 다처제란 남성이 여성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좌우지간 아랍ㆍ이슬람권에서는 아직도 다처제가 존속해, 법제적으로도 사회 관습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포함해, 다처제를 없애는 것은 최우선의 과제이기도 하다.





아마누라는 왕비와 함께 유럽방문의 여행을 떠났다. 그때 차도르를 벗어버린 그녀의 사진이 국가에 나돌았다. 그러자 반동파는 그것을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에에 샤리아(이슬람법)에 반하는 것이라고 일제히 외치기 시작했다. 왕비 소라야는 로얄 지루카(원래는 파슈톤족의 족장회의)에 출석해 국가의 발전에는 여성의 힘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연설을 했다





타루지와 아마누라가 여성의 권리가 존엄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여성해방사에 있어 괄목할만한 사례였으며, 이는 남녀공학제와 공교개혁 등에서도 함께 일대사회변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개혁만으로도 변혁의 반대파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이슬람 브레이크―뱟챠 사카오의 난










1910년부터 20년대, 중근동지역 일대에서 무슬림의 반동층은 자기의 지반손실을 위기로 느끼고 기사회생의 기회를 노렸다. 이윽고 그것은 낡은 이데올로기를 두르고 폭력에 의한 탈권투쟁으로 발전했다. 그 위기의 배경과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슬람 포교권의 주변에 위치한 중앙아시아에서 사람들은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향해 전진을 시작했다. 제1차 대전에 패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에서는 독일, 프랑스 및 영국이 그 영토를 노리고 쟁탈전을 펼쳤다. 이러한 정치조류를 유럽에서는 ‘동방문제’라고 했다. 청년 투르크운동에서 성장한 투르크국민당(대표 무스타프 게마루 아타츄루쿠)은 1922년~24년 유럽인의 식민지주의의 야망을 배제하면서 스루탄 칼리프제의 타파에 성공했다. 스루탄은 예언자만이 가지는 종교적 권위가 있었다. 칼리프란 이슬람국가의 세속적 권한이었다. 수르탄 칼리프제는 따라서 이슬람의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국가 권한이 일체화된, 아랍ㆍ이슬람권에 있어 유일무이한 초월적인 권력체제였다. 아타츄루쿠들은 그것을 폐지해 투르크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이는 아랍ㆍ이슬람권에서 일대 혁명 사업이었다.





이란에서는 1910년대 말부터 민족해방운동의 결과 성립한 지방혁명정권과 혁명예방의 쿠데타와의 싸움이 이어졌다. 이윽고 구 이란 이슬람왕조에 관계된 레바한 군사독재정권이 성립(1923년)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1919년 반영독립투쟁 후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비이슬람 이집트왕국으로 독립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미 말했듯이 청년아프간운동과 아마누라개혁이 이슬람교의 봉건적 대외종속분자를 제거하고 반영투쟁에 승리했다. 이슬람 반동층은 때로는 영국식민지주의에 원조를 구했다. 아프가니스탄인민은 영국과 친교를 맺은 성직자를 ‘앵글로이슬람’(앵글로섹슨에 영혼을 판 이슬람)이라고 경멸을 담아 불렀다.





이슬람 반동층은 중동전체가 마치 이교도와 무신론자의 대지가 된 것과 같은 공포에 휩싸여 위기의식을 한층 높여갔다.





이른바 이러한 위기의식은 아프가니스탄 바챠 사카오 반란으로 나타났다. 바챠 사카오는 타지쿠족 출신의 물 운반하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카불 거리에서는 힌드쿠시산지의 눈을 녹인 물이 고갈되기 시작하는 계절이 되면 양피에 물을 넣어 운반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곤 한다. 그들은 구두수리하는 사람과 거리의 영세상인과 함께 억압된 도시빈민을 상징했다. 사건의 경과를 요약하면, 1927년 사카오가 대표하는 카불근교의 빈약한 무장집단이 반란을 일으켰다. 특별히 정치적으로 포괄적인 프로그램을 가지지는 못했으나 아마누라개혁, 특히 이슬람의 개혁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 움직임에 반동파와 도시주민들의 포퓰리즘이 지지를 보낸 것이었다. 약 1년 후 아마누라를 추방하고 사카오는 스스로 한부라 카지라고 이름을 붙이고 왕위를 이었다.





다른 한편 아마누라개혁으로 이익을 얻은 이들, 이른바 국(왕)유지를 불하받아 그것을 입수한 신지주, 상인층, 나아가 자본가적 진로를 밟기 시작한 이들은 개혁을 지지하기는 했으나 반란의 향방을 단순히 주시하기만 할뿐이었다. 그들은 아마누라한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아마누라는 이곳 저곳에서 인민에게서 고립되어 사면초가 속에서 퇴위를 당하게 된다. 이슬람의 브레이크가 걸린 순간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근현대사를 통관할 때, 종종 조우하게 되는 것이, 이 브레이크라고 말해야할 현상이다. 이는 역동적으로 역사가 진전될 때, 그것을 저지하기위해 작동하는 이슬람 반동파의 움직임이다. 그래서 나중에 볼 수 있듯이 1973년 다우도 개혁과 1978년 4월혁명에 저항하며 공통적으로 마구 날뛰었던 무장한 이슬람주의자들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게다가 그것이 강력하고 몇 번이고 반복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총체적으로 ‘정체’와 ‘후진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했다.















타루지의 최후










반개혁파는 개혁파의 사령탑이라 불리는 모하메드 백 타루지를 칸다하루의 우리에 처넣었다. 타루지는 자신의 여명이 남지 않은 것에 괴로워했다. 그는 어느 날 하직의 말을 남겼다.





“청년 제군들, 아프가니스탄이 국가의 독립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을 신중히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러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선인들이 그 생명을 희생했을 것인가. 물적 손해도 측량불가하다. 독립을 위해서 오만하지 않고 싸우고 헌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캄불 타임즈��, 1989년 8월 17일, 무서명 논문)





타루지는 이 유언 속에서 무엇을 생각한 것인가. 한편으로는 아마 고국이 식민지가 된 사람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극한의 슬픔과 분노를 가지고, 한편으로는 식민지화를 방지한 지역의 사람의 명예와 안도였을 것이다. 이윽고 타루지는 국가를 뒤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스카스에 의해 귀국한 1904년부터 두 번 외국 땅에 발을 딛었던 1928년까지 동안 중동지역의 정치상황이 크게 변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제1차 대전 (1914년~18년)에 있었던 오스만투르크제국의 패배 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및 다른 국가가 투르크 영토를 둘러싸고 심한 진영 간 전쟁을 벌였다. 세부르조약(1920년)과 로잔누조약(1923년)이 열강의 외교무대였다. 오늘날 아랍 중동지역의 국경선은 거의 이 조약에 의해 확정된 것이었다. 이에 ‘동방문제’의 하나의 중간적 결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른바 1917년 11월 영국외상 제임스 발포아에 의한 이른바 ‘발포아 선언’은 아랍 팔레스타인인민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는 “영국정부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고국을 건설하는 것에 호의를 가지며 이 목적달성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땅에서 아랍 팔레스타인인에 의한 반시오니즘 투쟁이 반복되어 전개되고 있다(��유대인의 역사��시셀 로스 저, 長谷川真・安積鋭二 역, みすず書房、1966)





게다가 지역에 정주한 수천만의 쿠르도 민족은 투르크, 이라크, 이란, 시리아 및 그 외의 국경 속에서 분산되어 들어오며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로자누조약 이후 쿠르도인민은 민족해방을 위해 각국에서 고투를 벌여왔다. 지금의 투르크와 알마니아공화국의 국경부근에 살고 있는 알마니아인의 민족자결권이 무시당하는 문제도 있다. 이 문제는 아직까지도 세계사의 관심 밖에 놓여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쿠르도인 및 알마니아인 문제 등은 무엇보다도 구미제국주의 간 시장 확대 경쟁의 결과이다. 그 과정에서 그것에 저항하고 부르주아혁명을 관철한 아타츄루쿠의 근대적 국가 만들기 속에 소수민족을 경시한 그의 책임도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아시아민족혁명의 연구��, 앞의 책) 두 번 다시 타루지의 “국가가 독립을 잃지 않을 것을 찬찬히 생각해보기 바란다”라는 유언을 곰곰이 생각할 때 이것이 엄청난 무게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기르고 타루지와 그의 가족은 국외 영구추방 신세가 된 채로 헤라토에서 테헤란으로 보내져 마침내 투르크에 정착했다. 그의 아버지가 다마스카스에서 하늘을 섬기면서도 불귀의 객이 되었듯이 그의 아들도 또한 1933년 이국의 땅에서 쓰러졌다. 그의 사인은 암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묘지는 이스탄불에서 가까운 보스포라스 해협에서 보이는 언덕 위에 만들어졌다. 반동파는 진보파의 수괴의 숨을 멈추게 하고 아마누라 개혁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마누라는 마침내 맹수에게 물려버린 것이다. <노사과연>















1)(佐々木辰夫)





번역 :정혜윤(회원)
















1) 1928년 출생, 도시샤(同志社)대학졸업, 실직 중일 때부터 오키나와ㆍ아마미를 비롯해 일본각지를 외딴섬ㆍ벽지를 정력적으로 걸었다. 후에 중학교에서 일을 잡을 수 있었다. 동시에 1960년대 인도ㆍ오키나와 그 밖에 지역에 관한 르포를 ��신일본문학��과 관서인들이 하는 문학ㆍ사회운동의 동인지��표상����변혁자��등에 발표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주로 이란혁명, 아프가니스탄혁명에 대해 ��사회평론��에 집필했다. 저서로는 ��아하곤쇼코(阿波根昌鴻)- 그 투쟁과 사상��(2003, スペース伽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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